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틀러 유겐트

 


1. Hitler-Jugend
1.1. 유겐트 단검
1.2. 히틀러 유겐트 출신의 유명인물
1.3. 기타 매체에서의 히틀러 유겐트
1.4. 유사기구
1.4.1. 현대 이전
1.4.2. 현대
2.1. 개요
2.2. 역사
3. 제노기어스의 용어 '유겐트'


1. Hitler-Jug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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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틀러 유겐트 모집 포스터("우리에게로 오라! 히틀러 유겐트에 입단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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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 유겐트의 로고
나치 독일의 청소년 조직이다. 설립연도는 1922년. 이후 나치 독일의 패망으로 1945년 해체되었다.
1922년 3월에 조직되었던 '국가사회주의 청년동맹(NSDAP)'이 1926년 7월에 재건된 것이다.
18세까지의 청소년을 대원으로 하고, 돌격대(SA)의 일부로서 일종의 전체주의적 관념을 가졌으며, 나치당 초반에는 이론학습을 위한 야간 모임이나 소풍·시위·선동활동을 하였다. 대원의 69%는 청년 노동자와 도제, 10%는 상업 관계자, 12%는 학생이었는데, 그 중에서는 실업자의 비율이 높았다. 1932년 말에는 대원이 10만 명이었으나 나치스가 정권을 장악한 후 비약적으로 발전하여 1934년 말에는 약 358만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것은 전 독일의 정치·종교·군사·스포츠 관계의 전(全) 청소년 단체를 해산·흡수시켜서 히틀러 유겐트가 유일한 청소년 단체가 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시기에도 반항아들이 없지는 않았으며 에델바이스 해적이나 스윙 청소년, 모이텐 같은 반체제 청소년 집단이 나타났다.[1]
히틀러 유겐트는 독재자들의 필수라 할수 있었던 독재자 우상화 교육을 위한 기관이기도 했는데, 이런 단체가 흔히 그랬듯 가족애를 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바꾸는 세뇌를 유도했다. 인간이 보편적으로 지니는 가족에 대한 애정을 교묘히 특정 단체에 대한 애정으로 바꾸도록 하는 수법이다. 한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한 평범한 독일 가정의 아들이 히틀러 유겐트에 나가기 시작하더니 어느날부터 말을 잘 안 듣기 시작했는데 이를 야단치자 단검을 빼들면서 자신의 충성은 오로지 총통과 나치당만을 위한 것이라며 자신의 부모를 위협했다.[2]
히틀러 유겐트는 크게 4단체로 나누어졌다. ①10~14세의 소년으로 조직된 독일소년단, ②14~18세의 청년으로 조직된 본래의 히틀러 유겐트 ③10~14세의 소녀로 조직된 소녀단, ④14~21세의 여자로 조직된 독일여자청년동맹으로, 그 중 17∼21세의 여자는 '신앙과 미(美)단'이라는 특별조직을 만들었다.
1936년 12월 이래 전독일 청소년 남녀 전원을 강제적으로 조직하는 기관이 되었고, 나치스 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교육·체육·통치기관이 되었으며, 점차 스포츠나 사상교육보다도 근로봉사와 전시하의 군사보조노동이 중시되었다. 기본적으로 히틀러 유겐트 단원들의 경우 군대식 퍼레이드 연습을 받고 기초 군사 훈련 역시 받았다. 그리고 이들 중 엘리트 소년단원들을 차출하여 공군의 신체 조건이 맞는 단원들은 루프트바페 양성 학교로 나머지는 히틀러 유겐트 학교에 입학 시켜서 더 전문적인 군사 훈련을 받도록 하였다. 전쟁 초기에는 징집 영장의 발송이나 배급카드의 분배, 간단한 노동 지원 등 간단하고 그리 위험하지 않은 일을 맡았고, 점점 전쟁이 심해지자 군용 병원에서 부상자들을 간호하는 이들을 돕거나 고철을 수집하거나 방공호같은 군사시설 건축 노동을 하게 되었다. 42년 후반 부터는 군사 훈련을 충분히 수료했다고 판단된 17~18세 청년들을 차출하여 무장친위대에 편입시켜 독소 전쟁에 참전토록 하였다.
