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학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생애
박승학은 1919년 10월 3일 평안북도 정주군 정주읍 성내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중국 남방대학에 재학하다가 1942년 5월 중국인 학생 장가걸저(張家傑著)의 천거로 중국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 완남참(晥南站) 및 연호조(燕湖組) 주임 이세청(李世淸)의 부관이 되었다. 이후 그는 이세청 등과 함께 일본군의 주둔 위치와 소속 부대병력, 그리고 병력의 이동 규모 등에 관해 상세하게 보고서를 작성했다.
또한 한적 사병(韓籍士兵) 및 애국 청년 초모(招募)·후송과 지하공작운동을 전개했으며, 1942년 10월에는 안휘성 영국현에 주둔하던 군사위원회 별동군 충의구국군총지부 중장 마지초(馬志超)에게 난징에 거주하는 한국인에 대한 공작 책임자로 김해일(金海一)·박재엽(朴再燁)·장동식(張東植) 등을 천거했다.
1943년 3월 상하이의 한인 지사들과 연락하여 일본군의 행적을 탐지하여 중국군에게 제보하는 활동을 벌였고, 일본군 내부의 한적 사병들을 탈출시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게 해 수십명의 탈출을 성공시켰다. 1944년 5월 충의구국총지부 참모처의 주요 참모로 임명되어 정천(鄭天)·박재성(朴在成) 등을 데리고 영국현 소재 총지부 참모로 부임하였다. 이 후 장동식으로 하여금 한적 사병 이희화(李熙和) 등 10여 명을 광복군에 입대시키게 하였다.
1945년 야전방송을 통해 대적심리전을 전개하여 한적 학병 7명을 탈출시켜 광복군에 입대시키기도 했다. 1945년 8월 초에는 열세한 한국군 병력으로 항저우에 주둔한 일본군 1개 여단 병력을 상대로 전투를 벌여 적에게 타격을 입히기도 했다. 8.15 광복 후에는 일시 귀국했지만 곧 홍콩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여생을 보내다 1978년 9월 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승학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2년 그의 유해를 국내로 봉환하여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