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독일어: Nürnberger Prozess gegen die Hauptkriegsverbrecher(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Die Nürnberger Prozesse(뉘른베르크 계속 재판)
영어: Judgment of the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for the Trial of German Major War Criminals Nuremberg Trials참고
러시아어: Нюрнбергский процесс, Послдущие Нюрнбергские процессы
프랑스어: Le Procès de Nuremberg
1. 개요
2. 재판부 및 검사
2.1. 재판부
2.1.1. 수석 판사
2.1.2. 대리 판사
2.1.3. 검사
2.1.3.1. 수석 검사
3. 피고(24명의 전범들)
4. 재판의 쟁점 및 판결
5. 사형 선고
6. 사형 집행
7. 시신 처리
8. 금고형 집행
9. 슈판다우 교도소 철거
10. 기타
11. 매체
12. 관련 문서


1. 개요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은 제2차 세계 대전 직후인 1945년~1948년동안 진행된 독일뉘른베르크에서 나치 독일 전범들의 전쟁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거행된 재판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5년 미국, 영국, 소련얄타 회담, 포츠담 회담 등을 거치며 종전 후 나치 독일 전범의 처리 문제에 관하여 협의를 진행하였다. 최종적으로 전범들에 대한 국제군사재판을 실시하기로 합의한 이들 승전국은 1945년 8월 8일 런던헌장(London Charter)을 채택하여 국제군사재판소(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를 설치하여 유럽의 추축국(樞軸國) 핵심 범죄자의 소추 및 처벌을 위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런던헌장에 따라 이 재판소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행해진 나치 독일 소속 개인의 범죄행위에 대하여만 관할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시점인 1939년 9월 1일 이전의 개인의 행위에 대해서는 관할권을 보유하고 있지 않았다. 이들 3개국에 추후 프랑스가 포함되어 최종적으로 4개국 출신의 재판관 8명과 검사 4명으로 구성된 재판소가 독일 뉘른베르크의 법무부 건물(Justizpalast)에 개설되었다.
이 재판소는 전쟁 발발 및 전개에 책임이 있는 나치 독일의 핵심 정치·군사 지도자 24명에 대하여 1945년 10월부터 재판을 실시하였다. 당시 피고들은 침략 전쟁 등의 공모와 참가, 계획, 실행과 전쟁 범죄, 비인도적 범죄(유대인 학살) 등의 이유로 총 24명이 기소되었다.
반면 재판 대상이지만 피소되지 않은 전범들도 많은데, 아돌프 히틀러 총통과 요제프 괴벨스 선전장관, 하인리히 힘러 SS지도자,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 공군 원수, 한스 크렙스 육군참모총장, 빌헬름 부르크도르프 육군인사청장, 베른하르트 루스트 교육장관 등은 모두 체포되기 전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 또한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게슈타포 국장 또한 1942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암살되었기에 제외되었다.
1945년 11월에 시작되어 403회에 걸쳐 진행된 재판에서는, 전쟁의 공동모의, 평화에 대한 죄, 인도에 대한 죄 등의 항목으로 공군 총사령관이었던 헤르만 괴링 제국원수, 외무장관이었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등 12명에게 사형이 언도되었고, 이 가운데 헤르만 괴링마르틴 보어만을 제외한 나머지 10명의 사형은 10월 16일 집행되었다. 부총통 루돌프 헤스 등 3명에게 종신금고형이, 그 외의 알베르트 슈페어, 카를 되니츠 등 기타 전범자들에게는 20년 금고, 15년 금고, 10년 금고형이 언도되었다. 그리고 3명인 한스 프리체와 프란츠 폰 파펜, 얄마르 샤흐트는 무죄로 풀려났으며, 기소된 전범 중 사형선고된 마르틴 보어만은 궐석재판으로 기소됐으며, 로베르트 라이는 공판 전에 자살했고, 구스타프 크루프 폰 볼렌은 질병 사유로 출석이 연기되어 얼마 후 질병으로 사망했다.
두 차례 영화화 되었는데 1961년에 미국인 스탠리 크레이머(Stanley Earl Kramer) 감독이 만든 뉘른베르크의 재판과 2000년에 캐나다인인 이브 시모노(Yves Simoneau) 감독이 만든 《뉘른베르크》가 있다. 후자의 경우 알렉 볼드윈브라이언 콕스가 주연을 맡아 각각 로버트 잭슨 수석검사와 헤르만 괴링을 맡았다.

2. 재판부 및 검사


미국영국, 소련, 프랑스에서 각각 수석 판사 1명과 대리 1명(프랑스는 두명), 검사 1명씩으로 법정을 구성했기 때문에 4명의 검사가 있었다. 재판장은 영국의 제프리 로런스 남작이 선정되었다. 대부분의 판사 및 검사는 민간인 신분이나 소련의 경우에는 군인들이 선정되었다.

2.1. '''재판부'''



2.1.1. 수석 판사


  • 영국: 제프리 로런스 트레브딘 오크시 남작(Geoffrey Lawrence, 3. Baron Trevethin, 1. Baron Oaksey, 1880년 12월 2일 ~ 1971년 8월 28일, 재판장)
  • 미국: 프랜시스 비벌리 비들(Francis Beverley Biddle, 1886년 5월 9일 ~ 1968년 10월 4일)[1]
  • 소련: 육군 소장 이오나 티모페예비치 니키첸코(Иона Тимофеевич Никитченко, 1895년 6월 28일 ~ 1967년 4월 22일)[2][3]
  • 프랑스: 앙리 돈디외 드 바브르(Henri Donnedieu de Vabres, 1880년 6월 8일 ~ 1952년 2월 14일)

