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clearfix]
1. 개요
대한민국의 야구 국가대표팀. 국제 야구계에서 상위권에 속하며, 현재 아시아에서는 일본, 대만과 함께 3대 강국으로 꼽히고 있다. 이들 국가들에선 야구가 엄청난 인기를 자랑하고 있으며 특히 일본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대한민국에서의 야구 인기는 물론이고 상업적 흥행성이 있는 프로야구 리그인 KBO 리그의 인기와 더불어 국가대표 야구팀의 인기도 상당하다.''''''아시아의 푸르고 큰 파도 (アジアの青い大波) '''
에서 일컬은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2. 상징
2.1. 컬러
붉은 색이 상징색인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 달리 야구 대표팀은 코발트 블루가 팀컬러다.[12] 초창기에는 남색과 빨강색 조합이었으나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을 앞두고 현재의 팀컬러로 변경,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2.2. BI
2008 베이징 올림픽 본선 진출이 확정된 이후, KBO에서 직접 유니폼 로고 디자인을 제작했고 첫 선을 보인 것이 네덜란드와의 평가전에서였다. 이후 2008 베이징 올림픽 본선부터 대표팀의 BI로 활용중이다.
다만 데상트가 킷 스폰서일때는 대표팀 BI가 다른데, 나이키와 마제스틱의 경우에는 가슴 로고를 KBO가 제작한 이미지를 사용하지만 데상트는 타 대표팀도 자신들이 만든 로고를 사용한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제작한 로고를 사용한다고 한다. ‘프리미어12’ 대표팀 굿즈, 왜 KBO마켓에선 팔지 않았을까
2.3. 유니폼
3. 상세
현재까지 올림픽 야구에서 전승우승을 기록한 유일한 국가이자, 2000년대 중후반에 세계 야구의 다크호스로 떠올랐던 팀이며 아시안게임 야구의 최강자.[13]
역대 로스터 문서를 보면 알 수 있지만 2000년대 전까지는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 대표팀과 세계선수권 대표팀 멤버가 거의 비슷한데, 애초에 두 대회를 합쳐 대표팀을 뽑았기 때문에 그랬던 것이다. 원래는 아마추어 선수들만 출전이 가능했지만 1998 방콕 아시안 게임부터 프로선수들도 출전할 수 있게 되면서 이후로 점점 대표팀 구성원들이 스타급 플레이어로 채워졌다. 그와 반대로 인지도가 떨어지는 세계선수권대회에는 상무나 경찰청 소속 선수들을 비롯한 2군 선수들이 주축이 되었다. 한때는 프로팀들이 선수 차출을 꺼려 2005년에는 절반 가량을 상무 선수들로 채운 적도 있었다. 그나마도 당시 대표팀 감독이 상무 감독인 김정택 감독이었기에 가능했던 일.
최근에는 야수 쪽은 국제대회에서 괜찮은 모습을 보이는 김하성, 이정후, 강백호 등 자원이 어느 정도 있느나 투수 쪽은 김광현, 양현종을 제외하고는 믿음직한 투수가 없는 실정이다.
3.1. 소극적인 국제 무대 교류
대만과 일본이 최근 아시아 야구의 영향을 늘리기 위해 국제대회 야구가 없는 기간에도 알게 모르게 국가대표 후보들을 차출해서 교류전을 가지는 것에 비해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은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할 정도로 국가대표에 관심이 없다. 그도 그럴 것이 축구와 달리 수익이나 국제대회 여부같은 면에서 리그와 달리 국가대표팀은 대충 대회가 다가오면 후다다닥 준비하던 수준이다. 축구처럼 몇년전에 미리 감독 선임하고 선수 준비하던 거랑 달리 리그 여부가 크게 걸렸기 때문이다. 또한 팬들이나 야구인들이나 국제대회에 선수들을 차출 해가는 것을 반기지 않아서 국제대회를 썩 좋아하지 않으며[14] 아예 참가하지 마라라는 의견들도 상당히 강한 것도 한몫 하고 있다. [15][16]
그러나 WBSC를 앞세워 야구 국제화에 가장 적극적인 사무라이 재팬의 움직임에 주목하는 팬들이 늘어나고, 2019 WBSC 프리미어 12에서 한수 아래로 평가받던 대만에게 7:0이라는 대패를 기록하자, 대만이 일본과의 꾸준한 평가전[17] 을 유지한 것이 실력 상승의 한 요인이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등 우리도 국제대회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18]
3.2. 전임 감독제 도입
현재는 일본 대표팀과 마찬가지로 전임감독제를 도입했지만, 과거에는 리그와 반대로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 신경을 많이 쓰는 축구와 달리 야구는 야구 대표팀 감독도 자원봉사급(...)으로 국대감독을 맡았다. 대회가 다가와서야 리그 우승 감독을 국대감독으로 선임했기에 연봉계약도 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야구는 축구처럼 국제대회가 그리 없었고 리그 경기 수가 많았기에 국제대회에 신경을 쓰지 않은 것도 이런 구조를 유지하는 데 일조했다.
하지만 2013년 WBC에서의 충격적인 결과와, 2014년 인천 아시안게임에서도 금메달을 따기까지의 과정 등을 본 야구팬들은 프로야구의 저변 확대도 중요하나, 대만과 일본의 예를 들어 국가대표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며 성토했고[19] , 2015년 프리미어 12 우승을 이끈 김인식 감독도 전임 감독제를 추진하는 것이 좋겠다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다만 KBO는 난색을 표했는데 야구가 임시적이지만 올림픽 종목으로 다시들오게 되자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과 2019 WBSC 프리미어 12, [20] , 2021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등 연속으로 큰 대회들이 열리게 되었다.
결국 KBO는 전임감독제를 도입, 선동열 감독을 전임 감독으로 임명했고 이것이 야구 대표팀 역사상 첫번째 전임감독제가 된다.
3.3. KBO 기술위원회
대표팀과 뗄레야 뗄수 없는 이야기가 바로 KBO 기술위원회다. 김경문호가 출범한 이후, 대표팀 관리의 효율성을 위해 경기운영위원제도를 폐지하고 기술위원회를 신설하게 된다. 기술위원회는 국제대회가 있을 경우, 총재 추천을 통해 임명된 기술위원장과 이를 보좌하는 야구인들이 모여 대표팀 운영 전반에 걸쳐서 의논을 나누고 지원을 하게끔 되어 있는 제도다. 이 기술위원회는 대표팀 운영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수 있었는데 선동열 전 감독이 대표팀 전임 감독으로 임명되기 전까지는 KBO 약관에는 대표팀 운용의 대부분을 이 기술위원회를 걸쳐야 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2016 KBO 약관 중 기술위원회 관련 대목 보기
하지만 이런 기구의 단점도 있었으니 기술위원회의 입김이 선수 선발 과정에서 감독을 배제할 정도로 막강했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폐지되었으나 2018년 선동열 대표팀이 각종 논란에 휩싸이자 다시 부활했다. ## 다만 기존에 있던 내용들은 대부분 삭제되고 남아있는 부분도 총재에게로 권한이 넘어가며 감독을 서포트하는 역할로 변경되었다.기술위원회가 폐지됐던 것은 대표팀 선수 차출 과정에서 불거지는 형평성 문제 때문이었다. KBO이사회 구성원들인 각 구단 사장들의 입김이 작용한다는 것이었다. 올림픽 3위 이내 입상, 아시안게임 1위에 주어지는 병역 혜택을 각 구단이 고루 누리자는 암묵적 합의가 형평성을 해쳤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나왔다.
3.4. 국제대회 포상
대표팀 포상의 경우 다른 종목들과 달리 큰 액수가 지급되지는 않는다. 우승 상금이 가장 큰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과 올림픽이 10억원 가량으로[21] 큰 동기부여가 되는 편은 아니다.[22]
또한 올림픽이나 아시안 게임의 경우 병역특례라는 달콤한 꿀이 있지만 프리미어 12나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은 그런 것도 없고 김동주가 2006 WBC에서 헤드퍼스트 슬라이딩으로 인해 부상을 입어 FA 일수에서 손해를 보는 일이 발생하게 되자, 선수를 위한 대책 장치가 필요하다는 의견들이 나왔다. 2006년 도하 아시안 게임에 참가하는 김재박호의 선수 선발 과정에서 박진만은 "국제대회 나가서 다치면 누가 보상해줌? 그거 확실하게 해야 나 나감."이라고 못 박은 적도 있다.
그래서 나온 것이 국가대표 포상 포인트제로 국제대회 참가 1일당 FA 필요 일수 1일을 차감해준다. 총 8년을 채워야 FA조건이 충족되는 KBO FA제도의 1군 등록기간이 145일이상 되어야 1년으로 쳐주는 것을 생각하면 국제대회만 꾸준히 나간다면 FA 일수를 앞당길수 있다.[23] 또한 국제대회 부상으로 인해 FA 일수에서 손해를 보게 될 경우 출전하지 못한 기간의 절반을 1군 등록기간으로 인정해준다.
가장 많은 점수는 올림픽과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으로 우승시 총 60일이 차감된다. 또한 KBO 중요 대회의 경우 본선 진출시 별도의 가산점을 지급하는 경우가 있다. 2019 WBSC 프리미어 12의 경우 2020 도쿄 올림픽 진출 가산점이 30점이 부여되었고, 그 덕에 준우승을 했지만 준우승시 받는 30점에 가산점 30점이 추가되어 우승과 마찬가지인 60점을 부여받았다.
4. 역대 대표팀[24]
4.1. 주요 대표팀
4.2. 역대 로스터
5. 역대 대회 전적
5.1.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역대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전적 순위 : 5위'''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항목 참조.
5.2. WBSC 프리미어 12
'''역대 WBSC 프리미어 12 전적 순위 : -위'''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WBSC 프리미어 12 항목 참조.
5.3. 올림픽[30]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올림픽 항목 참조.
5.4. 아시안 게임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아시안 게임 항목 참조.
