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에니 전쟁
1. 개요
Bellum Punicum미움을 버리지 말라! 너희는 내 주검 앞에 이를
약속하라! 저들과의 평화는 일체 없으리라!
이제든 언제든 아무 때나 무력을 갖출 때에
내 무덤에서 누군가 생겨나 원수를 갚을 것,
백성을 쫓아갈 것이니,[2]해안이 해안에 대립하고, 바다가 바다에 맞서
원컨대 무기에 무기로 당대도 후손도 싸우라!
포에니 전쟁은 기원전 264년에서 기원전 146년 사이에 로마 공화국과 카르타고 공화국이 벌인 세 차례의 전쟁을 말한다. '포에니(poeni, 포이니)'라는 말은 라틴어 Poenicus에서 나왔는데, 이는 '페니키아인의'라는 뜻으로 카르타고가 페니키아에 기원을 두고 있기 때문에 로마인들이 그렇게 부른 것이다. 영어로는 퓨닉 워(Punic War)라고 부른다.
이 전쟁을 통해 로마는 이베리아와 북아프리카의 영토를 얻었고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로써 로마는 더 이상의 경쟁자가 없는 명실상부한 지중해의 최강대국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2. 발단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3세가 죽고 그리스 헬레니즘 세계가 분할을 거듭하는 동안 신생국인 로마는 착실히 내정을 다지며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초창기만 해도 카르타고와의 충돌은 없었다. 오히려 피로스 전쟁 때는 공동의 적을 상대로 일시적인 군사적 동맹 관계에 있기까지 했다. 애초에 로마는 전형적인 대륙국가였던 만큼 세력 영역이 이탈리아 반도 내로 국한되어 있는 한 해상국가인 카르타고와 이해관계가 충돌할 일은 없었다.
그러나 카르타고의 영토였던 시칠리아 섬에서 시라쿠사의 왕 아가토클레스를 받들던 이탈리아인 용병 마메르티니[4] 가 아가토클레스 왕이 죽은 후 그리스의 식민지인 메시나 시를 점령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마메르티니 용병들은 이탈리아 출신의 라틴계 병사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처음에는 근거지 없이 시칠리아 섬을 떠돌아 다니고 있었는데, 어느날 이들은 피로에 지쳐 메시나 시에 그들이 잠시 머물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였다. 메시나 시민들은 이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이들에게 성내에 휴식처를 주고 식량까지 제공해 주었다. 그런데 용병들은 이 도시가 살기 좋은 것을 보고 야밤에 시민들을 기습 공격하는 배은망덕한 짓을 저질렀다. 이들은 메시나 시의 모든 남자들을 죽여버리고, 여자들은 모두 포로로 잡아 각 병사들에게 균등하게 분배했다. 이러한 만행은 시칠리아 섬에 있던 그리스계 시민들의 분노를 사게 되는데 그 이유는 이 학살당한 메시나 시민들이 그리스계였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들 마메르티니인들은 메시나를 거점으로 하여 20년에 걸쳐 주변 도시들을 상대로 해적질과 약탈까지 벌였다. 결국 보다못한 시라쿠사의 왕 히에론 2세가 이들의 만행을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토벌에 나선다. 마메르티니와 그 용병들은 수적 열세인터라 시라쿠사 군대에 쉽게 무너져 내렸는데 그들은 '''같은 라틴인이다'''라는 이유로 로마에 도움을 요청하기로 했다.
이들의 사절을 맞이한 로마 원로원은 이들의 만행을 전해들은 바가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원군 파견에 부정적이었다. 그런데 이들 용병이 카르타고에게도 구원을 요청했다는 말을 듣고선 태도가 180도 바뀌었다. 당시 카르타고는 이미 시칠리아 섬의 절반의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고 만일 메시나의 요청을 받아들여 시라쿠사를 쳐부수는 일이 생긴다면 시칠리아 섬 전체가 카르타고의 영향력에 놓이게 되는 것이었다. 이탈리아를 제압한 로마는 자연스럽게 그 시선이 반도 밖으로 돌리게 되었는데 코 앞에 있는 시칠리아 섬이 강대국 카르타고의 손에 들어간다는 것은 카르타고 해군에게 로마의 영토가 고스란히 노출되는 - 엄청난 안보 위기 상황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원로원은 토의를 거듭했지만 결론을 낼 수가 없었고 결국 이 안건을 민회에 회부하였다. 민회의 로마 시민들도 토의하다가 메시나 측의 요청을 받아들여 참전할 것을 결정했다.
3. 제1차 포에니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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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정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우덱스는 군단병을 이끌고 야밤에 메시나 해협을 건넜다. 시라쿠사는 로마군이 참전했다는 말을 듣고 카르타고와 연합하여 로마군에게 대항하지만 격파당했다. 그 전쟁을 촉진시킨 메시나의 마메르티니인들은 포에니 전쟁이 일어난 이후 역사적 기록에서 잊혀져 버렸는데, 수백 년 후에도 마메르티니 와인의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로마의 세력에 종속된 이후 와인을 특산물로 양조하면서 제국에 편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로마군은 시라쿠사에 승리한 뒤 시라쿠사의 히에로 2세와 강화조약을 맺었다. 로마가 승자의 입장에서 맺은 강화조약이므로 사실상 시라쿠사는 로마의 패권하에 들어간 셈이었다. 카르타고는 이것에 반발하여 대규모 군사를 파병하였고 드디어 시칠리아 전역을 놓고 로마와 카르타고 두 세력이 충돌하게 되었다.
