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왕의 난

 


1. 개요
2. 배경과 원인
2.1. 명분이 없는 취약한 왕조
2.2. 재물과 권력의 남용
2.3. 문벌 귀족들의 급격한 성장과 막장 사회상
2.4. 백성들의 고난
2.5. 황족의 지방 할거
3. 전개
3.1. 폭주하는 외척
3.2. 가남풍의 악행
3.2.1. 양준 숙청
3.2.3. 의붓아들 살해
3.3. 팔왕의 난 전개
3.4. 하지만 영가의 난
4. 사건 정리
4.1. 타임라인
4.2. 등장인물
5. 기타 창작물에서



1. 개요


八王之亂
중국어: 八王之乱(bāwángzhīluàn)
서진 말기(291~307) 황후 가남풍이 외척 양준을 제거하고자 사마량, 사마위 등 사마씨의 사람들을 이용한 후 권력을 잡고 전횡을 일삼자 이에 반발한 8명의 왕이 반란을 일으켜 내전을 벌인 사건이다.
내란을 주도한 종실제왕(宗室諸王, 왕으로 봉해진 황족들)이 모두 8명이라고 해서 '팔왕의 난'이라 일컫지만, 이는 사실 황실의 문제만이 아니라 후한 말기부터 쌓여온 고대 중국의 사회 모순 전반이 터져나온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단순히 황실 안에서의 제위 다툼만이 아니라 극단적인 사회 양극화에 따른 거대문벌에 대한 중소문벌의 공격, 중앙정부에 대한 지방정부의 공격이라는 성격도 동반한 것이었다.[1]
이 사건의 결과 서진의 국가 막장 테크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었고, 이어진 영가의 난에서 서진은 한족 왕조 최초로 본거지인 중원을 잃고 강남으로 쫓겨난다.

2. 배경과 원인


"근자에 위무제가 법술(法術)을 좋아하니 천하에서 법가사상을 중시하고, 위문제가 통달(通達)을 흠모하니 천하에서 절개 지킴을 천시하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기강이 정돈되지 않고 방탕하고 기이한 행동이 조정에 가득차게 되었으니, 마침내 천하에서 다시는 청의(淸議)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폐하께서 제업을 일으켜 선양을 받고 의 교화를 넓히시는데, 청렴하며 예의를 갖춘 신하를 등용하여 풍기를 정돈하지 않으시고 허랑방탕한 인사를 물리쳐 불경한 이들을 징계하지 않으십니다. 신은 이로써 감히 한 말씀 올리나이다."

자치통감》 태시 원년(265), 산기상시 부현의 상소

265년 12월 임술일, 조조의 손자 조환으로부터 제위를 선양받은 사마염이 내건 국시는 크게 두 가지 측면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는 전란기의 군벌 집단을 기반으로 성장한 위나라가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던 전제적 · 법가적 정책 방향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지방 사회가 붕괴되면서 강고한 기득권 집단으로 굳어진 문벌들의 귀족적 · 퇴폐적 사회 풍조를 단속하는 일이었다. 이에 그 대안으로 내세운 것이 후한시대 이래 흐트러진 유교 질서의 회복이었다.
이에 따라 재위 초기 사마염은 여러 측면에서 유교적 예법을 준수하며 관대하고 검소한 모습을 보이려 노력했다. 즉위한 직후부터 사마염이 직접 사마소왕원희의 죽음을 3년간 심상(心喪)하면서 유명무실해져 있던 삼년상을 부활시킨 것은 곧 가족적 윤리와 국가적 충성을 동일시하는 한대 유교의 국가 운영 논리를 복구하려는 시도였다. 이외에도 278년 11월 신사일에 태의사마 정거(程據)가 꿩의 머리털로 만든 치두구라는 가죽옷을 바치자 이를 태워버린 일화[2]가 유명하다.
'''다만 사마염의 구상은, 의도는 좋았지만 여기까지였다.'''

2.1. 명분이 없는 취약한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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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 세조 무제 사마염, 역대제왕도권
가장 큰 문제는 하내사마씨(河內司馬氏)가 당시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위법과 탈법으로 찬탈을 저지른 것이다. 익히 알려진 대로 사마의무력 쿠데타로 정권을 뒤집었고, 그 아들 사마사는 임의로 외척을 척살하고 황제까지 쫓아냈으며, 사마소는 '''아예 황제를 시해했다.'''[3] 조비 역시 헌제를 핍박하여 황제가 되었지만 그래도 헌제에게 위해를 가하진 않았다.[4] 그러나 사마소는 가충을 앞세워 조모를 진짜로 시해하였다. 직접적 실행자인 성제에게 책임을 물리기는 했지만, 성제가 죽기 전 저항하면서 사방에 실상을 다 까발린 데다 정작 성제를 사주한 가충은 무사했으므로 눈 가리고 아웅일 뿐이었다. 이외에도 중간중간 사마씨 일족에 조금이라도 제동을 거는 세력이 있으면 심지어 혜강 같은 문인들조차 없는 죄까지 만들어 사형시키는 등 적극적으로 무력을 동원해 자근자근 밟아버리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처럼 억지 수단으로 정권을 찬탈했다면 최소한 '''수단을 정당화할 근거'''라도 있어야 하는데, 하내사마씨에게는 애초부터 그런 게 존재하질 않았다. 조씨의 위나라는 적어도 조조가 한나라에 기대어 성장하지 않은 자수성가형 세력으로 다 망해가는 한나라의 간판을 유지시켜 주었다는 점, 오히려 헌제가 이미 동탁에게 옹립되어 문제의 소지가 있는 황제였다는 점, 그리고 조조 조비 조예 3대 동안 동탁이 초토화시킨 낙양을 복구하고 황건적의 난으로 널리 초토화된 민생을 재건했다는 점에서 "조씨가 뭘 잘했길래 제위에 오르냐?"라는 질문에 최소한의 할 말은 있었다. 그러나 사마의에게 내치적 업적은 아예 없었고[5] 말 그대로 조씨 정권을 날로 주워 먹고 간판만 바꿔 달아놓은 사마씨 정권에 불과했다. 조조 자체가 서주대학살을 벌이는 등 도덕적으로 큰 흠결이 있긴 했지만[6], 사마의도 공손연이나 조상이나 왕릉에게 저지른 짓을 보면 딱히 나을 바는 없으니. 특히 사마소가 조모에게 한 건 답이 없다. 오늘날의 시각에서야 민간인 대량학살이 권력쟁탈전 과정에서 일어난 사회 지도자 살해보다 훨씬 더 위중한 죄악이나, 고대 사회의 관념에서는 인간말종인 폭군이 아닌 이상 아무런 큰 잘못도 없는 황제를 시해하는 짓은 민간인 학살을 비롯하여 다른 모든 악행을 다 초월하는 천인공노한 죄악이다. 당장 사마소 본인이 원래라면 제위 찬탈을 비롯하여 사마씨 왕국이 안정화된 뒤에야 가능했을 거라 여긴 촉정벌을 무리하게 밀어붙인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천하통일을 해서 황제 시해를 덮고 제위를 빨리 찬탈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유선이 상상 이상으로 답이 없고 등애가 기적적으로 등산에 성공한 덕택에 정복을 하긴 했지만.
그러다보니 당장 사마염의 재종손인 숙조 명황제부터가 자기 조상들이 위나라를 찬탈하고 진나라를 건국한 과정을 듣고난 후 "그 말대로라면 이전에 있던 우리나라가 망해버린 건 '''당연한 일이고''' 우리나라오래 못 가는 거 아닌가?"라고 [7] 한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8] 동시대에 석륵도 "남자라면 조맹덕이나 사마중달 부자처럼 고아와 과부를 속이고 아첨으로 천하를 취할 수는 없다"고 디스한 것을 보면 당대인들의 평가 자체는 그리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9]
그나마 사마염이 내세운다는 게 위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유교적 가족주의[10]였지만, 여기에도 엄연히 문제가 존재했다. 정작 사마염 자신이 사마의의 장손이 아니라 차남인 사마소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사마소의 형 사마사가 아들을 두지 못하기는 했지만, 대신 사마염의 동생 사마유가 사마사의 아들로 입적되어 있었고 그의 개인적인 인망도 상당했으므로 사마염에게 강력한 위협이었다. 그렇다고 사마유를 아예 배제해버리자니 또 유교적 가족주의에 어긋나고.
결론적으로 사마염이 내건 '유교 질서의 회복'은 '''적극적으로 강조될수록 사마염의 집권 정당성이 약화된다'''는 아이러니를 안고 있었다. 결국 위에서 본 치두구 사건이 벌어진 278년에 조정 내에서 군기반장 역할을 하던 부현(傅玄)이 사망하고, 280년에는 삼국이 통일되면서 사마염은 유교 질서의 실현이라는 기조를 사실상 포기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사마유에 대한 처우인데, 이전까지 유교적 가족주의에 입각해 전대에 비해 파격적인 혜택을 제공받던 사마유가 280년의 삼국통일을 기점으로 급격히 견제의 대상으로 전락한다. 사마염은 사마유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지방으로 쫓아낸 뒤 사마유도 산동 지방으로 보내버리는데, 283년 사마유가 갑자기 죽어버린다. 물론 의문사라고 발표하긴 했는데, 사람들은 대부분 사마염이 죽였다고 믿었다.
여기까지 내용을 총정리해서 보면 서진은 통일왕조라면 으레 갖는 사상이 없다. 주나라, 진나라(진시황의 진나라), 한나라 등을 보면 주나라는 유교적 종법질서를 내세우며 이에 근거한 봉건제를 실행하여 왕과 제후간의 혈연에 근거한 협력을 이끌었고 진나라는 법가사상을 내세워 부국강병을 일궈내 천하를 통일했고 통일 이후에도 이에 근거한 군현제 실시 등을 이루었다. 그리고 한나라는 초기에는 유교에 호의적이지는 않았지만 점차 유교를 받아들이며 결국 유교국가가 되며 이에 근거해 향거리선제 실시 태학 설치 등등을 실행했다. 그러나 사마씨 일족의 진나라는 이도저도 아니다.

2.2. 재물과 권력의 남용


"지금 토지는 넓고 사람은 드문데도 부족한 것을 걱정하고 있는 것은 사치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질검을 숭상하게 하고 싶다면 마땅히 그 사치한 사람을 힐책하여야 하는데, 사치해도 힐책을 받지 아니하니 돌고 돌아서 도리어 고상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어서 끝이 없게 되었습니다."

