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도경(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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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박도경(朴道京)
본명
박경래(朴慶來)
별명
박포대(朴砲大)

경화(京化), 화옥化玉)
생몰
1874년 3월 23일 ~ 1910년 3월 18일
출생지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
본관
밀양 박씨
사망지
대구형무소
매장지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추서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도경은 1874년 3월 23일 전라북도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에서 부친 박준식(朴準植)과 모친 한양 조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한미한 가정에서 자랐지만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였으며, 뜻이 보통 사람과 달라 평시에도 언변과 기개가 뛰어났다고 한다. 어렸을 때 늘 말하기를 "장부가 세상에 태어났다가 방안에서 죽는다면 그 위인을 알 수 있는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이웃사람과 나랏일을 걱정하던 얘기를 나눌 때 동석한 사람이 이르기를 "자네는 한미한 집안이라 나라의 은혜를 받지 않았는데 어찌 그렇게까지 나랏일을 걱정하는가" 하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우리가 몸에 옷을 입고 곡식으로 배를 채우는 것이 어느 것인들 나라의 은혜 아님이 없거늘 하물며 5백 년 동안 대대로 모두 이 나라의 신민인데 나라의 형편이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모르는 체 한다면 천리와 인륜이 어디 있는가?"

1907년 정미7조약에 의해 대한제국군이 해산되자, 기삼연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관동리 수련산에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라는 이름으로 의병부대를 구성하고 대장에 올랐다. 이들은 격문을 작성해 돌리면서 일본인과 일진회원을 처단하면 상금을 주겠다고 선언했다. 이 소식을 접한 박도경은 “이제는 내가 죽을 자리를 얻었도다”하고 동지를 보은 뒤 기삼연에게 가담해 종사로 복무했다. 그는 고창읍성 무기고에 총포가 많이 저장되어 있음을 탐지하고 이를 획득하기 위해 지리적으로 가깝고 요새의 형국을 띤 문수사에 본거지를 둬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기삼연은 무장현을 기습한 이튿날인 9월 26일 의병부대의 거점을 문수사로 옮기고 참모진을 앞세워 고창읍성을 기습 공략해 많은 무기들을 탈취했다.
이후 박도경은 포사대장이 되어 아들과 함께 선봉대를 이끌고 전남 각지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뒀다. 그는 몸소 천자포(千字砲)를 휴대하고 대원들을 지휘하여 광주, 담양, 순창 등지에서 활약했다. 1908년 2월 기삼연이 광주에서 체포된 뒤 총살형에 처해지자, 박도경은 격문을 돌려 의병대를 수습한 후 주장으로 추대되고 스스로를 포사장(砲士將)이라 칭하고 의진을 구축했다.
1908년 2월 19일, 박도경은 고창읍의 세리 서상달이 세금 미납자를 엄동설한에 꿇어앉히고 온갖 폭행을 가한ㄷ아는 정보를 입수하고 그를 체포한 뒤 읍민들 앞에서 그의 죄상을 낱낱이 밝힌 뒤 천보총으로 즉결 처분했다. 또한 1908년 기삼연의 뒤를 이은 의병장 김용구(金容球)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중상을 입자, 박도경이 그를 대신해 병권을 잡고 군사를 더욱 보강하고 훈련에 힘써 조직을 강화했다. 그는 오연발기총 1정과 총기 17정, 천보퐁 20정, 화승총 64정을 보유했고, 목포에 머물던 중국인으로부터 다량의 화약을 매입했다. 1909년 2월에 체포된 부하 박이일(朴爾日)이 공술한 기록에 따르면, 박도경이 이끄는 부하는 110명이고 선봉장 이도운(李道云), 중군장 손도연(孫道演)[1], 도십장 구연역(具連譯)과 좌우익장 및 참모를 거느렸다고 한다.
그러나 1909년 일본군이 남한 대토벌 작전을 감행하자, 다른 지역의 의병들이 여러 곳에서 괴멸되거나 흩어지면서 박도경의 부대는 점점 고립되었다. 이에 박도경은 의병들을 해산시켜 살길을 찾게 하고, 자신은 홀로 방등산의 석굴에 은신해 총상을 치료하며 기회를 엿봤다. 그러나 일본군 보병 제1연대 8대대가 박도경의 부친 박준식을 포박한 뒤 은신처 수색에 나서자, 결국 박도경은 1909년 11월 3일 가족을 학살하지 말며 체포된 동지들을 석방하라는 조건을 내세우며 하산했다.
그는 곧바로 체포되었고, 1909년 12월 3일 광주지방재판소 전주지부와 1910년 1월 18일 대구 항소원 형사부, 2월 22일 대심원 형사부에서 잇달아 사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자신을 면회 온 어머니 한양 조씨에게 "왜놈 손에 죽느니 차라리 깨끗하게 자결함이 옳습니다."라며 자신의 뜻을 밝혔고, 이에 모친은 독약을 구해 그에게 넘겼다. 그는 죽기 전 간수에게 부탁해 자신의 모습을 촬영한 뒤 노모에게 그 사진을 드리게 했다. 현재까지 전해지는 그의 사진은 이때 찍은 것이라고 한다.
1910년 3월 18일, 박도경은 옥중에서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기렸다. 대구의 아전들은 돈을 추렴하여 초상을 치렀고, 상인들은 수백냥을 모아 고향으로 반장(返葬)할 수 있도록 도왔다. 영남의 선비들도 제전(祭奠)을 올렸지만, 모친 한양 조씨는 미천한 신분으로 사대부의 절을 감당할 수 없다고 사양했다. 박도경의 유해는 고향에 운구되어 고창군 고수면 은사리 앞산에 묻혔다가 1963년 고창읍 교촌리 향교산으로 이장되었고, 2009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박도경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손도연과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