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외

 

裴頠
(267 ~ 300)
서진의 인물. 자는 일민(逸民). 배수의 막내 아들로 부인은 왕융의 딸.
하동 문희 사람으로 크고 맑은 식견이 있으면서 박학해 어릴 때부터 이름이 알려졌으며, 어사중승 주필이 배외를 만나자 감탄하면서 배외는 무기고 같아 다섯 가지 무기가 움직이듯이 한 시대의 걸물이 될 것이라고 평했다. 위충의 아버지가 사망했을 때 아버지 배수의 명령으로 위충이 상을 지내는 암자에 묘소를 조성했다.
271년에 배수가 죽으면서 형인 배준이 후사를 계승했지만 일찍 죽는 바람에 배외의 이모부인 가충이 배수는 큰 공이 있지만 불행히도 장남은 죽고 손자는 연약하며, 배외는 재주와 덕행이 있어 국사를 융성하게 할 만한 인물이라고 상소하자 배외는 작위를 이어받을 것을 명령받았다.
배외는 이를 거부했지만 사마염이 허락하지 않았고 275년 12월에 거록공에 봉해졌으며, 281년에 태자중서자, 산기상시가 되었다가 290년에 사마충이 즉위하자 국자좨주와 우군장군을 겸임했다. 291년에 양준이 살해될 때 좌군장군 유예에게 정위에게 출두해야 한다고 충고해 유예가 이끌던 군사를 대신 명령을 내리게 되어 만춘문을 지켰다.
양준을 벤 공적으로 무창후에 봉해져 이를 사퇴하고자 청했지만 사마충이 허락하지 않았으며, 배위는 국학을 닦도록 상주해 후세에 전하기 위해 돌을 새겼다. 배위는 의술에도 밝으면서 순욱의 율도를 거둬 도량형의 기준에 연구해 의료로 일어나는 사고를 막기 위햐 도량형의 기준을 수정하도록 상주했다.
배외는 사마휼의 생모인 사부인을 사숙비로 부르는 것을 반대하는 상주를 올렸으며, 가남풍의 마음에 들어 배위는 관리 3천 명을 거느리면서 동궁에는 1만명이 숙위하게 되었다. 상서가 되었다가 시중이 되면서 광록대부가 더해졌으며, 배외는 가남풍의 어지러운 정치로 사공 장화, 시중 가모 등과 함께 사숙비를 황후로 세우는 것을 논의했다.
300년에 팔왕의 난으로 조왕 사마륜이 가남풍과 이에 연루된 조정의 고관들을 죽일 때 상서좌복야로 있던 배외도 살해되었다.
사상가로써 하안이 주장한 천지 만물은 무를 근본으로 삼는다는 것을 반박하는 숭유론을 주장했으며, 그의 아들로는 배작(裴綽)[1]이 있다.

[1] 서진 때 사공연, 산기랑이 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