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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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역사
2.1. 개요
2.2. 식민지 시대
2.3. 미국 독립 전쟁 ~19세기
2.3.1. 미국 독립 전쟁
2.3.2. 미국 독립 이후
2.3.3. 노예 해방 선언
2.3.4. 미국 남부 흑인들의 지옥같은 일상
2.4. 20세기 초중반
2.4.1. 흑인 대이동
2.4.2. 미국 흑인 민권 운동
2.5. 20세기 후반
2.6. 오늘날 (21세기)
3. 헤어 스타일
4. 정치
5. 사회
5.1. 빈곤 문제
5.2. 비만 문제
6. 정치 성향
7. 범죄
7.1. 경찰 혐오, 범죄자 옹호 현상
8. 소수 집단 우대정책
9. 유명 인물
9.1. 정치
9.2. 과학
9.3. 군사
9.4. 음악
9.5. 배우
9.6. 모델
9.7. 스포츠
9.7.3. MLB[1]
9.7.6. 기타 스포츠
9.8. 코미디언
9.9. 기타
10.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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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어: African-American, Black American
이 문서는 미국에 있는 흑인들에 대해 설명한다. 아프리카계 미국인(African-American)이란 표현은 의미만 놓고 보면 흑인과 마그레브북아프리카 출신의 아랍인이나 남아프리카백인까지 포함할 수도 있겠지만 보통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을 말한다.[2] 그리고 카리브해 국가 출신 흑인들은 African-American은 아니지만[3] 이들도 미국 내 "Black American" 범주에 들어간다. 일반적으로 미국 흑인이란 노예 신분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유입된 이후 당시 식민지 백인 기득권에 의해 열등하고 무지한 인종으로 치부된 인종차별적인 역사를 가지고 현재까지 미국에서 생존해 있는 흑인을 총칭한다. 2017년 기준 인구는 약 4,700만 명 정도로 미국 인구의 13.5%를 차지한다. 미국에서 살고 있는 흑인은 아프리카 거주 흑인들 다음으로 숫자가 많다.[4]
다만 아프리카 흑인들을 피부색으로 한 그룹으로 묶기엔 무리가 있다. 유전적으로 동부, 서부, 중부, 남부 등의 지역별 아프리카 흑인들은 '''코카서스 계열과 동아시아인 만큼의 차이가 난다.''' 하지만 미국 내의 흑인들의 대부분은 노예 판매가 창궐했던 서부 아프리카 혈통이긴 하다. 동부, 중부, 남부 아프리카 혈통인 미국 흑인들은 조상이 미국의 노예제도 폐지 이후에 생계 등의 이유 때문에 자발적으로 이주해온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국 흑인을 분류함에 있어서 억지도 많았다. 대표적으로 미국 남부 정부기관에서 시행한 one drop rule이 있다. 이 룰은 흑인 피가 단 한 방울이라도 있으면 흑인이라고 분류하는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적인(순혈주의) 인종 구별 방법이다. 원 드랍 룰으로 분류하면 3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미국 흑인들이 유럽계 인종들과도 아주 다양한 혈연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일률적으로 정의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역사학자 헨리 게이트 주니어(Henry Gate Jr)는 흑인의 혈연 관계를 다음과 같이 구분한다. 