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하일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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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호'''
미하일 4세(Μιχαὴλ Δ´)
'''휘'''
미하일(Μιχαήλ)
'''생몰년도'''
1010년 ~ 1041년 12월 10일
'''재위 기간'''
1034년 4월 11일 ~ 1041년 12월 10일
1. 개요
2. 생애
2.1. 즉위 이전
2.2. 즉위
2.3. 황제 미하일 4세
2.3.1. 내치
2.3.2. 외치
2.4. 최후


1. 개요


동로마 제국의 황제이자 파플라고니아 왕조의 창건자. 그의 형이자 환관인 요안니스 오르파노트로포스와 조이 황후의 도움으로 황제에 올라 나름대로 제국을 잘 이끌었으나 31살에 요절했다.

2. 생애



2.1. 즉위 이전


미하일은 1010년경 파플라곤의 소작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환전상으로 일했다. 그의 형 요안니스 오르파노트로포스는 환관으로 발탁되어 황궁에 있는 여성들의 숙소를 관장했다. 요안니스는 미하일을 비롯한 세 동생들을 책임지기 위해 일자리를 알선해줬다. 이무렵, 조이 황후는 50대의 나이에 60살의 로마노스 3세와 결혼했다. 두 부부는 아이를 가지려 했지만 고령의 나이였기 때문에 실패했고, 두 사람 관계는 소원해졌다. 로마노스는 그녀와 침대를 함께 쓰기를 거부하고 아내가 국고에 접근하는 걸 차단하고 소액의 연금만 줬다. 그러던 1033년, 조이는 요안니스 오르파노르포스의 소개로 미하일과 만났다. 조이는 잘생기고 매력적인 10대 청년에게 반했고 그를 정부로 삼았다. 이후 세간에서 미하일과 조이가 황제를 시해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자, 로마노스 3세는 미하일에게 성해에 걸고 무죄를 맹세하라고 요구했다. 미하일은 선뜻 그렇게 했고, 로마노스는 마음이 누그러져 미하일을 자신의 수행원으로 삼았다.

2.2. 즉위


1034년 4월 11일, 로마노스 3세는 그의 목욕탕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당대 기록들은 황제가 익살, 교살되었거나 독살당했다고 기술되어 있지만 평소 몸이 안 좋았던 황제가 목욕 도중 심장마비나 발작으로 죽어버렸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아무튼 로마노스가 사망한 직후, 조이는 미하일과 결혼했고 다음날 총대주교 알렉시오스 1세를 불러 새 황제의 대관식 주례를 맡았다. 이후 미하일 4세는 대관식을 치르고 모든 신하들로부터 충성을 서약받았다. 콘스탄티노플 시민들 역시 무리한 토목 공사를 일삼았던 로마노스 황제에게 불만이 많았기 때문에 미하일의 석연치 않은 즉위에 반발하지 않았다.

2.3. 황제 미하일 4세



2.3.1. 내치


미하일은 즉위 초기에는 조이와 함께 제국을 공동으로 통치했다. 그러나 그는 조이가 로마노스 3세를 배신한 것처럼 자신 역시 배신할 것을 걱정했고 그의 형이자 환관인 요안니스 오르파노르포스 역시 조이가 권력을 잡게 된다면 위험해진다고 경고했다. 결국 미하일은 조이를 규방에 가두고 엄중하게 감시하게 했고, 그녀에게 로마노스 때보다 훨씬 적은 연금을 줬다. 그녀의 친구들은 허가 없이는 그녀를 만나러 오지 못했다. 이후 미하일은 형 요안니스에게 많은 권력을 양도하면서도 제국을 위한 개혁을 실시했다.
미하일은 형에게 재정과 세금의 문제를 맡기고 나머지 모든 일은 자신이 직접 도맡아 처리했다. 그는 지방 행정과 대외 관계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였고 로마노스 3세의 실정으로 사기가 떨어졌던 군대를 어느 정도 복구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비록 정규 교육은 받지 못했지만 배우는 속도가 빨라서 여러 뛰어난 학자들의 가르침을 모조리 깨우쳤다. 그는 간질 환자였으나 정서적으로 매우 건전해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이는 법이 없었고 침착하면서도 빠르게 말했으며 타고난 재치와 표현력을 자주 선보이곤 했다.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비천한 가문 출신에 간질 환자라는 핸디캡을 안고서도 이 정도로 탁월한 능력을 갖추고 제국을 잘 이끌어가는 것에 탄복했다.
하지만 그가 이렇듯 성실하게 제국을 다스리는 동안 그의 형 요안니스 오르파노르포스는 과도한 세금을 매겨 백성들의 반발을 샀다. 특히 그는 세금을 회피하기 일쑤였던 아나톨리아 귀족들에게도 세금을 확실하게 뜯어냈다. 이에 반발한 귀족들은 종종 봉기를 일으켰고 1034년엔 콘스탄티노스 8세로부터 황제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던 콘스탄티노스 달라세노스가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게다가 요안니스는 바실리오스 2세 이래 현물로 세금을 납부해오던 불가리아 주민들에게 현금 납부를 강요해 그들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켰다. 그 결과, 불가리아 주민들은 제국을 상대로 봉기한다.

