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로마)

 


[image]
  • 그리스어: Ζωή η Πορφυρογέννητη (조이 이 포르피로옌니티)[1][2]
  • 라틴어, 영어: Zoë
생몰일 : 978년 ~ 1050년 6월 재위 기간 : 1042년 4월 19일 ~ 6월 11일
1. 개요
2. 같이보기


1. 개요


콘스탄티노스 8세와 엘레니의 차녀. 당시 동로마 제국의 몇 안되는 포르피로옌니티였다.
콘스탄티누스 8세에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그의 사후 조이의 남편이 황제가 되었고 조에는 황후가 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내 처녀로 있다가 콘스탄티누스 8세의 임종이 가까워 오자 오직 제위 계승을 위해서 결혼한 것인데, 이렇게 황녀가 정통성을 갖고서 군주로서의 남편을 택군(擇君)하는 제위계승 메카니즘은 전대 테오도시우스 왕조의 풀케리아와 레오 왕조의 아리아드네에게서도 똑같이 나타났다. 하지만 여제까지 오른 것은 조이뿐인데, 이는 마케도니아 왕조의 통치기간이 테오도시우스 왕조나 레오 왕조와는 달리 당시 기준으로 150년이 넘었을 정도로 오래되어서 정통성 내지는 통치정당성을 더욱 높게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첫번째 남편이 로마노스 3세[3]이고, 두번째 남편이 미하일 4세. 늙은 로마노스 3세에 실망하던 중 환관장의 소개로 환관장의 조카인 젊은 미남 미하일 4세를 총애하게 되어 로마노스 3세를 목욕탕에서 익사시키고 미하일 4세와 재혼했다. 미하일 4세는 명군이 될 자질을 보여주었으나 젊은 나이에 병들어 죽었고, 미하일 4세가 죽은 후 그녀와 미하일 4세의 양자(미하일 4세의 누나의 아들이었다)인 미하일 5세가 즉위했으나 미하일 5세가 몇달 후 반란으로 폐위되자(당시 바랑기안 가드로 복무 중이던 노르웨이의 하랄 3세는 이때 자기가 직접 미하일 5세의 눈을 뽑아 죽였다고 자랑했다고 한다), 여동생 테오도라와 공동 여황제가 되었다. 그런데 얼마 후 다시 재혼해 새 남편이 황제가 되고 그녀는 다시 황후가 되었다. 이 3번째 남편이 콘스탄티노스 9세. 정리하자면 1028년 ~ 1041년까지 황후였고, 1042년에 몇달 간 여제였지만 다시 황후가 되었다.
결혼을 3번이나 했지만 50세가 되는 때에 첫 결혼을 했기 때문에 당연히 자식이 없었다. 양아들 미하일 5세(별명이 땜장이였다.)는 황제가 된 후 양어머니인 조이를 박해하고 추방하며[4] 반발을 사 폐위되었다.
여담으로 아야 소피아콘스탄티노스 9세와 조이의 모자이크가 있는데, 사실 이 모자이크는 그녀가 재혼을 할 때마다 '''남편의 얼굴과 이름을 새 남편에 맞추어 바꾼 거'''라고 한다.
[image]

2. 같이보기



[1] 신약 성경이 쓰여지던 시절의 그리스어로 하면 조에가 맞다. 하지만 그 시절과 이 사람이 살던 시절과는 거의 1000년의 갭이 있으며, 그리스어는 2세기 - 4세기 이후 모음 단순화 현상이 벌어져 η의 발음이 i로 변동되었다. 때문에 조이로 읽는게 옳다.[2] Ζωή는 그리스어로 '생명'이라는 뜻이다.[3] 원래 예정에 있었지만 친척이라 로마노스 3세가 고사했으나, 부황 콘스탄티노스가 죽음 목전에 그를 결혼하라고 지명했다. 로마노스 1세 레카피노스의 딸의 아들의 아들이 콘스탄티노스 8세였고, 또다른 딸이 아르이로스 가로 시집가서 낳은 아들의 아들이 로마노스 3세라 6촌간이다. 즉 조이와 테오도라 자매에게는 7촌 아저씨.[4] Anthony Kaldellis의 Byzantine Republic 92쪽에는 'had her tonsured', 즉 남자 성직자처럼 대머리 일부가 보이게끔 삭발시켰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