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원

 


1. 소개
2. 개괄
3. 구성
3.1. 의원 선출
4. 연혁
4.1. 공화정 초중기
4.2. 공화정 후기
4.3. 공화정 말기: 내전기
4.4. 제정 초기
4.5. 3세기
4.6. 4세기~7세기의 로마 원로원
4.7.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
4.7.1. 시작
4.7.2. 상원의 등장
4.7.3. 콤니노스 시대
4.7.4. 대중정치의 영향
4.7.5. 후기
4.7.6. 참고 자료


1. 소개


[1] / Senatus[2] / Roman Senate[3]
고대 로마의 정치 기구이다. 로마 공화국 시절부터 동로마 제국 말기까지 계속 존재했다. 유력 인사들이 모여서 법률을 제정하고 정책을 의결하는 등의 역할을 맡았다. 비록 민회의 힘이 차츰차츰 강해지기는 했으나 공화정 시대 내내 국책의 중심축은 원로원에 있었다.
공화정 시절 당시 로마에서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 즉 원로들이 지혜롭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시대의 조각상을 보면 주름이 자글자글하다. 그렇지만 실상은 30세 이상의 귀족이 참여하는 전혀 연로하지 않은 기관이었다.
초기에는 귀족(파트리키) 가문만 의원으로 받아들였으나 차츰 개방되면서 공화정 말기쯤 되면 평민들도 의원 중에 많았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나 의원을 해먹은 것은 아니고, 귀족이냐 평민이냐를 떠나서 명문가(nobiles, 노빌레스) 출신들로 원로원이 구성되었다.

2. 개괄


원로원의 기원은, 초기 왕정 때 국왕에게 조언을 해주던 부족 장로들의 모임으로 보고 있으며, 그 때문에 노인들의 모임인 senatus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따라서 처음에는 이름 그대로 '원로'원이었다. 이후 구성은 장년층 이상 귀족들의 모임으로 바뀌었지만, 초기 이름을 잘(로마인들은 본래 매우 보수적이고 전통을 중시하는 성향이 강했다) 바꾸지 않는 로마의 특성상 그 이름이 그대로 남게 된 것이다.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거듭하던 로마 공화정 초창기에는 평민을 노예로 매매하고 탄압하던 명문귀족층의 아성 같은 곳이었으나, 성장을 거듭한 신흥 상류층 평민들의 실력행사와 온건파 귀족들의 타협시도로 점차 비귀족에게도 문이 열리게 되어서 로마 연합을 완성하면서 체계가 확고해졌고 2차 포에니 전쟁이라는 사상 초유의 국가적 위기를 주도하여 극복하면서 그 유효성을 증명하였다. 선거를 통한 선출직이 아닌 원로원 내부의 엄격한 검사를 거친 선발직이고, 종신직이었긴 하지만 짧은 수명과 정쟁, '''전쟁''' 등에 따른 기존 귀족계층의 지속적인 감소로 그나마 비교적 구성인원의 물갈이가 잘 된 편이었다고 전해진다.
여기서 원로원 의원 자체가 많이 전사하지 않았다는 점을 들어 노블레스 오블리주나 물갈이 여부가 불확실하다고 여기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물갈이는 기존 세력인 대귀족가문이 갈리냐 갈리지 않느냐의 문제인 만큼 그저 원로원 의원이 많이 죽는다고 해서 물갈이가 되는 게 아니다. 죽은 자를 대신해서 들어오는 신입 의원들이 기존의 가문인가, 새로이 떠오르는 가문인가가 중요한 것이다. 어차피 옛날 잘 나가는 가문이란 건 직계에 방계까지 숫자가 굉장히 불어나는 법이고 제한된 원로원 의석수 내에서 의석을 따기 유리한 대귀족가문에서 얼마든지 다수의 인물들을 들여보내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실제로 공화정 후기까지도 이렇게 유구한 역사와 방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자랑하는, 클라우디우스나 코르넬리우스 같은 1급 명문 귀족가문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옛 귀족가문들이 점차 사라지고 신흥 가문들이 그 자리를 대체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귀족가문들의 청장년들이 많이 죽었음과 동시에 비귀족가문 출신 중장년의 능력을 보고 새로 뽑았다라는 결론이 난다. 예를 들어 카이사르의 율리우스 씨족은 옛날부터의 정통귀족이긴 해도 영향력이 듣보잡 수준으로 줄어 있었던 반면 그라쿠스 형제가 속해있었던 셈프로니우스 씨족은 원래 평민이었지만 클라우디우스 같은 1급 귀족들이 동급으로 대우해줄 정도로 영향력이 막강한 '평민귀족'이었다. 원로원 체제의 경직성이 극에 달한 공화정 후반기에도 폼페이우스 스트라본(폼페이우스의 아버지)이나 옥타비우스(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친부) 같은 촌동네 토호들도 들어올 수 있었을 정도면 꽤 열린 집단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적어도 그라쿠스 형제의 임차지 재분배정책에 반발한 것은 출신가문을 막론하고 실제 영향력이 막강한 사회지도층에 속한 원로원 의원과 그 가족들이지 유서깊은 명문귀족 전체는 아니었다.[4] 결국 극도로 경직되어서 기득권 사수에 열을 올리다 체제의 유효성은 잃고 말았지만, 기본적으로 인재들에게는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는 것이다.
로마를 상징하는 단어로 SPQR(Senatus Populusque Romanus)이 로마 원로원과 시민을 의미한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아직도 로마시 공고문이나 맨홀뚜껑, 심지어 현(現) 로마시의회에서도 쓰이는 단어라고 한다.
상원을 표현하는 Senate는 바로 이 단체에서 유래한 것이며, 그래서 상원의원도 Senator가 된다.
고대 로마의 원로원 건물로는 쿠리아 호스틸리아(기원전 53년 화재로 파괴), 쿠리아 코르넬리아(기원전 44년 신전으로 용도 변경), 쿠리아 율리아(현존)가 있었다. 비잔티움 원로원은 초기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원로원 건물을 사용했으나, 이후 황궁에서 회의를 열게 되었다.