2.1.2. 대리 판사


  • 미국: 존 존스턴 파커(John Johnston Parker, 1885년 11월 20일 ~ 1958년 3월 17일)
  • 영국: 윌리엄 노먼 버킷 남작(William Norman Birkett, 1. Baron Birkett, 1883년 9월 6일 ~ 1962년 2월 10일)[4]
  • 소련: 육군 중령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볼치코프(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Волчков, 1902년 ~ 1978년)
  • 프랑스: 로베르 팔코(Robert Falco, 1882년 2월 26일 ~ 1960년 2월 14일)

2.1.3. '''검사'''


  • 미국: 로버트 호아웃 잭슨(Robert Houghwout Jackson, 1892년 2월 13일 ~ 1954년 10월 9일)[5]
  • 영국: 하틀리 윌리엄 쇼크로스 남작(Hartley William Shawcross, Baron Shawcross, 1902년 2월 4일 ~ 2003년 7월 10일)
  • 소련: 육군 중장 로만 안드리요비치 루덴코(Роман Андрійович Руденко, 1907년 7월 30일 ~ 1981년 2월 23일)
  • 프랑스: 오귀스트 샹프티에 드 리브(Auguste Champetier de Ribes, 1882년 7월 30일 ~ 1947년 3월 6일)[6]

2.1.3.1. 수석 검사


3. 피고(24명의 전범들)


  • 피고들은 나치당, 내각, 친위대, 보안국, 게슈타포, 돌격대, 장군참모부 및 최고사령부의 정치·군사 지도층들 중 가장 악질적인 전범들[7]을 기소했으며, 피고인들의 유죄가 선고된다면 피고가 소속된 조직 역시 범죄조직으로 규정이 될 예정 이었다. 또한 현역 군인의 경우에는 재판에서 소련의 반대로 군복의 계급장, 서훈 장착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직 군인 피고들 전원(알프레드 요들, 빌헬름 카이텔, 카를 되니츠, 헤르만 괴링) 군복의 계급장 및 서훈 등을 강제탈거를 했다.
'''죄명'''
  • Ⅰ: 반평화적 범죄(Crime against peace)를 위한 공모죄
  • Ⅱ: 침략전쟁을 계획하고 실행한 죄
  • Ⅲ: 전쟁법 위반
  • Ⅳ: 반인륜적 범죄
'''판결'''
  • I: 기소되었으나 무죄 판결
  • O: 이 죄목으로 기소당하지 않음
  • G: 유죄 판결
※영화 뉘른베르크(2000)에서 판결 장면 당시 선고를 받지 않은 전범은 굵은 글씨 및 분홍색 바탕으로 표기한다.
'''전범 이름'''
'''역할'''
'''Ⅰ'''
'''Ⅱ'''
'''Ⅲ'''
'''Ⅳ'''
'''판결'''
율리우스 슈트라이허[8]
나치당 고위 간부
대중잡지 돌격병(Der Stürmer)의 사장
I
O
O
G
사형
(교수형)
'''마르틴 보어만'''[9]
나치당 비서실장
I
O
G
G
한스 프랑크[10]
폴란드 총독
I
O
G
G
에른스트 칼텐브루너[11]
국가중앙보안본부 대장.[12]
무장친위대 및 경찰대장.[13]
I
O
G
G
프리츠 자우켈[14]
외국인 노동고용 전권 총감
I
I
G
G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15]
오스트리아 수상(총리)
네덜란드 총독[16]
I
G
G
G
'''빌헬름 프리크'''
전(前)내무부 장관[17]
체코 총독
뉘른베르크 인종 법 작성 참여.
I
G
G
G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외무부 장관
G
G
G
G
빌헬름 보데빈 요한 구스타프 카이텔
육군원수
국방군 최고사령부 총장 및 총사령관
G
G
G
G
알프레트 요제프 페르디난트 요들[18]
상급대장
국방군 작전부장
G
G
G
G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나치당 교육부장
나치당 외교정책부장
동유럽 점령지 관리 장관
G
G
G
G
헤르만 빌헬름 괴링[19]
공군원수
공군 총사령관
4개년 경제계획청장
항공부 장관
산림청장
G
G
G
G
카를 되니츠
해군총사령관 겸 제3제국 2대 대통령(1945.4.30부터)[20]
I
G
G
O
10년형
발터 풍크[21]
경제부 장관
국가은행 총재
I
G
G
G
종신형
'''에리히 레더'''[22]
전(前)해군총사령관.
G
G
G
O
루돌프 헤스[23]
부총통
G
G
I
I
'''구스타프 크루프 폰 볼렌'''
1941년까지 크루프사의 최고경영자
O
I
I
I
---[24]
'''로베르트 라이'''
나치당 조직부장
노동전선 지도자
I
I
I
I
재판 전 자살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전(前)외무부 장관.[25]
전(前)체코 총독.[26]
G
G
G
G
15년형, 54년 석방
프란츠 폰 파펜
전(前)수상(총리)
전(前)부수상(부총리)
오스트리아 대사
터키 대사
I
I
O
O
무죄
얄마르 샤흐트[27]
전(前)경제부 장관
전(前)국가은행 총재.[28]
I
I
O
O
한스 프리체[29]
선전부 라디오 방송부장
I
I
I
O
'''발두어 폰 시라흐'''[30]
전(前)히틀러 유겐트 단장
I
O
O
G
20년형
알베르트 슈페어[31]
군수 & 탄약부 장관
I
I
G
G
수석 판사 이오나 니키첸코를 제외한 소련 재판부 측은 독일로 인해 2000만명의 사망자를 냈기 때문에 얄마르 샤흐트를 제외한 기소된 모든 전범에게 유죄를 선고하려고 했지만, 영국, 미국, 프랑스 측의 반대에 부딪혀 뜻하던 바를 이루지 못했다. 루돌프 헤스도 사형시키길 바랬지만 결국엔 무기징역에 만족해야 되었다. 결국엔 소련 측에서 반대의견을 따로 펴내는 것으로 끝냈다. 한스 프리체 같은 경우엔 다른 전범들 조차도 "쟤 누구임?" 할 정도로 영향력이 미미했고, 얄마르 샤흐트 박사 같은 경우엔 히틀러 반대했다가 수용소까지 들어갔던 인물이다. 이쯤 되면 나치가 그냥 싫어서 다 감옥에 넣고 싶다는 것으로 보인다.(...)[32]
다만 이 재판에서 무죄 방면된 피고인들은 모두가 그대로 편안한 여생을 누리지는 못했다. 괴벨스의 선전성 심복이었던 한스 프리체의 경우 전범 혐의는 없어서 이 재판에서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나치 부역 혐의에 대해서는 독일(서독) 국내 법에 의한 처벌이 가능했기 때문에 이 재판 이후 서독 검찰에 의해 기소되어 징역 9년을 선고받았다. 프리체는 복역 중 암 발병으로 1950년에 병보석으로 가석방되어 1953년에 사망했다. 역시 이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프란츠 폰 파펜도 마찬가지로 나치 부역 혐의가 유죄로 인정되어 서독 법원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으나, 항소심에서 무죄로 풀려났고 1954년까지 서독 내 공직 활동과 저작물 출판을 금지당했다. 이후에도 끈질기게 정계 복귀를 노렸지만 우파인 기민당에서도 받아주지 않아 실패했고, 자신이 끝까지 히틀러 반대자였다고 주장하다가 1969년에 노환으로 사망했다. 샤흐트는 서독 하 재판에서 5년형을 선고 받고 1년만에 출소 한 것을 제외하면 그래도 편한 여생을 보낸 것 만은 확실하다. 서독 정부에서 건국 훈장을 받았다.

