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펠릭스'''
라틴어: Lucius Cornelius Sulla Felix
[image]
'''생몰년도'''
기원전 138년 ~ 기원전 78년
'''출생지'''
로마 공화국 로마
'''사망지'''
로마 공화국 포추올리
(現 이탈리아 캄파니아주 나폴리현 코무네)
'''지위'''
귀족
'''칭호'''
행운아
'''국가'''
로마 공화정
'''가족'''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첫 번째 부인의 장인)
율리아 코르넬리아 카이사리아(BC.110~BC.104첫 번째 부인)
코르넬리아 술라(장녀)
아일리아(두 번째 부인)
클로일리아(세 번째 아내)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달마티카(네 번째 부인의 장인)
카이킬리아 메텔라(네 번째 아내)
파우스투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장남)
코르넬리아 파우스타(차녀)
마르쿠스 발레리우스 메살라 니게르(다섯 번째 아내의 장인)
발레리아(다섯 번째 아내)
코르넬리아 포스투마(삼녀)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조카)[1]
'''참전'''
유구르타 전쟁
킴브리 전쟁
동맹시 전쟁
제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직업'''
독재관
1. 개요
2. 주요 경력
2.4. 1차 로마 진군
2.5. 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2.6. 2차 로마 진군
2.8. 은퇴와 죽음
3. 술라의 개혁의 문제점
4. 가족
5. 여담
6. 둘러보기(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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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행운아(FELIX)'''

―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2]

'''보통 영웅들은 사자의 용맹함이나 여우의 교활함 중 한 성향을 갖고 있는데 술라는 이 두 가지 기질을 다 가지고 있다.'''

― 그나이우스 파피리우스 카르보[3]

술라는 로마 공화국 말기의 장군으로 로마 공화국을 복구하려 했으나 반대로 공화국이 뒤엎어지는 것에 큰 영향을 준 장본인이다. 아래의 경력에서도 볼 수 있듯이 수많은 전쟁에서 업적을 이뤄냈고 이 때문에 '행운의 여신의 사랑을 받는 자'로 유명했다. 술라 본인도 자기 자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행운아였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행운을 뜻하는 "Felix"를 성 앞에 붙이는 존칭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름 중간에 명문 코르넬리우스라는 가문명이 붙은 것으로 알 수 있듯 그는 당시 로마 공화국에서 몇 안 되는 전통 귀족 출신이다. 특히 코르넬리우스 가문은 발레리우스, 파비우스 가문과 함께 로마의 으뜸가는 집안이었다.
그러나 술라의 가문은 조상인 루피누스가 은쟁반을 뇌물로 받은 일로 원로원에서 쫓겨난 이후 술라 때에는 당시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몰락한 상태였고 술라라는 가문명을 가진 유력 정치인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훗날 술라의 숙청 때 어떤 해방노예가 술라가 자기와 같은 집에서 셋방살이한 과거를 언급하며 3천 세스테르티우스 셋방에서 살던 거렁뱅이라고 비난한 기록이 있다. 이것 때문인지 술라는 젊은시절 하층민인 광대, 배우와 친하게 지냈고 나중에 집권한 이후에도 이런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술라는 비교적 가난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귀족 가문이 받을 수 있었던 것과 동등한 수준의 좋은 교육을 받는다.[4] 공식적으로 5번 결혼했으며 그 외에도 남녀 가리지 않고 수많은 애인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있다.
뛰어난 정치가이자 명장인 동시에 냉혹함과 권모술수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술라의 부하 폼페이우스가 카이사르에게 패배했고 술라가 카이사르의 정적인 데다 술라와 카이사르 둘 다 내전의 최종 승리자이기 때문에 "양의 카이사르 vs 음의 술라" 로 가장 잘 먹히는 인물이다.[5] 나이차가 큰 데다 같이 생존하던 시기 서로의 위치가 워낙 차이가 나서 역사에서 둘이 본격적으로 대결할 일은 없었다.[6]

2. 주요 경력



2.1. 유구르타 전쟁


술라의 본격적인 관직활동은 유구르타 전쟁부터 시작된다.
기원전 107년 31살의 술라는 재무관에 선출되었고, 당시 집정관 마리우스의 휘하로 누미디아 왕국에 파병되어 누미디아의 왕 유구르타와의 전쟁에 종군하게 된다. 이후 술라의 로마군은 누미디아의 수도 키르타 인근에서 유구르타와 마우레타니아의 왕 보쿠스[7]가 이끄는 연합군과 전투가 벌어지고, 여기서 술라는 기병을 이끌고 적군 우익의 마우레타니아의 보병대를 격파하고 곧이어 로마군과 싸우던 유구르타의 본대를 공격해 승리를 이끌어 내었으며 그 기세를 몰아 누미디아의 수도 키르타까지 함락한다. 이후 술라는 유구르타의 동맹인 보쿠스 왕을 설득하여 유구르타를 생포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그렇게 승전한 술라는 상관 마리우스와 점점 사이가 벌어졌다. 일례로 로마 포룸에 이를 기념하는 조각이 세워지기도 했는데, 조각에서는 유구르타를 잡은 술라만 묘사되어있고 정작 유구르타를 몰아붙인 집정관 마리우스는 묘사되어 있지 않았다. 그리고 마리우스와 사이가 나쁜 세력가 메텔루스의 선전으로 술라의 공이 알려지게 된다. 이 때문에 마리우스와 술라의 사이는 나빠진다.

2.2. 킴브리 전쟁


기원전 101년에 게르만족의 일파인 킴브리족과 테우토네스족이 갈리아와 이베리아를 거쳐 이탈리아에 침략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37세였던 술라는 처음엔 마리우스 밑에서 일하다가 나중엔 다른 집정관인 카툴루스 밑으로 보내지는데 이를 본다면 마리우스와의 사이가 점점 나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카툴루스 휘하에서 그는 기병을 이끌게 되었는데 마리우스와 카툴루스가 이끄는 로마군과 게르만족이 맞붙은 베르켈라이 회전에서 그는 대단한 지휘 솜씨로 게르만족을 격파하는 데 큰 공을 세운다.

시민들에게 유명해진 술라는 기원전 97년 41세의 나이로 수석 법무관에 선출된다. 그는 다음 해에 터키 서부 킬리키아 지역의 총독이 되었다. 술라는 이때 파르티아와 외교협상을 벌였는데 주요 내용은 유프라테스 강을 로마와 파르티아 양국의 국경으로 정한 것이었다. 협정이 성공적으로 맺어지고 총독 임기가 종료되자 술라는 로마로 귀국한다. 귀국한 뒤 그는 원로원 의원이 되어 가이우스 마리우스에 적대하는 옵티마테스 파의 일원이 된다.

2.3. 동맹시 전쟁


5년 뒤인 기원전 91년에 동맹시 전쟁이 발발하는데 이는 로마인들이 로마 시민권을 이탈리아 내의 다른 도시들에게 수여하는 것을 반대해왔기 때문이었다. 술라는 가이우스 마리우스,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스트라보[8]와 더불어 로마군을 지휘하는 사령관이 되었는데 그는 대단한 맹활약을 하여 동맹시 전쟁을 로마의 승리로 마무리짓게 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한다.
처음에 술라는 집정관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보좌관이었고 남부전선에 파견되었다. 반면 마리우스와 또 다른 집정관 루푸스는 북부에서 싸웠다. 마리우스가 마르시족을 공격할 때 술라는 그와 합동작전을 벌여 마르시족을 무찔렀다.[9] 이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마지막 공동작전이었다. 두 명장이 이후 역사의 영원한 라이벌이 되는 것을 보면 흥미로운 전투라 할 만하다.
술라는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임기를 마치자 남부전선의 총사령관이 되었다.[10] 우선 폼페야니족[11]의 클루엔티우스와 싸워 그를 격파하고 추격하여 전사시켰다. 이후 술라는 히르피니족 도시인 아이클라눔의 성벽이 목재인 것을 파악하여 화공으로 점령한 뒤 약탈했다. 이에 히르피니족은 술라에게 투항하였다.
이어 삼니움의 무틸루스가 그의 타겟이 되었다. 술라는 무틸루스를 격파하고 아이세르니아에 고립시켰다. 술라는 빠르게 삼니움 세력을 정리하고 이탈리아 세력에 결정타를 가했다.
술라는 동맹시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워 풀잎관(Corona Graminea)을 받았다.
이러한 활약으로 인해 술라는 기원전 88년에 50세의 나이로 집정관으로 선출된다.