3. 구성


전통 시대에는 300명이 정원이었으나, 술라에 의해 600명으로 늘어났고 이것을 카이사르는 900명으로 늘린다. 그 뒤 아우구스투스가 600명으로 줄여 이 정원으로 확정된다. 술라는 원로원을 강화하기 위해 늘린 것이었고 카이사르는 약화시키기 위해 그 정원을 더 늘린다.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의 환심을 사고 싶었기 때문에 그 숫자를 줄인다. [5]
원로원 의원은 종신이었다.

3.1. 의원 선출


이 원로원 의원이 되는 것은 공화정 시절엔 원로원 의원 가운데서 선출된 감찰관이 결정했다. 주로 공직을 맡은 경험이 있는가를 최우선하였고 그 다음 어느 가문 출신인가와 재산을 보았다고 한다.
고위관직에 선출되면 높은 순으로 원로원 의원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집정관과 같은 최고위직의 경우 선출 전에 이미 원로원 의원인 상태에서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법무관의 경우 선출되면 원로원은 이미 보증수표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법무관의 수는 제국이 팽창한 이후에도 해마다 제국 전체에서 8명에 불과하였으므로 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호민관은 법무관 다음 랭크에 해당되는 고위직이므로 원로원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호민관의 수는 10명이었고 종신직인 원로원 의원의 수는 300명 나중엔 600명이었으므로 해마다 18명(법무관 + 호민관의 수)의 원로원 의원이 죽거나 강등되지 않은 해에는 호민관도 원로원 의원이 되지 않은 때도 많았다. [법적으로는]
훗날 로마가 제정시대가 되었을 땐 감찰관을 따로 두지 않고 황제가 겸임하게 되어 황제가 뽑게 되는데 그 역시 뽑을 때 공직을 맡은 경험을 보았다. 따라서 황제는 자신의 측근을 원로원에 임명하려면 주로 자신이 법무관과 같은 고위직에 그를 추천, 당선시켜 공직 경험을 쌓게한 뒤 원로원에 임명하는 수순을 밟았다. 따라서 원로원 의원이 되는 조건에 큰 변화는 없었다.

4. 연혁



4.1. 공화정 초중기


공화정 시대에는 로마의 행정과 정치의 중심이었다. 처음에는 거의 원로원 중심의 정치가 이루졌지만 이후 원로원을 견제하는 민회호민관의 존재로 인해 균형을 이루었다.