4. 재판의 쟁점 및 판결


첫째로 죄형법정주의가 문제되었다. 전쟁 범죄에 대한 처벌 법규가 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 범죄를 규정짓고 소급 적용하는 것이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의 판결은 1928년 켈로그 브리앙 조약으로 인하여 침략전쟁이 국제법에 위반한다는 점은 독일 지도자들도 이미 인식하고 있었으므로 이들에 대한 처벌은 소급처벌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둘째로 나치 경제·군사 지도자들은 독일 정부와 별도로 국제법상 개별적 형사책임을 부담하는지 여부의 쟁점이었다. 재판부는 이에 대하여 이미 ''국제법은 국가뿐 아니라 개인에 대하여 권리와 의무를 부과한다는 점이 오랫동안 확인된 바'', '''따라서 독일 정부와 별도로 나치의 정치·군사 지도자들도 국제법상 개별적 형사책임을 부담해야 한다'''고 보았다.
셋째로 사병 즉, 병들과 부사관들의 경우 상급자가 내린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는데 이들이 명령수행에 따라 지은 형사적 책임에 대한 정당화 사유가 쟁점이었다. 재판부는 이 쟁점에 대한 핵심은 해당 하급자가 실질적인 의미에서 범행 참여 여부에 관해 선택권을 가졌는지에 대한 여부로 보아 상급자가 내린 명령 수행은 하급자의 형사적 책임에 대한 정당화 사유를 제공하지 않는다고 판시하였다.
그리고 미국과 영국의 법체계인 영미법과 소련과 프랑스의 법체계인 대륙법의 법철학이 다르다는 점도 문제였다. 가령, 영미법에서는 범죄 의도만 있어도 처벌할 수 있는데 반해, 대륙법에서는 의도만 가지고는 처벌할 수 없기 때문에[33] 전범재판에서도 이런 법철학적인 마찰이 상당히 있었다.
여기에 마이너한 문제지만 엄청난 통역량도 문제였다. 피고는 독일인이고 재판부는 연합국 4개국에서 파견되었으므로 그 중 영국과 미국은 단어 등등의 차이가 있지만 같은 영어를 쓰기에 하나로 통합한다면 통역의 경우의 수는 6가지나 되었다.(영-독, 영-프, 영-소, 독-프,독-소, 프-소)
[image]
전범 재판을 풍자한 그림 - "Mein Name ist Hase(나는 아무것도 모른다)[34]"
[image]
앞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헤르만 괴링, 루돌프 헤스,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빌헬름 카이텔, 뒷줄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카를 되니츠, 에리히 레더, 발두어 폰 시라흐,[35] 프리츠 자우켈.[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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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사형 선고


재판 당시 영국·미국·프랑스에서 파견된 재판부 판사들은 유죄 선고를 받은 자들 중에서 사형을 선고 받은 경우 현직 정규 군인 계급을 가진 정규 군인[37]군대 군법회의[38]를 위한 표준을 적용해서 총살형으로 그렇지 않은 나머지는 교수형으로 사형을 집행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소련측 판사 중 수석 판사인 육군소장 이오나 니키첸코 장군[39]이 독일을 증오한 나머지 군인 사형수들의 총살형 집행에 대해서 "'''이런 쓰레기들에게는 교수형 만으로도 충분하다. 총살형은 무슨 얼어죽을 총살형이냐! 전원 교수형으로 고통스럽게 매달아 엮어놓아 찢어죽여도 시원찮을 놈들이다!'''"라며 그냥 화를 내는 수준을 넘어서 아예 길길이 날뛰며 반대했다고 한다. 전범들과 같은 현역 군인이었던 이오나 니키첸코가 군인의 총살형에 대해 거품을 물다시피 반대한 이유는 독소전쟁 당시 소련이 독일의 침략으로 사망자 수가 총 2000만명이 넘을 정도로 엄청난 희생을 치뤘기 때문이다. 소련 입장에서는 소련의 제안으로 독일로부터 불가침 조약까지 맺었음에도 불구하고 뒷통수를 크게 맞은 것도 모자라, 독일의 전쟁범죄로 인해 군인, 민간인 피해까지 합쳐 총 2천만이 넘는 사상자를 냈으니[40] 독소전쟁을 승인한 나치와 독일이라면 치가 떨리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불가침 조약도 어기고 전쟁범죄를 저지른 나치 인사들은 불명예 방식인 교수형으로 고통스럽게 집행해서 소련에 속죄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게다가 독소전쟁 이후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의 전력을 패퇴시킨 것은 거의 소련군이였으니, 연합군 측에서도 소련 수석 판사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전범들 중에서 군인 신분을 가진 자들도, 그렇지 않은 자들도 전부 이오나 니키첸코의 반대로 인해 예외없이 교수형을 선고받게 되었다.
행방불명 상태라 궐석 선고받은 마르틴 보어만을 제외한 11명의 사형수들은 1946년 10월 16일 새벽에 뉘른베르크 교도소의 체육관에 급조한 교수대 두 곳에서 비공개 교수형으로 처형하기로 결정되었다. 현역 군인 신분이었던 헤르만 괴링빌헬름 카이텔[41], 알프레드 요들의 경우 공개던 비공개던 시체를 걸레짝으로 만들어도 좋으니, 자신들의 사형은 총살형으로 집행해줄 것을 재판부에 요청했지만 재판부는 이 청을 기각했다고 한다.[42] 사형수들 중 헤르만 괴링은 자신의 사형이 총살형이 아닌 교수형으로 집행되는 것에 반발해서, 사형 집행 전날에 밀반입한 시안화칼륨 캡슐을 깨물고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 때문에 실제로 교수형으로 집행된 이들은 10명으로 줄었다.

