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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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정치인, 독재자. 나치당의 지도자이자 나치 독일의 총통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으며, 유대인을 중심으로 수많은 민간인과 전쟁 포로를 학살하는 홀로코스트를 저질렀다.
2. 상세
1933년 독일 총리가 되었으며, 1934년 독일 대통령과 독일 총통이 되었다. 1933년부터 1945년까지 독재하면서 1939년 폴란드 침공을 시작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고 이를 총지휘했다. 또한 홀로코스트, 즉 유대인 600만명의 대학살의 주모자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브라우나우 암인[2] 이라는 도시의 평범한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났다.[3] 화가를 꿈꾸며 상업 미술가 활동을 이어나가던 히틀러는,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독일 제국군(바이에른 왕국군)에 자원입대하였다. 독일 제국의 패전 이후 히틀러는 나치당의 전신인 독일노동자당에 들어가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그는 괴벨스와 함께 청중을 압도하는 연설과 천부적인 선전능력을 발휘하여 동네 소수정당에 불과했던 나치당을 제1당으로 일으켜 세웠다. 정권을 장악한 후 총리직과 새로 얻은 대통령직을 합쳐 제3제국의 퓌러(Führer: 총통, 영도자)의 자리에 올랐다.
나치 독일의 총통이 된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을 파기하고, 군수산업과 중공업을 확충하며 독일을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의 반열에 오르게 했고, 군국주의적 정책을 강행했다. 이러한 정책은 경제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해있고 패배주의에 찌들었던 독일 국민 대부분의 열광을 받기에 충분했고 심지어 '히틀러=독일의 메시아'라는 나치 당국의 선전을 그대로 믿는 국민들도 나올 정도였다. 전쟁을 기피하는 연합국의 소극적인 반응에 힘입어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고,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 지역을 무혈로 독일에 병합하는 등 외교적으로도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끝냈으면 좋았을 것을 안일한 생각으로 폴란드를 침공했다가 생각 외로 강경한 태도를 보인 연합국의 선전포고를 받아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폴란드 침공 직후 전쟁 초기 나치 독일은 영국, 프랑스의 소극적 참전 의사에 따른 이른바 가짜 전쟁(Phoney war)의 전개를 역이용하여 마지노 선을 우회하는 대대적인 프랑스 침공으로 군사적 우위를 점했다. 그리하여 단숨에 섬나라 영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유럽 대륙을 정복하는 데 성공하나, 대전 중반부를 넘어서고부터는 독소전쟁의 전략적 실책에 짐덩이가 되어 버린 추축을 떠안은데다 일본의 도발로 전선이 확대되는 등 악재가 겹쳐 매우 열세해진다.[4]
그와 동시에 점령지에서도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비롯한 점령지 주민 학살을 주도하고 각종 전쟁범죄를 방치, 조장함으로써 그는 민심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레지스탕스와 빨치산들이 돌아다니며 테러, 사보타주를 기도하는 것은 물론이고, 파시즘의 압제와 인권 탄압에 질려 내부적으로도 반나치 인사들이 암암리에 생겨났다. 유능한 과학기술자들은 연이어 연합국으로 망명하거나 투항했으며,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 백작을 비롯한 군부 측근들까지 히틀러에 대한 암살과 쿠데타를 시도했다. 결국 전쟁 말기 그는 그 누구도 믿지 못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레닌그라드 공방전의 실패와 노르망디 상륙 이후 반 년에 걸친 연합국의 공세에 독일은 판도를 완전히 잃고 몰락해 버렸다. 서부에 전력을 몰아 회심의 반격을 노린다는 계획도 실패하고 동부에서는 소련군이 빠르게 들어오고 있었다. 계속된 독일 본토 항공전으로 연합군 전략폭격기들이 히틀러가 애써 만들어놓은 산업단지들과 도시들을 전부 초토화시켜 버렸고 독일의 전쟁수행능력도 점점 악화되었다. 군대가 와해되기 시작하자 히틀러는 진격도 후퇴도 없이 그저 "결사항전을 하라."고 떼를 썼다. 지휘에서 전략과 전술이 실종되었고, 물자의 보급도 끊겼다. 이미 전선에는 소년병과 노병이 징집되어 최전방에 끌려가 싸운 지 오래되었다. 그럼에도 히틀러는 죽기 1주일 전까지 편성도 제대로 안 된 부대를 데리고 나가서 싸우라고 명령했다.[5] 이윽고 1945년 4월 30일, 소련군이 베를린을 포위하자 총통 벙커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세계를 공포로 몰아 넣은 독재자의 최후는 허망했다.
패색이 짙어지기 전에는 독일인들에게 거의 신으로 숭배받는 수준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종전 후에는 유럽에서나 전세계적으로도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말하는 것조차 금기시되었다. 나치즘에 입각하여 전쟁 중 점령지의 민간인 학살을 명령하는 등 숱한 전쟁 범죄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또한 홀로코스트 같은 인종 학살을 주도했고 T-4 프로그램 같은 장애인 말살 정책을 펴기도 했다.
남미의 칠레, 아르헨티나는 친독 국가였다. 다만 이들은 부득이한 이유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나치의 남미 도주 문서 참고. 중동, 아프리카나 인도 등지에서는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에 대해 긍정적이거나 최소한 중립적이다. 일부는 대놓고 아돌프 히틀러를 옹호하기도 한다. 이들은 영국, 프랑스 같은 서구 열강에게 시달린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핀란드, 발트 3국, 아이슬란드, 스웨덴 등은 나치 독일의 후원자였다. 핀란드, 발트 3국은 소련에게 많이 시달려 부득이하게 나치와 손을 잡았었고, 아이슬란드는 덴마크 군주인 크리스티안 10세 때문에 화가 났던 아돌프 히틀러가 독립시켜줬기 때문이다. 단 발트 3국을 제외하면 이들 나라들은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더라도 아돌프 히틀러를 옹호하거나 긍정적으로 여기진 않는다.
2010년대 후반 들어 유럽의 이슬람 난민들이 유럽에서 범죄 등 많은 사회문제를 일으키자 히틀러를 본따서 인종청소를 다시 부활시키려는 극우파들이 유럽에서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즉, 유럽에서 극우가 되살아나는 증거인데, 그래도 하도 이미지가 시궁창인지라 자신들은 나치가 아니라고 하며 연성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더 많다. 마린 르펜 등이 그렇다.
3. 이름에 대하여
히틀러의 아버지인 알로이스 히틀러(Alois Hitler)의 원래 성은 시클그루버(Schicklgruber)였으나 알로이스의 어머니이자 아돌프의 할머니인 마리아 아나 시클그루버(Maria Anna Schicklgruber)가 요한 게오르크 히들러(Johann Georg Hiedler)와 재혼하면서 알로이스의 성이 히들러로 바뀌었고, 1876년에 히들러에서 히틀러로 성을 다시 바꾸었다.아돌프 히틀러가 누렸던 수많은 행운 중에서 맨 처음 행운은 히틀러가 태어나기 13년 전에 닥쳤다. 1876년 훗날 히틀러의 아버지가 되는 사내가 이름을 알로이스 시클그루버에서 알로이스 히틀러로 바꾼 것이다. 아버지한테 가장 고마운 점이[6]
시클그루버라는 상스럽고 촌스러운 성을 내다버린 것이었다는 아돌프의 술회는 빈말이 아닐 것이다. 확실히 '하일 시클그루버'는 민족 영웅을 경배하는 인사말로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으리라.
이언 커쇼 히틀러 1권 (p. 39)
이 일은 모두 아돌프 히틀러가 태어나기 이전의 일이기 때문에 아돌프의 성이 시클그루버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아돌프의 정적들과 소련군과 연합군들이 아돌프를 놀릴 때 "아돌프 시클그루버"라고 불렀다. 일부 소련군은 "우리는~ 베를린에 처박혀 있는 광분한 시클그루버 아저씨를 곧 만나러 간다네~"라는 요상한 노래도 부르며 조롱했고 연합군들은 "니네 총통이란 사람 오스트리아 페인트공 출신으로 원래 성씨는 '시클그루버'랜다."라며 조롱했다. 당연히 게슈타포나 친위대에게 손에 닿으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거나, 불구가 될 정도로 구타를 당하거나, 수용소에 끌려갔다. 아돌프 본인도 자신의 인생의 불명예로 생각할 정도였다.
히틀러라는 성은 히들러(Hiedler), 휘틀러(Hüttler)라는 성의 바리에이션으로 여겨지고 있는데, 그 유래는 오스트로바이에른어로 천정천을 의미하는 Hiedl이나 독일어로 헛간을 의미하는 Hütte에서 왔을 것이라 보는 의견이 있지만 그 유래는 확실하지 않다. Hitler라는 성은 알로이스 시클그루버가 자신의 성을 바꾸면서 만든 성씨라 독일에서는 거의 히틀러의 가족들이나 쓰던 성이고, 바리에이션인 Hiedler, Hüttler도 독일어권에서는 그리 많이 쓰이는 성은 아니었다. 저 성으로 검색하면 뜨는 사람들이 모두 아돌프 히틀러의 가족일 정도...그렇기 때문에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히틀러가 천하의 대악당으로 평가되면서 Hitler라고 하면 바로 아돌프 히틀러를 떠올리게 되어 독일어권에서는 더 이상 이 성을 쓰지 않게 되었다. 2차대전 이후에도 살아남은 히틀러의 가족들이나 Hitler 성씨를 지닌 이들은 Hiedler나 Hissler로 개명했다고 전해진다. 가끔 히틀러라는 이름을 스스로 붙이거나 자식에게 지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네오 나치일 가능성이 100%라고 봐도 될 정도다.
히틀러라는 성뿐만 아니라 아돌프라는 이름도 서양 사회에서는 거의 나쁜 이름을 넘어 금지어급으로 취급되고 있다. 아돌프는 독일에서 흔한 이름이었으나 이후 전화번호부를 보면 그 흔했던 이름들이 싹 사라진다. 새 아기한테 지어주지 않는 건 물론, 멀쩡히 그런 이름을 가졌던 사람들도 다 개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아돌프라는 이름은 오스나브뤼크의 성 아돌푸스(축일은 2월 11일)와 같은 가톨릭 성인의 이름에서 유래한 이름이기에 독일이 아닌 북유럽권에서는 현재에도 아돌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많다. 그리고 루돌프, 랜돌프, 돌프, 같은 비슷한 이름들도 전세계적으로 많이 쓰인다.
러시아에서는 '아돌프 기틀레르(Адо́льф Ги́тлер)'라고 표기한다. 역사적으로 러시아어에서 인명이나 지명의 h를 /g/ 발음의 г로 썼기 때문. 이 자음은 역사적으로 /h/ 발음에 가까웠고, 현재 우크라이나어에서는 이 발음이 여전히 ㅎ 발음이다. 물론 요즘의 인물이나 지명은 Х(kh)로 옮겨적는 경우가 많다.
4. 생애
5. 사상
아돌프 히틀러의 사상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유행했던 "유럽은 멸망하리라."라는 식의 염세주의, 변질된 니체주의에 입각한 우생학과 인종주의, 사회진화론과 독일의 전통적인 민족주의에 기반한다.
거대한 영향력에 비하자면 사상 체계는 빈약하고 체계성이 없어 상호모순적인 측면도 많았다. 나의 투쟁이 출판 후 정권을 잡자 책과 모순된 정책으로 비웃음을 샀다. 심지어는 나치즘의 이론조차 히틀러가 세운 게 아니고 그레고어 슈트라서가 세웠는데, 슈트라서는 장검의 밤 때 숙청당했다.
히틀러를 논할 때는 정치, 인종 사상을 떼어놓고 설명할 수 없다. 그러나 편의상 이하는 별도로 다룬다.
5.1. 정치 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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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는 1차 대전의 패전은 독일인들이 '인류 문명의 수호'라는 슬로건을 내건 연합군을 이길 사상적 무장이 되어있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우생학, 인종주의, 사회진화론 등 온갖 자극적인 소스를 무질서하게 혼합한 나치즘을 내세운다. 빈약한 사상적 토대에도 불구하고 순식간에 독일인들의 관념 깊숙히 파고들 수 있었다. 그가 주장했던 독일민족의 생존권 영역은 이미 독일 제2제국 시절부터 존재했던 독일 민족의 영역 확장 개념에 먹지 않으면 먹힌다는 식의 사회진화론적 주장을 도용한 결과물이다.히틀러는 감옥 안에서 《나의 투쟁》을 집필했다. 히틀러의 세계관이 분명하고 광범위하게 담긴 이 책은 1945년까지 독일 안에서만 1천만 권이 팔렸다. 《나의 투쟁》에는 히틀러의 정치적 신조, 세계관, 사명감, 전망, 장기적 목표가 모두 들어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도자 신화의 토대가 거기서 만들어졌다. 히틀러는 이 책에서 자신을 도탄에 빠진 독일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 불세출의 지도자로 그렸다.
《나의 투쟁》을 읽으면 히틀러가 1920년대 중반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간파할 수 있다. 그 무렵 히틀러는 역사와 세상의 모든 악을 완벽하게 규명하고 그 극복 방안까지 알려주는 철학을 개발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그것은 우월한 아리아인이 기생충 같은 열등한 유대인에게 시달리고 피해를 입는, 선과 악의 인종 투쟁으로 역사를 보았다. “인종 문제는 세계사는 물론 인간의 문화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라고 히틀러는 주장했다. …… 나치 운동의 사명은 오직 하나, ‘유대 볼셰비즘’을 타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단숨에 논리가 비약해서 그래야만 독일 민족이 지배자로 군림하는 데 필요한 생존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면서 노골적인 제국주의 침탈을 정당화했다. 히틀러는 이 생각을 평생의 신조로 삼았다. 세월이 흘러도 바탕은 달라지지 않았다. 메시아를 방불케 하는 하나의 ‘이념’에 대한 비타협적 몰입, 단순하고 수미일관하고 포괄적이며 흔들리지 않는 신념 체계는 히틀러에게 의지력과 운명에 대한 주인 의식을 심어주었고 히틀러와 접한 사람들은 누구나 거기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히틀러는 넘치는 자기 확신을 강하게 표현할 줄 알았고 주변 사람들은 자연히 거기서 권위를 느꼈다. 모든 것은 흑백으로, 승리가 아니면 완전한 파멸로 그려졌다. 다른 길은 있을 수 없었다.
히틀러 1권 7장 카리스마(366쪽)
아돌프 히틀러는 1905년에서 1914년까지 빈에서 보냈다. 이 시절은 '나의 투쟁' 초반부에 잘 나타난다. 아돌프 히틀러는 노숙자에 가까운 생활을 하면서도 단순한 룸펜은 아니었다. 그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정치에 관심이 많았으며, 각 정파의 전략과 전술, 그리고 장점과 단점을 분석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당시 오스트리아 정계에는 기독교, 마르크스주의(공산주의), 범게르만주의 세력이 주요 정파들이었다. 아돌프 히틀러는 마르크스주의 정당으로부터는 대중주의를, 기독교주의 정당으로부터는 반유대주의를, 범게르만주의 정당으로부터는 독일 민족주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가 지닌 사해동포주의나, 기독교의 엘리트주의나 그리고 범게르만주의의 반가톨릭주의[8] 를 배격했다. 이렇게 각 정파의 장점만을 받아들이고, 수용할 수 없는 부분은 배제하면서 자신만의 사상을 발달시켜 나갔다. 또한 거리의 부랑아 숙소에서 동료들을 모아놓고 일장 연설을 하면서 연설을 발달시켰다. 그를 기억한 한 부랑자가 이를 자랑스럽게 떠벌이다가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1차 대전의 허무한 패배와 굴욕적인 조약으로 인한 민족주의적 분노는 아돌프 히틀러가 득세하는 토양이 되었다. 프로이센 시절부터 보오전쟁, 보불전쟁 등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무적의 위용을 자랑하던 독일 제국의 패배는 일반 민중들로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물론 1차대전 말기에는 독일 민중도 이미 전쟁수행능력이 바닥났음을 인지했다는 주장도 있다. 어쨌든 이들은 유대인과 공산주의자들의 뒷공작으로 인해 부당한 패배를 당했다고 현실도피를 시작했다. 연합군이 독일 영토 내로 진격하기 전에 내부의 반란으로 인해 항복했다는 사실은 망상을 부채질했다. 때문에 전간기 독일인들에게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즘은 무너져버린 민족적 자부심을 고취시키고 내부로부터의 중상을 인정함으로써 패전을 합리화시키는 그럴듯한 사상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이어진다.
윈스턴 처칠과 대다수의 역사학자들은 아돌프 히틀러가 유럽과 세계를 지배할 야망과 "마스터 플랜"이 있다고 믿었다. A.J.P. 테일러는 이러한 설에 반박했다. 그는 영국인 학자로 1970년대 <2차대전의 기원>을 발표한다.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를 뿔 달린 괴물이 아닌 유럽 정치환경과 연합국의 온정적인 정책과 기타 여러 삽질들이 겹쳐진 결과라고 본다. 아돌프 히틀러에게 뚜렷한 계획은 없었으며 세계의 정세를 잘 탄 기회주의자에 불과하다고 평한다. 이는 당대의 주류 의견과는 반대였기에 큰 반감을 샀다. 그러나 지금은 가장 유력한 주장 중 하나로 꼽힌다.[9]
"독일 민족"조차도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파괴도구"로 여겼다. 그리고 독일이 한계에 도달해 패배가 확정되자, 아돌프 히틀러는 독일 자체와 함께 자폭하려 했다. 마지막 순간에서도 아돌프 히틀러는 자기 도취적인 파멸의 미학에 빠져서 가능한 한 많은 인간과 문명이 자신과 함께 파멸하도록 모든 힘을 다했다.
전쟁 말기에는 "독일 민족은 패배자니 살아남을 가치가 없다."면서 사회기반시설을 모조리 파괴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또는 "독일 민족은 약한 걸로 판명되었어. 나같은 훌륭한 지도자를 가질 자격이 없어"라는 멘붕성 드립도 남겼다. 이는 그의 사상이 얼마나 사회진화론에 물들어 있는지 볼 수 있는 단적인 예이다. 독일 민족은 전쟁에서 졌으니 세상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이 명령을 들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불태우라고 했던 파리는 불타지 않았으며, 덕분에 동부전선에서 각종 파괴 및 살육을 저질렀던 파리의 독일 주둔군 사령관 콜티츠가 되려 선한 사람으로 둔갑해서 각국의 도덕 교과서에까지 등장한다. 베를린 역시 아돌프 히틀러의 절친한 친구였던 알베르트 슈페어에 의해 방어전을 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로 지켜졌다.
아돌프 히틀러는 나치 독일이 멸망한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사회와 소련이 대립할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동쪽에서 온 자들(소련)이 세계를 지배하리라고 예측했다. 서구권의 민주주의는 나약하여 소련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체제에 맞설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불안정한 민주주의에 대한 혐오에 기인했다고 여겨진다.
아돌프 히틀러의 죽음과 함께 20세기 전반 전 세계를 휩쓴 파시즘의 광풍도 종말을 고했고, 이후 세계는 자본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으로 나뉘어 기나긴 냉전에 돌입한다. 그러나 절멸 전쟁이 남긴 참혹한 폐허와 홀로코스트는 양 진영 모두에게 나치즘을 대표하는 모습으로 각인되었다. 당시 유럽 사회에 만연했던 반유대주의가 아돌프 히틀러의 인종차별적 사고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리라는 반성은 종전 이후 세계적으로 인종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급격히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특이한 점으로 군주제, 특히 세습 군주제에 대해선 매우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래서 절대적인 권력을 장악한 독재자가 되었지만 자신이 독일의 카이저가 되려고 하지는 않았다. 히틀러는 총통이라는 직위를 매우 마음에 들어했는데 그 이유도 이와 연관된다. 나의 투쟁에서는 군주제에 대한 노골적인 비난이 언급되어 있고, 이후의 발언 중에는 '세습하는 군주제의 군주란, 대부분 식료품 가게 하나 제대로 운영할 능력도 없는 자들이다.'라며 적나라한 비난을 가하기도 했다.(1942년 3월의 어느 저녁시사 도중 발언)
히틀러가 군주제에 반감을 가진 이유로는 여러가지가 있다. 먼저 빌헬름 2세를 비롯한 1차대전 패망 이전 독일 제국의 군주제 체제에 대한 반감에서 기인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히틀러는 고향인 오스트리아 특유의 다민족-다문화 체제를 매우 증오했는데, 바로 이 체제를 구축하고 유지한 곳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조이기 때문에 이것이 합스부르크 왕조를 포함한 군주제의 반감으로 이어졌다는 해석도 있다. 태생적 한계도 있을 수 있다. 자본가들도 그러한 모습이 있었으나 당시 귀족들은 당연히 비귀족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프랜시스 골턴 등이 기여한 유럽의 우생학[10] 에서는 귀족들이 태생적으로 우월한 인간이었으며 특히 독일 귀족들은 귀족주의가 상당히 심했고 심지어 같은 나치여도 내심 히틀러와 같은 비귀족들을 멸시하는 귀족들도 있었다. 히틀러[11] 는 자본가 계급에는 속할 수 있었어도 귀족 계급에는 속할 수 없어서 그런 인간들과 자주 대립하기도 했다.
