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우스 1세

 



'''아케메네스 제국 제7대 샤한샤'''
'''Dareios Ⅰ | 다리우스 1세'''
[image]
페르세폴리스의 부조
'''제호'''
다리우스 1세(Dareios Ⅰ)
''''''
다라야바우쉬(𐎭𐎠𐎼𐎹𐎺𐎢𐏁, Dārayavauš)
'''생몰 년도'''
기원전 550년 ~ 기원전 486년
'''재위 기간'''
기원전 522년 ~ 기원전 486년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정복 사업
2.3. 사후
3. 여담
4. 대중 문화에서
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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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𐎠𐎭𐎶 𐏐 𐎭𐎠𐎼𐎹𐎺𐎢𐏁

adam / Dārayavauš

나는 다라야바우쉬(다리우스)다.

 

𐎧𐏁𐎠𐎹𐎰𐎡𐎹 𐏐 𐎺𐏀𐎼𐎣

xšāyaθiya / vazraka

위대한 왕이며,

 

𐎧𐏁𐎠𐎹𐎰𐎡𐎹 𐏐 𐎧𐏁𐎠𐎹𐎰𐎡𐎹𐎠𐎴𐎠𐎶

xšāyaθiya / xšāyaθiyānām

왕 중의 왕이며,

 

𐎧𐏁𐎠𐎹𐎰𐎡𐎹 𐏐 𐎱𐎠𐎼𐎿𐎡𐎹

xšāyathiya / Pārsaiy

파르사(페르시아)의 왕이며,

 

𐎧𐏁𐎠𐎹𐎰𐎡𐎹 𐏐 𐎭𐏃𐎹𐎢𐎴𐎠𐎶

xšāyaθiya / dahyūnām

만국의 왕이며,

 

𐎻𐏁𐎫𐎠𐎿𐎱𐏃𐎹𐎠 𐏐 𐎱𐎢𐏂

Vištāspahyā / puça

비쉬타스파(히스타스페스)의 아들이자,

 

𐎠𐎼𐏁𐎠𐎶𐏃𐎹𐎠 𐏐 𐎴𐎱𐎠

Aršāmahyā / napā

아르샤마(아르사메스)의 손자로,

 

𐏃𐎧𐎠𐎶𐎴𐎡𐏁𐎡𐎹

Haxāmanišiya

하카마니시(아케메네스) 가문이다.

 

- 베히스툰 비문 中[발음]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제7대 샤한샤(왕중왕)이다. 통칭 '''다리우스 대제'''

2. 생애



2.1. 초기


파르티아 총독 히스타스페스와 로도구네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젊었을 적부터 큰 야심을 가진 사내였다. 키루스 2세의 뒤를 이었던 캄비세스 2세가 조기에 사망하자 쿠데타를 일으켜 다음 계승자였던 바르디야를 죽여버리고 제위에 올랐다. 다리우스와 그 지지자들은 진짜 바르디야는 이미 죽었으며, 가우타마라는 자가 바르디야를 참칭하고 있다고 명분을 내세웠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의하면 이때 쿠데타를 일으킨 사람들 간에서 페르시아의 정치체제를 놓고 전제정, 귀족정, 공화정 중에서 논란이 일었는데 다리우스가 '''닥치고 전제정!'''이라고 하여 결국 전제정이 유지되었다고 한다. 또한 누가 왕이 될 것인지를 두고 논쟁하다가 밤에 말을 타고 성 밖으로 나가서 해가 뜰 무렵에 처음 말이 운 사람을 왕으로 추대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그런데 이때 다리우스는 교묘한 방법을 사용했다. 하인이 암컷 말의 냄새를 미리 채취해서 해가 뜰 때 다리우스의 말이 냄새를 맡고 흥분해 울게 만든 것. 결국 다리우스는 왕으로 추대되었다. 아케메네스 왕조와는 혈연 관계가 캄비세스 2세의 6촌으로 매우 멀었으므로 그는 키루스 2세의 딸이자 캄비세스 2세의 여동생이었던 아토사와 결혼해서 정통성을 얻었다. 하지만 등극 과정이 이런 탓에 엄청난 반란을 겪어야 했다. 결과론적으로 보자면 이 수많은 반란을 모조리 제압하는 과정에서 황권을 강화하고 강력한 군사력을 얻었으니 좋게 마무리 되었다고 봐야겠지만...