6. 사형 집행


사형 집행은 미 육군 교수형[43] 담당관 이었던 미군 군사경찰 상사 존 클래런스 우즈(John Clarence Woods. 존 클라렌스 우즈)가 군사경찰 병사 조지프 몰타(Joseph Malta. 조셉 몰타)의 보조를 받으며 행했고, 증인들로 미군소련군, 영국군, 프랑스군 관계자들과 군종장교, 군의관, 취재 허락을 받은 인터내셔널 뉴스 서비스의 기자 하워드 킹즈베리 스미스(Howard Kingsbury Smith) 등이 입회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사형(교수형)은 1시 11분부터 2시 57분까지 약 1시간 40분 동안 집행되었고 원래 헤르만 괴링이 먼저 집행 될 예정이였으나 소련 이오나 니키첸코 판사가 길길이 날뛰면서 군인들 총살형 집행 반대로 교수형으로 선고되자 이에 반발해 청산가리를 물고 자살하는 바람에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를 시작으로 빌헬름 카이텔,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한스 프랑크, 빌헬름 프리크,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프리츠 자우켈, 알프레트 요들,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순으로 집행되었다.[44]
사형 집행 방식은 전원 교수형이였다. 하지만 소련 측에서는 강하게 단순 교수형 집행이 아닌 '''사형수들 전부 고의적인 질식사로 서서히 고통스럽고 오랫동안 매달아 죽이라고 요구했다.''' 결국 이 요구에 맞춰 줄길이를 조절하면서 롱 드롭 방식이 아닌 표준 방식으로 집행했고, 모든 사형수들이 10~24분 동안 전원 호흡 곤란으로 고통스럽게 질식사했다. 이는 소련 입장에서는 '''독소전쟁으로 인해 2000만명이 넘는 엄청난 수의 자국민이 고통스럽게 죽었는데, 그 전쟁의 원흉인 사형수들(나치 전범)을 롱 드롭 방식으로 한방에 편하게 죽이는 건 절대 용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독일에 대한 소련의 복수. 이는 사형수들의 사형 집행 시간을 보면 알 수 있다.
  •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 18분
  • 육군원수 빌헬름 카이텔 총사령관 - 24분[45]
  • 경찰청장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 13분
  •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 10분
  • 변호사.폴란드 총독 한스 프랑크 - 10분 5초
  • 체코 총독 빌헬름 프리크 - 12분
  • 출판업자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 14분
  • 노동 고용 총감 프리츠 자우켈 - 14분
  • 상급대장 알프레트 요들 국방군 작전부장 - 16분
  •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 기록 없음
서양에서는 사형수를 미결수 취급하므로, 이들 전원은 자신이 원하는 옷을 입고 사형을 받게 되었으며, 대부분은 양복을 구해다 입고 교수대에 올랐다고 한다. 빌헬름 카이텔과 알프레트 요들도 군인 신분이 유지되었던 관계로 교수형 집행이라도 육군 군복 착용을 허용 받아 일본의 극동국제군사재판일본군 군인 전범들과는 다르게 군복을 입은 채로 교수형이 집행 되었다. 다만 이들을 소련의 반대로 군인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계급장, 서훈 등은 전부 탈거되었다.
사형수들에게 마지막으로 유언을 할 기회를 줬는데, "없다(No)."고 대답한 알프레트 로젠베르크를 제외한 나머지가 유언을 남겼다. 한스 프랑크처럼 용서를 빌면서 반성한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자신의 잘못 자체에 대한 반성은 않고 단지 회한만을 남긴 이들[46]이 대다수라고 하며, 율리우스 슈트라이허처럼 죽는 순간까지 반성하지 않고 하일 히틀러를 외치고 유대인 학살을 합리화하던 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자우켈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은 억울하다는 유언을 남겼는데 자기 상관인 슈페어는 20년 형을 선고받은 것에 비해 자신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니, 유무죄는 몰라도 양형에 대해선 억울하다고 생각할 법도 하다.

7. 시신 처리


자살한 괴링을 비롯한 사형수들의 시신은 검시 후 연합군 검찰 관계자들에 의해 사진 촬영된 뒤 입관되었고, 군용 트럭에 실려 비밀리에 뮌헨의 한 화장터로 보내져 가명으로 일괄 화장되었다. 화장하고 남은 재는 묘지에 안장하지 않고 이자르 강의 콘벤츠 지류에 뿌려서 사후 준동을 할 지도 모르는 극우파들의 우상화를 막도록 했고, 유품만 모두 유족에게 반환되었다.