《자치통감》 태강 3년(282), 거기사마 부함의 상소

애당초 법가적 정책을 지양하면서 귀족적 풍조를 잡겠다는 방향 설정 자체도 문제였다. 이는 곧 '''사치를 금지하지만 처벌은 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나마 법가사상 대신 내세워진 유교적 검약주의가 제대로 작동했다면 모르겠지만, 기존의 유교사상은 이미 형식만 남아 문벌집단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온정주의로 왜곡된 지 오래였다. 예컨대 선비의 윤리의식을 가늠하는 기준의 하나였던 삼년상 관습이 후한시대에는 명성과 관직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어 있었다.[11] 대표적인 인물로는 원소가 있다.[12]
여기에 설상가상으로 구품관인법이 더해진다. 구품관인법의 당초 목적은 여론조사를 통해 '이름난 사람'을 등용하는 것이었지만, 평가 기준이 객관적이지 못하다 보니 여론조사관인 중정(中正)이 뇌물을 받거나 거대문벌들의 눈치를 보고 여론을 조작하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돈 있고 빽 있는 사람부터 등용되기 시작한 것이다.''' 중정의 자격과 활동이 엄격하게 관리되었다면 그나마 문제가 덜했을지도 모르지만, 사마염 황제께서는 중정들에게 사실상의 면책특권을 줘버리고 말았다. 이런 구조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로 274년부터 283년까지 선조랑[13]을 지낸 산도(山濤)는 정작 인재를 배치할 때에는 언제나 사마염의 눈치부터 봤다. 즉 공석이 생기면 그 자리에 배치할 후보자 명단을 만들어 비공식적으로 사마염에게 제출하고, 사마염이 그 가운데 한 명을 선택해야 그 사람을 공식적으로 인사에 배치했다. 즉 아무리 재주 있고 평판 있어도 사마염의 눈 밖에 있으면 장외탈락. 때문에 산도는 인사를 공정하게 처리하지 않는다고 여론의 뭇매를 맞았지만 사마염은 당연히(?) 언제나 산도를 감싸주었다. 사서에서는 이게 무슨 군신 간의 의리를 보여주는 미담처럼 포장되었지만 국가 건전성 측면에서는 절대 좋은 현상이 아니다.

일찍이 호위가 상서가 되었을 때 당시의 정치가 관대한 것을 간언하니, 황제는 "상서랑 이하에게는 내가 가차없이 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에 호위는 "신이 말씀드리는 것이 승 · 랑 · 영 · 사와 같은 하급 관원들이겠습니까? 바로 소신과 같은 직급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분위기가 엄숙해지고 법령이 분명해질 것입니다"라 하였다.

《자치통감》 태강 원년(280)

게다가 사마염의 관대함(?)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서, 문벌들의 각종 범법행위에 대한 사마염의 처벌은 솜방망이 수준이었다. 그나마 관대함이 일관성이나 있다면 몰라도 또 그게 그렇지도 못했다. 결국 밑에 힘없는 누군가가 책임지고 독박을 썼으니..... 일테면 이미 사마염의 재위 초기인 267년 1월부터 관전을 점탈했다는 죄목으로 산도, 사마목, 무해, 유우가 함께 고발되었는데 산도, 사마목, 무해는 그냥 방면되고 일개 현령인 유우만 목이 달아난 일이 있었다. 그 뒤에도 사마사의 인척이자 사마염의 최측근인 양수는 아무리 탈법적으로 재산을 모아도 사마염이 보호해준 덕에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그야말로 빽이 없는 게 죄인 시대. 그리고 또 하나 말하자면 온갖 사고치고 비리 저지르고 하면서 그 열매는 빽있고 지위있는 사람이 먹지만, 일이 잘못되면 독박쓰고 책임지는 건 이도저도 없는 하수인들이었다는 것... 다른 예 하나를 들어보자.
서쪽에서 저족 강족이 날뛰게 되는데, 당시 정서대장군이던 조왕 사마륜의 일처리는 영 개판이었다. 형인 학산의 죽음으로 벼르고 있던 학도원부터 저족들 모아서 한바탕 벌이려는 제만년까지 아주 끝간데 없이 날뛰는 마당에 별 대책도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다 혜계와 손수가 작전 문제 등으로 서로 표문을 올려 디스를 하는 등 일이 좀 커졌고, 구양건까지 나서서 사마륜의 죄상을 보고하자 조정에서도 책임을 물어 사마륜을 경질하고 그 자리에 사마융을 도독옹양이주제군사로 삼아 변방을 맡게 하는데, 이 문제의 책임자 사마륜은 불러들여서 거기장군(...)이 되고, 정작 책임을 지는 방법이랍시고 내놓은 이야기가 사마륜의 측근 손수의 목을 베어 저족과 강족에게 사과하고 문제를 해결하자는 소리였다. 팔왕의 난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이 기회에 천하의 간신 손수를 죽이지 못한 것이 커다란 실책이었을지는 몰라도 여기서 손수의 죄는 그저 해계와 군사적 문제로 싸운 것과 사마륜의 측근으로 사마륜 대신 책임을 지고 죽어야 한다는 것 두가지뿐이었다. 손수는 그나마 신염이 변호를 해 주어 살았지만 그 뒤에 진짜로 희생자가 된 건 오나라의 항장으로 아무런 빽도 기반도 없는 주처. 그리고 주처가 그 쪽으로 가게 된 건 저 잘난 해계가 학도원과 싸워서 졌기 때문(...)[14] 결국 주처는 사마융의 뒤끝 때문에 지원도 보급도 제대로 못 받고 싸우다 결국 죽게 되는데, 주처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는 걸 알고 노모 핑계를 대고 나가지 말라고 도시락 싸들고 가서 말린 게 바로 저 위에서 '''책임을 독박 쓰고 죽을 뻔한 그 손수였다'''.[15]
주처에게 저 임무를 맡기기 전부터 사마융 성격에 주처가 잘못될 걸 알았던 사람들도 많았고, 주처 사후에도 그의 죽음과 패전은 사마융의 탓임을 천하가 다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이 시대에는 아주 당연하게도, 사마융에게는 '''어떤 죄도 묻지 않았다'''. 이런 사태가 일어날 것은 불보듯 뻔한 일이었던지 주처가 이 임무를 맡게 되었을 때, 중서령 진준은 이런 말로 간하였다.

"하후준과 양왕은 모두 귀한 친척으로 장수의 재목이 아니니, 그들은 진전하여도 더 이상 얻을 명성이 없고, '''물러난다고 하여도 죄를 받게 될까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주처는 오 지역 사람이어서 충성스럽고 곧으며 용감하고 과단성이 있는데 원수는 있으나 그를 원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치통감》 원강 6년(296)

잘못해도 높으신 분들은 죄를 주지 않으니 책임 질 일도 없는지라 열심히 하지도 않을 거고, 아무런 빽도 없는데다 사마융에게 원한까지 샀던 주처 정도는 그냥 패전의 희생양으로 삼거나 아님 다른 해코지를 해버리면 그만일테니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일은 실제로 딱 그렇게 되었고, 정작 주처가 싸우다 물러나 살아돌아왔다더라도 사마융의 등쌀에 딱 손수 꼴이 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래저래 결과적으로 일을 엉망으로 처리한건 윗분들이시고 희생은 아래서 다 떠맡아버린 것이다.[16]
이러한 문제점들은 결국 사마염의 집권 명분과 이념이 취약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정권의 존립 근거가 귀족의 지지에 의존하다 보니, 황제가 자신의 지지 기반인 귀족에게 감히 손찌검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이 시기의 귀족은 아래 서술되는 청담사상의 영향과 맞물려 황제의 권위를 무시하는 모습을 많이 보였다. 대표적 사례로 황제가 왕개에게 내린 산호수를 아무렇지도 않게 때려 부순 석숭이나, 황제의 원림에 쳐들어가 오얏나무 열매는 열매대로 다 따먹고 나무는 나무대로 베어버린 왕제가 있다. 또한 왕제가 '사람 젖을 먹여서 키운 돼지 고기'를 대접하자 사마염은 몹시 불쾌해 했지만 내색도 못 하고 자리를 피해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사마염이 기껏 권위를 세운다고 선택한 방법이란 '''돈지랄하는 귀족보다 더 돈지랄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석숭의 사례를 보듯 이마저도 패배(?)했다는 것.
이러한 막장을 자정하려는 움직임이 없던 것은 아니었는데, 두예유의 등 일부 문관들이 구품관인법을 폐지하자고 주장하고 당대 사회의 풍조에 대해 비판을 제기했으나 사마염은 말로만 옳다꾸나 했지 실제로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2.3. 문벌 귀족들의 급격한 성장과 막장 사회상


이로써 모든 리미트가 해제된 상태에서 문벌 2세대들은 말 그대로 미쳐 날뛰기 시작했다. '''당시 진나라는 온갖 사치와 향락이 난무하는 동양의 소돔과 고모라가 따로 없었다.'''
당장 사마염의 부마인 왕제부터가 상당히 정신줄을 놓았는데, 어마무지하게 비싼 낙양 한복판의 땅을 사다가 말을 키우는 목장으로 만들고 바닥에는 돈을 가득 깔아두었다. 또 밥을 먹을 때 모든 식기는 귀한 유리그릇[17]을 사용하고 그 위에 사람 젖을 먹인 돼지고기를 담아 내왔다.(...) 세설신어에는 정말로 사람 젖을 먹여 키운 돼지의 고기를 내왔다고 하고, 진서에는 사람 젖으로 쪄내서 성분이 스며든 고기를 내왔다고 하는데 어느 쪽이든 먹였다고 표현할 수 있으므로 그대로 서술한다. 재상 하증은 날마다 1만 전이나 되는 산해진미를 차려놓고서도 젓가락을 댈 것이 없다고 반찬투정을 부렸고, 그 아들인 하소는 아버지보다 한 술 더 떠서 날마다 2만 전씩 먹었다.
위에서 말한 양수는 겨울에 술을 빚어 발효시키면서 사람들에게 번갈아가며 항아리를 품고 있게 시키고, 술을 데울 때에는 반드시 짐승 모양으로 빚은 숯을 사용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유명한 일화는 양수와 어깨를 나란히하던 갑부인 왕개석숭이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돈지랄 레이스'''를 벌인 것. 왕개가 엿기름으로 솥을 닦으면 석숭은 밀랍을 땔감으로 쓰고(...), 왕개가 명주로 40리에 장막을 치면 석숭은 비단으로 50리에 장막을 치고, 석숭이 산초로 집을 칠하면 왕개는 주사로 집을 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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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도와 왕융, 남조 전축분의 죽림칠현도
다만 사회가 이런 개판이 된 것은 400년 동안 윤리도덕이 주입되던 경향에 대한 반동이라는 측면도 있다. 자신의 진심을 억누르고 윤리도덕을 강조하다 보니 '그래서 이 사람의 진심이 뭔데?'라는 질문이 떠올랐고, 그 결과 형식적인 윤리도덕에 얽매이지 않고 진심을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바로 청담사상의 발생이었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정권 아래에서 청담사상의 '진심'이라는 테마는 귀족들이 자신의 욕망을 관철시키기 위해 윤리도덕을 짓밟는 자기합리화로 변질되었다. 대표적으로 왕융은 청담사상을 주도하던 죽림칠현의 일원이면서도 명성과 달리 조카의 결혼식 때 홑옷 한 벌만 선물로 주었다가 그마저도 나중에 다시 달라고 하는 등 쪼잔한 모습을 드러냈다. 반대로 정권에 영합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줄줄이 목이 달아나고 결국 허무주의신비주의 사조로 흘러가게 된다.
여기에 덤으로 서진의 사회분위기를 개막장으로 만드는데 일조한게 바로 오석산이다. 오석산은 주성분이 비소, 수은같은 독약화합물로 중추신경을 파괴해 환각작용을 일으키는 물건이다. 이런 미친 물건이 위나라 시절부터 하안을 시작으로 귀족들 사이에서 퍼지는데 하필 위에서 언급한 허무주의 신비주의와 뒤섞여 서진의 뽕쟁이들이 신선이랍시고 오석산을 빨고 날뛰었고, 그걸 옆에서 보던 멍청이들도 오석산을 흡입하기 시작하면서 귀족들을 거쳐 서진 전역에 유행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환각효과로 인한 기행에 중독성이 심각해 오석산 구한다고 가산을 탕진하는 인간이 늘었으며 독극물인 비소와 수은을 흡입하는 거라 건강에도 치명타였다. 더군다나 이 오석산은 서진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위진남북조시대를 거쳐 수나라, 당나라 때까지 유행하며 중국을 몇세기 동안 괴롭힌 물건이다.[18]