2.4. 1차 로마 진군


술라는 집정관이 된 뒤 동쪽 헬레니즘 제국 중 하나였던 폰투스의 미트리다테스 왕과의 전쟁을 준비한다. 당시 로마는 막 동맹시 전쟁이 끝난 상태였고 동맹시들은 모두 로마 시민권을 수여받은 상태였다. 로마에선 이들에게 어떻게 선거구를 줄 것인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마리우스가 이끄는 민중파는 이들에게 기존의 로마 시민들이 갖고 있는 선거구를 웃도는 숫자의 선거구를 줄 것을 원하였다. 원로원이 반대하자 이들은 폭동을 일으켰고 그때 로마에 있었던 술라는 마리우스의 집으로 피해 간신히 목숨을 구한다.
그 뒤 술라가 자신의 군단병이 있던 놀라라는 도시로 빠져나가자 폭동을 일으켰던 민중파는 민회를 소집해 술라가 가지고 있는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지휘권을 박탈하고 마리우스에게 맡기기로 결정한다. 이는 민중파의 지나친 폭거였다. 그 이유는 군단 지휘권은 집정관이 이끄는 것이 상식이었는데 이를 박탈한다는 것이 상식을 벗어났다는 것, 그리고 이렇게 빼앗은 지휘권을 아무런 직책이 없는 민간인 신분의 사람[12]에게 준다는 것 또한 전례에 없던 일이기 때문이었다.
놀라에서 이 소식을 들은 술라는 당연히 분개하였는데 마리우스에겐 불행하게도 이 놀라에 집결된 로마 군단병이 이미 술라에게 사병화된 상태였다. 그 이유는 술라가 군단을 편성하면서 일선 지휘관들을 전부 자신을 따라 동맹시 전쟁을 수행했던 장교들로 구성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우선 술라에게 지휘권이 넘어갔다는 사실을 공표하기 위해 로마에서 파견나온 사절들에게 돌팔매질을 해서 쫓아낸다. 그 뒤 술라는 6개 군단을 이끌고 로마를 향해 진군하였다.
마리우스와 민중파는 이러한 술라의 행동에 전혀 대비가 되어있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현직 집정관이 자신에게 주어진 군단을 이끌고 로마 시를 공격한 일은 로마 건국 이래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술라는 민중파가 일으킨 폭거에 더 심한 폭거로 대항한 셈이었다. 따라서 마리우스와 그의 일파들은 로마 시를 버리고 달아났으며 로마를 장악한 술라는 마리우스를 국가의 적으로 선포한 뒤 자신의 군대를 이끌로 놀라로 되돌아가 폰투스 원정을 떠난다.
술라가 떠난 뒤, 두 집정관 중 하나인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킨나의 도움을 받은 마리우스는 자신을 따르는 군대와 함께 아프리카에서 귀국하여 로마에 입성한다. 마리우스는 로마에 입성하자마자 거부권을 행사하는 집정관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를 죽인 뒤, 술라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하고 추방형을 내린다. 그 뒤 마리우스는 7번째로 집정관에 선출되나 이미 71세의 노인이었던 그는 그해에 죽고 만다.

