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남풍

 


<colbgcolor=#800080><colcolor=#ece5b6> '''서진의 황후'''
'''惠皇后 | 혜황후'''

'''시호'''
혜황후(惠皇后)
'''출생'''
256년
'''사망'''
300년
'''재위'''
'''서진의 황후'''
290년 ~ 3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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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賈)
''''''
남풍(南風)
'''부모'''
부친 가충(賈充)
모친 곽괴(郭槐)
조부 ||[[가규|{{{#000 가규(賈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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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이름 논란
3. 생애
4. 평가
4.1. 긍정적 평가
4.2. 부정적 평가
5. 미디어 믹스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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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賈南風
(256 ~ 300)
진혜제 사마충의 황후. 아명은 시(峕). 시호는 혜황후(惠皇后). 아버지는 가충, 어머니곽괴.

2. 이름 논란


세설신어전소(世說新語笺疏)에 인용된 왕은(王隐)의 진서는 가황후의 자가 남풍이라고 하고 있다. 태평어람이 인용한 진서에서는 당나라에서 편찬한 진서와는 다른 진서를 인용한 모양인지 가황후의 자는 남풍이라고 되어 있다. 근데 태평어람에 적은 또 다른 왕은의 진서 구절에는 가 남풍이라고 적혀있다. 마지막으로 당나라에서 편찬된 진서[1] 후비전 상에는 가황후의 휘가 남풍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뒤죽박죽이다(...). 오죽했으면 중국어 위키백과도 이름이나 자가 모두 남풍이 될 수 있다고 쓰고 있다.
당나라에서 편찬한 진서는 진이 멸망한 뒤에 편찬되었고 오류가 많은 걸로 유명한데 반해, 왕은은 진나라 당대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왕은의 진서를 따라 남풍은 휘가 아니라 라고 보는게 정설이라는 말이 있다. 사실 왕은의 진서는 이렇듯, 가남풍의 이름에 대해서 앞뒤가 안 맞는 서술을 하고 있으므로 지금 이 문제에 관해 관찬 진서보다 신뢰성이 높다고는 할 수 없지만 워낙 관찬 진서를 못 믿는 사람이 많아서 그런 듯 하다.
일단 당대에 여성의 이름, 그것도 진짜 이름인 휘를 언급하는 것은 매우 꺼려지는 일이었기에[2] 따라서 그녀의 자나 호가 아닌 휘가 실제로 남풍이었을 확률은 상당히 낮다고 볼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물론 진서를 비롯해 남북조 시대 황후들의 휘는 다 사서에 기록되었으므로 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당장 위에 나온 황후들의 휘만 봐도 그렇다.

