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맹시 전쟁
Bellum Sociale / Social War
1. 개요
기원전 91년부터 88년까지, 로마 공화국과 이탈리아 반도의 동맹시 연합이 벌인 전쟁이다.
2. 배경
로마는 에트루리아 연맹과 키살피나 지방의 갈리아#s-2족, 아펜니노 산맥의 삼니움족,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계 도시들[1] 까지 관광태운 뒤, 명실공히 이탈리아 반도의 지배자가 되었다(BC. 275). 그리고 로마는 최근에 전쟁에서 패한 도시들을 자신의 동맹으로 편입했다. 이 새로운 '''"동맹시(Socii)"'''들은 기존의 동맹시[2] 들과 차별적인 대우를 받았는데, 말이 동맹이지 사실상 속국 비스무리한 상태로 돈셔틀, 병력셔틀 신세인데다가 각 도시의 외교관계에도 간섭당하고 훼방을 당했다.
그래도 이것은 당시의 시대상황[3] 과 서로 멸망시킬 기세로 싸웠던 상대에게 내민 조건임을 고려했을 때 비교적 온건한 편이었다.[4] 로마는 전쟁시 이들에게 동맹으로서의 병력 지원을 요청했으나[5] 그 외에 과한 배상금이나 조공 요구는 하지 않았다. 전리품도 서로 반으로 나누어 가졌다. 이전과 마찬가지로 언어, 법, 정부체제, 내정 등은 간섭받지 않았다. 외교적으로 손발은 잘려나간 처지였으나, 로마의 패권하에 이탈리아 반도는 안정되었고, 도시국가들은 더 이상 이웃과 외적으로부터의 침략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로마가 이들과의 전쟁을 목적으로 만든 도로망은 교류와 통상을 더욱 활성화시켰다. 후세인들이 '''"로마 연합"'''이라 부르는 이러한 시스템은 약 180여년[6] 간 이어졌다.
물론 군사와 외교적 주권을 박탈당한 처지였던 동맹시들의 속내가 마냥 편할리는 없었다. 그래도 로마의 군사적 압박을 직접적으로 느꼈던 (잃을 것이 많은) 지배층들이 친로마 성향이었던 것에 비해, 자신의 전쟁도 아닌 로마의 전쟁에 억지로 끌려가 목숨을 내놓는 처지였던 일반 시민들의 불만이 특히 심했다. 이들은 기회가 될 때마다 독립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했는데, 대표적으로 전투민족인 삼니움족과 캄파니아 지방의 대도시 카푸아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로마 최대의 위기 상황이었던 한니발 전쟁에서도 과반수 이상의 동맹시들은 배신하지 않고 계속 동맹의 의무를 지켰으며, 이는 로마가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있어 가장 결정적인 공헌이었다.
이렇게 이어져온 동맹은 로마가 이탈리아를 넘어 지중해 제국으로 발돋움하면서부터 점점 균열이 가기 시작한다. 동맹시 시민들은 로마의 정복전쟁에서 함께 싸우고 피를 흘렸으나, 새로 얻은 영토의 분배는 대부분 로마(시민권자, 특히 원로원)의 몫이었다. '''그들은 동등한 의무에 걸맞은 동등한 권리를 갖기를 원했다.''' 햇수로 200년 가까운 기간동안 함께 해온 동맹시들은 이미 로마와 운명공동체였다. 그들은 로마의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원했다. 로마 내에서도 그라쿠스 형제와 같은 개혁파들이 이러한 불만을 인식하여 동맹시로의 로마 시민권 확대를 추진하였으나, 기득권층인 원로원의 보수파들은 그때마다 초법적인 수단까지 동원하여 이를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3. 전쟁의 시작
그렇게 쌓이던 불만은 한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폭발하고야 말았다. 그라쿠스 형제에 이어 동맹시 시민들에게의 로마 시민권 부여를 주장하던 민중파 호민관 드루수스[7] 는 당대 최고의 영웅 마리우스[8] 와 원로원의 1인자 스카우루스[9] 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10] 집정관 필리푸스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일이 잘 풀리는듯 하였으나 드루수스는 원로원에 의해 살해당했다.[11][12] 결국 완전히 폭발해버린 동맹시들은 로마와의 동맹을 파기하고 자체적으로 '''이탈리아 공화국'''을 결성, 정부와 수도를 정하고 군대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물론 로마도 두 눈 뻔히 뜨고 당하고 있을리는 없었다. 바야흐로 전쟁의 서막이 울리고 있었다.