로마군은 수백 년에 걸쳐 라틴족, 에트루리아인, 삼니움족, 그리스계 이탈리아인들과의 수많은 전쟁을 치룬 끝에 이탈리아의 패권을 차지한 군대였다. 게다가 당대 최고의 전술가라는 평가를 받던 피로스마저도 격파할 만큼 로마군은 전쟁경험이나 군제의 우수함에서 카르타고군보다 훨씬 우위에 있었다. 때문에 육지에서 붙은 전투에선 그야말로 연전연승을 거듭했다.
그러나 전쟁은 장기화되었는데 애초에 해상국가였던 카르타고는 우수한 해군력으로 보급 우위를 유지하며 로마군의 움직임을 봉쇄해 나갔다.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해선 결국 제해권을 장악해 카르타고와 시칠리아의 연결로를 끊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은 로마는 역사상 처음으로 해군을 편성하기에 이르렀다.
전쟁 발발 후 로마 해군은 리파리 제도 인근 해상에서 카르타고 해군에게 기습을 당해 17척의 군선을 나포당하고 함대를 이끌던 집정관이 사로잡히는 등 일격을 허용했으나, 이내 태세를 재정비하고 밀레(오늘날의 밀라초) 앞바다에서 양측의 해군이 맞붙게 된다. 뱃머리에 금속철을 씌운 충각을 단 카르타고 군선들이 로마 군선들을 향해 질주했지만, 로마의 해전 전술은 독특했다. 쇠갈고리를 던져 적의 함선을 끌어당긴 후, 배 앞에 설치한, 소위 까마귀(Corvus)라는 이름의 다리를 내려 로마군 병사들이 그 다리를 건너 적선에 진입하여 백병전으로 적 함대를 공격하는 새로운 전술을 고안해낸 것이다. 충각 전술 같은 전통적인 해상전으로는 카르타고를 당할 수 없으니 자신들의 강점을 활용할 수 있는 선상 백병전으로 바꿔 버린 발상의 전환이었다. 로마를 깔보던 카르타고는 그야말로 큰 코를 다친 것이니 이때가 기원전 260년이다. 해전에 익숙하지 않은 로마 해군은 이렇게 까마귀의 덕을 톡톡히 보았으나 나중에는 단점을 인식하고 떼어낸다.[5]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크게 다섯 번의 대해전이 있었다.
- 바로 위에서 말한 기원전 260년의 밀레 해전
- 기원전 256년의 에크노무스 곶(오늘날의 시칠리아 남부 리카타 근처) 해전
- 기원전 255년의 헤르마이움 곶(오늘날의 튀니지 케이프 본 반도) 해전
- 기원전 249년의 드레파나(오늘날의 트라파니) 해전
- 마지막으로 기원전 241년의 아이가테스 제도(오늘날의 에가디 제도) 해전이다.
그리고 이들의 패잔병 일부를 구하러 온 로마의 주력 함대는 헤르마이움 곶에서 공격해온 카르타고 함대를 무찌르는 데 성공했지만 귀국길에 폭풍을 만나 무려 10만에 이르는 사상자를 내는 대참사를 겪게 되는데, 여기서 포에니 전쟁은 잠시 소강상태를 맞았다. 사실 이 참사의 원인 중 한 가지는 앞서 서술했던 까마귀 때문이었는데, 까마귀는 무게중심을 불안정하게 만들어 조금만 강한 측풍이 불면 그대로 배가 기울어져 버리기 십상이었다. 거기다가 이탈리아 반도에 로마 함대가 가까워졌을 때 바다 사정에 무지한 지휘관들이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두려워한 나머지 함대를 무리하게 뭉친 상태에서 해안으로 접근하라는 지시를 선원들에게 내렸다고 한다. 경험 많은 선원들은 이럴 때는 흩어진 다음 해안이 아닌 바다로 나가야 생존률이 높다며 강력히 반대했으나 지휘관들의 강요에 따를 수밖에 없었고 이것이 더욱 엄청난 해난 사고로 이어졌다. '''한마디로 태풍보다 물을 더 무서워하다가 살릴 수 있던 사람들까지 억지로 죽인 게 되었다.'''
카르타고는 행운이 겹치며 엄청난 대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다. 바그라다스 전투의 승리로 아프리카에서 로마군을 축출하긴 했으나 그 여파로 카르타고의 지배력이 약해졌다고 생각한 리비아인이나 누미디아인들이 반란을 일으킬 기미를 보였기 때문이다. 애초에 카르타고는 로마와 달리 내부 결속력이 강하지 못했는데 다양한 민족 간의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었을 뿐 아니라 지배층 역시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 따라서 제해권 장악에 민감한 - 상인세력 출신과 아프리카의 대농장을 기반으로 가지고 있던 - 그렇기에 해외진출에 무관심하던 - 대지주 출신이 사사건건 충돌하는 형세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특유의 노블리스 오블리제 아래 강력한 결속력을 보여준 로마는 시민들의 자원 입대가 이어지면서 금세 무너진 병력과 함대를 재건하고 다시 공세를 취하게 된다.