3. 생애


가남풍은 원래 검은 얼굴에 키가 작달막한 추녀라고 얘기되는데, 그 일화는 <진서>에 소개되어 있다. 후에 세상에 보다 잘 알려지게 된 이유는 나라 당현종 시절에 이한이 지은 몽구에 세세하게 설명하면서부터다. 이를 짤막하게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다.
진무제 사마염이 태자비를 고를 때 당시 권신이었던 위관[3]과 가충의 딸을 두고 저울질을 할 때였다. 최종적으로 위관의 딸을 고르고자 신하들을 불러두고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였다.
"위씨의 딸은 풍채가 크고, 살이 희고 고우며, 위씨의 집안은 대대로 지혜로워 그의 딸 역시 어질고 지혜를 겸하고 있다. 반면에 가씨의 딸은 키가 작고, 피부는 검고 거칠며, 상이 좋지 못하다. 경들은 어떠한가?"
가충은 자신의 딸이 위관의 딸보다 어질지 못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으므로 가충의 처 곽괴무원황후에게 뇌물을 먹여 권신인 순의와 순욱을 움직이게 하였다. 순의와 순욱은 사마충이 워낙 백치이므로 미인이 황태자비가 되면 후에 바람날 것이지만, 지독한 추녀인 가남풍은 자기가 추녀임을 알고 있으므로 백치 남편에게 만족할 것이라며, 가남풍이 더욱 좋다고 진무제를 설득하였고 결국 진무제는 가남풍을 훗날 진혜제가 되는 사마충의 태자비로 책봉하게 된다. 하지만 순의와 순욱의 주장과 달리 후일 이 백치 남편에게 만족 못한 가남풍은 애인을 두었다.
원래 가남풍의 여동생이자 사마충보다 한 살 어렸던 가오(賈午)를 태자비로 삼으려고 했으나, 가오는 나이가 어려서 성인 옷을 입지 못했기에 가남풍이 내정되었다. 그래도 권신이었던 아버지 가충 덕에 270년인 당시 15세의 나이에 사마염의 아들인 13세의 사마충결혼했으며[4] 질투가 심해 손수 몇 사람을 죽였고 임신한 시첩에게 창을 던져 그 아이가 칼날에 맞아 유산한 일도 있었다. 이에 사마염이 화가 나서 낙양 북서쪽에 있던 금용성을 수리하고 가남풍을 폐비시켜 그 곳에 유폐하려고 했지만 순욱, 풍담, 양요, 조찬 등이 "어려서 저러는 거고 나이 먹으면 알아서 나아질 거다"라며 말려 폐비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녀가 결혼한 황자 사마충이 워낙 백치이고 어리석은 인물이라[5] 황제 사마염이 나라를 망칠까 불안해서 아들보다 자기 동생인 사마유에게 권좌를 물려주려고 하였으나 사마유가 독살당하면서 이는 무산된다. 가남풍이 독살하였다고 추측되긴 하나 확실한 증거나 기록은 없다.
훗날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결론적으로 사마유의 죽음 하나 때문에 서진은 멸망의 길로 접어든다. 물론 애당초 창업 당시부터 제대로 썩은 나라여서 사마유가 살아봤자 그다지 오래갔을 것 같진 않다. 서진이 망한 건 가남풍과 몇몇 사마씨 귀족들 탓만이 아닌 전반적으로 나라 자체가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아들에게 권좌를 물려줘야 했던 사마염은 그러면 나라를 맡길만한지 시험이라도 한 번 보게 해야겠다고 생각해 사마충을 시험 치게 하자 가남풍은 시험문제를 출제하는 장홍에게 뇌물을 먹이고 시험답안을 대신 쓰게 해[6] 황제를 속여 안심시키고 사마충을 정식 황태자로 인정하게 만든다. 거기다 사마충의 아들이자 황손 사마휼이 총명한 것을 보고 그나마 안심하고 만다.
사마염이 죽고 290년에 사마충이 황제가 된 뒤 황제의 외척인 양준이 국가대권을 쥐자 291년에 가남풍은 초왕 사마위에게 밀서를 보내 군대를 이끌고 황도로 올라오게 해 양준을 죽였으며 사마위를 영태자소부로 임명했다가 모함을 씌워 죽이고는 마침내 나라의 대권을 차지했다. 여기에다 양준의 딸이자 시어머니에 해당하는 무도황후 양지를 폐서인하고 친모인 방씨와 함께 영녕궁에 감금했다가, 이후 방씨를 처형했다. 양지는 어머니를 구명하고자 스스로 머리카락을 자르고 통곡하면서, 시어머니 체면에 며느리에게 '소첩'을 자칭하고 머리를 조아려 가며 어머니를 살려달라 애원했지만, 가남풍은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방씨가 처형당한 뒤 절망한 양지는 곡기를 끊고 스스로 굶어 죽었다.
이 일도 가남풍이 대단히 배은망덕한 일을 한 것인데, 태자비 시절 가남풍의 투기가 매우 심해서 사마염이 폐서인하려 하자 양지가 이를 말리고 가남풍에게는 행실을 반듯하게 하라고 여러번 권고했었다. 가남풍은 이게 자기 자리를 지켜주고 도와준 것인데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황후가 무제에게 자신을 깎아내리는 줄 알고 원한을 품어서 이렇게 잔인한 처사를 한 것이었다. 그런데 또 양태후가 굶어죽고 나니 무섭긴 했는지, 저승에서 선황에게 호소할까 두려워 시체를 거꾸로 엎어서 빈소를 차렸고 귀신 쫓는 부적과 약물 등을 쓰기도 했다.
남편인 황제는 어리석은 백치였으므로 정치는 모두 가남풍이 대신했으며, 밤 생활도 황제는 고자처럼 혼자놀이를 시키고 저잣거리의 미소년이나 절륜한 무관, 궁중 의원들과 놀아나며 음란한 사생활을 즐겼다. 미소년들은 밤에 몰래 거리에서 보쌈 해 와서 침소로 데려와 즐긴 뒤 바로 목 졸라 죽여서 상자에 넣어 강에다 버리곤 했다고 한다. 이런 행실이 얼마나 심했는지 정략적으로 가남풍과 협조 관계였던 가모, 배위, 장화 등이 괴로워하며 고뇌할 정도였다.
관련 일화로, 낙양성 남쪽의 어느 미소년이 가남풍에게 끌려갔는데 가남풍이 그를 특히나 아껴 죽이지 않고 비싼 선물들을 주고 풀어줬다. 그런데 그 소년이 갑자기 화려한 옷을 입고 다니자 도난 사건의 범인으로 의심을 받아 조사를 받게 되었는데, 그 소년의 이야기를 듣고 가남풍이 드물게 살려준 이로 알아채서 풀어줬다고 한다.
299년에 산기상시 가밀이 동궁에서 강의할 때 태자(사마휼)에 대해 오만하게 굴자 성도왕 사마영이 이를 보고 질책했고 가밀이 화가 나서 이를 얘기하자 사마영을 쫓아내 평북장군으로 업을 지키게 했다. 가밀은 태자 사마휼을 술에 취하게 해서 반역의 뜻이 담긴 글을 쓰게 했다가 그 글로 모함해서 사마휼을 폐태자로 만들었다. 이 후 가남풍은 사람을 시켜 사마휼을 죽이려다가 죽지 않자 약 찧는 절구로 때려 죽였다.[7]
태자 사마휼이 살해당한 것이 계기가 되어 다른 황족들과 제후들이 일제히 난을 일으키면서 300년에 마침내 조왕 사마륜과 제왕 사마경이 군대를 이끌고 황도로 입성해 가남풍은 붙잡혔다가 폐위되고, 여름 4월 9일에 금용성에서 독인 금설주를 마시게 해 자결하게 했다. 이때 가남풍은 독약을 강제로 마시게 되었고 사마륜을 역적이라고 비난하며 피를 토하고 죽는다. 그녀의 일족은 멸족당했고 이 반란이 팔왕의 난이며 사망할 당시 가남풍의 나이가 44세였다. 아들은 없었으며 딸만 다섯 있었다.
가남풍이 주살된 후에는 상서우복사 양현지(羊玄之)의 딸 양씨(양헌용)을 황후로 삼았다.

