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Lucius Licinius Lucullus, 기원전 118년경 - 기원전 56년)
로마 공화정의 유능한 군인이자 당대의 미식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옵티마테스 일원의 귀족으로 술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군인이다. 그는 20여년에 걸쳐 계속 군사활동을 하였으며 그 노력의 결과 동방의 상당한 영토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그는 굉장한 군사적 재능을 보였고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키지쿠스 공방전, 티그라노케르타 전투 등이었다. 그의 지휘 능력에 당대 역사가들은 상당한 관심을 보였으며, 그의 전투능력에 대해 높이 평가하였다. 그의 라이벌인 폼페이우스는 그를 가리켜 "토가를 입은 크세르크세스 대왕"이라고 농담삼아 부른 바 있었다.
루쿨루스는 명문 리키니우스 일족의 자제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였고 법무관이었던 아버지도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였다.
그의 어머니는 카이킬리아 메텔라로 당대 유명했던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문의 일족이었다. 특히 그 가문의 영향력은 루쿨루스가 태어났을때 가장 정점을 찍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칼부스였는데 그는 집정관과 감찰관을 역임한 거물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큰 오빠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1] 는 집정관과 감찰관을 역임하였으며 그녀의 작은 오빠인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달마티쿠스는 집정관과 최고 제사장을 역임하였다.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는 술라의 장인이기도 하였다.
이토록 당대 최고 명문출신인 그는 최초의 경력인 군사 호민관을 술라의 군대에서 시작하였다. 이때 동맹시 전쟁을 치루는 상황에서 그는 캄파니아 지방에서 주로 활약하였으며(기원전 90-89) 이때 군인으로써 뛰어난 재능과 지적 능력을 두드러지게 보이게 된다.[2]
기원전 88년, 그는 재무관으로 선출되었는데 그 해에 술라가 집정관이 된다. 그해 술라는 로마 진군이라는 사상 초유의 일을 감행하는데, 이때 지휘관 중 한 명 빼곤 모두 불복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 동안 루쿨루스와 술라의 관계를 본다면 이 지휘관이 바로 루쿨루스가 아닌가라고 학자들은 추측한다.
그 뒤 술라가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수행키로 결정하자 루쿨루스는 재무관의 신분을 뛰어넘는 권한을 술라로부터 받는다. 아마도 루쿨루스만이 로마 진군 때 술라를 따랐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술라는 갓 30세에 접어들고 군사경력이 2년 정도에 지나지 않은 루쿨루스에게 자신의 군대를 맡겨 그리스로 우선 보냈다. 그 뒤 그리스에 도착한 술라는 아테네를 포위공격하여 승리한 뒤 해군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루쿨루스에게 해군편성이라는 중임을 맡긴다. 루쿨루스는 로마의 동맹국들을 잇따라 방문하면서 전함을 받아내었고 크레타 섬에서는 많은 도시들을 방문해 로마의 편에 서도록 설득하였다. 그가 방문한 키레네는 7년에 걸친 내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루쿨루스는 로마를 대표하여 이들을 중재하기도 하였다.[3] 그 뒤 3년간의 노력끝에 마침내 해군을 편성하는데 성공한 그는 기원전 86년 폰투스의 해군과 결전을 벌여 승리해 제해권을 장악하고 술라군이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건너는 것을 도왔다. 곧 미트리다테스와 술라의 평화협정이 맺어지자 루쿨루스는 그대로 아시아에 남아 술라가 그 지역에 물린 막대한 벌금을 거두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루쿨루스는 그 벌금을 될 수 있으면 적게 거두려고 애썼다고 한다.[4]
술라가 권력을 잡자 루쿨루스는 귀국해 기원전 79년에 안찰관, 이듬해인 기원전 78년엔 법무관으로 선출되어 쿠르수스 호노룸의 단계를 착착 밟아나갔다. 법무관이었을 때 아프리카 총독을 지냈는데 그 지역에서 엄정한 법 집행을 하였다고 한다.
