미트리다테스 6세

 


역대 폰토스 왕
미트리다테스 5세

'''미트리다테스 6세'''

파르나케스 2세
'''미트리다테스 6세'''
Mithridates VI
[image]
'''생몰년도'''
기원전 135년 ~ 기원전 63년
'''출생지'''
폰토스 왕국 시노페
'''사망지'''
폰토스 왕국 크리미아
'''가족'''
미트리다테스 5세(아버지)
파르나케스 2세(장남)
'''참전'''
미트리다테스 전쟁 등
폰토스 왕국의 왕
재위
기원전 120년 ~ 기원전 63년
1. 개요
2. 일생
2.1. 초년기
2.2. 재위 초기
2.3.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재림을 꿈꾸다
2.4.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2.5. 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2.6.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2.7. 최후
3. 평가

'''언어별 명칭'''
고대 페르시아어
Miθradāta
그리스어
Μιθραδάτης

1. 개요


폰투스 왕국 제8대 국왕.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5세가 암살당해 정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젊은 나이에 즉위해 약육강식의 논리가 판치는 소아시아 일대에서 세력이 약소했던 왕국을 일약 최강국으로 육성시킨 명군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뒤를 잇겠다는 과도한 야망에 불타 로마와 수십 년에 걸친 기나긴 전쟁을 감행했으나 술라, 루쿨루스, 폼페이우스에게 연전연패한 끝에 파멸했다.

2. 일생



2.1. 초년기


미트리다테스는 기원전 135년 폰투스 왕국의 수도 시노페에서 태어났다. 그는 라오디케 6세와 미트리다테스 5세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 중 첫 아들이었다. 그의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5세(기원전 150년에서 120년까지 재위)는 폰투스 왕국의 왕족이었고 어머니 라오디케 6세는 셀레우코스 왕국의 군주 안티오코스 4세의 딸이었다. 어린 미트리다테스는 일찍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어 국왕 교육을 착실히 받았다.
그런데 미트리다테스가 15살이 될 무렵인 기원전 120년, 아버지 미트리다테스 5세가 호화로운 연회에 참석했다가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독살당했다. 그는 죽기 전에 왕국을 미트리다테스의 어머니 라오디케 6세와 미트리다테스, 그리고 남동생 미트리다테스 크레스투스의 합동통치에 맡겼다. 그러나 미트리다테스와 남동생 모두 나이가 어렸기에 그들의 어머니 라오디케가 당분간 섭정으로 모든 권력을 행사했다. 라오디케의 섭정은 기원전 120년에서 116년(또는 기원전 113년)까지 진행되었는데, 그녀는 미트리다테스보다 남동생 크레스투스를 아꼈다. 이 때문에 미트리다테스는 자신을 제거하려는 어머니의 음모를 피해 숨어지내야 했다.
미트리다테스는 기원전 116년에서 113년 사이의 시기에 은신처에서 나와 폰투스로 귀환해 백성들에게 국왕으로서 환영받았다. 미트리다테스는 그의 어머니 라오디케와 남동생을 권좌에서 축출해 감옥에 가두고 폰투스의 유일한 통치자가 되었다. 라오디케 6세는 감옥에서 사망했고 남동생 크레스투스도 감옥에서 죽었다.[1] 미트리다테스는 16살의 여동생 라오디케와 결혼하고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자녀들에게 승계를 보장함으로서 혈통의 순결을 지키고자 했다.