기원전 254년, 리파리 제도 해전에서 카르타고 함대에 생포되었다가 포로 교환으로 석방된 집정관 스키피오 아시나는 시칠리아 북서부의 파노르무스를 수륙양동으로 공성전을 벌인 끝에 점령하고 도시를 약탈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주변의 시칠리아 도시들은 로마군에게 항복하거나 남서부 항구 도시로 도주하였고 이제 카르타고에 남은 도시는 릴리바이움, 셀리누스, 헤라클레아, 미노아 등 4개 도시였다. 하지만 로마가 재건한 함대가 또 다시 폭풍에 휘말려 300척 중 약 150척의 함대가 침몰하는 대참사가 벌어진다. 해상국가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말과 같이 로마는 대규모 해군을 조성할 자금과 노동력은 충분했으나 숙달된 뱃사람들은 오랜 시간과 훈련이 있어야만 키워낼 수 있었던 것.
로마인들은 안전성의 이유로 해전에서 활약한 까마귀(Corvus)라는 회전식 부교까지 철거하고 50척의 함대를 재건하지만 이미 하스드루발이 이끄는 카르타고군과 130척의 함대는 각각 릴리바이움과 드레파나에 상륙한 뒤였다. 하스드루발은 본국에서 데려온 140마리의 코끼리를 앞세워 로마군에게 함락당한 파노르무스를 탈환하려고 하였고 당시 파노르무스에 주둔한 집정관 메텔루스는 로마군이 140마리나 되는 코끼리 부대가 온다는 소식에 두려워하자 병사들을 성내에 대기시키고 투창병과 경보병만을 성 밖으로 보냈다. 마침내 카르타고군의 코끼리 부대가 나타나자 메텔루스는 코끼리 부대를 집중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투창 세례를 얻어맞은 코끼리들은 통제를 잃고 카르타고군을 짓밟아 혼란에 빠트린다. 메텔루스는 대기하던 로마 군단병을 투입하여 2만의 카르타고군을 죽이고 60마리의 코끼리를 포획하였다. 이때 카르타고군을 지휘했던 하스드루발은 패전의 책임으로 사형당하고 이후 카르타고는 로마군을 육지에서 요격하는 것을 하밀카르가 등장할 때까지 완전히 포기하게 된다.
기원전 251년, 로마는 시칠리아와 아프리카의 해상로를 연결하는 릴리바이움을 공략하기 위해 4개 군단 4만 명의 병력과 130척의 함대를 투입하였으나 시칠리아 서쪽 반도 끝에 위치한 릴리바이움은 얕은 여울과 암초가 많고 서풍을 정면으로 받기 때문에 로마 함대의 항구 봉쇄가 어려워서 로마는 제1차 포에니 전쟁이 끝날 때까지 릴리바이움을 점령하지 못했다.
한편, 드레파나에 주둔하고 있던 카르타고 함대는 로마 함대가 릴리바이움을 봉쇄한 틈을 타 시칠리아 북부와 남부 이탈리아 연안을 약탈하였고 로도스의 한니발(Hannibal the Rhodian)이 이끄는 소규모 기병대가 로마군의 보급로를 습격하는 등 게릴라전을 벌이면서 군량이 바닥난 로마군은 카르타고군에 의해 공성탑까지 모조리 전소되자 기원전 249년의 집정관으로 선출된 푸블리우스 클라우디우스 풀케르는 로마군이 릴리바이움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다시 해전에서 승리하여 제해권을 되찾은 카르타고 함대를 격파해야만 한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로마 함대의 절반이 시칠리아 북동부의 카르타고 도시를 공격하는 작전에 동원된 탓에 풀케르는 130여 척의 함대 규모밖에 가지지 못했고 회전식 부교인 까마귀는 두 번의 폭풍으로 인해 철거된 상태였기에 기동력으로 카르타고 함대를 따라잡을 수 없었던 풀케르는 드레파나의 카르타고 해군을 기습하기로 결정한다.