루쿨루스가 법무관에 당선된 뒤 집정관에 선출되는 기간인 5년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없는데, 이때 로마는 술라가 죽고 집정관 레피두스가 반란을 일으키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루쿨루스는 아프리카 통치에 전념했던지 별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위의 상황을 폼페이우스가 맡아서 안정시킨다. 루쿨루스는 기원전 75년에 임기를 마치고 귀국해 결혼하였는데, 이때 술라가 자신의 후사를 루쿨루스에게 부탁했으므로 술라의 일가를 보호하게 된다.
기원전 74년에는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때마침 터진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으로 원래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로 예정되었던 총독 임지를 바꾸어 킬리키아로 파견되었다. 그는 총독 부임 즉시 적에게 포위되어있던 전임 총독 아우렐리우스 코타를 구원하였고 대승을 거둔다. 그 뒤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 도시들에서 함대를 징발하여 적군의 해군을 토벌하였다. 그 다음 내륙으로 진군하여 미트리다테스를 폰투스로 몰아내었다. 처음에 루쿨루스는 폰투스의 강력한 기병때문에 소극적으로 전술을 폈으나 몇번에 걸친 작은 전투들에서 승리하자 자신감을 얻었고 마침내 카비라 전투에서 미트리다테스를 몰아낼 수 있었다. 루쿨루스는 폰투스를 완전히 괴멸시키는 대신 소아시아 속주의 개혁과 안정을 꾀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지나친 욕심을 부려 원성을 샀다.[5]
이후 그는 미트리다테스의 사위이자 동맹자인 아르메니아 왕국의 티그라네스 2세를 공격했다. 기원전 69년에는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티그라노케르타를 함락시켰다. 그는 엄청난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계속 미트리다테스와 티그라네스를 공격하였고 기원전 68년 아르탁사타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곧이어 일어난 휘하부대의 참전거부[6] 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곤란을 겪었다. 그 사이 미트리다테스는 조금씩 영토를 회복했고 루쿨루스는 로마에서 자신의 지휘권을 폼페이우스에게 넘길 것을 요구받아 기원전 66년 폼페이우스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으며 로마로 돌아와 개선식을 치루었다.
그의 이름에서 유래된 lucullan는 '사치스러운'이라는 뜻으로, 그 뜻대로 루쿨루스는 당대의 미식가였다. 전선에선 사치는 커녕 일반 병사들과 같은 밥 먹고 같이 잠자리에 들어가는 용장이지만 전선에서 은퇴하고 로마로 돌아오고 정치에서도 손을 뗀 이후에는 격이 높은 사치를 추구하였다. 거의 매일 명사들을 초청하여 성대한 연회와 사치스러운 음식을 즐겼는데, 한번은 연회가 없어서 루쿨루스 혼자 식사를 하게 되었다. 하인이 간소한 음식을 준비하자 루쿨루스는 '루쿨루스가 루쿨루스를 위한 연회를 여는 날'이라며 하인을 크게 질책하였다고 한다.
후대의 문학 작품에서도 '루쿨루스의 연회'가 비유로 쓰이기도 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는 전쟁 말기에 기분전환을 하고자 모처럼 닭을 잡아 연회를 베푸는데, 여기에 레트 버틀러가 밀수해온 봉봉과 최고급 시가를 내놓자 사람들이 이를 루쿨루스의 연회에 비기는 대목이 있다. 실제로는 말라빠진 닭 한 마리를 조금씩 나눠먹는 수준이었지만.
삼총사에서도 포르토스가 작업을 걸던 부인의 수전노 남편이 형편없는 식사를 대접하면서도 '루쿨루스가 루쿨루스를 위한 연회에 참석했다'고 호들갑을 떠는 대목이 나온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도 백작이 집사 베르투치오에게 파티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이 말이 나오는데, 집사가 "주인님, 어떤 사람이 몇 명 참석하는지를 제가 알아야 준비하기 편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묻자 "거 뭘 그리 따지나? 그냥 '루쿨루스가 루쿨루스를 위한 연회를 연다' 정도로 알고 준비하게"라고 말하고, 여기서는 삼총사와는 정반대로 엄청난 호화 연회를 연다. 아무래도 작가인 알렉상드르 뒤마가 좋아한 일화인 듯.[7]
아내와 이혼하고 정치계의 미련이 없어 전략적 재혼을 하지않고 독신으로 살게된 루쿨루스는 미식가로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가끔 원로원에서 카이사르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명하기도 했지만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삼두정치가 루카에서 회담을 가진 기원전 56년 즈음에 루쿨루스는 자택에서 병으로 사망한다. 동생인 바로 루쿨루스[8] 는 형의 죽음을 슬퍼하였고 얼마 뒤 형을 따라 죽음을 맞이한다.