4. 전쟁의 경과
4.1. 초반전, 이탈리아의 승리
이에 로마는 집정관 푸블리우스 루틸리우스 루푸스를 북부 전선으로, 또 다른 집정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13] 를 남부 전선으로 보내 맞서게 했다. 여기서 동맹시가 오랫동안 로마의 병력셔틀을 하며 쌓아온 경험[14] 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동맹시는 로마군과 완벽히 같은 편제와 전술을 가지고 로마군을 궁지에 몰았고, 기선제압에 성공했다.
로마 집정관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처음부터 파일리그니족[15] 의 베티우스 스카토에게 패배하여 약간의 병력을 잃었다. 삼니움족[16] 의 무틸루스는 이탈리아 남부의 도시 놀라를 점거했고, 루키우스 카이사르와 대치했다. 무틸루스는 루키우스 카이사르에게 누미디아[17] 군이 많은 것을 파악하여 한 가지 계략을 생각해냈다. 삼니움 군대에는 누미디아 왕자 옥신타가 포로로 있었는데[18] 무틸루스는 옥신타에게 누미디아 왕의 복식을 갖추게 하여 루키우스 카이사르 휘하 누미디아군을 동요하게 했다. 루키우스 카이사르는 누미디아군을 북아프리카로 돌려보냈고 무틸루스의 습격을 막아내지 못하여 퇴각했다.
북쪽의 집정관 루푸스는 군 지휘 경험이 많은 노장 마리우스에게 지휘권을 제공하며 마르시족을 향해 공격을 가했다. 그런데 루키우스 카이사르를 패배시킨 베티우스 스카토가 성동격서의 계책으로 마리우스 진영 앞에 진지를 구축하고, 루푸스 진영에 기습을 가하여 '''현직 집정관인 루푸스를 전사시켰다.'''
마리우스는 강물의 로마군 시체를 보고 상황을 파악하여 스카토의 본진을 습격했다. 허를 찔린 스카토는 마리우스와 휴전하여 루푸스의 시신을 돌려주었다. 루푸스의 집정관급 지휘권은 마리우스에게 넘어갔다.
마르시족의 폼파이디우스 실로는 거짓으로 로마에 항복하며 노예의 자식을 자기 자식이라 속여 인질로 로마 사령관 카이피오에게 보냈다. 그는 카이피오의 로마 군대를 매복지로 유인하여 포위하였고 카이피오는 목숨을 잃었다.
4.2. 로마의 반격
노장 마리우스는 당대의 전설적인 영웅으로 군사적 업적이 대단하여 이탈리아인들조차 마리우스를 매우 존경했다. 즉 북부에서 마리우스가 사실상의 총사령관 역할을 한 셈이었다. 마리우스는 집정관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보좌관이자 옛 부하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와 합동작전을 벌여 마르시족을 공격하고자 했다. 마리우스와 술라는 마르시족을 무찔렀고 그들이 도주하자 술라가 추격하여 크게 격파했다.[19]
피케눔의 로마 장군 폼페이우스 스트라보[20] 는 비다킬리우스에게 한 번 패배했으나 이탈리아군에게 반격을 가하여 무찔렀다. 이어 마르시족을 습격하여 큰 패배를 안겨주었다.
한편 마리우스는 마르시족과의 싸움이 진전이 없자 장군직을 사임했다. 당시 67세의 고령이었던 것으로 보아 노쇠함과 병으로 인한 건강 악화가 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집정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로마 시민권 제공 법안을 민회에서 통과'''시키자, 이탈리아 공화국은 전쟁을 할 명분이 사라졌다. 이듬해인 기원전 89년 집정관에 폼페이우스 스트라보와 루키우스 카토가 당선되었다.
4.3. 술라의 활약
마리우스의 보좌관 술라는 남부 전선의 총지휘를 맡았다. 폼페야니족[21] 의 클루엔티우스는 술라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수적으로 우세했던 폼페이군은 로마군을 압박했으나 군량 보급을 위해 잠시 떠나 있던 로마 기병대가 복귀하여 공격을 퍼붓자 크게 패배했다. 술라는 추격을 가하여 클루엔티우스의 마지막 저항을 분쇄하고 그를 전사시켰다.