드레파나는 릴리바이움과 마찬가지로 육지 쪽으로 패인 만 안쪽에 위치하였고 항구와 외해를 잇는 길은 병목처럼 좁은 수로 하나뿐이라 풀케르는 이 점을 노리기로 하였다. 그는 카르타고 정찰대에 포착되지 않도록 어둠을 틈타 릴리바이움에서부터 드레파나까지 출항하였다. 사람의 주의가 가장 느슨해지는 새벽녘 무렵에 카르타고 해군을 기습하려는 의도였지만 카르타고의 경험 많고 뛰어난 해군 제독인 아드헤르발(Adherbal)은 해전에서 잔뼈가 굵은 장수라 이러한 사실을 모두 인지하고 있었다. 동이 트기 전에 로마 함대의 접근을 알게 된 아드헤르발은 드레파나 항구를 비운 뒤 외해로 이동했고 로마군은 그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당황하지만 지휘관인 풀케르가 최후미에서 따라오고 있었기 때문에 그대로 드레파나로 북상한다. 카르타고 함대는 외해로의 전진을 멈추고 즉시 남쪽으로 선회하여 종렬로 북상하는 로마 함대의 측면을 기습했다. 그때까지도 카르타고 함대가 방심한 채 항구에 정박하고 있을거라 생각한 풀케르는 자신이 있는 로마 함대의 최후미까지 카르타고 함대가 내려오고서야 사태를 파악하고 뒤늦게 뱃머리를 카르타고 함대를 향해 돌리라고 하였으나 후미에 있었던 탓에 선두로 나아가던 로마 함대는 명령을 받지 못하고 북상을 계속했다. 결국 해안가로 밀려가던 로마 함대는 차례대로 암초에 충돌하거나 카르타고 함대의 충각 전술에 격침되었고 릴리바이움으로 돌아갈 수 있던 로마 함대는 풀케르의 기함을 비롯한 최후미의 30여 척에 불과했다.
풀케르는 전투 이전에도 경솔한 행동을 했다. 당시 로마군은 전투를 하기 전 닭에게 모이를 먹여서 점을 치는 풍습이 있었다. 그런데 닭이 좀처럼 모이를 먹지 않자, '물이라면 먹겠느냐!'라고 화를 내며 닭들을 바다로 내던졌다. 해전 후 로마 본국으로 소환되었을 때 이 부분도 지적을 받아서 시민들이 크게 분노했고, 풀케르를 무능과 신성모독 혐의로 재판에 넘겼다. 풀케르는 처음엔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12만 아세스라는 무거운 벌금형을 선고받았고, 그 뒤에 곧 사망했다. 한편 풀케르의 누이동생은 나중에 이와 관련된 망언을 해서 마찬가지로 무거운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서커스 경기장에서 나오는 관중들을 보고 "푸블리우스 오빠가 살아있었더라면, 한 번 더 함대를 침몰시켜서 이 쓸모없는 평민들의 수를 확 줄일 수 있었을 텐데."라고 내뱉어버린 것...
기원전 247년, 카르타고에서 시칠리아에 파견된 하밀카르 바르카의 육지에서의 활약으로 카르타고군은 잠시나마 활기를 되찾았다. 로마는 하밀카르가 이전의 카르타고 지휘관들과 달리 만만치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그를 직접 공격하기보다는 해군력으로 고립시키기로 하여 기원전 242년이 되어서야 다시 해군을 재편성하였다. 여기서 전함을 건조하기 위해 로마의 부유한 귀족들은 앞다투어 사재를 털어 정부에게 기부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공화정 로마의 가장 큰 힘이었던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절정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로마는 이 재편성한 해군력으로 카르타고 해군을 아이가테스 제도에서 격파하여 시칠리아의 제해권을 다시 되찾았다. 결국 카르타고 본국은 더이상 견디지 못하고 로마군과 강화를 맺기로 결정하여 1차 포에니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마무리되었다.
카르타고는 이 강화조약에서 시칠리아 섬의 권리를 완전히 포기하였고 로마에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했다. 그리고 기원전 238년에는 조약에서 언급한 적 없던 사르데냐 섬과 코르시카 섬을 잇달아 빼앗겼다. 카르타고가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느라 자국에서 고용한 용병에게 돈을 제때 주지 못하자 이들이 이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는데 문제는 반란을 사르데냐에서 일으킨 것. 본래 조약에서는 사르데냐는 중립으로 하되 카르타고가 이곳에 올 수는 없게 해놨는데 이걸 안 용병들이 사르데냐로 가서 반란을 일으켜 카르타고를 공격했다가 불리해지자 사르데냐로 철수한 것이었고, 이에 카르타고가 사르데냐로 건너가 반란을 진압하려다가 로마에게 걸려버린 것이었다. 결국 로마에게 사르데냐를 잃은 건 물론이요 배상금까지 추가로 내놔야 했다.
한 때 지중해 최강의 해군국이었으며 로마보다 더 오래된 역사와 선진문명을 자랑하던 카르타고였으나 전쟁에 패배하면서 로마에게 제해권을 빼앗기는 굴욕을 당하고 북아프리카에 고립되어 버렸다. 로마의 기세는 무서웠고 결국 양국의 국력 격차는 계속 벌어지는 것 같았으나...
4. 제2차 포에니 전쟁
자세한 것은 해당문서 참고. 여기에는 간단히 서술한다.
1차 전쟁이 끝난 뒤 정치력 영향력을 많이 잃은 하밀카르 바르카는 자원하여 에스파냐에 진출한다. 해외 식민지를 개척하던 그는 이주 8년째에 원주민과의 전투에서 전사하니 그 뒤를 사위인 하스드루발이 이어받아 7년간 통치하였다. 이 시기 로마는 카르타고의 에스파냐 진출을 경계하여 하스드루발과 접촉하여 에브로 강을 경계로 더이상 세력을 뻗지 않도록 강요하는 조약을 맺었다.