- 1990년 베이징 아시안 게임 - 은메달
-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 게임 - 은메달
-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 - 금메달
-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 금메달
- 2006년 도하 아시안 게임 - 동메달
-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 - 금메달
-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 - 금메달
-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 금메달
5.5. 아시아야구선수권대회
- 1954년 1회 대회(필리핀): 3위
- 1955년 2회 대회(필리핀): 3위
- 1959년 3회 대회(일본): 준우승
- 1962년 4회 대회(대만): 준우승
- 1963년 5회 대회(한국): 우승
- 1965년 6회 대회(필리핀): 준우승
- 1967년 7회 대회(일본): 준우승
- 1969년 8회 대회(대만): 4위
- 1971년 9회 대회(한국): 우승
- 1973년 10회 대회(필리핀): 준우승
- 1975년 11회 대회(한국): 우승
- 1983년 12회 대회(한국): 공동 우승
- 1985년 13회 대회(호주): 공동 준우승
- 1987년 14회 대회(일본): 3위
- 1989년 15회 대회(한국): 공동 우승
- 1991년 16회 대회(중국): 3위
- 1993년 17회 대회(호주): 준우승
- 1995년 18회 대회(일본): 준우승
- 1997년 19회 대회(대만): 우승
- 1999년 20회 대회(한국): 우승
- 2001년 21회 대회(대만): 준우승
- 2003년 22회 대회(일본): 3위
- 2005년 23회 대회(일본): 4위
- 2007년 24회 대회(대만): 준우승
- 2009년 25회 대회(일본): 3위
- 2012년 26회 대회(대만): 3위
- 2015년 27회 대회(대만): 우승
- 2019년 28회 대회(대만): 4위
6. 과거 대회
6.1. 세계야구선수권대회[32]
- 1938년 1회 대회(영국)
- 1939년 2회 대회(쿠바)
- 1940년 3회 대회(쿠바)
- 1941년 4회 대회(쿠바)
- 1942년 5회 대회(쿠바)
- 1943년 6회 대회(쿠바)
- 1944년 7회 대회(베네수엘라)
- 1945년 8회 대회(베네수엘라)
- 1947년 9회 대회(콜롬비아)
- 1948년 10회 대회(니카라과)
- 1950년 11회 대회(니카라과)
- 1951년 12회 대회(멕시코)
- 1952년 13회 대회(쿠바)
- 1953년 14회 대회(베네수엘라)
- 1961년 15회 대회(코스타리카)
- 1965년 16회 대회(콜롬비아)
- 1969년 17회 대회(도미니카 공화국)
- 1970년 18회 대회(콜롬비아)
- 1971년 19회 대회(쿠바)
- 1972년 20회 대회(니카라과)
- 1973년 21회 대회(쿠바)
- 1973년 22회 대회(니카라과)
- 1974년 23회 대회(미국)
- 1976년 24회 대회(콜롬비아): 6위
- 1978년 25회 대회(이탈리아): 3위
- 1980년 26회 대회(일본): 준우승
- 1982년 27회 대회(한국): 우승[33]
- 1984년 28회 대회(쿠바): 5위
- 1986년 29회 대회(네덜란드): 준우승
- 1988년 30회 대회(이탈리아): 8위
- 1990년 31회 대회(캐나다): 3위
- 1994년 32회 대회(니카라과): 준우승
- 1998년 33회 대회(이탈리아): 준우승
- 2001년 34회 대회(대만): 6위
- 2003년 35회 대회(쿠바): 8위
- 2005년 36회 대회(네덜란드): 준우승
- 2007년 37회 대회(대만): 5위
- 2009년 38회 대회(유럽[34] ): 9위
- 2011년 39회 대회(파나마): 6위
6.2. 대륙간컵[35]
- 1973년 1회 대회(이탈리아)
- 1975년 2회 대회(캐나다): 6위
- 1977년 3회 대회(니카라과): 우승[36]
- 1979년 4회 대회(쿠바)
- 1981년 5회 대회(캐나다): 4위
- 1983년 6회 대회(벨기에): 5위
- 1985년 7회 대회(캐나다): 준우승
- 1987년 8회 대회(쿠바): 6위
- 1989년 9회 대회(푸에르토리코): 5위
- 1991년 10회 대회(스페인): 5위
- 1993년 11회 대회(이탈리아): 4위
- 1995년 12회 대회(쿠바): 4위
- 1997년 13회 대회(스페인)
- 1999년 14회 대회(호주): 7위
- 2002년 15회 대회(쿠바): 준우승
- 2006년 16회 대회(대만): 7위
- 2010년 17회 대회(대만): 6위
7. 논란
8. 주요 인물
8.1. 1990년대 이전
- 김재박(9경기 41타수 12인타 .292 1홈런 5타점 8득점)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당시 그 유명한 개구리 번트를 달성해내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원조 대표팀 4번타자. 국제대회에서 홈런 타자로서의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전 야구선수 출신으로 프로선수들이 출전한 최초의 대표팀 수장. 한일은행 야구단에서 선수생활을 했으며 은퇴 후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인하대학교 감독시절 1998 방콕 아시안 게임의 야구대표팀을 맡아 우승을 이뤄냈다. 그러나 비리 문제로 인하대 감독직에서 불명예 퇴진했다. 우리 히어로즈가 창단되면서 스카우트 팀장으로 재직했다.
1977년 니카라과 대륙간컵에서 에이스로서 팀 우승을 이끌었으며, 당시 쿠바 야구 국가대표팀을 상대로 인상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1981년 대륙간컵에서도 인상적인 활약을 펼쳐 토론토 블루제이스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기도 했다.
1982년 세계야구선수권대회 당시 극적인 홈런을 때려내며 팀 승리에 기여.
1982년 세계야구 선수권 대회 결승 한일전 완투승.
1982년 세계야구 선수권 대회에 육군 소속으로 나와 활약하였지만, 선동열이나 임호균에 의해 빛이 바랬다. 금메달을 획득했으나 너무 오래전이라 당시에는 소집해제는커녕 무조건 군생활을 마쳐야 했기 때문이다... 정말 불운 하나는 타고 났다...
8.2. 1990년대 ~ 2000년대 중반
대한민국 대표팀 감독 중 가장 많은 경기를 지휘한 감독. 2015년과 2017년에는 이렇다할 감독 지원자가 나타나지 않아 반 강제로 대표팀을 맡기도 했다. 2000년대 야구 국가대표팀에 있어서 빠질 수 없는 분.
- 구대성(8경기 / 27⅓이닝 /2승 / 1.66 / 26K)
합법적 병역 브로커,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완투승으로도 유명한 선수.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도 참가했으며 특유의 멘탈로 대표팀의 뒷문을 튼튼하게 막아냈다. 그야말로 일본 킬러 그리고 2006년 대회에서는 어느 후배 선수에게 그 선수를 대놓고 몸에 맞추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 김동주(25경기 / 77타수 / 25안타 / .325 / 3홈런 / 14타점 / 15득점 / 2도루 / OPS .813)
합법적 병역 브로커, 국제대회 깡패. 대학시절이었던 1997년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7경기 14안타 9홈런을 때려낸 것을 시작으로 1998 방콕 아시안게임, 2000 시드니 올림픽, 2002 부산 아시안 게임,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37] , 2008 베이징 올림픽[38] 등에 참가해서 대표팀 4번 타자로서 활약했다. 대표팀 타자들 중 이대호, 이승엽과 함께 대표팀 타선 일본 킬러 이승엽 이전 진정한 공포의 4번 타자로 군림했다. 단, 이승엽과 타순 자리는 가끔 바뀔 때가 종종 있었다. 은퇴 후 그의 포지션 후임은 이대호. 특히, 1997년에 있던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서 우에하라 고지를 상대로 4개의 홈런을 친 적이 있다. 비거리는 162M인데 이는 역대 신기록으로 아직도 깨지지 않고 있다.
합법적 병역 브로커, 리틀쿠바. 데뷔시즌 30-30이라는 전무후무한 임팩트를 남긴 박재홍은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부터 2006년 도하참사의 멤버로 활약하였다. 이병규와 더불어 아마야구 깡패로 군림하던 시절 미래의 국대 선수라고 들을 선수로 역시 이병규와 함께 출전하며 팀의 우승과 군면제를 받게 된다. 99년 한일 슈퍼게임 및 아시아 선수권 대회에도 참가하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때는 좀 부진을 했으나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에 차출되었으며 2006년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국가대표 주장도 되었지만, 팀의 붕괴로 국대 커리어는 거기서 멈췄다. 김동주, 이승엽, 이병규와 함께 국가대표 단골 멤버로 엠엘비파크 타자계의 4천왕 중 하나였다. 별명인 리틀쿠바는 쿠바 선수들처럼 아마추어 야구에서 깡패 같은 실력을 자랑한다는 의미이다.
- 박찬호(7경기 / 23⅔이닝 / 2승 / 3세이브 / 0.66 / 17K)
합법적 병역 브로커, 코리안특급. 원조 브로커의 대부이자 유일하게 당시 메이저 리거 현역 선수로 활동을 했었다. 활약상은 98년 방콕 아시안 게임과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39] 에서 선발, 마무리를 가리지 않고 상대팀을 죄다 폭격했었다. 입이 아프다면 두말 없이 일본, 미국, 멕시코라는 강타선 국가대표들을 체인지업 하나로 거의 박살낼 정도의 위력을 뿜어냈다. 대표팀 소집이 끝나고 대회 첫 마무리 투수 올스타에 뽑히는 영광을 보여주나 2009년 WBC 대표팀 발탁 인터뷰때 은퇴를 선언했다. 전 소속팀 로스앤젤레스 다저스에서 필라델피아 필리스 이적으로 이리저리 바빴을 것이다.