2.5. 1차 미트리다테스 전쟁


술라는 놀라를 떠나 그리스에 도착한 뒤 아테네를 공격하였다. 로마의 군사력이 강한 것을 보고 로마에 붙기로 결심한 많은 그리스 도시들이 술라에게 사절을 보내 협력하겠다고 하였고 술라는 이들을 모두 환영하였다. 술라는 아테네를 포위한 뒤 곡식을 철저히 차단하여 아테네의 항복을 받아낸다.
이듬해 술라는 북상하여 카이로네이아에서 아르켈라우스가 이끄는 폰투스군을 맞아 싸운다. 이때 로마군은 4만여였고 폰투스군은 12만이라고 한다. 이곳에서 술라는 적이 돌투성이었던 언덕 아래에 진지를 구축한 것을 발견하고 즉각 싸움을 걸었다. 즉, 팔랑크스를 쓰기에 좋지 않은 로마군의 언덕 아래에 폰투스군이 포진한 것. '''적 사령관이 어지간히 무능하지 않고선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다.'''
로마군은 무장과 훈련이 잘 된 데다 지형적 유리함도 있어 싸움은 일방적으로 로마군에게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폰투스군은 우세한 병력으로 로마군의 좌익을 포위하려고 하였으나 술라가 직접 군대를 끌고 지원하여 격퇴하였다. 곧 중앙과 우익에서도 폰투스군이 격퇴되면서 전투는 로마군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사료를 남긴 로마 시대 역사가인 아피아누스와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놀랍게도 폰투스군은 '"11만이 죽었고 로마군의 전사자는 12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사실 이 정도 손실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것이 현대전과 달리 고대전에서는 전투 중에 발생하는 대부분의 전사자는 후퇴 중에 발생하고, 보통 부상이 원인이 되어 사망하는 병사는 전사자 명단에 포함시키지 않기 때문에 아군은 현장에서 즉사한 군인만 따로 집계하고 적군은 추정살상까지 포함하면 충분히 가능하다. 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비현실적인 수치이기도 하고, 로마인들이 기록한 전투들의 사상자 비율이 실제보다 과장된 경우가 많다는 것이 현대 학계의 통설이므로 이 수치 역시 제법 과장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폰투스군을 격퇴한 술라는 집정관 킨나가 파견한 로마 정규군과 조우한다. 로마 정규군은 마리우스가 죽고 후임 집정관이 된 플라쿠스가 이끌고 있었다. 술라는 이들과 싸우는 대신 자신의 병사들로 하여금 플라쿠스의 병사들을 자신의 군에 합류토록 유혹하였다. 플라쿠스군은 술라보다 적은 병력인 데다 술라가 군인으로서의 명성이 높은 것도 있어 많은 이들이 탈주하여 술라 휘하로 들어갔다.
플라쿠스는 술라와 싸우는 대신 북상하여 미트리다테스와 싸우기로 하였고 술라는 이들 플라쿠스군을 쫓는 대신 남하하고 있는 폰투스군을 맞아 오르코메노스 곶으로 이동하였다.
오르코메노스에서 술라는 폰투스군을 상대로 한쪽엔 참호와 도랑을 파 놓고 다른 편에 군대를 보내 망치와 모루 전술을 사용한다. 한쪽은 호수인데다 참호와 도랑으로 압박을 당한 폰투스군은 패주하였고 이로써 폰투스군은 대패한다. 이때 참호를 파서 싸운 것은 전사에서 최초로 참호에 병사를 둔 뒤 싸운 예라고 한다.
오르코메노스에서 폰투스가 동원한 병력은 8만으로 알려졌는데 기록에 따른다면 12만 중 11만이 죽고서도 뒤이어 8만을 동원했다는 말이 된다. 동원력으로 친다면 폰투스는 중국의 거대한 왕조들과 비견될 정도였다. 그러나 폰투스의 영토는 아래 지도에서 알 수 있듯 이탈리아 반도보다 작았고, 또한 이미 이탈리아 반도 뿐 아니라 시칠리아, 스페인, 북아프리카를 점령하고 있었던 강대국 로마가 동원한 병력이 5만여인 것을 비교한다면 이토록 로마군을 웃도는 병력을 전쟁터에 내보낼 수 있었던 것이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잡병을 징집해서 죽창 들려 내보내는 거라면 8만이 아니라 80만도 그렇게 어려운 것은 아니다. 소아시아의 모든 로마, 이탈리아의 시민들을 학살한 미트리다테스의 인간성을 보면 자신의 영토에서 마구잡이로 징집했을 가능성이 높다.[13] 이렇다면 술라가 병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전력으로 폰투스군을 격파할 수 있었던 것을 설명하는게 가능하다.
녹색 부분이 폰투스 왕국, 단 미트리다테스 6세는 저 밑의 아나톨리아(이스탄불 동쪽의 터키 지역)를 완전히 지배하에 넣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당대 로마에 비하면 한줌 정도에 지나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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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양국의 군사 제도를 보자면 로마군은 로마 시민만 지원이 가능한 데다 마리우스의 개혁 이후에 모병제였다. 따라서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시민권법에 따른 '''기존 로마 시민과 로마 시민이 된 이탈리아인'''만 모병대상이다. 반면 폰투스는 전제군주인 왕의 재력으로 고용한 용병과 징집병이 주력이었다. 즉 아나톨리아 전체가 폰투스의 병력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폰투스는 보스포루스를 기반으로 스키타이까지 영향을 확대했기 때문에 스키타이 용병을 고용할 수 있었다.
게다가 양국의 상황을 보자면 우선 로마는 동맹시 전쟁이 끝났지만 여전히 삼니움이란 불씨는 남아있었고[14] 가장 중요한 문제인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을 치러야 했다. 즉, 로마의 술라 정부는 마리우스라는 강력한 적이 주적이고 동방의 적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적이었다.[15] 이탈리아에 주둔한 병사들이 속속 마리우스에 가담하고 삼니움족도 마리우스를 지원하면서 로마는 마리우스에게 점령되고 만다.[16] 반면 미트리다테스는 로마만이 적이었고 서방으로 빠르게 세력을 불리고 있었다. 그래서 미트리다테스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모든 병력을 투입할 수 있었고 로마는 일부만을 투입할 수밖에 없었다.
애초에 미트리다테스는 아시아와 킬리키아의 속주 주둔군을 이미 격파한 상태이며 그리스까지 손을 뻗고 있는 상태였다. 원정에서 승리하며 승승장구한 폰투스는 많은 자금을 확보한 상태이며 술라에게 패하고도 강대한 군사력을 유지했다. 그런데 당시 로마는 동맹시 전쟁으로 인한 군비 차출로 국고가 바닥나 있었다. 집정관 술라는 가까스로 군비를 마련하고 6개 군단을 이끌고 원정을 떠났는데 그리스에서도 신전을 약탈할 정도로 군자금이 부족한 상황이었다.[17]
즉, 폰투스 측의 군세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설사 과장이 아니더라도 완전 불가능한 수의 병력은 아니었고 로마에서는 내전과 경제 상황, 동맹시 전쟁의 휴우증 때문에 적은 군대만을 출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로마군이 폰투스를 이긴 원인은 술라의 군사적 재능과 로마 병사의 질(술라를 따라 삼니움을 격파한 정예병이었다), 폰투스 장교들의 무능함이었다.
'''그럼에도 가장 중요한 것은 총사령관의 역량이다.''' 술라가 쓴 전술은 폰투스의 전차와 팔랑크스를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폰투스의 전차나 팔랑크스가 오면 로마 보병은 양측으로 비키며 측면에서 공격을 가해 무력화시켰다. 결국 보병전을 벌여 로마 군단병이 폰투스군을 격파했다. 즉, 술라의 전술은 효과적이었고 전투에 승리를 가져온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로마와 폰투스의 전쟁을 쭉 보자면, 술라의 원정 이전에 동방에 파견된 아퀼리우스와 카시우스는 미트리다테스를 공격하다 크게 패했던 반면 술라와 루쿨루스, 폼페이우스 같이 뛰어난 지휘관의 군대는 대승을 거두었다. 훗날 술라가 남겨놓은 로마 사령관 리키니우스 무레나도 폰투스에 탈탈 털리고 로마로 귀국한다.
패주한 폰투스군은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철수하였고 북상중인 플라쿠스군은 이들을 추격키로 결정한다. 그러나 플라쿠스군 내부에서 내분이 일어났는데 이는 매우 엄격한 지도자였던 플라쿠스가 폰투스군을 맹추격하길 원하였고 그의 부하였던 핌브리아와 그를 따르는 부하들은 폰투스군이 떠나고 없는 도시들을 점령한 뒤 약탈하기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플라쿠스는 핌브리아를 해임하고 로마로 귀국할 것을 명령하는데 핌브리아는 이 명령을 듣지 않고 자신은 따르는 병사들과 반란을 일으킨다. 플라쿠스는 이들을 진압하려고 군대를 이끌고 왔으나 병사들 모두 핌브리아를 따라 약탈을 하기를 원했으므로 플라쿠스를 배신한다. 집정관 플라쿠스는 달아나다 붙잡혔고 핌브리아에 의해 처형된다.
이토록 술라의 뒤를 이어 그리스에 파견된 로마 정규군이 막장으로 치달았으나, 이들을 무시한 술라는 그리스 섬들을 점령하는 데 전념한다. 핌브리아의 로마군은 터키 지역에서 미트리다테스 6세의 잔존 병력과 전투를 벌여 대승을 거둔다.
핌브리아군은 미트리다테스를 추격하여 그를 페르가눔이라는 도시에 몰아놓고 포위한다. 그러나 미트리다테스는 배를 타고 피타네라는 도시로 달아났고 이를 추격한 핌브리아군은 피타네를 포위하였으나 미트리다테스의 도주를 저지할 해군이 없음을 안 핌브리아는 술라의 명령으로 해군을 편성했던 루쿨루스에게 협력을 요청한다.
그러나 루쿨루스는 핌브리아의 요청을 거부하였고 이를 들은 술라는 미트리다테스 6세와 몰래 강화를 맺기로 하였다. 배를 타고 달아난 미트리다테스 6세는 술라를 만나 강화를 맺는다. 이때 미트리다테스는 70여 척의 선단으로 구성된 해군을 술라에게 넘기고 3000 탈렌트를 지불하는 것뿐인 아주 온건한 강화조약을 맺게 된다. 그러나 핌브리아군은 이러한 강화조약이 법적으로 효력이 없다고 여겼으므로 계속 터키 지역에서 군사 활동을 벌였고 술라는 따라서 이들과 맞서기 위해 터키 지역으로 이동한다.
기원전 84년 핌브리아는 술라와 싸우려 하였으나 핌브리아의 병사들은 핌브리아를 따라 집정관 플라쿠스를 살해한 것에 대해 두려워 하는 마음을 품고 있었고 이미 충분한 전리품을 약탈하여 욕심을 채운 상태라 핌브리아를 따를 생각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술라에게 붙기로 하였고 병사들에게 배신당한 핌브리아는 자결한다.
술라는 새로 붙은 병사들의 충성을 높이고 미트리다테스 6세와 온건한 강화조약을 맺은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진 기존 병사들을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터키 지역의 점령지에서 마음껏 약탈하게 허용한다. 이러면서 여러 신전들과 도시들에게 많은 벌금을 물려 로마를 공격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았다.
한편 로마의 통치자였던 킨나[18]는 술라와 맞서기 위한 군대를 모아 일리리아를 향해 행군하던 중 병사들에게 살해당한다. 킨나의 군대는 술라와 싸워봐야 전리품을 많이 얻을 가능성이 없었으므로 그다지 싸우는 것을 내켜하지 않았다. 가령 술라군의 경우 로마에 반란을 일으킨 나라를 응징하는 것이었으므로 약탈의 기회가 많았다. 약탈은 병사들에게 있어 한 밑천 마련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었다. 하지만 킨나의 군대는 술라군을 진압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므로 이겨봐야 약탈할 기회가 별로 많지 않았다. 게다가 병사들은 킨나의 군사적 능력에 대해서도 신뢰를 하지 않았는데 킨나의 상대인 술라는 마리우스 휘하에서 이미 유구르타 생포, 게르만족 격파, 동맹시 전쟁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낸 명장[19]이었고 미트리다테스 전쟁에서도 연이은 대승을 거두어 당대에서 가장 유명한 장군이었기 때문이었다. 즉, 병사들은 킨나가 술라를 이길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전리품도 얻을 가능성도 별로 없는 데다 고향인 이탈리아를 떠나 싸워야하니 전쟁을 하러 가는게 상당히 내키지 않은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킨나는 병사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 애를 쓰기보단 오히려 그들에게 눈이 덮힌 산을 강행군으로 돌파하는 것을 강요하였다. 이에 병사들은 킨나에게 불만이 쌓은터에 킨나의 수행원이 보초를 서던 병사가 길을 가로막고 있다는 이유로 구타하자 분노하여 킨나와 그의 일행을 모두 살해한다.

