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일(야구선수)
한국의 전 야구 선수로 주 포지션은 유격수였다.
재일동포 출신이다. 1963년 전국체전에 재일동포팀으로 참가하여 재일동포팀의 2년 연속 우승에 큰 기여를 하였고, 이어 동국대학교 야구부에 입단하게 된다. 이 때의 활약으로 인하여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하게 된 것이 한국 국가 대표팀 경력의 시작이었다.[1] 이 대회에서 신용균과 함께 두각을 나타내어 다음 해에 은퇴하게 된 김진영을 잇는 국가대표 유격수의 계보를 잇게 된다.
실업야구에서도 스카웃 제의가 들어와 동국대를 1년만에 자퇴하고 1964년 크라운맥주 야구단의 창단멤버가 된다. 당시 크라운맥주 야구단은 적극적인 물량공세로 실업야구를 평정했다. 이 때의 주축투수가 국대 투톱이었던 신용균과 김영덕에 4번타자가 당시 국대 1루수가 김응룡이었던 흠좀무한 팀이었다. 박정일은 이 때 유격수로 활약하면서도 클린업 트리오에도 들어가기도 하는 등 5툴 플레이어급의 활약을 보인다. 적극적인 도루도 선보였으며, 사사구도 많은 편이었던 그야말로 다방면에서 화려한 선수였다. 1964년 금융팀과 실업팀의 대결로 벌어진 한국 야구 사상 최초의 올스타전에서도 실업팀의 주전 유격수로 실업팀의 승리를 이끌었다.[2] 다만, 유격수 수비에 있어서는 다음 국가대표 유격수가 되는 하일에 비교해서 떨어지는 편으로 하일이 안정감에 있어서는 더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박정일이 국가대표 유격수로 활약한 것은 1~2년에 불과하였으며, 이후에는 하일이 고정적인 유격수로 활약한 것으로 보인다.
1965년 시즌 이후 1966년 크라운맥주는 한일은행 야구단에 인수되었고, 박정일도 한일은행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1967년 한일은행에서의 활약을 마지막으로 신용균과 함께 야구계에서 은퇴한 뒤, 일본으로 돌아갔다. 실제로 상당히 짧은 기간의 한국 무대 활약이었으나, 신용균, 김영덕과 함께 일본 야구와의 격차를 절감하게 한 선수들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이후 실업팀들이 재일교포 섭외에 열올리더라며 기자들이 분개할 정도였으니 그 정도를 알 수 있다.
1980년대 중반에 잠시 해태 타이거즈 코치를 지내기도 했지만 그 뒤의 근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재일동포 출신이다. 1963년 전국체전에 재일동포팀으로 참가하여 재일동포팀의 2년 연속 우승에 큰 기여를 하였고, 이어 동국대학교 야구부에 입단하게 된다. 이 때의 활약으로 인하여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일원으로 참가하게 된 것이 한국 국가 대표팀 경력의 시작이었다.[1] 이 대회에서 신용균과 함께 두각을 나타내어 다음 해에 은퇴하게 된 김진영을 잇는 국가대표 유격수의 계보를 잇게 된다.
실업야구에서도 스카웃 제의가 들어와 동국대를 1년만에 자퇴하고 1964년 크라운맥주 야구단의 창단멤버가 된다. 당시 크라운맥주 야구단은 적극적인 물량공세로 실업야구를 평정했다. 이 때의 주축투수가 국대 투톱이었던 신용균과 김영덕에 4번타자가 당시 국대 1루수가 김응룡이었던 흠좀무한 팀이었다. 박정일은 이 때 유격수로 활약하면서도 클린업 트리오에도 들어가기도 하는 등 5툴 플레이어급의 활약을 보인다. 적극적인 도루도 선보였으며, 사사구도 많은 편이었던 그야말로 다방면에서 화려한 선수였다. 1964년 금융팀과 실업팀의 대결로 벌어진 한국 야구 사상 최초의 올스타전에서도 실업팀의 주전 유격수로 실업팀의 승리를 이끌었다.[2] 다만, 유격수 수비에 있어서는 다음 국가대표 유격수가 되는 하일에 비교해서 떨어지는 편으로 하일이 안정감에 있어서는 더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박정일이 국가대표 유격수로 활약한 것은 1~2년에 불과하였으며, 이후에는 하일이 고정적인 유격수로 활약한 것으로 보인다.
1965년 시즌 이후 1966년 크라운맥주는 한일은행 야구단에 인수되었고, 박정일도 한일은행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1967년 한일은행에서의 활약을 마지막으로 신용균과 함께 야구계에서 은퇴한 뒤, 일본으로 돌아갔다. 실제로 상당히 짧은 기간의 한국 무대 활약이었으나, 신용균, 김영덕과 함께 일본 야구와의 격차를 절감하게 한 선수들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이후 실업팀들이 재일교포 섭외에 열올리더라며 기자들이 분개할 정도였으니 그 정도를 알 수 있다.
1980년대 중반에 잠시 해태 타이거즈 코치를 지내기도 했지만 그 뒤의 근황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