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치간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박치간
朴致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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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86년 4월 14일
황해도 안악군 은홍면 학산리
<color=#fff> '''사망'''
1966년 4월 4일
서울특별시
<color=#fff>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1. 개요
2.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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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박치간은 1886년 4월 14일 황해도 안악군 은홍면 학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선명학교(善明學校) 교장으로 재직하던 1919년 3월 1일 경성에서 정계로, 유용원(柳龍源)과 함께 탑골공원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과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했다. 이후 귀향하여 김광은#s-2], 박승도 등과 만나 온정리 장날인 3월 11일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매일 밤 학산리에 소재한 유용원의 집에 모여서 태극기를 만들고 독립선언문을 등사하며, 은홍·대행(大杏)·서하(西河) 면내의 각 교회에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도록 연락하였다. 3월 11일 오전 11시 온정리 교회내의 이정엽(李正燁)의 집에 수백명의 시위군중이 모이자, 박치간는 이들 앞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함으로써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시위군중과 함께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앞세워 시가행진을 하였다.
이때 일본 헌병이 출동하여 시위군중에게 무차별 발포를 가해 많은 사상자가 발행하였다. 그후 일제의 대대적인 검속 때 그도 체포되었으며, 1919년 9월 11일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 안악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8.15 광복 후 북한의 급속한 공산화를 피해 서울로 월남했고, 1966년 4월 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박치간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