8. 금고형 집행


사형이 아닌 종신형을 선고받은 발터 풍크, 루돌프 헤스, 에리히 레더, 20년형을 선고받은 시라흐, 알베르트 슈페어, 15년형을 선고받은 노이라트, 10년형을 선고받은 카를 되니츠는 뉘른베르크 교도소에 구금되어 있다가 1947년 7월 18일에 서베를린 영국군 관할 지구에 있던 슈판다우 교도소로 이감되어 나머지 형을 살게 되었다. 이들 중 풍크와 레더, 노이라트는 건강 악화 등의 이유로 1954~57년 사이에 가석방되었고 몇년 후 모두 사망했으며, 시라흐와 슈페어, 되니츠는 만기 출소했다. 이후 유일한 수감자로 건강에 별 문제가 없어 감옥에 갇혀 있던 헤스는 90대까지 장수하다 1987년 8월 17일에 목을 매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헤스의 유족들은 헤스가 자살한 것이 아니라 타살당한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부검 결과도 자살로 나왔다. 헤스의 수감 생활은 많이 편했는데, 사실상 뉘른베르크 재판 기결수들만을 격리 수감하려고 남겨 둔 교도소라 다른 동료들이 출소하고는 거대한 감옥의 정원 및 시설을 혼자서 이용하면서 지낼 수 있었던 데다 면회를 온 사람도 꽤 많았으며, 교도소 측에서도 그가 고령에 종신형을 선고받은 인물이고 반인륜 범죄자가 아님을 감안해 사복 착용을 허용하고 담을 대놓고 넘어가려고 하지 않는 한 별다른 통제를 하지 않고 편의를 봐줬기 때문이다. 애초에 헤스 본인도 밖에 나가면 할 것도 없고 나치에 원한 가진 사람들이 수두룩한데 교도소 내에서 이거저거 받아먹으며 사는 게 더 편하기도 했고.[47]

9. 슈판다우 교도소 철거


루돌프 헤스가 자살한 뒤 슈판다우 교도소도 사형수들의 시신과 마찬가지로 네오 나치의 우상화를 막기 위해 철거 되었고, 잔해는 깔끔히 부수어져 북해에 뿌려지거나 영국군 관할 비행장이었던 가토 비행장에서 폐기 처분되었다. 헤스의 시신은 가족에게 인도되어 장례를 치르고 가족묘지에 묻혔으나 그가 그렇게 싫어하던 네오나치들이 자꾸 단체로 성지순례를 와서 결국 2011년에 화장되어야 했다.

10. 기타


처칠의 경우 1945년까지 재판은 있을 수 없고, 악질범은 과거의 처리 방식대로 군대에서 총살하자고 의견을 제시. 소련 측의 한 인사는 고위직 정치인과 범죄 행위가 확실한 자들만을 추려 약 5만명 정도 주요 범죄자들을 아무도 모르게 새벽에 총살하자고 의견 개진. 그러나 미국은 뉘른베르크 재판을 끝까지 관철하였다.[48] 이후 국제법을 공부한다면 한번쯤은 볼 만한 판례. 이와 같은 기본적 입장은 도쿄 재판에서도 관철되었다. 단, 일본군 포로 수용소에서 통역으로 일했던 조선인들이 독일의 부총통 헤스에게 내려진 것과 같은 무기 징역을 선고받았다.[49]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소련군에 투항했고 전범혐의를 받을 일을 하지 않은 덕에 이 재판에서 '''전범이 아니라 증인'''의 자격으로 증언을 했다. 소련에 포로로 잡힌 독일군 중에서 전범혐의자는 뉘른베르크 재판과는 별도로 소련에서 전범 재판을 받았으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는 전범 혐의로 볼만한 행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여기에 기소되지 않았다. 일단 파울루스는 1942년 봄에 6군 사령관을 맡기 전까지는 지휘계통과는 거리가 먼 참모장교로만 일했기 때문에, 휘하부대의 학살혐의에 대한 감독 책임은 없었고, 그가 비로소 야전직을 맡은 스탈린그라드에서는 민간인이 거의 빠져나간 도시에서 격전을 치뤘기 때문에 학살같은 일을 벌일 여지도 없었다. 오히려 파울루스는 학살 등의 전쟁범죄를 지시하는 라이헤나우 강조 명령을 폐기하고 전쟁범죄를 금지시키는등 '''국방군에서 보기 드문 올바른 자세'''를 보여주었다. 물론 이런 명령을 무시하고 범죄를 저지르는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여기까지 파울루스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전범 혐의는 받지 않았다. 파울루스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옛 동료였던 요들이나 카이텔 등에 대한 불리한 증언을 거부하여 바로 석방되지 못하고 몇년간 더 억류생활을 했다.
히틀러의 경우 본래 살아 있었을 가능성을 근거로 기소 대상자 명단에 있었으나 얼마 후 소련 측에서 사망을 공식 발표하면서 제외되었다. 살아서 재판을 받았어도 사형수가 12명에서 13명으로 늘어나는 정도였겠지만.
지금도 뉘른베르크 재판에 대해서 뒷이야기의 말이 많아서 1949년, 감옥에 수감된 나치는 300여 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일부 유대인들은 복수를 위해 비밀결사대 '''나캄'''[50]을 만들기도 했다.#
나치가 행한 인체실험에 대한 충격적 진실이 밝혀지고, 과학과 의학의 이름을 참칭해 벌어진 참혹한 학살에 대한 과학계 전반의 반성으로 의료실험 연구윤리에 대해 규정한 뉘른베르크 강령이 발표되었다. 이후 국제적으로 과학자 연구윤리의 대한 스탠다드가 되었다.
또한 자국민에게 저지른 범죄에 대해서도 그것이 반인륜 범죄에 해당한다면 국제 사회에서 그 죄를 벌할 수 있다는 판례가 만들어진 것도 이 때의 일이다. T-4 프로그램에 가담한 전쟁 범죄자들이 살해한 자들의 대다수는 독일 자국민이었지만, 연합국은 그 역시 전쟁 범죄의 일환이라 판단하여 똑같이 죄를 물었다.

