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두어 폰 시라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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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히틀러 유겐트의 총책임자.
2. 생애
2.1. 대학생 시기
발두어 폰 시라흐는 나치의 주역 인물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 막내였다. 그가 히틀러와 가까워졌을 때 나이는 고작 스무 살이었다. 귀족 출신의 그는 대학생일 때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나치의 활동범위를 대학으로 넓히라고 충고했다. 지성인이나 지성적인 것이라면 무엇이든 싫어하는 히틀러는 그의 말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열광하는 대학생들이 늘어나자, 히틀러는 생각을 바꾸었고, 그 바람에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훗날 그가 히틀러의 전용사진사 하인리히 호프만의 딸과 결혼할 때, 히틀러는 독일산 셰퍼드를 결혼선물로 주기까지 했다.
2.2. 나치당 활동
1930년대 초 그는 기존의 모든 독일 청소년 조직을 하나로 통합하여 히틀러 유겐트를 의무화 시켰다. 스물 네 살의 젊은이가 청소년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희망했던 히틀러의 꿈을 현실적으로 설정화시킨 것이였다. 그는 나치의 미래가 젊은이들의 것이라는 감정을 강하게 심어주었으며. 그러한 미래를 위한 죽음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2.3.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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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그는 할 말이라곤 오직 한 마디밖에 없다며, "나는 히틀러를 믿었다. 이 남자가 젊은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리라고 믿었다." 고 했다. 그는 슈페어처럼 재판에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한 인물이었으며, 슈페어도 의사와의 면담에서 그가 가장 적극적으로 참회하고 있다고 진술한 바 있다. 그 점이 참작되어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고 슈판다우 교도소에 들어갔다.
슈판다우 교도소에서 20년간의 수형 생활을 마치고 석방되었을 때, 그는 더욱 볼품없고 허약한 남자로 변해 있었다. 게다가 눈의 한쪽은 실명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리고 부인은 그가 감옥에 있는 도중 1949년 7월에 이혼을 해 버렸다.[2] 1974년 8월 8일에 67세의 나이에 죽은 그의 묘비에는 “나는 너희 가운데 하나이다“라고 적혀있다.
3. 평가
힘러가 내세우는 것과는 달리 매우 약한 인물이었음과 비슷하게 시라흐도 개인적으로 주장하는 바와 정반대 타입의 인물이었다. 그는 돌격대원 같이 저돌적인 인간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체격이나 외모도 볼품 없었고, 취미 역시 감성적이어서 예술에 관심이 많았으며 그 능력으로 히틀러를 사모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그는 대단히 내성적인 성격의 사람이었고, 젊었을 때에 이미 죽음을 깊이 동경할 정도의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나 또한 그는 수십만 명의 청소년들을 유혹하여 죽음으로 내몰기도 한 사람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자신이 오히려 유혹에 빠졌다며 뉘우친 사람이었다.
4.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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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사진에선 꽤 마르게 나오지만 실제로 꽤 통통한 사람이였다.
발두어 폰 시라흐는 20년 동안 감옥에서 살고 도중에 이혼도 당했지만, 적어도 말년에 참회한 덕에 의외로 자손들은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이 꽤 있다. 자녀로는 안젤리카 베네딕타(1933~), 클라우스(1935~), 로베르트(1938~1980), 리하르트(1942~)가 있으며, 차남인 로베르트의 아들인 손자 페르디난트(1964~)는 변호사이자 작가이고, 삼남인 리하르트는 중국학을 전공한 학자이며, 리하르트의 딸 아리에데(1978~)는 철학자이자 작가, 저널리스트 및 비평가[3] 이다. 역시 리하르트의 아들인 베네딕트(1984~)는 독일, 스위스 이중국적자로서 '베네딕트 웰스'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소설가이다.
헨리 포드의 반유대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해당 문서 참조.
[1] 국립국어원의 외래어 표기 용례대로는 '폰시라흐'로 표기한다. 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뒤 요소와 붙여 적도록 하고 있다.[2] 전 부인은 1992년 사망.[3] Deutschlandradio Kultur의 문학 비평가이며, 발트나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자이퉁(FAZ) 등의 신문에 에세이나 칼럼을 싣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