1. 개요
로마 공화정의 유능한 군인이자 당대의 미식가.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는 옵티마테스 일원의 귀족으로 술라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군인이다. 그는 20여년에 걸쳐 계속 군사활동을 하였으며 그 노력의 결과 동방의 상당한 영토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때 그는 굉장한 군사적 재능을 보였고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키지쿠스 공방전, 티그라노케르타 전투 등이었다. 그의 지휘 능력에 당대 역사가들은 상당한 관심을 보였으며, 그의 전투능력에 대해 높이 평가하였다. 그의 라이벌인 폼페이우스는 그를 가리켜 "토가를 입은 크세르크세스 대왕"이라고 농담삼아 부른 바 있었다.
2. 생애 초기
루쿨루스는 명문 리키니우스 일족의 자제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집정관을 역임한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였고 법무관이었던 아버지도 루키우스 리키니우스 루쿨루스였다.
그의 어머니는 카이킬리아 메텔라로 당대 유명했던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문의 일족이었다. 특히 그 가문의 영향력은 루쿨루스가 태어났을때 가장 정점을 찍었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칼부스였는데 그는 집정관과 감찰관을 역임한 거물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큰 오빠인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누미디쿠스[1] 는 집정관과 감찰관을 역임하였으며 그녀의 작은 오빠인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달마티쿠스는 집정관과 최고 제사장을 역임하였다. 루키우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는 술라의 장인이기도 하였다.
3. 명예로운 경력
이토록 당대 최고 명문출신인 그는 최초의 경력인 군사 호민관을 술라의 군대에서 시작하였다. 이때 동맹시 전쟁을 치루는 상황에서 그는 캄파니아 지방에서 주로 활약하였으며(기원전 90-89) 이때 군인으로써 뛰어난 재능과 지적 능력을 두드러지게 보이게 된다.[2]
기원전 88년, 그는 재무관으로 선출되었는데 그 해에 술라가 집정관이 된다. 그해 술라는 로마 진군이라는 사상 초유의 일을 감행하는데, 이때 지휘관 중 한 명 빼곤 모두 불복한다는 기록이 있다. 그 동안 루쿨루스와 술라의 관계를 본다면 이 지휘관이 바로 루쿨루스가 아닌가라고 학자들은 추측한다.
그 뒤 술라가 미트리다테스 전쟁을 수행키로 결정하자 루쿨루스는 재무관의 신분을 뛰어넘는 권한을 술라로부터 받는다. 아마도 루쿨루스만이 로마 진군 때 술라를 따랐기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술라는 갓 30세에 접어들고 군사경력이 2년 정도에 지나지 않은 루쿨루스에게 자신의 군대를 맡겨 그리스로 우선 보냈다. 그 뒤 그리스에 도착한 술라는 아테네를 포위공격하여 승리한 뒤 해군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고 루쿨루스에게 해군편성이라는 중임을 맡긴다. 루쿨루스는 로마의 동맹국들을 잇따라 방문하면서 전함을 받아내었고 크레타 섬에서는 많은 도시들을 방문해 로마의 편에 서도록 설득하였다. 그가 방문한 키레네는 7년에 걸친 내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루쿨루스는 로마를 대표하여 이들을 중재하기도 하였다.[3] 그 뒤 3년간의 노력끝에 마침내 해군을 편성하는데 성공한 그는 기원전 86년 폰투스의 해군과 결전을 벌여 승리해 제해권을 장악하고 술라군이 아나톨리아 지역으로 건너는 것을 도왔다. 곧 미트리다테스와 술라의 평화협정이 맺어지자 루쿨루스는 그대로 아시아에 남아 술라가 그 지역에 물린 막대한 벌금을 거두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나 루쿨루스는 그 벌금을 될 수 있으면 적게 거두려고 애썼다고 한다.[4]
술라가 권력을 잡자 루쿨루스는 귀국해 기원전 79년에 안찰관, 이듬해인 기원전 78년엔 법무관으로 선출되어 쿠르수스 호노룸의 단계를 착착 밟아나갔다. 법무관이었을 때 아프리카 총독을 지냈는데 그 지역에서 엄정한 법 집행을 하였다고 한다.