5.1.1. 영향 받은 학설들
히틀러가 가장 존경하는 미국인으로 미국 포드차 창업주인 헨리 포드를 꼽았는데 <나의 투쟁>에 반영된 상당수의 유대인 비판이 헨리 포드가 쓴 <국제유대인>이라는 문헌과 똑같다. 내용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아예 포드의 주장을 히틀러가 <나의 투쟁>에다가 전부 베꼈다고 해도 될 정도다. <국제유대인>은 포드가 1920년대에 배포한 4권의 반유대주의 책자인데 이 문헌에서 미국 유대인 재벌 제이콥 쉬프같은 인물이 반유대적인 러시아 왕정을 무너트리기 위해 레닌과 트로츠키에게 러시아 혁명 자금을 지원한 사실 등을 비난하며 유대인-공산주의자의 커넥션을 고발하고 있다. 이는 역사적 사실이기도 한데, 포드는 제조업의 아버지로서 미국의 유대계 금융업자들의 이같은 행태에 상당히 불만이었다. 미국 사회에서 유대인의 문제점들을 대대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실제로 헨리 포드는 나치독일에 우호적이었고 나치로부터 훈장을 수여받기도 했다. 실제로 제이콥 쉬프같은 유대 재벌은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제국에 자금을 지원하고 다이쇼 천황을 알현했고 일본 천황은 차관 제공에 대한 무한한 감사를 표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러일전쟁의 일본 승리에 기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12]
아르투어 딘터는 아리안인과 타인종의 결혼을 반대하며 인종의 순수성 보존을 주장했던 사상가다. 아돌프 히틀러는 그의 영향을 받았음이 확실하다. 아르투어 딘터는 1925년부터 나치당 튀링겐 대관구장을 지냈다가 "나치당안에 입법부를 만들자!"라고 아돌프 히틀러의 권위에 홀로 도전하다 1928년 쫓겨난다.
루돌프 헤스의 스승이었던 하우스호퍼 교수의 게르만족의 동부생활권(레반스라움)도 <나의 투쟁>에서 차용했다.
당대 독일 지식인들에게 널리 읽힌 하인리히 폰 트라이치케의 <19세기 독일사>와 오스발트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은 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읽진 않았어도 당시 유행했던 사조로서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서구의 몰락에선 총통주의 슈펭글러의 다른 저서 <프로이센주의와 사회주의>(1920년)에서는 민족 전체가 독재자 아래 일치 단결하는 초계급적 국가사회주의가 요구되어 있다.
보수혁명론자 아르투어 묄러 판 덴 브루크(Arthur Moeller van den Bruck)은 낡은 것이 젊은 것에 패하는 것은 이치라며 독일의 패전을 합리화 했고, 그의 저서 제3제국(Das Dritte Reich, 1923)에서 낡은 독일은 보수혁명을 통해 서구의 자본주의와 러시아의 공산주의 같은 외세의 이념에 대항하는 극도로 민족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민족주의적 사회주의"라는 이념으로 통치 되는 "제3제국"을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주장은 나치에 상당한 영향을 끼졌다.
5.2. 인종주의
아돌프 히틀러는 권좌에 오르기 전부터 죽는 순간까지 '유대-볼셰비즘'을 철천지 원수로 여겼다. 지금으로선 우습지만 당시 우익 진영에선 유대적이란 말과 볼셰비즘이 동일한 개념으로 통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적, 경제적 고립과 내부로부터의 중상을 유대인과 연관지어 독일인의 증오를 유발시키는데 성공했다. 일부 학자들은 아돌프 히틀러가 양면전쟁의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독소 불가침조약을 파기하고 소련 공격을 결심한 이유도, '유대볼셰비즘'에 대한 비이성적인 증오가 중요한 원인이었다고 주장한다. 당시 소련의 고위직에는 몰로토프 이전 외무장관이었던 막심 리트비노프 등 유대인도 상당수 포진해 있었다. 스탈린은 유대인을 배려하지는 않았지만 소수민족으로서 받는 탄압 이상의 차별도 없었다. 때문에 아돌프 히틀러의 관점에서 약간의 논리적 비약을 거치면 소련은 '유대인'과 '볼셰비키'가 지배하는 '악의 소굴'이나 다름없는 국가였다.[13]히틀러의 반유대주의는 처음에는 반자본주의적 색깔을 띠다가 1920년대 중반이 되면 유대인을 소련이 공산주의자들과 연결하는 쪽으로 바뀐다. 자본주의의 배후에 유대인이 있다는 주장을 버리고 공산주의의 배후에 유대인이 있다는 쪽으로 말을 바꿔 탄 것은 아니었다. 증오에 사로잡힌 히틀러의 머리에서 둘은 공존했다. 그렇게 지독한 증오는 공포심이 없다면 생겨날 수가 없었다. 국제 금융 자본과 소련 공산주의를 모두 조정할 수 있는 막강한 집단을 상상했을 때 느껴지는 적대감이었다. 국가사회주의도 감당하기 벅찰 만큼 강력한 '유대인의 세계 음모'가 있다는 고정관념이었다.
히틀러 1권 (p. 368)
아돌프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은 인류 역사는 계급 투쟁이 아닌 인종 투쟁이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인종성을 순종으로 유지하지 않고 잡종이 돼버린다면 그 민족은 망한다는 것이다. 흑인이 독일말을 배우고 독일말에 익숙해졌다해도 독일인이 될 수도 없고 유대인들도 기독교로 개종해도 절대 독일인이 될수 없다고 한다. 반대로 독일말을 잊어버리고 200년 전 러시아로 이주한[14] 독일계 러시아인들은 독일화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민족의 구분이 문화나 언어가 아닌 인종이다. 민족성 강조도 인종주의에 기반한다.
아돌프 히틀러의 유대인 혐오는 1차 세계대전 전의 오스트리아 제국의 가톨릭 교육과 사회 전반에 만연한 반유대주의, 그가 살던 빈 내 과격파들의 유대인 척결론, 1차 세계대전 직후에는 독일 내 부각되었던 여론을 따랐던 것이 가장 크다는 것이 학계의 설명이다.
반유대주의 성향은 1905년에서 1914까지 빈에서 지냈던 시절부터 형성되었다고 보인다. 이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의 시장은 오스트리아 국민당의 전신격인 오스트리아 기독사회당의 창당자 카를 루에거(Karl Lueger)[15] 라는 반유대주의자로 1897~1910년까지 선거로 뽑힌 자이다. 사회주의를 내세운것은 아니었고 오히려 당대 기준으로도 상당히 우파적인 성향의 정치인이었지만 당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카를 루에거가 사회복지와 연방주의를 주장해서 좌빨로 생각하고 2년이나 임명을 거부한 전력도 있다. '''누가 유대인인지는 내가 결정한다'''라는 유명한 드립을 쳤다. 이는 빈의 부유한 유대인들은 안심시키고 혹은 냅두고 제정 러시아의 유대인 탄압을 피해 내려온 코가 크고 검은 머리에 독일어를 못하고 튀는 외모의 유대인들만 탄압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다. 그는 연설 등에서 시도 때도 없이 유대인 음모론을 주장하고 차별을 정당화하고 인기를 얻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저서 나의 투쟁에서 당시 자신은 남는 시간을 "독서"로 보냈다고 하는데, 그가 읽는 책들은 주로 인종주의적인 팜플렛이거나 혹은 과격한 정치단체의 선전물들이었다. 이때부터 그가 유대인을 병적으로 증오하기 시작하게 되었다고 보인다.
반유대주의는 이 시대 유럽의 보편적인 감정이었다. 오히려 아돌프 히틀러가 살던 독일-오스트리아 지역이 그나마 덜한 편이었다.[16]
반유대주의는 영국이나 프랑스도 상당했다. 가톨릭 교회의 세가 강한 남유럽, 이탈리아, 스페인은 더 심했다. 끝판대장격은 러시아 제국으로 조직적인 유대인 탄압과 학살(일명 '포그롬')을 펼쳤다. 폴란드 및 발트 3국도 러시아와 사정이 비슷했다. 차르 시대에 대한 반감과 빈부격차 등 사회모순을 유대인 탓으로 돌리는 선동꾼들도 있었다. 러시아 정교회는 반유대교육을 실시했으며, 정부는 이를 방조했다. 게토 지역에는 살인, 약탈, 강간, 방화 등이 빈번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상대적으로 탄압이 적은 다민족 다언어 국가인 오스트리아로 많이 이주했다. 이주 유대인들은 빈의 골목 지역에 주로 살았는데, 상대적으로 낮은 교육 수준과 언어 장벽 때문에 뒷골목에서 매춘, 소매치기, 구걸 등으로 연명하는 하층민들이 증가한다. 이들의 유대인에 대한 여론을 악화시켰으며, 반유대주의 선동까지 더해져서 상황은 더 나빠진다.
유대인은 부유하다는 편견 때문에 당시의 상황이 와닿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도 부유한 사람은 소수다. 서방 금융권에 유대계의 비율이 높긴 하나 그 수많은 유대인 인구가 다 금융계의 거물들일 리 만무하다. 미국 뉴욕에만 해도 유대인 마을은 브루클린에 있다. 브루클린은 개발되고 치안이 안정되기 전까지는 가난한 동네였다. 록밴드 U2도 브루클린 브릿지에서 공연했던 적이 있다. 청나라가 개막장일 때 이주해 온 사람들이 세운 차이나타운과 아일랜드가 감자대기근을 겪을 때 이주해 온 이들이 세운 헬스키친도 위치는 맨하탄에 있다. 부유한 사람은 해외로 이주하는 등 발빠르게 행동했으며, 그들 중 홀로코스트에 희생된 자들도 최후에 그 자리에 갔다. 언제나처럼 가난한 자들이 먼저였다.
'헤르만 뢴스', '디터 에크하르트', '빌헬름 폰 폴렌츠' 등은 반유대적인 농민소설을 쓴 작가다. 이들은 유대인들을 고리대금업자, 가축상인, 중개인 등으로 묘사했다. 20세기 초반 40쇄를 찍을 정도로 엄청나게 팔린 '테오도어 프리치'의 <반 유대주의 문답서>는 후에 나치에서 위대한 교사라 칭할 정도였다. 이런 작품들이 아돌프 히틀러의 독서 취향이었다.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은 1916년 독일에 귀화한 영국인이다. 영국 해군제독의 아들로 태어났고 영국 육군원수 네벨 체임벌린의 조카뻘이 된다. 반유대주의자 프랑스인 고비노 백작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독일 음악가 리하르트의 사위가 된다. 그는 게르만빠로 반 유대주의자였는데, 아돌프 히틀러는 그의 주장에 깊이 공감했다. 1927년 체임벌린이 임종시엔 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손에 입을 맞춰줄 정도였다.
일부 심리학자들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들어 아버지와의 불화가 유대인에 대한 증오로 바뀌었다고 하는데,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그가 유난히 유태인을 싫어했을 만한 이유는 찾을 수 없다. 일부에선 어렸을 때 유태인한테 강간당했다느니, 혹은 어머니가 유대인과 바람을 피웠느니 아버지가 실은 유태인이었는데 아돌프 히틀러를 못 살게 굴었다느니 하지만 앞서 밝힌 대로 근거 없는 이야기이다.
반유대주의는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 19세기 후반 20세기 초반 유럽에 보편적인 정서였다. 아돌프 히틀러도 독자적인 반유대주의를 창시했다기보다는, 수천년동안 유럽에 만연한 반유대주의에 영향받았을 가능성이 크다. 주로 금융업과 보석세공업에 종사하며 여기저기 이주하였던 유대인들이 돈줄을 쥐고 유럽 도시들에 영향을 미쳤다는 금융자본주의 담론은 이미 18세기부터 어느 정도의 축적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노숙자로 살던 시절에 주로 거래하던 화상(畵商)이 유대인이었고, 심지어 이후 겪게될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전우 중에 유대인이 있었으나, 그와 사이는 특별히 나쁘지 않았다. 거기다 그때 받았고 이후 그가 평생 자랑하던 철십자 훈장을 주도록 추천해줬다는 설의 주인공이자, 아돌프 히틀러의 상관이었던 후고 구트만도 유대인이었다. 후고 구트만 역시 아돌프 히틀러 집권한 후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수난을 당한 적이 있으나 부대 전우들의 청원으로 석방되고, 이후 미국으로 망명했다고 한다. 진짜인지 그냥 비유적인 표현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빈으로 상경하기 전엔 유대인을 본 적이 없다'고 말한 적도 있다. 물론 이는 사실은 아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학교 동창 증언으론 빈으로 상경하기전에 이미 반유대주의에 빠져있었고 린츠와 아돌프 히틀러가 다닌 학교에서도 유대인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이언 커쇼의 연구 등을 종합해본다면 빈 상경 이전~빈 체류 시절에 아돌프 히틀러는 반유대주의에 어느 정도 빠져 있긴 했지만 당시 유럽 전반에 유행하던 반유대주의의 흐름을 고려할 때는 특출나진 않은 편이었다. 반유대주의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으나 유대인에 대한 일부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거나 멘젤스존을 비롯한 유대인 예술가들을 호평하기도 했다고 한다.
동유럽과 소련 인구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슬라브 민족은 게르만 민족에 비해 열등하다고 여겨졌다. 아돌프 히틀러는 '인종적 검사'를 통해 '가치'가 판명된 슬라브인들에 한해 간단한 셈법과 교통 표지판을 알아볼 정도의 기초적인 교육만 시켜서 독일인들의 노예로 부려먹고, 나머지는 우랄산맥 밖으로 추방하며 굶어죽든말든 개의치 않겠다는 구상을 했다. 그리고 동유럽에서는 차마 눈뜨고 못볼 인세지옥이 실현된다. 막상 독소전이 개시되고 아리안인의 후손들이 동장군에 고생하자 나약함을 질타하고 열등했다고 주장했던 슬라브인들의 "인종적 강인함"을 찬양하는 등 오락가락 맛탱이가 갔다.[17]
반면 서유럽과 북유럽에서는 그나마 온정적이었다. 영국 본토 항공전을 앞두고 영국에 '저런 하등한 인종 돕는다고 서로 싸우지 말고 우월한 우리들끼리 잘 살아보자'며 화해 의사를 피력했다. 물론 당시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이를 거절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또한 북유럽에 속하는 노르웨이·덴마크·스웨덴·네덜란드·벨기에의 플란데런 지역(네덜란드어 사용지역)은 인종적 가치가 독일 민족과도 비슷하다고 인정하기도 했다. 특히 한때 독일계 민족국가의 영토였던 벨기에의 오이펜-말메디, 프랑스의 알자스-로렌, 19세기 독일 연방에 속했던 룩셈부르크 지역의 거주자들은 조부모 중 두 명 이상의 혈통이 확인되면 '명예 아리아인' 인증을 했다. 독일군 입대시 독일 국적도 부여했다.
물론 모든 논리적 전개는 독일인은 가장 우월한 인종이라는 대전제 하에서 이루어졌으며, 다른 민족에 대한 판단은 전적으로 "독일 민족과 얼마나 많은 유사점을 가졌는가"에 기초하여 이루어졌다. 일례로 프랑스는 골 족과 게르만 족의 피가 섞인데다 라틴 민족도 포함되어 있으니 그만큼 더 열등하다고 여겨졌다.
요아힘 C. 페스트는 자신의 저서 《몰락》(한국판: 아돌프 히틀러 최후의 14일)에서 구체적인 사상은 존재치 않고 오직 파괴와 증오만 존재하였다고 간략하게 그의 사상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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킴벌리 코니시는 '비트겐슈타인과 아돌프 히틀러'라는 서적을 발표한다. 여기서 린츠에서 자랄 때 학생 시절의 유대인 급우이자 훗날 세계적인 철학자가 되는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에 대한 혐오로 인해 유대인을 몰살하려는 충동이 일어났다고 주장한다. 다만 비트겐슈타인과 아돌프 히틀러는 같은 학교 동기라는 외에는 충돌할 지점이 적었다. 실제 학교만 같지 학년은 달랐다.
5.2.1. 유색인종에 대해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의 유색인종 인식의 핵심적 키워드는 '''무관심''', '''우리편이면 너희도 괜찮은 민족'''이라고 본다.
아돌프 히틀러의 인종론에 따르면 다른 민족들은 아리안과 유대인 사이에 위치한다. 그 당시 서양의 흔한 인종주의와 마찬가지로 백인은 다른 유색인종보다 우월하다는 논리는 기본. 아돌프 히틀러에 따르면 아리안은 인류 문명의 모든 가치있는 것을 만들고 발전시켜 나갔으며, 다른 민족들은 아리안인을 뒤쫓기 바빴으며 유대인은 문명을 파괴하기에 바빴다는 설명이다.
"아리아인의 문화가 없다면 일본이나 중국은 다시 근대화 이전으로 돌아갈 것이다"며 동양인보다 아리아인이 위대하다는 걸 확실히 해두기는 했지만 일본과 추축동맹을 맺은 후엔 재독 일본인들을 명예 아리아인이라 선포하고, 심지어는 여러 번 동양과 접촉하고 나서는 "아시아인의 고대 문명이 우리의 것보다 우수하다고 믿는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이 말이 전부 진실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동맹인 일본을 위한 외교적 발언이었을 것이다. 실제론 전쟁 중에 일본이 싱가포르를 함락했다는 소식을 듣곤 매우 아쉬워했다고 한다. 영국이 자신들과 동맹만 맺었어도 이런 '불상사'가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면서.
독일이 전유럽을 제패해나가자 일본에서는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이 일본 교과서 만큼이나 엄청나게 인쇄되며 팔려나갔다. 일본인들은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을 읽으며 감명받고 일본도 독일처럼 행동해서 아시아를 정복하고 미국과 영국을 밀어내야한다고 주장하며 궐기대회까지 열며 아돌프 히틀러 본받기운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일본에서 판매된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 일본인에 대한 아돌프 히틀러 본인 스스로도 이불킥적인 안 좋은 이야기가 검열된 후반본 책이다. 다음은 아돌프 히틀러의 "나의 투쟁"에서 일본 번역판에서 검열된 초반본 부분.[18]
독일 역사가 안드레아스 힐그루버의 단계적 계획이론의 4단계 상황, 즉 독일민족의 위대한 독일 제국이 해외에서 세계제국 건설에 나서는 상황에서, 새로운 세계제국 독일과 동맹국 일본과의 관계에 대해서, 아돌프 히틀러는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일본인은 미개하고 추악하지만, 서구문명이라는 빛을 얻음으로써 일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일본인들은 그 빛이 없으면 그림자 조차도 존재할 수 없는 그런 인종이다.
스스로의 창작성이 부족한 열등한 인종이다.
하지만 손재주가 좋고 일처리가 빠르니 독일의 하인으로 이용하기에는 좋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독일-일본 양국이 내렸던 중요한 결정들을 보면, 양국의 불신이 극명했다. 애초에 동맹을 맺기 전, 중일전쟁 때는 중국에 무기를 계속 수출하고 전쟁고문들도 계속해서 파견해 일본군이 독일제 무기와 독일의 고급인력들을 상대하면서 궤멸되어 가는 일본군의 상황이 연출됐고 동맹채택도 중국 or 일본 중에 꽤나 고민했었다. [19] 또 아돌프 히틀러는 소련 침공계획인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일을 일본에 비밀로 했고, 일본은 태평양전쟁의 시발점이된 진주만 기습 결정에 대해서 독일에게 알리지 않았다.
1942년 1월 18일에 독일-일본 양국이 비밀 군사회담을 통해서, 시베리아와 인도를 남북으로 가르는 동경 70도를 기점으로 동반구에서의 각자의 작전반경을 나누었지만, 베를린과 도쿄는 어떤 군사 협정도 체결하지 않았다. 두 추축국은 보급상의 난관을 무시하고, 인도양 일대를 공동 작전지역으로 설정했다.
양국간의 군사 협력이 구체화되지 않은 것은 아돌프 히틀러의 일본이 무지막지하게 태평양과 유럽의 식민지들을 강탈하고 여러가지 성범죄나 학살같은 전쟁범죄에 대해서 일본을 견제할 생각이 있었다는 추정이다. 이와 관련해서 폰 하셀(von Hassell)이 일본이 싱가폴을 함락시킨 직후인 1942년 3월 22일에 적은 일기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다만 흑인종에 대해서는 그때 당시의 전 유럽이 좋게 생각하지 않았듯이 비슷했다.# 나치 독일 내에서 흑인들 또한 이런저런 못볼 꼴을 많이 당했다는 기록이나 증언이 나오고 있다. 특히 1차 대전에서 독일이 패전하고 라인란트 지방이 벨기에, 프랑스군에 점령되었을 때 프랑스군 중에 식민지 출신 흑인 부대(외인부대)도 주둔했고, 그 흑인 프랑스군과 독일 여성 사이에서 500여 명의 아이가 생겨났다. 이들은 "라인란트 사생아(Rhineland Bastard)"라고 불리웠으며 아돌프 히틀러는 불임 수술을 통해 이들을 사실상 멸종시켰다.아돌프 히틀러는 일본의 엄청난 성공에 크게 열정적이지 않았고, 그는 영국이 그 일본 황인종을 격퇴시키는 것을 돕기 위해서, 영국에게 20개 사단을 기꺼이 제공할 용의가 있다고 발언했다.
출처- Milan Hauner, Did Hitler Want a World Dominion? 중
당시에도 이미 사회적으로 '흑인은 백인보다 매우 저 아래'라는 생각이 지배적으로 깔려있던 시기라서[20] 굳이 흑인을 타겟으로 잡고 사냥해봐야 별다른 정치적, 경제적 이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21] 즉, 흑인에 대한 처분은 유대인처럼 철저한 계획하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서방열강들처럼 마구 탄압하던 것도 아닌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보면 된다.
당시 유럽의 유색인종(흑인, 황인 등)은 식민지를 통해서 유입되었으나, 독일은 식민지가 적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 비해서 유색 인종이 적은 편이었다. 예를 들어 나치 독일 당시 독일 본토에 살고 있던 흑인의 수는 2만 5천 명 정도로 전체 인구 6500만 중 0.04%에 불과했다. 이렇게 유색인이 적다보니 유색인의 존재감은 독일 내에서 상당히 미미한 수준이었으며, 아돌프 히틀러나 나치스 또한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고 나치당에서도 확고한 정책 기준이 없었다.