그 후 하스드루발이 암살당하자 그의 뒤를 하밀카르 바르카의 장남인 27세의 한니발 바르카가 이어받았다. 이 시기 로마는 사군툼이라는 명목상 동맹국(사실상 속국) 도시를 내세워 에브로 강 서쪽으로 진출하여 카르타고를 압박했고, 결국 한니발은 집권 2년에 사군툼에서 카르타고계 시민 및 친 카르타고계 인사들이 살해당한 사건을 명분으로 삼아 사군툼을 포위했다. 이때 로마는 사군툼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였으나, 북이탈리아에서 갈리아족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있던 중이라 당장 군단을 파병할 여력이 되지 않았고 대신 한니발에게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이 사절들은 한니발로부터 철수하겠다는 대답을 받지 못했다. 이에 로마 사절들은 직접 카르타고 본국으로 가서 한니발을 사군툼에서 철수시키든지 아니면 로마와 전쟁을 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엄포를 놓았다. 카르타고 원로원 의원들은 전쟁을 하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라고 대답했고 이에 로마는 카르타고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한니발은 로마가 선전포고를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군툼을 점령한 다음 그곳 주민 모두를 노예로 팔아버렸다.
로마 원로원은 집정관이었던 푸블리우스 스키피오(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아버지)에게 군사를 주어 스페인 원정을 결정했지만, 한니발은 스페인에서 앉아서 기다리기는커녕 군대를 편성하여 북상했고, 이에 로마군은 한니발 군대에 맞서기 위해 당시 이탈리아로 들어가는 유일한 통로인 마살리아(현재 마르세유)에 주둔하여 한니발을 기다렸다. 그러나 한니발은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서 이탈리아로 진입한다는, 당시 사람들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진군을 감행했다. 역사상 최초로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은 한니발은 로마군의 허를 완전히 찌르는 데 성공했으며 이에 놀란 로마는 마살리아의 스키피오와 또 다른 집정관이자 시칠리아에 주둔 중이던 셈프로니우스를 급하게 소환해 한니발의 저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한니발은 이탈리아 북부 트레비아 강 부근에서 로마 추격군을 일방적 학살에 가까울 정도로 대파해버렸다. 덕분에 한니발은 로마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눈치만 보고 있던 북부 갈리아 부족을 새로운 지원세력으로 만들어 이들을 용병으로 받아들이며 군사력을 보충할 수 있게 된다(트레비아 전투).
로마는 플라미니우스와 세르빌리우스를 새로운 집정관으로 임명하여 군단을 내어주고 이들은 각각의 군단을 이끌고 한니발이 남하할 서쪽과 동쪽의 가도를 봉쇄했다. 한니발은 이 두 가도 중 하나를 골라 남하하는 대신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그 사이의 가운데 늪지대를 통과하기로 결정했고 3박 4일간 휴식도 수면도 없는 초강행군을 벌여 이 늪지대를 로마군이 눈치채기 전에 통과하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많은 (북부 이탈리아에서 합류한) 갈리아군과 대부분의 전투 코끼리들을 잃고 한니발 자신도 한쪽 눈이 완전히 실명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강행군의 결과로 카르타고군은 이탈리아 중부 지역에 아무런 피해없이 진입해 지리적 이점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렇다 할 방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이탈리아 중부 지역을 한니발군은 거리낌없이 약탈을 벌이고 농지를 불태우면서 돌아다녔다. 로마 평민층의 지지를 얻던 플라미니우스는 지지층의 호소에 응답하기 위해 한니발군을 빠르게 전멸시켜야 한다는 초조함을 느끼게 되었다. 한니발은 이러한 심리를 역 이용해 트라시메노 호수에 기지를 세워 주둔한 척한 뒤 추격해온 플라미니우스의 군단을 매복작전으로 궤멸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플라미니우스도 전사하였다(트라시메노 호수의 전투).
이 승전 덕분에 한니발군은 남부 이탈리아까지 방해물 없이 진격할 수 있었고, 로마 원로원은 지구전법론자인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독재관으로 임명하여 그에게 군단을 맡겼지만 로마 시민들은 그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집정관 선거에서 적극론자인 바로를 선출하였다. 새로운 집정관인 바로와 파울루스는 무려 8만 6천에 달하는 로마 군단을 조직했다. 한편 한니발은 그동안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이탈리아 남부로 남하하여 로마군의 군량 보관소가 있는 칸나이에 진입하였다. 이에 두 집정관은 대군을 이끌고 칸나이에서 한니발과 대규모 회전을 벌였다. 칸나에 전투에서 한니발은 전사에 남을 기발한 기병, 보병의 유기적인 조합으로 로마군을 포위하여 그들을 섬멸해버렸는데 이 전투는 오늘날까지도 역사상 가장 완벽한 포위섬멸전으로 평가된다. 망치와 모루 전술을 설명하는 교범에는 백이면 백 칸나이 전투를 예시로 들 정도다. 이 싸움에서 한니발의 병력은 5만 남짓으로 로마군보다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2배에 가까운 적군을 오히려 거꾸로 포위하는데 성공했다. 전투 결과 약 5만명 사망, 2만명이 포로라 잡힌 로마군과 달리 한니발의 피해는 사상자 5천명 남짓에 불과한 일방적인 대승리였다.