2.6. 2차 로마 진군


킨나가 죽자 더이상 로마에선 술라와 맞설 만한 인물이 없었다. 아무런 방해 없이 기원전 83년 이탈리아에 상륙한 술라는 로마로 북상하기 시작했고 로마에서는 새로 선출된 집정관들이 저항하나 워낙 술라에 비해 명성이 떨어진 데다 전술에 있어서도 술라의 적수가 되지 않았다. 또한 술라가 이길 가능성이 높아지자 원로원의 유력 귀족들 대다수가 술라 편에 섰으며 술라에게 맞서기 위해 편성된 군대까지 속속 술라편으로 돌아서게 된다. 하지만 민중파는 홈 그라운드의 이점을 가진데다 그들의 군사력은 술라군을 훨씬 압도했다. 게다가 무자비한 술라가 집권하면 죽을 목숨이 될 것이 뻔한 민중파는 사력을 다해 맞서게 되었다. 그리고 민중들은 죽은 마리우스를 존경했기에 그의 아들과 민중파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즉 뛰어난 총사령관 술라의 지휘를 받는 소수의 군대와 죽은 마리우스의 위망을 기반으로 민중의 지지를 얻는 대군의 대결이었다.
술라는 마리우스의 아들과 집정관 노르바누스를 격파하고 다른 집정관 스키피오 아시아티쿠스와 대치한다. 스키피오는 술라의 2배에 달하는 군대를 보유하여 수적으로 우세했다. 술라는 스키피오 군대가 결속력이 떨어지는 것을 파악하여 마치 스키피오와 협상을 하는 것처럼 스키피오 군대에게 접근했다. 스키피오는 술라가 자신과 협상을 바라는 줄만 알고 술라와 자신의 군대가 은밀히 거래하는지 전혀 몰랐다. 양군이 만나자 스키피오의 군대는 와해되어 술라에게 합류하였고 스키피오 진영에는 스키피오와 그의 아들만이 남게 되었다. 스키피오는 술라에게 사로잡혔으나 곧 풀려나왔다.
기원전 82년 술라는 새로 선출된 집정관 젊은 마리우스를 프라이네스테에서 박살내고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술라는 오펠라에게 포위 임무를 맡겼고 젊은 마리우스는 부하에게 지시를 내려 로마의 유력 인사를 모두 죽이고 로마에서 철수하게 한다. 술라는 로마를 장악하고 민중파의 카리나스를 크게 무찌른 한편 북부전선에서 술라의 부하 메텔루스 피우스가 집정관 카르보를 연달아 격파한다. 당시 24세였던 폼페이우스 역시 뛰어난 군사적 재능으로 민중파 군대를 섬멸한다.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 곳곳에는 술라와 그의 부하들의 승전보만 들려왔다.
한편, 동맹시 전쟁에서 술라에게 크게 패한 삼니움족의 텔레시누스는 민중파와 손을 잡고 로마로 진격했다. 허를 찔린 술라는 급히 삼니움군에 대적했다. 콜리네 성문에서 격전이 벌어졌는데 크라수스가 이끄는 술라군 우익은 적을 무찌른 한편 술라가 직접 이끄는 좌익은 고전하고 있었으며 술라가 투창에 맞을 뻔할 정도로 치열하게 싸웠다.
결국 전투는 술라의 승리로 끝나고 술라는 저항한 민중파 멤버들을 살생부에 올려 모두 살해한다.

2.7. 독재관


최종 승자가 된 술라는 기원전 81년 57세의 나이로 독재관이 된다. 원래 독재관은 6개월이라는 임기 제한이 있는데 술라는 임기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술라의 독재관은 "법을 만들고 공화국을 재건하는 독재관(dictator legibus faciendis et rei publicae constituendae)"[20]으로 비상사태가 끝나고 공화국이 재건되면 독재관 임기가 만료되는 것이다. 즉 비상사태가 계속된다는 명분하에 계속 권력을 장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로마 원로원이 공화정이 생긴 이래 한 개인에게 절대적인 권력을 준 최초의 사례였고 이는 카이사르가 훗날 종신독재관(dictator perpetuo)에 취임하여 제정으로 가는 길을 터놓게 된다.
독재관이 된 술라는 1,500명의 명단이 적혀있는 살생부를 공표하였는데 실제로 살해된 인물들은 무려 9천 명에 달하였다. 원래 술라는 살생부를 작성하지 않고 '''그냥 죽였다.''' 6천 명의 삼니움 군대가 처형되었고 이때 술라가 태연하게 말했다.

'''"마땅히 죽어야 할 자들이 죽으니 신경쓰지 마시오."'''

이후 가이우스 메텔루스라는 사람이 무고한 사람이 안심하고 살 수 있게 해달라고 하니 그때 술라가 고안한 것이 살생부였다. 이들은 민중파에서 영향력을 가진 인물들뿐이었는데 당시 300명의 정원인 원로원의 30배에 해당되는 수를 처형했다는 것은 그야말로 씨도 남기지 않을 정도의 철저한 숙청이었다.
특히 이렇게 처형된 자의 재산은 몰수된 뒤에 술라의 측근들이 나눠가졌고 이때 크라수스와 같은 인물들은 재산을 엄청나게 불린다. 이 때문에 민중파로 조금이라도 알려졌거나 약간의 관련만 있어도 술라파 측에선 처형시키려고 혈안이 되어있었고 때문에 처형된 자들의 수가 과도하게 늘어난 것이었다.
이렇게 수많은 민중파 인사들을 처형한 뒤 술라는 로마법 체계를 바꿔 자신이 속한 옵티마테스 파의 권력을 강화시킨다. 그는 원로원을 강화하기 위해 원로원의 정원을 300명에서 600명으로 늘렸으며, 평민 집회에서 선출되는 호민관들이 정계에 진출하는 것을 막았다.
그리고 기사계급(에퀴테스)과 로마의 배심원을 전원을 원로원 의원들로 채움으로써 귀족들이 사실상 면책 특권을 갖게금 만들어 놓았다. 이는 훗날 카이사르의 개혁으로 폐지된다.
이탈리아 각지에 신도시를 건설하고 휘하의 퇴역 병사들을 정착시켰다. 그러나 이는 성공적이지 못하여 다수의 병사가 현지에 적응하지 못해 훗날 큰 문제를 일으킨다.
곡물법을 폐지했다. 즉, 민중들은 곡물을 싸고 일정한 매입가로 구매할 수 없게 되었다.
호르텐시우스법[21]을 폐지시켜 민회의 권한을 크게 약화시켰다.
내전 당시에 마리우스의 편을 든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로마 시민권을 박탈당하고 토지는 로마의 공유지로 몰수되었다. 삼니움족의 무틸루스, 텔레시누스 같은 지도자들은 술라에게 제거되었다.
군사정변에 대비하기 위해 집정관은 한사람만 출정나갈 수 있고 이탈리아 내에서 집정관 권한으로 4개 군단만 편성할 수 있게 했다. 또 전직 집정관이 다시 집정관이 되려면 집정관을 지낸 해로부터 10년을 거치게 정했다.
그리고 속주 총독의 권한을 크게 약화시키고 원로원에게 막강한 통제권을 주었다. 또 총독이 되기 위해선 명예로운 경력을 거쳐 법무관 이상의 관직에 오르도록 법안을 강화했다.
또한 한 개인이 돌출하는 것을 막기 위해 술라는 로마의 '''명예로운 경력'''에 나이 제한을 둠으로써 한 유능한 개인이 돌출하는 것을 막게끔 하였다. 이렇듯 술라는 독재관 임기 중 철저하게 옵티마테스의 권력을 강화하는 식으로 로마법을 고친다.
술라는 젊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킨나의 딸 코르넬리아와 이혼할 것을 요구했으나 카이사르는 단번에 거절한다.[22] 술라는 카이사르를 제거하려 했으나 여러 사람들의 청원을 못 이겨 끝내 살생부에서 카이사르의 이름을 지우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카이사르의 안에는 마리우스가 수백 명이나 들어가 있소."'''