2.4. 백성들의 고난


그나저나 그 많은 돈은 다 어디서 나왔을까? 사실 문벌들이 제 아무리 사치와 향락의 끝을 달리더라도 그만큼 경제가 활성화되었다면 그리 상관 없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제환공관이오는 사치를 즐겼는데 그럼에도 별로 까이진 않는다. 그 이유는 제환공 시기가 제나라의 전성기였던 시기라서 그렇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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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시대의 이상기후 빈도
그러나 이 시기 중국을 다스리던 서진은 고위 문벌귀족들의 극에 달한 사치와 대비되는, 오히려 소빙기가 의심되는 자연재해에 시달리고 있었다. 태양의 흑점 활동부터가 중국 역대 어느 왕조보다도 자주 관측되었으며, 특히 271년부터 5년간은 아예 해마다 일식이 일어났다. 농업도 이상기후로 몸살을 앓았다. 계절풍이 위축되면서 화북에는 가뭄이, 강남에는 홍수가 일어나는 일이 잦아졌다. 초여름에 서리가 내려 싹을 틔운 보리가 다 죽어버렸고, 한여름에 우박이 쏟아져 익어가는 곡식들을 망가뜨리기도 했다.[20]
이러한 상황 속에서 농민들이 선택할 수 있는 활로는 많지 않다. 사채를 쓰거나, 식객이 되거나. 여기에서의 식객이란 간단히 말해서 농노를 생각하면 간단하다. 객 중에서도 고용인인 '''용객'''(傭客)이나 소작인인 '''전객'''(佃客)은 사회적으로 비천하게 취급받긴 해도 자신의 가계를 가지고 자기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분상으로 양인에 속하지만, 식객 즉 '''의식객'''(衣食客)은 주인에게 가계를 의존하여 의식을 제공받고 있었으므로 사실상 노비에 가까운 상태였다. 이들은 그나마 노비처럼 아예 대놓고 인신을 지배받진 않았지만 어쨌건 공짜로 부양을 받은 게 빚이 되어 자의가 아닌 타의에 따라서 노동에 종사해야 되었고, 이렇게 해서 부양비를 갚은 뒤에야 다시 풀려날 수 있었다.[21]
결국 생업을 잃은 농민들은 개인의 비정상적인 권력과 부에 기생하는 존재가 되고, 얼마나 탈법을 용서받을 수 있는지에 따라 부와 권력의 자기확증이 일어났다. 한마디로 말해, 개인이 소유하는 노비와 사병들의 숫자가 엄청나게 불어난 것이다. 특히 노비와 사병들은 떠나봤자 영위할 만한 생업이 없기에 그 주인의 눈에 들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만 했다. 진서 외척전에는 양수가 원리원칙 없이 마음대로 사람을 선발했지만, 부하들이 양수의 눈에 들기 위해서 목숨을 내던지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회가 무너지고 군벌들이 일어나는 건 시간 문제였던 것.
게다가 돈을 모으는 방법 자체도 굉장히 악질적이었다. 석숭은 형주자사로 지내면서 지나가는 사신이나 상인을 겁박해 가지고 있는 물건을 약탈하고,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 상인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양수는 국가 관청에까지 사채를 씌울 정도였으며, 왕융은 장원과 상업을 경영하던 거대 자본이었는데도 종자가 아까워서 씨에 구멍을 뚫어서 팔았다. 상황이 이 정도면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뇌물수수와 부정부패는 애교일 정도.[22]

분쟁은 돈이 아니면 이기지 못하고, 관직은 돈이 아니면 트이지 못하고, 원수는 돈이 아니면 풀지 못하고, 명성은 돈이 아니면 떨치지 못한다. 붉은 옷을 입고 요직을 담당한 낙양의 사족들이 나 가형(家兄)을 좋아하는 것이 모두 끝이 없어서, 나의 손을 잡고 시종 나를 안고 있으니, 무릇 지금 사람들은 오직 돈만 알 뿐이다.

《자치통감》 원강 9년(299), 노포[23]

의 전신론(錢神論)

이렇게 경제 기반이 붕괴되어가는 마당에 정권을 잡은 소수의 거대문벌에게 극단적으로 부와 권력이 집중되는 현상은 반대로 이러한 주류 카르텔에서 소외된 중소문벌들의 불만과 위기감이 축적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당장 팔왕의 난에서 막후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손수이함, 장방이 모두 중앙의 문벌 사회에서 멸시받던 중소문벌 출신의 인물들이었다. 그리고 어지간히 한이 맺혀있었던 저 인간들에게 완장이 한번씩 갈 때마다 무지막지한 피바람이 일어났다. 그나마 자기들끼리는 나름의 카르텔도 있어서 기싸움하며 적당히 건드리다 말았던 주류 문벌 귀족들이었지만 갑자기 힘이 생긴 저 외부자들에겐 그런 눈치 볼 필요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황제가 하사한 산호수를 멋대로 깨먹고도(물론 왕개한테 더 큰 산호수를 주어서 배상했다.) 무사했던 석숭은 자기 애첩을 탐내는 손수를 무시하고는 자기 뿐 아니라 3족이 살아남지 못했다. 장방이 낙양을 무지막지하게 들쑤시고 다니며 온갖 인간 백정짓을 다 하고 다녔을 때 역시 중앙 귀족들은 그냥 칼로 베기 좋은 고깃덩어리었을 뿐이었다.

2.5. 황족의 지방 할거


황제는 위나라가 고립되었던 폐단을 경계하였으므로 종친을 크게 책봉하고 직임을 주었다. 또한 여러 왕들에게 모두가 스스로 자신의 봉국 안에서 장리(長吏)를 선발하도록 명령하였다. 위장군 제왕 유 혼자만이 그렇게 하지 못하고 모두 위에서 임명해줄 것을 청하였다.

《자치통감》 태시 원년(265)

더욱이 사마염은 또 다른 문제도 쌓아놓았다. 앞서 위나라는 후한의 혼란을 교훈삼아[24] 황족, 외척, 환관을 강박적으로 배제하고 오로지 측근들을 위주로 국정을 운영했다.[25] 하지만 그 때문에 측근들이 언제나 서로를 견제하고 균형이 유지되도록 안배하지 않으면 아차하는 순간 황권이 그대로 삼켜질 수 있었고[26], 실제로 이러한 가능성은 능력이 뛰어났던 조씨와 하후씨 일가의 인물들이 대부분 사망하고 사마의 일파가 전면에 나서는 순간 그대로 실현되었다.[27]
그래서 위나라의 전철을 답습하지 않기 위해 사마염은 즉위 직후부터 황권강화를 위해 일종의 봉건제로 돌아가는 방식을 선택, 각지에 할거한 황족의 권력을 비약적으로 강화시켰다. 책봉된 황족에게 휘하 관속을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는 인사권을 주었고, 277년부터는 최대 5,000명에 달하는 군대도 공식적으로 허용해 주었다. 280년에 삼국을 통일하고 나서는 지방의 행정권(자사)과 군정권(도독)을 분리시키고, 그렇게 분리된 군정권까지 황족에게 나눠주었으니 문제가 더욱 심각했다. 즉 황통을 지닌 사람이 인사권과 군사권까지 가지고 지방에 할거한 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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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년 말 종실왕 배치도 및 주요 종실왕. 다만 종실왕의 세력기반은 왕위가 아닌 장군위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실제 세력의 배치는 왕위의 배치와는 사뭇 다르다. 예를 들면 성도왕 사마영의 세력기반은 봉토인 성도가 아닌 평북장군·진북대장군·정북대장군 등으로서 주둔한 업이다.
다만 사마염 생전에는 중앙의 거대문벌이 일방적으로 지방을 압도하고 있었고, 양호, 두예#s-1, 장화, 호분#s-1과 같은 측근들이 지방의 군정권을 분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럭저럭 황족을 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마염이 죽고 뒤이어 즉위한 사람이 백치 황제 사마충이었고, 이를 틈타 실권을 장악한 외척 세력이 멍청하게도 황족을 중앙에서 쫓아내는 정치적 도구로 군정권을 사용하면서 지방의 군정권은 오롯이 황족들이 나눠먹게 되었다. 여기에 불만과 위기감에 싸인 중소문벌들이 독자적 인사권을 지닌 황족들에게 붙으면서 이들을 중심으로 결집하는 양상이 나타났다.
물론 모든 개막장인 상황에서도 중앙 정부의 정책과 군대만 건전하게 유지되고 있다면 나라가 쪼개지던 최악의 상황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28]황족 가운데 하나가 반란을 일으킨다고 해도 문제와 대안이 불분명한 이상 다른 황족이 한꺼번에 여기에 동조하기는 쉽지 않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중앙 정부의 토벌군으로 각개격파까지도 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놈의 지긋지긋한 외척.
사실 사마충 같은 백치가 별말없이 태자→황제테크를 탔다는 것 자체가 가충을 시작으로 하는 귀족집단의 힘과 사마씨 정권의 나약함을 보여주는 일화다. 실제로 팔왕의 난을 일으킨 원인인 가남풍이 태자비가 된 것부터가 가충의 뒷배 때문이기도 하고.
이에 대해 조선의 학자 홍대용은 신랄한 촌평을 남겼다.