칸나에 전투의 여파는 엄청나서 눈치를 보고 있던 마케도니아 왕국이 한니발과 동맹을 맺었고, 남부 이탈리아의 로마의 동맹시들도 한니발 편에 붙기 시작했으며, 시칠리아의 시라쿠사도 로마와 동맹을 끊고 카르타고에 붙었다. 칸나이 전투 참조.
칸나이 전투 이후 한니발이 군사적 천재이며 그를 상대로 대규모 회전으로 승리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뼈저리게 느낀 로마는 더 이상 한니발과 정면으로 회전을 벌이는 것은 포기하고 파비우스가 주장한 대로 지구전법, 즉 게릴라 전법 + 초토화 전법을 쓰기로 결정하였다. 다시 말해 당시 지중해의 초강대국이며 상비군만도 10만 - 잠재적 가용병력까지 포함하면 수십만에 달하던 로마가 - 외지에서 보급도 안되고 병력 충원도 어려운 3만의 한니발 군대를 맞서려고 자기 땅을 불태우고 파괴하는 청야전술을 썼다는 것이다...
그 후 10년간 로마와 한니발은 전면대결 없이 지루한 소모전을 계속했다. 한니발은 온갖 계책을 써서 로마군을 전장으로 끌어 들이려 들었고 성공할 때마다 전투의 승자는 한니발이었다. 하지만 한니발이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 본국으로부터의 보급이 절실했고 다른 카르타고 지휘관들이 하나같이 무능했기 때문에 한니발 외의 카르타고 군대는 연전연패한다. 여기에 카르타고 본국도 계속해서 터지는 반란과 히스파니아 원조 때문에 한니발에게 제대로 보급을 해줄 수 없었다. 게다가 로마 해군 또한 결사적으로 카르타고의 보급선을 저지하면서 한니발을 말려 죽이려 들었다. 반면 로마군은 본토에서 싸우기 때문에 계속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으며 1차 전쟁 때에 마찬가지로 모든 시민들이 일치 단결해 한니발에 맞서는 무서운 결속력을 보여주었다.
한니발이 노렸던 로마 동맹체제의 붕괴는 결국 실패했는데 이것은 그의 예상보다도 로마 동맹체제가 훨씬 견고했던 것과 한니발 외에는 사실상 적수가 없었던 강력한 로마군이 동맹을 유지한 도시를 지지하고 이반한 도시는 공격하여 다시 로마 세력권에 편입시켰기 때문이었다.[6] 결국 한니발 군대는 겨우 얻은 이탈리아 내 지지세력도 거의 잃고 이탈리아 장화 발부리 끝으로 몰렸다. 한니발의 동생인 하스드루발이 한니발과 합류하기 위해 지원병력 3만을 이끌고 스페인에서 북이탈리아로 진입하며 갈리아 부족들의 지원군까지 포함하여 5만으로 전력을 강화하고 한니발을 향해 남하했지만, 먼저 기다리고 있던 리비우스와 네로의 3만 7천의 로마군에 의해 메타우루스 전투에서 전멸당하고 그 자신도 전사하였다. 이로써 한니발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찾아온 대규모 보급의 기회는 영영 사라지고 말았다. 만일 이때 하스드루발이 성공적으로 합류했다면 전쟁이 어떻게 흘러갔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애석하게도 하스드루발의 군재는 형의 발가락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렇게 한니발이 고립되고 전세가 호전되자 로마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는 집정관으로 선출된 뒤, 아프리카로 건너가 카르타고 본국과 그 동맹국을 공격했다. 로마군은 연전연승하여 결국 누미디아 왕국[7] 까지 수중에 넣었다. 궁지에 몰린 카르타고 본국은 한니발에게 귀국 요청을 보냈고 한니발은 피눈물을 흘리며 이 요청을 받아들여 이탈리아를 떠나 카르타고로 귀국하였다. 한니발은 자마 전투 직전 스키피오를 만나 화친을 제의했으나 거부당했고 결국은 스키피오와 대결하게 되는데 여기서 패배하고 결국 2차 포에니 전쟁은 카르타고의 패배로 막을 내렸다. 자마 전투 참조.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는 에스파냐를 얻었고 카르타고를 사실상 반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기원전 168년에는 마케도니아와 그리스 역시 영향력 아래에 두었다. 한니발에게 당한 충격이 너무나도 엄청났던 로마는 제2의 한니발이 나올 것을 두려워해 카르타고를 철저히 탄압했다.
5. 제3차 포에니 전쟁
문서 참고.