루쿨루스가 법무관에 당선된 뒤 집정관에 선출되는 기간인 5년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 없는데, 이때 로마는 술라가 죽고 집정관 레피두스가 반란을 일으키는 등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루쿨루스는 아프리카 통치에 전념했던지 별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고, 위의 상황을 폼페이우스가 맡아서 안정시킨다. 루쿨루스는 기원전 75년에 임기를 마치고 귀국해 결혼하였는데, 이때 술라가 자신의 후사를 루쿨루스에게 부탁했으므로 술라의 일가를 보호하게 된다.
4. 미트리다테스 전쟁
기원전 74년에는 집정관에 선출되었고 때마침 터진 미트리다테스 6세와의 전쟁으로 원래 갈리아 키살피나 속주로 예정되었던 총독 임지를 바꾸어 킬리키아로 파견되었다. 그는 총독 부임 즉시 적에게 포위되어있던 전임 총독 아우렐리우스 코타를 구원하였고 대승을 거둔다. 그 뒤 이오니아 지방의 그리스 도시들에서 함대를 징발하여 적군의 해군을 토벌하였다. 그 다음 내륙으로 진군하여 미트리다테스를 폰투스로 몰아내었다. 처음에 루쿨루스는 폰투스의 강력한 기병때문에 소극적으로 전술을 폈으나 몇번에 걸친 작은 전투들에서 승리하자 자신감을 얻었고 마침내 카비라 전투에서 미트리다테스를 몰아낼 수 있었다. 루쿨루스는 폰투스를 완전히 괴멸시키는 대신 소아시아 속주의 개혁과 안정을 꾀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지나친 욕심을 부려 원성을 샀다.[5]
이후 그는 미트리다테스의 사위이자 동맹자인 아르메니아 왕국의 티그라네스 2세를 공격했다. 기원전 69년에는 아르메니아의 수도인 티그라노케르타를 함락시켰다. 그는 엄청난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계속 미트리다테스와 티그라네스를 공격하였고 기원전 68년 아르탁사타 전투에서 승리하였지만 곧이어 일어난 휘하부대의 참전거부[6] 로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곤란을 겪었다. 그 사이 미트리다테스는 조금씩 영토를 회복했고 루쿨루스는 로마에서 자신의 지휘권을 폼페이우스에게 넘길 것을 요구받아 기원전 66년 폼페이우스에게 지휘권을 넘겨주었으며 로마로 돌아와 개선식을 치루었다.
5. 미식가 루쿨루스
그의 이름에서 유래된 lucullan는 '사치스러운'이라는 뜻으로, 그 뜻대로 루쿨루스는 당대의 미식가였다. 전선에선 사치는 커녕 일반 병사들과 같은 밥 먹고 같이 잠자리에 들어가는 용장이지만 전선에서 은퇴하고 로마로 돌아오고 정치에서도 손을 뗀 이후에는 격이 높은 사치를 추구하였다. 거의 매일 명사들을 초청하여 성대한 연회와 사치스러운 음식을 즐겼는데, 한번은 연회가 없어서 루쿨루스 혼자 식사를 하게 되었다. 하인이 간소한 음식을 준비하자 루쿨루스는 '루쿨루스가 루쿨루스를 위한 연회를 여는 날'이라며 하인을 크게 질책하였다고 한다.