2.2. 정복 사업


정복 군주로서 카스피해에서 인도, 마케도니아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정복해 아케메네스 왕조의 판도를 넓혔다. 그러나 다리우스의 정복사업이 항상 수월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스키타이와의 전쟁에서는 이들을 정벌하기 위해 수만의 군세를 이끌고 소아시아를 거쳐 발칸의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를 통과, 도나우 강을 넘어 북진했으나 스텝 지역의 지리에 익숙했던 스키타이는 민첩하게 페르시아군과의 정면 전투를 계속해서 피했다. 이단튀르수스 항목 참조.
스키타이족은 페르시아군의 진군로에서 우물들을 메우고 식량을 남김없이 가져가면서 다리우스의 대군을 보급 곤란 상태로 텅 빈 스텝 한가운데에서 헤매도록 유인했다. 결국 참다 못한 다리우스 대왕은 스키타이의 왕 이단튀르수스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대는 도망만 다니고 있는데 결국 다음에 말할 두 가지 길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될 것이다. 만약 그대에게 우리 군대에 맞서 싸울 자신이 있다면 더 이상 이리저리 도망쳐 다니지 말고 한 곳에서 싸우도록 하자. 만약 역부족이라고 느낀다면 더 이상 도망치지 말로 그대의 주군인 내게 헌상품으로 땅과 물을 알현하러 오라.”

다리우스의 편지에 이단튀르수스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나는 이때까지 어떠한 자도 두려워해 도망친 적은 없소. 그냥 이제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하고 있을 뿐이요. 우리나라에는 점령당하거나 황폐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대들과 서둘러 싸워야만 되는 도시나 과수원이 없소. 우리는 그대와 싸워야 할 합당한 이유가 발견되지 않는 한 계속해서 싸움을 피할 생각이오. 그리고 내가 주군으로서 받드는 분은 우리의 선조이신 제우스와 스키타이의 여왕 헤스티아 두 분밖에 없소. 그대에게 땅과 물 대신 그대에게 합당한 다른 것을 보내 주겠소. 그리고 그대가 내 주군이라고 운운한 데 대한 나의 반응은 한 마디로 ‘엿 먹어라’요. 정 그렇게 우리와 싸우고 싶다면 어디 우리 조상들의 무덤을 찾아 파헤쳐 보시지요. 그때 가서 내가 정말로 싸우기 무서워서 도망치고 있었던 것인지 어떤지를 알게 될 겁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보면 이때 이단튀르수스가 다리우스 대왕에게 보낸 것은 , 개구리 각 한 마리 씩과 화살 다섯 대였다. 다리우스 대왕은 쥐는 땅에서 살면서 사람과 같은 곡식을 먹고 새는 말과 닮았으며[1], 개구리는 물속에서 살고 화살은 군사의 상징이므로 즉 스키타이인들이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내놓고 우리한테 항복하겠다고 하는 뜻이라고 이해하고 기뻐했는데, 다리우스 대왕의 측근인 고브뤼아스는 이렇게 해석했다고 한다.

이 페르시아 놈들아, 선택해라. 새처럼 하늘로 솟던지 쥐새끼처럼 땅으로 꺼지던지, 개구리처럼 물에 뛰어들던지, 이 화살에 맞아 죽던지.

전격작전을 구상한 다리우스였지만 스키타이의 힘 빼기 작전에 시간만 낭비하자 대군을 동원한 페르시아 군에서 문제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페르시아 대군이 소비하는 식량이 문제였다. 스키타이가 먹을 만한 것이라곤 모든 것을 불태워버린 황량한 들판에서는 곡식을 구할 수 없었다.
결국 페르시아군은 질병과 기아에 시달리며 퇴각했고, 스키타이군은 돌아가는 페르시아군을 지속적인 게릴라전으로 괴롭혔다. 참담한 페르시아의 패배였다.[2]
치세 말기에는 아테네가 자꾸만 그리스인 거주지역에서 반란을 부추기자 혼쭐을 내주고자 페르시아 전쟁을 일으켜 그리스 원정에 나섰으나 마라톤 전투에서 무참히 박살나고 말았다. 이 덕분에 우리는 올림픽에서 마라톤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정복사업 외에도 대규모 토목사업을 통해 페르세폴리스를 새로운 수도로 만들었는데, 선왕 키루스 대왕과 마찬가지로 노예제에 반대했기 때문에, 당시 건설에 동원된 인부들에게 빠짐없이 보수를 공평히 나눠줬다고 한다. 사트라프(총독) 제도를 확립하고[3] 상업을 장려하는 등 제국의 발전에 많은 족적을 남겼다. 그 외에도 제국의 표준어로 아람어를 채택하고 이집트의 법을 정비하기도 하였다.