4. 평가



4.1. 긍정적 평가


이처럼 죽은 뒤 온갖 욕설을 다 먹는 가남풍이지만 역사서에서 보면…
"비록 암주(혜제)와 학후(가남풍)[8]의 조정이라고 간주하기도 하나, 천하는 이와 같이 편안하였다."라는 기록도 있고, 의외로 백성들 살기에는 좋았다는 얘기가 존재한다. 왜냐하면...사실 '''이때의 백성들은 누가 왕이 되든지 간에 전혀 상관없었다. 왕이 바뀌었다는 것은 단순히 세금을 내는 사람이 바뀌는 것 뿐이고, 그 왕이 자기들 괴롭히지만 않으면 만사 OK였다...'''[9] 그리고 또한 혼란의 시기일수록 종교 문화가 발달하였으니... 이것도 어찌 보면 아이러니.
다만 중국의 많은 왕조에서 황제 자신의 위세 과시나 유흥을 목적으로 과도한 증세를 시도하거나 지나친 부역을 부과해 백성들의 삶을 도탄에 빠뜨린 암군들이 적지 않았던 걸 보면, 적어도 저 문구는 가남풍 시절에는 그런 학정이 없었다는 얘기도 될 수 있다. 실제로 이런 대형 사업은 거의 없었다.
일부에서는 가남풍을 황족 제후들과 외척들에게서 황권을 굳건히 지킨 여걸로서 높이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선황의 유조까지 숨기며 황궁을 차지하고 앉았던 권신 양준을 제거하며 등장하였고, 정적을 적절히 제거하며 사마충 같은 바보 황제의 제위를 꽤 오래 지킨 것도 정치적 감각 없이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또 시기마다 인재 기용을 대단히 안정적으로 한 점도 의외의 장점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가남풍은 여남왕 사마량이나, 위관, 장화 등 명성과 식견을 두루 가진 정치가들을 적시에 기용하곤 했다. 심지어 제일 황당한 건 인재 기용은 대체로 아주 반듯한 인물 위주로 했단 점이다. 정치적으로 자신의 권위를 높여줄 사람보다는 자신에게 위협이 되더라도 올곧은 사람을 써서 내치를 안정시킨 다음에, 자신과 갈등하게 되면 차도살인하거나 숙청하고 쫓아내는 식이었는데 교활한 성격답게 특히 사람들 사이의 원한관계나 심리를 잘 이용했다.
가남풍을 재평가하고자 하는 사람 중 일부는 조선 문정왕후의 경우처럼 여성이 권력을 가졌다는 걸 몹시 싫어한 유학자 사관들이 가남풍의 행적을 왜곡해 의도적으로 악녀로 만들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또 일각에서는 팔왕의 난의 전개를 보면 가남풍에게 책임을 전가하기엔 팔왕의 난 주동자인 황족들이 너무 막장이었고[10], 되려 가남풍 같이 권모술수에 능하고 세상을 꿰뚫어보는 사리에 밝은 능력 있는 사람이 중앙정부에서 황제를 비호해 주었기 때문에, 그나마 황족들이 가남풍을 두려워하여 감히 난을 일으키지 못했다고 하면서 옹호해 주는 견해도 있다. 실제로 혜제 사마충은 가남풍이 곁에 없고부터는 마구 폐위당하고 복위당하고 생명의 위협까지 겪게 된다.
가남풍의 일반적인 인식이 '나라를 망친 추녀'다 보니 흔히들 간과하는 사실이 있는데 가남풍은 혼돈 파괴 망가였던 당시 상황에서 '''10년 가까이 안정적인 시국을 유지'''했다. 물론 선제 당시의 체제를 이어받은 것 뿐이라는 비판도 있고, 후반에 본격적으로 막장이 되면서 황족들 사이에 피바람을 불러일으키면서는 실드 불가의 영역으로 가고 말았지만...
가남풍이 정권을 잡은 이후 몇 년간 천하는 다소 평온해지는데, 가남풍 이 사람이 권력욕이 세기는 했지만 장화를 중용한 덕분이었다. 장화가 나라를 그나마 그럴듯하게 꾸려 갔다. 그래서 국경지대가 약간 시끄러웠던 정도만 제외하면 이 평온은 가남풍의 집권 내내 이어졌다.