2.3.2. 외치


1038년, 미하일은 요안니스의 추천을 따라 매제인 스테파노스를 수송 함대 사령관, 요르고스 마니아케스를 육군 사령관으로 삼고 시칠리아 원정을 단행했다. 시칠리아 원정은 본래 바실리오스 2세가 1026년에 단행하려 했으나 그 전해에 죽는 바람에 지연된 것이었고, 현재 시칠리아에 근거지를 둔 사라센인들이 남부 이탈리아의 동로마 영토를 침략하고 지중해에서 해적질을 했기 때문에 미하일로서는 반드시 정벌해야 했다. 게다가 마침 시칠리아에서 내분이 일어나면서 성공 확률이 더 높아졌다. 급기야 팔레르모의 지배자 알 아칼은 반란군에게 시달리다가 1035년 동로마 제국에게 구원을 호소해 가뜩이나 시칠리아를 정벌하려 했던 제국군에게 좋은 명분을 제공했다. 비록 알 아칼은 곧 암살되었지만 동로마 제국은 개의치 않고 원정을 단행했다.
1038년 초여름, 시칠리아 원정군이 출격했다. 늦여름에 시칠리아에 상륙한 워정군은 파죽지세로 밀고 나갔다. 사라센군은 분열된 상태에서도 용감히 싸웠으나 제국군의 기세를 전혀 막지 못했다. 제국군은 순식간에 메시나를 손에 넣었고 팔레르모로 가는 북부 해안 도로와 메시나를 잇는 고개를 통제하는 중요한 요새인 로메타도 격전 끝에 함락시켯다. 이후의 과정은 기록이 미비해 잘 알 수 없지만, 1040년에 시라쿠사를 함락시킨 것을 봤을 때 원정군이 꾸준히 성과를 거두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시라쿠사를 공략한 후 원정군은 문제에 직면했다. 요르고스 마니아케스와 스테파노스가 서로 갈등을 빚었던 것이다. 급기야 마니아케스는 이성을 잃고 스테파노스에게 폭력을 가하고 스테파노스가 과연 남자인지 의심스럽다면서 황제에게 즐거움이나 주는 자(즉 남색 상대라는 의미)일 뿐이라고 조롱했다. 이에 스테파노스는 복수를 결심하고 콘스탄티노플에 긴급 사자를 보내 마니아케스를 반역자라고 몰아붙였다. 그러자 마니아케스는 소환되어 변명할 기회도 빼앗긴 채 투옥되었다. 이후 스테파노스가 총사령관을 맡았으나 얼마 안 가 병사했고, 환관 바실리오스가 그 뒤를 이었지만 변변치 못해 원정군의 사기가 뚝 떨어지는 걸 막지 못했다. 결국 원정군은 힘을 잃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1038년 아풀리아에서 반란이 일어나 일부 지휘관들이 살해되었고 1040년에는 동로마의 군사 총독이 살해되었으며 현지 민병대가 해안 지대에서 연이어 폭동을 일으켰다. 이 상황을 처리하기 위해 시칠리아 원정군 일부가 긴급히 파견되었고 몇 개월 뒤에는 메시나를 제외한 시칠리아 전역이 도로 사라센의 수중에 들어갔다.
1040년, 불가리아인들은 제국의 수탈에 맞서 페트라 델리안의 지도 아래 무작 폭동을 일으켰다. 몇 주뒤 페트라의 사촌인 알루시안이 콘스탄티노플을 탈출해 반란 세력에 합류했다. 두 사람은 순식간에 불가리아 서부에서 비잔티움 세력을 몰아낸 다음 북부 그리스를 침공했다. 그해 말, 그들은 다라키온은 손에 넣고 아드리아 해로 나가는 길을 확보한 후 곧이어 남쪽의 레판토 만까지 진출한 후 동쪽의 테베를 공략하려 했다.
이 소식을 접한 미하일은 친정을 선포했다. 당시 그는 괴저병으로 두 다리가 끔찍하게 부어올라 거의 마비 상태였고 조금만 움직여도 통증이 심했다. 형제들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이 극구 만류했지만 그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그는 자기 치세에 제국의 영토가 전혀 늘어나지 않았다면서 적어도 줄어들게 놔두지는 않겠다는 각오를 보였다. 미하일 프셀로스는 황제가 세심하게 원정 계획을 수립하고 구체적인 목표를 정한 뒤 군대를 이끌고 국경을 넘어섰을 때, 지휘관들이 진지에 남아있으라고 권했으나 이를 묵살하고 말에 올라타더니 안정된 자세로 능숙하게 말을 몰았다고 기술했다.
황제가 전선에 막 이를 때 델리안과 알루시안이 서로 내분을 벌였다가 알루시안이 델리안의 눈과 코를 잘라버리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 뒤 봉기가 성공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한 그는 황제에게 항복할 테니 콘스탄티노플로 돌아가달라고 제안했다. 이리하여 미하일은 1041년 초에 눈과 코를 잃은 델리얀을 비롯한 수많은 포로들을 거느리고 수도에 개선했다.

2.4. 최후


그의 뇌전증과 수종병은 결국 치료되지 않았으며, 미하일 4세는 이것을 로마노스 3세를 암살하고 제위를 찬탈한 데 대한 천벌이라 여겨 짧은 재위 기간 내내 참회 기도를 드리고 기부와 자선을 하며 종교에 집착하였다. 하지만 결국 회복하지 못하였고 불가리아 반란을 제압한 직후인 1041년 12월 10일 31살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슬하에 자녀가 없어 조카인 미하일 5세를 후계자로 삼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