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덕

 


김영덕의 수상 경력 / 역임 감독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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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시리즈 우승 감독
1982






[image] [1]
이름
김영덕(金永德)[2][3]
본관
언양 김씨#
생년월일
1936년 1월 2일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일본 교토부[4][5][6]
학력
즈시카이세이고교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소속팀
난카이 호크스 (1956~1963)
대한해운공사 (1964)
크라운맥주 (1965)
한일은행 (1966~1969)
지도자
한일은행 감독 (1969~1971)
장충고등학교 감독 (1977)
북일고등학교 감독 (1977~1981)
OB 베어스 감독 (1982~1983)
삼성 라이온즈 감독 (1984~1986)
빙그레 이글스 감독 (1988~1993)
LG 트윈스 투수 인스트럭터 (1996)
LG 트윈스 2군 감독 (1997~1998)
국가대표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코치 (1971)
베네수엘라 세계청소년야구선수권대회 감독 (1978)
미국 오하이오 뉴어크 세계청소년선수권대회 감독 (1981)
1. 소개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3.2. 프로 시절
3.2.1. OB 베어스 감독 시절
3.2.2.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3.2.3. 빙그레 이글스 감독 시절
3.2.4. 이후
4. 기타
5. 평가와 비판
5.1. 기록 조작
5.2. 동료야구인들과의 관계
5.3. 큰 경기에 약한 감독
5.4. 종합
6. 역대 감독 성적
7. 관련 문서


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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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의 모습
대한민국야구인이자 재일교포 출신이다. 일본명은 가네히코 나가노리이며 개명 후에는 가네히코 히데시게이다.
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김영덕편 상, 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김영덕편 하
KBO 특별기획 야구를 말하다 - 김영덕 편

2. 선수 경력


일본 가나가와현 출생으로 1956년 일본 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에서 입단했다. 1959년 1군에 데뷔하여 1963시즌까지 통산 69경기(158.2이닝)에 출장하여 7승 9패 평균방어율 3.57의 성적을 거두었다. 통산방어율을 보면 나쁘지 않은 성적이었지만 그에 비해 출장 경기수는 많지 않은 편이다. 부상이 많았고, 무엇보다 이시절 난카이 호크스퍼시픽리그를 평정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팀 투수진이 워낙 좋았던 탓도 컸다. 그리고 재일교포로 인한 차별도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한편 김영덕 본인 자신은 오사카판 최동원의 4연투 4연승이란 말도 안 되는 역투로 한 차례도 출장하진 못했지만 1959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경험하기도 했다. 아는 사람은 적지만 그가 콩라인이 아니라는 또다른 증거.
차별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차에 일본 사회인야구에서 별볼일 없는 선수였던 김성근[7]이 한국 실업야구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김영덕은 자신도 고국 무대에서 뛰어보기로 결심했다. 만28세였던 1963시즌을 끝으로 난카이 호크스에서 은퇴하고 대한민국으로 건너온 김영덕은 이후 그야말로 리그를 초토화시켰다. 실업 야구 데뷔 첫해인 1964년 33경기 255이닝 동안 단 9실점하여 방어율이 무려 0.32.
1967시즌은 특히 각종 기록들이 쏟아진 해로 그의 전성기에 해당하는 시절이었다. 1967시즌 25경기에 등판해 17승 1패 승률 94%라는 놀라운 기록을 수립했다. 시즌 평균자책점은 0.49.[8] 또 54이닝 동안 무실점을 기록함과 동시에 10연승을 달성한 전설적인 기록을 가지고 있으며, 9월 25일에는 퍼펙트게임까지 달성했다. 실업야구 최초의 퍼펙트 게임은 김영덕이 기록하기 이틀 전인 9월 23일 고순선이 먼저 했다고 한다. 김영덕은 2번째.
그밖에도 노히트노런 2회를 기록하는 등 선수시절 동안 신화적 기록을 쌓았다. 여기에 1999년 한국야구위원회대한야구협회가 공동출판한 "한국야구사"에서는 슬라이더를 국내야구계에 최초로 도입한 인물로 꼽았으나 본인 인터뷰에 따르면 본인은 포크볼과 싱커를 처음 던진 사람이며, 슬라이더는 역시 재일교포출신인 신용균이 먼저라고 밝혔다.[9]
뿐만 아니라 타자로서도 뛰어난 활약을 보였는데, 데뷔시즌인 1964시즌의 경우 3할 타율로 타율 6위에 올랐고, 4개의 홈런으로 홈런 공동 2위, 출루율은 4할7푼6리로 3위에 올랐다.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재일교포 출신 야구인으로 실력에 있어서는 그닥 차별을 받지 않았다고 한다.[10] 김성근보다 일본에서 훨씬 오래 살았고 서른살에야 고국땅을 밟았지만 재일교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어려울 정도로 유창한 서울 말투를 구사했다. 다만 현재는 연로하여 말투가 느려졌고 발음도 예전보다 부정확해지면서 일본어투가 느껴지기는 한다.