4.2. 부정적 평가


중국 3대 악녀여후, 측천무후, 서태후에 버금가는 악녀로, 최근에는 측천무후를 대신해서 중국 3대 악녀에 가남풍이 들어가기도 한다고 한다. 측천무후(측천무황제)는 "그래도 백성들은 살기 좋았다더라."는 호평을[11] 받는데다 사후 다시 당나라로 돌아가 백년을 버텼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남자 역사가에 의한 피해자 소리도 듣지만, 가남풍은 진나라 왕족들을 숙청하면서 사망 후에 팔왕의 난을 부른 책임이 있고 팔왕의 난 때문에 사실상 진나라가 멸망했기 때문에 나라와 왕실을 함께 결딴냈다는 평가를 피할 수 없다.
심지어 미소년 납치나 간통 같은 엽기적인 행위가 진서에 버젓이 남았다. 전형적으로 개인이 권력을 남용한 경우다. 정치 투쟁 과정도 철저히 숙청 위주여서 개막장이었다. 제각기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비범하고 총명한 사마씨 왕족들을 마구 죽여대서야 자신의 앞날이 밝을 리가 없다.
특히 황태자 사마휼을 살해한 것은 가남풍 자신에게는 결과적으로 자살 행위였다. 가남풍 자신에게 장성한 소생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마휼을 살해함으로서 혜제의 정식 후계자가 사라져 버렸으니 왕족이라면 누구나 황제가 될 야망을 품을 수 있게 됐다. 사마휼이 경계를 피하느라 좀 노는 것에 몰두하긴 했어도 폐해지고 살해당할 수준은 결코 아니었다. 살해 이후 역풍이 불 것을 짐작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권불십년이라고 이미 판단력이 완전히 떨어졌다고 볼 수 밖에 없다.
당장 황태제가 될 욕심에 흑화하여 전면전 수준의 내전을 벌이면서 나라를 결딴내는 데 큰 역할을 한 사마영은 불과 몇 년 전만해도 황태자 사마휼에게 거만하게 대하던 가밀을 대놓고 갈구다가 찍혀서 외지로 좌천되었던 사람이었음을 생각해 보자. 오죽하면 질투와 성깔머리 그리고 인성질로는 가남풍에 절대 뒤질리가 없는 가남풍의 어머니 곽괴까지도 가밀이 싸가지 없게 굴 때마다 혼내가며 병들어 죽기 직전까지 태자를 사랑해야 한다고 그토록 부탁하고 죽었을 정도였는데도 그랬다. 자기 친자식까지 죽게 만든[12] 곽괴의 판단조차도 저랬을 정도로 가남풍의 사마휼 살해는 집안 말아먹기 딱 좋은 짓거리였다. 이렇듯 가남풍의 사마휼 살해라는 만행은 사마씨 친척왕들을 완전히 자극하여 팔왕의 난영가의 난으로 이어지는 혼란기의 원흉이었다. 이후 그 결과 백성들의 삶이 어떻게 됐는지를 감안하면 절대로 좋게 볼 수가 없다.
"천하는 편안하였다"는 것도 바로 다음이 팔왕의 난, 영가의 난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일 수 있다. 궁중정변은 있다고 해도 아예 천하가 갈아엎어지는 전쟁 까지는 아니었으니까. 사실 서진 정권 자체가 안정과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그 당시의 편안한 천하에 대한 공을 역사서에서는 명확하게 가모, 장화, 배외로 인해서라고 서술했다. 저 세 사람은 가남풍 시절 조정의 핵심 인사들로 가남풍과는 가까운 사이였음에도, 가남풍의 난행과 비행을 참다 못해 폐위 논의까지 하게되는데, 저 중 가모는 가남풍의 사촌형제이자 가씨 가문의 당주급인 인물이었다. 세 사람은 가남풍의 성질을 도저히 감당할 자신이 없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달래도록 권유했다가, 그것만으로도 화를 입는다. 특히 가모는 가남풍에게 찍혔다가 홧병으로 죽어버린다.[13] 가모가 가충에게 돌직구를 날릴 정도로 기본적인 사리판단이 될 인물인데다 가씨 가문에서 입지도 강했던 인물이라는 걸 생각해 본다면, 그리고 황후의 권력이라는 게 외척들의 뒷받침 없이 유지되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생각해 본다면 가모 정도 되는 인물은 어떻게든 지켜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14] 가남풍 때 핫한 가씨 집안 남자로 가충의 양자가 된 가밀이 있긴 했지만 저 인간은 애시당초 한씨 집안 인물로 아들 없는 외가에 양자로 들어와 제사나 잇는 인물... 