후대의 문학 작품에서도 '루쿨루스의 연회'가 비유로 쓰이기도 한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는 전쟁 말기에 기분전환을 하고자 모처럼 닭을 잡아 연회를 베푸는데, 여기에 레트 버틀러가 밀수해온 봉봉과 최고급 시가를 내놓자 사람들이 이를 루쿨루스의 연회에 비기는 대목이 있다. 실제로는 말라빠진 닭 한 마리를 조금씩 나눠먹는 수준이었지만.
삼총사에서도 포르토스가 작업을 걸던 부인의 수전노 남편이 형편없는 식사를 대접하면서도 '루쿨루스가 루쿨루스를 위한 연회에 참석했다'고 호들갑을 떠는 대목이 나온다.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서도 백작이 집사 베르투치오에게 파티를 준비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 이 말이 나오는데, 집사가 "주인님, 어떤 사람이 몇 명 참석하는지를 제가 알아야 준비하기 편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묻자 "거 뭘 그리 따지나? 그냥 '루쿨루스가 루쿨루스를 위한 연회를 연다' 정도로 알고 준비하게"라고 말하고, 여기서는 삼총사와는 정반대로 엄청난 호화 연회를 연다. 아무래도 작가인 알렉상드르 뒤마가 좋아한 일화인 듯.[7]
6. 말년
아내와 이혼하고 정치계의 미련이 없어 전략적 재혼을 하지않고 독신으로 살게된 루쿨루스는 미식가로서 여생을 보내게 된다. 가끔 원로원에서 카이사르에 대한 반대의사를 표명하기도 했지만 논의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삼두정치가 루카에서 회담을 가진 기원전 56년 즈음에 루쿨루스는 자택에서 병으로 사망한다. 동생인 바로 루쿨루스[8] 는 형의 죽음을 슬퍼하였고 얼마 뒤 형을 따라 죽음을 맞이한다.
[1]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숙적으로 유명한 사람으로 유구르타 전쟁을 지휘했다.[2] 루쿨루스는 만 28세에 명예로운 경력의 가장 말석인 군사호민관을 최초로 시작하였는데 이는 당대의 기준으로는 늦은 편에 속하였다. 20대 초중반에 이미 임페리움을 소유했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와 폼페이우스는 예외적인 경우로 쳐도 대부분 20대 초반의 나이에 명예로운 경력을 밟고 20대 후반에 재무관을 역임하는게 일반적이었다. 루쿨루스는 비슷한 나이의 동년배들이 재무관이었을때 군사호민관이 된 것이었다.[3] 고작 재무관이 이런 일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전직 집정관이자 미트리다테스 전쟁의 총사령관인 술라가 그에게 그런 권한을 주었기 때문이었다. 로마 공화정 시절 임페리움의 권한은 어마어마해서 전쟁 지휘권뿐 아니라 전쟁에 필요한 외교권과 점령지의 행정개편, 그리고 강화조약의 내용을 결정하는 일을 총사령관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즉 임페리움의 소유는 사실상 왕의 권한을 가졌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4] 이건 아시아 지역에 대한 배려였다. 일시에 막대한 금액을 치를 여력이 없던 아시아 지역은 로마의 고리대금업자에게서 돈을 빌려 벌금을 치르고 빚을 갚아야 했는데 나중에 가면 이자가 붙다보니 이 빚이 벌금보다도 큰 액수가 되었다.[5] 아시아 속주들에 벌금을 낼 돈을 빌려준 로마의 고리대금업자들에게 불리한 조치를 취했고 손해를 본 고리대금업자들이 로마에서 루쿨루스에 반대하는 로비를 벌였다.[6] 이들은 장기간 아시아에서 복무 중이었는데 아시아의 민심을 안정시키는데 주력한 루쿨루스가 약탈을 제한해서 불만이 많았다. 당시 약탈은 병사들의 불만해소뿐만 아니라 한몫 잡을 수 있는 기회였기도 했기 때문.[7] 참고로 뒤마 역시 미식 취미로는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고 한다.[8] 테렌티우스 바로 가문에 양자로 입양되었다. 그 역시 술라의 휘하에서 내전에 참여했고 카르보 일당을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