3. 지도자 경력



3.1. 실업야구 시절


1970년 한일은행에서 선수 겸 감독으로 취임하면서 지도자 생활에 들어갔다. 이때 이광환, 김응용, 김인식과도 인연을 가지게 되었는데, 김응용과의 악연은 이 때부터 생겼다고 한다 당시 강대중 한일은행 감독의 후임으로 김응용이 낙점된 상황이었는데, 중간에 나이 서열상 선배인 김영덕을 먼저 감독에 앉힌 다음, 김영덕의 후임으로 김응용을 앉힌다는 모양새였다고 한다. 그러나 오해가 생겨 김응용 입장에서는 자기 감독 자리를 김영덕이 갑툭튀해서 뺏었다고 생각했다고. 오랜 세월이 흘러 그때에 이야기에 대해 박동희가 김응용과 인터뷰했을 때는 그런 이야기는 잘 모르겠다고 했으나 진실은 저 너머에... 김영덕은 한일은행을 맡은 해 그해 곧바로 우승을 차지해 우승감독이 되었다. 어쨌든 위 일화가 진실인지 한일은행은 2년간의 김영덕 감독 체제 후에 1972시즌부터 김응용이 감독이 되었다.
1971년 제9회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한국국가대표팀이 1차 리그에서 탈락 위기에 쳐한 상황에서 감독대행이 되어 팀을 반등시켜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때 공로로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았는데 김영덕은 그의 인생 최고의 영광으로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후 한일은행 감독 일선에서 물러나 은행 창구 업무를 보게 되었는데 어려운 한글 받침 때문에 마음고생을 하기도 했다고.
1977년 장충고 감독으로 야구계에 돌아왔고, 1977년 9월 말부터 프로야구 개막 직전인 1981시즌까지 천안북일고 감독을 지냈다. 천안북일고 감독을 지내면서 한화그룹과의 깊은 인연을 시작하게 되었다. 훗날 프로감독이 되고 나서 김영덕은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했다.
"김종희 회장으로부터 물질적인 것은 물론 정신적으로도 큰 은혜를 입었다. 보수도 후했다. 세금 제하고 950만원을 받았으니까[11] 프로야구 부러울 게 없는 대우였다. 보수가 문제 아니었다. 인간적으로 따뜻하게 대해준 그 마음이 고마웠다."
나중에 빙그레 이글스가 창단되자 김영덕은 김종희 회장과의 인연으로 신생팀이었던 빙그레 감독을 맡아 단기간에 강팀으로 육성시키는데 성공했다. 빙그레 감독에서 물러난 후에도 김종희, 김승연 회장과의 의리를 생각해서 다른 팀 감독을 맡지 않겠다고 했고 실제로 그 약속을 지켰다.

3.2. 프로 시절



3.2.1. OB 베어스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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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한국프로야구가 출범했을 때 당시 대한야구협회 회장인 최인철의 소개로 두산그룹 회장인 박용곤 회장에게 OB 베어스 감독을 제의받아 창단 감독에 부임하게 된다. 개막시기 야구계에서 지도자로 명성이 높은 3명을 꼽으면 '빨간 장갑의 마술사'로 불리던 김동엽 원년 해태감독, 국가대표팀을 이끌던 김응용, 그리고 김영덕이 꼽혔다.
당시 창단 멤버 코치로는 타격코치로 이광환, 투수코치로 김성근이라는 조합이었으며, 선수 구성도 원년도 22연승의 에이스 박철순, 실업야구 홈런왕 김우열, 학다리 신경식, 계형철, 김유동, 윤동균, 김경문등을 앞세워 시즌 첫 개막전 MBC 청룡박철순의 완투승으로 승리한 이래 5월 부터 10승 5패로 단독 선두를 유지하고, 28승 8패로 전기리그를 우승한 이후 1982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라이온즈를 상대로 원년도 첫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이 당시 세간에서는 박철순의 선수 생명과 맞바꿔 얻은 우승이라는 비판이 쏟아졌고, 실제로도 박철순은 24승 4패에 224 2/3이닝이라는 무지막지한 이닝과 함께[12] 팀을 원년 우승으로 이끌고 곧바로 부상으로 쓰러졌지만, 정작 당사자인 박철순"오히려 내가 등판을 자원하자 김영덕 감독님은 결사 반대했다" 라면서 김영덕의 혹사설을 전면 부정했다."김영덕 감독이 혹사시켜 허리 망가졌다?… 완전 오해"
그러나 찬란했던 원년도 우승 이후, 다음 시즌에는 그야말로 성적이 폭망하게 되는데 박철순, 선우대영 등 주축 선수들의 부상과 원활하지 못한 신인 수급[13]등의 복합적인 이유로 전기리그 6위, 후기리그 5위로 마친뒤 10월 14일 OB 베어스 감독에서 사임한다.

3.2.2.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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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시즌 이후 OB 베어스에서 사임한 김영덕 감독은 원년 한국시리즈에서 자신이 꺾은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부임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주옥같은 기록들이 참 많이도 나왔었다.
삼성 라이온즈에 부임하기까지 에피소드는 후배인 김성근이 삼성행 제의를 받고 상의했을 때 곧바로 자기가 사임하고 그 자리를 먹튀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실제로는 당시 삼성의 노진호 단장[14]김영덕, 김성근, 김진영 세 명에게 제의를 했었다고 하고, 서로가 모르고 있는 상황에서 김성근이 삼성행 이야기를 꺼내자, 역시 삼성행 제의를 받았던 김영덕이 자기가 먼저 달려가 협상한 것. 삼성은 전격 발탁이라고 했으나, 사실은 이전부터 물밑작업을 해왔다고 하고, 두산그룹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기가 찰 일. 당시 두산그룹의 박용곤 회장은 김영덕을 감독으로 선임하기 전에 관상까지 일일이 따지면서 영입을 하고는 그야말로 극진히 대접했었다, 심지어 자진 사임 이후에는 지도자 유학까지 보내주겠다고 했으나...
어쨌거나, 삼성 감독에 부임한 김영덕은 3년간의 기간동안 각각 1984년 .550, 1985년 .700 1986년 .654 라는 승률로 1회 통합우승, 2회 준우승을 기록했다. 특히 1984년과 1985년 시즌은 지금까지도 기억되는 편.
1984년의 경우 포스트시즌에서 롯데와 OB 중 상대적으로 쉽다고 판단한 롯데를 골라[15] 고의적인 져주기 게임을 한 것. 당시에는 롯데한테 2연패를 깔고 들어간다는 생각으로, 2진급을 내보냈었다고 직접 시인했다. 하지만 오히려 2진급 선수들이 자신들의 실력을 보여주려 의욕적으로 경기를 펼쳐 리드를 해나가자 1군 선수들로 교체한 이후 노골적인 실책플레이로 갖은 비난을 받았고, 그때의 일은 아직도 미안하다고 밝혔다. 그리고 여기에서 그 유명한 말인 비난은 순간이고 기록은 영원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른 것은 다 인정해도 그것은 기자들이 지어낸 말이었다고. 그리고 그렇게 야유속에 올라간 1984년 한국시리즈에서는 모두가 알다시피 가을의 전설이 탄생한다.
이후 절치부심한 1985년 시즌에서는 전무후무한 전/후기 통합우승으로 프로야구 역사상 유일무이하게, 한국시리즈 없이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프로야구 역사상 처음으로 2회 우승을 기록한 감독이 되나...
다음해인 1986년도 무난하게 순항중이었는데 시즌 중 요로결석으로 입원하게 되었다. 그래도 한국시리즈까지는 갔지만 해태 타이거즈에게 깨진 이후 사임하게 된다. 한국시리즈 우승을 못해 잘린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김은식이 쓴 '삼성 라이온즈 때문에 산다'에서는 "오랜 객지생활로 가정생활이 피폐해"져 김영덕이 재계약 포기를 선언했고 이후 희망대로 당시 집이었던 천안시와 가까운 곳에 연고를 둔 빙그레 이글스의 감독으로 취임했다는 말이 언급되어 있는데, 이 대목을 봤을 때는 감독직에서 잘린 것이 아니라 김영덕이 스스로 감독 자리를 포기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후 김영덕 후임 감독은 롯데 자이언츠의 초대 감독 출신인 박영길로 팀 타율 3할을 달성한 사람이자 외야수 출신 감독 중 가장 성적이 좋은 감독이다.