그리고 선비들 불러모아 청담이나 즐기는 딱 그 수준의 인간이어서 능력으로나 덕망으로나 가문 내 위상으로나 그다지 가남풍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인물이 못 되었다. 거기다가 정치감각도 떨어지는 주제에 욕심은 또 얼마나 많았는지 자신이 설쳐대는 걸 싫어해 원수지간이 된 사마휼을 그렇게 이를 갈고 죽이고 싶어하다가 조왕 사마륜의 부추김에 넘어가 사마휼 죽이는데 앞장서게 된다. 당장 가모가 했던 상황판단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 가남풍의 딸 가오의 아들이었으니 가충의 양자라는 가문의 위치를 떠나서 나이도 어리고 뭔가 정통성도 애매한 인물이었는데 하는 짓도 딱 저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저 사마륜이 가씨 가문에 한 일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이렇게 가모가 죽은 후 얼마 안 되어 가남풍은 사마씨에게 역관광을 당하고 모든 걸 잃어버린다.
정치적 감각도 그다지 뛰어나지 않았으며 능력도 사람 죽이는 일에만 잘 썼고 머리도 남 해치는 데만 기막히게 잘 돌아가서 측천무후나 서태후처럼 제도를 세우거나 국가를 주도적으로 이끌지도 못했고[15] 단기적인 안목만으로 일을 추구했으며 그마저도 권력추구가 목적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당장 가남풍을 도와서 양준을 몰아낸 공신이었던 맹관은 제만년을 때려잡는 등 엄청난 활약을 했지만, 가남풍의 폭주에 답 없음을 느끼고 사마륜이 가남풍을 제거할 때 방관하게 될 정도였다.[16] 사마휼 문제로 가모나 장화와는 사이가 멀어졌고, 사마휼의 어머니 사씨를 높이는 문제에서 반대의견을 내세워 가남풍을 기쁘게 했던 배외조차도 어느 순간 가남풍의 폭주를 보면서 이건 아니다 싶어서 가모나 장화와 가남풍 폐위를 같이 논의했을 정도였다. 사마휼과의 관계가 파탄났을 때 쯤이면 막말로 가밀 같은 어리고 멍청한 놈을 제외하고는 정권을 잡고 유지하는 데 엄청난 역할을 했던 공신들마저 다 비판자가 되어서 자기 편이 거의 남아있지도 않았다는 이야기... 가문빨을 이용해 명분과 지위를 차지하고 막무가내로 돌진하는 기세를 통해 허를 찔러 권력을 쥘 수 있었으나 사람들이 맘먹고 상대하자 맥없이 무너졌다.[17] 애시당초 저 가문빨이라는 것도 가문을 유지할 만한 능력있는 사람이 있어야 먹히는데, 그나마 그걸 그럭저럭 유지할 만한 실력은 있는 가모 같은 사람은 적을 만들어 버리고 모함에 이간질까지 도지며 홧병나서 죽게 만들고 가밀 같은 놈이나 설치고 다니는 판에 그런 게 제대로 먹힐 리도 없다. 외모가 추한 거야 뭐 자기 잘못은 아니니 그렇다 쳐도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매우 많았다. 과시욕은 적어서 뭘 세우거나 전쟁하거나 행사하거나 하는 식으로 백성들을 괴롭히지는 않았으나 잠자리 상대를 족족 죽여버렸으니 착해서 그런 것은 절대 아니다.
할아버지 가규는 조씨를 도와 후한을 망하게 만들었고 아버지 가충은 사마씨를 도와 위나라를 망하게 만들었고 가남풍은 팔왕의 난을 불러 진을 망쳐놔서 이 3대의 가씨는 세 나라를 망하게 한 세 가씨라고 불린다. 그런데 사실 이는 중국 특유의 끼워 맞추기에 가깝다. 가규는 한나라 멸망에 적극적인 공헌을 한 것도 아니고 그냥 조조의 신하였을 뿐이다.[18] 가충의 경우 위를 멸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건 맞지만 적어도 진나라 입장에선 개국공신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19] 반면 가남풍은 그런 게 아니라 순수하게 자기 나라를 말아먹은 경우라 선대들하고 비교가 안 된다.
가남풍은 제 가문의 영달에 눈이 멀어 천하의 질서를 어지럽혔고, 특히 쿠데타라는 선례를 만들어 군권이 있는 자들이 대권을 노리도록 한 매우 나쁜 선례를 만든 책임을 피할 수 없다. 말 그대로 그 쿠테타의 원인 그 자체였던 사람이었다. '''패륜을 저질렀고, 무능한 황제를 옹립하고, 황족을 마구 살해해서 모든 문제의 원인을 제공했다.'''