영웅은 영웅을 알아본다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술라는 이 말을 남기고 카이사르를 사면한다.
술라의 개혁은 훗날의 독재를 막기 위해 잠시 독재를 한 것이지만 술라 사후, 술라가 재건한 공화국은 술라의 부하였던 폼페이우스에 의해 무너지고 민중파 카이사르에 의해 결정적으로 붕괴된다.

2.8. 은퇴와 죽음


술라는 독재관을 단 2년 만에 그만뒀는데 이는 과두정 옹호파인 옵티마테스였던 자신의 이념에 충실한 것이다. 그러나 술라의 권력 기반 자체가 옵티마테스였고 또한 민중파를 공격한 뒤 학살, 그리고 뒤이어 한 개혁들을 한 명분이 이들이 공화정의 토대를 흔든다는 것이었으므로 술라가 일인 통치 체제인 독재관을 그만두고 로마를 공화정으로 되돌려 놓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기원전 80년 독재관에서 물러난 이후 그는 사저에 틀어박혀 자신의 회고록을 집필하는 데 전념한다. 그는 회고록의 탈고를 무사히 마쳤으나 곧바로 급작스럽게 죽었는데 당시 사료를 바탕으로 추정해보면 술라는 만성적인 알코올 의존증에 빠졌으며 이에 따른 급성 간경화 혹은 위출혈로 죽은 것으로 보여진다.
술라가 죽은 뒤, 그의 처우에 대해 논란이 있었다. 집정관 카툴루스는 그를 국장으로 처리해야 한다고 했고, 다른 집정관 레피두스[23]는 장례식을 치를 명예조차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논쟁이 알려지자, 격분한 술라의 퇴역병들이 전 로마에서 몰려들었고 국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묘비에는 자기가 생각한 비문이 새겨졌는데, '''"동지에게는 술라보다 더 좋은 일을 한 사람이 없고, 적에게는 술라보다 더 나쁜 일을 한 사람도 없다"'''고 한다.

3. 술라의 개혁의 문제점


술라는 공화정을 강화시키려는 개혁을 시도하였으나 그로 인한 희생에 비해 개혁의 성과는 상당히 별볼일 없었다.
우선 술라는 공화정을 강화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귀족층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민중파들의 권한을 철저히 축소시켰다. 따라서 민회가 법안을 가결하는 권한을 박탈하고 호민관의 거부권, 그리고 이들 호민관이 '''명예로운 경력'''의 다른 공직에 선출되는 것을 막는다. 그런데 문제는 공화정이라는 것 자체가 이들 민중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굴러가는 정부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무리 원로원의 권한을 강화시켜놔도 여전히 명예로운 경력의 공직자들은 민중들의 투표를 통해 선출되고 있었다. 따라서 필연적으로 로마 정부는 민중들의 민심에 기반할 수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공화정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에서 민중들을 소외시킨다는 것은 완벽한 모순이었다. 따라서 술라의 개혁이 전혀 효과가 있을 턱이 없었고 실제로 술라가 죽고 얼마 안 있어 이러한 개혁들은 모두 폐지되고 원상복귀된다.[24]
또한 술라는 민중파 인사들을 철저히 숙청했으나 이것도 실상 쓸데없는 노력이나 다름없었다. 그 이유는 민중파 인사들이 그들의 선조로부터 대대로 민중파의 유지를 물려받은 것도 아니고 그냥 '''민중들이 귀족들의 전횡에 맞서 그들의 대표로 내세운 인물에 불과하다는 것이다.'''[25] 따라서 이러한 민중파 인사들을 철저히 제거해 봤자 민중들이 다른 인물들을 대표로 내세우는 것을 막을 수 없는 한 다른 민중파 인사들이 끊임없이 등장할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즉, 술라가 9천명이나 제거해서 얻은 것이라곤 그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여 민중파의 대표들이 나오는 것을 일시적으로 막은 효과 정도에 불과하였고 따라서 로마 공화정을 강화하는 것과는 상관없는 짓이었다.
당시 민중파가 자꾸 위협적으로 성장한 것은 원로원의 전횡이 점차 심각해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원로원이 계속해서 로마의 정책을 그들에게 유리하고 로마 서민들에게는 불리한 것들만 입안시키자 로마 민중들은 이러한 전횡에서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능력있는 정치가들에게 그들의 지지를 집중시킨 것이고 이 때문에 그라쿠스 형제나 마리우스와 같이 원로원에 맞서는 강력한 정치가들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었다. 즉, 강력한 민중파 인사가 등장하는 것의 근본적 원인은 로마 시민들의 원로원에 대한 불만을 키웠던 원로원 의원들 탓이라고 볼 수 있었다.
원로원의 전횡에 좀 더 자세히 다루자면 당시 로마 원로원 의원들을 포함한 귀족들은 대농장을 경영하였고 그로 인해 로마 중산층은 점차 붕괴되어 가고 있던 중이었다. 그로 인해 빈민층이 넘쳐 결국은 중산층으로 제대로 된 군단병을 구성할 수 없게 되자 군단병을 빈민층으로 구성할 수밖에 없었다. 로마 사회가 점점 이 지경이 되었으나 로마 원로원 귀족들은 이러한 것을 방관하였고 로마 시민들이 분통을 터뜨리며 그라쿠스 형제를 비롯한 강력한 호민관들에게 힘을 실어주어 분배를 하기 위한 농지법을 추진하자 이들을 '원로원 최종권고'라면서 마구 죽이는 짓을 저지를 뿐이었다. 마리우스가 등장하여 무산자들인 군단병들에게 퇴직금으로 토지를 지급하겠다고 하자 원로원은 '''절대로 줄 수 없다'''라면서 팽팽하게 맞섰다. 즉, 원로원은 중산층이 붕괴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책없이 로마가 전쟁을 통해 획득한 넓은 영토를 자신들이 멋대로 대농장을 경영하면서 일부를 평민들에게 분배하려는 유력 정치가들을 죽여가며 맞서온 것이었다.
로마 시민들은 이러한 로마 원로원의 전횡에 맞서 능력있는 정치가들에게 강력한 지지를 실어준 것이었고 이것이 바로 '''민중파'''의 실체였다. 근본적인 원인인 평민의 희생과 원로원의 로마의 부의 독점이라는 현상을 전혀 해결하지 않은 채 단지 눈앞에 보이는 민중파 인사를 죽이고 평민들의 정치 참여를 막고는 개혁을 하는 시늉만 냈으니 평민들의 불만은 식을 줄 몰랐다.
또한 술라의 개혁 중 아주 심각한 부분은 군단 사령관들이 자신의 병사들을 멋대로 사병화하는 것을 막을 만한 개혁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공화정 말기에 로마에서는 자꾸 유혈사태가 일어나는데 이것의 가장 큰 요인은 로마 군단의 사병화였다. 이렇게 사병화가 진행된 이유로는 로마 군단병이 무산자들로 구성되면서 그들의 생계가 달린 봉급과 퇴직금 문제를 전적으로 그들의 군단 사령관에게 맡겨야 했기 때문이다. 즉, 로마 군단병과 군 사령관의 관계는 '''용병단과 용병단장''' 비슷한 관계였다.[26]
훗날 아우구스투스는 이러한 문제를 파악하고 군단병 개인에 대한 봉급과 퇴직금을 명확히 규정하였고 사령관이 아닌 정부가 지급하게 함으로써 사병화되는 길을 막는다. 따라서 제정 시대로 돌입하면서 더이상 술라, 마리우스, 카이사르같이 사병화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군해 정부를 뒤엎어 버리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27] 술라의 개혁에선 이렇게 심각한 문제였던 로마 군단병에 대한 처우 문제가 빠졌고 그로 인해 술라가 물러난 뒤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가 사병화된 군단을 거느릴 수 있게 된 것이었다.[28]
이렇듯 술라는 로마 공화정을 강화시키려는 노력을 하긴 하였으나 근본적인 문제엔 전혀 접근하지 못했고 결국 그의 개혁은 사후 모조리 묻혀버리고 만다. 술라가 남긴 것이라곤 이탈리아와 미트리다테스 6세를 진압한 군사적 업적과 원로원와 관료체제를 정비하고 로마 군단병으로 로마를 점령함으로써 훗날 카이사르가 이를 본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정도이다. 그의 개혁이 명분상으로나 결과적으로나 전부 실패했다는 것은 그의 부하이자 위의 내전에서 한몫 단단히 챙겼던 크라수스폼페이우스조차도 후에 민중파를 자처하면서 진짜 민중파였던 카이사르[29]삼두정치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잘 나타난다. 거기에 공화정을 전복할 큰 요소였던 사병화[30]는 점점 가속화되어 원로원은 술라의 바람과는 달리 그 힘을 점점 잃어갔으며, 결국은 이를 바탕으로 한 프린키파투스[31]가 탄생하게 된다.
결국 근본적 문제는 고치지 못하고 로마는 제정의 길로 들어서고 만다.