3.2.3. 빙그레 이글스 감독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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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의 감독에서 물러난 후 1년 간 야인으로 지낸 김영덕은[16] 1988년 빙그레 감독에 취임하였다.
당시 빙그레는 창단한지 3년째인 신생 팀으로 1986~1987년 각각 최하위(7위)-6위에 머물렀지만 전임 배성서 감독의 혹독한 훈련으로 키워낸 이상군, 한희민, 유승안, 장종훈 등등의 투타 자원들이 있었다. 여기에 김영덕 자신의 지도력을 더한 빙그레는 그 해 돌풍을 일으키며 정규 시즌 2위로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비록 해태 타이거즈에 밀려 준우승에 그쳤지만 그때까진 좋았다...
이후 1989년, 1991~1992년 한국시리즈에 진출[17]하는 성과를 보였으나 그때마다 김응용 감독의 해태 타이거즈에 번번이 밀렸고, 심지어 1992년 한국시리즈 에선 시즌 3위로 올라온 롯데 자이언츠[18]에게 무력하게 우승을 내주기까지 했다.[19] 이때부터 김영덕은 OB 시절 원년 코시 우승의 경력에도 불구하고 콩라인의 이미지를 굳히게 되었다...
그 외 1990년 시즌 중반까지 순조롭게 리그 선두를 달리고 있었으나, 난데없이 터진 "김영덕 종신감독 계약설"로 인해 팀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면서 정규시즌 3위로 추락, 간신히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가 4위 삼성 라이온즈에 발렸고, 게다가 김영덕은 종신계약설로 인해 강병철 수석코치와 사이가 벌어지며 강병철이 이듬해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 이적하는 연쇄반응이 벌어지기도 했다.[20]
이 과정에서 김영덕은 이상군, 한용덕, 전대영, 김상국 등의 북일파한테 보호막을 쳐 주었고, 강병철은 유승안, 한희민, 장종훈, 송진우 등이 속한 비북일파한테 보호막을 쳐 줬는데 이런 현상은 1990년 준플레이오프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당시 주전 유격수였던 장종훈이 어깨부상으로 출전이 불투명해지자[21] 1~2차전에서는 북일고 출신의 이종호가 스타팅 멤버로 출전했고 장종훈은 1차전에 대타로 나왔을 뿐이었으며 2차전에서는 1차전에서 대주자로 출전한 또다른 북일고 출신 조양근을 김성갑 대신 스타팅 2루수로 출전시킨 바 있었다.
게다가, 2차전에서는 4-2로 앞서던 7회말 선발 한용덕이 솔로홈런을 맞자 빙그레는 투수를 한희민으로 바꿨지만 9회말 연속 솔로홈런을 허용하여 패전투수가 되었는데 북일파 한용덕의 승리를 비북일파 한희민이 날려먹은 셈이 됐다.
그도 그럴 것이 1990년부터는 북일파 김상국을 주전포수로 등용했고 다음 해에는 또다른 북일파 포수 양용모까지 등용했다. 게다가, 1991년에는 그 해 주전 유격수였던 비북일파 황대연이 플레이오프 1차전에서 게임 전 연습 도중 부상을 당해 남은 시즌을 마감하자 한국시리즈까지는 북일파 선수들인 조양근, 이종호, 지화동 등을 써먹은 바 있었고 플레이오프 때는 비북일파 유승안을 기용하지 않았다.[22]
그 후, 1993년 이정훈, 장종훈 등 주축 선수의 부상과 에이스 한희민과의 불화가 불거지면서 빙그레는 김영덕 감독 취임 이후 최악의 성적인 정규시즌 5위에 그쳤고, 결국 김영덕은 그 해를 끝으로 빙그레 유니폼을 벗었는데 당시에는 지화동(2루수), 양용모(중견수 겸 포수), 지화선(우익수, 지화동의 동생.) 등 북일파를 대거 기용했다. 그리고 빙그레는 시즌 후 한화 이글스로 팀명을 바꾸고 강병철을 신임 감독으로 영입하였다.

3.2.4. 이후


이후 김영덕은 1996~1998년 LG 트윈스의 투수 인스트럭터와 2군 감독을 역임하였고, 1998년 LG 트윈스의 2군 감독직을 끝으로 현장을 떠났다. 17년 오랜만에 한 인터뷰에서 밝히길 김승연 회장과 1군 감독을 다시 하지 않겠다고 약속한 것을 이행해 의리를 지키고 싶었다고 한다.

4. 기타


현역 시절 별명은 변태(...) 아마 1번항목의 그 변태 맞을거다. 김성근의 야신이나 김응용코끼리 같은 별명과 다르게 좀 그렇다. 그냥 지어낸 것도 아니고 1980년도 초부터 김성근 OB 베어스 감독이 삼성으로 야반도주하듯이 떠난 김영덕 감독을 비하하려고 선수들에게 변태라고 붙였다는데 왜 이런 별명이 생겼는지는 당사자들만 알듯. 실제로 삼성 감독 재임 시절 OB의 신인 포수 배원영이 선배들 지시로 멋모르고 삼성 덕아웃을 향해 "변태, 변태"라고 외쳤다가 김영덕 감독의 불꽃 싸대기를 맞았다고(...) 그 전까지는 할배였다.