5. 미디어 믹스


역사처럼 추녀로 그려지는 경우, 이와 반대로 역사와 다르게 예쁘게 그려지는 경우로 나뉜다. 고대 중국의 미적 기준이 현대와 많이 다르기에, 추녀라고 알려진 부분이 사실 현대 기준으로도 손색없는 미적 요소라든가(...) 하는 상상력을 덧댄 결과. 황부인과 마찬가지다.

5.1. 삼국지대전


한편 삼국지대전에도 등장했는데, '''쇼걸''' 같은 모습으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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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은 성내수계다. 매력소지자라는 점은 여무장이니 당연하지만 폭란을 왜 가지고 있지... 무력 2, 지력 6, 1 코스트 슈레 기병 그냥 이도저도 아닌 스펙이다. 사실 기병일 필요는 없는 게 함정카드 공성게이지가 발생되어야만 스킬이 발동되기 때문에 딱히 기병이라고 좋거나 나쁜 게 없다... 그냥 개소리다 그전에 다 출진한다. 어차피 노려서 쓰는 인간들은 기병 창병 다 씹어 먹고 잘 쓴다. 성내수계를 쓸 일이 없다면 그저 잉여로운 카드... 아무래도 뇌근[20]들이 넘실대는 군웅 애들만 좋은 먹잇거리가 되어버렸다. 성내수계 쓰는 순간 본격 수학지 대전이 되어버린다. 부활 카운트를 계산해야 하기 때문... 타이밍만 잘 맞춰 갈구면 정말 빡친다. 아 당연히 퇴갤했을 시에는 알려주니 걱정하지 말 것.

5.2. 삼국지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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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만인의 삼국지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본편에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100만인의 삼국지에 등장했다. 능력치는 기대 말자...