그나마 유럽국가 지도자들에 비해 우호적으로 대접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때 손기정과 제시 오언스에게 축하인사를 건네거나, 태국 국왕 라마 8세 아난타 마히돈이 독일에 오자 직접 공항까지 가서 마주한 것[22] , 그리고 1938년 네팔 국왕에게 차를 선물한 것 등이다. 또 중동의 국가원수들과 회담을 하고 슬라브계인 크로아티아나 불가리아와도 우호적으로 지냈다.
그러나 그렇게 따지면 소련과도 불가침조약 이후~독소전쟁 이전까진 온갖 덕담이 오가며 경제협력도 크게 늘리는 등 훈훈한 분위기가 오갔다. 더 거슬러가면 뮌헨협정 시기까지는 민족자결주의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라고 주장했고, 더 이상의 영토 확장은 없을 것이라 주장했다. 애초에 아돌프 히틀러는 일개 당수 시절부터 독일 총통으로 다른 나라들에 대한 침략 전쟁을 벌일 때까지 상대방을 기만함으로 일종의 뒷통수를 쳐서 그 자리까지 올라온 것이다. 즉 상대방을 현재 상황에 맞게 이용해 먹은 것뿐, 나치가 진짜 견제할 국가 없이 세계 패권을 쥔다면 어떻게 변했을 지 알 수 없다. '''한 마디로 말해서 정치적으로 필요했었다면 이념이고 줏대고 간에 인종을 떠나서 이용할려고 했다는 걸로 보면 되겠다.'''
5.3. 아돌프 히틀러와 종교
일단 공식적(명목상)으로는 가톨릭 영세를 받았으니 가톨릭이라고들 한다.[23] 하지만 거의 성당에 나가지 않았으니 냉담자라 할 수 있고, 또 1931년 나치 지도층 전체가 함께 파문을 당했으니 가톨릭이 아니게 되었다.[24]
아돌프 히틀러의 종교관은 아주 좋은 떡밥이며, 기독교인이나 유신론자는 아돌프 히틀러가 무신론자나 반기독교주의자였다고 주장하고 반기독교주의자와 반종교주의자들, 그리고 일부 반가톨릭적 성향이 강한 개신교인들은[25][26] 아돌프 히틀러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고 주장하지만 그러나 꼭 가톨릭에 한정된 건 아니고 다른 주장으로는 아돌프 히틀러가 오히려 개신교에 가까웠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물론 아돌프 히틀러가 기독교인이었든지 무신론자였든지 그 사실이 기독교나 유신론, 혹은 반기독교주의나 무신론이 잘못되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종교가 걸려 있기 때문에 오늘도 논쟁이 끊일 날이 없다.[27]
아돌프 히틀러는 많은 연설에서 무신론에 반대하고 가톨릭을 긍정하는 모습을 보였다.[28][29] 그리고 연설 뿐 아니라 일부 측근들은 아돌프 히틀러를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고 말하기도 했다. 허나 이를 표면적으로 받아들이고 아돌프 히틀러는 독실한 기독교인이라고 단정지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당시 80%가 기독교인이었던 독일을 비롯한 당시 유럽 기독교 국가에서 독실한 신앙을 가졌다고 주장하지 않는 우파 정치인은 거의 없었다. 무신론=볼셰비즘으로 낙인 찍던 시대이다. 현재도 세속화가 상당히 진행된 유럽에서도 무신론 국가 지도자는 잘 나오지 않고 있으며[30] , 미국 같으면 정치인이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하면 정치적 자살이나 마찬가지이다.
아돌프 히틀러는 공식석상에서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는데, "하느님의 거룩한 사명" 같은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좋아했고, "가톨릭적 도덕관을 바탕으로 한 국가를 세우는 것이 우리의 목표"라는 말을 하기도 했고 가톨릭을 정치적으로도 자주 써먹었다. 당시엔 "무신론 = 공산주의"라는 일반화가 통용되는 시대였으니 무신론자를 공산주의자라고 비난하는 일도 당연히 서슴치 않았다. 따라서, 당시에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공산주의자라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인이라는 위장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기독교인인지, 다른 종교인인지, 무신론자인지 알 수 없지만, 다음은 아돌프 히틀러가 어떻게 종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했는지 보여주는 문구이다.
이것저것 길게 말하고는 있지만, 결론만 따지고 말하면, 자신의 반유대주의가 종교(혹은 신의 의지)에 의해서 정당화된다는 것이다.민족주의적인 정신을 가진 사람은 특별히 각자 자기의 이름으로 사람들이 단지 피상적으로 신의 뜻을 얘기하는 것을 중단하게 하고 실제로 신의 뜻을 실행하게 하여 신의 말씀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만들 성스러운 의무를 지닌다. 왜냐하면 신의 말씀은 인간에게 그 형체와 정수와 그 능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누구라도 그의 작업을 파괴하는 자는 주님의 피조물, 그 성스러운 의지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을 일깨워, 원한다면 각자 그 자신의 이름으로, 모든 사람이 누구든 그 활동에 있어서 말이나 행동으로 그의 종교적인 공동체의 한계를 벗어나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사람을 반대하는 것을 일차적이고 가장 성스러운 의무로 삼게 하라.
(중략)
따라서 오늘 나는 전능하신 신의 의지를 따라 행동하고 있다고 믿는다: 나 자신을 유대인으로부터 방어함으로써 나는 주님의 일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
아돌프 히틀러, "나의 투쟁", 랄프 만하임 역-먼소류 한국어 역
이것도 마찬가지. 아돌프 히틀러는 세간의 비난을 받기 쉬운 학살을 정당화 시키려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유대인들은 신을 살해한 자들'이라고 매도했고, 그 매도를 진실로 받아들인 사람의 기록이다. 유대인을 예수를 살해한 자라고 비난한 건 아돌프 히틀러가 처음은 아니다. 이들에게 '''예수 또한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모양이다.총통께서는 최종 해결책의 임무를 맡은 자들에게 살해가 가능한 한 인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알렸다. 이것은 해충으로 가득한 세상을 정화하라는 신의 명령에 봉사하고 있다는 그의 확신과도 일치했다. 로마 교회의 계급을 혐오하면서도 여전히 로마 교회의 평판 좋은 회원인 그는 유대인이 신을 살해한 자들이라는 그들의 가르침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 말살 정책은 따라서 비개인적으로 잔인하지 않게 행해지는 한은 그가 단지 신의 복수의 손으로서 행동하는 것이었으므로 양심에 거리낌 없이 수행할 수 있었다.
John Toland (Pulitzer Prize winner), from "Adolf Hitler", pp 507, talking about the Autumn of 1941.
아돌프 히틀러는 어릴 적 가톨릭 세례를 받아 형식적인 기독교인이었으며 유럽의 보편적인 기독교 문화에 대놓고 반대하지 않았고 좀 불만이 있었어도 독일 민족이 2000년 동안 기독교에 동화되어 버려서 어쩔 수 없다고 봤다. 힘러처럼 대놓고 반기독교적 성향을 드러낸 적은 한 번도 없다. 즉, 아돌프 히틀러는 독실한 가톨릭교도는 아니었지만 정치적인 목적을 위해 적어도 형식적인 기독교인이라는 점을 공개적으로 자주 보여줬다. 연설에서 시도 때도 없이 쓰는 네덜란드식 감사 기도[31] 라며 공식석상에선 대체로 긍정적으로 평가했지만, 측근과의 대화에서나 1927년 밤베르크 회의에서 나치당 강령을 두고 회의 시엔 "당 강령은 안 바꾼다. 성경은 모순 덩어리지만 기독교의 확산을 막지 못했다."라고 못박은 적이 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는 수많은 성직자를 자신에게 반대한다는 이유로 탄압했으며 가톨릭을 틀려먹은 종교(Wrong Religion)라고 비난하기도 했다.[32][33] 개신교의 경우에는 가톨릭에 비해서는 덜 한편이기는 하였으나[34] '''반나치 성향 고백 교회 목사들 700명을 게슈타포가 체포해서 수용소'''로 보내기도 한 것을 보면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거슬리지 않는 경우에 한정된 이야기로 보인다. 가톨릭 사제나 수도자도 마찬가지. 나치당 내의 개신교도를 억압하자는 주장에 반대하였고, 심지어 나치와 개신교의 충돌을 막고자 "게르만 기독교 신앙운동"을 열기도 했다. 개신교가 가톨릭과 다른 점이 독립된 종파이며 중앙 조직이 없다는 점인데 가장 크게 반발했던 부분이다. 세례받은 유대인을 탄압하거나 서로 다른 개신교 종파를 억지로 "독일 민족 교회"라는 하나의 공동체로 묶어서 국가에서 관리하고자 할 땐 개신교계에서도 크게 반발했다. 이는 독일 개신교 내에서 반나치 운동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가 됐다. 대표적인 예가 독일 고백교회를 이끌었던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이다.
또한 다른 나치 추종자들이 아돌프 히틀러의 뜻을 거스르기 어렵다고 본다면 돌격대 깡패들과 (SA) 친위대는 가톨릭 사제들을 "로마의 첩자", "남색집단"이라고 폄하했고 괴벨스는 가톨릭 사제들을 가리켜 "검은 무뢰한"들이 동성애적 성향으로[35] 독일 청소년들에 성적인 폭력을 동반한 악영향을 끼친다고 비난했으며, 힘러와 친위대는 신비주의와 실체도 없는 게르만 민족종교나 찾아다니는 등 반유대-반기독교성향이 뚜렷했고 총통 비서인 마르틴 보어만은 "국가사회주의와 기독교는 양립할 수 없다", 뉘른베르크에서 처형당한 인종학자 알프레드 로젠베르크는 "독일이 살아남으려면 십자가가 떨어져야 된다."라고 주장했다. 괴벨스도 가톨릭 장학금만 먹튀하고 신앙은 일찍 버린다.
논란이 갈린다 하더라도 아돌프 히틀러가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통설은 존재하지 않는다. 평전 작가 이안 커쇼는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의지와 운명만을 믿었다라고 평가했고 아돌프 히틀러와 스탈린을 비교한 <독재자들(Dictators)>을 저술한 영국의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는 "아돌프 히틀러는 교회를 파괴하진 않았지만, 어디까지나 정치적 관점에서 판단으로 독재체제 내에서만 허용되었다"라고 평가한다. 종국에는 소련 공산주의와 국가사회주의는 종교와 양립할 수 없었다고 결론을 내린다. 아돌프 히틀러도 공식적인 자리가 아닌 힘러와의 사적 대화에선 "기독교 교리는 과학이 진보하기 전에 낡아버렸다"라고 평가했다. 독일이 기독교 국가임을 부정할 수 없어서 정치적으로 이용했고 적극적인 탄압은 없었으며 보수적인 성향을 지닌 대부분의 가톨릭 교회 및 독일 개신교 교단의 성향상 나치의 종교정책에 대체로 순응했으며 반나치성향의 고백교회를 제외하고 적극 이용당하고 소극적으로나마 협력했다.
아돌프 히틀러가 이교도라는 주장도 있으며 아돌프 히틀러는 이교, 즉 게르만족의 전통 믿음인 북유럽 신화에 관심을 보이고 독일의 신앙을 기독교에서 이교로 갈아치우려 했다는 음모론도 있다. 실제로 나치는 크리스마스 때 산타가 아니라 오딘이 선물을 준다고 강조하기도 했다.[36] 아돌프 히틀러는 다른 나치 고관들인 루돌프 헤스나 하인리히 힘러와는 달리 신비주의적이나 이교적인 것들에 대한 관심이 거의 없었다. 헤스나 힘러는 기독교 이전 시대의 아리안족 고유신앙을 재구성한답시고 룬 문자가 새겨진 비문들을 수집하거나 인도나 페르시아의 고대 종교들을 연구하는 등의 기행을 일삼았으나, 아돌프 히틀러는 오히려 이러한 행동들을 비웃었다. 실제로 힘러가 1938년에 "아리아인의 뿌리를 찾겠다"며 SS 단원들로 탐사대를 꾸려서 티베트로 보낸 적이 있는데 이게 아돌프 히틀러 귀에 들어가자 예산을 함부로 낭비했다는 일갈이나 들어야했다. 슈페어의 회고록에 의하면 아리안 드립은 쳤지만 고고학적 발견엔 별 관심이 없었는데 그 이유는 그리스-로마 시대의 엄청난 유적과 유물들이 남아있는데 우리 조상들의 유물로는 돌도끼 같은 것이나 발굴되면 쪽팔리니까 그만두자는 것이었다. 힘러와 후에 나치 내에서도 정신상태가 맛이 갔다고 여겨지던 루돌프 헤스는 프리메이슨과 가톨릭 예수회가 세계를 정복하려는 국제유대인 조직의 하수인이라고 생각했단다. 힘러의 친위대에선 휴스턴 체임벌린의 영향을 받아 예수는 유대인이 아니라 아리아인이었단 주장까지 펼쳤다.
나치당이 집권한 후엔 심지어 일본의 신토를 조국을 위해 희생한 영혼들을 숭배하는 위대한 종교라고 추켜올리는 발언을 했다는 기록도 있다. 또한 공자와 석가모니를 "인류의 위대한 스승"이라고 했다고도 하는데, 역시 해석은 제멋대로에 엉망이라서 인도에 자리잡았던 아리아인들은 북부 독일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세웠던 지배인종이며 샤캬족도 그들의 후손이라는 개드립이나 치는 수준이었다. 이슬람이 진정한 아리안의 신앙인데 망할 카롤루스 대제가 이슬람의 북상을 저지했기 때문에 "기독교처럼 순종적이고 무기력한 종교가 모국의 종교로 자리잡게 됐다"는 발언을 했다는 알베르트 슈페어의 증언도 있다.[37]
아돌프 히틀러는 위 발언처럼 이슬람교에 대해서 호의적인 발언도 하였다.'''내가 유일하게 존중해주는 종교는 이슬람이며, 내가 유일하게 존경하는 선지자는 무함마드이다.'''
- 아돌프 히틀러
물론 일본의 신토 관련으로 발언한 것과 같이, 이 또한 외교 차원에서 전략적으로 남긴 발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2차 대전이 진행되면서 독일은 예루살렘의 大무프티 아민 알 후세이니 휘하의 팔레스타인계 아랍 민병대들을 꼬셔다 반영 반란을 부추기려고 노력했다.[38]
아돌프 히틀러가 스스로 예수라고 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목사 및 신부 탄압과 기독교 탄압이 "자신을 예수로 인정해주지 않아서"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를 "재림 예수"처럼 꾸며낸 일등공신은 괴벨스이며 기독교 문화권에서 친숙한 성자나 구세주적인 이미지를 쓴 것에 불과하다. 현재 한국에서 유교 드립 친다고 해서 상투 틀고 갓 쓰면서 청학동에 사서삼경 외우는 사람이 아니듯이 당시 사람들에게 친숙한 기독교적 소도구를 사용한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저 루머는 목사와 신부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다가 실패하고 탄압했다는 것이 와전되어서 생긴 이야기일 가능성이 높다.
아돌프 히틀러가 종전 후 기독교를 말살하려고 계획했다는 설도 있다. 영문 위키피디아 자료
아래는 위 내용을 대충 간추려서 번역한 글이다.
나치가 기독교 말살을 계획했다는 주장 자체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상당한 근거를 들어 제출된 바가 있고(본문에서 언급되는 도노반 장군의 자료들이 재판에서 제출되었다.) 첫 문단에서 인용하고 있는 앨런 불록의 <Hitler: A Study in Tyranny>나 미첼 페이어의 <The Catholic Church and the Holocaust> 등에도 실려 있다.
도노반 장군의 자료들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게 아돌프 히틀러의 종교에 대한 설은 다양하지만 공통된 사실이 있다면 아돌프 히틀러의 주장에서 일관성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이다.[39] 아돌프 히틀러는 종교인인지 무신론자인지 이전에 제대로 된 사상을 갖추지 못한 선동가였다. 실제로 '''아돌프 히틀러의 행동과 사상, 언행에는 일관성이 존재하지 않았으며, 지리멸렬 그 자체였다.''' 종전 직전의 발언이나 행보, 프로이센의 전통에 대한 증오, 문화에 대한 반달리즘은 아돌프 히틀러가 정말로 독일을 사랑했었는지조차 의심스럽게 만든다. 기라성 같은 독일군 장교들이 연합군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돌프 히틀러에 의해서 갈려나갔으며 전쟁 활동을 수행할 군수산업 체계와 군대는 나치의 권력 장악에 의해서 엉망이 되어버렸다. 따지고 보자면 그 나치즘이라는 것도 사상적인 기반을 마련한 당원들은 거의 다 정권 초기에 갈려나갔다.[40] '''애초에 독일 자체도 아돌프 히틀러 때문에 거진 망했다.'''나치 전범에 대한 뉘른베르크(Nuremberg) 국제재판은 무려 6백만의 유태인을 살해한 Holocaust 사건을 나치의 인종학살 계획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것을 증명하고 고발하였다. 미국의 고소인단을 이끌었던 윌리엄 도노반 장군(General William Donovan)은 나치가 유태인 학살 뿐만 아니라 기독교에 대한 체계적 파괴도 계획하였다는 내용을 담은 방대한 분량의 문서들을 제출하였다. 도노반의 문서들―무려 150 권에 달하는 장정본(裝幀本)―은 1959년 도노반이 죽은 후에 코넬(Cornel) 대학교에 보관되었다. 지금은 Rutgers Journal of Law and Religion에서 internet을 통해 찾아볼 수 있다. 이 범죄적 음모에는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 선전부장 요셉 게벨스(Joseph Goebbels), 히틀러 유겐트의 지도자 그리고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의 피고인 발두어 시라크(Baldure Schirach)를 포함한 나치당의 정상급 핵심 요원들이 연루되어 있었다. 이 문서에 의하면, 나치는 기독교회가 애초부터 나치의 인종차별과 정복전쟁 계획에 반대 입장을 견지한다는 이유로 제압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했다.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하여 나치는 교회의 내부에 침입하려 하였다. 즉, 중상모략, 체포, 습격 등을 획책하고 목회자를 살해하고, 신도의 사상을 개조하며, 교회 학교와 청소년 조직에 침입하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성경 중심의 복음주의 교회는 타협적인 교회에 반대하면서 대(對) 나치 항거의 전면에 나섰다. 성경의 무오설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견지하지 못했던 자유주의 교회들은 집권자의 친-진화론적 이념에 기독교 교리를 끼어 맞추려는 기도의 일환으로 기독교 교리를 서슴없이 ‘재해석’하려 하였다. 그것은 오늘날 다윈의 ‘과학’적 이론에 추종하려는 현상과 유사했다. 일찍이 1937년에 벌써,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나치 정책에 반대한다고 선언한 바 있다. 그러자 나치는 이를 보복하기 위하여 700명의 목회자를 체포 구금하였다. 인본주의자와 자칭 ‘민간 자유주의 단체’는 ‘창조설을 교회 내에 국한’시키자, 그리고 모든 기독교의 영향을 대중의 생활과 학교로부터 말살하자고 외쳤다. 이 불길한 외침에 보조를 맞추어 여러 교파의 교회들도… 종교 활동을 가능한 한 좁은 범위 안으로 한정하려 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자진하여 축소한 활동범위 위에 더 많은 제약을 막무가내로 가하려 하던 나치의 방해 공작에 교회는 속수무책이었다. 기독교를 둘러싸고 벌어졌던 이러한 현상은 나치의 ‘점진적 잠식을 위한 용의주도한 기독교 말살 계획’을 진전시키는데 도움을 주었고, 교회의 조직체계를 나치의 정치목적에 이용당하게 하였다.
6. 인간 아돌프 히틀러
아돌프 히틀러의 사악한 이미지에 비해 이후 실제 연구에서 나타나는 인간적인 면모들은 종종 사람들을 의아하게 만든다.
'인간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당시 독일 내외의 표면적인 이미지는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지도자''''였다. 금주, 금연, 금욕[41][42] 에 채식을 했고 동물을 사랑하는 이미지였다. 동물 보호법이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시초일 정도. 케이크나 단 빵 종류를 엄청 좋아했다는 미식가 일면도 있다. 실제로 나치 집권 후 아돌프 히틀러는 금연 캠페인을 벌였으며, 나는 이미 독일과 결혼했다는 말을 했다.
오늘날의 아돌프 히틀러 개인에 대한 이미지는 과장된 면이 있다. 영화처럼 평소에도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거나 눈을 뒤집으며 거품을 물지 않았다. 그는 그때 당시 다수의 독일 정치인들과 달리 소시민 계층 출신으로 소박한 면도 많다. 그가 독일 국민들로부터 선풍적인 옹호를 받은 이유이기도 했다. 물론 그의 아버지는 소박한 생활을 동경하여 잠시 그러한 삶을 살기도 했다. 그러나 고된 일과 형편없는 생산성에 질려 그만두었다. 아버지는 세무서장으로 활동하여 충분한 자산을 가졌다. 아돌프 히틀러는 유복한 어린시절을 보냈고 가문은 충분한 유산을 소유하여 독일로 이전할 수 있었다. 청년기의 아돌프 히틀러는 화가지망생으로서 그림 엽서나 홍보 그림을 그려서 팔던 프리터였다. 배고프고 가난한 화가 생활에 염증을 느끼던 중 그는 20대 중후반에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다. 그는 최전선에서 목숨을 걸고 여러 참호들을 오가며 참호전신 역할을 맡은 연락병으로서 자신이 충실히 임무를 수행함과 정말 열심히 싸웠고 그 대가로 부상까지 입어서 철십자 훈장 두 번 수여받았고 전상장을 받은 것을 자부하였다.