진주(晉主, 사마염)는 조씨(曹氏)가 고립되던 것을 거울삼아 종실(宗室)을 다량으로 봉(封)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서로 해치어서 거의 멸망할 지경에 이르다가 요행히 보존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종실을 봉해야 하겠는가? 봉하지 않아야 하겠는가? 말하자면, 봉하여도 또한 가할 것이고, 봉하지 않아도 또한 가할 것이다. 위(魏) 나라가 멸망하게 됨은 고립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진나라가 혼란하게 됨은 종실에 연유함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임금이 덕을 잃지 않으면 종실을 봉하지 않아도 고립되지 않을 것이고, 봉한다 하더라도 스스로 호위(護衛)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까닭은 생각하지 않고, 구구하게 봉하고 봉하지 않는 것만을 용심(用心)한다면 나는 동쪽에서 멸망하고 서쪽에서 생겨남을 볼 것이다.

홍대용 《담헌서》

즉 홍대용의 주장은 이러하다. 서진의 멸망이 지나친 종친의 우대와 할거 때문인 것은 맞다. 하지만 서진과 반대로 행동했던 위나라도 마찬가지로 멸망했다. 즉 애초에 국가의 안위는 종친의 우대/천대의 문제를 떠나서 이를 컨트롤할 수 있는 적절한 중앙 권력에 달려 있음을 주장한 것.

3. 전개



3.1. 폭주하는 외척


12월에 황후의 아버지인 진군장군 양준을 거기장군으로 삼고, 임진후로 책봉하였다. 상서 저략곽혁이 양준은 그릇이 작아 국가의 중책을 맡기에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황제가 따르지 않았다. 양준이 교만해져 남을 업신여기고 스스로 우쭐거리니, 호분이 양준에게 말하였다.

"경은 딸을 믿고 더욱 거만하게 구는구려! 앞 시대의 일들을 두루 살펴보면, 천자의 집안과 혼사를 맺고 집안이 멸망하지 않은 일이 없었소. 단지 이르거나 늦거나 했을 따름이오."

《자치통감》 함녕 2년(276)

사마염은 황제로 즉위하기 전 양병의 딸 양염(楊艶)과 혼인하였고, 즉위한 뒤 양염이 병사하자 양준의 딸 양지(楊芷)를 황후로 간택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양염과 양지가 사촌자매 사이이니, 2연속으로 황후를 배출한 양준 일가가 외척으로서 강력한 권력을 누리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참고로 홍농 양씨 자체도 당시 낙양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명문 집안이었다. 후한 안제 때 이래로 양진, 양병, 양사, 양표 4대가 모두 재상의 반열에 올랐고, 양표의 아들이 계륵의 고사로 잘 알려진 양수다. 다만 양병과 양준 일가는 이와 별도로 양진으로부터 양봉, 양부, 양중으로 갈라진 방계였지만 그럼에도 진서 외척전에서 계통을 구분하지 않고 '사세삼공(四世三公)'이라 일컬어질 만큼 그 후광 자체는 업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전 시대의 조위는 외척에 대해 거의 노이로제 수준의 거부감을 지니고 있었다. 당장 조조부터가 헌제의 외척을 탄압한 것은 물론이고 조씨의 외척들도 크게 경계하였는데, 전처 정씨와 이혼한 뒤 배후 세력이 없는 기녀 출신의 무선황후 변씨를 정실로 삼았으며, 변씨의 동생 변병에게도 경계심을 감추지 않았다. 조비는 명문가 출신의 문소황후 진씨를 황후로 삼았지만 이내 자결시키고, 뒤이은 문덕황후 곽여왕의 가족들에게도 권력은 주지 않았다. 조예까지도 명도황후 모씨를 죽이고 명원황후 곽씨로 황후를 바꾸었지만, 정작 조예가 아들을 두지 못하고 바로 이듬해 죽으면서 위나라의 후계구도는 막장으로...
이 때문인지 유교적 가족주의를 표방하고 있던 사마염으로서는 외척을 통제할 명분도 의지도 없었다.
더욱이 사마염이 삼국을 통일한 뒤 정무에 마음을 두지 않고 주색만을 탐하자, 온갖 청탁과 뇌물이 양준, 양요, 양제 삼형제에게로 밀려들었다.[29] 그러자 이전까지만 해도 숙청을 두려워하며 면벌부까지 미리 받아놓았던 양준 삼형제는 점차 긴장이 느슨해지며 막후의 제왕으로 군림하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들을 가리켜 삼양(三楊)이라 불렀다.
289년 말, 방탕하게 놀아나던 사마염이 드디어 골병이 들면서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양준은 이를 기회로 자신을 위협할 만한 세력을 중앙에서 쳐내기 시작했는데, 황실의 가장 큰어른인 사마량[30]에게 예주의 군사 지휘를 맡겨 허창으로 보내고 다른 황족도 각기 왕으로 책봉해 전국에 흩어놓았다. 다시 이듬해에는 위관의 아들 위선이 술주정이 심하다며 헐뜯어서 그에게 시집간 번창공주의 혼인을 파기하도록 여론을 몰아 위관이 관직을 내놓고 버로우를 타게 만들었다.
이때 골골거리다 잠시 정신을 차린 사마염이 주위가 죄다 양준의 사람들로 바뀐 것을 보고 놀라서 사마량에게 떠나지 말고 양준과 함께 섭정하라는 유조를 내렸지만, 중간에 양준이 '''유조를 빌려가서 배째라며 안 돌려줬다.''' 이내 다시 사마염의 병세가 악화되자, 이에 황후 양지가 사마염의 형식적 동의를 얻어 양준에게 섭정을 맡기는 조서를 내렸다. 결국 사마염은 "여남왕은 아직 안 왔는가?"라는 말을 남기고 혼수상태에 빠져 290년 4월 기유일에 붕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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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서진시대의 낙양성 평면도[31]
이로써 사마염의 뒤를 이어 사마충이 즉위하자, 양준은 사마염의 빈전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황궁의 정전인 태극전에 들어앉아 살면서 그야말로 황제나 다름없이 행동했다. 사마염의 후궁들이 왔는데 태극전 밖으로 나와보지도 않는다거나, 근위대인 호분을 100명이나 거느리고 다니는 등. 진서 직관지에 따르면 재상급이 개인적으로 거느릴 수 있는 호분도 20명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사마량은 양준이 두려워 황궁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대사마문 밖에서 통곡하며 국상이라도 치른 다음에 떠나게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양준은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사마량이 내란을 꾸민다고 아득바득 몰아세워서 기어이 그가 허창으로 도망치게 만들었다.
이제 양준은 제국의 행정집행권에서 생살여탈권까지 모든 기능을 망라하는 막대한 권력을 거머쥐었다. '''양씨의 집권 추세가 계속 이어졌더라면 머지않아 사마진은 양씨에게 찬탈당하였을 것'''이라는 예상도 있을 정도. 하지만 사람들에게 외척데자뷔를 일으키는 양준의 집권은 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이에 양준은 관직과 작위를 뿌려서라도 유력 문벌들의 환심을 사려 했지만 근처에서 불만이 비등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양준이 쥔 불안한 권력을 매의 눈으로 노리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사마충의 황후 가남풍이었다.'''

3.2. 가남풍의 악행



3.2.1. 양준 숙청


사실 가남풍이 처음부터 양준과 정적은 아니었다. 애당초 가남풍이 태자비가 되었던 것부터가 무원왕후 양염(양준의 조카딸)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양염의 사후 새로 들어온 무도황후 양지(양준의 딸)는 가남풍의 포악한 행동을 엄격히 훈계하기 시작했고, 이에 가남풍이 불만을 품으면서 둘 사이의 관계는 완전히 틀어졌다.
한편 이때 양준도 양준대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지금까지 전도유망한 황족을 중앙에서 밀어낼 정치적 수단으로 각지의 군 정권을 황족에게 분배했지만, 이렇게 방출당한 황족이 오히려 지방의 군 정권을 이용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다. 무엇보다도 초은왕 사마위가 지휘하는 형주군과 회남충장왕 사마윤이 지휘하는 양주군은 과거 손오가 있던 지역으로서 외지인 데다 장강을 끼고 있으며 독자적인 성격까지 강하여 자칫하다가는 제2의 오초칠국의 난으로 비화될 가능성을 충분히 안고 있었다.
그러던 중 291년 초에 갑자기 두 사람이 낙양에 올라오고 싶다는 요청을 하자, 양준은 이를 얼씨구나 받아들였지만...'''이 모든 것은 가남풍의 설계였다.''' 초은왕과 회남충장왕이 낙양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가남풍은 한밤중에 기습적으로 양준을 역적으로 선포했고, 초은왕은 동안공 사마요와 함께 황궁을 봉쇄하고 양준 일파를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에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낀 양준은 자신이 머물고 있던 무고 남쪽의 저택[32]에서 측근들과 대책을 의논했다. 이때 그의 비서실장 격인 태부주부 주진이 황궁 동쪽의 운룡문에 불을 질러 적들을 위압하고, 사건을 조사하여 주모자를 색출한 뒤, 동궁에서 군대를 모아 황태자를 받들고 만춘문으로 들어가자고 헌책했지만, 여태 상황파악이 안 된 양준은 아래와 같은 소심한 이유로 이 방법을 기각해버렸다.

"운룡문은 위나라 명제가 만든 것이고, 그 노력과 비용이 아주 많이 든 것인데 어찌 그것에 불을 지른단 말이오!"

《자치통감》 영평 원년(291년)

결국 궁중을 장악한 사마위 등의 군대는 양준의 집을 포위했다. 이 시기 귀족들의 저택은 그 자체로 하나의 요새나 마찬가지여서 양준은 그 안에 틀어박혀서 사병들을 모아 항전하려 들었지만, 사마위와 사마요는 누각 위로 궁노수들을 올려보내 저택 안으로 화살을 퍼부었고, 압도적인 병력으로 공격해오자 양준의 사병들은 참패했고 결국 화공으로 저택이 함락된다. 양준은 마구간으로 달아나다가 일개 군사들에게 붙잡혀 죽는다. 이때는 앞서 사마염에게 받아놓았던 면벌부도 무용지물이었다. 덧붙여서 이때 문앙도 원한을 품고 있던 제갈탄의 외손자인 동안공 사마요에게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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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의 저택 모양 부장품
양준이 이 모양이 되었으니, 그 딸인 태후 양지도 궁에서 쫓겨나게 된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특히 양준이 저택에서 포위당해 있을 때 양지는 '태부(양준)을 구해주는 사람에게 상을 주겠다'는 편지를 궁 밖으로 화살로 쏘아보냈는데 이것을 빌미로 며느리 가남풍은 사사건건 자신에게 간섭하던 시어머니 양지를 이제는 역적이 된 양준과 한패로 몰아서 폐위시켰고 낙양성 외곽의 금용성에 가두었다.
이후 가남풍은 양지의 어머니이자 양준의 처인 방씨를 처형하고자 했다. 양지는 어머니를 구명하고자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통곡하면서, 시어머니 체면에 며느리 앞에서 '소첩'을 자칭해 가며 방씨를 살려달라고 애원했으나, 가남풍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결국 방씨는 역적의 아내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했고, 이에 절망한 양지도 스스로 단식하여 죽었다.
가남풍이 양지에게 이렇게 잔인하게 행동한 것은 양지가 자신을 훈계한 데 앙심을 품었기 때문이었는데, 사실 양지는 앞에서는 가남풍을 훈계했지만 뒤로는 '지금이야 나이도 젊고 해서 투기도 하고 좀 방자하게 굴지만 차차 나아질 것'이라며 그의 행실을 감싸주고 있었다. 그야말로 은혜를 원수로 갚은 셈이다.