11. 매체


훗날 이 재판 과정은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제목은 <뉘른베르크에서의 재판> 영화에선 괴링의 비중이 매우 높은 편이다. 사실상 주인공이라 봐도 될정도. 독빠 기질을 가진 자신의 전담 장교[51]인 미 육군 중위[52]를 꼬드겨 청산가리를 밀반입해 자살하는 것으로 나온다. 피고인들 중 괴링 다음으로는 알베르트 슈페어가 가장 비중이 높다. 그 외에는 대부분 단역이지만 그래도 주요 전범들은 대부분 등장한다.
베를린 전투 말미의 국회의사당 국기 게양 사진을 찍은 소련 해군 정훈장교 예브게니 할데이(Евгений Aнаньевич Халдей, Yevgeny Khaldei) 중위는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도 소련 측 전속 사진기자로 투입됐다. 유대인 출신인 그를 소련 정부가 배려 겸 상징성 부각 차원에서 배치한 것으로 보인다.

12. 관련 문서


  • 극동국제군사재판
  • 뉘른베르크 의사 재판
  • 에르하르트 밀히
  • 뉘른베르크 최고사령부 재판
  • 전범
  • 전범기업
  • 나치의 남미 도주
  • 전쟁범죄: 광기의 끝[53]

[1] 1941년에서 1945년 간 58대 미 법무장관에 재직하였다.[2] 소련의 대법원에 근무한 대법원 판사로 계급은 영미권 계급의 준장에 상응한다. 한국을 비롯한 영미권은 대장-중장-소장-준장, 북한을 비롯한 소련은 대장-상장-중장-소장, 중국 인민해방군은 일급상장(대장)-상장-중장-소장-, 2차 대전까지의 독일 국방군의 계급은 상급대장-대장-중장-소장, 현재 독일 연방군은 영미권 계급 체계를 사용한다.[3] 이오나 니키첸코는 아래에도 후술하겠지만 독소전쟁 당시 독일이 소련과 맺은 불가침 조약을 어기면서 뒷통수를 얻어 맞은 것 으로도 모자라, 그 전쟁에서 2000만명이나 넘는 소련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사망했기에 나치 독일이라면 치를 떨었다고 한다. 때문에 전범재판에서 현역 군인들을 총살형으로 사형시키는 것을 길길이 날뛰며 반대를 했고, 결국 군인이든 군인이 아니든 유죄를 선고받은 전원이 교수형으로 사형당하게 만든 것을 비롯해서 비단 나치 군인들뿐만이 아니라 이 재판의 다른 피고인들 에게도 전혀 자비가 없었다고 한다.[4] 1958년부터 사후까지 상임항소법관으로 재직하였다.[5] 실존인물은 1940년에서 1941년 간 57대 미 법무장관, 1941년에서 1954년 간 연방 대법관에 재직하였다. 이후에 2000년작 영화 〈뉘른베르크〉에서 배우 알렉 볼드윈이 잭슨 검사 역으로 출연했다. 해당 배우는 〈진주만〉에서 제임스 둘리틀 중령 역, 〈붉은 10월〉에서 잭 라이언 역으로도 등장한다.[6] 프랑스 상원의원이었으며, 비시 프랑스 정부 수립에 반대한 80명의 국회의원 중 한 명이다.[7] 전·현직 장관(리벤트로프 현 외무부 장관 & 알베르트 슈페어 군수·탄약부 장관 & 발터 풍크 경제부 장관 &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동유럽 점령지 관리장관 &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전 외무부 장관) & 총독 & 경찰대장 & 총재 유겐트 단장 등 17명+현역 정규 군인 5명(육군 2명(육군원수 빌헬름 카이텔 & 상급대장 알프레트 요들)/해군 2명(에리히 레더 & 카를 되니츠 원수)/공군 1명(헤르만 괴링 공군원수)+출판업자 1명(율리우스 슈트라이허)+선전 라디오 방송부장 1명(한스 프리체)[8] 유태인을 병적으로 증오해서 오죽하면 변호사들도 이 사람 정신병 있는 거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다니 말 다했다. 물론 정신병이 있는지가 증명되지 않았으므로 결국 유죄판결. 원래 이 정도면 사형까지 가기는 무리였지만 연합국 측은 그가 나치 이념의 구성 및 선동의 핵심 역할을 했음을 고려하여 사형을 판결했다. 일종의 시범 케이스라는 평가도 있다.[9] 실종되어 궐석재판으로 진행되었으며-이 때문에 오치아이 노부히코고바야시 모토후미는 그가 살아서 네오 나치를 이끌고 있다는 소설/만화를 쓴 적이 있다. 나치 독일 시절 정보부대에 근무하고, 서독 성립 후 서독정보기관 수장이 된 갤런은 보어만이 사실 소련의 첩자로서, 소련에서 은신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 1972년 그의 유골이 발견되어 최종적으로 사망으로 판정. 몰락(역사서와 영화 모두)에서는 1945년 5월 2일 자살한 것으로 나온다. 그러나 최근에 유골에 묻어있던 흙이 독일의 것이 아니라 다른 나라의 것으로 감정되어, 남미나 소련 은신설도 다시 부활하게 되었다.[10] 알베르트 슈페어와 더불어서 진솔하게 사죄한 나치 고위관리자 중 한 명이다. 알렉 볼드윈이 주연으로 나온 2000년 영화 뉘른베르크에서는 프랑크의 진솔함에 감명받은 프랑스 재판관이 살려주는게 어떻겠냐고(무기징역형) 제안하지만 소련 니키첸코 판사(렌 돈체프 역)가 반대한다. 프랑크의 아들은 아버지는 극렬 나치빠였고, 뉘우치는 건 진심이 아니었을거라는 식의 발언을 해서 논란이 있었다.[11] 어느 문서에 서명했냐 물어보면 죽어도 안 했다고 일관해서 변호인단은 그를 "Der Mann ohne Unterschrift" (the man without a signature, 즉 서명 없는 자)라고 불렀다고 한다.