6. 그 후
포에니 전쟁은 고대 지중해 세계가 그때까지 경험해 본 적 없는 엄청난 대전쟁이었다. 장장 100년 동안 도합 100만에 가까운 병력을 투입해 지중해 세계 전역을 무대로 벌인 가히 고대판 세계대전이었다. 갈리아족, 이베리아족, 누미디아, 시칠리아와 지중해의 해적들 그리고 마케도니아 같은 기존의 강대국들도 참전하면서 고대 지중해 세계의 질서를 아예 다시 써버린 전쟁이다. 알렉산더의 동방원정이나 키루스 대제의 페르시아 제국 건설도 큰 전쟁이었지만 그렇게 오랜 기간 동안 계속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시대에 포에니 전쟁보다 더 큰 전장은 중국에서 전국칠웅이 벌이고 있던 전국시대가 유일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포에니 전쟁의 결과, 로마는 지중해의 최강자가 되었다. 주요 섬들이 모두 로마의 수중에 떨어졌고 전쟁을 거치며 건설한 거대한 해군력으로 지중해의 제해권을 장악하게 된다. 육군력 역시 희대의 명장 한니발을 상대하면서 그의 전략 전술을 벤치마킹 한 결과 전쟁 전에도 이미 지중해에서 가장 강하고 잘 조직된 군대로 평가되었던 로마의 육군은 경쟁국가들의 군대와 비교도 안될 만큼 엄청난 전투력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 로마가 헬레니즘 국가들과 벌이는 전쟁을 보면 2~3배[8] 의 적을 너무나도 쉽게 압살해 버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부작용도 없지 않았는데 때를 같이하여 여러 정치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수십년에 걸친 고통스러운 전쟁으로 인해 자기 농장을 경영하던 시민권자들이 대부분 몰락하면서[9] 경영불량 상태가 된 평민들의 농지는 대지주들에게 넘어갔고, 새로 얻은 비옥한 해외 식민지에서 싼값의 농산물들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들어오면서 로마의 자영농들은 경제적으로 몰락하게 된다.[10] 이후 로마는 이러한 빈부격차를 어떻게 해소할 것이냐를 놓고 엄청난 부를 획득하며 부상한 대지주 귀족계급과 몰락한 빈농들을 대변하는 포퓰리스트들 간의 숙청과 정쟁으로 얼룩지게 된다. 이러한 혼란을 잠재우기 위해 로마인들이 선택한 것이 공화정의 해체와 제정의 성립이었다는 점에서, 결국 포에니 전쟁은 로마 공화정 몰락의 원인으로 보기도 한다.[11]
반면 카르타고는 아예 멸망당했다. 로마는 최소한 제정이 자리잡기 전까지는 패배한 상대국을 정복하기보다 동맹이라는 형태로 자신들의 세력권에 편입시키는 것을 선호하였다. 이것이 피지배층의 반감을 덜 사는 훨씬 효율적인 통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그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이 안겨준 엄청난 충격과 고통 때문에 로마는 카르타고에겐 이전에 한번도 보여준 적이 없는 모습을 보여준다. 제2차 포에니 전쟁 종료 후에도 그야말로 카르타고를 멸망시킬 명분만 노리다가 끝내 완전히 멸망시켰으며 도시도 폐허가 되었다. 로마가 패전국에게 이렇게 가혹하게 대한 경우는 카르타고를 제외하면 수차례에 걸쳐 끊임없이 반란을 일으킨 유대 왕국 정도 뿐이었다. 결국 한니발 자신은 그 엄청난 능력으로 로마의 최대적수로서 이름을 남기게 되었으나 역으로 자신이 로마에 남긴 충격 때문에 자국의 멸망에 일조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실제로 100년간에 걸쳐 3번의 전쟁을 겪었고 마지막 3차 전쟁도 차포 다 뗀 상황에서 3년이나 로마 정예군의 맹공을 버텨냈던지라 카르타고에 대한 로마의 증오는 대단했다. 3년간의 공성전으로 폐허가 다 된 카르타고를 다시 한 번 건물 한 칸 남기지 않고 철저하게 부숴버렸고 남아있는 카르타고 시민들에 대해선 작정하고 죽이고 강간하고 약탈한 다음 살아남은 5만명은 모조리 노예로 팔아버렸다.
수백 년간 강대국으로 번영한 도시인 만큼 카르타고는 지리적 이점이 많은 도시였음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가 복구되기까지는 아우구스투스 시절에 이르기까지 100년이 넘는 세월이 필요했다(율리우스 카이사르 때 복구 계획이 세워졌지만 카이사르가 암살당하면서 미뤄졌다). 그만한 요충지를 100년간 황무지로 내버려둘 만큼 로마인들의 카르타고에 대한 공포와 증오는 대단했다.