4.2. 공화정 후기


포에니 전쟁의 승리를 거두고 뒤이은 전쟁에서 헬레니즘 제국을 차례차례 격파하면서 로마는 막대한 부와 권력이 모이는 도시가 된다. 그러나 당시 농업경제구조의 부조리로 인해 해외의 대규모 농장에서 노예를 부리는 원로원 의원들에게 부가 집중되는 한편 그만큼 기존의 자영농 중산층이 대거 극빈층으로 몰락하여 큰 사회문제가 되었다.
그라쿠스 형제호민관의 권한으로 농지법을 제정하여 이를 개혁하고자 했으나, 원로원 의원들의 폭동으로 살해당하여 개혁은 좌절되었다. 이 과정에서 원로원은 '원로원 최종결의'라는 강력한 법적 권한을 손에 넣게 되는데, 이는 원로원에서 '공화국의 적'으로 규정한 모든 시민을 초법적으로 규탄할 수 있는 강력한 권한이었다. 사실상 계엄령+사형선고(&선전포고).

4.3. 공화정 말기: 내전기


가이우스 마리우스의 군제개혁으로 기존의 로마 시민병 체계는 무너지고, 로마의 정치는 여러 군벌들에게 휘둘리게 된다. 술라는 일시적으로 원로원의 권위를 강화하고자 했으나, 그의 부하였던 폼페이우스, 크라수스가 민중파를 자처하며 민중파였던 카이사르와 협력하면서 오히려 원로원이 약화된다.[6]
카이사르의 내전은 원로원의 권위에 치명타를 가했다. 원로원은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제거하고자 했으나 오히려 카이사르의 군대가 로마를 점령하고, 원로원 의원들은 무더기로 폼페이우스와 함께 도망치는 신세가 된다. 폼페이우스의 몰락과 함께 많은 원로원 의원들이 죽음을 맞았고, 살아남은 자들도 정치적으로 무력해진다. 이후 카이사르가 암살당했으나 이미 원로원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기 때문에, 옥타비아누스가 그들이 지키려고 했던 공화정의 전통을 대놓고 무시하는 것[7]을 전혀 막지 못했다. 이후 제2차 삼두정치 시기 대대적으로 숙청당했다.

4.4. 제정 초기


아우구스투스는 원로원을 실질적으로 약화시켰으나, 교묘하게 그 권위를 존중하여 황제가 원로원으로부터 '인준'(호민관 특권의 부여)을 받는 형식으로 원로원의 체면을 살려주게 된다. 하지만 시대가 갈수록 서서히 원로원의 권력은 약화되어 간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서는 법률적으로 황제의 즉위를 인준하는 한편, 황제에 대한 탄핵을 할 수 있는 등 견제장치로서의 역할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당한 황제가 바로 네로. 황제는 원로원으로부터 '호민관 특권'을 인정 받음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황제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법률적으로는 이 특권을 박탈하는 결의를 함으로써 황제를 축출할 수 있었다.
플라비우스 왕조에서 이 탄핵권이 법률적으로 제거되면서[8] 원로원은 단지 황제의 즉위를 인준할 수 있는 권한만을 가지게 되었다.
황제권이 안정을 찾은 오현제 시기와 내란기를 거치면서 원로원의 권한은 더욱 약화된다. 오현제 시대부터 황제 주변의 측근 관료층이 강화되면서 원로원이 행정 조직으로서의 역할도 상실해가기 때문이다.
세베루스 왕조에 이르면 황제를 중심으로 한 관료 체계가 더욱 강화되면서 실권을 거의 잃어버린다.

4.5. 3세기


유력 군벌들이 황제 자리를 다툰 군인 황제 시대에는 그저 유력한 군벌에게 황제 도장을 찍어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며, 디오클레티아누스도미나투스[9] 시대가 되면 실무 권한은 거의 모두 관료 조직으로 넘어가서 원로원 의원의 기능은 예식적인 것에 머물게 된다.[10] 원로원 의원의 역할은 경기대회나 축제를 주최하거나 자문을 하는 것이 거의 전부가 되었을 정도. 다만 실무권한을 행사하자면 어쨌건 교육을 받아야 했고, 인재풀을 제공할 곳은 원로원이었기에 실질적인 영향력은 어느 정도 유지된다. 또한 5세기 황제 지위가 왔다갔다 하던 시절에는 다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는데, 씁쓸한 사례로는 455년의 로마 약탈[11]을 그나마 좀 인간적으로 마무리하도록 협상을 한 것을 들 수 있다.
로마 원로원 의원에 대한 인기는 로마가 멸망할 때까지 대단히 높았다. 그 이유는 실질적으로 로마 원로원에게는 세금의 혜택이 부여되기 때문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 원로원이라는 직함 자체가 일종의 제국 내의 최고 명사라는 뜻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로마 원로원이 되려면 일단 로마 제국내에서 최상류층에 속해야 했으며 실제 최상류층에 속함에도 불구하고 이 로마 원로원 의원인 600명 안에 들지 않으면 인정해 주지 않았다.
실제로 대도시마다 원로원이 있긴 하였으나 로마 원로원만은 로마 거주자들뿐 아니라 제국 내의 모든 성공한 사람의 최종 획득 타이틀이었다.