[12] 전임자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13] 홀로코스트를 주도한 인물 중 한 명이다.[14] 알베르트 슈페어의 죄까지 뒤집어 썼다는 논란도 있다. 그는 사형대에 올라 하얗게 질린 표정으로 교수대를 바라보며 "난 죄 없이 죽는거요."라고 애처롭게 중얼거렸다.[15] 사람같이 생겼지만 '''절대 사람이 아니다.''' 반인륜적 범죄에 가장 적극적으로 가담한 거물 전범 중 하나이다. 레온 골든손(Leon Goldensohn)의 뉘른베르크 인터뷰에서도 괴링이 반인륜적 범죄에 가장 앞장섰던 전범 중 하나로 자이스잉크바르트를 언급한 기록이 있다.[16] '''네덜란드의 도살자'''라는 무시무시한 악명을 가지고 있었다.[17] 그 후임이 하인리히 힘러.[18] 프랑스 측 판사는 요들의 사형 판결에 대해 비판적이었다고 한다.사형은 무리고 종신형이면 족했다고 한다. 결국 다른 판사들이 코미사르 명령과 바르사로바 작전 당시 소련군 포로 학살에 대한 건으로 인해 소련 측의 강력한 주장으로 사형을 찬성하는 바람에 묵살되었고 동의 할 수 없었던 사형 판결문을 본인이 읽어야 했지만... 이후 독일 법정에서 무죄 판결을 내렸으나 연합국 측은 이 판결을 인정하지 않음. 현재도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실제로는 프랑스 판사가 판결문을 읽었으나 영화 뉘른베르크 2000에서는 소련 니키첸코 판사(렌 돈체프 역)가 요들에 대한 판결문을 읽었다. 즉 고증오류.[19] 소련 수석 판사 이오나 니키첸코의 반대로 총살형이 아닌 교수형으로 결정되자 이에 반발해서 사형집행 전날 청산가리로 음독자살[20] 히틀러의 지시로 2대 대통령이 되며, 총통직이 히틀러 집권 전처럼 대통령과 수상(총리)직으로 분리됨.[21] 57년 석방[22] 55년 석방[23] 처음에 4가지 죄목 모두 기소 당했으나 1941년에 영국으로 날아갔던 시점엔 반인륜 전쟁범죄에 대한 범죄사실을 증명하기 어려웠다. 결국 재판부는 전쟁 범죄와 반인륜적 범죄에서는 무죄 판결을 내린다.[24] 병으로 재판에 불참. 얼마후 사망. 검사팀은 1943년 이후 최고경영자인 아들을 대신 재판에 앉히려 했지만 당사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재판부가 거부하였다. 대신 이후 진행된 뉘른베르크 계속재판 중 하나인 크루프 재판에 넘겨져 12년형을 선고받았다.[25] 그 후임이 리벤트로프.[26] 그 후임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서 프리크임.[27] 샤흐트는 다른 피고인들과 달리 재판 증언석에서도 독일어 대신 영어로 응수했고 언제나 오만하고 당당한 태도로 일관했었다고 전해진다. 그러자 슈트라이허가 비꼬길 "전쟁에 반대한 유대인의 개이니 이제 훈장만 받으면 완벽하겠군!" 이라며 조롱했다. 그리고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역시 "전쟁에 반대했으니 연합군 놈들이 황금 다이아몬드 곡엽 검 기사 철십자 훈장을 주겠구먼."이라고 역시 조롱했다. 그러자 헤르만 괴링이 박장대소를 했다고. 그리고 이 말은 사실이 되었다. 훗날 서독 정부에서 건국훈장을 받게 된다.[28] 그 후임이 풍크.[29] 종적 직전 자살한 파울 요제프 괴벨스 대신 기소. 그런데 괴벨스의 위상이 너무 높았는지 정작 같이 기소당한 이들 중 어느 누구도 프리체가 누군지 몰랐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단지 괴벨스와 목소리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라디오 해설자로 발탁된 사람이다. 간단히 말하면 목소리 대역이 전범재판에까지 대신 끌려온 셈. 이 사람은 단지 괴벨스와 같은 목소리를 가졌다는 이유로 끌려온 것이며 대본에 써 있는 대로 읽었을 뿐인 일을 했기 때문에 기소는 되었으나 처벌은 받지 않았다.[30] 알베르트 슈페어, 한스 프랑크와 더불어 자신의 죄를 진솔하게 뉘우친 자 중 한 명이다.[31] 같은 임무를 맡았던 부하 프리츠 자우켈은 사형인데 이쪽은 20년형이라서 사법거래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다만 사형이 마땅할 정도의 반인륜 범죄에 적극 가담한 증거는 없다. 어쨌든 여러모로 논란이 많은 판결 중 하나.[32] 샤흐트의 경우 애초에 무죄가 될 게 뻔했기 때문에 일부러 전범재판을 걸어 '''재판이 승자의 철저한 보복 파티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삼았다는 견해가 있으며, 샤흐트 본인도 그렇게 주장했다. 그래서 재판관 두 명(소련 이오나 니키첸코, 미국 프랜시스 비들)이 샤흐트에게 유죄를 주장하자 나머지 6명의 재판관들이 "아니, 전쟁을 반대한 사람까지 유죄라면 도대체 무죄는 누구냐?" 라며 유죄를 주장한 두 판사에게 반박했다. 심지어 소련 측 대리 판사였던 알렉산드르 볼치코프 판사는 이오나 니키첸코 판사에게 "이보시오, 동지. 저 사람이 왜 유죄입니까?" 라고 반문할 정도였다. 미국 프란시스 비들 판사 역시 노먼 버켓 판사에게 "이 사람아. 약 빨았어?" 라며 빈축을 샀다고.[33] 예를 들어 영미에서는 함정수사로 잡은 범인도 처벌할 수 있으나 대륙계 국가에선 함정수사는 금지되어 있고, 시도한 경찰 등이 범죄자로 기소될 수도 있다. 