아돌프 히틀러 광기어린 모습은 전쟁 말기의 전쟁영화들에나 유래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주변인들에게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며 다정했고 화를 정말 잘 안 냈다고 한다. 정치인이 되기 전 그는 한량이나 다를 바 없는 삶을 살았으므로, 터프가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가 사적으로 사람을 대할 때 연설할 때처럼 카리스마와 화려한 논변술로 사람들을 압도했다거나 성질을 부려 사람들을 위축시켰다는 증언이나 기록은 없다. 2002년에 사망한, 아돌프 히틀러의 여비서이자 타자수였던 트라우들 융에에 따르면 아돌프 히틀러는 그녀에게도 항상 친절하고 다정했다고 한다. 이와 더불어 2013년에 사망한 로후스 미슈는 아돌프 히틀러에 대하여 언제나 친절했던 최고의 보스였다는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개인적인 인상을 남겼다.
그래서 2004년에 개봉한 영화 몰락(다운폴)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아돌프 히틀러가 미쳐 날뛰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대신 다정한 모습을 보이다니 이 영화는 아돌프 히틀러를 미화한 작품이 아니냐?'라는 대한민국 언론의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벼랑 끝에 몰린 아돌프 히틀러가 반쯤 실성하여 울부짖는 모습일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다운폴 항목을 참조.
6.1. 예술적 취향
잘 알려져 있듯, 뛰어난 예술적 감각의 소유자였다. 정치에 입문하기 전 화가로서 활동하였던 만큼 그는 예술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의 저서인 나의 투쟁에서도 예술 중 으뜸은 음악과 건축이라고 꼽았다.[43] 반면 연극은 스스로의 장점 없이 남의 습성을 흉내내기 좋아하는 유대인의 예술이라고 여겨 탄압했다고 알려진다. 집무실에 스위스의 화가 아르놀트 뵈클린의 죽음의 섬 연작 중 3번째 작품을 걸어뒀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자연히 예술품을 모으는 데도 관심이 많았는데, 전쟁 중에 러시아의 호박방을 비롯한 고전 시대의 화가들이 그린 그림들까지 전 유럽에서 예술품을 강탈했고, 훗날 총통 자리에서 물러나면 자신의 고향으로 여겼던 린츠를 전면적인 문화수도로 개조하고 직접 설계한 린츠 박물관에 수집한 예술품들을 전시할 계획을 세웠다. 그가 모은 예술품들은 전쟁이 끝나고 주인이나 각국정부로 반환되었지만 상당수는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를 두고 스위스 비밀금고에 처박혀 있다, 나치 잔당들이 들고 튀었다 등 수많은 이야기가 생겨났다.
재미있는 사실은, 동 시기 유럽의 다른 지도자들도 예술에 소양이 높은 사람이 많았다는 점이다. 우선 그의 숙적이라고 할 수 있을 처칠의 경우, 피카소가 '처칠이 다른 일을 안 하고 그림만 그렸어도 꽤 넉넉하게 살았을 것.'[44] 이라고 평가하기도 했을 정도로 미술에 남다른 재능을 가졌다. 문학적인 소양도 출중하여 젊은 시절 그가 종군기자로서 참전했을 때 겪었던 일들을 모아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으며, 비록 논란은 있지만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정도이다.[45] 스탈린 또한 의외로 대단한 문재의 소유자였는데, 그는 시인으로 정식 등단한 경력이 있으며 이 시기에 발표한 작품들이 그루지야의 문학 교과서나 귀족들의 선집에 실렸을 정도였다.[46] 드 골 또한 30대 중반부터 책을 썼던 문장가였으며, 심지어 같은 추축국의 무솔리니도 전쟁 전인 20대에 이미 편집장을 맡을 정도의 문장가이자 대단한 달변가이기도 했다.[47]
다만 비교 대상들의 재능이 너무 뛰어났던 것이지, 아돌프 히틀러의 예술적 재능만 따져본다면 나름대로 뛰어난 편이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빈에 거주하던 시절 매우 가난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부업삼아 그리던 그림엽서가 나름 잘 팔려서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진 않았다.", "뮌헨에서는 광고판 등을 그렸으며 평 또한 나쁘지 않았다."는 기록들이 존재하고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서 판단해보면 아돌프 히틀러가 그림만 그려도 먹고 살 수 있는 수준의 재능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48][49] , 이 정도면 당연히 미술 방면의 재능이 일반인 수준은 확실히 넘었다고 보는 게 옳다. 다만 당시의 유럽 지도자들 중 이상할 정도로 예술적 재능과 소양이 뛰어난 인물들이 많았기에 현재의 '아돌프 히틀러는 예술적 재능이 형편없었다'는 인식이 생겨난 것이다. 이들 모두가 예술을 했었다면 세상이 더욱 평화로웠을 것이다.
6.1.1. 건축
아돌프 히틀러는 젊은 시절 이루지 못했던 건축의 꿈을, 젊은 알베르트 슈페어가 이루기를 기대하고 총애하면서 대리만족을 느꼈다고 한다. 이전에는 트로스트가 건축을 담당했다고 하는데, 건물은 물론 실내 장식이나 가구 배치에도 아돌프 히틀러의 취향을 반영하지 않았다. 슈페어 발탁 후에는 건축에 지대한 관심을 쏟아부어 세세한 치수나 가구의 재질까지 신경을 쓰면서 다른 일을 소홀히 할 정도였다고 한다.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에 따르면, 아돌프 히틀러는 개인적 취향에 대한 고집이 셌지만, 전문가가 진지하게 주장하면 마지못해 따랐다고 한다.
일부 건축물은 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도안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나 건축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건축물이라기보다는 마인크래프트에 가까운 공상의 산물이었다. 히틀러의 구상한 건축의 대부분은 대리석 같은 최고급 재료로 건물을 짓자고 해 놔서 원활한 재료 수급이 불가능했고, 크기도 너무 커서 당대의 기술로는 수십 년은 지나야 겨우 완공할 만한 수준이었다. 특히 아돌프 히틀러의 망상이 극에 달한 게르마니아 계획은 만약 이루어졌다면, 베를린 지반이 약해 수년 안에 도시 전체가 붕괴할 위험이 있었다.[50] 덕분에 알베르트 슈페어는 아돌프 히틀러를 설득하거나 조금이라도 현실적인 설계를 하느라 자주 머리를 싸매야 했다. 아돌프 히틀러의 도안이 실현된 건축물은 베를린 경기장과 총통관저가 전부였다. 그나마도 총통관저는 베를린 전투 때 거의 파괴되었고, 소련군이 나머지 건물을 폭파하여 오늘날에는 그 모습이 남아 있지 않다.
6.1.2. 음악
음악에 대한 관심과 소양도 평균 이상이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일반인 수준에 비교할 때 그렇다는 것이지, 히틀러는 기본적으로는 고전시대보다는 낭만주의 이후 음악을 더 좋아했고 당대에 변화 발전하던 20세기 이후의 현대음악은 영 탐탁지 않아 했으므로,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히틀러의 음악에 대한 이해는 미술과 마찬가지로 꼰대스러운 측면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히틀러가 가장 좋아했던 음악은 널리 알려져 있듯이 리하르트 바그너의 악극이었다. 엄청난 바그너 팬이었으므로 빈 시절부터 바그너의 공연이라면 빼먹지 않고 오페라하우스를 꼭 찾아갔다고 한다.[51] 바그너의 초기 작품보다 게르만 신화가 나오는 후기작품을 편향적으로 좋아해서 바그너의 작품을 순수하게 좋아했다고 여기기는 어렵다는 의견이 있지만, 음악적으로는 바그너 후기 작품이 훨씬 깊이 있고 바그너 음악의 정수를 담고 있으므로, 아돌프 히틀러의 바그너에 대한 경도를 유추해볼 수 있다. 제1차 세계 대전 중에 4년만에 휴가를 받아서 후방에 가게 되었을 때는 동네 오페라 극장에 들렀다가 바그너는 안 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바로 나와버린 일이 있을 정도로 히틀러의 바그너 숭배는 중증이었다.
다만 아돌프 히틀러가 바그너 작품 가운데서 가장 좋아한 것은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로, 바그너의 전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신화가 사용되지 않은 작품이다. 뉘른베르크의 명가수는 쉬운 곡을 쓰지 못한다는 비판을 의식한 바그너가 의도적으로 평이한 화성과 선율을 사용하여 작곡한 곡으로, 당시 독일 국민들에게 가장 인기가 높은 작품이기도 하다. 참고로 리하르트 바그너의 부인(코지마 리스트)은 아돌프 히틀러의 후원자이면서 추종자이기도 했다.
바그너 이외의 낭만주의 시대 작곡가 가운데에서는 안톤 브루크너[52] 를 두 번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세 번째로 좋아했다고 한다. 특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는 나치 독일에서 제국음악회장을 하면서 높은 자리에 오르기도 했으며, 이 때문에 전후 나치 협력문제로 비판을 받는다. 이렇듯 1930년대 기준으로 조금 올드한 독일 낭만파 음악을 좋아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최고의 독일 작곡가로 꼽히지만 작법에서는 고전주의적인 형식성과 명료성을 상대적으로 중시했던 루트비히 판 베토벤이나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작품의 경우에는, 젊었을 때는 구색 맞추려고 듣는 수준이었다가 만년에야 좀 즐겨 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히틀러의 개인 취향과는 별개로, 베토벤의 곡들은 나치 프로파간다에서 아주 잘 써먹었다.
자기가 특히 관심있는 분야나 대상이 아니면 별다른 체계적인 지식이나 선호가 없었던 히틀러답게 독일권 이외의 다른 문화권의 작곡가와 음악에 대한 이해는 그렇게 깊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히틀러는 인종차별정책에 따라서 슬라브인들을 열등민족으로 여겨 그들을 탄압했지만, 정작 아돌프 히틀러 자신은 슬라브인 음악가인 차이코프스키와 라흐마니노프의 음악,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슈나벨의 레코드를 즐겨 들었다고 한다. 반면 1920~30년대 유럽과 미국에서 유행한 재즈에 대해서는 청승맞은 선율과 리듬에 맞춰 몸이나 배배 꼬고 돌리는 열등한 깜둥이 음악으로 취급했다.[53] 정작 모리스 라벨이나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 같은 서구권의 당대 최고의 음악가들은 재즈의 영향을 받은 작품을 꽤나 남겼고, 오늘날 재즈가 1920년대 이후의 서양음악에서 가장 의미있는 발전을 이룬 장르로 평가받는 것을 생각하면 이 역시 히틀러다운 안목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19세기 최고의 이탈리아 오페라 작곡가로 꼽히는 주세페 베르디의 음악은 가끔 가다가 듣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는 베르디의 1급 음악보다 바그너의 2급 음악이 100배 낫다는 식으로 폄하했으며, 황실 오페라 극장의 베르디 공연보다는 동네 극장의 바그너 공연을 듣는 것이 좋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알려져 있다. 길거리 악사가 베르디의 대표적인 아리아인 "여자의 마음"을 연주하는 걸 보고, 바그너의 음악이라면 저런 천박한 자가 연주할 수 없을 것이라면서, 베르디를 좋아하던 젊은 시절의 절친한 친구인 아우구스트 카비체크에게 '''너의 베르디'''도 참 안되었다고 혀를 찬 일도 있다고 한다. 그나마 베르디 음악 중에 괜찮다고 평가한 건 아이다 정도였다고.
일본의 군가인 군함행진곡을 듣고 만족해서 자주 흥얼거렸다고 한다.
6.2. 아돌프 히틀러와 미술
아돌프 히틀러는 매우 뛰어난 그림솜씨를 가졌다고 평가된다. 오죽하면 히틀러를 다룬 매체들에서 '계속 그림이나 그리지, 으이구!'라는 반응이 나올 정도다. 히틀러의 미술 실력이 사실은 별볼일없는 수준이었다는 말도 있지만, 독일의 역사학자인 라이너 자이틀만 등에 따르면 사실 히틀러의 그림 실력은 적어도 평균 이상이었다.[54] 다만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고 계속해서 고전적인 화풍을 고집한 것일 뿐이지, 그림 자체는 분명 꽤나 잘 그리는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력이 별로였다는 말이 자주 나오는 것은 히틀러에 대한 증오심에서 나온 것으로 추측된다는 의견도 있다.
앞에서 서술했듯이 아돌프 히틀러는 어린 시절부터 미술에 관심이 있었고 파리로 유학을 떠날 정도였다. 다만 아돌프 히틀러는 건축물을 묘사한 풍경화를 주로 그렸고, 사람을 잘 그리지 못해 인물화는 거의 손대지 않았다.[55] 풍경화에서도 배경의 사람들은 간략하게만 묘사하였다. 후기작에서는 간간히 사람을 그렸지만 여전히 중심은 건물이었다. 아돌프 히틀러가 남긴 그림을 보면 평범한 구도에 특별히 미적인 독창성이 없으며,[56] 어긋난 원근법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색감 또한 단조로운 편. 때문에 일부 평론가들은 기술은 괜찮았지만 예술적 성향보다는 건축조감도 느낌이 난다고 평가했다. 이를 아돌프 히틀러의 과격하고 잔혹한 정치적 행보와 엮어서 '아돌프 히틀러는 인간을 무의미한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림에서도 지워버렸다'는 식으로 추론하는 의견이 종종 보이지만, 제대로 된 근거는 없기 때문에 단순히 아돌프 히틀러 개인의 풍경화 취향이 그랬을 뿐이라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아돌프 히틀러의 미술적 취향은 자신의 그림 만큼이나 다소 고전적이었으나 훗날 알려진 것처럼 처음부터 모더니즘 예술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은 아니다. 아돌프 히틀러의 롤모델이었던 무솔리니와 이탈리아의 파시즘이 초기 모더니즘 예술의 후원자였으며 나치당 역시 초기에는 모더니즘 건축 등에 관심을 보였었다. 나치가 정권을 잡은 후 게르만의 문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정의하던 나치당의 인사들에 의해 고전 예술이 게르만적이라고 정의되고 모더니즘이 타락한 예술이라고 정의된 이후부터 거기에 편승했다. 마침 독일의 기성 미술계도 이런 비슷한 보수적인 시각이 있었기에, 차츰 입체파 스타일 등을 시도만 해도 화풍이 '유대적으로 물들었다'라고 판명하고 제국 예술협회에서 쫓아내고 활동을 금지했으며, 현대미술 작품에는 퇴폐적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다. 1937년에는 <위대한 독일미술전>과 <퇴폐미술전>이라는 전시회를 여는데, 퇴페미술전에 에밀 놀데, 마네 등 오늘날 근대 미술의 선구자로 추앙받는 이들의 작품을 전시하면서 기형아, 장애인의 사진과 비교를 하면서까지 '옳지 못한 예술, 옳지 못한 신체'의 이미지를 대중에게 주입하려고 애썼다. 반대로 <위대한 독일미술전>은 아카데믹한 회화나 조각이 주를 이룬 전시회였고, 아리아 인종의 신체를 찬양하는 교과서적인 누드 작품이 많았다. 그러나 우습게도 정작 내세웠던 위대한 독일미술의 기원은 그리스-로마 조각상, 르네상스 이탈리아 회화다. 또한 <퇴폐미술전>은 나치의 기대와는 달리 대중의 뜨거운 관심을 받으며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의 건축적인 취향은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를 통해 나치 제국의 수도 계획인 게르마니아로 구체화된 바 있다.
아돌프 히틀러의 배타적인 예술관에 대한 일화가 있다. 괴벨스는 300만 제국 마르크를 들여 초호화 제국선전장관 관저를 지어놓고 집들이 겸 파티를 열었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도 초대되어 집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경악하며 인사도 없이 돌아가버린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유는 괴벨스가 선전부 예산과 영화계 뇌물로 흥청망청 초호화 저택을 지어서도 아니었고, 국립미술관의 그림들을 선전장관 개인 저택에 제멋대로 걸어놔서도 아니었다. 바로 '''입구에 걸어 둔 수채화 그림이 천박해서였다'''.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는 몰래 베를린에서 개최하는 미술작품 전시회에 '몰래' 분장을 하고 갔었다. 아돌프 히틀러의 비서인 트라우들 융에의 회고록에 따르면, 아돌프 히틀러는 롱코트를 입고 모자를 푹 눌러쓴 차림으로 미술 전시회에 갔는데, 그 이유는 이전에 전시회에 그냥 갔다가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을 보고 계속 "총통각하 만세!"를 외치는 바람에 작품 감상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젊은 시절 2천여 점의 그림을 그렸으며 그 중 700여점 정도가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군복무 하던 시절에 그린 그림이 벨기에의 농가에서 발견되는 등 간간이 신작이 발견되기도 하기 때문에 수가 약간씩 늘고 있으며, 경매에도 꽤나 자주 나오는 편. 총통 시절에도 나치당원들이 아부한답시고 비싸게 샀지만 현대에도 그 희소성으로 인해 상당히 비싸게 거래된다. 아돌프 히틀러의 그림 중에서 꽤나 유명한 축에 속하는 <바다의 야상곡>이라는 그림은 2012년 슬로바키아의 온라인 경매에서 3만 2천 유로(약 5천만 원)의 가격에 팔렸고, 뮌헨 시청을 그린 그림 한 점은 13만 유로(약 1억8000만 원)에 팔렸을 정도. 인터넷에서도 상당수의 작품을 볼 수 있으며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클릭하는 걸 보면, '세계의 모든 사람이 내 작품을 보도록 하고 싶다'던 아돌프 히틀러의 소망은 결국 실현된 셈이다.
다만 예술적 가치가 있어서 팔린다기보다는, 역사상 최악의 독재자가 직접 그린 작품이라는 희소성 때문에 경매에 나오는 쪽에 가깝다.[57] 인터넷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작품을 검색해 보는 사람들 또한 작품이 좋아서가 아니라 '아돌프 히틀러란 악당이 그림도 그렸다는데, 과연 어떤 그림일까' 같은 호기심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당장 위에 나와 있는 <바다의 야상곡> 같은 경우도 '''그림만 보고서는 아돌프 히틀러의 작품이라는 것을 전혀 상상하지 못하는 그림'''으로 유명하다.
게다가 다른 제대로 된 작품들과는 달리 경매 자체에도 논란이 있다. 나치 피해자 중에는 아돌프 히틀러가 그린 그림도 나치의 산물이라 주장하며 소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이걸 낙찰받는다는 것 자체가 홀로코스트 관련 단체들의 어그로를 끄는 일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큰 경매장에서는 올라오지도 않고, 대부분의 낙찰자 역시 익명으로 낙찰받는다. 그나마 밝혀진 경우는 자료 삼아 공개적으로 구입하는 교육재단 등의 시설 뿐. 2017년 새로 발견된 아돌프 히틀러 그림 역시 신원 미상의 기증자가 관련 재단에 기증하면서 존재가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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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를 소재로 한 우표들. 우표의 경우 나치 독일 시절 워낙 많이 찍어놓은지라 그렇게 높은 가격을 받지는 못한다.
6.3. 성격
히틀러를 매일 보았고 누구보다도 가까운 거리에서 자주 히틀러를 접햇던 수행원과 비서 같은 보좌관 중에서도 지도자라는 껍질 안에 숨겨진 진솔한 히틀러를 엿보았을 만큼 히틀러를 잘 안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은 드물었다. 히틀러는 언제나 거리를 두려고 애썼다. "대중은 우상을 원한다."고 그는 훗날 말했다. 히틀러는 대중뿐만 아니라 자기를 바로 옆에서 보필하는 사람들에게도 우상처럼 굴었다. 군중 앞에서는 폭포수처럼 말을 쏟아냈고 측근들에게도 기나긴 독백을 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히틀러는 기질적으로 자기를 드러내기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불신과 냉소가 워낙 몸에 배어서 남들에게 고백을 한다거나 하는 일은 도통 없었다. 수백만 명 앞에 드러난 공인의 모습과는 달리 히틀러는 지극히 폐쇄적인 사람이었다. 제대로 사람을 사귀는 경우도 드물었다. 아무리 오래전부터 알고 지냈던 사람이더라도 히틀러는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히틀러가 부담 없이 반말로 대하는 사람은 겨우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이듬해 어릴 때 가깝게 지냈던 아우구스트 쿠비체크와 상봉했을 때도 말을 꼬박꼬박 올렸다. 1933년 이후로 히틀러를 부르는 정식 호칭으로 자리 잡은 '지도자(Fuhrer)'라는 말은 이 딱딱한 사이를 잘 나타낸다. 히틀러가 권위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지도자에 따라붙는 후광을 잃지 않았기 때문이었고 자신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히틀러는 아주 가까운 가신한테도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했다. 히틀러라는 인물이 '신비주의'를 불러일으킨 것은 히틀러의 성격 탓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그것은 권위를 살려주는 역할도 했다. 히틀러의 입장에서는 인간적 따뜻함보다는 자기의 권의를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이 더 중요했다.
이언 커쇼 히틀러 (p. 68~69)
히틀러가 하는 행동의 대부분은 어떤 효과를 노리고 연출한 쇼였다. 불같이 화를 내고 폭발하는 것도 실제로는 의도적인 것이었다. 히틀러는 기회가 생기면 평당원과 만나서 굳게 악수를 나누고 '남자답게' 눈을 바라보았는데 초라한 평당원에게는 죽어도 잊지 못할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그렇지만 그 행동은 개인 숭배 열풍을 강화해 운동의 기반을 다지고 지도자와 추종자 사이를 더욱 끈끈하게 만드는 데 필요한 연기일 뿐이었다. 실제로 히틀러는 추종자들에게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앞장서서 히틀러를 따르던 사람도 1928년 히틀러가 "인간을 경멸한다"고 비판했다. 히틀러의 성격에서 자기 중심주의는 실로 엄청난 비중을 차지했다. '자애로운 아버지'라는 선전의 이미지가 내면이 공허를 감추었다. 그는 쓸모있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기울였다.