4. 가족


아내가 총 5명이고 자식도 5명이다.[32]
첫 번째 아내는 일리아이다.[33]
두 번째 아내인 아일리아는 아이가 없었던 것 같다. 세 번째 아내인 클로일리아도 마찬가지.
술라는 기원전 88년에 클로일리아와 이혼하고 최고제사장이었던[34] 메텔루스 달마티쿠스의 딸 카이킬리아 메텔라 달마티카[35]와 결혼한다. 메텔루스 가는 마리우스 전성기 이전부터 위세를 떨치던 보수파 가문으로 그 영향력이 상당했다. 따라서 술라는 메텔루스 가와 정치적 동맹을 맺게 되었다. 메텔라는 마리우스가 대학살을 벌일 때 술라에게서 낳은 파우스투스와 파우스타를 데리고 그리스로 대피했다. 파우스투스는 훗날 탑수스 전투에 참전하여 카이사르에게 패사한다. 파우스투스는 폼페이우스의 딸과 결혼했는데 그 후손들은 제정 초기까지 살아남아 1세기 초에는 집정관을 역임하고 황가와도 친척이 되는 등 명문가로 대접받았다.
술라의 독재관 취임 후에 메텔라 달마티카가 사망하자 술라는 검투 경기 관람 중 한 젊은 여인과 우연히 만나게 된다. 그 여인은 술라의 토가에서 실밥을 뽑아 가져갔는데 술라가 궁금하여 그 이유를 묻자, '당신의 행운을 제가 조금이나마 얻고 싶어서 그랬어요'라고 답했다고. 이 여인은 발레리우스 메살라 니게르의 딸 발레리아로 술라의 마지막 아내이다. 딸 코르넬리아 포스투미아를 낳았고 그녀에 대한 술라 사후의 기록은 잘 남아있지는 않다.
조카인 푸블리우스 술라는 카이사르의 내전 당시 카이사르파에 가담해 디라키움 공방전에 참전했고 파르살루스 전투에서는 카이사르군의 우익을 지휘했다. 푸블리우스는 기원전 65년 집정관에 당선되었으나 뇌물로 인한 선거 부정으로 판결되어 원로원에서 추방되는 등의 굴욕을 겪었고, 카틸리나의 음모의 가담자로 기소되었지만 키케로의 변호로 겨우 살아난 바 있다.

5. 여담


  • 이미지와 비슷하게도 외모가 공포스러웠다. 붉은 빛을 띤 금발에 흰 피부로 푸른 눈을 가졌다. 젊었을 때 상당히 잘생겼다고 한다. 나이가 들면서 피부가 나빠지면서 창백해지고 빨간 여드름이 생겼다. 술라의 적들은 술라의 이런 외모를 보고 두려워했다. 한 예로 술라의 연설 시 누군가가 그를 비판하자, 술라가 연설을 멈추고 그 사람을 가만히 노려보았더니, 비판자는 더이상 아무 말 못 했다.
  • 협상과 압박에 매우 능했기 때문에 보쿠스를 설득해 유구르타를 생포하고 나중에 파르티아에 외교 사절로 파견되었다. 그렇게 사람을 잘 다루었기에 그가 지휘하는 군대의 파업이나 불만 토로는 거의 없었다.[36][37] 적군의 결속력, 충성심, 전투 의지 등의 부재를 노려 적을 분열시켜 싸우지 않고 승리를 거두는 것을 보면 정치력과 술수가 만렙에 달했다.
  • 술라의 장군으로 작은 마리우스를 제거한 퀸투스 오펠라가 술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군중 앞에서 술라를 비난하며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려 하자 즉시 그를 제거했다. 같은 편이라도 위험한 인물이라 판단하면 거리낌 없이 죽이는 술라의 냉정함을 알 수 있다.
  • 라이벌이라 불리는 마리우스와 19살 차이난다. 거의 아버지 뻘이다. 사실 마리우스와 술라의 경쟁구도는 마리우스가 장수했기 때문에 형성된 것이다. 마리우스가 69세의 고령에 군사 지휘권을 두고 50세의 술라와 경쟁했으니...[38]
  • 살생부를 작성하고 독재관에 오른 탓에 당시부터 공포스러운 독재자라는 이미지를 강하게 받았다. 보수주의자라고 칭송하는 경우도 있으나, 그의 행적이나 개혁을 보면 보수주의자라기보다 원로원파와 기사계급만을 위해서 기존의 법과 절차를 무시한 독재자였다는 비판도 받는다.
  • 인생 후반에 최전성기를 누렸다. 50세에서 60세까지가 그의 전성기였는데 이는 평민 출신에 지방 출신이었던 마리우스가 50대에 최전성기를 누린 것과 같다.
  • 막내딸과 나이차가 60세가 넘는다. 술라의 마지막 아내 발레리아가 낳았고 술라 사후에 태어났기 때문이다.
  • 인재를 보는 눈이 뛰어났다. 폼페이우스, 루쿨루스, 크라수스, 메텔루스 피우스 모두 술라가 발굴해낸 인재들이며 술라의 로마 진군과 그 이후에 큰 활약을 하였다. 폼페이우스는 두말할 것도 없고 크라수스는 카이사르, 폼페이우스와 삼두정치를 한 대갑부가 되었으며 루쿨루스는 미트리다테스를 무찌른 명장이 되었다. 또 아직 어린 나이었던 카이사르를 제거하려 하기도 했다.
  • 내전 최종 승리자들 중 마리우스랑 더불어서 유이하게 천수를 다 누리고 죽었다. 암살된 카이사르와 원정에 실패하고 손자들이 요절해 힘든 말년을 보낸 아우구스투스와 달리 술라는 말년을 쿠마이에서 편하게 지냈다. 본인도 자기 인생에 만족하여 행운아를 자칭했고 회고록을 집필했다.[39] 하지만 카이사르와는 다르게 그의 회고록은 현재 그 내용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 점에서는 카이사르보다 운이 없다고 할 수 있겠다.

