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균

 

'''신용균의 역임 감독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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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신용균(申鎔均)[1]
'''본관'''
평산 신씨
'''생년월일'''
1938년 10월 13일 (85세)
'''국적'''
대한민국
'''출신지'''
경상남도 사천시[2]
'''학력'''
에히메 현립 야와타하마공고
'''포지션'''
투수
'''투타'''
우투우타
'''소속팀'''
대한통운 (1963)
크라운맥주 (1964∼1966)
한일은행 (1967∼1968)
'''지도자'''
삼미 슈퍼스타즈 투수코치 (1985)
OB 베어스 투수코치 (1986~1988)
태평양 돌핀스 투수코치 (1989~1991)
쌍방울 레이더스 감독 (1993)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 (1996~1998)
삼성 라이온즈 2군 감독 (1999, 2001~2004)
삼성 라이온즈 2군 투수코치 (2000)
KIA 타이거즈 3군 투수코치 (2010~2012)
한화 이글스 투수 인스트럭터 (2013)
한화 이글스 1군 불펜코치 (2014)
'''국가대표'''
서울아시아선수권 대회(1963)
1. 소개
2. 선수 경력
3. 지도자 경력


1. 소개


재일교포 출신 야구인.

2. 선수 경력


일본 에히메 현에 위치한 야와타하마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인야구팀에서 활동했다. 현역 시절 포지션은 투수(언더스로)였다. 1963년 재일동포 팀의 모국 방문 경기에서 맹활약하면서 대한민국의 국가대표팀으로 발탁되었다. 일본에서 활동했던 김영조 국가대표 감독 등 국내 야구인들이 그를 끈질기게 설득했다고 한다.
그 해 서울특별시에서 열린 제5회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에서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의 에이스로 맹활약했다. 예선전에서 일본을 상대로 5:2 완투승, 결승 2차전에서 4안타 무실점 3:0 완봉승을 거두면서 역사상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최초의 일본전 승리이자, 사상 첫 우승의 주역이었다. 불과 수년 전 일본에 20대 1로 지는 수모를 당했던 김영조 감독으로서는 신용균이라는 비밀병기를 통해 천지개벽을 일으켰던 셈.
그 뒤 대한민국에 정착해서 실업 무대에서 활약했다. 한 시즌 실업야구 리그 24승이라는 불후의 기록을 남기기도 했고, 0점대 평균자책점도 기록한 바 있다. 대한통운(1963년), 크라운맥주(1964∼1966년), 한일은행(1967∼1968년)에서 선수 생활을 하다가 은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서 건축 사업에 종사했다.
현역 시절 싱커대한민국에 처음 알린 선수였다. 그는 언더핸드 투수였기 때문에 싱커 위주로 상대를 잡았고, 이것이 대한민국에서는 당시만 해도 생소한 것이었기 때문에 큰 위력을 떨칠 수 있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싱커의 달인이다. 자연히 그를 통해 대한민국 야구의 수준도 높아졌다.[3]

3. 지도자 경력


[image]
의 투구폼을 지도 중인 신용균 코치.
1985년 한국프로야구 청보 핀토스의 코치로 부임하면서 다시 대한민국과 인연을 맺어 OB 베어스, 태평양 돌핀스의 코치를 역임했다.[4] 투수 조련에 일가견이 있어 태평양 시절에는 언더스로 투수 박정현에게 싱커를 전수해 그를 1989년 신인왕으로 만들었다. 나중의 일이지만, 해태 타이거즈 2군 감독 시절에는 언더스로 투수 임창용과 인연을 맺고 그를 조련하기도 했다. [5]
1992년 10월 이용일 구단주 대행과 불화를 빚어 사임한 김인식의 후임으로 쌍방울 레이더스의 2대 감독으로 취임한다. 그가 배터리 코치로 끌어들인 조범현박경완을 만나 한 시대를 지배하는 포수로 키워 내지만, 정작 그는 쓰지도 못했다. 1993 시즌 성적 자체도 부진했지만, 애당초 쌍방울의 전력이 약해서 그 정도는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한동화 수석코치와 불화가 생기면서 중도 사임하게 된 것이다.
그 뒤로도 꾸준히 지도자 경력을 이어갔다. 현대 유니콘스 투수코치, 삼성 라이온즈 투수코치 및 2군 감독, 2010년에는 KIA 타이거즈 3군 감독에 임명되어 2012년까지 활동했다. 삼성 시절에 안지만, 권혁, 권오준, 정현욱이 그의 손을 거쳤고, 특히 정현욱은 신용균의 집중 조련을 받아 각성하여 리그 최고의 릴리프 및 2009년 WBC의 국민 노예로 거듭났다. KIA에서도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던 김진우를 전담 지도하여 재기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확실히 투수 조련에 있어서 명성을 떨치던 지도자였음은 확실.
이후 2014시즌부터 한화 이글스의 1군 불펜코치로 활동하게 되었다. 삼성 시절 김응용 감독이 1군 감독으로 재직 중이었으므로 현장에서 10년만에 재회하게 된 셈. 이와 동시에 77세의 고령으로 코치가 되면서 '''한국프로야구 현역 최고령 코치'''가 되었다. 김응용 감독보다도 1살 더 많으니...[6]
2014 시즌이 끝난 후 재계약을 하지 않으면서 팀을 떠났다.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이미 코치직을 1년만 맡고 물러날 예정이라고 밝혔다.

[1] 일본식 성명은 平山鎔均으로, 평산 신씨 집안 차원에서 뿌리를 기억해 두려는 측면으로 히라야마(平山)으로 창씨한 듯.[2] 1963년 12월 18일자 경향신문에 따르면 사천이 고향이라고 한다. 사천에서 태어난 후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자란 것으로 보인다.[3] 참고로 대한민국에 처음 슬라이더를 소개한 투수는 김영덕이다. 정작 김영덕 감독은 슬라이더를 처음 소개한 선수가 신용균 감독이라 말한 바 있다.[4] 김성근 감독과 같이 이동한 것이지만, 추후에 불화가 생기면서 결별하게 된다.[5] 96시즌 전 신용균이 임창용의 제구를 잡은 뒤 "얘는 일단 올리면 매해 20승 감이다" 라고 하니 처음엔 김응용이 그게 말이 되냐며 비웃었다고 한다. 신용균이 일단 시범경기에 써보라고 해서 내보내기 시작했는데 결과적으로 해태의 1996년 한국시리즈1997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위한 주력 병기를 신용균이 제공해 준 셈이 됐다.[6] 김응용 감독은 1941년생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1939년 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