- 박진만(31경기 / 85타수 / 16안타 / .188 / 0홈런 / 6타점 / 13득점 / 2도루 / OPS .434)
수비의 달인, 국민 유격수. 2000년대에 발탁되어 현재까지 내야 수비 본좌라고 불린다. 김재박과 류중일의 뒤를 이은 차세대 국가대표팀의 유격수라고 불렸는데, 루키시절부터 은사였던 김재박이 포수 장비를 입혀놓고 수비를 시킨게 그 유명한 일화이다. 그리고, 그 실력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2008년 베이징 올림픽까지의 두각을 보여줬다. 다만, 타격면에서는 절망이었는데 이전 감독들 모두 박진만을 9번에 박는 경우가 많았다. 이유는 개인 타율을 봐도 갭이 심한 선수라 2009년 WBC 승선을 하였지만, 고된 무릎 부상으로 후임 박기혁이 승선하였다. 그게 국대 마지막 시절이고 그 이후에는 손시헌과 박기혁 정도가 나섰지만 박진만보다 뛰어난 수비가 나올 리도 없고 물빠따라 기대 이하였다. 강정호, 김재호, 김하성 등 후배들이 가세하면서 공격면에서의 부분이 박진만의 통산 성적을 능가할지는 몰라도 수비만큼은 여전히 박진만이 우위라고 평가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 이병규(32경기 / 126타수 / 50안타 / .397 / 4홈런 / 31타점 / 37득점 / 7도루 / OPS 1.029)
적토마, 강한 1번 타자.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 ~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국가대표팀 1번 타자와 중견수를 맡았었다. 국대 말기에는 좌익수로 포지션을 변경한 적이 있었다. 아마야구 시절부터 국대 승선을 하여 96년에 처음 대표팀에 차출되어 대회 광탈의 쓴 맛을 본 이 후 1998년 방콕 아시안 게임에 뽑힌다. 홈런 4개를 치며 우승에 일조 한다.(이병규 국대 커리어에 있어서 홈런 4개 전부가 바로 이 대회였다.) 99년 한일 슈퍼게임과 아시안 선수권에도 출전, 2000년 시드니 올림픽 국가대표에도 뽑혀 대표팀 사상 첫 메달 기여를 했다.[40]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역시 메달 수훈을 하여 팀의 공로를 확실히 쌓아 올렸다. 그러나 2006년 마지막 국가대표 시절 경험을 하지 말아야 할 나쁜 불운까지 겪었다. 은퇴 뒤에는 이종욱, 이용규 등 후배들이 이병규의 포지션을 번갈아 보고 있는데도 이병규의 성적에 근접도 못하고 있고 그나마 도루 부분은 이용규가 통산 도루에 동률을 이뤄냈다.
합법적 병역 브로커, 국민타자. 이 선수는 참고로 팔꿈치 부상으로 군면제를 받은 상태에서 브로커 역할을 수행해왔던 것이다. 그 진가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3.4위전 동메달 결정전 마쓰자카 다이스케[41] 를 상대로 8회 결승타,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예선에서 8회말 극적인 역전 투런 홈런,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는 본선 내내 최악의 부진에 빠지며 엄청난 질타를 받았으나 4강에서 일본의 마무리 이와세 히토키를 울리는 극적인 홈런을 때려내며 팀의 승리를 이끌었다. 결승에서도 선제 투런포를 때리며 진가를 보였다. 그리고 2009년 WBC 2회 대회에서 엔트리 발표 과정에서 역시 박찬호와 은퇴 선언 인터뷰를 했는데 둘 다 똑같이 짠한 표정을 보여줬으나, 갑자기 2013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대표팀에 뽑혀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였다. 물론 팀이 개판 5분전이라 타석에서 밥값을 했지 후배놈들이 하나같이 말아먹으며 그대로 대표팀 선수 생활은 끝났다. 물론 복귀에 대해서 말이 많은데 소속팀 류모 감독과 야구팬들이 시켜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리고 2000년 이후 대표팀 개인 최다 홈런인 8개의 홈런을 기록 중이다. 그리고 2017년 시즌 종료 후 은퇴를 선언하였다. 아쉬운게 있다면 이 때도 4회 대회가 열렸던 해라 자국에서도 예선전을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본인에게는 험한꼴을 안봐서 불행 중 다행.
창용불패, 국가대표 잠수함. 2018 시즌 기준 유일하게 방콕 아시안 게임 출전 당시 투수 멤버였다.[42] 시즌에는 그냥 노예(야구)였다면 대표팀에서는 편안한 마무리 투수를 지탱을 해 온 잠수함 투수. 해외에서도 볼 수 없는 잠수함 투수로 시속 150km/h 넘나드는 폼으로 선수들을 졸 곧 상대를 했었다.(반대로 정대현은 130km/h 구속으로 대응했다.) 활약상으로는 2002 부산 아시안 게임과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이 있는데 이 대회만큼은 투수들이 박살난 가운데 류현진, 정현욱, 이승호와 함께 계투진에서 밥값을 했던 선수이다. 그러나, 연장에서 아쉬운 패배를 당했는데 아쉽고도 박수 받을만한 대회였다. 8년 후, 2017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 왕고참이였으나 끝내 경험할 수 없는 사태를 경험한 산증인... 연장전에서 뭐 본인도 말아먹고 선수들도 전부 말아드셨다. 한때는 엠엘비파크 투수계의 4천왕 중 하나였다. 그 외 3인은 박찬호, 구대성, 정대현.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당시 미국전에서 A로드를 삼구삼진으로 잡아낸 것으로 유명.[43] 그러나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엔트리에 포함되고도 한경기도 뛰지 않아 팝콘 팔러다니냐는 비아냥을 얻으며 팝콘갑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리고 은근히 국제대회 성적이 좋지 않은데, 2000년 시드니 올림픽, 2006 도하 아시안게임에서 평균자책점 6점대를 기록하며 부진했다.
국민 우익수[44] 일본 킬러. 일본전마다 미친 듯한 활약을 하는 또 하나의 선수로 2006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당시 호수비로 유명세를 펼쳤으며, 2008 베이징 올림픽에서 준결승전 동점 적시타를 때려 많은 이들의 열렬한 지지를 한 몸에 받았던 선수였다. 2013년 WBC가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 경기였으며 은퇴 후 일본의 퍼시픽 리그 팀인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로 연수를 떠났다. 일본으로 가게 된 계기가 메이저리그팀 LA 다저스에서 뛰던 이시이 가즈히사가 이전 다저스 출신인 코리안특급의 연락으로 인연이 닿았고 그렇게 되어 박찬호가 추천을 했다는데, 기사의 댓글 일부가 개드립으로 번지기도.
국가대표 최종병기. 이승엽과 마찬가지로 일찌감치 군 면제를 받았기에 병역특례와는 무관했다. 국내리그에서도 최정상급 불펜이었지만 언더핸드 투수를 많이 접하지 않는 외국 선수들을 상대로 한 국제대회에서는 더더욱 절정의 퍼포먼스를 보였다. 경희대학교 재학시절 참가했던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의 맹활약을 시작으로[45] 2015년 프리미어 12까지 중요한 순간마다 팀을 위기에서 건져냈다. 특히 2008 베이징 올림픽 결승전에서의 마지막 병살은 그의 활약상 중 최고의 장면으로 꼽을 수 있다. 2017 시즌 후 은퇴했다. 아직도 미국 야구선수들에 회자되던 느린 구속으로 타자를 현혹시킨 투수라고 불리는데 간단하게 생각하면 김병현의 반대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팀 생활을 하면서 삿포로 참사(야구)와 도하 참사(야구)를 겪은 적은 없으나, 타이중 참사를 겪은 적이 있다. 그래도 마지막 국가대표 경력을 마칠 때는 도쿄 대첩(야구)으로 마무리를 했다. 소속팀은 SK 와이번스 - 롯데 자이언츠를 거쳤다.
봉의사. 메이저~마이너리그를 오가며 선수생활을 하다가 06 WBC에서 국대로 선발되어 불펜자원으로 괜찮은 모습을 보여줬다. 2007 시즌 LG로 국내 유턴 후 2008 시즌 에이스로 활약하며 베이징 올림픽 국대에 승선했으나 미국-대만전에 선발출전하여 난타당했다. 그러나 2009 WBC에서는 김광현이 난타당하고 류현진도 썩 좋지 못한 모습을 보이는 와중에 봉중근이 일본전에 3번 선발 출전하여 호투하면서 봉의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견제구 동작만으로 이치로를 슬라이딩 귀루하게 만든 것은 덤. 이후에도 10, 14 아시안게임에 국대로 뽑혀 금메달을 획득했다.
8.3. 2000년대 중반 이후
2019년 기준 대표팀 최다 안타 1위, 최다 타점 3위 기록중인 국가대표 타격기계. 소속팀 두산 베어스에서는 폭발적인 신인시절에 비해 부침을 많이 겪기도 했지만 국가대표 유니폼만 입으면 훨훨 날아다니던 선수. 2015 WBSC 프리미어 12 초대 MVP와 2009 WBC 베스트 팀으로 선정되었다. 국가대표 좌익수 하면 다들 서슴없이 김현수 라고 말한다. 2018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에서는 주장을 맡았지만, 대표팀으로 뛰면서 역대급 커리어 로우를 기록을 했었다. 현. LG 트윈스 외야수로 고정 포지션은 좌익수이며, 가끔 LG 수비진이 시망인지라 1루수도 겸하고 있다. 성인 대표팀을 하면서 의외로 홈런은 없지만, 도루는 있는게 신기할 따름... 그런데 부상과 외적 논란 등으로 네임드 타자들이 본인을 제외하고 김경문호에 전부 승선하지 못해 2008년과 2019년 2번의 김경문호에 두번 다 발탁된 유일한 타자이자 올림픽-아시안게임-프리미어 12 금메달을 모두 가지고 있는 유일한 타자로, 레전드 국가대표 타자가 되었다. 투수까지 범위를 넓혀도 김광현만이 추가된다는 점에서 그의 꾸준함을 알 수 있다. 그동안 김현수가 홈런이 없었는데 2019 프리미어 12에서 A매치 첫 홈런을 달성 하였다.
평화왕 국가대표 거포 유격수.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을 기준으로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 까지 출전 하여 국대 유격수 현 부분에서는 한때 홈런 1위 였었다. 아무도 단기간 그의 아성을 넘은 선수는 없다. 현재 까지도 유격수 본좌 라고 불린다. 2010 아시안 게임 때는 최정의 부상으로 잠시 3루수를 뛰었었다. 원래 강정호가 전도유망한 내야 유틸리티라 상관이 없었다. 입단 당시에 포지션은 포수였었다. 하지만, 잘 나가던 2016년 대형 사고를 치는 바람에 앞으로 국대 승선에 관해서는 어떻게 될 지 미지수다. 2015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팀인 피츠버그 파이리츠 소속 포지션은 3루수[46] 로 뛰었고, 2020년 현재는 무소속이다.