3.2.2. 토사구팽


이렇게 가남풍은 사마위 및 사마요를 움직여 궁중에서 외척 세력을 흔적도 없이 쓸어버렸다. 따라서 이 정변의 가장 큰 공로자는 단연 사마위와 사마요였지만, 가남풍은 의도적으로 사마위를 배제하고 사마량과 위관을 다시 중용했다. 이에 사마위가 불만을 품자 눈치챈 가남풍은 다시 사마위에게 밀사를 보내 황제의 명이니 사마량과 위관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안 그래도 부글부글 끓고 있던 초왕 사마위는 '''한달음에 사마량과 위관을 살해한다.''' 사마위는 스스로 공을 세웠다고 떠들었으나, 살해된 사람들이 각각 황실의 큰어른, 명망 높은 노신으로서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신임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범인을 색출하자는 여론이 높아졌다. 결국 가남풍은 여론을 반영하고 토사구팽으로 '''사마위를 처형했다.'''
간단히 말해 '''가남풍이 초왕 사마위를 이용해 정적들을 전부 제거하고 초왕 사마위까지 제거했다.''' 당연히 권력은 가남풍 손으로… 사실 사마유 독살사건도 가남풍이 한 짓이라는 설도 있다.

3.2.3. 의붓아들 살해


사마량과 위관, 사마위가 제거된 이후인 291년부터 300년까지 가남풍이 전횡을 저지르자 각지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사마씨들의 불만은 날로 높아진다. 여기서 가남풍이 실책을 저지르는데, 혜제 사마충의 아들로 황태자였던 사마휼이 가남풍의 소생이 아닌 데다 똑똑했기 때문에 가남풍은 사마휼이 자신의 권력에 방해가 될까봐 태자를 지나치게 견제하여 죽이려 했다.
가남풍이 사마위를 죽인 일은 일단 사마위가 지은 죄가 있었으므로 문제가 안됐지만, 가남풍이 다른 사마씨도 죽이려 든다는 것이 알려지자 지방 각지에서 권력을 잡고 있던 사마씨들이 분개하였다. 이 중 조왕 사마륜[33]이 가장 크게 반발했다. 하지만 사마륜은 다른 꿍꿍이가 있었기 때문에 정작 사마휼을 구하려 들지는 않았고, 결국 사마휼은 가남풍이 보낸 손려가 건넨 독약을 거절했다가 결국 약 찧는 절구에 맞아 최후를 맞았다.
참고로 절구 찧는 소리가 얼마나 켰는지 담장 넘머로 들렸다고 한다.

3.3. 팔왕의 난 전개


조왕 사마륜은 드디어 속셈을 드러내어 제왕 사마경#s-1과 함께 낙양으로 진군해서 가남풍과 그 일족 및 장화를 멸족하고 권력을 잡는다. 게다가 혜제 사마충을 뒤로 몰아내고 사마휼의 아들 사마장을 죽였는데, 사마장의 형 사마반과 동생 사마상은 요절하여 사마충과 사마휼의 대는 확실히 끊긴다.
사마륜은 의양왕 사마위(초왕 사마위와는 동명이인, 사마망의 손자), 손수 등 측근과 함께 모의해 스스로 황제에 오를 준비를 한다. 황통이 넘어가게 생기자 사마염의 9남 회남왕 사마윤이 군대를 일으켜 사마륜을 공격했다. 사마륜의 군대는 연전연패를 거듭했으나 여음왕 사마건에게 포섭당한 부하의 배신으로 사마윤은 목숨을 잃는다. 살해당한 사마윤은 당시 황족 중 가장 평가가 좋았던 인물이었기 때문에 사마륜은 사마윤의 아들이자 진왕 사마간의 양자인 사마욱도 죽이고, 사마윤의 동복형제이자 사마염의 15남 오왕 사마안도 죽여버리려 했으나 좌천 선에서 끝낸다.
이후 사마륜이 황제가 되고, 아들 사마과를 태자로 삼는 등 전횡을 일삼자 제왕 사마경 - 장사왕 사마예 - 성도왕 사마영 - 하간왕 사마옹이 연합하여 사마륜을 공격, 사마륜의 일족과 손수를 모조리 축출하고 죽여버리는 데 성공한다. 이때 사마충으로부터 옥새를 빼앗았던 의양왕 사마위 또한 죽임을 당한다.[34]
본시 사마소는 사마염보다 사마유를 더 사랑했는데, 원소와 유표의 일을 예로 들어 결국 장남 사마염이 황제가 되었다. 제왕 사마경은 이를 항상 한탄스럽게 생각하였고 재상이 되어 전권을 장악하게 되자 혜제 사마충에게 무례하게 대하며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키는 등 사치를 일삼았다. 혜소(죽림칠현 혜강의 아들), 평원왕 사마간(진왕 사마간과는 동명이인으로 사마의의 7남) 등이 충고했으나 사마경은 이를 무시했다.
결국 장사왕 사마예와 성도왕 사마영, 하간왕 사마옹이 다시 사마경을 공격해 패사시키고, 이번에는 사마예가 권력을 잡게 된다. 사마예, 사마영은 모두 사마충의 형제들로 이때까지 생존해 있던 혜제 사마충의 형제는 본인 포함, 사마예, 사마영, 25남 사마치, 15남 사마안 5명이었다.
어느 정도 평화가 유지되나 싶더니 황태제 자리를 두고 사마예와 사마영이 충돌하게 된다. 장사왕 사마예는 그나마 조심을 하기는 했지만, 이미 다들 야심의 독이 오를 대로 올라 있는 마당이었다. 황태제 자리를 노리라며 성도왕 사마영을 부추긴 하간왕 사마옹 덕에 다시 개판이 벌어지며 엄청난 전투와 출혈끝에 사마예는 그 두 사람의 손에 살해당한다. 이제는 형제끼리 서로 죽이는 상황까지 된 것.
또한 장사왕 사마예 축출과정에서부터 지방 주둔군 외에도 국경 주둔군이나 이민족까지 동원한 대규모 전투가 벌어진다. 이전까지는 상대적으로 정치싸움에 이어지는 소규모의 국지전 정도에 불과했고, 과정도 비교적 단순했지만 장사왕 사마예 경우는 큰 규모의 공방전이 여러 번 벌어졌고, 장기전으로 일이 번지는 과정에서 단순 왕부의 군사로만 일을 도모하기 힘들게 되면서 지방 군벌이나 이민족 부대들이 본격적으로 참전하게 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각 세력으로의 줄서기와 자기 세력 지키며 방관하기 내지는 독자 세력 키우기 등의 모습들도 노골적으로 등장하며 나라가 사분오열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때부터 사실상 서진 제국은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리기 시작한다. 이미 옛 촉한의 땅인 익주에서 가씨의 일파 조흠, 그리고 저족의 유민 출신 이특성한을 세워 분리 독립하였으며, 병주에선 성도왕 사마영에게서 벗어난 흉노의 유연한나라를 세워 자립하였고, 유주에서는 모용씨를 위시한 선비족이 대거 침투하고 있었다. 또한 형주에서 유민들이 몰려들어 장창의 난, 양주에선 진민의 난을 일으킨다. 이것은 무제 사마염이 천하통일 후 지방 주둔군을 감축하여 지방의 통제력을 상실하기 시작한 사태가 심화된 현상이었으며, 결국 이민족의 침입으로 서진 멸망의 시작이 된다. 참고로 이 시점에 이르면 이제 18명에 달하던 사마염의 아들들[35] 가운데 살아남은 사람은 사마영, 사마치, 사마안 고작 셋뿐이었다. 물론 고대 특유의 높은 영아 사망률 탓에 아들들 중 7명은 8세 이전에 요절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해도 나머지는 다 서로 죽이는 바람에 죽은 거다.
이렇게 사마영과 사마옹이 승리하는가 싶었지만 사마륜과 똑같이 자기가 다 해먹으려다가 중앙에서 이 난리가 일어나고 있으니까 예장왕 사마치와 동해왕 사마월이 군대를 이끌고 성도왕 사마영의 본거지인 업성으로 진군한다. 비록 첫 거사는 실패하고 사마월은 봉국으로 패퇴했지만, 동해왕파인 유주자사 왕준#s-3(王浚)과 병주자사 사마등(司馬騰)이 탁발부를 비롯한 여러 선비족을 거느리고 사마월을 밀어주면서 다시 대립구조가 서게 되었다.
이에 성도왕 사마영은 유연의 흉노족을 끌어들여 자신의 본거지인 업을 지키지만, 정작 사마영 자신이 지레 겁먹고 낙양으로 튀어버렸다. 이 와중에 동안왕으로 복권되었던 사마요(사마위와 양준을 죽인 제갈탄의 외손자)는 사마영에게 항복을 권유했다가 죽임을 당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막장으로 치닫는 중원의 형편을 생생히 목격한 유연은 업을 빠져나온 뒤 흉노족을 끌어모아 독립을 선언하고 한(漢)나라를 세워 병주자사 사마등과 대립하면서 영가의 난의 씨앗이 뿌려진다.
혜제도 무사하지는 못해서 화살을 맞는 부상을 입었으며, 다른 신하들이 모조리 도망가고 혜소 한 사람만이 그를 지키다가 죽임을 당했다. 이때 피가 혜제의 옷에 튀었는데, 이후 아랫사람들이 핏자국을 닦아내려 하자 혜제는 "충신의 피이다."라고 말하며 거절했다.
혜제를 끼고 낙양의 장방에게로 달아났던 성도왕 사마영은 다시 장안으로 옮겨갔다가 장방이 살해되고 본진 하북으로 도망치려다 하간왕 사마옹의 배신으로 죽음을 맞이했다. 장안으로 달아난 사마옹은 혜제를 확보한 사마월에게 장방을 죽이며 항복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으나 항복한 후 몇달도 되지 않아 범양왕 사마효에게 낚였고, 사마치와 사마월은 장안을 함락한 뒤 낙양으로 환도하고 사마옹은 죽여버렸다. 이와 동시에 혜제가 사망하면서 둘은 합의를 통해 예장왕 사마치가 제위에 올라 회제가 되고, 동해왕 사마월은 권력을 잡으며, 회제 사마치를 돕기로 하여 일단 6년에 걸친 피비린내 나는 권력투쟁은 일단락된다. 여기까지가 팔왕의 난이다. 여기서 진정되었더라면 그나마 황실의 내분으로 수습할 뻔했다.