  • 공화정 말기의 내전 승리자였다는 점에서 카이사르 및 옥타비아누스와도 자주 엮이는데, 술라는 잔혹하고 모순적이었고 최악의 독재자였다.[40] 카이사르나 옥타비아누스와는 다르게 이 사람의 개혁 등이 후대에 크게 영향을 주지 못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일부에서는 술라를 '진정한 보수주의자'니 '공화정 수호' 신념이 있었다는데 이 사람이 한 것들은 보면 매우 거리가 멀다.[41] 그리고 이런 신념이 있었다고 술라의 군사 쿠테타를 옹호하기도 하는데, 이는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넌게 원로원에서 카이사르를 옹호하던 호민관들이 신체불가침 권리를 침해당하고, 거부권 행사를 방해받았기 때문에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과 다를 것이 없다.[42] 실제로는 민회가 군대 지휘권을 마리우스에게 주기로 결정하자, 여기에 빡쳐서 쿠테타를 일으킨 것일 뿐 '공화정 수호'라는 신념과 관계가 멀다. 또한 술라가 안전하게 은퇴한 것은 정적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고 모두 살해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의도야 어쨌든 정적들은 대부분 다 살려줬다. 그리고 살려준 정적들에게 암살당한다. 그리고 그렇게 로마가 공화정으로 돌아갈 마지막 희망은 끝장나고 만다.[43]
  • 동방원정 당시 그리스 신전의 자금을 약탈하려는데 그의 종자들이 어떤 음악 소리를 듣고 아폴론의 경고음이 들린다고 두려워했다. 이에 술라는 그 소리는 아폴론이 자금을 가져가라고 허락한다는 뜻이라며 금을 가져오라고 명령했다. 그들은 하는 수 없이 술라를 따랐다. 그렇게 술라는 군자금을 챙겼다.
  • 아테네에 묻혀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을 발견해 로마로 가져왔다. 현재 우리가 아리스토텔레스의 고전을 읽을 수 있는 것도 술라가 그것을 로마로 가져온 것 덕분에 가능한 것이다.
  • 카이사르의 내전 당시 그리스에 있던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의 카이사르와 대치 중이었는데 이탈리아 진군 문제에 대해 '술라도 했는데 나라고 못 하겠느냐'고 언급했다. 카이사르는 술라의 정치적 능력에 대해 가나다도 모른다는 평가를 내렸다.
  • 폼페이우스가 카르보 일당을 소탕하고 로마로 귀환할때 술라에게 개선식을 요구했다. 술라는 불허했으나 폼페이우스는 자신의 군대가 요구하는 것이라며 군대를 이끌고 로마 근처까지 진군했다. 술라는 "왜 나는 어린이들과 싸워야 하는건가" 라고 말했는데 어린자들은 젊은 마리우스와 폼페이우스를 의미한다. 그러면서 역시 군단을 편성하는데 이에 폼페이우스는 술라에게 반역의 의미는 없다며 술라의 오해를 풀었다. 이후 폼페이우스는 술라와 로마 근처에서 만나 이 문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폼페이우스가 자신을 떠오르는 태양에, 술라를 지는 태양에 비유하자 술라는 그의 대담함에 개선식을 허락해주었다.[44] 다만 폼페이우스에게 아내 안티스티아와 이혼하고 자신의 양딸 아이밀리아 스카우라[45]와 결혼할 것을 요구했다. 폼페이우스는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참고로 언뜻 보면 새로운 영웅과 시대를 제패한 영웅의 미담이지만, 중요한 건 이때 폼페이우스는 공식적으로 관직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고로 군대 지휘권이 없었다. 이게 중요한 이유는 술라가 반란을 일으켜서 로마를 점령한 이유가 민회가 군사 지휘권을 당시 집정관이었던 자신에게 빼앗아서 마리우스에게 줬다는 이유였다. 즉 술라가 보수주의자라는 말에 반박이 되는 에피소드다.
  • 임기응변에 능해 여러 상황에서 위기를 잘 극복했다. 오르코메누스 전투에서 폰투스의 습격으로 로마군이 겁을 먹고 전열의 일부가 붕괴되자 술라는 선봉에 나서서 "로마 시민들이여, 후대에 누가 그대들에게 총사령관을 버린 곳이 어디냐 묻는다면 오르코메누스라고 답하라!"라고 외쳤고 이에 로마군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폰투스의 대군를 격파했다.
  • 스탠리 큐브릭이 감독한 대하 사극 <스파르타쿠스>에서도 잠깐 언급된다. 로마의 권력자가 되고자 하는 크라수스에게 동료가 '군대를 로마로 끌어들이라'라고 권유하자 분개하며 술라의 이름을 잠깐 언급한다.
> 술라? 그 파렴치한??
>
>
> 대대로 저주받을 녀석!

  • 삼국지의 원소와 묘하게 비슷한 느낌이다. 명문가 출신이지만 몰락한 방계이거나 서출이라 주류 가문에서 차별과 무시를 받았고, 잘생긴 외모로 유명한 원소만큼이나 술라 역시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인상이 날카롭고 아름다웠다고 한다. 권모술수와 모략에 능숙했고 병사들에게도 인기가 많았다. 다만 본인의 사망과 함께 삼국지의 판도를 뒤흔든 원소와 달리 술라의 죽음은 제정으로 향해가던 걸 늦추고 있던 로마의 시류를 다시 흐르게 했을 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

6. 둘러보기(계보)


'''로마의 종신독재관'''
(초임)