7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번영을 누렸고 로마와 100년에 걸친 대전쟁을 벌인 강대국이었던 만큼 로마인들도 카르타고의 멸망에 대한 감회가 남달랐던 듯하다. 특히 직접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小스키피오가 남긴 술회가 유명하다. 스키피오와 함께 3차 포에니 전쟁에 참가했으며 후일 '포에니 전쟁史'를 저술한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스키피오가 불타는 카르타고 시를 바라보며 비애감에 젖어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의 한 구절을 읊으며 '후일 언젠가 로마도 이처럼 멸망할 것이다’라고 말하곤 눈물을 흘렸다.[12]
스키피오는 전쟁 이후 맞닥뜨릴 로마의 변화를 진지하게 걱정했다기 보다는 아마도 '그 강대한 카르타고도 이렇게 되었으니 로마 역시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란 단순한 감상을 나타낸 것으로 보이지만, 이 발언은 결과적으로는 약간 사실이 되었다. 물론 로마 자체는 공화정이 무너진 뒤에도 짧게는 400여년(서로마), 길게는 1400년 이상(동로마) 존속했다. 하지만 위에서 나왔듯이 포에니 전쟁의 결과로 양극화가 심해지면서 로마의 정치는 큰 혼란에 빠졌고, 결국 로마 공화정이 무너지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다. 즉 의도치 않게도 스키피오는 당시 로마의 국체인 공화정 로마의 멸망을 경고한 셈이 되었다.
곁들여서 이 당시 스키피오의 군영에는 후일 유명해지는 그라쿠스 형제의 형인 티베리우스 그라쿠스가 참전했었다.
제3차 포에니 전쟁은 공식적으로 1985년 1월에 끝났다고도 할 수 있다. 이날 이탈리아의 로마 시장 유고 베텔레와 튀니지의 튀니스(현재의 카르타고) 시장 체드리 쿠리빈과 만나서 전쟁 종결에 서명했기 때문. 이렇게 양측이 공식적인 종전협정을 맺음으로써, 인류역사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전쟁이 끝났다. 무려 '''2131년''' 만이다.
이 종전 선언의 명분은 카르타고가 항복했지만, 그 이후로도 공식적으로 종전선언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탈리아-튀니지의 관계 개선을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에 가까운 상징적인 협정이다. 어차피 현대 이탈리아나 현대 튀니지가 역사적으로 봤을 때는 포에니 전쟁의 직접 당사자도 아니었고, 고대에는 이런 식의 종전, 강화 협정을 맺는다는 개념도 없었던 만큼 어디까지나 이벤트성 행사에 불과하다.
그리고 설령 포에니 전쟁 참전국의 현대 후계 국가들이 종전협정을 맺는다면 시장들이 체결할 게 아니라 실제로 외교권이 있는 이탈리아와 튀니지 정부 사이에 체결하는 게 옳을 것이다
[1] Dardania, 트로이가 위치하고 있던, 아나톨리아 북서쪽에 위치한 반도의 명칭. 다른 이름으로 트로아다(Τρωάδα)라고도 한다.[2] 로마는 트로이 전쟁에서 아이네이아스가 함락된 트로이를 탈출해 이탈리아로 건너와 로마의 전신 격인 라비니움을 건설한 신화를 들어 아이네이아스와 트로이의 후예를 자처했다.[3]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 제4권 622-629행, 김남우 번역[4] 마메르티니(Mamertini)는 마메르스(Mamers)의 아들들이란 뜻으로, 마메르스는 남부 이탈리아의 라틴족들이 군신 마르스를 부르던 이름이다. 끝이 i로 끝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복수형 명사이나. 이 용병대 전체를 싸잡아 마메르티니라고도 하기에 본 문서에서는 그냥 마메르티니인이라고만 서술한다.[5] 까마귀가 장착된 선수 부분에 지나치게 무게중심이 쏠려 조금만 거센 풍랑을 만나도 배가 전복될 위험이 컸다.[6] 이 시기에 로마와 동맹을 유지한 도시와 배신한 도시의 이유는 제각각으로 복잡하기 때문에 일괄적인 서술이 어렵다. 다만 칸나이의 대패를 보고도 대다수의 동맹시가 로마를 배신하지 않고 의리를 지킨 것은 사실이다. 심지어 자신들의 영토 내에서 칸나이 전투가 일어난 동맹시조차도 그 이후로도 동맹을 유지하며 이후 인접 지역의 방파제 역할을 했고 한니발에게 넘어간 도시도 도시 내 친로마파가 다시 로마군을 끌어들여 로마 체제로 복귀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전쟁 종료 후, 로마 원로원은 배신한 동맹시에 대해서 영토를 박탈하는 등의 엄중한 처벌을 집행했다.[7] 한니발 군대의 핵심인 기병의 대부분이 갈리아의 용병들과 누미디아의 기병들이었다.[8] 비록 기록의 신빙성에 논란이 있긴 하지만 때로는 10배.[9] 후반에는 무너지지만 로마제국의 경우 시민권자만 군인이 될 수 있었다.[10] 그리고 이들은 로마 내전기동안 유력 정치가의 사병이 되어 그들의 주인을 위해 싸웠다.[11] 아이러니하게도 대귀족들은 공화정을 지키려고 했고 반대로 몰락한 빈농들은 그들의 편이 되어준 그라쿠스 형제나 마리우스, 카이사르, 아우구스투스를 응원했고 결국은 제정이 세워지게 되었다.[12] 로마 전쟁영웅사(아드리안 골드워디 저, 강유리 옮김, 말글빛냄) p.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