5. 평가와 비판



5.1. 기록 조작


지금까지 살펴봤듯이, 그는 OB에서의 원년 우승, 삼성에서의 전후기 통합 우승, 그리고 빙그레의 강팀 도약 등을 비롯해서 분명 KBO 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기록과 성적을 거둔 명감독이다. 그럼에도 그의 이미지로 기억되어 있는 것은 감독으로서의 역량보다는 바로 기록조작.[23]
아래는 그가 지금까지도 비판받고 있는 문제의 '타이틀 만들어주기' 사례들.
1.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이만수의 타격 기록을 위해 경쟁자였던 롯데 홍문종을 9연타석 고의사구로 내보냄(1984년). 그런데 사실은 10연타석 고의사구나 다름이 없다. 왜냐하면 9연타석 고의사구 후 비난이 쏟아지자 다음 타석에선 포수가 일어나지는 않고 그냥 볼만 요리조리 보내서 볼넷으로 또 출루시켰다... 포수가 일어나서 손을 벌려야 고의사구니까...
2. 빙그레 이글스 감독 시절 고원부의 타격왕 경쟁
당시에 경우의 수를 계산기로 계산해가며 출장 여부를 결정함(1989년). 그러한 탓에 고원부에게는 '계산기 타격왕'이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이 붙었다. 그리고 20년 뒤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3. 빙그레 이글스 감독 시절 송진우의 다승 1위를 만들어주기 위해 한희민을 5회에 내리고 19승째를 만들어줌(1992년). 그리고 13년 뒤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24][25]
4. 빙그레 이글스 감독 시절 이정훈의 타격 1위를 유지하려고 장효조를 볼넷으로 내보냄(1991년).[26]
5. 빙그레 이글스 감독 시절 유승안의 타점 1위 달성을 위해 유승안의 전 타석이었던 전대영이 안타를 칠때 당시 3루주자였던 황대연에게 홈을 밟지 말라고 지시함(1989년).[27] 다만 당시 명 야구기자였던 이종남이 현장에서의 취재를 바탕으로 펴낸 저서인 '사람 좋으면 꼴지'에 따르면 유승안이 경기 시작 전에 동료들에게 자신이 타석에 있을때 자신의 안타 등으로 홈에 들어와 득점하는 주자에게 자비로 상금을 지급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때문에 유승안이 걸어둔 상금에 욕심이 생긴 3루 주자 황대연이 전대영의 안타때 홈을 밟지 않았던 것이라고 하며, 김영덕 감독의 지시가 있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리고 그 황대연은 다음 타자로 나온 유승안의 적시타로 유유히 홈을 밟아 유승안이 주는 상금을 챙길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타이틀 만들어 주기에 대하여 김영덕 감독은 팀을 위해 엄청난 희생과 훈련을 따라온 선수를 위해 감독으로서 당연히 해줘야 하는 '배려'라고 배웠고, 당연히 그렇게 하는게 맞다고 밝혔다. 이는 난카이 시절 감독인 츠루오카 카즈토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거리낌 없이 이렇게 할꺼라고 한다. 타이틀을 만들어 주는데 자신은 한점 부끄럼이 없다고... [28]
또한 항상 거론되는게 노골적인 져주기 게임.[29][30]
1984년 삼성 라이온즈 감독 시절 전기리그 1위로 한국시리즈에 직행한 상태에서[31], 후기리그 1위를 보다 만만해 보이는 롯데에게 밀어주기 위해서 시즌 막판 노골적인 져주기 게임을 했다.
당시 상황은 OB는 해태와 삼성은 롯데와 2연전을 남겨두고 있었다. 이 때 OB가 해태를 모두 잡고, 삼성이 롯데에게 1승이라도 거둬주면 OB가 후기리그 우승을 거둘 수 있었다. 그리고 OB는 이미 의욕이 없던 해태를 잡고 2승을 먼저 거두었기 때문에 삼성의 선택에 따라서 롯데와 OB중에서 한국시리즈 상대를 고를 수 있었다. 그리고 삼성의 선택은 롯데였다. 롯데도 이런 분위기를 알아차리고는 최동원을 포함한 주력 선수들 빼고 거저 먹으려고 들었고, 지라고 내보낸 2군 선수들이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너무 잘했다는 것이다. 때문에 조작이 보다 노골적이 될 수밖에 없었고, 마지막 2차전은 후기리그 우승팀을 결정하는 경기라고 전국에 생중계 된 덕분으로 전국 시청자들이 이 어처구니 없는 작태를 목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상황은 더 커졌다.
결국 껄끄러웠던 OB 대신[32] 비교적 약체인 롯데와 한국시리즈를 했지만 그해 한국시리즈는 최동원의 초인적인 나홀로 4승에 힘입은 롯데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우승했다. 김영덕과 삼성은 욕은 욕대로 먹고서 우승도 놓치는 2중의 굴욕을 맛보았다.
명감독이긴 하지만 위의 사례처럼 '기록'에 지나치게 집착한 면이 있어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33] 강병철[34], 김성근[35]하고는 결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사이.
OB 베어스의 원년 우승 이후 1983년 전기 6위, 후기 5위, 종합승률 5위로 추락한 성적에 책임을 지겠다며 OB 감독직에서 사임했으나, 물러난 후 불과 열흘만에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취임했다. 당시 삼성 라이온즈에서는 OB의 투수코치였던 김성근을 영입하고자 했으나, 김성근은 김영덕에게 상의했고 김영덕은 김성근의 삼성행을 만류해 실제로 김성근은 OB에 남았다. 그러나 도리어 후배의 기회를 가로채고 본인이 삼성으로 튄 것이다. 그러한 연유로 당시 OB의 선수들과 김영덕 감독 사이에는 악감정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이후 김영덕은 김성근이 전 감독인 김영덕에게 선수단이 인사를 하도록 지시해 삼성 덕아웃으로 찾아와 인사를 하려는 베어스 선수단을 쫓아 내는 등으로 감정의 골이 깊어진다.[36] 그래서 OB 베어스의 고참들이 뭘 모르는 신인 후배를 시켜 김영덕 감독의 별명을 부르며 야유하였고, 김영덕 감독은 이후 OB 덕아웃으로 찾아가 그 선수의 뺨을 때리며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된다. (출처 : 두산 베어스 때문에 산다)
송진우, 이만수가 감독의 기록조작으로 개별 타이틀을 따고도, 기자단 투표로 받는 타이틀은 놓치는 대가를 치렀다. 송진우는 골든글러브, 이만수는 MVP. 그 외에도 자신이 감독으로 재직한 적이 있는 북일고등학교 출신의 선수들을 특히 밀어주어 현재의 '천안북일고 성골'이라 불리는 인맥의 토대를 만들었다는 비판도 받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는 이상군, 한용덕 등 일부 선수만을 두고 뭉뚱그려 해석한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른바 북일파, 비북일파의 갈등은 실체가 불분명하다는 것. 실제로 김영덕 감독의 빙그레에서는 북일 출신의 조양근, 전대영보다 비북일 출신의 김용선, 진상봉 등이 더 많은 기회를 얻은 바 있어 이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다만, 그 유명한 비난은 순간이고, 기록은 영원하다라는 망언을 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정작 본인은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당시 기자들의 소설인지 아니면 지금에 와서 비난이 계속 되니까 말을 바꾼 건지가 의문이었는데, 근래 들어서는 기자의 소설인 것이 거의 확실해지고 있다. 다만 김영덕이 이후 인터뷰에서도 내가 그런 말을 하진 않았지만, 그 당시에는 아구계가 당연히 그런 선택을 했다. 단지 내가 학연, 지연이 없어 표적이 되었을 뿐이다. 라는 견해를 보였었다.
또한 저때 기록 밀어주기에 대해서 예시를 든게 일본프로야구 난카이 호크스의 감독 선수가 열심히 하면 감독은 도와줘야 한다.라는 지론이었다고 한다. 어떻게보면 이런 기록밀어주기의 원조는 일본프로야구인데, 일본은 이런식의 기록 조작이 이전부터 활성화 되있었고, 특히 장훈야자와 켄이치의 타율왕 경쟁때 노골적으로 야자와를 밀어줬던 케이스가 있어, 일본에서 야구를 배운 김영덕이 자연스럽게 행동했다고 볼 수 있다.