대표팀 최다 안타 2위, 대표팀 최다 도루 기록을 가지고 있는 대한민국 대표팀 최고의 2루수. 2006년 대참사 당시 성인 대표팀 경력으로 프리미어 12 대회를 기준으로 역대 국가대표팀 2루수 올타임 선수로 군림하였다. 특히, 죽고 못사는 동생 이용규[47] 와 [테이블 세터 조합을 자주 맞췄는데, 2014년엔 둘 다 한화 이글스로 이적하고 2015년 프리미어12에 같이 승선하며 한화 이글스는 국가대표 테이블세터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2017 시즌 중간에 무릎 부상이 더더욱 악화되어 2018 시즌 하반기 부터 1루수로 수비 위치로 변경, 더 이상 우리가 아는 국가대표 2루수 정근우 로 나오기는 힘들 것 같다. SK 와이번스 시절에는 리즈 시절이였고 막판 2시즌은 잔부상으로 말아먹고 2013년말 FA를 가져 한화 이글스로 이적해서 제2의 전성기를 도모했으나 2017년 무릎 부상 이 후 지금은 1루수 및 외야수든 어느자리에서도 고군분투 병행을 하고 있다.
조선의 4번타자. 2000년대 이후 대표팀 4번타자 최다 홈런 2위, 최다 안타 2위를 기록중이다. 현재도 국가대표 선수로 남아있다. 2008년 대표팀 당시 팀내 홈런 1위로 이승엽의 부진에 그가 해결사 도모를 맡으며[48] ,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에서도 맹활약을 하였다. 2015 WBSC 프리미어 12 준결승 전 도쿄대첩 결승타의 주역으로 팀의 결승을 올리는데 일조 그리고, 우승을 하였으나. 후배들이 군면제가 되는 대회가 아니였다. 그래도 당시 시원하게 능욕을 선사한건 덤.[49]
후에 인터뷰에서는 김현수와 함께 일본이 지들 우승 하고 싶은거 다 아니깐 맘대로 해라 대신 우승 못하면 개망신 이다 라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 과거에는 NPB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MLB의 시애틀 매리너스 소속이자 2017년 부터 현재는 원 소속팀인 롯데 자이언츠에 돌아와 부동의 4번 타자를 맡고 있다.
후에 인터뷰에서는 김현수와 함께 일본이 지들 우승 하고 싶은거 다 아니깐 맘대로 해라 대신 우승 못하면 개망신 이다 라는 것을 몸소 보여줬다. 과거에는 NPB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와 MLB의 시애틀 매리너스 소속이자 2017년 부터 현재는 원 소속팀인 롯데 자이언츠에 돌아와 부동의 4번 타자를 맡고 있다.
돌부처. 정대현과 함께 2000년대와 2010년대 국가대표 마운드를 지탱하던 대한민국 대표 마무리 투수이며 2020년 국대자격을 박탈당하기 전까지 계속 국가대표 신분이었다. 과거 KBO에 있을때는 삼성 라이온즈 소속이였고, NPB는 한신 타이거스, 2019년 까지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팀인 콜로라도 로키스 소속에서 2020년 부터 해외 생활을 청산하여 국내로 복귀한 삼성으로 컴백 하였다.대한민국 명실상부 마무리 투수다. 데뷔 첫 국대 경기인 제 1회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때는 해외 야구팬들에게 눈도장을 찍은적이 있었다. 후에 2006년 카타르에서 있었던 아시안 게임 흑역사의 주범이였는데 당시 도하 참사겪으며 오뎅환 이라는 달갑지 않는 별명이 있었으며[50] , 국내용 이라는 비난을 들었었다.
이 후 베이징 올림픽 때는 무실점 경기 및 안정감이 있는 경기를 보여줬지만, 현지 내에서 컨디션이 좋지 않아 문제가 걸렸었다. 이와 별개로 오승환이 데뷔 했을 때 소속팀 삼성은 매년 포스트 시즌을 진출 했으며 그 2년은 우승을 하였고 아시아 야구 대항전에도 나갔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3년 내내 고생을 했었다. 결국, 2009년과 2010년 초반에 부활 했나 싶더니 다시 나가리가 되어 2년간은 국가대표급 투구는 볼 수 없었다. 2013년 WBC 대표팀 일원으로 나갔으나 팀은 타이중 참사를 겪고 예선 탈락으로 짐을 쌌다.
그리고 2017년 역시 WBC 대표팀으로 발탁 되었으나 무수한 사건사고가 많아서 발탁 금지와 발탁 찬성에 대한 논란이 있어 결국 발탁이 되었다. 허나 또 다시 참사를 당해 예선 광탈을 했다. 지금은 메이저리그로 돌아가 선수생활을 하고 있으며 은퇴하기 전까지 국대 야구 경기가 있으면 언제든지 다시 마무리 투수로 부를지 모른다. 그러나 2018년엔 해외파가 참가하지 않아서 승선 실패, 2019년엔 부상으로 또 승선하지 못했고, 2020년부턴 음주운전, 불법 도박 경력이 잇는 선수들의 국가대표 발탁이 불가능해지며 2017년 WBC가 그의 커리어 마지막 국가대표 경기가 되었다.
이 후 베이징 올림픽 때는 무실점 경기 및 안정감이 있는 경기를 보여줬지만, 현지 내에서 컨디션이 좋지 않아 문제가 걸렸었다. 이와 별개로 오승환이 데뷔 했을 때 소속팀 삼성은 매년 포스트 시즌을 진출 했으며 그 2년은 우승을 하였고 아시아 야구 대항전에도 나갔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3년 내내 고생을 했었다. 결국, 2009년과 2010년 초반에 부활 했나 싶더니 다시 나가리가 되어 2년간은 국가대표급 투구는 볼 수 없었다. 2013년 WBC 대표팀 일원으로 나갔으나 팀은 타이중 참사를 겪고 예선 탈락으로 짐을 쌌다.
그리고 2017년 역시 WBC 대표팀으로 발탁 되었으나 무수한 사건사고가 많아서 발탁 금지와 발탁 찬성에 대한 논란이 있어 결국 발탁이 되었다. 허나 또 다시 참사를 당해 예선 광탈을 했다. 지금은 메이저리그로 돌아가 선수생활을 하고 있으며 은퇴하기 전까지 국대 야구 경기가 있으면 언제든지 다시 마무리 투수로 부를지 모른다. 그러나 2018년엔 해외파가 참가하지 않아서 승선 실패, 2019년엔 부상으로 또 승선하지 못했고, 2020년부턴 음주운전, 불법 도박 경력이 잇는 선수들의 국가대표 발탁이 불가능해지며 2017년 WBC가 그의 커리어 마지막 국가대표 경기가 되었다.
대선배였던 이병규 이 후 국대 차기 1번 타자로 군림했다. 종박과 함께 한 때는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 주력 선수 투 톱 이였으며, 2008 베이징 올림픽/야구과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우승과 준우승을 거기에 한 술을 더 떠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금메달의 영광을... 여기까지 어찌보면 국대 리즈시절 및 대한민국 야구 흥행 시기에 맞춰 인기를 얻었으며, 데뷔는 LG 트윈스를 거쳐 전성기 시절 KIA 타이거즈 시절과 현 한화 이글스 소속이다. 2000년대 후반부터 2010년대 중반까지 전 팀 동료 정근우와의 테이블 세터 조합을 이루었다. 예전만해도 엄청난 승부사 기질이였는데 어느새 땅볼만 치면 포기한 듯 그런 표정으로 대충 산책 야구를 한다고 덤으로 까였다. 이건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해설을 맡던 박찬호의 일침이 컸는데 이 후로는 좀 사람이 정상으로 돌아왔으나 현재는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의 실력이 모조리 개판이라 국가대항전에 다시 뽑히면 악바리 같은 기질이 다시 나올지 역시 미지수다. 여담으로 일본의 해설자들이 현 외야수인 아오키 노리치카 선수와 많이 비교를 한다. 볼을 잘 고르는 것과 투수와의 승부 기질과 타격센스 및 수비 능력이 비슷하다라고 했다. 서로 비슷한 점은 좌타자.
전 KIA 타이거즈 소속. 한 때는 대한민국 최고의 우완투수로 자리매김을 하나 싶었으나, 부상으로 먹튀가 된 비운의 투수 데뷔 초창기 시절은 중간계투로 뛰었으며, 선배 신용운과 후배 한기주와 함께 서정환 감독 아래서 엄청 굴렸다가 선발로 전환한 투수로 첫 선발인 2007년 리그 최다패인 18개를 적립하며[51] 이듬해 각성하여 방어율 1위 다승 2위를 기록했다. 이 후 개노답 타선 땜에 09/10시즌 10승은 커녕 9승과 6승에 머물며 팀의 계투진들이 개판이라 팀을 위해서 포지션 변경도 마다 했으며, 결국, 그 바램이 왔는지 2011년 정규리그 MVP에 오른다.
이후 대표팀에 뽑혀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주로 계투로 뛰었지만 가끔 선발투수로도 뛰며 한때 라이벌이자 국가대표 동료였던 류현진, 김광현과 함께 국가대표 투수진을 이끌었다. 도하 참사(야구)부터 2013 WBC까지 매년 국대 경기에 출전도 하였다. 특히 베이징 올림픽 때는 분식회계로 엄청 까였는데 이유는 선발 투수였던 윤석민을 마무리로 활용한 김경문 감독의 용병술이였는데, 팬들도 의아했지만, 결론적으로 전승우승 이라는 흠좀무한 성적을 냈다는거에 증평이니 다행이였지 1패라도 적립한 순간 역적으로 몰릴 뻔.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때는 중국/베네수엘라 국가대표팀을 가지고 놀아 한 때 메이저리그에서 당장 통할 것 같다 라는 투수로 거론이 되었으나 메이저 계약을 했지 마이너리그에서 1년간 떠돌다가 메이저 콜업은 못받고 2015년 복귀를 하여 현, 2019년 국내에서 활동. 수술과 재활등 갖은 노력을 하였으나 계속되는 부상과 부진에 결국 2019년 은퇴하였다. 참 아쉽다고 할 정도로 타이거즈 팬이나 야구팬들에게는 뼈아픈 손가락 중 하나일것이다
이후 대표팀에 뽑혀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 주로 계투로 뛰었지만 가끔 선발투수로도 뛰며 한때 라이벌이자 국가대표 동료였던 류현진, 김광현과 함께 국가대표 투수진을 이끌었다. 도하 참사(야구)부터 2013 WBC까지 매년 국대 경기에 출전도 하였다. 특히 베이징 올림픽 때는 분식회계로 엄청 까였는데 이유는 선발 투수였던 윤석민을 마무리로 활용한 김경문 감독의 용병술이였는데, 팬들도 의아했지만, 결론적으로 전승우승 이라는 흠좀무한 성적을 냈다는거에 증평이니 다행이였지 1패라도 적립한 순간 역적으로 몰릴 뻔. 2009년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때는 중국/베네수엘라 국가대표팀을 가지고 놀아 한 때 메이저리그에서 당장 통할 것 같다 라는 투수로 거론이 되었으나 메이저 계약을 했지 마이너리그에서 1년간 떠돌다가 메이저 콜업은 못받고 2015년 복귀를 하여 현, 2019년 국내에서 활동. 수술과 재활등 갖은 노력을 하였으나 계속되는 부상과 부진에 결국 2019년 은퇴하였다. 참 아쉽다고 할 정도로 타이거즈 팬이나 야구팬들에게는 뼈아픈 손가락 중 하나일것이다
- 류현진(13경기 / 51.1이닝 / 6승 1패 / ERA 3.69)
코리안몬스터.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최다 승리 1위 타이틀을 보유중인 현재 대한민국 최고의 투수이자 박찬호에 이어서 역대 한국인 투수 2위로 평가받고 있다. 현, 2020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의 토론토 블루제이스 소속. 그야말로 한국에서 다시 나오기 힘든 개캐 선수. 데뷔 시절 부터 소년가장이였다. 국내 소속은 한화 이글스였고 당시에도 잦은 출전으로 혹사가 아니냐 라고 할 정도로 정규시즌에 가히 괴물급 성적을 내어 타팀 팬들에게는 부러움의 대상이였다. 초기 성인 대표팀은 카타르 아시안 게임인 류택배 라고 불릴만큼 까이던 첫 시절이였다.