이후 대전 말기가 되면 이미 43년 이후 패망의 길을 걸어가던 제3제국의 상황 덕분에 초기의 '''파시즘 보이스카우트'''에서 '''청소년 의용군'''으로 변질되어 14세 이상 소년단원들을 마구 잡이로 차출하여 각종 전투병과에 우겨 넣어 소년병으로 활동시켰다. 대공 부대에 입대해서 적군 폭격기를 사격하고 탐조등을 조종하거나 일선 부대로 보내서 동부전선과 서부전선 최전방에서 전투를 치르도록 하였다. 즉 18세 이하의 미성년자를 군대에 입대시켰다는 것이다. 1945년에는 아예 14세 이하 소년들 조차 군인처럼 취급해서 포위망을 뚫고 들어오는 연합군을 상대로 참호를 파고 부상자를 구하고 불을 끄고 전투를 벌이는 등의 고된 일을 해야 했다. 물론 이 상황에서 도망치기라도 하면 무조건 총살이었다.
1943년에는 아예 1926년에 태어난 히틀러 유겐트 출신 소년들만을 모아 제12 SS기갑사단 히틀러 유겐트를 창설했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 참조.
이 뿐만 아니라 이들을 글라이더로 훈련시켜 제트 전투기 He 162에 태워 연합군 중(重) 폭격기들을 요격하려는 계획도 있었다. 그러나 해당 제트 전투기 항목에서 볼 수 있듯이 애로사항이 꽃피었고 계획은 무산되었다. 히틀러가 독일 재무장선언을 한 이래로 독일 공군은 신체조건을 만족하는 소년단원들을 항공기 조종사로 훈련시키는 프로그램이 진행되고 있었으며, 이 때는 적어도 연습기를 동원하는 등 그럭저럭 갖춘 모양새를 지니고 있었으나,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공군 파일럿이 급해진 독일 공군은 교관들 조차도 전선에 투입하거나 비행기를 띄울 줄만 알면 바로 전선으로 투입하면서 이 훈련 수준 또한 어이없을 정도가 되어버린다. 연합군 조종사들은 러더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 하는 안습 독일기를 왕왕 볼 수 있을 정도였으니 이착륙 도중에 전멸하고 마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는 결국 루프트바페 베테랑 파일럿들에게도 상당히 큰 피해로 돌아갔는데 비행 편대 형태가 아예 초장부터 신입 파일럿들이 제거 되면서 망가졌고 편대 전술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면서 압도적 수적 열세속에서 동료기들의 지원을 거의 받지 못하고 각자 연합군과 소련군 공군을 상대하게 되는 꼴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베테랑 조종사라 해도 압도적 수적 열세와 동료기들의 지원 부재, 그리고 만만치 않은 상대 공군 앞에서는 하나 둘 격추당했다.
초창기에는 그래도 입단시에 주말을 활용하여 시골 소년들이 도회지 등으로 소풍, 견학을 가기도 하고, 리조트 등의 시설을 즐길 수도 있어 지루한 일상의 탈출구로 청소년들에게 환영받기도 했다. 그러나, 전쟁이 격화되며 이런 유겐트들의 휴양 시설 등이 파괴되거나 다른 용도로 전용되며 이용할 기회가 줄어들고, 힘들고 지겨운 군사 훈련이나 노동에 동원되는 게 일상이 되자 점차 기피 대상이 되어갔다. 또한 히틀러 유겐트 학교들은 국방군에서는 척결된 병영부조리를 그대로 가져와서 시행하기도 했다. 히틀러 유겐트 학교를 배경으로한 독일의 영화 나폴라에서 묘사되지만 히틀러 유겐트 교육은 상당히 가혹했다. 물론 독일 국방군과 무장 친위대의 경우 그 이상으로 더 엄격하고 힘든 훈련을 받았지만 기본적으로 병영 부조리도 적었다. 하지만 히틀러 유겐트 쪽의 경우 상당히 가혹 행위가 심각했다. 윗 학년 소년단원들이나 히틀러 유겐트 교관들이 군기 잡겠답시고 공개 망신이나 가혹 행위를 서슴치 않았다.
몇몇 고령의 독일 노인들은 한때 유겐트 소속임을 부끄럽게 여겼고,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다고 회상한다.
군대와 유사하게, 투블럭 머리모양이 규정이었다.링크
추축국 삼국동맹이 체결되자 유겐트 역시 일독교류의 일환으로 일본에 방문했는데 이때 일본 제국측에서 이들을 환영한답시고 만세 히틀러 유겐트(aka 독일청년단 환영의 노래)라는 환영가를 써주기도 하였다.