4.6. 4세기~7세기의 로마 원로원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에는 콘스탄티노폴리스이 새로운 수도가 되고 동서로마가 분열되면서 원로원도 로마 원로원과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12]으로 분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때까지 로마 원로원 의원들의 부유함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 의원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다.
이때 후기로마 시대에는 원로원 의원들을 3분해서 높은 것부터 vir illustris[13], vir spectabilis[14], vir clarissimus[15]로 나누었다. 사실은 모든 의원들이 clarissimus였다가 4세기(정확히는 콘스탄티우스 2세 치세의 354년)에 숫자가 많아지고 차별화의 필요성이 생기면서 앞의 2개를 그 위에 옥상옥처럼 추가했다. 그것이 공식화 된 것은 20년 정도 지난 372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 때였다. 그 결과 나중 6세기의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는 뒤의 2개는 원로원 참가 자격조차 없어지고 원로원 내에는 illustris만 남았다고 한다. 그래서 illustris는 예전의 clarissimus만도 못하게 떨어져서, 새로운 차별화 호칭으로 그 위에 vir gloriosus[16] 및 gloriosissimus[17], vir magnificus[18]를 신설했다.[19] 여담으로 콤네노스 이후에는 황족과 그 인척의 족벌정치[20]로 나라가 운영되었으므로, 그들에게 내리는 호칭이 또 여러 가지가 개발되었는데, 보다 보면 이것보다도 더 호칭 인플레의 진수.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고 동고트 왕국의 지배하에서도 로마 원로원은 존속하였다. 그러나 동로마 제국과 동고트 족의 싸움 와중에 이들이 내통하고 있다는 의심을 품은 동고트 족에 의해 인질로 잡힌 후, 몰살당한다. 동로마 제국이 로마를 수복하고 다시 원로원을 만들었지만 그 기능은 미약했고 중요성도 떨어져갔다. 기록상에 남아있는 로마 원로원의 마지막 활동은 603년 포카스 황제의 즉위를 축하하는 서신을 보낸 것이다. 로마 원로원이 쓰던 쿠리아 율리아 건물은 교황 호노리오 1세가 630년에 교회로 개조해버렸다.
로마의 원로원은 기록상으로 사라진 지 500년 만에 부활했는데 1144년 교황령에서 교황과 시민들 사이에 불화가 발생해 시민들이 교황을 축출해 코뮌이 들어서면서 자체적으로 부활시켰고, 이후 1145년 새 교황과 코뮌 양측의 타협과 함께 코뮌의 조직으로 추인받게 된다.

4.7.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에 들어간다는 것은 동로마 제국에서는 여전히 큰 영광으로 여겨졌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수복 이후 팔레올로고스 왕조 시대에도 원로원이 있었으며 14세기 중반에 완전히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도 이 원로원은 모체인 국가가 1453년에야 망했기 때문에 국가가 멸망한 뒤 비참한 꼴을 맞는 일은 피할 수 있었고, 구성원들도 소멸되지 않고 그대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유력인사로 남아 제국과 운명을 함께 했다고 전해진다.
현대에 들어 동로마 제국의 공화적 면모에 대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지면서, 실권이 없었다는 과거의 인식과는 다른 평가를 받고 있다.
고대 로마 시의 원로원과 달리, 이것은 아예 존재 자체도 잘 모르는 사람이 많은 편. 영어의 압박이 괜찮다면 영어 위키백과Byzantine Senate(동로마 원로원) 일독을 추천한다.