현재 미국 흑인 인구가 약 4,700만명에 미국 인구의 13.5%에 달하는데 미국 흑인 중 중 58%는 12.5%의 유럽 혈연(증조부모 중 한 명이 백인)이며 19.6%는 25%의 유럽 혈연(조부모 한 명이 백인)이며 5%가 미국 인디언, 단 1%가 아버지나 어머니가 유럽 혈연이다. 즉 원 드랍 룰로 분류하게 되면 완전한 순혈의 흑인은 없다고 봐야한다. 애초에 미국이라는 나라가 다민족 국가로서 모든 출신을 명료하게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다 섞여 있다. 그래서 원 드랍 룰 같은 것은 집어치우고 미국 흑인이란 미국에 살고 있는 흑인들을 총칭한다고 보면 된다. 반대로 순수 백인이랄 것도 없다.
20세기초까지는 그저 단순히 유색인종(Colored) 또는 흑인과 히스패닉계 백인 사이의 혼혈의 경우 물라토(Mulatto)로 분류되었다. 이후 니그로[5]라고 불렸다. 사람들의 의식이 진보할수록 명칭 또한 변해갔다. 처음에는 소위 니그로에서 블랙, 블랙에서 아프로 어메리칸, 아프로 어메리칸에서 에프리칸-어메리칸으로 바뀌었다. 이 처럼 미국 내 흑인을 말하는 명칭은 시대별로 변화해 왔다. 1997년부터 미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Black American 또는 African-American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가 검은색인데 왜 아프리칸-아메리칸 같은 말로 나를 지칭해야 하냐?"라며 블랙을 더 좋아하는 흑인들도 꽤 있다.[6] 비공식적 자리에서는 블랙이라는 말이 자주 쓰이고 부정적인 뉘앙스는 거의 없는 편.
미국 흑인은 아프리카 본토의 흑인과는 생김새의 차이가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위의 원 드랍 룰을 설명한 문단에 서술되어 있듯이 미국의 흑인들 역시 타 인종의 피가 섞였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에서 태어나는 흑인들은 대부분 혈통적으로 일정 비율 이상 백인의 피가 섞여 있다고 보면 된다. 또한 유전학으로 분석해보면 대서양 연안의 서아프리카 지역 흑인과 유사점이 많다. 노예 무역의 주된 대상지가 이 곳이었으므로 당연한 일.
혼혈인의 경우엔 자기의 정체성에 따라 백인인지 흑인인지를 택하기 때문에 한국에서 보기엔 백인임에도 자신을 흑인으로 인식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것은 one drop rule의 영향이기도 하다. 그 때문에 미국에서는 여전히 순수 백인 아니면 백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데 따지고 보면 또 순수 백인이란 것도 없다. 그냥 백인 처럼 생기면 백인이라고 여긴다. 아니 미국에서 인종 구분은 별 의미가 없다.
파푸아뉴기니, 솔로몬 제도, 바누아투, 피지오세아니아에서 온 멜라네시아인들도 피부가 검지만 이들은 아프리카계 혈통인 대다수 미국 흑인들과 달리 오스트랄로이드이며, 네그리토계열이 가장 적으며 미국 내 분류에서 흑인이 아니라 '태평양 섬 주민'으로 따로 분류된다.
출산율이 미국 내에서 비교적 높은 집단 중 하나다. 미국에 거주하는 백인들과 비교해봤을 때 넘사벽일 정도로 높고 히스패닉계 미국인보다는 조금 떨어진다. 그리고 인구 증가 지역 분포도에서 대부분 미국 남부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다.[7] 다만 전반적으로 보았을때 흑인들도 출산율이 떨어지는 추세이기는 하다. 지금은 피임률이 높아지면서 덜했지만 미국이 높은 청소년 임신으로 한창 골머리를 앓았을때 청소년 임신률에 기여하는 집단으로 손꼽혔다. [8]