1.1. 유겐트 단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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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s HJ-Fahrtenmesser
여담으로 단원이 부모에게 단검을 뽑아 반항한 에피소드 등에서 언급되는 히틀러 유겐트 단검은 꽤 유명하다. 히틀러 유겐트에서는 단원들에게 단검을 지급했는데, 나치스 물건답게 디자인에 신경을 많이 썼기 때문. 어린 소년들에게 번쩍거리고 멋지게 생긴 칼은 상당히 탐나는 장난감이었다. 칼날에 "Blut und Ehre" 라는 문구가 세겨져 있는데, 이는 "피와 명예" 라는 뜻이다.
이 유겐트 단검은 물량이 많았기 때문에 전후에는 연합군이나 소련군에 노획되어 기념품이 되기도 했고, 나치 장식만 떼어내고 팔아치우는 경우가 많았다. 나이가 차거나 입대하거나 등의 사유로 나가면 단검을 반납하지 않아도 됐으므로, 전장에서 계속 갖고 다니던 이들의 것들이 많이 노획되기도 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잠깐 등장하는데 초반 오마하 해변 전투에서 카파조가 참호안에서 사살한 독일군의 품에서 꺼내서 멜리시 일병[3]에게 건네준다. 멜리시는 "이제 이걸로 안식일에 빵이나 자르면 되겠군" 이라고 말하고 나서는 다리에 힘이 풀리고 그 자리에서 주저 앉아 흐느낀다. 아이러니하게도 멜리시는...스포일러

1.2. 히틀러 유겐트 출신의 유명인물


  • 교황 베네딕토 16세 - 히틀러 유겐트에 소속되어 대공포대에 복무한 경력이 있지만, 위에 나온 내용이나 베네딕토 16세 본인의 항목에도 나와있다시피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적으로 활동한 것이었으므로 별다른 문제가 되지 않는다.
  • 니클라스 루만 - 베네딕토 16세처럼 히틀러 유겐트에 소속되어 대공포대에서 복무했고, 연합군에 붙잡혔다. 그리고 반강제로 히틀러 유겐트에 가입한 터라 행진도 싫었고, 인사법은 더더욱 싫었고, 덤으로 나치 정권의 끔찍한 자기홍보도 싫었다고 인터뷰에서 말했다. 이는 부모님의 영향도 있었는데, 아버지는 나치 때문에 장사가 안된다고[4] 욕을 하기도 했고 어머니는 스위스계라 스위스에 잘 놀러가서 상황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1.3. 기타 매체에서의 히틀러 유겐트