4.7.1. 시작


330년 콘스탄티노폴리스이 완공된 이후 로마 정부는 여러 혜택을 보장하면서 기존 로마시의 원로들을 유인하면서 신도시의 원로원을 빠르게 구축해갔다. 359년 콘스탄티우스 2세는, '새 로마' 콘스탄티노폴리스 원로원을 로마 원로원과 동급으로 격상시키면서[21] 정원도 2000명으로 늘렸다. 초기의 원로원은 여타 제정시기와 마찬가지로 과거 시대의 여러 형식적 내지 의식적(ceremonial)인 기능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 참여층은 로마제국의 주요 정치참여 계층으로서의 입지를 점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테오도시우스 법전이나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을 비준하기 위해 원로원에 안건으로 회부하거나 원로원의 만장일치를 거치는 방식을 갖추었던 것은 그러한 요인이다. 형식성이 실질성과 분리되어 인식되는 근현대의 인식과 달리 과거에는 그러한 형식은 상당한 정도의 실질을 '담보'하는 요건으로서 인식되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시절에 이르러 제국은 법률입법, 행정권의 최종적인 대권이 국가를 표상하는 1인의 황제의 권한으로 집중시키는 작업에 들어간다. 이것은 이후 1천 년간에 걸쳐서 꾸준하게 진행되는 하나의 경향으로서 지방 위에 군림하는 정부, 계급을 초월하여 모두를 종속시키는 강력한 국가권력을 창출하는 일련의 과정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541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지명하는 집정관직이 철폐된다. 다만 그 권한을 명시한 법령 자체는 9세기 말이나 10세기 초, 레온 6세가 신법령(Novellae)[22]으로 폐지를 천명할 때까지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원로원의 중요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정치적, 문화적, 경제적 중심지인 콘스탄티노스 광장의 한쪽에 있는 원형의 건물이 의사당으로 이용되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때부터는 아예 궁궐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거대한 건물로 의사당이 옮겨졌다. 이 건물은 마그나브라(Magnaura, 산들바람)라는 이름을 부여받았으며, 황제가 사절단을 접견하는 중요한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레온 6세는 죽기 전 원로원 회기에 나가 전통적으로 황제들이 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963년에는 원로원 의장(Proedros)이라는 상당한 고위직 품계도 신설된다.
원로원의 여전히 남아있는 중요한 정치적 기능은 정치적 공백 시기에 부여받는 전권이었다. 당연히 원로원 내 상당한 숫자의 의원들은 하나같이 제국의 유력한 실력자들이었고 사회 주도층이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들은 결격사유를 가졌던 아스파르를 황제로 옹립하려는 시도를 했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시대 니카 반란을 뒤에서 조장하기도 했다. 인기가 없었던 이라클로나스 모녀를 폐위시키고 콘스탄스를 세운 후 아직 어렸던 그로부터 섭정을 부탁받았던 것도 원로원이었다. 유스티누스 2세티베리우스 2세 등의 즉위를 결정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또한 콘스탄티노스 7세를 보호하는 데도 일조하였다. 바실리오스 2세 이후 왕실의 적통이 사실상 단절되자 주요 관료들로 구성된 원로원은 이제 공식적으로 국정운영의 중심으로 도약하였다. 로마노스 3세[23]콘스탄티노스 9세[24]가 배출된 가문들이 바로 원로원에서 두각을 드러낸 이들이었다. 하지만 원로원의 문민통치는 결국 미하일 6세 시대에 이르러 권력중추에서 배제된 군부의 반발에 부딪혔고 결국 점차 무너지게 된다.

4.7.2. 상원의 등장


앞서 언급한 콘스탄티노스 9세는 11세기 중반에 들어 원로원에 상당한 변화를 꾀하였다. 이미 학제개편으로 좀 더 다양한 계층간 이동이 가능하도록 환경을 조성하려 했던 그는 원로원 의원 자격을 대폭 떨어뜨려 주요한 상인, 공장장 등 평민이라고 할 수 있는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문호를 열게 되었다. 그리하여 원로원의 대표성은 상당히 제고되었으며 원로원과 시민대중의 거리를 좁혔다.
물론 비슷한 시기에 로마제국은 기존의 원로원을 초월하는 또 하나의 좀 더 중심적인 의사결정기구를 만들게 된다. 이 기구는 보통 기록에서 상원(Prote Sygkletos)으로 불리며 일반적인 원로원(Sygkletos)과 구분된다. 이 기구는 어느 정도 품계가 있어야 참여할 수 있는 원로원과 달리 황제가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참석하여 황제와 보다 직접적으로 정책을 논의할 수 있었다. 이 '상원'은 이후 오랫동안 존속하여 14세기 이후에도 살아남았다. 영어권에서는 추밀원(Privy Council) 등의 유사한 단어로 번역되어 있다. 이러한 체제에서 제국의 정책논의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황제는 원로원을 대상으로 현재의 상황과 정책의 필요성을 강변한다. 원로원은 이를 만장일치로 지지하는 정통성을 부여하는 형식을 담보한다. 고대-중세의 정치에서는 이러한 형식 역시 시민대중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사회복리에 대한 정당성을 보증할 수 있는 증거로 여겨졌다. 황제는 직접적으로 상원 구성원들의 자문과 논의를 접한 끝에 최종적인 결정을 내리게 된다. 그 이후의 정책 집행은 여러 부서(Logothesion)로 이루어진 비서국(Sekreton, 조선을 기준으로 하자면 승정원과 유사한 기구) 휘하의 관료들이 담당하게 된다.