5.2. 동료야구인들과의 관계


김영덕은 원래 그렇게 활발한 성격이 아니었으며 위의 일들로 인한 비난 때문에 야구판에서 사라진 이후에는 대인기피증이 생겼다고 한다. 그래도 2009년 정민철의 은퇴식 날 그의 싸인이 적힌 야구공이 등장하기는 했다. 감독 은퇴이후 공식석상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고, 그나마 최근에 가끔 야구장에서 야구관람을 하는 모습만 포착될 뿐이었으나, 2012년 7월 21일 대전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올스타전에서 과거 이글스의 레전드들을 초대하는 자리에 등장, 올스타전 시구를 했다.
같은 재일교포 출신에 교토 고향 후배이기도 한 김성근과는 이상하게 사이가 좋지 않았다. OB 창단 감독으로 취임할 때 조창수, 강병철 등을 코치로 데려오려 했지만 조창수김동엽의 부름을 받고 해태 타이거즈 코치로 갔고, 강병철은 감독으로 있던 동아대학교 와의 모종의 계약 관계 때문에 모두 불발되며 결국 구단 측의 천거로 영입한 코치는 투수코치 김성근과 타격코치 이광환이었다. 김영덕은 김성근에 대해 대놓고 거부감을 표시했으나 구단의 설득 끝에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고 신일고 감독 사임 후 백수 생활 중이던 김성근에게 직접 "프로가 출범하는데 여기 저기 찔러보고 다녀야 일자리를 구할 것 아니냐. 난 너 싫다고 했는데 구단에서 뽑으라 해서 뽑았으니, OB로 오라"고 말했다는 소문이 수 십년 동안 정설로 받아들여질 정도였다(...).[37] 둘은 감독과 투수코치로서 1982년 원년 코시 우승을 차지하는 소득을 올렸지만, 1983년 말 삼성 라이온즈 감독 제의를 받은 김성근이 김영덕(앞서 말했지만 김영덕도 삼성에서 감독 제의를 받은 상황이었다.)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상담을 청했는데 김영덕은 그 얘기를 듣고 "거기는 내가 가고 싶은데?" 라고 털어놓았다. 결국 삼성 감독은 김영덕으로 낙점되었고 이에 OB감독을 맡은 김성근과 OB 선수들의 감정이 크게 상하여 1984년 시즌 내내 OB와 삼성은 경기 중 난투극을 수 차례 벌일 정도로 앙숙지간이 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다.[38]
그리고 난카이 호크스 출신이라는 인맥을 잘 활용, 이나오 가즈히사, 장훈같은 동년배의 일본프로야구 레전드들을 재능기부 인스트럭터로 초빙하고, 난카이의 후신인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의 마무리훈련 캠프이나 일본 교육리그에 자신이 총애하는 젊은 선수들을 파견[39]해 젊은 선수들의 기량 향상을 도모했으며, 또 빙그레 시절에는 당시 기준으로 파격적인, 투수코치를 두 분이나 두어서[40] 각기 좌/우완 투수에게 맞춤형 교육을 시도하기도 했다.

5.3. 큰 경기에 약한 감독


기록조작과 한국시리즈에서의 약한 면모 때문에 이미지가 좋지 않지만, 그의 통산 승률은 0.596으로 이보다 높은 수치는 .606의 서영무(삼성 창단 감독)뿐이다. 그마저도 한시즌 성적이므로 실질적 페넌트레이스 역대 감독 승률 1위인 감독이었지만, 두산 베어스의 김태형감독이 4년간 .610이라는 경이로운 승률을 찍으면서 여기서까지 콩..
빙그레와 삼성 시절의 많고 많은(..) 준우승 때문에 콩라인의 이미지가 많이 남아있다. 그러나 위에 언급되어 있듯이 그는 한국프로야구 원년 우승감독으로 콩라인 멤버는 아니다. 다만 빙그레 시절로 한정하면 콩라인 맞다.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따지면 OB, 삼성(이쪽은 한국시리즈 안열리고 통합우승)도 포함. 일본 시절에도 일본시리즈 우승 경험을 했고.
그의 유일한 한국시리즈 우승 사례인 원년 1982년의 OB와 이후(삼성과 빙그레)를 비교하면, 그가 큰 경기에 약했던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에이스의 활약' 여부였다. 1982년 OB 우승때는 그해 22연승에 빛나는 박철순이 한국시리즈에서도 훌륭한 투구를 보여주었고, 덕분에 우승까지 했다. 하지만 삼성 시절에는 김시진과 김일융이 1984년 롯데의 최동원, 1986년 해태의 선동렬만큼 활약하지는 못했고, 특히 김시진은 끝내 새가슴을 극복하지 못했다. 빙그레에서는 한희민, 이상군 등이 나름 활약했지만 역시 선동렬에 비할 정도는 못되었다. 그나마 1992년에 다승과 구원을 동시 석권한 송진우와 신인으로 대활약한 정민철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롯데의 고졸 에이스 염종석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5.4. 종합