  • 헬싱에 등장하는 《최후의 대대》 소속인 슈뢰딩거 준위의 복장은 히틀러 유겐트의 복장이다. 나이가 많아봐야 청소년 연령대로 보이는 만큼 그럴싸하다.
  • 베를린 공방전을 다룬 영화 《몰락》에서 유겐트 소속의 소년·소녀들이 88mm 대공포를 맡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한 소년은 판처파우스트 대전차로켓으로 소련군 전차를 격파한 공로를 인정받아 히틀러에게 훈장을 수여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45년 말년의 히틀러가 유겐트 대원을 만나는 사진을 본딴 듯하다. 결국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이 소년을 제외한 나머지 대원들은 마지막 포탄을 쏜 이후 모두 자살을 하거나 사살당한다. 그러나 소년의 가족들도 헌병대로 보이는 사람들에게 죽고, 떠돌아 다니다가 트라우들 융에를 만난 소년은 함께 소련군이 점령한 베를린을 빠져나간다.
  • 영화 지옥의 영웅들. 사무엘 풀러가 감독한 전쟁 영화로 원제 The Big Red One은 미 제1보병사단의 부대 상징이며 별명이다. 특공 대작전으로 알려진 리 마빈이 양차 대전을 다 겪은 고참 부사관으로 나왔으며, 스타워즈루크 스카이워커로 유명한 마크 해밀도 비중 있게 출연했다. 이 영화에서 한 어린 히틀러 유겐트 저격수가 주인공 분대원 한 명을 사살한다. 분대장이 저격수를 생포하여 다른 분대원 앞에 끌고 오자 그들은 모두 흥분하여 그 소년병을 죽여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분대장이 "누가 죽일거냐?" 라고 묻자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결국 분대장은 소년병을 죽이는 대신에 볼기손으로 계속 때리는 벌을 내린다. 소년은 맞으면서 계속 히틀러 만세를 외치지만 이후 울면서 아빠를 찾는다.(#) 전쟁의 참혹함을 말해주는 상당히 인상적이면서도 씁쓸한 장면이다.
  • 고바야시 모토후미흑기사 이야기에서는 전쟁 막바지에 나치당 관료가 보충병이라며 히틀러 유겐트 소년병들을 주인공인 에른스트 폰 바우어 대위에게 데리고 오자, 선임 소년병과 나치당 관료를 두들겨 패며 어린애들은 집으로 가라고 호통친다. 이에 나치 관료가 이 사실을 당에 보고하겠다고 협박하자 주먹을 날리며 "멍청한 말 하지 말아. 자네보다 먼저 이반이 베를린에 도착할 거야." 라고 받아치기도 했다.
  • 영화 《모뉴먼츠 맨:세기의 작전》에서는 미술품 회수부대원 두 명이 건너편 폐건물의 소총수의 견제질에 당황하다가 소총수를 잡기 위해 건물에 진입한 것까지는 성공했는데 소총수의 정체는 히틀러 유겐트였던 것이다. 그 외에도 유겐트 포로들에게 히틀러가 꿍쳐둔 미술품의 행방을 묻는 장면이 나온다.
  • CSI : NY 시리즈에서는 히틀러 유겐트였는데, 나치에 가담하여 여러 사람들을 죽이고 수십년동안 미국에서 생활한 범인이 잡히는 장면이 나온다.
  • 장갑척탄병에서 주인공 프란츠가 SS 소위로 승진한 후 히틀러 유겐트 사단으로 전속되어 전투를 치르게 된다.
  • 나폴라 2004년 개봉 독일영화[5]에서 이들 히틀러 유겐트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이 어떤 교육을 받는지 알아 볼수 있는 영화이다.영화리뷰
  •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는 상륙 작전이 끝난 직후 카파조가 멜리시에게 기념품이라며 시체에서 노획한 히틀러 유겐트 대검을 건낸다.[스포일러]
  • 타이카 와이티티가 감독한 영화 조조 래빗은 10살짜리 유겐트 소년이 인간성과 나치즘 사이에서 갈등하고 성장하는 내용을 그린다. 2차대전 말기 유겐트가 어떤 식으로 활동했는지 블랙코미디가 들어간 시선으로 꽤 자세히 다룬다.
  • 나폴라의 배경이 되는 알렌슈타인 학교

1.4. 유사기구



1.4.1. 현대 이전



1.4.2. 현대



2. 동명의 무장친위대 제12기갑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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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개요