4.7.3. 콤니노스 시대


이러한 형식은 12세기 콤니노스 왕조 시대에도 지속되었다. 요안니스 2세는 1137년 안티오히아 공국이 평화조약을 제안했을 때 이 안건을 원로원으로 회부하였다. 1147년, 시칠리아-아풀리아 공국이 침략을 개시하자 마누일 1세는 원로원의 연설을 통해 침략자들을 규탄하였으며 이후 황실과 지휘관, 전략가들로 구성된 상원을 소집하여 대응을 논의하였다. 다만 11세기 중후반과 비교하여 달라진 점은, 정국운영의 안정성과 일치된 이해관계에 의한 조직을 구성하기 위해 콤니노스 왕실이 대대적으로 정부기구와 상원의 참여자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지간한 정부기구 수장, 특히 상원은 왕실 인사들이 대거 기용되었다. 이것을 이른바 '족벌체제'의 저열한 독점현상으로 보고 저평가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 체제는 대체적으로 잘 운영되었다. 실무는 수장급 이하의 실무관료들이 맡고 전체적인 총괄, 책임이나 상부기구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황제와의 원활한 의사소통을 위하여 왕실인사들이 배치된다는 조직원리에 의해 구성된 체제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히려 이런 정교한 체계를 무턱대로 무너뜨린 안드로니코스 1세 이후 오히려 제국의 복잡한 사회는 방향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했다.

4.7.4. 대중정치의 영향


12세기 말, 콤니노스 선전체제가 붕괴된 이후 제국의 거버넌스는 중심을 잃고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때를 기하여 각 지방의 유력자들은 각지의 도시 참사회(Boule)의 여론을 장악하였으며 이를 기반으로 지방군의 통제까지 손에 넣기 시작했다. 안드로니코스 1세의 과격한 찬탈과 폭정으로 시작된 이 흐름은 이사키오스 2세 시대에 격화되었다. 많은 지방이 정부의 통제를 벗어나고 반란에 가담했다. 알렉시오스 3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한 방식으로서 지방의 유력자들에게 중앙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는 '당근'을 제시하기로 한다. 그것은 바로 '원로원 참여'의 가능성이었다. 그의 시대에 제국정부는 세바스토스(Sebastos) 품계를 저렴한 값으로 여러 지방 유지나 상인들에게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 세바스토스 품계는 원래 알렉시오스 1세가 동생들을 높여주기 위하여 특별히 만들었던 것이다. 알렉시오스 3세는 이 특별한 직위를 제공함으로써 지방을 중앙의 정치에서 이탈시키지 않도록 묶어두고자 했다. 그리고 그 조치는 성공적이어서 이후 점차 지방의 반란이나 불복종은 감소하는 추세를 보인다.
안드로니코스 1세의 통치는 또한 원로원이 엮여 있는 의사결정구조의 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원로원은 그 특성상 상당수의 법관들과 성직자들이 포함되며 당연히 이들의 보수적인 태도 때문에 안드로니코스의 급격한 찬탈은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특히 레온 모나스테리오스(Leon Monasteriotes) 대법관과 같은 사람은 당당하게 원로원 회기 중에 안드로니코스에게 호통을 치는 등 반대의사 표시에도 거리낌이 없었다. 안드로니코스도 레온을 '원로원의 입'이라고 부르기만 하고 감히 손을 대지 못하는 것이 당시의 상황이었다. 이에 맞서 안드로니코스는 궁정으로 시민들을 적극 초청하여 늘 자신의 곁에 두고자 하였으며 그때마다 수시로 유세와 연설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시민들에게 전달하였다. 평소에는 애써 감춰왔던 원리였으며 콤니노스 왕실이 거의 100년 동안 타협과 선전으로 잘 묻어두었던 시민의 적극적인 정치참여가 이로서 폭발하게 된다. 안드로니코스는 이들에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국가적 위기와 결부하여 호소하는 전략을 택했다. 시민들의 강력한 요구와 이따금의 폭력적 개입은 매번 원로원과 정부, 군대도 무력화시키곤 했다. 그는 이러한 방식으로 숱한 폭정에도 불구하고 거의 3년 가까이 집권할 수 있었다.
알렉시오스 3세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이렇듯 팽배한 시민집단의 힘으로 인해 정국운영이 더욱 쉽지 않은 일이 되었다. 그리하여 특별세를 걷어야 하는 등 국가중대사가 있는 1196년의 경우처럼 콘스탄티노폴리스 전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전체 민회'가 개최되기 시작했다. 알렉시오스 4세가 실망스러운 행보를 지속적으로 보였고, 그가 데리고 온 십자군이 조건 이행 문제로 계속 웅거해 있어서 제국이 위기에 빠지자 1204년 1월 25일에는 시민집단이 원로원과 종교회의소 구성원들까지 함께 소집시킨 가운데 자체적으로 새로운 황제 후보를 물색하여 니콜라스 카나보스(Nicholas Kanabos)라는 사람을 황제로 선포하기까지 했다.