위에서 나열한 사례(기록 조작, 져주기 게임, 특정 출신고 파벌 조성 의혹 등)로 인해 실력에 비해 꽤나 저평가받고 있으며 현역감독 시절 상대 감독들과의 불화로 인해 영 좋지 않은 평판을 받는 인물이다.[41] 하긴 자신이 선수들 타이틀 만들어 준다고(...) 자초한 면도 있으니 할 말은 없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초창기의 프로야구의 태동기를 이끌었던 장본인임은 틀림없으며 나아가 대한민국 야구에 결코 적지 않은 공로를 끼친 사실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프로야구 매니저빙그레 이글스 구단이 업데이트되면서 추가된 감독카드이기도 한데 기존의 감독과는 궤를 달리하는 투수운용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김성근 감독이 불펜 혹사형, 선동열 감독이 중셋마, 김경문 감독이 셋마 야구를 구사한다면 김영덕 감독은 마무리 체력+5의 히든에 힘입어 7회부터 마무리가 올라와서 세이브를 따는 중무리(?) 야구를 한다.[42] 그 덕에 중계와 셋업이 구제불능인 1990년도 이전 덱의 구세주로 조명되고 있다.
위에 언급된 인터뷰에서 박철순을 혹사시켜 OB 베어스를 우승시킨 것은 옛날 야구를 배웠던 탓에 어쩔 수 없다고 하면서도 박철순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밝혔다. 허나, 김성근 감독이 한화에서 만나게 된 인생 최대의 위기를 잘 헤쳐나갈 것이라고 밝혀 혹사에 대해 별 감각이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샀다. 아니면 김성근이 아무리 원수지간이 되었어도 같이 늙어가는 입장이란 점과[43], 자신이 이글스란 팀에게 삼성 못지않은 애착이 있어서 립서비스한 것일 수도 있다. 이는 김응용이 김성근에게 하는 것과 거의 비슷하다. 다만 김응용과 김성근은 김영덕과 김성근 같은 견원지간은 아니고, 1930~1940년대생 원로 야구인들 중에서는 그나마 사이가 좀 양호한 편[44].

6. 역대 감독 성적


한국시리즈 우승 감독
1982
역대 감독 전적
연도

경기



정규리그
한국시리즈
1982
OB 베어스
80
56
24
0
1위[45]
우승
1983
100
44
55
1
5위[46]
-
통산
<color=#373a3c> 180
<color=#373a3c> 100
<color=#373a3c> 79
<color=#373a3c> 1

연도
소속팀
경기수



정규리그
한국시리즈
1984
삼성 라이온즈
100
55
45
0
2위[47]
준우승
1985
110
77
32
1
1위
[48]
1986
108
70
37
1
1위[49]
준우승
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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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202
<color=#373a3c> 114
<color=#373a3c> 2

연도
소속팀
경기



정규시즌
한국시리즈
1988
빙그레 이글스
108
62
45
1
2위[50]
준우승
1989
120
71
46
3
1위
준우승
1990
120
68
50
2
3위
-
1991
126
72
49
5
2위
준우승
1992
126
81
43
2
1위
준우승
1993
126
61
61
4
5위
-
통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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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373a3c> 415
<color=#373a3c> 294
<color=#373a3c> 17