2.2. 재위 초기


[image]
폰투스 왕국의 영역. 짙은 보라색이 원래 폰투스 왕국의 영역, 중간 보라색이 미트리다테스 6세가 재위 초기에 획득한 영역, 옅은 보라색이 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때 일시적으로 차지한 영역이다.
미트리다테스는 자신의 국가를 소아시아의 최강국으로 육성시키기 위해 정복 전쟁을 개시했다. 그는 처음에 흑해의 동쪽 지역에 위치한 콜키스와 여러 독립 왕국들을 정복했다. 또한 그는 스키타이 족의 국왕 팔라쿠스를 상대로 대초원에서의 패권을 다퉜다. 크리미아, 타우릭 케르소네소스, 그리고 보스포루스 왕국은 스키타이족의 침략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주겠다는 미트리다테스의 약속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독립을 쉽게 포기했다. 스키타이족은 여러 차례 크림 반도를 침공했지만 미르리다테스는 그들을 성공적으로 격파했고, 결국 스키타이족은 미트리다테스의 패권을 인정했다.
이 젊은 왕은 로마의 권력이 부상하고 있는 아나톨리아에 관심을 돌렸다. 그는 비티니아의 국왕 니코메데스 3세와 파플라고니아 및 갈라티아를 분할하려 했다. 하지만 니코메데스가 자신의 나라를 로마의 속국으로 삼으면서, 미트리다테스의 계획이 중단될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미트리다테스는 포기하지 않고 비티니아를 침공해 니코메데스의 군대를 격파했다. 이에 개입한 로마 공화정이 당장 철수하지 않으면 보복하겠다고 경고했고, 미트리다테스는 순순히 비티니아를 떠났다. 그러나 그는 로마를 몰아내지 않으면 소아시아의 패권을 확립할 수 없다고 판단했고 마침내 로마와의 전쟁을 감행한다.

2.3.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재림을 꿈꾸다


[image]
미트리다테스가 지중해의 패권자 로마와 전쟁을 벌이기로 결심한 데엔 로마를 소아시아에서 축출하지 않으면 언젠가 자신들도 비티니아처럼 로마의 속국이 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한없는 야망도 한몫했다. 미트리다테스 6세는 헬레니즘을 정치적 도구로 사용했다. 그는 그리스 문화의 보호자를 자칭했고 야만족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준다는 명분을 내세워 여러 도시 국가들을 간접 통치했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재림이라 칭하며 대왕의 모습을 본딴 자신의 초상화가 새겨진 동전을 주조해 전국에 배포했다. 그는 자신이 로마의 침략으로부터 그리스 세계를 지켜낼 위대한 해방자라고 칭하며 스스로에게 '메가스(Megas, 대왕)'라는 칭호를 붙이게 했다. 이에 로마의 위협을 받던 그리스계 도시 국가들이 호응하면서, 그는 전쟁 초반에 로마를 상대로 우세를 점할 수 있었다.

2.4.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니코메데스 3세 사후 비티니아를 통치한 니코메데스 4세는 로마의 꼭두각시였다. 미트리다테스는 그를 몰아내려 했으나 실패했고 니코메데스 4세는 로마 고문단의 조언에 따라 폰투스 왕국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 기원전 89년, 비티니아군과 마케도니아 주둔 로마군은 폰투스 왕국을 침략했다. 이에 미트리다테스는 친히 군대를 이끌고 가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로마 군대를 축출했다. 이 승리는 아나톨리아 전역에 퍼져 그리스인들의 호응을 얻는 데 기여했다. 이듬해인 기원전 88년, 미트리다테스는 여러 아나톨리아 도시에 남아있는 로마인과 이탈리아인의 학살을 조직적으로 감행해 이 지역에 거주하는 로마인들의 존재를 없애버리려 했다. 이로 인해 8만 명에 달하는 로마인과 이탈리아인이 살해당했다. 이를 (소)아시아의 만종(Asiatic Vespers)이라고 한다.
이후 미트리다테스는 스스로를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왕다리우스 1세의 후예이자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재림이라고 자칭하며 소아시아와 그리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그의 군대는 그리스 본토로 진군해 아테네를 포함한 여러 그리스 도시들의 환영을 받았고 그의 함대는 로도스에서 로마인들을 포위했다. 또한 폰투스 왕국과 이웃한 아르메니아의 국왕 티그라네스 2세는 미트리다테스와 동맹을 맺고 미트리다테스의 딸 중 한 명인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했다. 이들은 연합군을 결성해 로마와의 전쟁 시 서로를 돕기로 했다.
당시 동맹시 전쟁을 막 끝낸 로마는 그를 격파하고 권좌에서 몰아내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일으켜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진군했다. 이리하여 발생한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주도한 이는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였다. 미트리다테스는 술라와 여러차례 교전했으나 모조리 패하고 그리스에서 쫓겨났다. 술라는 그의 뒤를 쫓아 아나톨리아 지방으로 진입해 미트리다테스를 위협했다. 그런데 마리우스와 킨나가 로마를 점령해 자신을 따르는 세력이 축출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술라는 서둘러 미트리다테스와 평화 회담을 마치고 로마로 귀환했다. 이때 맺은 평화조약에서 미트리다테스는 전쟁 동안 빼앗은 영토를 되돌려줘야 했지만 자신의 권좌는 보장받을 수 있었고 이는 그가 세력을 회복할 수 있게 해줬다.