이 후 기량이 급속히 늘어나자 2008 베이징 올림픽을 기준으로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대표팀 일원이였다. 국대 선수들 중 최다승을 가지고 있으며 최다 완봉을 가지고 있을 만큼의 페이스를 자랑한다. 한화 시절에는 정말 눈물겨운 시절을 보내 심히 성적이 안습하다. 2012년이 그의 마지막 경기였는데 넥센 히어로즈를 상대하여 10이닝 1실점[53] 이라는 쾌투를 했음에도 개노답 물빠따 타선 땜에 승리를 많이 못 거둔 것이 아쉽다. 대한민국에서 거둔 승리만 98승에 머물러 있으며[54] 포스팅 시스템 제도로 인해 미국으로 진출하여 생활 중(2013년 부터 현재) 류현진의 현재 등번호 99번은 임시결번이며 언제든지 돌아오면 다시 그가 입을 예정이다. 현재, 대한민국 투수 유망주들의 우상이며 레전드로 남아있다. 아쉽게도 소속 팀 시절 현재까지도 우승과는 인연이 없다.
이 후 기량이 급속히 늘어나자 2008 베이징 올림픽을 기준으로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 대표팀 일원이였다. 국대 선수들 중 최다승을 가지고 있으며 최다 완봉을 가지고 있을 만큼의 페이스를 자랑한다. 한화 시절에는 정말 눈물겨운 시절을 보내 심히 성적이 안습하다. 2012년이 그의 마지막 경기였는데 넥센 히어로즈를 상대하여 10이닝 1실점[53] 이라는 쾌투를 했음에도 개노답 물빠따 타선 땜에 승리를 많이 못 거둔 것이 아쉽다. 대한민국에서 거둔 승리만 98승에 머물러 있으며[54] 포스팅 시스템 제도로 인해 미국으로 진출하여 생활 중(2013년 부터 현재) 류현진의 현재 등번호 99번은 임시결번이며 언제든지 돌아오면 다시 그가 입을 예정이다. 현재, 대한민국 투수 유망주들의 우상이며 레전드로 남아있다. 아쉽게도 소속 팀 시절 현재까지도 우승과는 인연이 없다.
- 김광현(16경기 / 57.2이닝 / 5승 3패 / ERA 3.41)
대한민국 야구 국가대표팀 최다 이닝 1위, 최다 선발 등판 1위, 최다 승리 2위 타이틀을 보유하고 있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 소속 좌완 투수.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최종예선 및 본선에서 류현진과 함께 원투펀치로 활약하면서 이름을 날렸다., 특히 일본과의 두 경기에서 모두 호투했고, 메달이 걸린 준결승전에서는 8이닝 2실점 1자책점으로 승리를 따내면서 일본 킬러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나 다음 해인 2009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에서는 일본에게 철저히 분석당하면서 1.1이닝 8실점으로 털리고 난 후 김콜드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 2010년과 2013년엔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하며[55] 잠시 주춤했지만, 2014년 이후 부활하며 국가대표 투수 자리도 되찾았다. 류현진이 메이저 리그로 떠난 이후 2014 인천 아시안 게임과 2015 프리미어 12에서는 명실상부한 1선발로 우승을 이끌었으며, 2019 프리미어 12에서도 양현종과 함께 원투펀치로 출전하는 등 10년 넘게 대표팀을 지켜왔다. 2008년과 2019년 두번의 김경문호에 모두 탑승한 유일한 투수이자 동시에 올림픽-아시안게임-프리미어 12 금메달[56] 을 모두 가지고 있는 유일한 투수라는 점에서 그의 꾸준하고 대단한 국대 성적을 알 수 있다.[57] 부상으로 출전하지 못한 2010년(뇌경색), 2013년(어깨 부상), 2017년(팔꿈치 수술)을 제외하면 데뷔 후 모든 국가대표 경기에 출전한 것도 눈여겨볼만 한 기록이다.
특히 2017년 부상으로 시즌 아웃을 당하고도 복귀 이후 2018년 팀과 본인의 철저한 자기 관리로 다시 전성기 시절 구위를 회복하면서 리그 에이스로 군림했고, 결국 2019시즌 종료 후 포스팅 시스템으로 메이저 리그에 진출했다. 류현진이 메이저 리그로 진출한 이후 국가대표 커리어를 더이상 쌓지 못하며 최다승 기록을 갈아치울 수도 있어 보였지만, 본인도 해외 진출을 하면서 앞으로 국가대표 커리어가 추가될지는 미지수다. 다만 국가대표 역대 최다 이닝 기록은 당분간 깨지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58]
특히 2017년 부상으로 시즌 아웃을 당하고도 복귀 이후 2018년 팀과 본인의 철저한 자기 관리로 다시 전성기 시절 구위를 회복하면서 리그 에이스로 군림했고, 결국 2019시즌 종료 후 포스팅 시스템으로 메이저 리그에 진출했다. 류현진이 메이저 리그로 진출한 이후 국가대표 커리어를 더이상 쌓지 못하며 최다승 기록을 갈아치울 수도 있어 보였지만, 본인도 해외 진출을 하면서 앞으로 국가대표 커리어가 추가될지는 미지수다. 다만 국가대표 역대 최다 이닝 기록은 당분간 깨지기 힘들 것으로 보인다.[58]
- 양현종(9경기 / 40⅔이닝 / 4승 2패 / ERA 2.46)
붉은청룡[59] . 김광현과 함께 프로에 입단했으나, 1군 초기에는 패전조나 추격조로만 나왔다. 이후 간베 토시오라는 스승인 일본인 투수 코치를 만나 일취월장하여 2009년에 리그 우승을 거뒀다. 이 후에는 다소 부진했는데 2014년부터 2019년까지 포텐이 터져 KBO 대표 투수로 군림하며 매년 10승씩 적립을 하고 있다.
국가대표 경력 대부분이 아시안게임이라 애매한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류현진이 메이저리그에 진출 한 이후 김광현에 이어 국대 2선발로 등판해서 우승을 이끈적도 있고[60] 김광현 류현진에 이어 국대 최다 이닝 3위, 최다 승 3위 및 국대 통산 평균자책점 2점대로 현재는 류현진 김광현만큼은 아니어도 국대 에이스로 평가받고 있다. 다만 프리미어 12 당시에 '국대 차출 거부' 라는 말을 했다가 무참하게 까인 적이 있었고[61] 2017 WBC에는 참가했지만 아시다시피 고척돔 참사로 팀은 광탈했고 대차게 까였다. 2020년 부터는 국대 1선발이었던 류현진과 김광현이 모두 해외로 진출하며 양현종을 이길만한 투수가 나오지 않는 이상 국가대표 1선발 자리를 맡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국가대표 경력 대부분이 아시안게임이라 애매한 부분이 있지만 그래도 류현진이 메이저리그에 진출 한 이후 김광현에 이어 국대 2선발로 등판해서 우승을 이끈적도 있고[60] 김광현 류현진에 이어 국대 최다 이닝 3위, 최다 승 3위 및 국대 통산 평균자책점 2점대로 현재는 류현진 김광현만큼은 아니어도 국대 에이스로 평가받고 있다. 다만 프리미어 12 당시에 '국대 차출 거부' 라는 말을 했다가 무참하게 까인 적이 있었고[61] 2017 WBC에는 참가했지만 아시다시피 고척돔 참사로 팀은 광탈했고 대차게 까였다. 2020년 부터는 국대 1선발이었던 류현진과 김광현이 모두 해외로 진출하며 양현종을 이길만한 투수가 나오지 않는 이상 국가대표 1선발 자리를 맡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2000년대 후반 한정 김승엽 2006 WBC와 2009 WBC에서 이승엽에 후계자로 지목되어[62] WBC를 폭격했었다.[63] 2009년 WBC 1루수 올스타에 선정되었고 만약 우승시 MVP는 김태균이 가장 유력했을 정도로 엄청난 활약을 했다. 그후 이대호에 밀렸다기 보다는 수비에서의 차이점도 보였고 무엇보다도 2010년 광저우 아시안 게임때의 0할 구푼!(0.091)! 이라는 처참한 성적을 찍었다. 2013 WBC에서 6타석 2안타를 얻어 고분고투 했으나 득점권 타석에서 삽질을 하여 잊혀지게 된 원흉이였다. 2017년 WBC 이후로는 나이도 있고 하여 대표팀에 김태균이 있을 자리는 없다. 이후 김태균의 프로시즌 성적이 갈수록 내리막길로 가기 되었기에 이젠 볼 수 없을 전망이 더더욱 높다.
8.4. 2010년대와 현 2020년대
소년장사 현 KBO 리빙 레전드 3루수 겸 SK 와이번스 소속 선수
최정은 두목곰의 뒤를 이어 3루수 보직을 받았다.