2.3. 사후


그를 이어 아들이 제위에 올랐으니, 그가 바로 '''관대한 크세르크세스 1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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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왼편에 사산 제국 시기의 유명한 부조가 또 하나 새겨져 있다. (로마 황제를 사로잡은 샤푸르 1세)
다리우스는 현재 이란에 있는 낙세 로스탐에 왕가의 무덤에 안장되었는데 여러 개의 무덤 중에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무덤 주인이 확실한 무덤은 그의 무덤뿐이다. 그나마 무덤은 오래전에 모두 도굴되어 남아 있는 게 없다.
치적이 여러모로 수문제와 비견될 만한 인물.

3. 여담


그리스 공격 당시 마케도니아는 즉각 항복을 선언했는데, 당시 마케도니아의 왕이 알렉산드로스 '1세'였다. 시간이 흘러 페르시아를 멸망시킨 왕이 흔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라고 불리는 알렉산드로스 '3세'였고 당시 페르시아의 황제가 다리우스 '3세'였다.
성서의 에즈라 6장에도 등장한다. 키루스 2세의 지시로 바빌론 유수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건축을 시작하자 유프라테스 총독 닷드내가 찾아와 '누구 지시로 성을 쌓느냐'고 묻자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키루스 황제의 명이다'라고 대답하고, 닷드내가 다리우스에게 서신을 보내 이것이 사실인지 확인하자 다리우스가 조서를 보내 '경비도 우리 왕실에서 대신 지불할 것이니 너희들은 건축을 막지 말고, 총독의 관할구역에서 거둔 세금 중 일부를 떼어 정기적으로 그들에게 지원금을 지급하라'라고 지시한다.

4. 대중 문화에서


각 도시를 연결하는 군사도로를 만들어 역전제도를 확립하고, 교역과 문화교류를 권장한, 총독제도와 새로운 세제에 의해 속주에 대한 징세를 효율적으로 수행함으로써 국고를 충실시켰다는 명군중의 명군인 다리우스 일세는, 속주통치에 있어서는 피정복민에 대해서도 다른사람과 다르지 않게 신앙과 문화의 자유를 주는 관용을 보이며, 동시에, 「왕의 눈」 「왕의 귀」라고 하는 순찰사에 의해서 총독및 속주를 감시하고 군사적이반을 방지했다고 한다.
일세야말로, 사람을 묶지않고, 문화와 교류를 사랑한, 국가를 풍요롭게 한 선왕이다.
▶Fate/Grand Order 마테리얼||
Fate 시리즈에서는 후손인 다리우스 3세 관련으로 자주 언급된다. 위대한 선왕이었고, 니토크리스의 무덤을 연 일화는 게이트 오브 바빌론과 연이 있다.
  • 영화 300: 제국의 부활 초반부에 잠시 등장한다. 마라톤 전투에서 퇴패 도중 테미스토클레스의 활에 맞는 등 실제 역사와 엄청난 차이가 있지만 혼란해하는 아들을 진정시키고 오직 신만이 그리스를 정복할 수 있으니 그대로 두라는 유언을 남기고 사망하여 나름 대왕의 면모를 보여준다.

5. 둘러보기


[image]
고대 페르시아어
𐎭𐎠𐎼𐎹𐎺𐎢𐏁 (다라야바우쉬)
고전 아람어
ܕܪܝܘܫ‎ (다리야와쉬)
엘람어
𒆪𒊑𒅀𒄷𒌑𒆜 (다리야우이쉬)
고대 아르메니아어
Դարեհ (다레흐)
고대 히브리어
דָּרְיָוֶשׁ (다르야웨쉬)
고대 그리스어
Δαρεῖος (다레이오스)
페르시아어
داریوش (더리우쉬)
라틴어
Darius (다리우스)

[발음] https://youtu.be/unFjLTKVXo4?t=35, https://youtu.be/qkefO0NVcwY?t=395[1] 말처럼 빠르다는 뜻이다.[2] 《인도유럽인, 세상을 바꾼 쿠르간 유목민》, 380-381쪽.[3] 제국을 여러 주로 나누어 그곳에 지방관이 다스리도록 배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