2.5. 제2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술라가 로마로 돌아갔지만, 그의 부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무레나는 가이우스 플라비우스 핌브리아와 함께 두 군단의 지휘관으로서 소아시아에 남았다. 그러던 중 미트리다테스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무레나는 카파도키아를 가로질러 미트리다테스에게 속한 코마나를 공격했다. 미트리다테스는 이 당시 콜키스인과 부족들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함대를 이끌고 간 상황이라서 코마나를 구원할 병력을 보내기 힘들었다. 이에 그는 평화 협정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무레나는 술라가 그리스로 돌아가기 전에 평화 협정을 문서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은 어떤 조약도 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그는 약탈을 벌인 후 카파도키아로 돌아와 그곳에서 겨울을 보냈다. 미트리다테스는 사절단을 로마로 보내 평화 협정을 준수하라고 요구했다. 기원전 82년에 무레나는 미트레다테스에 속한 400개의 마을을 점거했지만 미트리다테스는 사절단이 오기를 기다릴 뿐 그와 전투를 벌이려 하지 않았다. 이때 미트리다테스는 무레나를 내버려두고 핌브리아에게 사람을 보내 대화를 나눔으로써 무레나와 핌브리아가 서로를 오해하고 반목하도록 조장했다.
얼마 후, 무레나는 미트리다테스의 영토를 침범했다. 이에 미트리다테스는 그의 부하 고르디우스를 파견해 로마인들이 거주하는 마을에 대대적인 보복을 가해 수많은 재물과 동물들을 약탈했다. 무레나가 이들을 추격하자, 미트리다테스가 습격하여 알리스에서 무레나를 격파했다. 이 일은 로마의 편을 들었던 소아시아의 많은 도시 국가들이 미트리다테스에게 귀순하는 계기로 작용했다. 미트리다테스는 여세를 모아 모든 로마군을 카파도키아에서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술라는 미트리다테스와 또 다시 전쟁을 벌이는 무레나를 비난하고 가비니우스를 파견해 미트리다테스와 전쟁을 벌이지 말라는 명령을 전달하게 했다. 또한 가비니우스는 미트리다테스와 카파도키아의 아리오바자네스 1세를 화해시키기 위해 협상을 주관했다. 미트리다테스는 그의 4살짜리 딸과 아리오바자네스를 약혼시켰고 아리오바자네스 1세의 카파도키아에서의 영유권을 인정했다. 그리고 무레나는 로마로 소환되었다.