3.4. 하지만 영가의 난


하지만 팔왕의 난은 '''중국 역사상 유례없는 혼란기의 서막'''에 불과한 이벤트였다.
'''이미 내전을 틈타 자립한 이민족이 이미 진나라 내부에 일대 세력을 이룬 상태였던 것이다.''' 이 막장극을 보고는 "진나라 놈들 별거 아니구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이민족들이 사방에서 발호하기 시작했고, 흉노를 규합한 유연의 아들 유총이 남하하면서 그 부하 석륵, 왕미, 유요 등이 화북 각지를 휩쓸고 다니기 시작했다. 이미 서진의 지방 통치는 와해되었기에 실권자인 동해왕 사마월이 자신의 친인척인 살아남은 사마등, 낭야왕 사마예 등을 지방으로 파견하여 거점을 장악하게 하는 등 황실의 권위를 다지는 한편 여러가지로 고군분투하며 이민족을 몰아내려 노력했다.
사마월은 암중 집권자로써 궁궐에 들어가 회제의 측근을 살해하는 등 전횡을 저질렀기 때문에 사마치는 점차 사마월을 견제하기 시작하였고, 사마월 또한 독재를 계속하며 사마치의 친족인 청하왕 사마담을 죽이는 등 인망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이와 동시에 이민족은 계속해서 서진을 위협했고, 사마월이 전쟁을 나간 사이 사마치는 황형인 사마염의 15남 사마안과 짜고 사마월을 죽이려는 조서를 꾸몄다. 그 와중에 회제가 연주자사 구희에게 밀조를 보내 통수를 치려하자 이를 알게된 사마월이 분사하며 공식적으로 팔왕 관련자는 전부 죽는다.
사마월의 뒤를 이어 대권을 잡은 태위 왕연은 낙양에서 탈출하기 위해 사마월의 장례를 위해 동해로 간다는 핑계로 낙양을 떠났다. 한마디로 말해 황제를 버린 셈이다. 그런데 피난민들과 낙양 주둔군이 대거 그의 도망에 합류하여 무려 10만 명에 달했다. 그러나 이미 낙양 주변은 흉노의 놀이터가 된 지 오래라 해당 지역을 담당하는 석륵이 왕연 일행을 중간에 기습했고, 이들은 사로잡히거나 모두 죽었다. 사로잡힌 왕연 등도 결국 밤에 일부러 무너뜨린 담장에 깔려 죽어 수백명의 고관대작이 또다시 살해당한다. 문제는 그나마 없는 낙양 주둔군이 엄청나게 괴멸되었으며 지방 주둔군은 사마염의 감축과 여태까지 팔왕의 난으로 인한 소모로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물론 지방을 장악한 군벌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도 자기 코가 석자인 경우가 많은 데다가 굳이 수도인 낙양을 구원할 이유도 없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군대 없는 국가가 돼버린 꼴이다.
이 어처구니 없는 팀킬로 낙양은 유총이 보낸 유요, 석륵, 왕미, 호연안 등의 흉노족 군대의 공격으로 무너졌고, 동탁이 파괴한 지 100여 년 만에 또 다시 파괴되어 폐허가 된다. 이후 흉노의 유총이 결국 낙양을 함락, 대장군 오왕 사마안이 사망하고, 회제 사마치는 유총에게 끌려가서 최후를 맞았으며, '''사마염의 아들들은 단 한명도 살아남지 못하고 모두 죽는다.''' 장안으로 도주하여 뒤를 이은 사마안의 아들 사마업이 장안에서 민제로 즉위하였으나 세력권은 극히 적었다. 근방인 홍농에 사마월의 형인 남양왕 사마모(부하에게 살해당함)의 아들 남양왕 사마보가 있었으나 사마보는 사마업을 구원하지 않았고, 사마보는 부하에게 살해당한다. 사마업은 마침내 항복해 사마치와 같은 운명을 맞으면서 결국 서진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 흉노의 침입을 '영가의 난'이라 한다.
이후 화북 지방은 여러 민족이 난립하는 혼란기가 도래하고, 장강 이남은 유일하게 살아남은 서진 황족인 낭야왕 사마예가 과거 손오 지역을 근거로 하여 여명을 잇게 되는데 역사는 이를 동진이라고 칭한다.

4. 사건 정리



4.1. 타임라인


  • 291년
양준 VS 사마위 + 가남풍
사마량 + 위관 VS 사마위 + 가남풍
사마위 VS 가남풍
  • 300년
가남풍 VS 사마륜 + 사마경
사마륜 VS [36]
  • 301년
사마륜 VS 사마경 + 사마예 + 사마영 + 사마옹
  • 302년
사마경 VS 사마예 + 사마영 + 사마옹
  • 304년
사마예 VS 사마영 + 사마옹
  • 306년
사마영 + 사마옹 VS 사마치 + 사마월
그러니까, 291년 이래로 대략 '''한 놈이 나댐 → 나머지가 합동으로 조짐 → 그 가운데 한 놈이 나댐 → 나머지가 합동으로 조짐 → 그 가운데 한 놈이 나댐 → 나머지가 합동으로 조짐'''의 테크를 탄 걸 알 수 있다.[37]

4.2. 등장인물


[image]
8왕의 봉토. 하지만 성도왕이나 하간왕처럼 분봉지와 실제 병력을 가지고 지배한 거점이 다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아서 큰 의미는 없다. 책봉된다고 반드시 부임하는 것도 아니고 실제 팔왕의 병력은 작위가 아니라 무관직에서 비롯하였기 때문이다. 하간왕이지만 진서장군으로 관중의 병력을 가진 하간왕이 그런 예. # 출처
일련의 사건을 주도한 종실왕과 그 활약상은 다음과 같다.
  • 여남문성왕(汝南文成王) 사마량(司馬亮)
    • 선제 사마의의 3남, 무제 사마염의 숙부. 혜제 사마충을 기준으로는 작은할아버지.
    • 황실의 가장 큰 어른으로 양준이 죽은 뒤 자동으로 정권을 인수받았다가 사마위에게 살해되었다. 사실 이 사람은 난을 일으킨 게 아니라 모살당한 것이므로 팔왕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 어찌보면 팔왕의 난 중에서 가장 불쌍한 인물. 독발수기능의 난 때 고전하는 아군을 구원하지 않아 참패를 면치 못하게 만든 부하 유기를 살리려고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돌려달라고 요청할 만큼 착한 사람이긴 한데 양준이 자신을 축출하고 권력을 독점하려 할 때 맞서 싸우지 않고 지방으로 도주하고, 양준이 몰락한 뒤에는 권력을 잡은 뒤 공이 없는 사람들까지 벼슬을 다 나눠주면서도[38] 정작 사마위를 지방으로 좌천시키려 하다가 빡친 사마위에게 공격당할 땐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다가 살해당한 인물. 사마가문의 나이많은 웃어른으로 남은 여생 보내고 있었는데 가남풍의 계략에 말려 가장 처음 목숨을 잃는다.
  • 초은왕(楚隱王) 사마위(司馬瑋)
    • 무제 사마염의 5남. 혜제 사마충의 이복동생, 장사왕 사마예의 동복형이다.
    • 여남왕을 주살했지만 그 자신도 가남풍에게 주살당했다. 가남풍의 계략에 이용당한 사냥개. 다른 사마씨들과는 달리 가장 행동력이 있던 인물이었는지 모든 일이든 화끈하게 결정하고 처리했다. 양준 일당이 척살당한 뒤 자신을 몰아내려는 사마량에게 반감을 품고 가남풍과 힘을 합쳐 사마량과 위관을 척살한 뒤 자신의 공로를 자화자찬하다가 가남풍에게 토사구팽당했다. 죽기 전에 가남풍이 사마량, 위관을 척살하라고 지시한 교지를 사형수에게 보이며 내가 왜 죽어야 하냐며 징징거렸다고 하는 굴욕적인 최후를 맞았다. 사실상 팔왕의 난의 원흉이라고 불리어도 손색이 없다.
  • 조왕(趙王) 사마륜(司馬倫)
    • 선제 사마의의 9남, 무제 사마염의 숙부. 혜제 사마충의 작은 할아버지.
    • 가남풍을 주살했지만 결국 야심을 드러내 제위에 올랐다가 사마경 등에게 주살당했다. 사마륜은 혼자서 결단 내리는 건 별로 없고 참모 손수에게 질질 끌려가기만 했으며 가남풍을 척살한 뒤에는 혜제 사마충을 몰아내고 황제가 되어 사마충의 손자를 죽이는 만행을 저지르다가 다른 왕들에게 공격당해 3개월 만에 손수와 함께 주살되었다. 남에게 휘둘리기만 하고 세력도 압도적이지 않은 주제에 찬탈하다가 망했으니 좋은 평가를 내리긴 어렵다.
  • 제무민왕(齊武閔王) 사마경(司馬冏)
    • 제헌왕 사마유의 아들, 무제 사마염의 조카. 혜제 사마충의 사촌형제.
    • 거점은 허창(許昌)으로 조왕을 주살했다. 사마경은 본래 지혜롭고 남들에게 인자한 성품이었다는데 처음에는 사마륜과 함께 했다가, 사마륜이 황제가 되어버리자 다른 왕들과 힘을 합쳐서 사마륜을 잡아죽였다. 그리고 나서 권력을 독차지하고 요직에 측근들을 앉힌 뒤 지나친 향락과 사치를 일삼다가 결국 다른 사마씨들에게 통수 맞고 죽는다.
  • 장사려왕(長沙厲王) 사마예(司馬乂)
    • 무제 사마염의 16남. 혜제 사마충의 이복동생. 초은왕 사마위의 동복동생이다.
    • 거점은 낙양(洛陽)으로 조왕과 제왕을 주살했다. 그나마 팔왕의 난 중에서 정상인에 가까운 사람인데 황제로 즉위한 사마륜을 패고, 이어서 향락에 흠뻑 빠지며 국정을 농단하는 사마경을 몰아내고 혜제를 구출하기 위해 100명의 선봉대를 친히 이끌고 낙양에 진군해 황제를 구하고 사마경을 척살했다. 이후 자신의 형인 혜제를 충실히 보필하고 다른 왕들과 협치를 하여 엉망이 된 제국의 체제를 재정비하고 지방을 통제하려 노력하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사마옹의 꾀임에 넘어간 사마영이 배신을 때리는 바람에 위기에 처했다. 그래도 절대 열세인 상황에서도 분전해 사마영을 고전케 했지만 사마월이 느닷없이 역습을 가하는 바람에 끝내 자식들과 함께 사로잡혔다. 그후 사마옹의 부하 장방에 의해 산채로 화형당했다. 팔왕 중 가장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사람, 장방의 부하들조차 너무 잔인한 최후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
    • 무제 사마염의 6남. 혜제 사마충, 장사왕 사마예, 초왕 사마위의 이복동생.
    • 거점은 업(鄴). 조왕, 제왕, 장사왕을 순서대로 주살했다. 사마영은 본래 똑똑하고 백성들에게 인자한 사람으로 인망이 두터웠다고 하는데 처음 행보는 의기로왔으나 곧 사마옹에 의해 흑화해버렸다. 사마예와 힘을 합쳐 사마륜을 축출하고 권력을 얻었다. 하지만 사마륜, 사마경을 잇달아 몰아낸 뒤에는 황태제가 되려는 야욕에 빠져 사마옹의 꾀임에 넘어가 사마예를 통수쳐서 죽여버렸는데, 왕들 사이에서 완충제 역할을 하고 있었던 사마예의 죽음으로 사실상 서진의 마지막 희망이 끊어진다. 그 후 사마월+사마치 연합군이 자신을 몰아내려 하자 흉노족과 손을 잡고 맞섰으나 형세가 불리해지자 혜제를 버리고 도주했다가 후에 사마옹에게 통수맞고 잡혀죽는다.
  •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
    • 사마방의 3남 안평헌왕 사마부의 손자, 태원열왕 사마괴의 장남, 무제 사마염의 6촌. 혜제 사마충의 재당숙(7촌 삼촌뻘).
    • 거점은 장안(長安). 역시 조왕, 제왕, 장사왕을 순서대로 주살했다. 사마영 흑화의 일등공신. 이리 붙었다 저리 붙었다한 전형적인 기회주의자로 사마륜이 득세할 땐 그와 손을 잡았다가 사마경, 사마예, 사마영이 사마륜을 공격하자 세 왕 편에 들었다. 그 후 사마경이 타락하자 사마영, 사마예와 힘을 합쳤고, 황태제가 되려는 야욕에 사로잡힌 사마영을 부추겨 사마예를 치게 해 사마예를 잡은 뒤엔 산채로 불태워 죽였다. 이후 이미 오랜 싸움으로 힘을 잃어버린 사마옹은 사마영과 흉노까지 끌어들여 힘을 합쳐 사마월+사마치와 맞서 싸웠으나 형세가 불리하자 사마영을 잡아 죽게 한 뒤 사마월에게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본인도 사마월에게 죽는다.
  • 동해효헌왕(東海孝獻王) 사마월(司馬越)
    • 사마방의 4남 사마욱의 손자, 고밀문헌왕 사마태의 차남, 무제 사마염의 6촌. 혜제 사마충의 재당숙.
    • 성도왕과 하간왕을 주살했다. 다른 사마씨들 난리칠때 혼자 숨죽이고 지켜보다가 대충 정리가 되었다 싶으니까 튀어나온 기회주의자. 물론 그 명분은 어지러워진 천하를 바로잡겠다는 것이지만, 당연히 말이 안되는 소리다. 처음에는 기세좋게 밀고 나가다가 흉노까지 합세한 사마영+사마옹의 세력에 밀렸는데 이에 질세라 선비족을 끌고와서 맞불을 놔버렸다. 결국 최후의 승리자가 돼서 사마옹까지 잡아죽였지만 이 개판으로 인해 이미 서진의 영역안에는 흉노와 선비족이라는 큰 위험이 깊숙히 자리잡힌 상태였다. 혜제에게 독이 든 떡을 먹여 죽였다는 음모론도 있다. 사마치를 황제에 올렸는데 그후 영가의 난이 발발해 사방에서 이민족들이 들어오고 유연의 흉노족과 석륵갈족이 낙양으로 쳐들어오자 이를 막기 위해 지방에 파발을 띄워 당장 낙양으로 오라고 명령하는 등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정적이나 위험 인물들에게 잔인하기로 유명했고 그 와중에도 권력을 독점하고자 사마치의 측근들을 주살해 그를 분노하게 했다. 결국 사마치는 사마월을 숙청하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음모가 발각되어 사마치의 배신을 알게 된 그가 분사해 피를 토하고 죽은 후 서진 정권은 순식간에 와해되었고 이민족들이 서진을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그 후 태위 왕연이 10만의 병사 및 백성들과 함께 그의 시신을 관에 싣고 동해로 도망가다가 석륵의 군대에 붙들려 몰살당하고 사마월의 시신은 불태워졌다.
  • 팔왕에 들어간 여남왕 사마량보다는 예장왕 사마치가 팔왕에 들어가는 것이 더 합당하다는 평이 있다. 단지 사마치가 사마월의 대리로 즉 3대 황제 회제가 되었으므로 황제의 예후상 팔왕에서 빠진 것으로 보인다. 대부분의 역사서에서 지목하는 여남왕 사마량은 단지 초왕 사마위에게 살해당했을 뿐이지만 사마치는 사마월과 함께 팔왕의 난에 가담하여 성도왕과 하간왕을 주살한 인물이다. 사마치가 황제로 즉위하여 공식적으로는 팔왕의 하나로 분류하지 않는다고 하나 그의 행적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일부 역사서에서도 그가 팔왕의 난을 일으킨 인물 중 하나임을 명시하고 있다. 저 팔왕의 분류 자체가 진서 권59에 실린 8왕의 열전에 따르는 듯 하다. 저런 식의 다른 대표적 예로는 5호16국의 16국이 있는데 실제 저 시대의 나라는 더 많았지만 역사서 16국 춘추의 예에 따라 16국으로 대표국들을 분류한 것...