총계(11시즌)
1224
717
487
20


7. 관련 문서


[1] 2018년, 한화 이글스 홈개막전 시구때의 모습[2] 한국 국적 완전 취득전 일본명 가네히코 나가노리(金彦永徳), 개명 후 가네히코 히데시게(金彦任重)).[3] 김영덕은 "내 일본명이 가네히코 히데시게(金彦任重)다. 원래 가네히코는 일본인 사이에서 '성'이 아닌 '이름'으로 쓰인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가네히코를 이름이 아닌 성으로 쓴 건 내가 '언양(彦陽) 김(金)씨'의 후손이기 때문이었다. 당시 언양 김씨들은 뿌리를 잊지 않으려고 '언양'의 뜻이 포함된 '가네히코(金彦)'라는 이름으로 창씨 개명했다. 조선 이름으로 살았으면 좋았겠지만, 일본에 사는 교포들은 생존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이름을 바꿔야 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우리의 뿌리가 어딘지 절대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4] 김성근과 동향출신이다. 김성근이 일본프로야구 경력이 없는데 반해 김영덕은 일본프로야구에서 8년간 뛰고난 후에 한국실업야구에 입단했다. 참고로 그의 부모님은 합천 출신이라고 한다.[5] 그런데 일본 시절 난카이 호크스선수명단(첫번째 링크는 1957년 제작, 두번째 링크는 1959년 제작으로 김영덕의 사진은 둘 다 2분 15초 부근에 있다)에는 출생지가 가나가와현으로 나와있다. 어째서인지는 불명.[6] 부모님의 고향은 경상남도 합천군.[7] 1961년 김성근이 난카이 호크스 2군에 입단 테스트를 받으로 왔을 때 같은 교토 출신이었던 김영덕이 선수들에게 김성근에게 잘해주라고 지시했던 일화가 있다.[8] 프로야구 시절까지 포함하면 1위의 기록이다.[9] 김영덕, 신용균, 김성근 같은 재일교포 투수들이 직구와 커브밖에 없던 대한민국 야구계에 다양한 변화구를 선보이면서 일대 변화를 가져온 건 사실이다. 그러니까 김성근이 주장하는 본인이 먼저 싱커볼을 던졌다는 건 낭설에 가깝다. [10] 이를 뒤집어 말하면, 실력 외적인 면에서는 차별이 존재했다는 이야기도 된다. 실제로 2010년의 한 인터뷰에서 김영덕 본인이 일본에서는 조센징, 한국에서는 반쪽바리 소리 들었다고 직접 언급하고 있다.[11] 참고로 당시 프로야구 창립기획서에서 정한 감독의 연봉이 1200만원이었다. [12] 원년도 OB 베어스가 56승을 했는데 그중 24승이 박철순 혼자 일궈낸 것이다. 게다가 당시에는 한 시즌에 80경기 시절. 매경기 3이닝 가까이 던져야 나올 수 있는 이닝이다.[13] ...이라고 하나, 이 때 들어온 신인들이 박종훈, 한대화, 장호연 등이었다.[14] 훗날 빙그레 이글스 단장으로도 근무했다.[15] 또한 친정팀이었던 OB를 상대하기 부담스러운 것도 있었다고 했다.[16] 본래 1986년 시즌 종료 후 MBC 청룡 측에서 당시 잦은 구설수로 구단 눈 밖에 난 김동엽 감독을 자르고 김영덕을 후임으로 영입하고자 물밑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고 김영덕 또한 서울팀 감독직에 대한 열망이 컸는지라 김영덕이 MBC 감독으로 부임할 가능성이 매우 높게 점쳐졌었다.. 그러나 당시 김영덕이 모 언론지 기자를 다리삼아 들어오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 때문에 MBC 측에서는 "기자한테 기대서 감독으로 오려는 사람은 필요없다."면서 김영덕 감독 영입 의사를 철회하고 대안이 사라진 MBC는 결국 김동엽을 유임시켰다. 그러나 1987년 시즌 중반 팀이 최하위로 처지면서 김동엽이 결국 경질되자 다시 김영덕이 후임으로 거론되었으나 감독대행을 맡은 유백만이 팀을 잘 추스리고 시즌을 마무리하자 MBC는 유백만을 감독으로 선임한다.[17] 1989년, 1992년은 정규시즌 우승.[18] 당시 롯데 감독이던 강병철은 평소 김영덕을 아버지 라 부를 정도로 서로 아끼는 사제지간 이었지만, 밑에 설명한 김영덕 종신계약설 때문에 사이가 서먹해졌다.[19] 그동안 한국시리즈에서 계속 졌던 해태라면 모를까, 시즌 내내 우위를 보였던 롯데(게다가 당시 롯데는 준플레이오프부터 시작해서 7경기나 치르고 올라온 상태였다)에게 진 것이었기 때문에 아쉬움은 더욱 컸다. 김영덕에게 당시 패배는 1984년 한국시리즈의 재판이나 다름없었다. 둘 다 강병철의 롯데를 상대로 졌고, 롯데에는 안경낀 에이스(1984 최동원, 1992 염종석)가 있었다는 점.[20] 앞서 말했듯이 원래 강병철 감독은 김영덕 감독과 나름 사이가 좋은 편이었고 1987년 10월 입단 당시 '차기 감독'을 약속하고 강병철 감독을 데려온 김영덕 감독으로서는 자의든 타의든 자신이 감독을 계속할 경우 강코치와의 의리를 저버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었는데 하필 재계약을 앞두고 이런저런 말이 나오자 구단 간부는 김영덕, 강병철과 함께 회장실을 찾았다. 5명이 모인 자리에서 김승연 회장은 “감독 더 하시오”라고 했다. 이 말이 종신감독으로 둔갑했다.[21] 이후 장종훈은 유격수에서 1루수로 포지션을 전환하게 된다. 1991년부터 은퇴까지 1루수와 지명타자로 뛰었다.[22] 그러나 북일파와 비북일파의 갈등이 실제로 존재했는지에 대해서는 2010년대에 들어서는 회의적인 시선이 적지 않다.[23] 김영덕이 감독으로 활동하던 당시는 인터넷이 발달하지 못했을 때였다. 인터넷이 활성화된 후인 2000년대 이후 타이틀 만들어주기 논란이 있는 선동열(2005년 오승환 승률왕과 배영수 탈삼진왕)과 김재박(2009년 박용택 타격왕)이 김영덕 이상으로 이슈화가 안되었을 정도로 당시 김영덕의 타이틀 만들어주기는 수많은 야구팬들의 비판을 받았다.[24] 하필 해당 경기는 당시 송진우와 다승왕 경쟁을 벌이고 있던 이강철의 소속팀인 해태와의, 시즌 마지막 2연전의 첫 경기였다. 이에 이강철은 다음날 선발로 등판해 '공동' 다승왕의 가능성에 도전했지만, 당시 최전성기를 달리고 있던 장종훈에게 홈런을 맞는 등 패전했다.[25] 차이점은 송진우 때는 다승왕을 만들어주려고 경쟁자 이강철이 보는 앞에서 호투하던 선발투수를 조기강판시켰고 오승환 때는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호투하던 선발투수를 조기에 내리고 오승환을 등판시켜 10승을 채워줌으로써 승률왕을 만들어줬다는 점이다.[26] 7년 전 이만수를 타격왕으로 만들어주려고 썼던 상대 타자 고의사구 수법을, 이번에는 이만수와 삼성에서 함께 뛰었던 장효조를 상대로 쓴 아이러니가 되었다.[27] 당시 유승안과 홈런, 타점왕 경쟁을 벌이고 있던 김성한의 해태도 유승안을 고의사구로 거르고, 만루 찬스에서 김성한을 대타로 기용하는 등 비슷한 수법을 썼다. 