5.3. 진삼국무쌍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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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삼국무쌍 BLAST에 일러스트 참전. 등급은 레어다. 상위의 가남풍보단 그래도 역사가 적절하게 반영되어서 컨셉을 뽑았다.[21] 게다가 진삼국무쌍 7에 나왔던 아버지 가충과 마찬가지로 다크포스가 철철 넘치는 인상도 특징. 코에이 트위터에 의하면 황후가 되어 권력을 잡기 위해 암약한 점을 반영하여 본 모습과 야망을 베일로 가린 수상한 여성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조비처럼 막상 삼국지에 등장하는 사마염보다 먼저 참전했으며 나라를 말아 먹는 게 삼국지에서 먼저 나온 손노반은 어리숙하고 귀엽게 나왔다. 이는 두 사람의 부모인 손권과 보연사, 가충의 이미지 차이 때문인 듯하다. 손권과 보연사는 긍정적인 인물상이지만 가충은 처음부터 사마소를 위한 필요악이란 캐릭터를 지니고 나와 악역이나 다름없이 굴었으니.

5.4. 삼국전투기


디즈니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악역인 하트 여왕(퀸 오브 하트)로 패러디되었다. 참고로 황태자비 자리를 놓고 경합했던 위관의 딸은 앨리스.
사마충이 가남풍 모습을 보고 부들부들 떨며 정신줄을 놓아버리는 장면마저 있다(...). 일단 해설에서는 사마충이 원래부터 바보였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마치 만화 내의 묘사로만 보면 자기 아내 될 사람 보고선 충격 먹고 백치가 되어버린 것처럼 보일 정도.
그 와중에 최훈 작가는 '''가남풍이 생긴 건, 저래도 마음씨만큼은 착할 수도 있으니깐 힘내라'''는 말로 사마충을 응원했다.

5.5. 고우영 십팔사략



못생긴 얼굴에 색을 탐하는 모습으로 나오는데, 생김새가 십팔사략 당나라편에 나오는 다른 추녀, 악녀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개성넘치는 디자인을 자랑한다. 진짜 가남풍은 이쪽이 가깝다.
그래도 추녀치고는 귀엽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다...
가남풍에게 끌려간 한 미소년이 테크닉이 너무 절륜해(...) 가남풍이 그를 죽이기 아까워 보물을 주고 풀어줬다. 그런데 허름한 풍색의 소년이 보물을 가지고 있자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병사들이 그를 잡아 취조했는데 하는 말이 '그거 황후마마가 주신 건데요?' 그 말에 크게 놀란(살아남았으니까) 병사들은 그를 풀어줬다. 풀어준 소년이 안도하며 달아나자 병사들이 그 뒷모습을 보고 "남의 마누라를 훔쳤으니 도둑은 도둑이네 낄낄" 하며 손가락질 한다(...).

5.6.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


[image]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에서는 두 명의 가남풍이 존재한다. 게임 출시 때부터 있었던 도사 병종 가남풍과 2019년 6월 업데이트에서 마왕계 병종으로 추가된 가남풍이 있다.
도사 가남풍은 실제 기록상으로 그렇듯 전형적인 추녀로 등장, 마왕 가남풍은 마왕에 의탁한 후 외모를 바꿔 위와 같이 미형으로 등장한다.정확한 설정은 관련 연의가 출시되지 않아 밝혀지지 않았지만 열전을 봐선 마왕 제갈량을 가상루트 엔딩 오장원 제단에서 조조가 퇴치한 이후 마왕이 새로 빙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열전에 따르면 마왕과 손잡고 마왕의 힘을 손에 넣은 가남풍. 표정과 감정을 완벽하게 제어하여 내재된 격한 감정과 마왕의 인격을 좀처럼 드런지 않는다고 한다.
유저들은 마왕 가남풍은 줄여서 마남풍으로 부르는 편. 성우는 김하루.

5.7. 토탈 워: 삼국


DLC 팔왕의 난에 등장.
트레일러에서 화자로 나온다. 트레일러 영상에서는 아주 잠깐 앞모습이 나오지만 흐릿한 원경이어서 외모를 알 수 없다. 홍보 포스터에선 가남풍으로 추정되는 여성의 모습이 등장한다. 정작 인게임에서는 이벤트로만 등장하고 무장으로 나오지않는다. 이는 남편 사마충도 마찬가지.