사마치는 사마월과 힘을 합쳐 사마영+사마옹을 격파하고 황제가 되었지만 영가의 난으로 완전히 몰락하고 흉노족이 세운 전조의 황제 유총에게 술을 따르며 말을 몰아주는 신세로 전락했다. 이에 신하들이 통곡하자 유총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겨 사마치를 죽여버렸다. 사실 사마치는 명석한 사람이었고 국정을 게을리하지 않는 성실한 성품의 소유자였으나 사마월의 전횡을 미워한 나머지 그를 죽이려 했다가 일을 그르쳤고[39] 결국 패망했다.
아래는 팔왕의 난과 관련된 주요 인물의 '''간단한''' 계보도. 황제 및 추존황제는 굵게 쓰고 8왕은 작위를 빨갛게 썼다. 각 인물들의 휘를 맨 뒤에 포함했다. 당연하지만 어차피 성은 다 사마씨라서 생략.
'''고조 선황제 의'''
'''세종 경황제 사'''
제헌왕 유
'''제무민왕 '''
'''태조 문황제 소'''
'''세조 무황제 염'''
'''효혜황제 충'''
민회태자 휼
진헌왕 간
'''효민황제 업'''[40]
'''초은왕 '''
'''장사려왕 '''
회남충장왕 윤
'''성도왕 '''
오효왕 안
[41]
'''낭야왕→효회황제 '''[42]
[43]
'''여남문성왕 '''
낭야무왕 주
낭야공왕 근
'''중종 원황제 예'''[44]
'''조왕 '''
안평헌왕 부
태원열왕 괴
'''하간왕 '''
동무대후 욱
고밀문헌왕 태
'''동해효헌왕 '''
사마염을 중심으로 '''불과 7촌 이내 사람들끼리''',[45] 더 편하게 생각하면 사마의의 부친인 사마방의 손자~현손자끼리 '''서로 죽고 죽였으니''', 게다가 일반인들끼리도 아닌 국가 지배계층들이 다스리라는 나라는 안 다스리고 1~2년 동안도 아니고 '''장장 15년'''간이나 이런 난리를 계속 벌여댔으니 나라가 폭삭 망하는 건 당연지사.[46] '''가정이 무너지고 사회가 무너지고라는 것을 엄청난 스케일로 정말 완벽히 실천한 셈이다.'''