이언 커쇼 히틀러 (p. 415)
아돌프 히틀러와 사적으로 친분을 맺었던 사람들의 평가는 '''다정다감하며 친절했다고 한다.''' 물론 이는 절대다수가 그와 친분이 있었던 이들의 증언에 의존한 탓도 있지만, 최소한 그가 저지른 온갖 만행과 전쟁범죄와는 무관하게도 주변사람들에게는 되도록이면 다정하고 소탈하게 대했다는 것 자체는 사실인 듯 하다. 본래 아무리 악명을 떨친 독재자라도 의외로 주변 인물들에게는 예의바르고 친절하게 대한 경우가 많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딱히 이상한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히틀러는 비록 나중에는 독재자가 되었지만 맨 처음 정권 자체는 독일 국민들의 선택을 받아 적법적으로 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다. 주위 사람의 호감조차 사지 못하는 사람이 온국민의 지지를 받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다.유대인 학살에는 분명히 히틀러의 책임이 있다. 그렇지만 유대인을 공개 연설에서 그렇게 비난하고, 갈수록 급진화되는 극단적 폭력을 그렇게 선동하고, 자기의 '예언'이 이루어진다면서 그렇게 겁을 주었지만, 히틀러는 유대인 살해에 자기가 관여한 흔적을 절대로 남기지 않으려고 노심초사했다. 어쩌면 최고의 권력을 누리는 동안에도 히틀러는 유대인의 권력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유대인이 '복수'를 할까 봐 두려웠는지 모른다. 히틀러 자신의 비밀주의도 한몫 거들었겠지만, 어쩌면 독일 국민이 무시무시한 비밀을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어 있다고 생각한 나머지, 끔찍하긴 해도 두루뭉술한 표현으로만 그 문제를 언급했는지도 모른다. (...) 측근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도 히틀러는 유대인 살해를 솔직하게 거론하지 않았다. 히틀러가 있는 자리에서는 아무리 그 범죄를 작당하는 장본인들이 동석했더라도 유대인 살해를 완전히 알고 있는 것처럼 거론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이언 커쇼 히틀러 (p. 598)
이런 면모는 아돌프 히틀러의 말년에 그의 비서로 근무했던 트라우들 융에의 증언을 통해서도 확인해볼 수 있다. 그녀는 노년의 인터뷰에서 비록 아돌프 히틀러가 개인적으로는 주변 사람들에게 친절한 사람이었으나, 동시에 거대한 이상과 충동에 사로잡혀 타인에 대한 동정심이나 공감능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말한 바 있다.
2013년 96세로 사망한 로후트 미슈 전 SS 통신중사[58] 의 증언은 아돌프 히틀러의 사생활을 연구할 때 중요하게 다뤄진다. 그는 독일 슈피겔 신문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이 만나본 사람들 중 가장 친절하고 다정했으며 최고의 상사라고 평했다. 아돌프 히틀러는 일하는 사람들의 직책을 부르지 않고 일일이 이름을 불렀으며 절대로 까먹는 일이 없었다고 증언한다.
요리사 만치를르아니는 총통 전속 채식 요리사였다. 그는 영화 몰락에서도 등장한다. 조상 중 유태인이 있던 사실이 밝혀져 해고됐지만, 그가 연금 수령 및 재취업에 불이익이 없도록 주민등록상 순수 게르만으로 등재토록 아돌프 히틀러 개인이 조치를 취해 줬고, 전쟁 말기에는 아예 다시 불려들였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의 비서 트라우들 융에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왜 결혼을 하지 않았냐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자 아돌프 히틀러는 '나는 결코 가정에 충실할 그런 가장이 못되오. 그런데 그걸 알면서도 결혼을 한다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일'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한 측근이 총통 관저에서 자신을 위한 음악회를 열자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러자 아돌프 히틀러는 '''자기 하나 때문에 예술가들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다'''라고 거절했다고 한다.
전속 사진사 호프만의 증언에 의하면 1933년 총리가 되기 전에 아돌프 히틀러의 측근들 중에서 집회나 공식석상이 아닌 평소에 아돌프 히틀러에게 '총통 각하(Mein Führer)'나 '하일 아돌프 히틀러!'라고 부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주로 '''아돌프 히틀러 씨'''라고 불렀으며 낯을 많이 가리고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주절주절 수다를 떨기 좋아했다고 한다. 영화 다운폴 초반에서 묘사했듯이 한 친위대 장교에 의하면 "총통 사령부에 새로 부임받은 장교들이나 병사들은 총통을 만날 때마다 깍듯이 열정에 차서 "하일 아돌프 히틀러"라고 경례를 한다. 하지만 총통은 공적인 자리도 아닌 이런 곳에서 너무 그러지 말라며 그냥 인사만 하라고 맨날 달래신다. 실제로 총통 사령부에서 좀 오래 있던 사람들은 그냥 총통을 만날 때 "좋은 아침입니다. 총통각하."라고만 인사한다."라고 한다. 동류집단이 아닌 사람들에게서는 어눌할 정도로 침묵을 지켰다고 한다. 또 인간적으로 몹시 소탈해서 선물을 받으면 상이군인 병원이나 양로원 등으로 보냈다고 한다.
친구처럼 지낸 알베르트 슈페어의 증언도 있다. 아돌프 히틀러는 아무 말도 없이 둘이 몇 시간씩 산책하기를 즐겼다고 한다. 식사도 친한 사람 몇 명과 하거나 혼자 했으며, 친분이 없는 다수의 사람들과 함께 하는 일은 드물었다고 한다.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괴벨스가 검열로 자르거나 수입 금지된 '''헐리우드 영화''' 작품까지 특별히 들여와 밤새도록 감상했다고 한다.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즐겨 보았으며 자신을 풍자한 위대한 독재자는 포르투갈을 통해 입수해 두 번이나 감상했다. 덧붙여서, 미국의 유명한 애니메이션 감독 '''월트 디즈니'''의 만화의 광팬이었다고 한다.[59]
다만 히틀러는 어디까지나 자신이 쓸모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에게만 친절하게 대했을 뿐 자신이 필요없다고 생각한 사람이나 자신이 불편하다고 느낀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냉담하게 대했다. 히틀러의 실제 성격은 폐쇄적이였기 때문에 자신의 측근들에게도 일정한 거리를 두려 애썼고, 자신의 속내를 절대 털어놓지 않았다. 또한 사석에서 자신이 마음에 드는 사람들만 모아놓고 자기 혼자 무수히 많은 독백을 하는 것이 히틀러의 습관 중 하나였다. 그래서 히틀러와 이야기를 하던 중 제1차 세계대전 이야기나 바그너의 음악과 관련된 이야기는 절대로 나오지 말아야 했는데, 이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히틀러가 흥분하여 먼 동이 터올 때까지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히틀러가 자신만 관심있는 주제를 주변사람들에게 얼마나 이야기했던지 히틀러가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순간 다른 사람들이 히틀러가 말할 내용을 술술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성격 때문에 히틀러와 같이 있으면 한마디도 못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히틀러의 관심을 끄는 이야기가 나오면 몇시간이 되었던 간에 곁에서 참을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야 했기 때문에 히틀러의 곁에 있을 때 대단히 불편해했다고 한다.
6.4. 식습관
젊은 시절에는 미식을 좀 즐겼고, 제1차 세계 대전 때 복무할 때는 다른 데는 돈을 하나도 쓰지 않았지만 취사병들에게 더 맛있는 음식을 사먹을 때는 돈을 아끼지 않아서 먹보라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후술되어 있는 한프슈탱글의 증언 등을 봐도 알 수 있듯이 20년대 이후 히틀러 특유의 식습관으로 바뀌었는데, 거의 청교도와 맞먹을 정도로 엄격한 식습관을 정립했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술을 거의 마시지 않았고, 게다가 담배는 평생 피우지 않았다. 부하들도 히틀러의 앞에서는 절대로 못 피우게 해서 부하들이 싫어했다.[60][61]
당시 나치당에서의 금연 캠페인 포스터
나치당 해외공보실장을 지내고 아돌프 히틀러에게 사교예절을 가르치고 숙청되기 전 미국으로 망명한 에른스트 한프슈탱글은 후에 미국 언론과 인터뷰에서 히틀러가 란츠베르크에서 석방되고 나서 와인과 닭 한 마리를 통째로 먹어치웠다가 점차 배가 나오는 걸 경계해서 육식과 술을 멀리하기 시작했다고 구술했다. 그러니 술을 아예 안 마신 게 아니다. 맥주홀 폭동 당시의 증언들을 들어보면 아돌프 히틀러는 돌격대 앞에서 맥주를 완전히 들이키고, 잔을 바닥에 던짐으로서 모든 게 시작되었음을 상징적으로 알렸다. 그 후로도 어떤 비장한 상징성을 부여하기 위해 아돌프 히틀러는 종종 맥주를 들이키고 그 잔을 바닥에 내던졌다. 이외에도 여기저기서 필요한 상황이라면 한두 잔 정도의 가벼운 음주를 한 기록은 발견된다. 에른스트 한프슈탱글이 밝히기로는 맥주집 폭동으로 수감하고 나서도 술은 조금 마셨다고 한다. 나중에 집권 후에도 알려진 것과 달리 식사 때는 소화를 돕기 위해 알콜 냄새는 지독히 싫어해도 코를 쥐어막고 '꼬냑 한 잔' 정도는 어쩔 수 없이 마셨다고 한다. 소화 불량에 시달리던 그에게 주치의 테오도어 모렐 박사가 처방한 것으로 보인다..
또 채식주의자로 고기를 먹지 않는 등 일반적인 이미지에 비해 의외의 면이 많다. 다만 금주, 금연한 것은 약간의 정신병적인 '건강 염려증' 때문이었으며, 채식은 사실이나 최고급 식재료인 아스파라거스를 주로 즐겼고, 단 음식을 매우 좋아했다. 육식을 완전히 끊은 건 조카딸 겔리 라우발이 1931년 자살하고 나서라고 알려졌다. 그 전까지는 비둘기를 보양식으로 먹는 등 약간의 육식을 한 것으로 보인다. 아돌프 히틀러의 방에서 권총 자살했는데 육식할 때마다 그 이미지가 떠올라서라는 추정을 하기도 한다. 아돌프 히틀러의 음식 검시관으로 고용되었었던 마르고트 뵐크의 말에 따르면, 주로 아스파라거스나 피망 같은 채소에 파스타나 쌀을 곁들여서 먹었다고 한다.
일단 이것들만 본다면 의외로 소박하고 같이 식사해도 괜찮을 듯 한 인상을 주지만, '''실제로는 식사 시간에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 중 하나였다.''' 일례로 2차대전 당시 아돌프 히틀러의 사령부 중 하나인 볼프샨체에서, 루돌프 슈문트(아돌프 히틀러의 수석 부관)가 국방군 지휘참모부의 장교 중 한 명이 매일 아돌프 히틀러의 저녁식사에 동석해야 한다는 규정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젊은 장교들이 열광적으로 호응했는데, 같이 식사해보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무도 지원하지 않는 바람에 그 규정의 발안자인 슈문트가 매일 저녁식사에 참석할 장교를 강제로 지정해야 했다. 왜냐면 앞서 말했듯이 일단 아돌프 히틀러가 소싯적부터 규칙적인 생활과는 한참 떨어진 니트적인 생활을 했으므로[62] 저녁 시간이 일상인의 리듬과 전혀 맞지 않은데다가, 히틀러의 식단은 채소뿐이고 식사 자리에서는 금연이었으며 히틀러는 식사할 때 주로 혼자 떠들어대고 그와 식사하는 주위 사람은 인내심을 갖추고 들어야 했는데, 대화 주제로는 '개를 길들이는 방법', '(로엔그린이나 파르지팔 같은 게르만족의 영웅이 나오는) 바그너 오페라 이야기', '흡연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이나 '채식의 우월함' 따위였다. 게다가 혹여라도 정치적인 화제가 나오거나 전선에서 나쁜 소식이라도 전해지면 분위기는 금방 심각해졌고 저녁식사 후 아돌프 히틀러는 몇 시간 동안이나 동석한 장교들을 앞에 앉힌 채 혼자서만 말을 해댔기 때문이다.[63][64] 때문에 히틀러와 식사를 할 때는 정치적인 얘기는 금기였다.
아돌프 히틀러에게 결벽증이 있었다는 말도 흘러다닌다. 근데 정작 케이크를 무지 좋아해서 치아 상태는 별로였다고 한다.[65] 그나마 3조각 이상은 절대 먹지 않았던 젊은 시절, 중년 초반 시절과는 달리 노환 문제가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병적으로 케이크를 찾기 시작해 3접시를 한꺼번에 해치웠다.[66] 초콜릿도 굉장히 좋아하여 하루에 1kg에 달하는 양을 먹었으며 케이크, 파이, 과자도 초콜릿이 많이 든 것들을 좋아했다고 한다. 과자와 크림빵도 좋아해서 즐겨먹었고 덕분에 자주 복통에 시달렸다. 이는 생모가 위암으로 죽은 가족력과 관련이 있을 수도 있다.
아돌프 히틀러가 채식주의자라는 것에 관련된 몇몇 논란이 있으며, 영문 위키피디아에 '''아돌프 히틀러와 채식주의'''에 관한 항목이 따로 개설되있다. 해당 문서에서 Ilse Hess, Fritz Redlich, Thomas Fuchs의 증언에 의하면 히틀러는 고기, 빵가루, 달걀, 야채 등을 섞어 뭉쳐 만든 간만두 LeberKnodel을 항상 먹었다고 한다. 역사학자 Robert Paine는 “히틀러가 채식주의자였다는 일화는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의 조작”이라고 말한다. 아돌프 히틀러의 치아와 틀니에 존재하는 치석 퇴적물 분석에서 고기 섬유가 발견되지 않은 것으로 볼 때 말년엔 최소 '''비덩주의(Flexitarianism)'''였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6.5. 동물 보호
막상 동물 애호가였다. 심지어 나치 치하에서 근현대 최초로 동물보호법이 만들어지기도 했다.[67][68] 심지어 미국, 유럽, 아시아 등 현대의 다수국가 동물보호법은 나치가 만들었던 동물보호법을 기초 틀로 하고 있다.[69] 나치의 동물보호법은 수렵을 제한하는 것 외에 '동물 꼬리 자르기 금지', '동물을 이용한 생체실험 금지' 등의 조항도 있었다.
동물 중에서도 특히 애견가로 유명하였으며 그의 셰퍼드 블론디(Blondi)는 사실상 그의 유일한 단짝과도 같았다. 물론 블론디 이전에도 개를 여럿 키웠다. 블론디는 1941년 마르틴 보어만에게 선물받았다고. 또한 1차대전 당시 종군할 때도 전우들과 거의 친교하지 않았던 병사 아돌프 히틀러가 유일하게 애정을 쏟았던 대상도 적진에서 길을 잃고 헤메다 넘어온 푹슬(여우라는 뜻)이라는 화이트테리어 개였다. 이 개는 영국군의 군견이었는데 길을 잃어 아돌프 히틀러네 소대가 있던 참호로 뛰어들어 왔다고 한다. 푹슬은 매우 영리하고 붙임성이 있어 비사교적이던 아돌프 히틀러마저도 푹슬에게는 마음을 열었다고 하며, 전쟁 내내 아돌프 히틀러의 애견으로 함께 하였다. 그런데 1917년 6월, 서부전선으로 이동하던 중 어느 기차역의 역장이 푹슬을 탐내서 아돌프 히틀러에게 200마르크에 개를 팔 것을 제의했는데 히틀러는 벌컥 화를 내면서 20만 마르크를 줘도 푹슬은 팔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자 역장은 (아돌프 히틀러의 말에 따르면) 푹슬을 훔쳐가버렸다고 한다. 히틀러는 부대가 다시 이동하기 시작했을 때야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개를 찾겠다고 부대 이동을 지연시킬 수는 없으므로 푹슬을 찾지 못하고 그대로 전선으로 이동해야 했다. 이 일로 아돌프 히틀러는 매우 슬퍼하고 분노했다고 하는데(엉엉 울었다고 한다.) 이 일이 훗날 아돌프 히틀러라는 인간이 완성되는데 큰 영향을 끼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2차대전 말기에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생활하던 그는 자살하기 전 폭풍같이 밀려오는 소련군이 그의 애견을 잡아먹을 것을 두려워하여 주치의로 하여금 독극물 투여로 블론디를 죽이게 하였고, 얼마 뒤 자기자신도 목숨을 끊었다.[70]
반대로 고양이를 그리도 싫어했다. 고양이는 이기적이고 충성심이 없기 때문이란다.
6.6. 평상시 목소리
직접 들어보자. 목소리가 꽤 굵직한 편. 하지만 연설시 그 특유의 악센트는 훗날 찰리채플린 흉내내는것보다 유명한 독일어 개그로써 전세계 코미디언의 흉내 대상이 되고있다. 히틀러어를 익히면 독일어 흉내가 가능하다.
7. 재산
빈 시절만 해도 부모와 친척으로부터 받은 유산과 매달 25크로네씩 나오는 고아연금이 있었고, 본인도 포스터나 극장 간판 그림 알바 등으로 상당한 추가수입이 있었다. 그러나 오페라나 전시회 관람 등 취미생활에 돈을 쏟아붓는 통에 이내 거덜이 났고 그림 알바도 막혀[71] 엄청나게 쪼들리게 되어 노숙자 숙소를 전전하는 신세가 되었다. 이후 좀 정신을 차려서 바이에른 시절에는 웬만한 은행원보다 수입이 좋았지만[72] , 빈곤했던 시절의 기억을 못 잊어 이후 돈에 대한 집착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나치당 시절에는 당으로부터 받는 활동비와 본인이 끌어모은 후원금 중 일부를 당에 집어넣지 않고 횡령해서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대부분 장부에도 없이 익명에 현찰로 받았기 때문에, 좋은 집과 옷에 자가용[73] 까지 굴리는 그를 세무서가 작정하고 털려고 해도 '다 공무용으로 마련한 것이고 내 수입은 없다'라며 버티는 통에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나.
1920년에는 파산해서 매물로 나온 신문사 '민족의 관찰자(Volkischer Beobachter)'와 프란츠 에어 출판사(Franz Eher Nachfolger)'[74] 를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인수한 뒤 직접 사장 자리에 앉았다. 표면적으로는 당 선전기관 쯤으로 둘러댔지만 실제로는 거의 아돌프 히틀러 개인 홍보수단에 가깝게 이용했고, 그 수익금도 개인이 차지해 버렸다. 이 외에도 워낙 독선적인 아돌프 히틀러에 반발한 당 수뇌부가 그의 당내 권한을 제한하기도 했지만, 아돌프 히틀러가 오히려 탈당 소동을 일으키는 등 크게 반발하자 결국 아돌프 히틀러에게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당이 회계권까지 쥐어주는 등 이전보다 더 큰 권한을 넘겨주게 됐다. 이후 프란츠 에어에서 그의 저서 '나의 투쟁'을 출판하면서 아돌프 히틀러가 15%의 인세를 가져가게 됐는데, 초기에는 별 인기가 없었던 책이 집권 후 거의 반강매로 전 국민에게 돌려지면서 어마어마한 수익을 아돌프 히틀러에게 안겨줬다.
집권 전의 아돌프 히틀러는 위대한 지도자라기보다는 일종의 정치적 아이돌로서의 인기가 높았고, 심지어 그의 사진이 담긴 액자나 머그컵 같은 상품이 불티나게 팔릴 정도였다. 다만 아돌프 히틀러가 사진 찍히는 걸 워낙 싫어한 탓에 그의 사진은 품귀 현상을 빚고 있었는데, 무명의 사진사인 하인리히 호프만(Heinrich Hoffman)이 미국 신문사로부터 1000달러를 약속받고 몰카를 시도하다 돌격대원들에게 걸려 두들겨 맞는 일이 벌어졌다. 마침 현장을 목격한 아돌프 히틀러는 웬일로 흥미가 동했는지 그를 불러 얘기를 나눴고, 그에게 자기 사진을 독점적으로 찍을 수 있는 파격적인 권리를 약속하고 대신 그 수익 중 10%를 받게 되었다. 호프만의 사진은 대박을 터뜨려서 본인도 돈방석에 앉았지만, 이 역시 아돌프 히틀러의 축재(蓄財)에 한 몫 단단히 하게 된다. 그렇게 전속 사진사가 되고 나서 아돌프 히틀러는 호프만과 둘이서 연설 퍼포먼스를 연구하기 위한 사진을 찍으며 연설연습을 하곤 했다. 우리가 자주 보는 아돌프 히틀러의 사진 중 상당수가 바로 호프만의 작품이라고 한다.