술라는 히르피니족[22] 을 복속시키기 위해 그들의 도시인 아이클라눔을 포위했다. 술라는 아이클라눔의 성벽이 목재로 이루어졌음을 파악하고 화공을 가했다. 아이클라눔은 함락되었고 로마군에게 약탈되었다. 겁먹은 히르피니족은 술라에게 대항할 엄두를 내지 못하게 되었다.
술라의 칼날은 이탈리아의 집정관이자 삼니움족의 수장 무틸루스를 향했다. 술라는 빠른 공격으로 무틸루스를 격파하고 아이세르니아로 고립시켰다. 무틸루스는 부상을 당해 아이세르니아로 힘겹게 도주했다. 이후 술라는 남은 삼니움 세력을 천천히 정리해 나갔다.
술라의 활약으로 전세는 확실히 기울어졌고, 반로마를 외치던 중심 세력인 삼니움족은 대부분의 세력을 잃었다.
4.4. 종전
폼페이우스 스트라보는 파일리그니족을 복속시키고, 이탈리아 전쟁의 시발점인 아스쿨룸을 점령했다. 술라는 가까운 최측근이자 부하인 메텔루스 피우스에게 지휘권을 제공했다. 메텔루스는 이탈리아의 집정관이자 마르시족의 수장 실로를 전사시키는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제 로마에 위협이 되는 세력은 대부분 정리되었고, 술라에게 패해 급속도로 약화된 삼니움족의 무틸루스 정도만이 남게 되었다.
5. 의의
이 전쟁을 통해 로마는 기존의 느슨한 도시국가 연합의 형태에서 벗어나 '''진정한 이탈리아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23] '''동맹시들은 비록 전쟁에서는 패배하였지만 목적이었던 로마 시민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남아 있던 이탈리아 내의 여러 민족들이 자신들 고유의 언어와 정체성을 버리고 로마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이는 로마의 대외 정책 방향에 영향을 주었고, '''훗날 로마의 부드러운 속주 정책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6. 영향
동맹시 전쟁의 1등 공신 술라는 '풀잎관'을 받고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술라는 집정관 권한으로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지휘권을 얻는 등 승승장구했다.
마리우스의 지지자이자 호민관인 술피키우스는 이번에 로마 시민권을 얻은 신시민들이 35개 선거구 어디서나 투표하게끔 했지만 술라를 비롯한 보수파와 구시민들은 이에 반발하며 신시민들이 수도 근처의 4개 선거구와 지정된 4개 선거구에서만 투표하기를 바랬다. 한편 노장 마리우스는 술라의 부상을 질시하여 폭력적인 수단으로 술라의 폰토스 지휘권을 가져가려 했고, 신시민들은 이를 지지했다. '''결국 술라는 동맹시 전쟁 당시 지휘했던 군단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로마를 장악했다.''' 술피키우스의 선거구법 역시 술라에 의해 폐지되었다.
동맹시 전쟁의 주동자였던 마르시족의 실로는 죽었지만 삼니움 세력은 여전해서 다른 주동자인 무틸루스는 마리우스를 지지해 정권을 탈취하도록 도왔고, 5년이 지나 술라가 2차 내전을 벌일 때 마리우스편에서 싸웠다. 그는 술라가 승리하자 자살했는데 삼니움 세력도 그때 완전히 몰락했다.
술라는 매우 경직된 정치가였던 까닭에 자신에게 적대한 동맹시들에게 불이익을 가했다.[24] 수많은 동맹시의 땅이 로마의 공유지가 되었으며 주민들의 시민권 역시 박탈당했다.
전쟁이 끝났다고 해도, 당시 로마 전체의 35개의 선거구 중 동맹시들은 단 4개만을 배정받는 등 여전히 차별 요소가 남아 있었고 이는 훗날 카이사르의 내전 때 민중파의 거두가 된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남하하기 시작하자 이탈리아 도시들이 전부 그에게 붙는 계기가 되었다.
7. 기타
한편 동맹시(市) 전쟁이 아니라, 동맹국(國) 전쟁이라 해야 옳지 않느냐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동맹시라고 하면 동맹도시를 가리키는데, 그 '도시'들을 살펴보면 도시뿐만 아니라 농경지라든가 항구 등 꽤 넓은 범위를 차지하고 있어 '도시'라고만 하기에는 부적절하다는 이유. 이와 같은 맥락에서 폴리스를 '도시국가'라 번역해서는 안된다는 견해도 있다.