5. 기타 창작물에서


[image]
토탈 워: 삼국의 첫번째 챕터팩이 이 시기를 배경으로 발매되었다. 희대의 개막장 시대란 평과 삼국지와 관련이 없단 인식이 커서 기존 삼국지 팬층이 두터운 한국 및 중국에서는 반발이 있는 편이다. 사실 삼국지와 아예 관련이 없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일단 사건 자체는 삼국지가 끝난 직후이므로 삼국지는 아닌 셈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삼탈워 본편의 유니크 무장이 심각할 정도로 부족한 상황에서[47] 무장을 추가할 생각은 안하고 별 뚱딴지같은 DLC가 먼저 나왔다는 데 있었다.
반면 서양인들 기준으로는 이 게임을 플레이하기 이전부터 삼국지 팬이었던 경우가 적고, 왕좌의 게임 때문인지 황제 자리를 놓고 일족들끼리 전쟁을 일으켜 서로 죽고 죽이는 막장의 시대라는게 꽤 매력적으로 느껴진 모양이다.[48] 사실 팔왕의 난, 영가의 난의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기존의 한족 세력의 화북 상실과 육조시대남북조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역사적 의의가 적지 않은 시대다. 삼국시대보다 이후 위진남북조, 육조시대 관련 연구가 훨씬 더 많은게 현실이기도 하고. 이렇게 연구가 넘쳐나는 시대를 버리기도 아까웠을 것이라는 행복회로가 당시에는 있었다.
그러나 실제 팔왕의 난 DLC는 출시하고 난 뒤에도 큰 반향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망해버렸다. DLC 출시 이후 유저가 고작 6천명 정도만 증가했을 정도며 그렇게 찔끔 오른 유저들도 몇주 안돼서 다시 다 빠져버렸다. 토탈 워: 삼국의 유저층은 삼국지라는 이야기의 매력으로 유입된 유저들이 대다수였기 때문에 삼국지와 전혀 관련이 없는 팔왕의 난은 애시당초 기존 유저들의 흥미를 이끌어낼 수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상술했듯 호평을 보였다는 서양측에서도 반응이 미적지근한 편인데, 중국 역사 중에서 가장 인지도 있는 파트 중 하나인 삼국지 시대조차도 서양권에서는 마이너에 속하는데 그 삼국지 시대에 비해 훨씬 인지도가 떨어지는 시대를 낸 시점에서 당연히 예상되는 결과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무슨놈의 군주들이 죄다 Sima Sima Sima Sima냐???'''라는 불평도 무시하기 힘들 정도였다. 단순히 서양인들의 무지라고만 하기도 힘든게 중국인이나 한국인들도 이 사마씨 왕족들 제대로 구분할 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나마 삼국지에 나오는 사마의, 사마염, 사마부, 사마유 등의 아들이나 손자 라는 식으로 아는게 대부분. 애시당초 이런 인식을 없애려면 이들이 황족이라는 설명을 충분히 해야 하는데...
그 뿐만 아니라 고증도 좋지 못해 논 플레이어블 세력 중에서는 사마씨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가상인물이다. 거기에 이름만 바꿔 달았을 뿐 성의라곤 1도 없는 미칠듯한 중복 모델링은 덤.
[1] 중앙에 대한 지방의 대대적인 역습으로 사실상 나라가 작살났다는 점에서 팔왕의 난은 후한 말 18로 제후들의 동탁 토벌전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2] 十一月, 辛巳, 太醫司馬程據獻雉頭裘,帝焚之於殿前。[3] 이것이 사실상 결정타라 봐도 무방하다. 사마의나 사마사의 경우 조상의 전횡과 촉, 오와의 전쟁상황이라는 참작의 여지가 있었던 반면, 사마소의 대에 일어난 현위 황제 시해는 그럴 여지도 없었는데다 이에 대한 책임을 전혀 지지 않았다. 후대의 인물들도 보면 폐위 후 죽이는 일은 있었어도 적어도 현직 황제를 살해하는 일은 진짜 드물었다. 설령 죽여도 일단 폐위시켜 '황제' 직위를 박탈하고 나중에 적당히 핑계를 대 암살을 했지 현직 황제를 백주대낮에 대놓고 살해하는 일은 없었다.[4] 연의나 민담에선 조비가 보낸 자객에게 살해당했다고 하는데, 이는 촉한 소열제 유비의 칭제를 정당화 하기 위한 장치일 뿐이고, 정사에서는 공작위(산양공)를 받고 조비보다 8년이나 더 편안히 살다가 천수를 누리고 사망했다.[5] 그나마 조방 시기, 제갈량의 북벌을 막아낸 공이 있기는 한데 이건 고평릉 사변 이전의 일인지라...[6] 그 덕에 결국 위나라는 중원 통일에 실패했으므로 그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7] 한자 획이 조금 다르긴 하다.[8] 이게 진명제가 진나라 건국과정이 어땠는지 재상 왕도에게 물었다가 조모 시해건을 듣고 내뱉은 한탄이다. 뭐 진짜로 오래 못 가긴 했지만 100년은 채웠다. 그나마 위진남북조 시대의 왕조 중에 100년 넘게 간 건 동진과 북위 둘뿐이었으니 상대적으론 오래 가긴 했는데, 제대로 임금 노릇을 해봤던 휘두른 황제는 진명제가 마지막이다. 진명제 자신도 반란을 막다가 죽었고, 이후 황제들은 모두 어리거나 어리석거나 해서 제대로 통치한 자가 한 명도 없다.[9] 이를 두고 혹자들은 '제갈량은 천하를 셋으로 나눴지만 사마의는 무려 열여섯으로 나눴다'고 비웃기도 한다.[10] 즉, 충을 내세우는건 진작에 황제 시해를 저지른 사마소 때문에 전혀 내세우지 못하고 당대의 교리인 유교를 배척한다는건 또 말이 되지 않으니 차선으로 내세운 유교적 가치관이라 봐도 무방하다.[11] 원래 삼년상은 이런 의도가 아니었다. 공자가 삼년상에 대해 비판한 재야에게 자식은 태어나 3년은 지나야 부모 품에서 벗어날 수 있기에, 무릇 부모를 위해 3년상을 치르는 것이 천하에 통하는 상례인 것이다 라고 했듯 원 목적은 달랐다.[12] 원소는 자기 생모가 아닌 원가의 정실부인의 3년상을 치르고 곧 이어 자기가 태어났을 때 이미 고인이었던 '호적상' 아버지 원성의 3년상을 이어서 치르면서 6년상이라는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행했고 이를 통해 얼자라는 태생적 약점을 씻어내고 당대 청류파 명사들과의 교류를 통해 명성을 쌓을 수 있었다.[13] 選曹郞. 관리 선발 담당이다.[14] 그리고 기세가 오른 반란군들은 제만년을 앞세워 칭제까지 해버린다.[15] 손수는 젊은시절 하급관리로 근무할 때 태수도 아니고 태수 아들인 반악에게 싸커킥까지 맞는 대 굴욕을 겪는 등 당시 위진사회의 갑질에 엄청나게 학을 떼고 있었을 사람이었다. 과연 그가 훗날 흑화하게 된 게 저런 사회의 상황과 전혀 관련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16] 그리고 몇 년 더 끌다가 맹관이 제만년을 진압한 후, 사마융은 그 공으로 대장군, 녹상서사로 영전하게 된다.[17] 당시 중국에는 유리 공예술이 없었다. 그럼 이 유리그릇이 어디서 온 물건이냐 하면, 무려 '''로마 제국'''이나 페르시아에서 수입해 온 물건...[18] 헌데 당나라 이후로도 안 없어졌다. 왜냐하면 하필이면 소동파가 그 극약을 극찬했기 때문[19] 검소함을 중시한 공자도 관이오에 대해서 "그 양반 없었으면 우린 오랑캐와 뭐가 달랐겠나?" 라고 평가했을 정도. 그렇다면 오히려 그렇게 호사스러운 생활을 누릴 수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당시의 사회 경제가 고도로 발달하고 있었다는 징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자면 만일 옛날 조선시대 사람들이 이 시대의 우리를 보면 높은 확률로 사치한다고 여길 가능성이 높다. 옛날 사람들 중 대다수는 지금 사람들보다 더 많이 먹는 건 밥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쌀밥은 별로 먹지도 못했다. 삼시세끼를 제대로 챙겨먹는다는 개념도 없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마음껏 먹는 고기, 계란, 우유, 떡, 과자, 밀가루 음식 등은 조선시대에는 어지간한 부자도 쉽게 먹기 힘든 고급품인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마음껏 멋는 것도 2000년대부터지, 1990년대만 해도 그렇게 편하게 먹을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지금 이렇게 할 수 있는 건 이전보다 경제가 더 좋아졌기 때문이다.[20] 실제로 진서 4권, 혜제편을 살펴보면, 우박이나 지진, 서리, 홍수, 가뭄, 기근, 전염병, 태풍과 같은 자연 재해에 관한 기록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21] 이공범, 『위진남북조사』, 2003, 234~235쪽 참조.[22] 그나마 뇌물의 경우엔 후진국에서는 오히려 경제가 돌아가는 원동력이라도 되는 경우도 있지 이쪽은 노답 그 자체다.[23] 노포(魯褒)는 진혜제 시대의 인물로, 전신론을 지은 것 외에는 자세한 행적이 남아 있지 않다.[24] 위의 실질적 건국자인 조조는 십상시의 난을 두 눈으로 목격한 사람이다.[25] 그나마 다행이었던건 유전자가 남달랐던 건지 조씨와 하후씨 위주로 구성했는데도 이들의 능력들이 뛰어난 편이라 조예 때까지는 아무 문제없이 돌아갔다. 조진, 하후상, 조휴 등..[26] 황족, 외척, 환관은 보편적으로 황제가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힘을 실어주었던 사람들이며, 이는 중국사 내내 지속되는 현상이다. 이들에게 힘을 실어주었을 때도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들을 등한시하는 것 역시 황권 유지에 있어서는 좋지 않은 방법이다.[27] 특히나 당시 이들을 제어해야 할 조방이 어렸음을 감안하면 측근 중심 정치는 결국 제어할 사람이 그러한 능력이 없으면 붕괴되기 쉬운 체제였음을 보여준다.[28] 황실 종친들이 중앙 정부에 대항한 대규모 반란의 예시로는 오초칠국의 난도 있다. 그러나 오초칠국의 난은 조정의 권위도 강력했고, 태위 주아부로 결집한 군대도 멀쩡했으며, 반란에 가담한 황족 중에도 이탈자가 상당수 나왔다.[29] 이는 진서 양준 열전의 "帝自太康以後 天下無事 不復留心萬機 惟耽酒色 始寵後黨 請謁公行"란 표현 그대로다.[30] 사마의의 3남이자 사마소의 바로 아래 동생. 사마염의 숙부 가운데 가장 연장자.[31] 현재 위치가 아니다 지금의 뤄양시는 수나라때의 낙양성을 기초로한 것으로 당대의 냑양성은 현재 뤄양시에서 북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대에 세워진 최초의 불교 사찰인 백마사가 낙양성 동쪽에 바로 붙어 있어 구글 어스등을 쉽게 찾을 수 있다.[32] 공교롭게도 42년 전에 고평릉 사변으로 사마의에게 숙청된 조상의 집이었다.[33] 사마의의 아들이자 사마소의 이복동생으로 백부인 소생이다.[34] 사마충이 직접 사마위를 지목해 이 사람이 직접 옥새를 빼앗은 역적이라고 언급했다.[35] 딸들까지 합하면 25명의 자식을 두었다.[36] 사실 팔왕의 난 가운데 유일한 방어 성공 케이스지만... 그렇기 때문에 묻히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게다가 다른 왕을 죽인 적이 없는 사마량은 위관과 함께 정권을 장악한 적이 있지만 사마윤은 정권을 장악한 적이 없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37] 여담으로 이 전개는 이전의 다른 진나라의 멸망 테크와 비슷한데, '''이 두 진나라는 모두 晉이라는 한자를 쓴다.''' 춘추오패의 진나라는 마지막 생존자인 삼진이 사이좋게 진나라를 셋으로 쪼개 먹는 걸로 끝났지만.[38] 이런 일 때문에 기강이 안 선다며 부함이 여러가지로 간하였지만 따르지 않았다고 한다.[39] 그런데 마냥 그르쳤다고 볼 수 없는게, 사마월을 놔 두는 게 사마치에게는 굉장히 위협적인 일이었다.[40] 제4대 황제. 영가의 난으로 낙양이 무너지고 서진이 망하자 장안에서 등극하지만, 역시 얼마 못가 망한다. 이로써 '''서진은 완전히 망했다.'''[41] 백부 진헌왕 간의 양자가 됨.[42] 제3대 황제. 8왕의 난을 수습하고 황제로 즉위하지만, 얼마 못 가서 영가의 난으로 낙양이 무너지면서 망한다..[43] 백부 세종 경황제 사의 양자가 됨.[44] 제5대 황제. 낙양이 무너지면서 회제가 잡혀 붕어하고, 장안이 무너지면서 민제까지 잡혀 붕어하자, 건업에서 새로이 황제로 즉위한다. 이것이 동진의 시작.[45] 현대 핵가족 사회에서 7촌은 아주 멀게 느껴지지만 친족관계가 밀접했던 고대 사회에서는 매우 가까운 관계이다. 불과 60년대만 해도 7촌은 가까운 관계였다. 애당초 부계혈족 8촌까지는 유복친이라 하여 상복을 입을 만큼 가까운 관계로 규정되었으니 고대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바로 와닿게 설명하면, 당신의 손자와 당신 사촌의 자식이 정확히 7촌간이다.[46] 이후 명나라 시대에도 정난의 변이라는 내전을 4년간 벌이긴 했지만 그래도 그때도 이정도는 아니었다. 결정적으로 사직도 온전히 보존했고[47] 순유는 첫턴에 정강에게 죽고 삼국지 최고의 메이저 히로인인 초선이나 책사계 탑티어 순욱조차 클론 일러였다. 인물 비중이 높은 삼국지 특성상 난리가 날 수밖에.[48] 실제로 해당 작품의 황건적 DLC에서 나오는 하의의 대사에선 대놓고 밤의 경비대의 맹세를 오마쥬한 부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