첫 A매치는 2009 WBC 대표팀 맴버로 당시, 투수조 막내인 김광현, 임태훈과 야수 막내인 김현수와 어렸으며 차세대 유망주로 낙점을 받던 선수였다. 그러나 발탁 되기에는 선수가 시즌 성적은 좋게 냈으나, 정작 대표팀 승선에는 희비가 많이 엇갈릴 정도로 가장 손해 받던 케이스의 한 축이였다. 2015년 프리미어 12, 2017 WBC 선수 후보에 없었고 동시대의 라이벌인 박석민 이나 황재균의 이름이 많이 보이거나 뉴페이스 였던 허경민이 있었다.[64] 최정이 발탁 되었던 첫 A매치인 2009 WBC 때는 그저 평범한 후보였고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때는 본래 3루수 선발로 낙점이 되었으나, 본인이 뜻하지 않는 부상으로 유격수 백업으로 준비하던 강정호가 주전을 맡은 사건이 있었다. 야구 팬들도 당시에는 벙쪄있었던건 물론이요, 평론가들도 무덤덤했다. 그래도 양 선수들이 멀티 플레이어라 다행이였다. 이후에도 국대 부름으로 나갔으나 의외로 국대 성적도 빈변찮고 선발보다는 백업 선수로 인식이 되었다. 어찌보면 친구 박병호와 쌍으로 욕먹는다.
최정은 두목곰의 뒤를 이어 3루수 보직을 받았다.
첫 A매치는 2009 WBC 대표팀 맴버로 당시, 투수조 막내인 김광현, 임태훈과 야수 막내인 김현수와 어렸으며 차세대 유망주로 낙점을 받던 선수였다. 그러나 발탁 되기에는 선수가 시즌 성적은 좋게 냈으나, 정작 대표팀 승선에는 희비가 많이 엇갈릴 정도로 가장 손해 받던 케이스의 한 축이였다. 2015년 프리미어 12, 2017 WBC 선수 후보에 없었고 동시대의 라이벌인 박석민 이나 황재균의 이름이 많이 보이거나 뉴페이스 였던 허경민이 있었다.[64] 최정이 발탁 되었던 첫 A매치인 2009 WBC 때는 그저 평범한 후보였고 2010 광저우 아시안 게임때는 본래 3루수 선발로 낙점이 되었으나, 본인이 뜻하지 않는 부상으로 유격수 백업으로 준비하던 강정호가 주전을 맡은 사건이 있었다. 야구 팬들도 당시에는 벙쪄있었던건 물론이요, 평론가들도 무덤덤했다. 그래도 양 선수들이 멀티 플레이어라 다행이였다. 이후에도 국대 부름으로 나갔으나 의외로 국대 성적도 빈변찮고 선발보다는 백업 선수로 인식이 되었다. 어찌보면 친구 박병호와 쌍으로 욕먹는다.
2010년대 중후반 ~ 2020년 현재 대표팀 4번타자겸 1루수 의외로 박병호는 대표팀과의 인연이 그다지 없었다. 일종의 타자판 정우람의 버전? 이라고 볼 수 있다. 둘 다 군대도 갔다 온 것도 똑같고 후에 대표팀 발탁 된 것도 똑같다.
사실, 첫 A매치 데뷔는 2013 WBC 대표팀에 승선에 가까웠으나 당시에는 이대호와 김태균 이라는 큰 산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좋지 않아서 선수 입장에서는 다행일려나...
결국, 데뷔는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 대표팀으로 맡게 되었다. 그리고 대표팀 주장은 덤[65] 개인 커리어 대표팀 첫 우승을 일궈냈으며, 2015 프리미어 12,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에서도 4번타자의 임무를 수행 하였다. 그러나, 2019 프리미어 12에서는 엄청난 삽질과 슬럼프로 팀은 준우승을 하며 대표팀 차출 이후 첫 눈물을 보이기도 하였다. 포스트 이승엽, 김태균, 이대호를 꿈꾸는 박병호에게는 너무 늦은 데뷔인지라 아쉬움이 남을법하다. 이상하게도 박병호는 국대에서 활약한 적이 꽤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내용 타자라는 인식이 많은데 아무래도 2016, 2017 시즌 메이저리그에서 죽 쑨 것과 2019 프리미어 12에서 부진 했던 영향이 큰 것 같다.
사실, 첫 A매치 데뷔는 2013 WBC 대표팀에 승선에 가까웠으나 당시에는 이대호와 김태균 이라는 큰 산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것이 좋지 않아서 선수 입장에서는 다행일려나...
결국, 데뷔는 2014년 인천 아시안 게임 대표팀으로 맡게 되었다. 그리고 대표팀 주장은 덤[65] 개인 커리어 대표팀 첫 우승을 일궈냈으며, 2015 프리미어 12,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에서도 4번타자의 임무를 수행 하였다. 그러나, 2019 프리미어 12에서는 엄청난 삽질과 슬럼프로 팀은 준우승을 하며 대표팀 차출 이후 첫 눈물을 보이기도 하였다. 포스트 이승엽, 김태균, 이대호를 꿈꾸는 박병호에게는 너무 늦은 데뷔인지라 아쉬움이 남을법하다. 이상하게도 박병호는 국대에서 활약한 적이 꽤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내용 타자라는 인식이 많은데 아무래도 2016, 2017 시즌 메이저리그에서 죽 쑨 것과 2019 프리미어 12에서 부진 했던 영향이 큰 것 같다.
지금은 이전보다 몸상태가 좋지 않아 어쩌면 국가대표 선발로는 많이 보기 힘들 것 같은 전망이 높다.
2010년대 중후반 한정 황재균은 2006년도에 입단을 했는데 당시에는 동기인 강정호, 류현진,한기주 등등 드래프트 일원이였다, 두각을 내지 못했다가 상비군에 몇번씩 이름으로는 오르락 내리락 언급만 있었을 뿐이다.
그와중에 2009년 커리어 처음으로 풀시즌과 규정타석을 채웠으며, 최정과 함께 한때 3루수 구도를 낼 정도로 차기 대형 선수로 낙점을 했었다. 그러면서 광저우 아시안 게임 때 무조건 뽑힐정도로 기대하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2010년이 되자마자 선수 개인적으로 부상, 부진 및 김민성과 트레이드 되었고 이후, 2013 시즌 까지 평균 성적만을 찍는 선수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그는 병역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와중에 2014 시즌 초반부터 엄청나게 치고 올라왔다.
그렇게, 첫 A매치는 2014 인천 아시안게임 발탁이 되었고 이후 꾸준히 국가대표 야구팀에 승선 후보로 낙점 되었다. 결승전에는 나성범, 민병헌과 합작하여 금메달을 획득 하였고 당시 트레이드 상대였던 김민성과 함께 대표팀 생활을 하며 병역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일례로 FA때 친구 김현수 처럼 메이저리그 입단이 있었기에 차출되지 않았다. 이후에는 꾸준하게 대표팀에 참석을 했으며, 의외로 무서운 선수다. 대표팀 홈런 2위 이대호와 똑같다.
그와중에 2009년 커리어 처음으로 풀시즌과 규정타석을 채웠으며, 최정과 함께 한때 3루수 구도를 낼 정도로 차기 대형 선수로 낙점을 했었다. 그러면서 광저우 아시안 게임 때 무조건 뽑힐정도로 기대하는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2010년이 되자마자 선수 개인적으로 부상, 부진 및 김민성과 트레이드 되었고 이후, 2013 시즌 까지 평균 성적만을 찍는 선수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런 그는 병역문제로 골머리를 앓던 와중에 2014 시즌 초반부터 엄청나게 치고 올라왔다.
그렇게, 첫 A매치는 2014 인천 아시안게임 발탁이 되었고 이후 꾸준히 국가대표 야구팀에 승선 후보로 낙점 되었다. 결승전에는 나성범, 민병헌과 합작하여 금메달을 획득 하였고 당시 트레이드 상대였던 김민성과 함께 대표팀 생활을 하며 병역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일례로 FA때 친구 김현수 처럼 메이저리그 입단이 있었기에 차출되지 않았다. 이후에는 꾸준하게 대표팀에 참석을 했으며, 의외로 무서운 선수다. 대표팀 홈런 2위 이대호와 똑같다.
닥터 K 긁히면 되고 안되면 차르 봄바
현, LG 트윈스의 선발투수 이자 삼진을 잘 잡기로 유명한 선수이다. 첫 A매치는 2013년 WBC이며 류현진, 강정호, 황재균, 한기주 등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과 함께한 동시대의 드래프트 선수다, 포텐이 좀 늦게 터졌을뿐이였다. 그래서 한때 조원수박차의 일원으로 야갤에서 핫한 이미지 선수 중 하나, 첫 성인 대표팀을 맡았을땐 불을 질러 욕을 꽤나 먹었던 이미지가 강했었다. 이후 그런 버릇은 개나 줬는지 잘하지 않는다. 리그에서는 선발투수로 활약하지만, 어째서인지 정작 중요한 세계 대회에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롱릴리프로 출전을 한다. 체력이 좋아서 인지 구위가 좋아서 인지는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다. 번외로 양현종에 뒤를 이어 국가대표 다승 3승 겸 4위를 기록 하고 았다.
현, LG 트윈스의 선발투수 이자 삼진을 잘 잡기로 유명한 선수이다. 첫 A매치는 2013년 WBC이며 류현진, 강정호, 황재균, 한기주 등등 기라성 같은 선수들과 함께한 동시대의 드래프트 선수다, 포텐이 좀 늦게 터졌을뿐이였다. 그래서 한때 조원수박차의 일원으로 야갤에서 핫한 이미지 선수 중 하나, 첫 성인 대표팀을 맡았을땐 불을 질러 욕을 꽤나 먹었던 이미지가 강했었다. 이후 그런 버릇은 개나 줬는지 잘하지 않는다. 리그에서는 선발투수로 활약하지만, 어째서인지 정작 중요한 세계 대회에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롱릴리프로 출전을 한다. 체력이 좋아서 인지 구위가 좋아서 인지는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다. 번외로 양현종에 뒤를 이어 국가대표 다승 3승 겸 4위를 기록 하고 았다.
