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 폭동
1. 개요
백인 폭동은 미국 백인들에 의해 발생한 폭동으로 인종 폭동을 일컫는 다른 말이다. 거의 대부분의 백인 폭동이 백인들이 일방적으로 흑인 동네를 약탈하고, 미국 흑인들을 고문하고 학살하고 린치하는 것이었다. 20세기 초중반에 주로 일어났다. 흑인 대이동, 미국 흑인 민권 운동과 함께 미국 인종차별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다.
2. 상세
2.1. 흑인 대이동, 그리고 시작된 백인 폭동
흑인 대이동을 통해 미국 남부에 90%가 거주하던 미국 흑인들이 북부, 서부, 동부의 대도시들로 이주하며 그 전까지는 남부에서 차별받고 린치당하던 흑인들을 감싸주는 듯 했으나 대이동 전까지 북부, 서부 및 동부 대도시에 흑인들이 별로 없었지만 대이동을 통해 많은 흑인들이 이주를 하기 시작하며 북부, 서부, 동부 지역에 거주하던 백인들과 갈등이 빚어지고 만연하던 인종주의에 따라, 흑인들을 차별하기 시작했다.
또 당시 사회적으로 제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파병간 미국 백인 군인들도 많았는데 이들이 없는 동안 이주를 한 남부 출신 미국 흑인들이 이들의 일자리를 차지하면서 돌아온 백인 군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은 "저 흑인들이 우리의 일자리를 빼앗았어"라며, 흑인에 대한 악감정을 표출하게 되고 이를 빌미로 백인들은 폭동을 일으킨다.
백인들은 갓 이주를 와 터전을 잡고 있던 흑인들의 동네를 약탈하고 불태우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흑인들을 마구 린치하고 살해하고 폭행하면서 흑인들에게 피해를 입혔다. 1919년 여름에 특히 이런 폭동이 많이 일어났는데, 이를 '''붉은 여름'''이라고 한다.
1919년 여름에 전미에서 이런 폭동이 많이 일어났고 이 붉은 여름 사태 이후 미국 정부와 주 정부들은 인종 폭동을 근절하기 위해 인종 분리 정책을 적극적으로 실시하기 시작했다.
백인의 인종 폭동은 주로 북부(중서부), 서부, 동부 주들에서 발생했다. 남부에선 인종 폭동이 발생하지 않았지만 남부의 흑인들은 매일매일을 린치당하고 폭행당했다. 참고로 남부 이외 지방에서도 끝난 줄 알았던 인종 폭동이 털사 인종 학살이라는 더 끔찍한 참사로 재현되며 미국 흑인들을 더 암울하게 만들었다.
2.2. 최악의 백인 폭동: "털사 인종 학살"
그러나 2년 뒤 미국 역사상 제일 참혹한 사건 중 하나인 털사 인종 학살이 발생했다.
사건 경위는, 엘리베이터에 한 흑인 슈샤인보이와 백인 여자가 타고 있었는데 엘리베이터가 크게 흔들렸다. 그에 이 슈샤인보이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본능적으로 무언가를 잡았는데 그게 그 여성이었다. 이 여성이 소리지르자, 당시 자신들보다 훨씬 잘 사는 흑인 중산층/상류층을 아니꼽게 보았던 백인 시민들이, 이 슈샤인보이에게 혐의를 씌우고 그걸 빌미로 흑인들이 힘들게 일궈놓은 부와 재산을 다 불살랐다.
그리고 그 동네의 흑인 중산층과 상류층을 보이는 족족 학살하거나 고문하거나 린치했다. 이로 인해 300명 이상의 흑인이 학살당하고 8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으며 블랙 월 스트리트라고 불리던, 미국 전체에서 가장 부유한 흑인들이 거주하던 동네가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이 사건이 근처의 백인 시민들에 의해 일방적으로 자행된 일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데 이 백인 폭도(근처 시민들)이 폭동을 일으킬 조짐을 보이자 이에 그 백인 여성이 "이 흑인 슈샤인보이는 아무런 잘못이 없어요. 제발 이 흑인 남성을 용서해 주세요"라고 했지만 백인 폭도들은 그냥 무시했다.
이 참사 이후 인종 분리 정책은 더 강해졌으며 이 인종 분리 정책은 30여 년 후 미국 흑인 민권 운동의 원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