이후 호프만은 아돌프 히틀러의 취미인 미술품 수집도 도맡게 되었는데, 워낙 금전감각이 없었던 아돌프 히틀러에게 그림 값을 부풀려 받아내는 것으로 역시 짭짤한 이득을 챙겼다. 아돌프 히틀러 사진의 인기는 곧 우표에도 실릴 정도가 되었는데, 호프만은 당시로서는 생소하게도 우표에도 초상권을 주장해서[75] 인세를 받아냈다. 우표값이야 대단치는 않았지만 워낙 수요가 많았기 때문에 이걸로 호프만은 떼돈을 벌었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는 총리 취임과 동시에 '내 급여는 전부 순직한 돌격대원 유족들의 연금으로 돌리겠다'고 발표해 큰 호응을 얻어냈다. 물론 인세와 초상권만으로도 그깟 월급 안 받아도 될 정도의 부자였지만. 위에서 쓴 대로 아돌프 히틀러는 1933년부터 온갖 핑계를 대어 단 한 푼의 세금도 안 내고 있었는데, 이 무렵 국세청은 아무리 봐도 정상으로 보기 힘든 그의 지갑사정을 파헤치기 위해 다시 한 번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 있었다. 그러나 아돌프 히틀러의 지시로 국세청과 접촉한 재무차관 라인하르트는 협상에 성공하여 '국사에 바쁜 지도자가 세금 문제로 발목을 잡혀서는 안 된다'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결국 아돌프 히틀러의 납세자 카드는 국세청에서 말소되어 아돌프 히틀러의 납세의무는 사라졌고, 그는 총리 급여를 도로 자기 계좌로 돌려버리게 된다.
이 시기 아돌프 히틀러의 돈 관리를 담당한 것은 은행원 출신의 막스 아만(Max Amann)이었다. '민족의 관찰자(Volkischer Beobachter)' 인수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후원자인 디트리히 에카르트와의 연줄로 아돌프 히틀러에게 소개받은 그는, 탁월한 금전감각을 발휘하여 당과 아돌프 히틀러의 재정을 지켜낸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출판사 인수를 비롯해 온갖 빚 독촉을 연줄로 무마하거나 후원금을 울궈내 돌려막는 수완을 발휘했고, 이런 능력을 인정받아 그는 원내총무 및 출판사 대표 등을 역임하여 아돌프 히틀러의 심복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그 역시 자기 돈주머니 챙기는 데 부족함이 없었고, 아돌프 히틀러는 결국 자기 회계관리를 부총통 루돌프 헤스의 심복인 마르틴 보어만에게 맡겼다. 보어만은 워낙 철두철미하고 입이 무거우면서도 돈 관리를 철저히 한 덕분에 아돌프 히틀러의 큰 신임을 얻으면서 나치당의 실세 중에 한명으로 떠올랐다.
패망이 가까워지자, 아돌프 히틀러는 유서에서 당과 독일 정부에 전 재산을 헌납하고 주변인들에게도 얼마씩 나눠줄 것을 약속했다. 그러나 이 유서를 집행할 보어만은 탈출 중에 전사했고[76] 이후 상속법에 따라 처리되었다. 강제로 강탈한 재산은 원주인에게 돌려졌고, 나머지 재산은 유일한 상속순위자인 여동생 파울라에게 일부 상속된 걸 제외하고는 모조리 바이에른 주정부로 헌납되었다. 독일 정부가 히틀러의 재산을 가져갔으니 결과적으로 유언 자체는 지켜진 셈.
8. 평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독재자'''이자 (유대인, 집시, 폴란드인, 러시아인, 동성애자, 종교인, 반체제 인사들에 대한) 광범위적 대학살 홀로코스트의 주동 인물이기도 하다.
9. 전쟁 후 결과로 본 아돌프 히틀러의 영향
10. 나치 추종자들의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발언
세계의 역사에서 아돌프 히틀러 총통께서 위대한 지도자이자 위대한 아리아인이라 기록되신다면 그의 선택된, 충성스러운 기사단인 우리들은 영웅의 신화가 될 것이다.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아돌프 히틀러가 나의 양심이다.
그는 하느님이다! 메시아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 이후 가장 위대한 인간이다.
아돌프 히틀러가 곧 독일이고 독일이 곧 아돌프 히틀러입니다.
나는 히틀러를 믿었다. 이 남자가 젊은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리라고 믿었다.
11. 히틀러의 라이벌
- 이오시프 스탈린 - 어제는 동지, 오늘은 적. 아돌프 히틀러는 집권 후 소련과 우호적이었던 바이마르 공화국의 외교방침을 뒤엎고 소련을 위협하면서 디스했으나, 본격적으로 서유럽에서 영-불과의 대결이 임박해지자 잠시 적과의 동침에 이르러 소련과 일시적으로 화해했다. 이렇게 손잡은 동안은 사이좋게 폴란드를 나눠먹고, 독일은 서유럽에서 신나게 프랑스-영국과 싸우는 동안 소련은 보이지 않게 동유럽에서 자신의 몫을 톡톡히 챙겼다. 하지만 아돌프 히틀러의 야욕은 서유럽에 그치지 않아서 드넓은 소련땅까지 꿀꺽하려고 했고, 결과적으로 소련을 침략하여 독소전쟁이 발발했다. 세기의 독재자로서 라이벌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으로 2차 세계대전을 스탈린과 아돌프 히틀러의 전쟁이라고 부를 만큼 가장 치열하고 결정적인 전투는 이 둘 사이에서 일어났다. 재미있는 건 두 독재자는 서로를 '존경'했다. 스탈린은 1934년 나치당 좌파와 돌격대 국방군 내 반대세력을 숙청한 '장검의 밤'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고, 아돌프 히틀러도 독소 불가침 조약 전후로 '스탈린은 볼셰비즘에서 국제 유태적인 요소를 많이 청산했다'라며 덕담을 했다. 히틀러는 전쟁 중에도 소련을 정복하고 나면 자신의 대리인으로 스탈린을 세워야 한다고 발언하기도 했다고 한다. 심지어 히틀러는 1944년 7월 20일에 암살당할 뻔했다가 구사일생한 이후엔 스탈린처럼 군부를 가차없이 숙청했어야 되었다고 후회하기도 했다. 이런 여러가지 면모를 봤을 때 두 독재자는 쌍둥이처럼 유사성이 많다. 영국 역사학자 '리처드 오버리'의 <독재자들> 참조. 다만 둘이 서로 직접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다.
- 윈스턴 처칠 - 아돌프 히틀러 자신이 인정한 최대의 라이벌. 초창기부터 마지막까지 처칠과 아돌프 히틀러는 적이었으며, 처칠의 최대 업적 중 하나가 아돌프 히틀러를 물리치고 세계를 구한 것이니 설명이 필요없다. 당연히 히틀러는 처칠을 부정적으로 여겼기에 처칠을 알콜 중독 "저질" 선동가이며 전쟁광이자 국제 유대 자본에 굴종한 금권 정치인이라고 평했다. 히틀러의 악감정이 끼어들기는 했지만 유대인 음모론스러운 부분을 제외하면 나치 독일 입장에서는 정확한 평가라고 할 수 있는 게 실제로 처칠은 술과 담배를 매우 좋아했고[82] 말솜씨 또한 대단히 뛰어났다. 그리고 전시 수상이라는 이미지에 가려져서 그렇지, 그의 사상을 놓고 보면 히틀러보다 나을 게 없는 인종 차별주의자[83] 에 제국주의자였다. 거기다 전시 수상이란 것도 결사 항전을 맹세한 점 하나 때문에 붙은 별명이고, 그의 전략적 안목은 없는 것보다도 못한 수준이라서 일선 장군들이 처칠의 계획에 맹반대하며 독자적 작전을 수립하지 않았으면 영국이 망했을 거라는 게 중론일 정도였다. 이 정도면 입만 산 저질 선동가라고 까일만 했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아돌프 히틀러 입장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최종보스. 다만 히틀러는 유럽에 신경을 쓰느라 그를 신경쓰지도 못했고, 그를 전쟁에 끌어들인 건 독일이 아닌 일본이었지만, 그가 뉴 딜 정책으로 복구시킨[84] 미국이 아니었으면 처칠은 마음 놓고 싸울수 없었을 것이다. 루스벨트는 아돌프 히틀러와 같은 해에 집권해 같은 해에 재임 중 눈을 감았다. 여담으로 아돌프 히틀러는 루스벨트가 소아마비가 아니라 매독 때문에 하반신이 마비라고 생각했다. 참고로 루스벨트가 죽은 뒤 아돌프 히틀러는 새로 대통령이 된 해리 S. 트루먼이 소련과의 대치를 우선시하여 전쟁을 멈출 거라고 기대했지만 당연히 그런 일은 없었다.[85] 물론 그의 예상이 맞긴 했지만 트루먼이나 스탈린이나 그 전에 히틀러부터 때려잡고 그 다음 서로 적대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 샤를 드골 - 아돌프 히틀러의 입장에서는 프랑스의 눈엣가시로 알려졌으며 프랑스가 나치에 점령되고 드골이 런던으로 망명하면서 나치를 프랑스에서 몰아내자며 프랑스인들에게 용기를 북돋자 아돌프 히틀러의 라이벌이자 적이 되었다. 드골은 런던에서 프랑스인들에게 고하는 성명에서 우리 프랑스를 점령한 나치를 몰아내어 자유를 되찾자는 호소를 하였다. 사실상 아돌프 히틀러에게 선전포고를 한 것이나 다름이 없으니 적대지간이나 다름이 없었다. 프랑스를 점령한 아돌프 히틀러라지만 정작 수장인 드골은 잡아내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을 만 하겠다.[86]
- 백장미단 - 나치 독일에 유일하게 항거했던 독일의 대학생 단체. 한스, 죠피 숄 남매를 중심으로 1942년에 결성되었다. 나치의 악행을 비판하고 나치의 패망을 선언하는 전단지를 뿌리면서 극악무도한 독재자와 그의 수하들에게 대항했지만, 1943년 체포되었다. 한스 숄, 조피 솔, 크리스토프 프롭스트는 첫 재판 이후 사형되었으며 나머지는 두 번째 재판 이후 사형당했다.
12. 히틀러의 협력자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베니토 무솔리니 - 무솔리니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이탈리아 왕국을 추축국에 끌어들였고 본인 역시 아돌프 히틀러와 애증관계에 그를 추종하고 지지하는 입장이자 같은 추축국의 수장으로서 유럽 침략에 뜻을 같이하는 등 같은 길을 걸어갔다. 그러나 전쟁 중에는 입장이 바뀌게 되어서 오히려 아돌프 히틀러의 돌출적인 행동에 불만을 품었고 1943년 이탈리아가 조기에 패망하고 패전국 수장으로 전락하면서 운명이 갈리게 되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이탈리아 왕국의 국가원수로서 추축국 가입과 무솔리니의 개전을 허가하는 등 위험한 행동을 벌였으나, 무솔리니가 전쟁을 초반부터 줄줄이 말아먹기만 하자 위기감을 느끼고 국왕 권한으로 무솔리니를 체포하고 전쟁을 중단한 덕분에 전범으로써의 처벌을 면했다. 그러나 결국 왕정을 유지시키지 못했다.
- 히로히토, 고노에 후미마로, 도조 히데키 - 우선 고노에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일본 제국을 추축국에 끌어들인 장본인이였다. 그리고 그 다음 총리인 도조는 제2차 세계 대전 내내 적극적으로 아돌프 히틀러와 협력했으며, 아돌프 히틀러는 도조를 환상의 파트너로 여겼다. 하지만 실상은 최악의 파트너에 가까웠다. 아돌프 히틀러는 도조가 소련을 공격해 주길 원했는데 도조는 미국을 공격했고 거기서 잡은 손을 뺐으면 좋았을 텐데 아돌프 히틀러는 미국에 선전포고를 해버렸다. 결국 두 사람은 사이 좋게 자폭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리고 히로히토는 고노에가 주도한 추축국 가입과 도조가 주도한 태평양 전쟁을 국가원수로서 허가한 인물이였기 때문에 적극적인 아돌프 히틀러의 협력자 중 한 명으로 볼 수 있다.
- 프란시스코 프랑코 -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중립을 유지했던 스페인의 수장이었지만 사실은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의 협력을 가졌고 프랑코 본인도 아돌프 히틀러와 우호적인 성향을 보였던 편이라 사실상 협력자에 속한다. 그래서인지 대체역사물(추축군이 패배했다는 실제의 거시역사와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면) 및 히스토리 픽션에서는 프랑코 정권 역시 추축국으로 참전하는가 하면 프랑코 치하의 스페인으로 나치 잔당이 도망간다는 설정으로 응용되기도 한다.(실제로도 그랬다.) 그리고 아돌프 히틀러의 협력자들 중에서 가장 행복한 말로를 맞았다.[87]
- 호르티 미클로시 - 국왕이 없던 헝가리의 섭정이자 바다 없는 내륙국의 해군 제독이라는 참으로 괴이한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88] 총리인 기울라 굄뵈시(Gyula Gomboss)를 시켜서 추축국 구성안을 내놓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헝가리가 추축국 준 메이저급의 대우를 받게 한다. 그러나 이후 전세가 기울자 헝가리 나치당이라고 할 수 있는 화살십자당 당수였던 살러시 페렌츠(Szalasi Ferenc)를 잡아 가두고 연합군에 항복하려 했지만 아돌프 히틀러가 인간병기 오토 슈코르체니에게 그의 아들을 납치하도록 해서 저지시킨다. 이후 아돌프 히틀러와 페렌츠에 의해 모든 권력을 빼앗기고 해외로 쓸쓸히 망명해야 했다. 그 결과 부다페스트는 소련군에 끝까지 저항하다 함락당했고 헝가리 여성들은 베를린에서 자행되었던 것과 같은 수난을 겪어야했다.
- 이온 안토네스쿠 - 루마니아의 총리로 2차대전이 발발하고 독일군이 루마니아에 진출하자 아돌프 히틀러의 충실한 개가 되어 독일에게 석유를 마구마구 퍼준다. 이후엔 독소전쟁에 가담하기도 했으나 소련의 맹공으로 국토가 점령당하고 안토네스쿠는 잡혀서 사형당한다.
13. 각종 음모론
유명한 인물이고, 워낙에 악명이 높은 지라 온갖 별의별 음모론들이 쏟아지게 되었다. 여자설, 생존설, 유대인설이나 외계인설, 타임슬립설 등 온갖 해괴한 음모론들이 많은데 그에 관련한 음모론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사실 그는 자살하지 않았으며 충성스런 나치당원들 및 일부 병사들과 함께 남극으로 도피해 비밀기지를 세우고 다시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설이다. 또 여기저기에 출몰하는 UFO는 이 나치 잔당의 작품이란 설도 유명. 전쟁 이후 보고된 아돌프 히틀러 목격담이나 남미 도피설도 존재한다. 이래서 나치는 멸망 뒤에도 오래도록 음모론 필수요소에 수록되는 영광을 얻었다.
영국 현지시각 2016년 1월 7일 영국 대중지인 '더 선'과 '익스프레스' 등은 최근 기밀 해제된 700쪽짜리 FBI 자료를 미국의 전문가가 검토한 결과 아돌프 히틀러의 죽음은 자작극임이 밝혀졌다고 보도했다. 해당 기사 아래 음모론 항목의 남미 은신설과 일치한다. 더 선#s-2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영국의 대표적인 황색언론발 기사이므로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는 말자.
'아돌프 히틀러 여성설'도 있는데 죽은 아돌프 히틀러의 시신을 발굴했더니 성인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골반뼈 등이 발굴되어서 남성적으로 생겼지만, 사실 여자 아니냐는 것. 하지만 이 역시 아돌프 히틀러의 아내 에바 브라운과 자살 후 화장과 매장을 한 자리에 해버렸기 때문에 뼈가 섞여서 생긴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왜 남자 골반뼈는 발견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도 제기되는데, 분노에 찬 러시아 병사들이 발굴작업 때 포격이 진행되는 도중 참호파듯 삽질을 막 해댔기 때문에 골반뼈가 훼손되었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부정확한 정보이다.
2009년 9월, 당시 소련군이 아돌프 히틀러의 벙커에서 수거해간 아돌프 히틀러의 것으로 추정되는 머리에 구멍이 난 두개골이 여성의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보도에 의하면 이 두개골의 연령이 20~40대의 여성이라고 보도된 것을 볼 때, 에바 브라운의 유골을 아돌프 히틀러의 것으로 착각하여 수거한 게 아닐까라는 추정도 해볼 수 있겠지만 좀더 두고봐야 할 듯. 에바는 알려지기로는 청산가리 자살이다. 과연 이 사실이 비밀을 풀 열쇠가 될까?
청산가리 자살설은 영화 몰락을 보면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원작이 된 아돌프 히틀러의 마지막 여비서 트라우들 융에는 이미 죽고 없었고, 그녀가 쓴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책자는 혼란, 바로 옆에 있었던 만큼 미화된 면 등이 있기 때문에 정확한 근거는 될 수 없다. 아돌프 히틀러의 자살방식은 입에 청산가리 캡슐을 물고 깨물면서 동시에 권총으로 자살한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고 있다. 의의로 권총으로 자살하는 경우 순간적인 반사행동 등으로 인해 실패하거나 중상만 입는 경우가 많다. 게다가 실패시 고통이 상당하고, 빈사상태에서 적에게 잡히는 일도 많다. 당장 같은 추축국인 일본의 도조 히데키가 이런 케이스였다. 이런 이유로 인해 확실하게 하려면 차라리 수류탄을 사용하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아마 그래서 청산가리 캡슐도 동시에 깨물었을 것이다.
그리고 NKVD(소련 KGB 전신)에선 스탈린이 아돌프 히틀러가 죽었다고 해도 믿지 못하자, 아돌프 히틀러 벙커의 부관 참모 요리사 관리 청소부까지 죄다 잡아서 4년 동안 심문하고 보고서 작성했는데(영화 '몰락'에서 나온 꺾다리 부관 오토귄셰가 무척 고생했다고 한다.)[89] 결론은 자살이다.
그 외에도 남미 은신설이나 숨겨둔 자식이 남미로 도주했다는 설 등의 음모론이 있다.
남미 은신설에 의하면 아돌프 히틀러는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이 발생할 것을 미리 예측해서 연합군의 공세를 피해 수송기를 타고 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에서 그 비행기를 고의로 격추시킨 뒤 거기부터 잠수함을 타고 아르헨티나로 도망친 뒤 마르텔플라타에 정착했다고 한다. 그 후 아돌프 히틀러는 아르헨티나에서 여생을 보내고 1962년 2월 13일에 천수를 모두 누리고 자연사했다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의 남미 은신설에는 다음과 같은 근거가 있다.
2017년 공개된 미국 CIA 기밀문서에 따르면 아돌프 히틀러는 1955년에도 생존해 있었고. 콜롬비아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러나 해당 설은 그저 어느 전직 SS친위대의 일방적인 주장이어서 설득력은 떨어진다. 특히 그의 당시 사진이라고 내세운 것은 특징적인 콧수염을 그대로 기른 상태라 더더욱 신빙성이 없다. 남은 생을 모두 숨어서 살아야할 입장인데, 적어도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콧수염은 깎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
- 아돌프 히틀러의 시체를 조사한 소비에트 연방 측에선 아돌프 히틀러가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하였다고 발표하였으나, 아돌프 히틀러의 측근들은 성병으로 죽었다고 하는 등 사인이 일치하지 않다.
- 자신은 독일이 전쟁에서 패망하고 모든 장교들에게 나가라고 지시한 뒤 그의 시체를 본 독일 장교들은 아돌프 히틀러와 비슷한 몸매에 얼굴은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구멍이 나있었고 이를 아돌프 히틀러라 생각하며 불에 태웠다는 점을 보아 자살한 것은 아돌프 히틀러가 아닌 그의 대역이었다.
- 아돌프 히틀러는 자신의 몸에 7,200만 달러의 보험을 들고 있었으나, 그가 죽은 후 그의 여동생 파울라 히틀러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 돈을 찾아가지 않았다.
- 아돌프 히틀러가 찍힌 마지막 모습이 뉘른베르크에서 SS의 배웅을 받으며 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는 모습이었다.
- 1950년 3월경에 아르헨티나에서 아돌프 히틀러로 추측되는 사람이 목격되었다는 설이 있으며 아돌프 히틀러의 아들이 아르헨티나 사람이라는 설이 있다. 실제로 독일의 신문에는 아돌프 히틀러의 아들이 아르헨티나에 생존했다는 내용이 실리기도 했다.
- 스탈린이 아돌프 히틀러 사후인 1946년에도 그를 찾아내서 제거하라는 명령을 NKVD에 내렸다. 그러면서 스탈린은 남아메리카 대륙 전지역을 샅샅이 수색하라고 명령했다.
사실 이런 음모론이 퍼진 이유는 상위 항목 중 아돌프 히틀러의 생애에도 서술되어 있듯 스탈린은 나치 잔당들이 누구 한 명을 구심점으로 모여서 일을 벌리는 것보다 아돌프 히틀러의 흔적을 찾다가 힘이 빠지도록 아돌프 히틀러는 살아있다고 거짓으로 소문을 퍼트렸다. NKVD나 KGB에 아돌프 히틀러를 찾으라던가 죽이라고 거짓 지시를 한 것도 스탈린 본인이다. 이는 효과적이여서 이제는 나치 잔당이고 뭐고 없는 현대에도 수많은 음모론을 낳게 했다.
심지어 그를 재현한 밀랍인형에서조차 도시전설이 나돌았었다. 아돌프 히틀러/기타 창작물 문서 참고.
[image] [image]
특히 2번째 사진은 머리까지 비슷해서 정말 아돌프 히틀러와 닮았다. 두 번째 사진의 인물은 코소보의 Emin Djinovci란 인물로 자신을 '''히틀러의 환생이라고 믿고 있으며''' 나의 투쟁을 들고 다니며 열렬히 나치즘을 신봉하는 위험한 사상을 지닌 인물이다. 그가 이전에 독일에 거주하다가 코소보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독일 경찰에서 고소가 불가능하지만 그가 독일로 돌아올 경우 체포될 수 있다. # 히틀러와 비슷한 외모를 지닌 유럽인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감안하면 히틀러의 외모가 그렇게 특별한 것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랑스 연구팀이 내놓은 2018년 연구에 의하면 히틀러는 1945년에 사망한 것이 확실하다고.#
14. 각종 매체의 아돌프 히틀러
워낙 유명한 인물이라서 제 2차 세계 대전을 다뤘거나 연관이 있다면 열에 아홉은 꼭 등장하거나 언급이 된다. 오컬트나 호러 장르라면 음모론 중 하나인 히틀러가 악마와 손을 잡는다는 식으로 묘사.