2. 역사



2.1. 개요


미국 흑인 사회는 미국이 건국될 때부터 시작했다. 그들의 역사는 미국의 근현대사를 함께 이뤘다고 봐도 무방하다. 남북전쟁 땐 미국 흑인으로 구성된 정규군인 제54 매사추세츠 의용보병연대[9]가 있었으며 자유를 위해 함께 싸웠다. 1863년 링컨의 노예제 폐지 이후 자유인이 된 흑인들은[10] 자유인이 됐음에도 여전히 당시 주류였던 백인을 따라하며 동경했지만 적어도 북부 지방에서는 '백인'들이 '흑인'들의 문화를 즐기러 보는 일이 '가능'해졌다. 물론 북부 지방에서도 '흑인'들의 문화를 보는 것은 '백인'으로서 해선 안되는 '부도덕'한 짓이라는 '인종적' 편견이 존재했다.

2.2. 식민지 시대


1526년, 최초의 흑인 노예가 현재의 사우스캐롤라이나 지역에 있었던 스페인 식민지에 유입되며 식민지 노예 역사가 시작되었다. 당시 아메리카 대륙은 토착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분쟁으로 아주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노예들은 종종 그 틈을 타서 반란을 일으키거나 도주하는 일이 잦았다. 1600년 이후 부터는 가혹한 노동 환경 때문에 사망하는 노예들이 많아지자 아프리카에서 대규모로 노예가 유입되었다. 이에 관련해서는 노예무역 문서를 참고하면 좋다.
여타 다른 유럽 국가들도 다 마찬가지로 흑인을 매수, 매입 하거나 경매에 붙이는 등 반인륜적으로 물건 취급 했지만 특히 대영제국 식민지는 가장 악명이 높았다. 루이 14세 시절에 있던 "흑인법" Code Noir[11] 때문에 임금 없이 보통 4~7년간 담배밭에서 강제 노동을 시켰는데 죽으면 그냥 갖다가 버리는거고 복무 기간이 끝나거나 평생을 일해 본인을 스스로 매수하면 노예 신분에서 풀려날 수 있었다. 다만 자녀는 신분 상속이 없었다. 자녀를 매수하던지 아니면 자녀보고 강제 노동을 마치라고 하던지 둘 중 하나다. 영국 식민지였던 현재 메사추세츠 지역은 최초로 노예제를 합법적으로 인정한 곳이기도 하다.
1640~1650년대 부터는 노예에서 해방된 흑인들이 본인의 농장을 가지거나 아니면 다른 유럽 정착민과 결혼하기도 했다. 특히 스페인 제국은 현재 플로리다지역도 담당하고 있었는데 대영제국과 경쟁 중 이었으며 노예들이 플로리다로 오면 가톨릭으로 개종하는 대가로 자유를 주기도 했다. 이들의 후손은 스페인 제국 정착민과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는 일이 많았는데 이들의 후손이 혼혈인 메스티소물라토[12]가 되었다.
1699년 식민지 의회는 자유 흑인이 늘어나자 모든 자유 흑인들을 추방하는 법을 만들었다. 이는 사실상 아메리카 식민지에 있는 모든 흑인을 노예로 규정한 것이다. 다만 스페인 제국은 여전히 본인을 스스로 매수해 자유를 얻는 것은 허용했다. 1775년까지 아프리카계 식민지 인구는 인구의 20%를 차지하고 영국인 다음으로 가장 큰 민족이 되었다.

2.3. 미국 독립 전쟁 ~19세기



2.3.1. 미국 독립 전쟁


1776년 미국 독립 전쟁 초기 대부분의 주에서는 흑인 노예에게 군복무의 기회를 주면 안된다는 법안이 있었다. 그러나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병력이 부족해진 미국 독립군도 자유를 주겠다는 조건을 내걸고 노예들을 전투에 내보내는데 힘썼다. 대영제국령 버지니아 주 총독 던모어도 노예들에게 대영제국 편에서 싸우면 자유를 주겠다고 말하며 노예들을 대거 사들이기 시작했다. 당시 노예 해방이라는 기대감에 탈출한 노예들도 아주 많았다. 노예를 비싼 값에 쳐줄테니 대영제국 군대에 팔아 넘기도록 농장주들을 장려하기도 했다. 노예 1명당 약 950달러 정도의 가치가 있었고 농장주는 많은 이득을 챙겼다. 수 만명의 노예들이 영국군에 합류했지만 던모어가 사망하자 그 약속은 사라지고 만다. 이 시기에 흩어져 있던 흑인들이 전쟁하겠다고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기 때문에 커뮤니티가 많이 발전했고 가스펠 음악도 많이 발전할 수 있었다.

2.3.2. 미국 독립 이후


1783년 전쟁이 끝나고도 미국 독립군, 영국군에서 복무했던 그들중 일부만이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 특히 대영제국은 패전 이후 그들이 매수한 흑인들을 본인들 식민지에 다시 끌고 가서 강제 노역을 시켰다. 그리고 그들이 현재 영국 흑인중 한명이 되었다. 영국 흑인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 참고. 독립 이후, 당시 미국에서는 투표에 있어 흑인 노예들을 어떻게 봐야 할 것인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 미국 헌법 제정 당시 미국의 주는 14개였다. 2년에 한번씩 뽑는 하원과 각 주에서 2명을 뽑는 상원이 있는데 미국 흑인 노예들에게는 3/5 타협을 적용했다. 이는 흑인 5명이 백인 3명과 똑같다는 것으로 에이브러햄 링컨이 1863년 1월 1일 노예 해방 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을 하고 남북전쟁 이후 미국 수정 헌법 제 13조가 비준됨으로서 3/5타협도 심의되었다.

2.3.3. 노예 해방 선언


물론 그 노예 해방 선언이란, 노예제도 때문에 생기는 미합중국의 분열 즉, 남부와 북부의 갈등으로 인한 대립 때문에 타협(Compromise) 본 것으로 인간 대 인간의 입장에서 노예 해방은 아니었다.[13]그래서 어설프게 미국사 공부하고 미국 흑인에게 링컨 이야기 하면 역사 공부 다시 하라는 말을 들을 수 있으니 주의바람. 이건 마치 미국인이 한국인에게 식민지근대화론 말하는거랑 비슷하다. 그나마도 남북전쟁 직후 1865년부터 1877년까지의 "재건기"(Reconstruction Era)라는 시기에는 미군이 구 남부연합 지역에 주둔하여 노예해방을 감독하였고 흑인들의 정치참여도 증가하여 흑인 상원의원들도 나올 정도였다.