[1] 피로스 전쟁 참고[2] 라티움 지방의 라틴계 도시들. 국방권과 외교권을 제한받은 것은 동맹시들과 같았지만, 라틴 시민권(참정권이 없는 로마 시민권)을 받아 로마 시민과 별 다를것 없는 권리를 누렸다. 그 결과 원래부터 로마와 민족과 언어가 같았던 이들은 서서히 로마에 동화되어 갔다.[3] 정복지의 주민을 학살하거나 노예로 팔아버리고 도시 자체를 파괴하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던 시대였다. 이전에 로마도 정복지의 주민을 학살하고 도시를 파괴한 역사가 있으며, 이후에도 카르타고나 코린토스, 누만티아, 유대 왕국 등에서 비슷한 짓을 했다.[4] 특별히 로마가 더 관대하거나 정의로웠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로마도 로마 나름대로 자신들의 패권을 유지하기 위해 더 효율적인 온건책을 택했을 것이다.[5] 언제, 어디서, 누구와 싸울지는 맹주인 로마가 결정했기 때문에 사실상 로마의 전쟁에 억지로 끌려다니는 셈이었다.[6] 대략 피로스 전쟁 종료부터 동맹시 전쟁 시작까지[7] 소 카토의 외삼촌이기도 하다.[8] 누미디아의 유구르타를 평정하고 킴브리 전쟁에서 게르만족의 침입을 저지하여 집정관을 6번이나 지낸 거물이었다. 로마 군단의 군제개혁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고모부이기도 하다.[9] 기원전 115년도 집정관으로 원로원 내에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원로원의 수장이었다.[10] 드루수스는 보수파에 속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스카우루스같은 보수적인 사람들에게도 신뢰를 얻고 있었다. 특히 그라쿠스 형제의 전례를 참고하여 모든 절차를 합법적으로 진행하려고 노력했다.[11] 필리푸스나 법무관 카이피오가 배후로 많이 의심되는데 키케로는 히스파니아의 수크로 출신인 바리우스 세베루스를 배후로 지목했다. 참고로 원로원 의원 중 상당수가 드루수스를 지지했고, 그랬기에 다른 방법이 없어서 그라쿠스 때와 달리 암살을 한 것이다. 심지어 평생을 정적으로 산 스카우루스와 마리우스가 이 문제에 한해서는 같이 힘을 합쳐 드루수스를 지지했다.[12] 드루수스의 유언은 '''누가 나처럼 우리 공화국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Ecquandone similem mei civem habebit res publica)였다.[13]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큰아버지.[14] 2차 포에니 전쟁 참전 로마군의 절반 이상이 동맹시 보병이었다.[15] 이탈리아 중남부의 부족.[16] 이탈리아 중남부의 삼니움에 사는 부족. 카우디움 전투에서 로마에게 큰 굴욕을 안겨준 이들로 유명하다.[17] 아프리카 북부의 왕국, 현재의 알제리.[18] 마리우스가 누미디아 왕 유구르타를 제압할 때 생포되어 이탈리아 남부에 연금되었다.[19] 로마사의 라이벌로 유명한 마리우스와 술라의 마지막 협동작전이었다.[20]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버지이자 키케로의 상관이었다. 키케로는 이때 군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21] 유명한 도시 폼페이의 주민.[22] 남부 이탈리아에 사는 삼니움인 가운데 한 부족 그룹.[23] 고대 로마가 좀 자세하게 표현된 연도별 나라들의 영역이 나타나는 유튜브 동영상들에서는 이 때까지는 이탈리아의 상당 부분이 로마 본국보다는 색깔이 연한 동맹국 내지는 부용국 정도로 표시되다가 동맹시 전쟁이 끝나면서 로마 본국과 완전히 같은 색깔로 합쳐지는 것이 묘사되어 있다.[24] 상당히 많은 수의 동맹시가 민중파인 마리우스의 편을 들었다. 프라이네스테가 대표적인 예인데 주민들은 도시에서 마리우스의 아들과 같이 농성하다가 술라 군대에게 도시가 점령당하고 지도자들이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