14.1. 역사서
히틀러에 대한 평가는 어떤 책이 나왔나로 먼저 볼 수 있을 것이다. 히틀러를 다룬 서적은 전후 수천 종이 쏟아져 나왔는데 음모론이나 별 신빙성 없거나 흥미위주의 책을 제외하고 '''진지하게''' 다룬 서적으로는 수백여종이 있고 국내에 발매된 것중 권위있는 서적은 요아힘 C. 페스트의 <히틀러 평전>과 이언 커쇼의 <히틀러 1(의지),2(몰락)>이 있다. 요하임 페스트는 전문 학자는 아니지만 독일의 저명한 방송인겸 저널리스트로 프랑크푸르트 자이퉁에서 주필과 독일 공영방송 ZDF의 현대사 편집장을 20년간 지낸 전문가이며 이언 커쇼는 영국의 역사학 교수이다. 커쇼는 수십년 넘게 준비해서 발표한 히틀러를 다룬 저작으로 영국 기사작위도 받았다. 두 작품 모두 히틀러를 다룬 저작 중에 가장 권위가 있고 자세한 대신에 단점이라면 읽기에 매우 부담스러운 분량. 페스트는 개정판 기준 1400페이지, 이언커쇼는 2200페이지가 넘는데 커쇼책은 페스트책보다 책 넓이도 넓어서 양은 거의 두배에 달한다. 두 작품 모두 읽으면 좋겠지만 하나만을 읽는다면 2000년대에 나온 커쇼책 하나만 봐도 무리가 없다. 반대로 히틀러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고 싶다면 '''실제 히틀러의 비서'''였던 트라우들 융에가 쓴 <히틀러 여비서와 함께한 마지막 3년>을 읽어보기 바란다.[90]
- 아돌프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은 현재 한국에 정발되어 있다.
- 아돌프 히틀러 사후 포로로 잡힌 아돌프 히틀러의 전속부관인 오토 귄셰와 하인츠 링에를 심문하여 아돌프 히틀러의 최후의 순간을 재구성한 '히틀러북'이 존재한다. 이는 스탈린의 개인 문서로 분류되었다가 소련 붕괴 이후 해금되었고 2003년 독일 현대사연구소의 마티아스 울과 헨릭 에벨레가 이 파일을 찾아내어 출판하였다. 한국에는 2008년 루비박스가 정발하였으나 2017년 현재 절판되었다.
- 생각의 나무에서 2008년 정발한 독일 역사학자, 저널리스트 라파엘 젤리히만의 '아돌프 히틀러: 집단애국의 탄생'이 있다. 2017년 현재 절판 상태다.
- 요아힘 페스트의 '아돌프 히틀러 평전'이 1998년에 1권, 2000년에 2권이 정발되었다. 나치 시대에 대한 의도주의 연구의 결과물로 이언 커쇼의 아돌프 히틀러 평전이 나오기 전까지 아돌프 히틀러 평전의 대표적인 물건으로 거론되었다. 페스트의 책은 70년대에 먼저 나왔고 90년대 동구권 기록이 해제되면서 개정판이 나왔지만 그래도 커쇼의 책보다 이전이며 전체적으로 무리는 없지만 현재의 연구와 사실과 약간 다른 면도 있다. 그외에 아돌프 히틀러의 최후를 다룬 요아힘 페스트의 '아돌프 히틀러, 최후의 14일'도 있는데 이것이 유명한 영화 몰락의 원전이 되었다. 후자는 2005년 교양인에서 정발했으나 2017년 현재 절판되었다.
- 이언 커쇼의 '아돌프 히틀러 평전'이 존재한다. 2010년 1월 교양인에서 정발한 걸작으로 나치 시대 전반에 대한 기능주의 연구를 집대성한 결과물인데 권당 5만 씩, 2권에 10만이라는 어마어마한 가격에 엄청난 분량의 압박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나치 시대와 아돌프 히틀러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저서. 이전까지의 히틀러 연구들이 무비판적으로 인용했던 사료들의 신뢰성을 철저히 검증하여 히틀러와 나치시대 연구에 큰 획을 그은 저서다. 사실 커쇼 이전에 출간된 히틀러 전기들은 이제 와서는 굳이 찾아볼 필요가 없을 정도다. 커쇼는이 연구로 기사작위를 받았다.
- 이언 커쇼에게 큰 영향을 미친[91] 마르틴 브로샤트 교수의 '아돌프 히틀러 국가' 역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 연구에 빼놓을 수 없는 걸작이다.
- 트라우들 융에의 '히틀러 여비서와 함께 한 마지막 3년', 알베르트 슈페어의 회고록 '알베르트 슈페어의 기억'도 한국에 정발된 상태다.
- 평전이 아닌 또 다른 저명한 서적으로는 시대가 낳은 쌍생아 스탈린과 히틀러를 동시에 다룬 리처드 오버리의 <독재자들(Dictators)>가 있다. 리처드 오버리는 역사학자로 독소전쟁을 다룬<스탈린과 히틀러의 전쟁>의 저자이기도 하며 이 부분 연구의 권위자이기도 하다.
- 만화가 김태권이 아돌프 히틀러의 집권기를 다룬 히틀러의 성공시대를 그렸으나 김태권의 십자군 이야기를 그린 작가이니만큼 평가는 심히 안좋다…
- 2019년, 퓰리처 상을 받은 미국의 작가 존 톨랜드의 아돌프 히틀러 결정판이 페이퍼로드를 통해서 출판되었다. 과거의 물건이라 이후 커쇼의 평전에 비하면 학술적인 질은 떨어지는 편이지만 히틀러가 걸어온 생애의 발자국 하나까지 죄다 살리려 한 작가의 열정이 돋보이는 작품. 이 책도 2권 짜리에 각각 4만원 구성으로 금전적 부담은 적지 않지만 문체는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히는 편이라서 히틀러에 대한 입문용으로는 괜찮다. 히틀러에 대한 흥미로운 잡썰들도 꽤나 많이 실려 있다. 그런 잡썰들을 읽는 재미도 있다. 문제는 앞서 서술되었듯, '결정판'이라는 이름이 안어울리게 지금은 꽤 낡은 책인 데다가,[92] 저자가 전문 사학자가 아니라서 사료해석 등에 한계가 뚜렷하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14.2. 창작 부문
15. 기타
- 믿기 힘들겠지만 1939년 노벨 평화상 후보자이다. 당시 스웨덴의 한 국회의원이 아돌프 히틀러를 추천해서 후보자에 올랐다고 한다. 그해 일어난 어떤 사건 때문에 수상에는 실패했다.[93]
- 대단히 뛰어난 웅변가다. 나치 독일이 성립될수 있었던 이유중 하나가 이 사람의 연설이었으며, 그의 연설을 직접 들어본 사람의 말로는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은 한번 내뱉었다 하면 그를 미워하는 사람조차 그를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마술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라고 한다. 아돌프 히틀러를 싫어하는 사람들도 아돌프 히틀러의 웅변 능력 하나만큼은 인정해준다.
- 이 웅변 능력을 키우기 위해 아돌프 히틀러는 화가지망생 시절 길거리 노숙자들을 불러모아 빵과 음료수 등을 사주고 그들에게 환호성을 질러달라는 주문을 한 뒤 연설 연습을 했다. 이게 쌓여서 아돌프 히틀러는 웅변의 달인이 된 것이다.
- 사적인 지인에게는 자기가 뭐하는 인간인지 단 한번도 내색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여동생인 파울라 히틀러조차 자기 오빠가 뭐하는 인간인지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참고인 자격으로 끌려가서야 알았다.[94]
- 모닝구 무스메가 진행하는 일본의 한 프로그램에서는 아돌프 히틀러를 세계의 위인으로 소개해 물의를 빚기도 하였으며, 전 스타크래프트 프로게이머 마재윤이 본좌 시절에 불렸던 별명 '마틀러'도, 당시 서양 팬들 사이에서는 극도의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 아돌프 히틀러의 조상이 유대계, 슬라브계와 흑인계였다는 설이 있다.# 다만 아돌프 히틀러의 유골조차 제대로 회수가 안 되어 있는 것이 현실이니 확실한 증거가 나오기 전까진 너무 진지하게 믿지 말자.
- 빅데이터 인문학의 저자들이 구글 엔그램 뷰어를 이용해 지난 200년 동안 가장 유명했던 사람을 선정했는데 히틀러가 1위였다. 1위 아돌프 히틀러, 2위 칼 마르크스, 3위 지그문트 프로이트, 4위 로널드 레이건, 5위 이오시프 스탈린, 6위 블라디미르 레닌, 7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8위 찰스 디킨스, 9위 베니토 무솔리니, 10위 리하르트 바그너순이었다.[95]
- Epic Rap Battles of History에서는 다스 베이더와 세번이나 랩 배틀을 벌인다. 그런데 시즌 1에서는 카보나이트에 갇히고 시즌 2에서는 랜코어 핏에 떨어진다. 게다가 시즌 3에서는 광선검으로 반으로 베인다. 시즌 4 예고에서는 유령으로 부활하고 자신이 날 수 있다며 히히덕거리다가 고스트 버스터즈에게 걸려서… 사실 서양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매우 안 좋은 취급받고 있으니 어찌 보면 대우 차이가 당연할 지도.
- 디시 같은 곳에서는 흔히 히총통이라 불린다. 이는 유명한 짤방으로 쓰였던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일보에 실린 기사 제목 "히總統의 대사자후"에서 따온 것. 원본 링크는 짤렸지만 1935년 동아일보에 같은 기사가 있다.
- 유명한 게 마약 허용이다. 대표적으로 마약 때문에 연합군에게 제공권을 미친듯이 제공해준 인물이 다름아닌 헤르만 괴링. 원래 이런 인물이 아니다.[96] 아무리 우울증 때문이라지만 마약을 너무 오래 한 나머지 1차대전 때의 건강했던 정신이 갈수록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다 전범 재판 때 오랜만에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살도 빠졌다. 이건 독일군이 볼 때는 기적[97] 이나 다름없지만 이미 전쟁은 끝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히틀러도 갈수록 제정신이 아니게 되는데, 이 사실을 장군들이 전혀 몰랐다고 한다. 그런데 히틀러는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의사를 찾아가 상담을 해서 처방 받은 약이 바로 마약이다. 그로 인해 그렇지 않아도 불안정한 총통 정신상태가 더 악화되어서 며칠전에 전멸한 부대가 아직 있다고 믿거나, 안그래도 재배치돼서 저 먼 서부전선에서 뼈빠지게 연합군의 공격을 막고 있는 부대를 동부전선에 있다고 생각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 대한민국의 교육과정 중 6차에서는 사회책에 그가 설명돼 있었으나 7차에서는 그는 거의 언급이 없고 2차 세계대전 페이지에서는 무솔리니만 나와서 기묘하게 되었다. 그후 2007 개정에서 다시 아돌프 히틀러가 부활했으나 2009 개정에서 사라진 걸로 알려져있다.
- 오늘날 아돌프 히틀러의 유품은 매우 비싼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
- 아돌프 히틀러의 근무복 외투는 히틀러 사후 모스크바에 소재한 중앙 육군 박물관에 전시되었다. 그런데 이 외투가 이걸 입는 관람객을 모두 심장마비로 죽여버려서 그렇게 죽은 사람이 39명이나 되었다. 이것 때문에 박물관 당국에서 과학자들에게 지시해 이 외투를 조사하라고 했다.
- 아돌프 히틀러와 닮았다는 이유만으로 폭행당해 실명된 고양이도 있다. #
- 소문으로만 들리던 아돌프 히틀러의 고환이 하나라는 이야기가 연구끝에 사실이었음이 밝혀졌다. 링크 소문이라고 쓴 것은, 당시 독재정권하에서의 독일이 위대한 총통각하가 짝x알이라는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했을 리가 없으므로. 의학검진 자료에 의하면 아돌프 히틀러의 이러한 신체적 결함은 후천적인 것이 아닌 선천적인 특성이었다고 한다. 심리학자들은 아돌프 히틀러의 뒤틀린 여성관과 지나친 마초성의 추구가 어쩌면 본인의 신체적 결함에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내놓았다.[98]
- 소련군이 시신에서 발굴한 골반뼈가 말해주듯 엉덩이가 여자처럼 크고 이뻤다고 한다. 다만 이것이 머리에 총상 흔적이 있는 여자의 두개골과 더불어 히틀러의 진짜 시체인지는 지금도 명확하게 밝혀진 게 없다.
- 히틀러가 유태인이라는 근거를 히틀러라는 성에서 유추한 NGC 다큐멘터리가 있다. 내용은 히믈러나 히슬러, 히들러 등의 성은 흔한데 히틀러라는 성은 독일-오스트리아 역사를 뒤져봐도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 착안해서, 공문서에서 히틀러라는 성을 추적했는데 전유럽과 미국을 뒤져도 2차 대전경에 미국에 이민간 2백여명의 유태인들이 히틀러라는 성을 다른 성으로 변경해 달라고 미국법원에 신청한 기록만 발견된다는 것이었다. 물론 이 결과만으로 히틀러가 유태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상당한 의심을 갖게 한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 일각에서는 유럽의 죄를 짊어지고 죽은 예수같은 존재라는 드립이 있다. 히틀러를 찬양하는 것은 아니고, 히틀러와 추축국의 악행이 강조되면서 연합국 측 식민제국들의 악행들이 묻히는 것을 비꼬는 의미다.
- 히틀러 생가는 그가 그토록 싫어했던 '이민족' 난민 재정착 센터로 유용하게 재활용됐다고 한다. #
- 히틀러의 선 채로 두 손을 모은 자세는 '어색해서'가 아니라 일종의 버릇이다. 실제로 히틀러가 찍힌 사진이나 영상에서도 두 손을 모은 모습을 흔히 찾아볼 수 있으며(ex. 프랑스 침공 항목 에펠탑 배경으로 찍은 사진), 서구권에서는 이 자세가 나름 나폴레옹의 '주머니 손' 같은 트레이드 마크로 인식되는 듯. 일설에는 히틀러가 유전적 결함으로 고환이 하나였기에 손으로 가렸다는 주장이 있었고, 훗날 실제로 잠복고환이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 때문에 저런 버릇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 뿐만 아니라 전간기와 전쟁 당시에도 히틀러의 손 모으는 버릇은 유명했으며 당시 사람들이 남긴 기록 중에 그가 독신인 점을 들어 "언제나 쓰지도 않는 걸 가린다."라는 조롱도 있었다.
- 히틀러의 동복 여동생인 파울라는 오빠가 그렇게 극악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고 한다. 그녀와 히틀러의 사이는 좋지는 않았지만 여러 정황으로 보아 아돌프 히틀러가 누이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고 추측된다.
- 히틀러는 잔인한 행각과는 별개로 자신의 옛날 지인들을 상당히 챙겨준 편이다. 에드워드 블로흐는 어머니를 사망 직전까지 치료해줬던 가족 주치의였다. 아돌프 히틀러는 오스트리아 합병 당시 특별히 그를 프랑스로 떠나도록 배려했다. 독일 제국 육군 보병대위 출신인 휴고 구트만은 과거 아돌프 히틀러가 1급 철십자훈장을 받도록 추천서를 써준 사람이다. 그 인연으로, 유대인이었던 그가 체포되자 아돌프 히틀러가 지시를 내려 석방했다. 전우이자 상관이었던 에른스트 헤스도 살려뒀다.
- 슈코르체니와 한나 라이치는 카미카제와 비슷한 자살 폭탄 공격을 기획한다. 히틀러와 괴링은 이에 반대했고 기각된다. 이 계획은 카미카제와는 달리 탈출과 후퇴 수단이 있긴 했다.
- 한때 아돌프 히틀러의 친모 클라라 퀼츠가 아돌프 히틀러를 낙태할까 고려하다가 낙태를 하지않고 낳았다는 루머가 있었다. 하지만 이는 전혀 사실이 아니며 그의 모친 클라라는 아돌프 히틀러를 끔찍하게 아끼고 사랑해주었다. 그녀의 주치의 였던 에드바르트 블로흐 역시도 그녀는 낙태를 고려해야할만큼 건강이 악화된 상태가 아니었다고 증언했을 정도.[99]
- 일본만화에서는 히틀러를 군부독재자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히틀러는 직업군인이 아니며, 쿠데타 없시 독재를 이룩한 인물이다. 권력의 획득과정은 일본식 군부보다는 소련 공산당이 정권을 얻어가는 과정과 유사하게 당을 중심으로 사람을 결집하고, 당이 중심이 되어 사회전반을 장악했다. 특히 군부에 대한 통제와 사회통제를 강화하기 위해서 친위대를 창설하였는데, 이 친위대는 소련식 정치장교의 형태와 유사하다[100]
15.1. 유럽 및 영미권
'''서구권에서는 아돌프 히틀러, 나치에 대한 반감이 상상을 초월한다.''' 독일에게 점령당했던 유럽 국가는 더욱 그렇다. 물론 과거 독일 식민지였던 나미비아나 탄자니아 같은 아프리카의 국가들 역시 과거 식민지배국의 독재자였다는 이유로 엄청난 반감을 품고 있지만, 안타깝게도 이쪽은 국제적으로 묻히는 편.[101] 그런데 나미비아는 같은 이름의 정치인이 있다!# 이름과 별개로 높은 지지율을 얻고 있다고 한다. 당연히 나치즘이나 비슷한 류의 인종우월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은 아니고 오히려 반(反)아파르트헤이트 운동가였다.아돌프란 이름은 이제 못 쓰잖아? 그가 죽은 이후로 그 이름도 같이 죽은 거야.
'''누구도 이제 자기 자식 이름을 '아돌프'라고 지을 수 없어.'''
- 리키 저베이스
독일 등을 비롯한 대다수의 서구권 국가들에서는 히틀러의 '히'도 꺼내지 못하도록 하며, 화두에 오르더라도 철저하게 부정적인 시각으로만 일관한다. 미화를 했다간 문자 그대로 맞아죽을 수 있으며 고소까지 당할 수 있다. '''희화화도 제정신으로는 불가할 지경이다. 이 지역이 독일에게 직접 피해를 받았고, 20세기 중반의 국제세력구도에 작용했던 복잡한 국제정세가 개입된 탓이다.''' 일부 밀덕후들이 한국에서 하듯 '히총통님 간지네요' 같은 소리를 했다간 그 자리에서 현지인에게 두들겨 맞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다.
오스트리아나 체코, 폴란드 등에서는 아예 나치 관련 상징을 기재하는 것부터 불법으로 간주하고 있다. 물론 루마니아와 헝가리, 불가리아처럼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추축국 편에 서던 나라들도 있었지만[102] 정작 이들 국가들에서도 아돌프 히틀러는 네오나치, 스킨헤드 같은 족속들이 아니고서는 대개는 영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이 국가들에서조차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는 전범 내지 학살자로 비난받는 실정이다.[103][104] 실제로 동유럽 지역을 여행갔던 한 서방국가의 관광객은 불가리아의 흑해 휴양지 바르나에서 니네 나라 아돌프 히틀러 나치놈들이랑 손잡고 깡패짓했잖아.라고 말했다가 현지인에게 멱살 잡혀 '우리나라 역사 잘 알지도 못하면서 깡패라고 입 나불대지 마라', '제국주의 시대 아프리카, 인도 등 식민지 사람들 학살하고 잔혹하게 착취한 주제에 니들이 제2차 세계 대전 때 나치 강압에 끌려간 우리나라를 비난할 자격이 되느냐?', '앞으로 그 살인자 이야기 꺼내지마라. 우리도 그놈한테 반강제적으로 끌려갔던 아픈 역사 있다.'라며 욕을 얻어먹은 적도 있었다. 이 관광객은 심지어 현지민에게 말을 잘못해 욕을 얻어먹은 뒤 이후 바르나를 떠나 벨리코투르노보와 소피아 등 불가리아 다른 도시에 가서 제2차 세계 대전과 관련된 역사 이야기를 했어도 그 곳의 불가리아 현지민들조차도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를 비난하거나 살인자, 야만인이라고 냉정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불가리아는 나치의 압력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추축국에 합류해 피해를 입은 것과는 별개로 제2차 세계 대전 초기에 나치독일의 지원으로 제2차 발칸전쟁에서 루마니아로부터 빼앗긴 도브루자 지역을 수복하는 등 어느 정도 실익을 얻기도 했었지만, 여기에서도 아돌프 히틀러는 네오 나치나 스킨헤드 등 나치즘 밎 전체주의를 추종하는 일부 현지의 극우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학살자, 전범으로 비판받는 등 긍정적인 평가를 찾아볼 수 없다.
'''자유주의 진영과 공산주의 진영에서 한 목소리를 내며 비난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이기도 하다.''' 안 그래도 이 두 진영은 2차대전 시절에 독일이랑 죽어라고 싸우기도 했다.
2012년에는 미국에서 자녀 이름을 '''히틀러'''라고 지은 부모가 법원에 의해 양육권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
라이온 킹의 스카의 캐릭터송인 Be Prepared에서도 이 인간을 연상시키는 장면이 나와서 독일에서 논란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오히려 '''독일버전이 문제의 그 장면을 가장 진지하게 연기했다.''' 자세한 것은 Be Prepared 문서 참고.