미국에서는 가끔씩 여경이 창녀로 분장하고 호객행위를 해서 걸려든 자들을 성매매범으로 체포하는데 대륙법체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며 되려 그 여경이 성매매 미수로 기소될 수도 있다.[34] 직역하면 "내 이름은 토끼이다"[35] 그 유명한 히틀러 유겐트의 총책임자. 재판에서 "'''나는 히틀러를 믿었다. 이 남자가 젊은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리라고 믿었다."'''라고 했다고 한다.[36] 제3제국의 외국인 노동력 징발 총책임자. 자신이 노동력 동원을 주도한 점은 인정했지만, 외국인 노동자들이 당한 가혹 행위나 부당한 처우, 살해 등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37] 국방군 최고사령부 총장 및 총사령관 육군원수 빌헬름 카이텔, 작전부장 육군상급대장 알프레드 요들, 공군총사령관 공군원수 헤르만 괴링[38] 군사재판의 옛말이다.[39] 대리 판사인 알렉산드르 볼치코프 육군중령 판사는 정작 아무런 소리도 없었고 니키첸코와는 다르게 연합국(미국.영국.프랑스) 판사들과 같은 입장이였다.[40] 이에 소련군들도 그 분풀이로 독일군 포로들에게 엄청난 가혹행위를 한 뒤 바로 죽여버리는 걸로 보복을 가했다. 급기야 소련군이 베를린을 점령 한 뒤에는 본토의 독일인을 상대로 수많은 약탈과 강간을 저지르는 것으로 복수심을 표출했다. 소련 입장에서는 독일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몰살시키고 찢어 버려도 분이 풀리지 않았을 상황. 심지어 독소전쟁으로 인해 소련의 남성이 너무 많이 죽어서 러시아는 '''현재도''' 남녀 성비 불균형 국가다.[41] 카이텔의 요구대로 연합군 측도 카이텔의 총살형 집행에는 동의했다고 한다. 이유는 연합군 측이 카이텔의 '''범법 행위를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이마저도 이오나 니키첸코가 단 한사람이라도 총살시킬 수 없다며 완강하게 반대했다고 한다.[42] 이유는 위에서도 서술했다시피 소련의 이오나 니키첸코 판사가 총살형을 완강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재판부에서도 이를 언급하며 '''"적어도 독일로 인해 2000만명이 넘는 인명이 사망한 소련의 반대가 있었음으로, 전범의 처리가 한 명이나 둘 뿐인 독일군 장교의 처형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 이상은 사형 방법을 본인의 의사에 따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라는 이유를 들어서 기각했다고 한다. 요약하자면 나치 전범들은 교수형으로 치욕스럽게 사형당하면서 그들의 만행으로 인해 엄청난 인명손실을 당한 소련에게 속죄하라고 한 거다.[43] 당시에는 미군의 군인 사형수도 교수형을 집행했던 것 으로 보인다. 원래 군인은 총살형이 원칙이나 당시 미군의 군인 사형수는 교수형과 총살형을 선택이 가능했던 것 으로 보이는데 현역 군인인 군 소속 교수형 담당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군인 사형수도 상황에 따라서 교수형 선택이 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보통 병사나 부사관들을 처형할 때는 교수형으로 처형하며 장교를 처형 할 때는 총살형으로 처형한다.[44] 영화 뉘른베르크에서는 순서가 리벤트로프-카이텔- 칼텐브루너-로젠베르크-자우켈-프랑크-요들-슈트라이허 순으로 집행되었다.[45] 교수형 집행 중 최장 시간을 기록했다. 낙하시에 교수대 발판이 작게 만들어지면서 머리를 바닥에 부딧치면서 온 얼굴에 피를 쏟으면서 고통스럽게 질식사했다.[46] 리벤트로프는 "독일이 자신의 운명을 자각하는 것과 세계가 평화로워 지는 것을 바란다."는 말을 남겼으며, 카이텔은 자신은 독일인에게 하느님의 축복을 빌며, 독일을 위해 먼저 죽은 부하들을 따라 간다고만 하였다고 한다.[47] 그리고 이 인간이 그렇게 오래 살 줄을 교도소 측이 예상 못 하고 어차피 곧 죽을 늙은이니 예우 좀 해 주자던 게 너무 건강한 나머지 중간에 끊을 수도 없어 길어진 탓도 있다.[48] 에른스트 벤다가 저술한 '새로운 국제법의 기초를 세운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이 원출처, 김명섭 연세대 정외과 교수가 저술한 '대서양 문명사'가 674p에서 재인용.[49] 김명섭 연세대 정외과 교수 저, '대서양 문명사', 675p[50] 담 예후디 나캄(Dam Yehudi Nakam): 유대인의 피에 대한 복수라는 뜻이다.[51] 전범 1명당 연합군측 위관급 장교 한 명이 붙어 고충 처리 등을 맡았다.[52] 이들 전담 장교들과 전범들과의 관계는 각양각색이었는데, 전담 전범을 무시하고 험하게 대한 경우도 있고, 괴링의 전담 장교처럼 그의 화술에 넘어가 정중히 예우하고 편의를 봐 준 경우도 있다.[53] 워크래프트를 원작으로 한 소설로 호드의 수장으로 있는 동안 각종 잔혹한 전쟁범죄와 전횡을 일삼은 가로쉬를 얼라이언스와 호드의 합의하에 전범재판에 회부하여 심문하는 내용인데 저자가 실제로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을 모티브로 했다고 밝힌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