12. SS-Panzer-Division Hitlerjugend
히틀러 유겐트 단원으로 편성되었던 기갑사단이다.

2.2. 역사


1943년 1월, SS 중장 고틀로프 베르거(Gottlob Berger) 장군이 제안한, 1926년에 출생한 히틀러 유겐트 단원으로 전원 구성된 전투 사단을 만들자는 계획은 곧 하인리히 힘러아돌프 히틀러의 찬성하에 승인, 제1 SS기갑사단 총통기 아돌프 히틀러(LSSAH)의 프리츠 비트 SS 상급대령을 사단장으로 하여 창설을 시작했다.
신규 부대에 쓰일 문장 도안을 위한 경연대회가 열렸고, 수많은 도안 중 채택된 것은 LSSAH 사단의 문장으로 쓰인 열쇠에 히틀러 유겐트의 하부조직인 독일소년단(Deutsche Jungvolk) 상징들 중 하나였던 시겔(지크) 룬[6]이 엇갈리게 교차된 문장이었다.
1943년 9월 1일 16,000명이 넘는 신병들이 6주간의 기초 훈련을 마치고 SS 이병으로 군적을 올렸다. 벨기에 베베를로(Beverloo)에서 훈련을 계속하던 중 기갑척탄병사단이 아닌 기갑사단으로 편성하라는 통고를 받았고, 그에 따라 사단은 SS 기갑 사단 히틀러유겐트로 재편성되었다. 대부분의 신병이 너무 어렸기 때문에 기호식품으로 담배 대신 비흡연, 비음주자에게 대체 지급되는 과자사탕이 주어졌다.
판터 전차도 일부 보이나, 숫적 주력은 4호 전차였다. 그나마 히틀러가 친히 관심을 기울여 편성한 사단이라, 1944년 기준으로는 전차 등의 장비가 잘 배치된 편이다.
1943년 10월, 제12 SS기갑사단이라는 단대호와 히틀러 유겐트라는 명칭이 정식으로 수여되었다.
당연히, 이제 막 입대한데다 나이도 어린 이병들만으로 사단을 구성할 순 없었기에, 아돌프 히틀러 사단에서 장교부사관들을 차출해 배치했고, 그러고도 부족한 인력은 다른 SS 사단 및 육군에서 차출했다. 비트 사단장이 수많은 규칙과 규정을 어겨가면서까지 최대한 빨리 전투 준비를 끝마치려고 했기에, 현실적인 전투 시나리오와 실사격 훈련이 주가 되었다. 당시 훈련을 담당한 베테랑들은 이들 신병들이 대부분 가혹한 훈련들을 소화해내자 매우 신뢰했고, 신병들 역시 근 4년여 간의 전쟁 와중에 살아남은 베테랑들을 존경하고 의심없이 따랐기에 사단 내 장병들의 분위기는 매우 화목했다고 한다. 이는 나치의 선전도 있겠지만 실제 참전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거짓은 아니다. 전투와 거리가 먼 후방인 프랑스에 주둔해 있었다는 점과, 선술했듯 신병들은 베테랑 장교와 부사관들을 존경했고 이들 고참들 또한 나이가 어렸던 신병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지 않겠다는 사명감에 훈련을 가혹하게 시키면서도 애들이라는 점 때문에 훈련 이외의 시간에는 굉장히 자상하게 대해 준 점이 시너지 효과를 낸 것이다.
초반에는 베테랑 장병들의 배치도도 낮았고 나치의 약육 강식 사상에 입각한 가혹한 통제와 훈련에 어린 신병들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훈련의 효과가 크게 나지 않았다. 이후, 사단에 합류한 언제나 최전선에서 부하들과 함께 싸워 존경을 받아 "판처 마이어"로 유명한 쿠르트 마이어 SS대령의 제안으로 교육 방침을 크게 바꿨는데, 훈련 강도는 강하게 유지하되 병들에 대한 통제를 완화하여 약간의 두발이나 복장 불량은 좀 덜 터치하고, 훈련병들을 상하 관계로 깐깐하게 대하기보단 집을 떠나 온 아이들에게 부모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도록 장교와 부사관들이 신병들을 보다 자상하게 대해 주도록 바꿨다. 2차세계 대전시 독일군은 타군에 비해서 아니 선배격인 독일 제국군에 비해서 병영부조리가 거의 없는 수준의 병영 문화가 잡혀있었다. 국방군 병영, 무장친위대 가리지 않고 병영 부조리가 없는 단결된 군대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이는 독일군의 베테랑 병사들과 신병들의 완벽한 시너지를 이루어냈고 강력한 독일군의 전투력의 원천 중 하나이기도 했다. 이 방침은 위에서 언급한 시너지 효과를 내어, 신병들은 높은 전투력을 발휘하고 단결할 수 있었다. 또한, 엄숙하고 웅장한 규모의 SS 대원이 되었음을 뜻하는 선포식을 열어 주어 이들에게 자긍심도 심어 주었다.
1944년 4월에는 전략 예비 기갑 부대로서 노르망디 캉 근방으로 이동, 현지 적응 및 지형 숙달 훈련과 사단장 비트 장군의 SS소장 진급 및 36세 생일 축하 파티 등으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던 중, 이달 빌뇌브다스크에서 철로 사보타주가 있었고, 그에 대한 보복으로 근처에 살던 프랑스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데 히틀러유겐트 사단 장병들이 동원되었다. 사단 장교들은 어린 신병들이 학살을 주저할 지도 모른다고 우려한 것과 달리 묵묵히 자신들의 명령에 따라 민간인들을 주저없이 학살하는 모습을 보고, 자신들의 교육 방침이 옳았음을 확신하게 됐다. 2달 뒤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맞았다. 전투 초반, 비트 장군이 영국 해군함포 사격으로 전사하는 바람에 전선에서 마이어 대령이 히틀러 유겐트 사단을 지휘했다.
총통의 열렬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병력 숫자 외엔 모든 장비가 부족한 와중에도, 강력하게 세뇌된 히틀러 유겐트 출신 신병들은 캐나다군을 상대로 싸웠다. 팔레즈 포위전에서 후미를 지키면서 연합군의 공세를 지연시켰다. 이 와중에 캐나다 육군 포로를 학살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이후에 마이어 장군은 "포로들을 잡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것이 밝혀져 이 일에 책임을 져야만 했다.