'''술라 펠릭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1] 이 인물은 카이사르의 내전카이사르를 지지하여 폼페이우스에 맞섰다.[2] 본인에게 붙인 아그노멘(이름에 들어가는 칭호)이다.[3] 술라의 마지막 정적이자 민중파의 우두머리. 이 말은 카르보가 남긴 유일한 것이다.[4] 일설에는 주변의 창녀들이 보태주는 돈으로 학문을 이어갔다고 한다.[5] 정권을 잡은 뒤의 행보도 상당히 차이가 있다. 술라는 정적들을 냉혹하게 살해했지만, 카이사르는 정적들을 사면해주었다. 술라는 2년의 독재관 이후 스스로 물러나서 여생을 보냈지만, 카이사르는 종신독재관직에 올랐다가 살해당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이후 역사에서 이름을 크게 떨치며 본인의 사후에도 카이사르의 정책 노선을 후계자들이 이어받는다. 하지만 술라는 쓰디쓴 평가를 받으며 사후 자신의 개혁 정책들이 본인을 따르던 사람들에게조차도 외면받으며 줄줄이 폐지되는 수모를 맛보게 된다.[6] 술라는 당시 권력의 정점을 찍어 맞설 적수가 거의 없던 최종보스급 존재였다. 실제로 어린 카이사르도 눈 밖에 나서 죽이려고 하다가 여러 사람들의 청원 때문에 마지못해 살려주었다. 당시 술라가 진짜로 죽일 마음을 굳게 먹었다면 카이사르는 그날로 끝장날 하루살이 신세였다. 그 때의 카이사르는 나이도 어리고 경력도 미천해서 영향력이 없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의 청원에 못이겨 살생부에서 카이사르의 이름을 지우면서 '''"저 젊은이의 머릿속에는 마리우스가 백명이나 들어있다."'''라며 경계하는 말을 했는데, 공화정을 위해 노력했던 술라의 업적이 사후 대부분 엎어진 것을 감안하고 보더라도 통찰력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7]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는 누미디아의 왕으로 기록되어 있다.[8] 훗날 카이사르와 맞서는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의 아버지.[9] 남쪽에 있던 술라가 북진하여 마리우스와 협공한 것이다. 사전에 마리우스와 루키우스 카이사르가 술라를 마르시 전장에 보내기로 결정한 듯하다.[10] 술라는 이때 처음으로 군대를 총지휘하게 된다.[11] 그 유명한 도시 폼페이의 시민들이다.[12] 마리우스는 당시 아무런 직책이 없던 상황이었다.[13] 미트리다테스는 친인척 제거는 물론 키오스인의 씨를 말릴 정도로 잔학했다.[14] 술라의 부하 메텔루스 피우스는 술라의 원정 동안 이탈리아에 남아 삼니움의 파피우스 무틸루스를 상대하기 바빴다.[15] 그럼에도 술라가 동방으로 원정간 이유는 원래 본인이 적법한 대 폰투스 사령관임을 보여주면서 외적을 격파하며 마리우스에 대항할 군공을 얻기 위함이었다. 적에게 무자비하기로 유명한 술라가 폰투스를 멸망시키지 않고 조약으로 문제를 매듭지으려 했던 것도 마리우스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 이 덕에 미트리다테스가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16] 피케눔에서 4개 군단을 지휘한던 사령관 폼페이우스 스트라보는 술라파였으나 병으로 죽었다. 지휘관을 잃은 피케눔 출신의 병사들은 와해되었고 이탈리아 출신인 마리우스를 따랐다.[17] 그리스 신전은 로마 종교와 연관되었기 때문에 보통 자금이 부족한 수준으로는 약탈하지 않는다.[18] 마리우스의 지지자로 마리우스의 정권 탈취를 도왔다. 흥미롭게도 이 인물 역시 술라처럼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다. 두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는 이렇게 로마의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맞서게 된다.[19] 이 때문에 옵티마테스 파로 시민에게 인기없던 그가 집정관에 당선될 수 있었다.[20] 이 독재관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직이며 굉장히 교묘하게 설계되어 있다. 기간으로 정해진 임기가 없지만 독재관 취임부터 비상시 종료까지가 독재관의 임기다. 술라는 공화국 재건을 기치로 걸고 비상시 종결에 임기 종료를 설정함으로써 원로원과 보수파에 공화국 복구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알려 그들의 지지를 얻었다. 반면 정해진 임기가 없음을 이용하여 민중파와 민중들에게 독재관이 절대적인 권한을 쥐고 있음을 선전해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이런한 교묘함으로 술라는 자기가 원하는 임기동안 독재관으로서 개혁을 실시하게 된다.[21] 평민회에서 의결된 법안이 법적효력을 갖고 원로원의 승인이 필요하지 않게 정한 법.[22] 카이사르는 이때 고작 10대 청소년이었다. 술라의 명을 거역하면 무조건 죽음이었고 이혼도 많이 봐준 건데 이걸 거절하고 도망친 것에서 이미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23] 이 레피두스는 나중에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와 함께 2차 삼두정치를 펄쳤던 레피두스의 아버지이다. 술라 생전에는 민중파 성향을 감추고 있었으나, 술라 사후에 반란진압을 거부하고 오히려 반란군에 합류해 반기를 들었다 실패하여 사르데냐 섬으로 유배를 당해 그곳에서 죽었다.[24] 이것을 폐지한 정치가들은 다름 아닌 술라 밑에서 한몫 잡은 폼페이우스크라수스였다. 웃기는 점은 이들은 술라의 개혁과 법령을 개무시했는데 정작 카이사르는 술라가 정한 법을 온전히 지켰다는 것이다. 폼페이우스의 경우 원래 명예로운 공직에 나서기 위해서는 나이제한이 있었는데 폼페이우스는 편법과 불법으로 비켜갔지만 카이사르는 법에 따른 나이에 출사했다.[25] 사실상 민중파의 효시는 그라쿠스 형제다. 이들은 포에니 전쟁 이후에나 등장했으므로 술라의 등장 시기와도 크게 차이나지 않는다.[26] 그리고 사실상 이 사병 문제도 결국은 위의 토지 분배 문제에 수렴된다. 부패한 원로원이 토지 분배를 막은 탓에 먹고 살 수 없게 된 병사들이 자신의 사령관에게 생계를 의지하게 된 것이므로.[27] 중앙정부의 수장인 황제가 암살당해서 일시적으로 황제 자리가 공백 상태에 빠지면 각 지역의 군사령관들이 황제의 지위를 노리는 내전에 빠지기는 했다. 대표적으로 베스파시아누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그외 수많은 군인 황제들이 있다. 하지만 이건 로마 제정의 모순점으로 인해 생긴 문제이다.[28] 이는 술라가 별로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인다. 술라는 섬세한 지도자라기보단 무골에 가까운 인물이었다. 이는 그가 자신의 병사에게 토지를 주기 위해 에트루리아 사람들에게서 영토를 몰수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에트루리아는 로마 건국 때부터 더불어 살아온 이웃들로 이때는 완전한 로마 시민이나 다름 없었다. 따라서 이들은 공화정 치하에서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진 시민들이며 따라서 이들에게 영토를 몰수한 것은 정치적 파장을 전혀 고려치 않은 것이었다.[29] 마리우스의 친척이었으며 킨나의 딸과 이혼하면 목숨은 살려주겠다는 술라의 요구를 거절하고 원로원 최종 권고를 수차례 비판하는 등 민중파로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물론 당시 정치적 명분이 여기에 있기도 했지만 반대파 탄압에 혈안이 되있던 술라와 원로원에 정면으로 맞선 것 자체가 꽤나 대범한 행적이다.[30] 마리우스의 군제 개혁으로 인해 군대에는 빈민을 비롯한 민중들이 많은 비중을 가지게 되어서 민중의 의사를 간접적으로 대변하게 된다.[31] 원수정, 실질적으로는 제정이나 아우구스투스는 본인은 어디까지나 특권 있는 로마 1시민인 프린켑스라 강조했다.[32] 재혼을 거듭한 결과다. 로마 사회는 일부일처제이고 이혼이 가능했다. 그리고 이혼하는 걸 그리 나쁘게 보지 않았다.[33] 키베니가 일리아라는 기록은 사료가 오염된 탓이라며 카이사르의 친척인 율리아라는 설을 냈다. 물론 가능은 한 이야기지만, 증거가 전혀 없다. 근거가 되는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애초에 라틴어로 기록된 것이 아니거니와, 그것에 오류가 있었다고 주장할만한 증거도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루키우스 카이사르의 딸이 있었던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콜린 맥캘로우의 명저 마스터스 오브 로마에서는 이 설을 차용해 술라의 첫번째 아내로 카이사르의 고모인 율리아의 동생 율릴라가 등장한다. 물론 율릴라라는 인물 자체는 창작인물.[34] 물론 술라가 결혼한 시기에는 이미 고인이었고 당시에는 무키우스 스카이볼라가 최고제사장이었다.[35] 술라와 결혼 전에 원로원의 일인자 스카우루스의 아내였다. 물론 스카우루스는 술라가 삼니움족과 싸울 때, 카이킬리아와 술라의 결혼 전에 이미 사망했다.[36] 그 카이사르도 폼페이우스와의 내전 중에 길어지는 내전에 지친 휘하 10군단 병사들이 카이사르에 불만을 품어 항명사태를 벌였다.[37] 사실 지쳤다는 것은 핑계에 가깝고 실제로는 봉급 인상을 위해 카이사르를 압박하려던 것이 목적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카이사르가 10군단을 해산하고 로마로 돌려보내겠다고 하자 큰 충격에 빠져 항명을 포기했다.[38] 술라가 내전에서 이긴 건 사실 마리우스보다 오래 살아서 그렇기도 하고, 또 술라가 자신의 최전성기에 이미 늙은 마리우스와 맞붙었던 것도 있다. [39] 이를 맡은 게 루쿨루스다.[40] 술라 개인부터가 사병화된 로마군에 근거한 군벌에 가까웠다. 다시 말해, 술라의 권력 기반 자체가 지극히 반(anti)공화적이었다.[41] 사실 원로원파 자체가 실제 공화정 수호와는 거리가 멀다. 그들이 정말로 지키고 싶었던 건 자기들의 기득권이었고 공화정은 허울좋은 명분이었다.[42] 그나마 이쪽은 최소한 제대로 된 명분은 있다는 차이점은 있고, 원로원이 카이사르의 선택지를 막아버렸기 때문에 살기 위해서라도 쿠데타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것도 있다. [43] 그 카이사르가 정적들을 살려뒀다가 암살당했으니 그 뒤의 어떤 자가 자기 정적들을 남겨둘까 생각해보자. 특히 이후 패권을 획득한 옥타비아누스는 자기 양부가 그렇게 되었으니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44] 공교롭게도 이 말은 훗날 카이사르의 내전 당시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에게 더 잘 어울린다.[45] 마르쿠스 아이밀리우스 스카우루스의 친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