6. 둘러보기





[1] 현대까지 남아있는 진서는 당나라에서 편찬한 진서이고 왕은의 진서는 소실되어 다른 책에 인용된 구절들만 확인할 수 있다.[2] 당장 우리나라만 해도 유명한 역사 속 여인들은 거의 택호로 알려졌지 본명인 휘로 알려진 경우는 거의 없다. 사임당 신씨만 해도 그녀의 택호는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휘는 아직까지 아무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다. 남성 위인들조차도 자나 호로 더 잘 알려진 사람이 한둘이 아닌데 여성의 휘만 알려졌을 확률은 그보다 더 적을 것이다.[3] 이것과는 크게 연관이 없겠지만 건국공신인 위관은 후에 가남풍에 조종당한 초왕 사마위에게 암살된다.[4] 이때 가남풍의 유모 서의도 같이 궁에 들어왔다.[5] 삼국지에서 능력이 부족하거나 판단력이 떨어지는 인물은 유선이나 하후무 등 많이 있지만 이들이 적어도 정상인의 지능은 가지고 있었던 반면, 사마충은 아예 지적장애 3급 정도의 정신장애를 앓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6] 물론 백점 만점짜리 답안을 써 주지 않고 간신히 낙제를 면할 수준으로 써 줬다. 왜냐하면 사마충의 머리로는 아무리 날고 기어도 백점짜리 답안을 써 내는 건 절대 불가능하기 때문에 백점 만점짜리로 써 줬다가는 대필해 준 게 곧바로 들킬 것이니까.[7] 덤으로 사마휼의 모친 사구도 죽였다.[8] 암주와 학후는 사마충과 가남품을 지칭하지만 둘의 시호가 아니다. 암주(闇主)는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군주'을 말하며 학후(虐后)는 '사납고 모진 황후'를 뜻한다. 참고로 둘의 시호는 각각 혜황제와 혜황후. 다만 저 혜라는 시호도 전혀 좋은 의미로 주어진 시호는 아니었다.[9] 여담이지만, 노자는 이런 왕이야말로 최고라고 극찬했다. 최악은 백성이 욕하고 신음케 하는 왕이요, 그나마 나은 왕이 백성이 칭송하는 왕이고, 가장 나은 게 왕이 뭘 하든 백성이 신경을 안 쓸 정도로 태평성대를 누리게 하는 왕이라고...[10] 가남풍이 죽었는데도 한참동안 팔왕의 난 주동자들 지들끼리 싸운 데다 가남풍이 죽자마자 혜제를 폐제시키고 자신들이 황제를 참칭하는 등등의 사실이 있다.[11] 이 둘은 업적과 실책이 분명하며 철권통치를 하다가 권좌에서 밀려나 몰락했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적어도 백성들을 탄압하지 않았다. 당시 백성들 대부분은 피비린내가 나는 권력투쟁이 벌어진지도 몰랐다.[12] 아들이 유모를 더 따르는 걸 질투하여 패죽였는데 이 일로 아들은 울다 죽어버린다.[13] 여기서 가남풍 폐위에 어정쩡한 태도를 보여서 일이 틀어지게 되는데 큰 역할을 했던 놈이 왕연이었다고...[14] 거기다 가모와 가남풍이 틀어지게 된 결정적 계기가 사마휼 때문이라는 걸 생각해보면 가모의 죽음이 더더욱 가남풍의 사망 플레그가 된다. 가모는 가남풍이 개인감정이고 뭐고를 떠나서 사마휼을 어떻게든 지켜야 된다는 입장이었고 가남풍은 그 사마휼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했다. 문제는 대안도 없는데도 그 꼴이었다는 것이다.[15] 그나마 양준이 적이 많았고 나름 측근들의 복도 좀 있어서 정권을 잡고 어느 정도 꾸려가긴 했으나 결국 그 복은 자기가 다 차버렸다. 그리고 자기 감정대로 하려고 했던 일은 자기 목 메다는 데나 쓰이고 말았다.[16] 그리고 이 인간은 사마륜의 전횡을 방관하다가 사마경에게 찍혀서 죽는다.[17] 애초에 가문도 라이벌이었던 위씨에 대면 그렇게 대단하지도 않았다.[18] 물론 조씨를 거들어 후한을 멸망시키고 위를 세우게 한 이들도 있지만 그냥 조정에 임관하여 묵묵히 자기 일을 하는데 새로운 국가와 정부가 생기며 거기서 계속 자기가 하던 일을 이어간 이들도 있다.[19] 물론 가충이 자기 딸 못지 않거나 오히려 더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욕먹을 거리가 더 많으면 많았지 절대 적지는 않겠지만...[20] 7 뇌근육의 줄임말. 무력만 겁나 높고 지력이 겁나 낮은 것들... 예를 들면 호로관 바퀴벌레 여포라든지 여포라든지 여포라든지.[21] 코에이의 역사게임이 과장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고증을 잘 하는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