3. 제노기어스의 용어 '유겐트'


유겐트(Jugend). 게브라 사관 후보의 육성을 목적으로 해서 청년 병사의 교육·훈련을 실시하는 솔라리스 제립 지휘관 양성 학교.
게브라 특부부대의 관련인들은 거의 여기를 거쳤다.
「청춘」「소년 시대」를 의미하는 독일어 '유겐트(Jugend)'에 유래.
조직으로서의 유겐트는 독일군의 돌격대 청년부로서 설립되어 후의 히틀러 정권에서 강대한 영향력을 가지는 국가적 청소년 단체로서 활동한 「히틀러 유겐트」가 그 모델이라고 생각된다. 즉, 유래는 항목 1이다. 이 항목의 1.에서 앞은 빼고 뒷부분 '유겐트'만 따왔다.
분량상 이 '유겐트'만 독립 항목으로 따로 떼어내면 토막글 규정에 걸리게 된다는 문제가 있는 관계로, '유겐트'로 리다이렉트되는 이 항목에 편의상 1.과 함께 같이 기재한다.
[1] 1993년 영화 스윙키즈를 보면 이들 반나치 청소년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저항했는지 자세히 알 수 있다.[2] 조지 오웰1984에서는 주인공 옆집에 사는 파슨스의 아이들이 비슷한 식으로 권총놀이를 하는 장면이 나오고 "자녀들에 의해 신고당하고 증발될 것이다" 라는 주인공의 독백과 나중에는 실제로 파슨스가 아이들에게 반정부적인 잠꼬대를 신고당해 애정부에 끌려오는 장면이 나오는데 아마 이 일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 하다.(E. L. Doctorow, ''On the Brink of 1984'')[3] 유대인이다.[4] 뤼네부르크에서 양조장과 더불어 펍을 운영했다.[5] 한국에서는 히틀러 유겐트 라는 제목으로 케이블 영화채널에서 방영해줬다.[스포일러] 멜리시는 후반부 라멜 전투에서 무장친위대 병사와 처절한 육박전을 벌일때 칼을 꺼내든다.(다른 칼이다) 하지만 힘에서 밀려 결국 역으로 찔려 죽는다.[6] 룬 문자 소윌로가 두개이면 말 그대로 SS를 뜻하는 것이지만, 하나만 쓰면 이 융폴크단 상징이다. 소윌로를 현대 독일어로 옮기면 'Sieg'(승리)가 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