조승사자 현, 키움 히어로즈의 마무리 투수이며 평균 구속 148~151최고 구속은 152~154 언저리로
2020년 9월 7일 일자로 리그 세이브 1위를 달리고 있다. 원래 중간 계투 였다가 보직을 여러차례 바뀐 케이스,
첫 A매치는 2015 프리미어 12 였다. 이후 승승장구 했으나 팀선배랑 어이없는 사건에 휘말려 그만 2018년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 차출도 무효화 되고 병역특례 찬스를 놓치게 되었다. 물론 선수 개인에게는 시즌 아웃 이라는 초유의 사태까지 터졌으니... 다행히 사건은 무혐의로 끝나 살았으나, 피해 여성이라는 사람이 무고한 사람을 쪽박치게 만들어 버렸다. 이후 다시 대표팀 복귀는 했으나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이 진행이 되지 않아 지금 상황으로는 가만히 있어야 할 상황이 되었다. 2020 도쿄 올림픽도 2021년으로 연기 되는 등 좋지 않는 악재들이 점점 쌓아지고 있다.
2020년 9월 7일 일자로 리그 세이브 1위를 달리고 있다. 원래 중간 계투 였다가 보직을 여러차례 바뀐 케이스,
첫 A매치는 2015 프리미어 12 였다. 이후 승승장구 했으나 팀선배랑 어이없는 사건에 휘말려 그만 2018년 자카르타 아시안 게임 차출도 무효화 되고 병역특례 찬스를 놓치게 되었다. 물론 선수 개인에게는 시즌 아웃 이라는 초유의 사태까지 터졌으니... 다행히 사건은 무혐의로 끝나 살았으나, 피해 여성이라는 사람이 무고한 사람을 쪽박치게 만들어 버렸다. 이후 다시 대표팀 복귀는 했으나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이 진행이 되지 않아 지금 상황으로는 가만히 있어야 할 상황이 되었다. 2020 도쿄 올림픽도 2021년으로 연기 되는 등 좋지 않는 악재들이 점점 쌓아지고 있다.
평화왕자 현, 키움 히어로즈 내야수. 리그 유격수 선수들 중 김하성 만큼 뛰어나게 성적을 낸 선수가 없다.[67]
사실, 김하성이 현 유격수에 어울리는 이유는 공수주 3박자에 해당이 될 뿐만 아니라, 비단 각 방송사 해설자들도 인정할만큼 가치가 좋다는 것을 증명한다. 사실 김하성의 별명인 평화왕자는 현 소속팀의 선배이자 본 포지션의 전임자였다. 강정호는 별명이 평화왕이였다.
첫 A매치 데뷔는 2017 APBC 대회에서 인상적인 활약으로 각팀의 감독들 및 코치들에게도 눈도장을 받았었다. 이후 자카르타·팔렘방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병역특례도 하였고 당해년도와 이듬해에는 골든글러브 2연패를 달성하는 등 점차 성적도 좋아졌고 대표팀 주전으로는 손색이 없을 정도로 주목 받고 있다.
문제는 이 선수가 국내에서 뛴 기간이 만 6년차가 되는 시점에 포스팅 시스템으로 인한 해외진출을 하면 대표팀 차출에 차질이 있을 수도 있다.
사실, 김하성이 현 유격수에 어울리는 이유는 공수주 3박자에 해당이 될 뿐만 아니라, 비단 각 방송사 해설자들도 인정할만큼 가치가 좋다는 것을 증명한다. 사실 김하성의 별명인 평화왕자는 현 소속팀의 선배이자 본 포지션의 전임자였다. 강정호는 별명이 평화왕이였다.
첫 A매치 데뷔는 2017 APBC 대회에서 인상적인 활약으로 각팀의 감독들 및 코치들에게도 눈도장을 받았었다. 이후 자카르타·팔렘방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병역특례도 하였고 당해년도와 이듬해에는 골든글러브 2연패를 달성하는 등 점차 성적도 좋아졌고 대표팀 주전으로는 손색이 없을 정도로 주목 받고 있다.
문제는 이 선수가 국내에서 뛴 기간이 만 6년차가 되는 시점에 포스팅 시스템으로 인한 해외진출을 하면 대표팀 차출에 차질이 있을 수도 있다.
바람의 손자
이종범의 아들이자 팀 선배 김하성과 같은 키움 히어로즈 외야수.
김하성과 데뷔는 3년 차이이고 데뷔 첫 해 부터 이종범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KBO 팬들에게 가장 관심거리 였다. 그야말로 대형 신인의 탄생 이라고 말할지경, 그 기세로 2017년 신인상을 수여 받으며[68] 당해년도 국가대표 성인 대표팀에 차출 되었다. 그것도 아버지와 함께 하였고 2018년 아시안 게임 출전 금메달 획득 후 병역문제도 해결을 하여 한시름 홀가분해 졌을 것이다. 이때도 아버지 이종범과 대표팀 생활을 했었다. 2019 WBSC 12 대표로 출전하여 일본, 미국 대표팀에서도 예의 주시하며 많은 관찰을 하였다고 한다. 김하성과 함께 프리미어 12 대회가 끝난 후 각 포지션의 베스트 선수 선정이 있었는데 그 중 김하성과 같이 뽑혔다. 최연소 500안타를 기록도 하였다. 앞으로 꾸준한 성적을 내다본다면 1천안타의 접근성이 4년 내에 볼 수 있다는 전망이다.
일례로 별명이 별명인지라 부친은 바람의 아들, 본인은 바람의 손자인데 저거 검색하면 '''리다이렉트''' 된다.이종범의 아들이자 팀 선배 김하성과 같은 키움 히어로즈 외야수.
김하성과 데뷔는 3년 차이이고 데뷔 첫 해 부터 이종범의 아들이라는 수식어로 KBO 팬들에게 가장 관심거리 였다. 그야말로 대형 신인의 탄생 이라고 말할지경, 그 기세로 2017년 신인상을 수여 받으며[68] 당해년도 국가대표 성인 대표팀에 차출 되었다. 그것도 아버지와 함께 하였고 2018년 아시안 게임 출전 금메달 획득 후 병역문제도 해결을 하여 한시름 홀가분해 졌을 것이다. 이때도 아버지 이종범과 대표팀 생활을 했었다. 2019 WBSC 12 대표로 출전하여 일본, 미국 대표팀에서도 예의 주시하며 많은 관찰을 하였다고 한다. 김하성과 함께 프리미어 12 대회가 끝난 후 각 포지션의 베스트 선수 선정이 있었는데 그 중 김하성과 같이 뽑혔다. 최연소 500안타를 기록도 하였다. 앞으로 꾸준한 성적을 내다본다면 1천안타의 접근성이 4년 내에 볼 수 있다는 전망이다.
9. 개인 기록
개인 기록은 각 부문별 상위 3위 이내의 선수들까지만 서술한다.[69]
9.1. 최다 홈런[70]
9.2. 최다 안타
9.3. 최다 타점
9.4. 최다 도루
9.5. 최다 승리[72]
9.6. 최다 세이브
9.7. 최다 이닝
10. 관련 문서
11. 둘러보기
[1] 대한축구협회가 운영을 총괄하는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과는 달리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보다 KBO의 영향력이 훨씬 크다. 프로선수 차출과, 전력 분석, 지원금 등 운영 전반은 KBO에서 담당하며,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는 아마추어 야구 대표팀의 선발 과정에서 영향력을 행사한다.[2] 연속 4회 출전[3] 연속 2회 출전[4] 연속 7회 출전[5] 프로선수들이 참여하기 시작한 98년 아시안 게임 부터.[6] 야구가 2012 런던 올림픽부터 올림픽 정식종목에서 제외되었으나 2020 도쿄 올림픽에서 한시적으로 부활했다.[7] 영문 명칭으로는 Amateur World Series. 88년 대회부터는 야구 월드컵(Baseball World Cup)이라고 불렀다. 2011년 대회를 끝으로 폐지.[8] 인터컨티넨탈컵(Intercontinental Cup)이라고도 한다. 2010년 대회를 끝으로 폐지.[9] 홈런을 비롯해 아래 기록들은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 올림픽 지역 예선 결과는 제외.[10] 다승을 비롯한 아래 기록들은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와 2008 베이징 올림픽 대륙별 플레이오프 기록도 포함한다.[11] 12분 12초에 언급[12] 그래서 2006 WBC 출범 당시 야구 국대 서포터즈를 조직했을 때 이들 이름이 '파란 도깨비'였다. 2006 WBC 이후 해산해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13] 다만 한국의 경우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획득하면 군면제 혜택이 주어지기 때문에 프로선수를 위주로 내보낸다. 일본, 대만 등 다른 국가들은 아시안게임을 마이너게임으로 여기기 때문에 프로선수를 선발하지 않고 실업팀 위주로 아시안게임 야구 국가대표팀을 구성하고 지금까지 3파전 추세가 계속 이어지고 있다.[14] 프로리그가 선진화 하면서 팬들도 이제는 자신이 응원하는 팀이 한국시리즈에 진출해 우승하는게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가 되었고 당연히 이에 걸림돌이 되는 요소나 일으키는 방애물은 제거해야 한다는 의견이 커지는 것이다. MLB는 진작부터 이런 분위기가 널리 퍼져있었고, 그 때문에 선수 차출에 매우 부정적이다.[15] 그래도 WBC나 올림픽에서는 역시 주목도가 남다르기에 06-10에는 차출을 우선으로 하였지만 06년에는 김동주가 예선에서 크게 다쳐 일년을 거의 쉬면서 두산을 그해 폭망하였다. 09년에 크게 다친선수는 없었지만 투수의 경우에 빨리 컨디션을 끌어올려 시범경기 시즌인 3월에 무리를 하다보니 9-10월에 주축 투수들의 체력이 고갈되는 문제가 발생하였다. 게다가 90년대가 아니라 2000년대에 국제리그 활성화이 바람이 불면서 구단>대표팀 의 중요도가 바뀐게 크다.[16] 90년대나 그 이전까지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은 클럽 그딴거 상관없이 닥치고 국대라고 할정도로 모든걸 국대 위주로 꾸렸지만 한일월드컵 이후로 케이리그 팀들이 스스로 반발할 정도로 클럽의 입장등을 생각하는 방향으로 노선이 바뀌었다. 그리고 야구의 메이저 대회 WBC는 이러한 바람이 굳어질때 발생하였으니 구단의 입장과 선수를 생각해 무리를 시키지 않는 방향으로 2010년 이후로 생각하게 되었다.