4.7.5. 후기


콘스탄티노폴리스이 점령되었다가 수복된 뒤인 14세기에도 의사결정기구로서의 원로원은 유지되었다. 기록상 원로원 회기가 언급되는 마지막 사례는 1341년 내전 발생 소식이 전해진 데 대한 대응으로 소집된 원로원 회의일 것이다. 1360년대 이후로는 대부분의 관직과 품계들이 기능을 상실하고 허직이 되는 현상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 시기가 되면 사실상 원로원도 의미가 퇴색하기 시작하였을 것이다. 추밀원 혹은 상원은 안드로니코스 2세 시기에 언급된다. 이 시기에 들어 상원은 약간의 개편을 통해 콤니노스 시대와 달리 교회 성직자들이나 일반 시민들을 구성원으로 뽑기 시작하여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대표성을 크게 높일 수 있었다. 특히 세금문제를 조절하는 경우에는 일반 농민을 초빙하여 직접 의견을 구하기도 하는 모습을 보였다. 안드로니코스 2세의 아들이자 몬페라토의 후작이 되는 테오도로스는 논문을 통해 상원을 임기제/선출제로 개편하며 황제조차도 따라야하는 법적 구속력을 부여할 것을 주장했다. 비록 그의 개혁안은 채용되지 않았지만 이후 '보편법관'(Universal Judge) 제도로 발전하게 된다.

4.7.6. 참고 자료


Angeliki E. Laiou and Dieter Simon, Law and Society in Byzantium, 9th-12th Centuries , Dumbarton Oaks, 1994.
Demetrios Kyritses, The imperial council and the tradition of consultative decision-making in Byzantium(eleventh to fourteenth centuries), Power and Subversion in Byzantium, Ashgate Publishing, Ltd., 2013.
Demiter Angelov, Imperial Ideology and Political Thought in Byzantium, 1204-1330, Oxford University Press, 2009.
Niketas Choniates, Tr. by Harry J. Magoulias, O City of Byzantium, Annals of Niketas Choniates, Wayne State University Press, 1984.
Paul Magdalino, The Empire of Manuel I Komnenos 1143-1180,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Dejan Dzelebadzic, Provincial Sebastoi, From the End of 12th to Mid 13th Century, Recueil des travaux de l’Institut d’études byzantines L, 2013.
Telemachos C. Lounghis, The Byzantine historians on politics and people from 1042 to 1081, Byzantion Vol.72, No. 2, 2002.