트랜스포머의 여주인공이었던 메간 폭스는 트랜스포머의 감독 마이클 베이를 "아돌프 히틀러 같은 인간"이라고 비난했다가, 이게 언론에 알려져서 트랜스포머 시리즈에서 단칼에 짤렸다. 아무래도 트랜스포머의 제작자가 유대인 스티븐 스필버그였으니 그 발언에 대한 분노가 더했던 듯. 물론 굳이 스필버그가 아니었다고 해도 아돌프 히틀러 욕은 상당히 심한 것이기 때문에 결국 짤렸을 것이다.[105]
영화감독 라스 폰 트리에는 칸 영화제 기자회견에서 '''"나는 히틀러를 이해한다. 동정한다. 그의 심정이 이해가 간다."'''고 발언했다가 칸 영화제 블랙 리스트에 올라 몇년간 영화 출품을 금지 당하고 초청도 받지 못 했다. (지금은 해제)
히틀러(혹은 그를 필두로 형성되었던 단체)에게서 비롯된 말도 못하게 많은 사정들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무지하게 민감한 소재다. 심지어 위에 언급된 동화책 '깊은 밤 부엌에서'는 전체적인 내용은 어린이가 어른이 모두 잠든 밤중에 부엌에서 모험을 펼친다는 유쾌한 이야기이고, 아돌프 히틀러 얼굴을 한 요리사들도 사실은 좋은 사람들이라고 묘사되었음에도 미국의 여러 공공도서관에서 '''비치 금지''' 조치를 당했다.
영국의 SF 드라마(영드) 닥터후 뉴 시즌 6 에피소드 8 제목이 "Let's Kill Hitler"라는 거창한 거라서 팬들을 설레게 했지만, 이 에피소드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쩌리 취급당했다. 죄값을 치르지 않고 죽은 역사 속 악인을 처단하는 미래의 시간법무부에 의해 죽을 뻔했다가 집무실로 날아든 타디스 덕분에 간신히 살았지만 닥터가 널 구한 건 그냥 사고였을 뿐이라고 하질 않나, 권총이라도 뽑아서 총질하려니까 2000년 동안 산전수전 다 겪은 전직 로마군 백인대장에게 안면을 정면으로 강타당한 후 벽장에 갇히질 않나. 그리고 갇힌 채로 그냥 잊혀졌다. 그런데 이건 '스티븐 모팻이 의도적으로 SF 세계의 오랜 클리셰를 차용했기 때문에 그렇다'는 분석이 있다. 해당 게시물 참조 바람
영국의 코미디 집단인 몬티 파이선에서도 미스터 힐터라는 이름으로 희화화를 한적 있다. 이 에피소드의 방송은 1960년대이다. 2차대전 끝난지 30년도 채 안 되던 시기다.
아돌프 히틀러의 딸이라는 호주 작가의 작품에서는 딸이 패전 후 호주로 떠나게 된다. 이 작품에서 아돌프 히틀러는 자기 딸을 절름발이라는 이유로 냉대한다. 아버지라는 작자가 답이 없다.
Hearts of Iron III의 튜토리얼에서는 이상한 콧수염을 가진 그림 못 그리는 체구가 작은 사람이 나온다. 이름은 나오지 않지만 튜토리얼에서의 대사를 보면 본 문서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벙커에서 진행되는 마지막 튜토리얼이 끝나면 그가 다른 방으로 이동한 후 총소리 한 발이 들렸다고 나오고, 정말 못 그린 그림만 남았다고 나온다.
A.J.P 테일러의 <제2차 세계 대전의 기원>은 지금에 와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배경에 대한 연구서들 중에서 고전 대접을 받는 서적이지만 초간본이 나온 1962년에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아돌프 히틀러는 진지하게 전쟁을 할 생각이 없었고, 단지 영불 양 국가에 퍼진 독일의 처지에 대한 동정과 전쟁기피 분위기를 활용하여 공갈외교로 독일의 이익을 확보하려고 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에 저런 소리를 했으니 당연히 폭풍까임.
독일 제3제국이나 아돌프 히틀러에 대한 현대 독일인의 인식에 대한 관련 기사(이코노미스트 원본)
독일인 역사학자 한스 몸젠은 나치당이나 아돌프 히틀러에게 잘못을 뒤집어씌울 게 아니라 독일인 자신들의 동조한 점을 인식하며, 한편으로는 아돌프 히틀러를 나약한 독재자로 보기도 했다.
현재에는 특유의 악센트로 이미 코미디 재료로 격하되었다. #
15.2. 아시아
직접적인 피해를 받지 않은 아시아권에서는 히틀러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이 비교적 덜하지만, 대신 나치 독일의 동맹국이던 일본 제국이 제대로 깽판을 쳤기 때문에 역시 시선이 영 곱진 않다. 그러나 나치의 ㄴ자, 히틀러의 ㅎ자만 꺼내도 부정적인 반응 일색인 유럽권에 비한다면 아시아권의 인식은 우호적이지는 않더라도 중립적인 편에 가깝기는 하다. 반대로 서구권에서 일본 제국이나 도조 히데키의 이름 역시 막연히 '악랄한 전쟁광' 정도 인식에 그칠 뿐 아시아인들이 보이는 격한 반응에 비하면 다소 무른 면이 있고. 어쨌거나 인간은 자신들이 직접 겪은 일에 더 공감하고 분노하는 법이다.
이러한 인식 차이의 원인을 구체적으로 따져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어쨌거나 아돌프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아시아 국가들을 직접적으로 적대하지도, 침공하여 학살하지도 않았다. 나치 독일의 관심사는 어디까지나 아르한겔스크-아스트라한 선으로 대표되는 유럽에서의 레벤스라움 건설이었고, 그 외부에 있는 아프리카나 지중해 연안은 이탈리아 왕국 맘대로, 아시아는 일본 제국 맘대로 하라는 쪽에 가까웠다. 물론 이건 히틀러가 흑인이나 동양인 등 유색인종에 친화적이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오히려 나치 이데올로기에서 동양인은 굳이 귀찮게 찾아가서 박멸하거나 지배할 만큼의 가치도 없는 열등한 인종 정도였다는 이야기이지만. 사실 나치의 공격적인 이념 특성상 소위 레벤스라움을 건설하고 나면 또 태도가 어떻게 돌변했을지는 모르는 일이겠으나, 결국 나치 독일은 아시아까지 도달할 역량이 없었으며 실제로도 전성기에도 우랄 산맥은 커녕 캅카스 산맥조차 넘지 못한 채 패전했다.
둘째, 당대의 정치외교적 관점에서 아시아가 나치 독일에게 부정적일 이유가 없다. 당장 일본 제국은 나치 독일의 우방이었고 중화민국 역시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의 예에서 보듯 한동안 나치 독일과 밀월관계를 유지했다.[106] 게다가 인도와 파키스탄의 경우 말 그대로 '''연합국의 일원인 대영제국의 식민지'''였으며, 실제로 추축국의 힘을 빌어 독립을 쟁취하려던 찬드라 보세 같은 인물도 있었다. 동남아시아에서는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비롯한 수많은 국가들이 소위 인도차이나 연방이라는 이름 하에 '''연합국의 일원이던 프랑스의 식민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인도네시아 또한 '''연합국의 일원이던 네덜란드의 식민지배'''를 받았다. 이들에게 추축국의 악행은 머나먼 유럽에서의 일이었지만 연합국의 악행은 당장 피부로 더 와닿는 상황이었고, 히틀러나 추축국의 죄업을 옹호하지는 않을지라도 '그놈이 그놈'이라거나 ''''우리가 제국주의에 당하는 건 시대상이 그런 거고 지들이 유럽에서 당하는 건 인류사의 죄악이냐?'''' 정도의 냉소적 인식은 당연히 생길 수밖에 없다. 어찌 보면 소련에 당했던 발트 3국이 나치 독일에 비교적 우호적인 입장인 것과 비슷하다 하겠다. 사실 이런 면에서는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던 한국이 특별한 케이스에 가깝다.[107]
셋째, 식민지배의 후유증과 경제적 빈곤에 시달리던 아시아 국가들에게 파시즘의 대중 동원력과 응집력은 매력적인 대안이었다. 당장 장제스의 중화민국 역시 파시스트 국가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권력 유지와 체제 개혁을 위해 부분적으로 파시즘의 광신적 속성을 받아들였다는 평가를 받고 있을 정도이니까. 게다가 전간기 민주주의 국가들이 대공황이니 뭐니 헤매는 도중 히틀러의 나치즘과 스탈린의 공산주의가 나란히 약진했던 모습은, 전후 강력한 독재권력을 유지하면서 산업화를 시도하려 했던 많은 신생국가의 지도자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물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시점에서 파시즘은 공공의 적 취급을 받았기에 대놓고 파시즘을 추구한 국가는 없었다. 그러나 히틀러의 파시즘적 통치 특성에서 일부분을 빌려 와서 써먹거나, 매스미디어를 통해 이름표만 뗀 채 파시즘에 내재된 방법론들을 은연중에 미화한 케이스는 상당했고, 이러한 교육에 노출되었던 사람들이 히틀러나 나치 논리의 부정적 측면이 갖는 심각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함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게다가 일본 제국 치하에 있던 국가들은 정치논리에 따라 히틀러를 위대한 영도자로 묘사한 모습에 익숙했을 테니...
넷째, 갈 곳 잃은 사회불만의 표출과 간지. 멀리 갈 것 없이, 실제 역사 속에서 히틀러와 나치당이 집권하기까지의 과정만 봐도 무슨 말인지 감이 올 것이다. 물론 이것만이 이유라기보다는 앞서 언급한 원인들과 조화를 이루는 경우가 많다. 즉, 서구권에서는 실제로 자기네 부모, 조부모 세대가 나치에게 당한 경우가 많은지라 아무리 그래도 네오 나치 급의 꼴통들이 아니면 히틀러를 옹호하는 쪽으로는 잘 안 가지만, 아시아권은 아무래도 당한 게 없다 보니 (특히 도덕관념이 아직 정착되지 않은 저연령층이나 독일군의 강함을 찬양하다가 흑화한 밀덕들이) 비교적 손쉽게 친나치, 친히틀러적인 스탠스로 빠져들기 쉽다.[108] 실제로 그런 발언을 했을 때 사회적 지탄의 강도에도 분명한 온도차가 있고. 추가로 역사 청산이 제대로 되지 않은 일본 한정으로, 연합국을 깨부쉈던 화려했던 과거와 극우 군국주의에 대한 향수를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데 쓰이기도 한다.
15.2.1. 대한민국
히틀러가 생존해 있을 때 그를 직접 만난 한국인은 현재까지의 기록에 따르면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손기정이 유일하다. 손기정은 대회에서 우승하고 그 다음날 아돌프 히틀러를 친견했으며, 그 소감을 먼 훗날 자서전에 남기기도 하였다. 이 해 8월에는 한반도 남부지방에 홍수 피해가 커서 2천여 명이나 되는 사망자가 발생했었는데, 이때 히틀러가 다롄 주재 총영사를 통해 수재의연금 3만원을 보내기도 했다.의연금을 가져온 총영사와의 인터뷰 기사(10월 21일), 히틀러가 낸 의연금 액수를 명시한 기사(11월 6일)[109]
한국은 독일에 의한 직접적인 피해는 받지 않은 관계로 전성기 시절의 마재윤이 마틀러로 미화되는 등[110] 취급이 자유로운 부분이 일부 있다. 사실 말이 자유로운 취급이지, 단순히 홀로코스트 등의 만행 문제뿐만 아니라 앞서 얘기한대로 한국을 식민 통치한 일본 제국의 동맹국이었던 만큼 한국에서도 좋은 취급을 받기는 힘들다.[111] 하지만 의외로 '''일제강점기에는 매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물론 일본의 동맹국인 독일의 정치인이다보니 꺼림칙한 부분은 다 검열돼서 카리스마있는 애국자[112] 로 여겨졌으며, 특히 분열된 독일을 하나로 통일시켜 외세에 맞섰다는 점 때문에 조선인 대학생들이 나의 투쟁을 읽기도 했다고.
물론 현대엔 그런 거 없다. 한국에서 아돌프 히틀러의 위상은 대략 '독재자라는 것은 아무도 부정하지 않지만 각종 매체에 등장하는 것에는 노골적인 옹호나 미화가 없으면 크게 문제삼지 않고, 농담의 영역에서는 거의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다[113] ' 정도인데, 상기된 바와 같이 '''영미권이나 유럽권에서는 설령 사용자에게 악의가 없었다 해도 이런 취급이 심각한 문제를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크다.'''[114]
나무위키도 아돌프 히틀러 미화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엔하위키 - 리그베다 위키 시절부터 '''아돌프 히틀러가 그나마 낫네''', '''아돌프 히틀러가 천사로 생각될 정도로 일본군이 잔혹했다''' 등의 서술이 여기저기 있다.[115]
2차 대전 베를린을 모델로 나치 깃발과 의상을 활용한 술집(신촌에 있었다.)/카페가 주한 독일 대사관과 이스라엘 대사관의 항의를 받고 컨셉을 수정한 사건도 있다. 그런데 미국에서도 나치 깃발로 도배한 호프집 사진이 국내 인터넷으로 퍼진 바 있는데…
90년대 초반 KBS에서 방영한 코미디 프로그램 '쇼 비디오자키'에서는 심형래가 출현하는 '병사 심틀러'라는 코너가 있었다. 심형래가 독일군 병사(옷을 입은) 심틀러로, 조금산, 김학래 등과 열연. 물론 얼간이 군대로 나와 아돌프 히틀러나 나치를 비꼬는 것이라 그런지 독일이나 이스라엘 대사관에선 별 문제 삼지 않았다. 더불어 적군으로 나오는 존재들이 베트남 저항군이라든지 미국 원주민들로 나오는데 이들에게 된통 당하는 게 많았다.
2000년대 초반 코미디언 심현섭이 모 제과 CF를 촬영할 때 아돌프 히틀러가 연설하는 장면을 패러디했다가 독일 대사관으로부터 항의가 들어오기도 했다.
KBS2의 김승우의 승승장구에서 양동근이 자신이 만들었던 유행어 "한 턱 쏴!"를 설명하면서 게스트와 방청객들까지 한번에 '''로마식 경례'''를 했다. 자막까지 "아돌프 히틀러도 했던 로마식 경례"라고 넣으면서. 사실 나치식 경례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이건 로마식도 아니고 분명한 나치식 경례였다. 나치 미화 의도가 아니라 어조를 설명하고자 한 것이었지만, 해외 사람들이 이걸 봤다간 난리날 거다.
아돌프 히틀러 희화화에서는 약간 벗어난 이야기지만, 어느 인터넷 소설에서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기가 주변 사람들을 다 죽이자 "장하다 김아돌프 히틀러"라고 산부가 말하는 내용이 인상적이라서, "장하다 김XX"라고 하는 밈이 있다.
2010년대를 거치고 나서는 "히틀러와 나치가 유럽의 모든 악명을 가져갔고 제국주의의 만행을 다 덮어버리고 이미지 세탁 해줬으니 유럽 국가들은 나치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거 아니냐?"라면서 2차대전 이전의 유럽 열강들의 제국주의를 비꼬는 경우도 종종 생기고 있다. 이 농담은, 나치 독일과 히틀러를 옹호하는 게 아니라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열강들도 제국주의 시절에 야만적인 만행을 저지른 것이 나치 독일 못지 않게 심각한데도 거의 언급되지 않는 것에 대한 비꼼이다. 둘 다 나쁜 건 매한가지인데 나치 독일만 욕을 먹고 다른 유럽 열강들은 욕을 안먹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것이다.[116]##
15.2.2. 일본
일본의 경우 나치는 주로 게임이나 특촬물 등 창작물의 악역에 쓰인다. 가령 쇼커 전투원의 경례가 나치식 경례인데 "하일" 이런 게 아니라 그냥 '''이 이'''거리기만 한다. 이들은 일반적인 성인 남성보다 훨씬 강력하다는 설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동네북'''이다.
또한 특촬물 악역 중에서는 아예 나치 간부를 형상화하기도 하며 그 중 하나가 바로 불가사리 아돌프 히틀러이다. 물론 나치 이미지를 많이 써먹고 이용해 먹긴 하지만 결과적으로 '''주인공들한테 맨날 얻어터지는 역할'''을 할 뿐이기 때문에 독일 대사관이나 이스라엘 대사관에서 아무 소리도 없다.
일본의 유명 게임개발업체인 SNK에서는 메탈슬러그 시리즈라는 슈팅게임을 개발했는데 여기서는 나치를 패러디한 모덴군을 적으로 활용했다. 그러니까 주인공들의 목적이 이 가상의 나치인 모덴군을 때려잡는 것이다.
일본 극우파들의 경우 히틀러를 추종하는 무리들이 적잖게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2014년 4월 20일 일본 극우들은 일본과 군사동맹을 맺었던 나치독일을 기리는 것은 당연하다.며 나치 깃발을 들고 거리행진을 하기도 했었다. 관련 기사1 관련기사2
16. 어록
'''"국민들은 이해력이 부족하고 잘 잊어버린다."'''
'''"국민은 아둔하여 무조건 단순한 것을 좋아한다."'''
'''"국민에겐 큰 거짓말이 잘 먹힌다."'''
'''"선전에 따라 국민들에게 천국을 지옥으로, 지옥을 천국으로 여기게 할 수 있다."'''
'''"거짓말을 하려면 될 수록 크게 해야 한다. 그럴 수록 국민은 쉽게 믿을 것이다."'''
'''"모든 유태인들은 하나의 인종인 것은 틀림없으나 인간은 아니다."'''
'''"인종적 오염을 거부하는 국가가 세계를 지배할 것이다." - 나의 투쟁 중'''
'''여자는 약한 남자를 지배하기보다는 강한 남자에게 지배당하는 것을 좋아한다.'''
'''이성을 제압하여 승리를 거두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공포와 힘이다.'''
'''모든 효과적인 선전은 요점을 크게 제한하고, 슬로건처럼 이용하며, 그 말에 의해 목적한 것이 마지막 한 사람에게까지 떠올려질 수 있되, 그 참 의미를 알 수 없도록 해야 한다.'''
'''독일의 운명은 나에게 달려있으며 나만이 독일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
'''삶이란 뭐요? 삶은 곧 국가요. 개인은 어떻든 죽어야 하지 않소?'''[118]
'''우리는 우리 앞에 독일이 있음을 알고, 독일은 우리와 함께 행진하며, 독일은 우리를 따른다.'''[119]
'''우리의 사회복지제도는 그저 단순한 자선행위가 아닙니다. 우리는 부자들에게 "제발 가난한 사람들에게 뭔가 주시죠"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대신 우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독일 국민 여러분 서로 도우십시오. 모두가 도와야 합니다. 가난하든 부유하든, 항상 당신보다 더 불행한 상황에 빠진 (독일)사람이 있었다는 걸 명심하십시오, 그리고 독일인으로써 같은 동포인 그 사람을 돕고 싶어해야 합니다."'''[120]
[121]
'''누구나 전쟁에서 자신이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신은 살아남아서 죽은 전우들을 묻게 될 것이라고만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122]
'''승리한 군대라도 죽은 병사들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123]
'''내가 유일하게 배우지 못한 말, 그것은 바로 항복이라는 말이다.'''
'''우리 독일 역사에 항복이라는 단어가 적히지 않을 것을 온 세계에 선언하노라.'''[124]
'''나의 불멸의 업적과 나의 이름이 역사에 길이 남을 것임을 알고 나는 기쁘게 죽을 것이다.'''[125]
'''국가의 권위는 절대 스스로 종결되지 않는다.'''
'''어떤 종류의 폭정이라 하더라도 불가침화되고 신성화된다. 만약 국가의 권력수단이 민중을 폐허로 인도한다면, 저항은 모든 개개인 시민의 권리일뿐만 아니라, 의무이다.'''
- 나의 투쟁 중.
'''외교의 목표는 국가의 실질적인 생존이 되어야지, 절대로 영웅적인 몰락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 목표에 이르는 모든 길은 선한 것인데 반해, 그 실패는 범죄적인 직무유기로 봐야 한다.'''[126]
[127]
- 나의 투쟁 중.
'''결사 항전하라. 후퇴는 용납되지 않는다. 철수란 이쪽에서 맞게 될 멸망을 저쪽으로 이동시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128]
'''삶은 나약함을 용서하지 않는다.'''
'''민주주의 옹호자를 나치당원으로 만드는 것보다 공산주의자를 나치당원으로 바꾸는 것이 훨씬 더 쉽다.'''[129]
'''"스포츠적이고 기사다운 시합은 인간의 최고의 자질을 깨웁니다. 그것은 이해와 존중 안에서 전투원(선수)들을 분리시키지 않고, 오히려 단합시킵니다. 그것은 또한 평화의 정신 안에서 국가들을 결속시키는 것을 돕습니다. 그것이 올림픽 성화가 죽어서는 안되는 이유입니다."'''
- 1936 베를린 올림픽 개회사.[130]
'''전쟁이 목적이 아니라면 어떤 동맹도 무의미하며 무가치하다.'''
그리고 히틀러는 그 말 대로 베니토 무솔리니 치하의 이탈리아 그리고 도조 히데키와 히로히토의 일본 제국과 추축국 동맹을 맺고 전세계를 상대로 침략 전쟁을 벌였다.
'''독일은 세계 최강국이 되거나 사라지거나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히틀러의 말 대로 전쟁에서 패전한 나치 독일은 완전히 사라졌다.
'''큰 거짓말이 잦아지면 곧 사실이 될 것이다.'''
'''만약 내가 오늘 혁명가로서 여기 서게 된다면, 그것은 혁명에 맞선 혁명가로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