[17] 2013년을 시작으로 대회가 없던 2016, 2017, 2018년에 평가전을 치렀다. 2015년과 2019년엔 프리미어 12에서 맞대결을 펼쳤기에 사실상 2014년을 제외하고 매년 맞붙고 있는 것이다.[18] 물론 대만리그 수준이 메이저리그 스카우터나, 타리그를 체험하는 용병들을 비교대입해볼시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뤘다고보기는 어렵다.[19] 다만 이 두 국가는 프로야구 선수들을 차출하지 않고 자국의 아마추어 선수들을 내보낼 정도로 야구 인력 저변이 넓지만 한국은 프로야구 선수가 아니라면 국제 대항전 대회를 치를 수 있을만한 인력 수급이 안된다. 한국의 독립, 대학 야구팀들이 일본의 사회인야구팀들 같은 높은 수준의 경기력을 보유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퓨처스리그 소속 팀들 중에서 추려내려 해도 구단의 반발들이 심하니 난감한 이유다.[20] 코로나 19로 1년 연기됨[21] 다만 WBC는 선수 상금이 별도로 지급되는데 그 규모는 대표팀이 성적으로 받는 수령액의 50%. 따라서 우승하면 10억원에 5억원의 선수 수당이 나온다.[22] 당장 KBO 한국시리즈 우승 상금이 30억원대다. 만약 모기업이 우승 보험을 들어놓으면 50억원 가까이 받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23] 김하성의 경우 원래라면 2022시즌 종료 후 FA이나, 국가대표 출전 기한의 혜택을 받아 2021시즌 종료후 FA가 된다.[24] '''프로선수들이 참여하기 시작한 98년 아시안 게임 부터'''.[25] 당시 인하대 감독.[A] A B C D E F G 평가전[26] 10:2 승[27] 1차전 6:2 패, 2차전 3:15 승.[28] 당시 KBO 기술위원장. 현역 감독이 아닌 최초의 국대 감독.[29] 전임감독제 체제 시작.[30] 야구가 2012 런던 올림픽부터 올림픽 정식종목에서 제외되었으나 2020 도쿄 올림픽에서 한시적으로 부활했다.[시범종목] A B [31] 당시 양준혁, 이종범을 비롯해 초화 라인업을 구성했지만 일본과 대만에게 패배하며 본선 진출을 하지 못했다.[32] 영문 명칭으로는 Amateur World Series. 88년 대회부터는 '''야구 월드컵'''(Baseball World Cup)이라고 불렀다. '''2011년 대회를 끝으로 폐지'''.[33] 아시아 유일한 우승이긴 하지만 최다 우승국이자 강력한 우승후보 쿠바가 불참했기에 이뤄진 점도 있다.[34]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한 국가가 아닌 한 대륙이 개최. 개최 국가는 네덜란드, 독일, 산마리노, 스웨덴, 스페인, 이탈리아, 체코, 크로아티아 8개국.[35] 인터컨티넨탈컵(Intercontinental Cup)이라고도 한다. '''2010년 대회를 끝으로 폐지'''.[36] 대한민국 야구 대표팀 첫 국제대회 우승.[37] 인생 최초이자 최후의 헤드퍼스트 슬라이딩 사건으로 당해년도 커리어 로우를 찍어버린 비운의 시즌.[38] 시즌 중에 이제는 대표팀에서 내려올 자리 라고 말했을 정도 엄청난 훈련을 했었다고 한다.[39] 금메달, 4강 진출[40] 당시에는 동메달[41] 데뷔 2년차였는데 어지간히 일본 야구계 내에서는 포텐이 터질 실력을 가진 선수였다.[42] 타자로는 박한이가 있었다. 2019년에 불명예 은퇴.[43] 이전 타자 켄 그리피 주니어에게 솔로홈런을 맞고 나서 다음 타자 상대였던 A로드를 상대로 탈삼진.[44] 검색을 하면 이진영의 이름으로 리다이렉트 된다.[45] 이때는 선발투수로 활약을 하였고 나머지 국가대표팀 시절은 릴리프(계투 - 마무리)를 맡았었다.[46] 국내 활동 당시 유격수 였으나 메이저리그 에서 부상을 당한 이 후 아예 3루수로 정착. 국내 활동은 언제 될 지 미지수.[47] 프로 데뷔는 이용규가 1년 빠르다. 이용규는 2004년 정근우는 2005년.[48] 준결승전+결승전에는 이승엽이 미쳐버리자 이대호의 활약이 묻혀진 감이 좀 있었지만 이대호의 파괴력이 없었으면 메달에 접근도 할 수 없었다.[49] 그래도 본인은 2010년 광저우 대회에서 합법적인 브로커의 역할을 했다.[50] 실제로 오뎅 장수가 아니였고 일본의 사회인야구 선수 출신이자 현, 히로시마 도요 카프 소속의 초노 히사요시였다. 이 선수가 궁금하면 직접 항목을 참조 하기를 바란다.[51] 이것은 한시즌 선발투수 최다패이며 아직도 2000년대에 기록자 중에서는 김영수와 단 둘 밖에 없는 기록인데 그 김영수는 팀이 8888577라는 안습의 타선에 윤석민 처럼 팀이 꼴찌였다.[52] 나중에 LA로 가서 팀메이트에게 인터뷰를 하는데 그 중 하나였던 안드레 이디어 에게 강정호의 별명이 있는데 들으면 깜짝 놀랄꺼야 라는 장난을 친적 있다. 물론, 강정호는 1년 뒤 메이저리그에 올라왔다.[53] 이 1실점은 현재 메이저에 있는 친구이자 프로 동기 친구 강정호[52] 를 상대로 동점 솔로 홈런을 맞은건데 인터뷰에서 실투 라고 본인이 말을 했다.[54] 2승만 했으면 최소경기 및 최연소 100승을 바라 볼 수 있었다. 최연소 100승은 팀 선배인 정민철 해설위원이 가지고 있다.[55] 2010년 안면마비 증세로 출전을 하지 않자 군면제 받았으니 차출 거부를 한다며 마비킴이라는 별명과 함께 까였으나, 2010년 한국시리즈 우승 다음날 실제로 구토와 안면마비 증세를 보이며 뇌경색을 앓았다는 것이 뜨며 억울하게 욕을 먹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리그 정상급 투수의 꾀병 루머는 2015년 양현종이 프리미어 12를 나가지 않을 때도 나왔다.[56] WBC는 최고기록이 은메달이다. 물론 역대 최고기록인 은메달을 딴 2009년 WBC에도 김광현은 있었다.[57] 야수로 범위를 넓혀도 김현수 말고는 존재하지 않는다.[58] 최다 이닝 2위인 류현진이 2019년 토론토와 장기 계약(4년)을 맺었는데, 만약 계약이 끝나자마자 한국으로 복귀해도 30대 후반이므로 국가대표 복귀는 어렵기 때문.[59] 별명중 하나인 대투수는 소속팀인 KIA 타이거즈 팬들이 붙히고 주장하는 별명이었으나, 갈수록 국대 에이스라고 불릴만한 퍼포먼스를 보여주며 여러 팬들에게도 쓰이고 있다. 물론 대투수라는 어감 자체가 엄청난 레전드한테 붙이는 별명인 감이 있어서 부정하는 헤비팬 및 타팀팬도 꽤 많다. 그러나 붉은청룡이라는 별명은 귀여운 어감과 양현종의 호감 이미지로 인해 타팀팬들도 즐겨쓰는 별명이 되었다.[60] 김광현이 부상으로 못 나왔던 2017 wbc, 2018 아시안게임과 김광현과 같이 나왔지만 2019 시즌 성적이 조금 더 좋았던 2019 프리미어 12는 사실상 1선발[61] 하지만 당시 양현종은 경기를 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시즌 막판 실제로 부상이 있었고, 그로 인해 출전하지 못한 것이다. 타팀 선수를 까내리는 네티즌들의 특성상 억울하게 까인 것. 2010년 김광현도 아시안게임에 안면마비 증세로 출전하지 않아 욕을 바가지로 먹었는데, 이후 뇌경색을 앓았다는 것이 뜨고 추가로 2011~2013년 팔꿈치 부상으로 부진하며 억울하게 욕을 먹었다는 것이 밝혀졌다.[62] 한때 김태균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포스트 이승엽 이기를 바랬다 라고[63] 이승엽이 09년 WBC 대표팀 은퇴를 시사하며, 김태균이 "승엽이형이 없어 많이 힘들지만, 그 자리를 후배들과 대신하여 잘해보겠다" 라고 한적이 있었다.[64] 허경민 입장에서는 첫 A매치가 2015 프리미어 12 였는데 당시, 야구팬들도 왜 이 선수가 뽑혔냐고 불만투성이였다.[65] 커리어 상으로는 타자인 김현수가 주장을 맡거나 투수조 맏형이자 대표팀 최고참인 임창용이 맡아야 하는데 오히려 류중일 감독이 편하게 이끄는게 좋다고 판단하여 지목을 했다.[66] 국가대표 최초로 어머니와 아들이 아시안 게임 금메달 리스트.[67] 김재호 같은 선수도 있으나 홈런과는 거리가 먼 선수이고 김재호의 플레이는 안정적인 플레이를 하는 반면 김하성은 전임자 처럼 홈런과 거리가 같았고 수비는 꽤나 스릴 있게 하는 플레이를 하는 스타일[68] 순수 신인이 받은 신인상은 2007년 투수 임태훈이후 2008년 최형우를 시작하여 2016년 신재영 까지 모두 중고신인들이 신인상을 받았었다.[69] 부문별로 3명 이상일 수는 있으나 4위 이하로는 서술하지 않는다.[70] 홈런을 비롯해 아래 기록들은 자료가 존재하지 않는 올림픽 지역 예선 결과는 제외.[71] 2006년 1개 대회에서만 때려낸 기록[72] 다승을 비롯한 아래 기록들은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와 2008 베이징 올림픽 대륙별 플레이오프 기록도 포함한다.[73]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1승,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대륙별 플레이오프 1승 1패[74]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대륙별 플레이오프[75]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대륙별 플레이오프[76]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1세이브,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대륙별 플레이오프 1세이브[77]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대륙별 플레이오프[78] 2007 아시아 야구 선수권 대회 5이닝, 2008년 베이징 올림픽 대륙별 플레이오프 5⅔이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