2.6. 제3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10년 후, 로마가 비티니아를 자신들의 영역으로 삼으려 하자, 미트리다테스 6세는 기원전 73년에 대군을 동원하여 로마와의 전쟁을 재개했다. 그러나 그가 맞이한 상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당대 최강의 전술가였다. 그는 먼저 적에게 포위된 킬리키아의 전임 총독 아우렐리우스 코타를 구원하고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 도시들에서 함대를 징발한 후 폰투스의 해군을 격파했다. 그 뒤 아나톨리아 지방에 상륙한 루쿨루스는 카비라에서 미트리다테스의 대군을 섬멸해버렸다.
이에 미트리다테스는 아르메니아로 달아나 사위인 티그라네스 2세에게 의탁했다. 루쿨루스는 티그라네스에게 미트리다테스를 내놓을 것을 요구했으나 티그라네스가 거부하자 아르메니아로 진군했다. 미트리다테스와 티그라네스의 군대는 루쿨루스의 수배가 넘는 대군이었으나 연전연패했고 기원전 69년에 아르메니아의 수도 티그라노케르타가 공략당하고 기원전 68년에는 아르탁사타에서 또 다시 대패했다. 이제 루쿨루스가 조금만 더 몰아붙이면, 미트리다테스는 꼼짝없이 잡혀 죽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이변이 벌어졌다. 루쿨루스가 자신들에게 제대로 대접하지 않는다며 불만을 품은 로마군이 집단으로 파업해버린 것이다. 이로 인해 루쿨루스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쇠퇴하자, 미트리다테스는 잔여 군대를 이끌고 기원전 67년에 폰투스로 진격해 젤라에서 발레리우스 트리아리우스 휘하의 로마군을 격파하고 7000명의 로마 병사를 살해했다. 이리하여 폰투스 왕국을 탈환하는 데 성공한 그는 여세를 몰아 해적들에게 막대한 지원을 퍼부어 로마인들이 해적들의 난립으로 고통받게 만들었다.
그러나 기원전 66년,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가 이끄는 대군이 루쿨루스를 대신해 폰투스로 쳐들어왔다. 미트리다테스는 결사적으로 항전했으나 라이카스 전투에서 대패하고 소규모 군대와 함께 콜키스로 피신한 후 코카서스 산맥을 넘어 크리미아로 건너갔다. 그는 그곳에서 재산을 대대적으로 털어서 군대를 재조직해 로마군과 일전을 벌이려 했다. 그러나 그는 최후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2.7. 최후


기원전 63년, 미트리다테스의 아들들 중 한 명인 파르나케스 2세는 아버지를 몰아내고 로마인들의 지원을 받아 폰투스의 국왕이 되기로 결심했다. 그는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의 소규모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요새를 급습했다. 이젠 아들마저 그를 저버리고 부하들도 그에게 더이상 충성을 바치는 걸 거부하자, 미트리다테스는 절망에 빠져 독약을 삼켰다. 그러나 그는 예전부터 자신의 아버지처럼 독살당할 것을 염려해 독약을 아주 조금씩 복용해왔기 때문에 내성이 생겨 독약을 먹고도 죽지 않았다. 이에 그는 칼로 자신의 목을 찌르는 방식으로 자살했다.[2] 폼페이우스는 파르나케스로부터 미트리다테스의 시신을 접수받은 뒤 폰투스의 옛 수도 야마샤에 있는 그의 조상들의 무덤에 묻었다.

3. 평가


미트리다테스 6세는 15살 때 선왕이 독살당하고 정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즉위해 어머니의 박해를 피해 은둔할 정도로 위태로웠다. 하지만 그는 은둔지에서 기량을 갈고 닦으며 때를 기다렸고 마침내 정변을 일으켜 어머니와 남동생을 축출하고 진정한 국왕으로 거듭났다. 그후 그는 소아시아의 소국이었던 폰투스의 세력을 대거 확장해 스키타이족을 물리치고 크림 반도 일대의 패권을 장악했으며 소아시아의 최강국으로 육성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렇듯 그는 명군이라 불리기에 충분한 역량을 갖췄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후계자가 되겠다는 대왕병에 걸려 로마와의 무모한 전쟁을 끊임없이 벌인 것이 그의 몰락을 초래했다. 확실히 그의 군사적 역량은 소아시아 일대에서는 최강이었지만, 포에니 전쟁을 겪으며 지중해 최강의 군대로 거듭난 로마군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를 상대하는 이들은 술라, 루쿨루스, 폼페이우스 등 로마 공화정 말기 최고의 군략가들이었다. 결국 그는 연전연패를 거듭하다가 끝내 파멸했으며 오늘날 역사 애호가들로부터 '명장 판독기'로 취급당하고 있다.
[1] 일부 기록에 따르면 미트리다테스가 남동생에게 반역 혐의를 씌우고 재판을 통해 사형에 처했다고 한다.[2] 자신의 심복 하인을 시켜서 자신을 죽이도록 했다는 기록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