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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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미하일 5세(Μιχαήλ Ε΄)
'''휘'''
미하일(Μιχαήλ)
'''생몰년도'''
1015년 ~ 1042년 8월 24일
'''재위 기간'''
1041년 12월 10일 ~ 1042년 4월 20일
1. 개요
2. 즉위
3. 치세
4. 4월 봉기
5. 최후
6. 여담
7. 참고 문헌


1. 개요


파플라고니아 왕조를 공고히 하려다가 친마케도니아 왕조파 여론의 역풍을 맞아 파플라고니아 왕조를 멸망시킨 황제.
부친이 땜장이 일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땜장이(Kalaphates)라는 별명을 붙여 불렀다.

2. 즉위


1041년 12월 10일, 파플라고니아 왕조를 세운 미하일 4세(1034년 ~ 1041년)가 사망했다. 당시 미하일 4세의 맏형이자 국정 주도권을 쥐고 있던 고아원(Orphanotropheion) 원장 요안니스(Ioannes)는 미하일 4세의 조카인 또 다른 미하일을 황제로 추대하기로 작정했다. 원로원은 미하일 4세를 지지했던 때와 마찬가지로 군인들, 특히 당시 가장 권력에 가까운 인물이었던 콘스탄티노스 달라시노스(Konstantinos Dalassenos)로 대표되는 파플라고니아계 군인 공무원들을 견제하기 원했다. 따라서 파플라고니아의 일반 시민인 미하일 4세와 마찬가지로 미하일 5세를 권력으로 끌어올리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런 까닭에 미하일 4세는 죽기 직전, 조카 미하일을 부황제(Kaisar)에 봉하고 자신과 늙은 아내인 조이의 양자로 입적하였다.

3. 치세


하지만 집권을 시작한 미하일 5세는 곧 큰 삼촌 요안니스와 충돌에 들어갔다. 결국 미하일 5세는 요안니스를 변경의 수도원으로 유배를 보낸 뒤, 삼촌이 추방했던 관료들을 복귀시켰다. 그 중에는 훗날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가 되는 미하일 케룰라리오스(Michael Keroulrarios)나 요르요스 마니아키스(Georgios Maniakes)와 같은 유망한 지휘관들이 있었다. 특히 마니아키스는 곧장 지휘권을 받아 남이탈리아의 노르만 용병대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수도를 떠났다.
미하일 5세는 삼촌인 4세와 마찬가지로 원로원을 보호하는 입장이었으며 아울러 출신 성분 뿐만 아니라 주요 정치 구성원으로서 콘스탄티노플 시민 대중을 중시했다. 그리하여 원로원 - 시민을 중심으로 한 정치 구도를 안정 궤도로 올리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실제로 1042년에 들어와 치렀던 대규모 공공 행진에서 미하일 5세는 시민들의 열화와 같은 지지를 확인했고 마침내 모종의 결심을 내리게 된다.

4. 4월 봉기


4월 18일에서 19일로 넘어가는 밤, 미하일 5세는 양어머니이며 정치적으로 무거운 걸림돌이라 할 수 있는 조이 황제를 제거하고자 했다. 직전에 있었던 행진에서 시민들의 분명한 지지를 확인한 그는 거침없이 밤중에 조이가 미하일 5세를 독살하려 했다는 혐의로 그녀를 남자 성직자처럼 대머리 일부가 보이게끔 삭발시키고[1], 마침내 수도에서 머지 않은 프린키포(Prinkipo) 섬의 수녀원으로 보내버렸다. 그리고 4월 19일 아침, 콘스탄티노스 광장에서 조이의 폐위를 통보하는 선언서를 콘스탄티노플 시장을 통해 대독하게 했다.
시민들의 반응은 미하일 5세의 예상과는 '''정반대'''로 폭발적이었다. 이들은 마케도니아 왕조를 폐할 생각은 염두에 없었던 것이다. 프셀로스는 '조용하던 여성들이 제일 먼저 들고 일어나 모든 것을 때려부쉈다'고 평하였다. 실제로 19일날 일어난 봉기로 콘스탄티노플은 궁궐과 그 외부로 분단되었다. 시민들은 유배되었던 조이와 노년을 쓸쓸히 보내던 테오도라성 소피아 교회로 데려와 다시금 황제로 선포했다. 조이는 테오도라를 싫어했기 때문에 이를 막고자 했지만 시민들은 기어코 테오도라도 황제로 삼았다.
이후 바로 시민군이 조직된 뒤에 3갈래로 나뉘어 궁궐을 공격했다. 예상치 못한 봉기에 당황한 미하일 5세는 도주하려 하였으나 또 다른 삼촌인 콘스탄티노스(Konstantinos)가 물러서지 말고 맞설 것을 강청하자 이에 호응하여 병력을 무장시켰다.
4월 19일부터 20일 새벽에 이르기까지 궁궐을 두고 정부군과 시민군이 크게 충돌했다. 이 사건으로 총 3천 명의 시민이 살해되었다. 그러나 결국 시민군은 정부군을 압도하였으며 버티지 못한 미하일 5세와 삼촌 콘스탄티노스는 황급히 황제의 기함을 타고 근교의 스투디온 수도원으로 물러나 재빨리 수도자가 되었다.

5. 최후


사태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조이와 테오도라는 대경기장에서 집회를 열고 시민들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그 다음 이들은 무슨 조치를 취하면 좋을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견을 구했다. 시민들은 이미 퇴위한 미하일 5세의 처형을 주장했다. 통치권자인 조이와 테오도라는 의견이 엇갈렸다. 조이는 그런 강경한 처벌까지는 바라지 않았지만 테오도라는 거침이 없었다. 그러나 결국 시민들의 의향대로 결정되었다.
시민군은 곧장 스투디온 수도원으로 들어가 미하일과 삼촌 콘스탄티노스를 끌어왔다. 미하일 5세는 삼촌이 자신을 파멸로 끌어갔다며 비난하는 가운데 시력을 잃었고 거세도 당했다. 콘스탄티노스도 마찬가지가 되었다.[2] 이후 남은 기간 수도자로 4개월 동안 여생을 보낸 미하일 5세는 1042년 8월 24일, 수도자로서 세상을 떠났다.

6. 여담


미하일 4세와 5세의 심복으로 활동했던 레온 파라스폰딜리스(Leon Paraspondyles, 사서에 따라 Strabospondyles로도 불린다)는 이후 점차 원로원과 관료, 정부를 대표하는 인물로 그 중요성을 높여갔다. 그리고 마침내 미하일 6세 정권을 창출하는 공도 세웠다. 그러나 항상 일관되게 원로원 - 시민 정치를 꾀하던 그는 끝내 군대의 쿠데타를 저지하지 못한 채 퇴진해야 했다.
노르웨이의 왕이던 하랄 3세 하르드라다가 미하일 5세는 자신이 죽였다고 주장했었는데 위의 실제 행적에서 보다시피 완벽한 뻥카다.

7. 참고 문헌


Telemachos C. Lounghis, The Byzantine historians on politics and people from 1042년 to 1081년, ''Byzantion'' Vol.72, No. 2월, 2002년.
Attaleiates, Anthony Kaldellis Tr, ''History'', Harvard, 2012년.
John Skylitzes, John Wortley Tr, ''Synposis of Byzantine history'', Cambridge, 2011년.

[1] Anthony Kaldellis의 Byzantine Republic 92쪽에는 'had her tonsured'라는 대목이 있다.[2] 당시 바랑기안 가드의 우두머리였던 하랄 3세 하르드라다는 자신이 직접 미하일 5세의 눈을 뽑았다고 평생 자랑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