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원근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200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원근은 1912년 12월 8일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면 교사리에서 부친 박치호와 모친 이영자 사이의 10남매 중 장자로 태어났다. 그는 1927년 보은 삼산보통학교를 14회로 졸업하고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그러던 1929년 6월, 그는 경성부 필운동에 거주하는 김영학(金榮鶴)의 집에서 손경준(孫敬俊) 등과 함께 사상연구의 비밀결사 진화회(進化會)를 조직하였다. 회장엔 손경준을 선출하고 각 부서의 담당자를 정하고 회지 ‘진화(進化)’의 발행을 결정하였다. 이후 ‘진화’를 발행하여 회원 간에 회람하면서 사상연구에 힘썼다.
1930년 3월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자퇴한 후, 그는 인쇄업에 종사하면서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하고 사회주의 사상에 깊이 감화되었다. 1931년 6월 사직공원(社稷公園)에서 비밀회의를 개최하여 사회주의의 실천을 위해 사회주의 선전의 3대 강령을 세우고 회명(會名)을 삼인회(三仁會)로 고치기로 결정하였다. 그 책임자로 김영학을 선임하고 사회주의 선전의 실행 방법으로 동회의 회지(會誌) ‘삼인(三仁)’을 발행하기로 하였다. 이후 회명을 다시 신로회(新路會)로 고치고 회지 ‘신로(新路)’를 발행하였다. 이들은 회지의 발행을 통해 회원의 의식 교양을 높이고 조직의 확대 강화에 노력하였다. 박원근은 이 회지에 사회주의 사상을 선전하여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글을 수차례 투고하였다.
그러나 1932년 9월7일 신로회 조직이 드러나 박원근을 포함해 동지 6명이 종로경찰서에 체포당했다. 이후 1934년 11월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출판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선고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때 그는 1933년 8월경부터 1934년 봄까지 그곳에 있던 모스크바 공산대학 출신 이건호(李健鎬)로부터 사회주의 이론 및 실천방법에 대해 지도를 받았다. 1935년 1월 4일 만기 출소한 그는 1936년 5월부터 6월까지 경성 관훈동 산해여관에서 지내면서 이건호 등과 함께 항일운동 자금을 모으는 활동을 계속했다.
이후 금산으로 내려온 박원근은 중일전쟁 이후 조선의 독립과 신사회의 건설을 목적으로 박철원(朴哲元)을 지도하여 동지 이석태(李錫台)·이동우(李東雨) 등과 함께 대전, 금산 등지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1939년 5월9일 신인구락부 사건에 연루되어 다시 금산경찰서에 검거되었다. 1940년 2월26일 전주지방법원으로 송치되었고, 1941년 10월19일 전주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2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이때 일제 재판부는 박원근에 대해 “1937년 7월 발발한 지나사변이 반드시 세계대전으로 확대될 것이고 공산주의 운동을 실현할 날이 다가왔다고 하면서 조선의 적화운동을 결의한 자이다”라고 명시했다.
1942년경 출옥 후 결혼하여 3남 1녀를 둔 박원근은 8.15 광복 후 보은군 마차 임금조합에서 일하면서 자제들에게 '적기가'를 가르치는 등 좌익 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다 6.25 전쟁 발발 후인 1950년 7월 10일 충북 보은경찰서 경찰 김달용에게 체포된 뒤 보은면 길상리 뒷산 미륵뱅이로 끌려가 총살되었다. 그의 유해는 보은중학교 뒤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가 2011년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9년 박원근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