결국 그해 홈런은 김성한, 타점은 유승안이 각각 1위를 나눠(?)먹었다.[28] 1번의 홍문종 고의사구와 4번의 장효조 볼넷은 자팀 선수의 기록을 위해 남의 팀 선수 기록을 망친거니까 그렇다 쳐도, 2번과 5번 사례는 어떻게 설명할 셈인가? 송진우, 유승안은 팀을 위해 희생한 이글스 선수고 한희민, 전대영은 아니란 말인가? 얼핏 그럴싸한 말 같지만, 결국은 같은 팀 내에서조차 타이틀 경쟁자와 그렇지 못한 선수를 차별 대우했다는 뜻으로밖에 해석될 수 없다. 이 점에서도 김영덕 감독이 업적에도 불구하고 저평가를 피할 수 없는 이유를 증명해주는 말이기도 하다.[29] KBO 초창기의 명장이며, 한국 야구의 발전에 공헌한 바가 많은 그가 야구팬들 사이에서 저평가를 받는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다.[30] 만약 김영덕이 활동하던 시절 인터넷이 활성화되어 있었다면 그는 김성근 이상으로 야구팬들에게 씹히고 뜯기고 까였을 것이다.[31] 당시는 전후기 리그로 나누어서 전기리그1위와 후기리그1위가 한국시리즈를 했다. 1985년 삼성처럼 한팀이 전후기 1위하면 한국시리즈 없이 바로 통합우승.[32] 김영덕 감독의 전임 팀이었던 OB 베어스를 피하기위한 목적이 더해져 있었다.[33] 정확히 말하면 단순히 기록과 승리에 집착했다고 비판받는 것은 아니고, 승리지상주의에 더해 그것을 위해 노골적인 져주기 게임까지 감행했던 전적 때문에 박한 평가를 받는 것이다. 당장 김영덕과 비교했을 때 승리지상주의적인 면에서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김성근김응용만 봐도 이래저래 많이 비난받기는 하지만 최소한 김영덕 수준으로 단순히 업적을 폄훼하는 정도를 넘어서 아예 없는 사람으로 치는 수준의 무시를 당하지는 않는다. KBO 역대 최고 포수 논쟁에서 이만수박경완으로 많이들 싸우지만, 2010년대 최고팀 포수임에도 약물 복용 전과가 있는 자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구도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34] 앞서 말했던 종신계약설로 인해 불화가 생겨 결국 롯데 감독으로 돌아섰고 1992년 한국시리즈에서 김영덕을 이기자 구단프런트는 강병철 감독과 바둑을 두는 등 김영덕 감독에게 나가라는 압박을 줬다. 근데 강병철 감독은 한화에서 혹사까지 동원한 나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승은 고사하고 5년동안 가을야구를 2번밖에 못했다.....(3-6-4-7-7) 거기에 승률은 1할 2푼 넘게 폭락... 김영덕 감독 시절에 비한 이 초라한 전적에 빙그레-한화팬들은 급실망했고, 강병철은 1998년 중간에 한화 이글스 감독에서 경질당했다. [35] 김영덕 감독의 후임으로 OB감독으로 들어섰고, 1984년 OB를 피하기 위하여 롯데를 상대로 져주기 경기를 했던 당시 OB감독이기도 하다.[36] OB 선수단은 김성근 감독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김영덕 감독을 대놓고 무시했다.[37] 여기까지가 세간에 알려진 이야기였으나, 김성근 감독은 본인의 자서전인 『꼴찌를 일등으로』에서 ,이미 삼성에서 투수코치로 제의를 받았으나 김영덕 감독이 "나와 같이하자"라는 으름장을 놔서 OB로 갔다고 기술했다. 김영덕 감독이 삼성으로 가기 전까지 둘의 사이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는 것.[38] 이 와중에 OB감독으로 승진한 김성근과 수석코치 이광환도 야구관의 차이로 여러차례 충돌하였고, 결국 이광환은 수석코치직에서 물러나 일본미국을 오가며 3년 간 장기 연수를 떠났다. 이후 돌아와서 김성근을 밀어내고 OB감독을 차지한다. 1982년 원년우승을 이끌어낸 김영덕-김성근-이광환 3자가 서로간에 감정의 골이 생겨서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 것이다.[39] 당시 수혜자들 중 한명이 이상목인데, 이 일본 교육리그에서 다이에 호크스의 투수코치로부터 포크볼을 배워서 100승 투수 이자 90년대의 대표적인 연투형 투수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40] 좌완 이선희 코치, 우완 김명성 코치.[41] 다만 빙그레 팬들은 김영덕 감독에게 호의적이다. 사실 위에 언급되었듯이 빙그레 이글스 시절에도 기록조작 논란에서는 자유롭지 못하긴 하지만, 어쨌든 창단한 지 얼마 안 된 신생팀에게 별 기대도 안하던 한국시리즈 진출/정규 리그 우승이라는 영광을 가져다 준 감독이므로 긍정적인 인상이 더 강할 수밖에 없기 때문. 다만 기록 밀어주기는 그렇다치고 져주기 게임 때문에 이미지에 치명타를 입은 전적이 있는 만큼 마냥 칭송하기는 좀 그런 면이 있어서, 그냥 '왕년 리즈 시절을 이끌었던 명감독' 정도로 평가하는 분위기가 일반적이다.[42] 이전에 이것과 그나마 유사한 형태는 제리 로이스터 감독의 대타인 외국인 감독이었는데, 이 경우는 타격에 힘을 실어주기 때문에 선발은 자력으로 버텨야 했다. 그리고 이 경우는 선발이 셋업이 나올 때까지 버티는 거라서 선발 7이닝-셋업 1이닝-마무리 1이닝의 형태가 많았다. 즉 선발에 대한 부하가 굉장히 크고, 적어도 셋업은 갖춰줘야 밥값을 한다. 대신 장타가 강화되기는 하지만.[43] 인터뷰를 할 때 기자한테 김성근에 대해 (당시) 현역 감독이고 하니 서로 감정 상하지 않도록 안 좋게 쓰지 말아달라고 당부한 적도 있다.[44] 많이들 착각하는 사실인데 인터넷의 두 감독 빠와 까들이 원수지간인거지 정작 당사자들은 아주 친한 건 아니어도 그렇게 막장으로 틀어진 관계도 아니다. (애초에 둘 사이에 김인식이라는 가교가 있어서 진짜 어지간하지 않으면 완전히 파국으로 가긴 어렵다) 김응용이 은퇴 후 가진 인터뷰에서 한화 감독으로 취임한 김성근에게 덕담도 해준 적 있고 유명한 야신 발언도 풀버전은 "김응용:마치 신과 싸우는 것 같았다 / 김성근:그러면 신을 이긴 자기는 뭐가 되는가"인데 진짜로 앙숙이면 저런 식의 드립들이 오가지는 않는다. 김응용과 진짜로 앙숙인 원로 야구인은 김성근이 아니라, 김응용의 한화 감독 시절 "나이 들어서 자꾸 욕심내면 안 된다"면서 공개적으로 비판할 정도였던 이광환이다.[45] 전기 1위, 후기 2위[46] 전기 6위, 후기 5위[47] 전기 1위, 후기 5위.[48] 전·후기 리그 통합 우승으로 인한 한국시리즈 무산[49] 전기 1위, 후기 3위. 페넌트레이스 승률은 더 높았으나 당해 한국시리즈 상대팀이 전·후기리그 모두 2위를 차지해 플레이오프 진출권 2장을 획득했던 터라 삼성은 플레이오프부터 시작해야 했다.[50] 전기 2위, 후기 3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