[1] 한자[2] 라틴어[3] 영어[4] 오히려 삼두정치라는 판을 짜서 토지개혁정책을 강행통과시키는 쇼를 성공시킨 사람은 명문귀족 율리우스 씨족 출신인 카이사르였다.[5] 이해를 돕기 위해 각각 극단적인 상황을 가정할 수 있는데 만약 대한민국국회의원 숫자를 전체 유권자 수준으로 늘린다면 총 4000만명이 넘는 국회의원이 존재하게 되고 국회의원의 권리는 각 유권자의 권리와 완전히 동일하게 된다. 국회의원이라는 지위는 유명무실해지고 법안 통과 투표는 국민투표와 완전히 동일한 수준의 규모와 복잡성이 되어버려 정치 권력은 대통령(당시 로마의 경우에는 독재관카이사르)이사실상 일방적으로 독점하는 상황이 되며 현실적인 이유로 대통령의 행정명령이 대부분의 입법을 대체해버리게 된다. 반대로 국회 정원을 단 한 명으로 줄이면 그 의원은 선출과 동시에 총리가 되고 이 경우 오히려 독재관이 의원내각제 국가의 대통령, 국왕, 총독처럼 유명무실한 직책이 되기 쉽다.[법적으로는] 호민관은 당선과 동시에 원로원 의석을 얻었으나(아티니우스법)공화정 후기로 가면서 이 법은 거의 유명무실해졌다.[6]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내전 당시 술라 밑에서 마리우스파의 재산을 빼앗아 한몫 단단히 챙겨간 이력이 있다. 그런 그들이 민중파를 자처한 것만으로도 술라의 개혁이 명분도 실리도 없었다는 의미가 된다.[7] 아무런 경력도 없는 젊은 나이에 카이사르의 후계자라는 걸 앞세워 집정관 자리를 요구했다. 술라 앞에서 군공을 내세워 (술라가 설정한 관직의 나이 상한선을 무시하고) 고위직을 요구한 폼페이우스보다 한술 더 떴다. 이것 자체도 모순의 극치인 것이 원로원이 아우구스투스를 통해 막아주기를 바랐던 안토니우스 또한 카이사르의 후계자라고 주장하는 게 가능할 만큼 상당한 명분과 힘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 모순의 결과는 제2차 삼두정치와 대숙청이었다.[8] 더불어 황제정을 제도화함과 동시에 공화정을 부정했다.[9] 원수정과 대비되는 의미의 로마 전제정[10] 원로원 뿐 아니라 민회도 그 권한이 거의 없어졌다.[11] 사실상 로마 납세에 가까웠다. 극렬한 저항을 우려한 반달족 왕 게이세리크는 그냥 기존에 잡은 포로를 돌려주고 인신에 대한 위협을 가하지 않는 조건으로 막대한 전리품을 요구했고, 그걸 로마에서 자진해서 바친 것이기 때문이다.[12] 그전엔 그냥 지방도시 1인 비잔티움이라서 시 원로원을 따로 둘 정도의 도시도 아니었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새로이 태어나면서 원로원을 두었지만, 아직 로마 원로원과 동급은 아니었다. 콘스탄티우스 2세의 치세 말기였던 359년에 비로소 로마 원로원과 동급으로 승격됐다.[13] 빛나는 분(Illustrious man)[14] 존경스러운 분(admirable man)[15] 아주 유명한 분(very famous man)[16] 영광스러운 분(glorious man)[17] ssimus는 최상급이므로 앞의 것보다 이게 더 높다. 참고로 지금 이탈리아어에도 그대로 쓰이는 표현이다. 악보의 표현인 피아니시모(매우 약하게), 포르티시모(매우 강하게)도 이 최상급 어미가 쓰인 것.[18] 장엄한 분(magnificent man)[19] 비슷하게 신라의 골품제에서도 역사가 오래되면서 진골이 팽창하고 거의 모든 요직을 오로지하자, 6두품 정도나 빼꼼 하면서 존재감을 유지했고, 5두품 이하는 거의 의미가 없어진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20] 그래도 일족이라고 절대로 다 중용하지는 않고 능력을 매우 중시했다. 위치 때문에 양면전쟁, 심지어 '''삼면전쟁''', 신들린 외교 등이 강제된 동로마의 주요인사들이 능력이 없었다면 절대로 1453년까지 못 버텼다.[21] 여담으로, 로마 시에만 두던 로마 특별시장(Praefectus Urbi)도 이때 콘스탄티노폴리스에도 같이 두기 시작했다.[22]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의 그리스어 편집. 왜 이때까지 안 되어 있었어? 라는 의문을 제기할 법 하지만, 법전의 양이 워낙 많은 데다가, 7~9세기를 지배했던 외침, 내전, 성상파괴운동 등보다는 우선순위가 밀릴 수밖에 없는 일이기 때문에 미루어져 있었다.[23] 아르기(이)로스. Argyros[24] 모노마호(코)스. Monomacho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