2.3.4. 미국 남부 흑인들의 지옥같은 일상


그러나 재건기가 끝나고 미군도 철수하자 남부는 짐 크로우법을 도입하여 흑인들의 투표권을 제도적으로 봉쇄하고 당시 범죄자들을 강제노역에 사용할 수 있다는 법을 악용하여 흑인들을 여전히 준노예로 부리고, 또 린치를 가했는데 매일매일 많은 흑인들이 린치당했으며 린치를 가한 백인들은 이걸 기록으로 남겼다. 현재 린치당한 미국 흑인의 기록이 많이 남아 있는 이유는 이 당시 미국 백인들은 흑인들에게 린치를 가하는 걸 추억으로 생각했고 이에 린치당해 죽은 흑인들을 자랑스러운 "기록" 으로 남겼기 때문이다. 사진의 대중화 이후에는 사진으로 기록을 남겼다. [14] 자신이 흑인 몇 명을 죽였고 그래서 나는 애국자라는 기록도 있다. 결국 이런 참혹한 일상으로 인해, 1916년에 흑인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2.4. 20세기 초중반



2.4.1. 흑인 대이동




2.4.2. 미국 흑인 민권 운동




2.5. 20세기 후반



2.6. 오늘날 (21세기)



3. 헤어 스타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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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흑인 헤어 스타일은 아프리칸 고유의 헤어 스타일로서 인종차별과 백인 주류 문화에 대한 저항을 표출하는 수단이 되었다. 미국 흑인은 아프리카 전역에 걸쳐 노예로 잡혀왔기 때문에 신체 유형과 머리카락의 색, 모발 또한 곱슬머리부터 부드러운 머리까지 다양하다. 곱슬머리의 경우 강한 햇빛으로부터 머리를 보호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말한다. 미국 흑인의 75%는 아주 심한 곱슬머리를 가지고 있으며 15%는 부드러운 곱슬이다. 이런 헤어를 가진 미국 흑인들은 주로 에티오피아, 누비아, 소말리아 등 습한 지역과 사하라, 수단에서 발견되며 흑인들 대부분은 검정색이나 브라운 헤어를 가졌지만 블론드, 레드 톤을 가지기도 한다.
고대 흑인 문명에서는 헤어 스타일을 관리하는 스타일러들은 높은 지위를 누려왔으며 헤어 드레싱은 클렌징, 오일링, 다양한 브레이즈(Braids), 랩(Wraps), 트위스트(Twists) 그리고 다양한 헤어 악세서리로 스타일링 하는 것을 다 포함하는 아주 복잡하고도 고도의 기술이다. 1602년 네덜란드 탐험가인 피터 드마리가 본인 저서에서 아프리카인들은 16가지의 헤어 스타일이 있다고 언급한 바와 같이 미국 흑인들도 헤어 스타일링에 많은 시간과 관심을 기울인다. 한국에서는 단순히 레게머리라고 부르지만 크게 드레드락(Dread lock), 콘로우(Cornrow), 아프로(Afro) 등이 미국 흑인들이 주로 하는 헤어스타일이다.
드레드락은 드레드나 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관리를 하지 않아 엉클어진 헤어를 말한다. 캐러비안의 헤어 스타일이며 사실 용어자체는 15세기 경 노예선에 묶여 몇 달을 씻지도 못하며 시간을 보내 자라난 머리를 보고 백인들이 끔찍하다(Dreadful)고 말한 것에서 유래한다. 사실 드레드락은 고대 이집트나 고대 아시아 일부 및 미국 인디언에서도 발견되는 헤어스타일로 그 역사가 매우 길다. 한국 사람들이 소위 레게머리라고 부르는 그것이다.
콘로우는 다른 말로는 캐인로우(Canerow)라고도 한다. 콘로우는 머리를 땋아 만드는 브레이즈 스타일이다. 브레이드이란 말 자체는 줄을 땋듯이 헤어를 땋은 것을 의미한다. 특히 콘로우라는 말은 옥수수(corn) 모양과 비슷하다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며 고대 아프리카에서는 농업을 의미하기도 했고 예술로서 받아들여졌다. 그도 그럴게 콘로우 머리를 만드는데는 엄청난 비용과 수고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노예가 된 아프리카 출신이 미국에 정착하면서도 그 헤어스타일을 고수했고 현대까지 전수되었고 전 세계에 알려진 계기가 된 것은 2000년 파리패션쇼[15]에서 런웨이 모델들에 의해서다.
아프로는 아프로 아메리칸에서 나온 말이지만 사실 내추럴(Natural)로 잘 알려져 있다. 미국 사람들에게 아프로 헤어라고 하는 것은 헤어에 어떤 처리를 안하고 그냥 자연스럽게 기른 머리를 말하기 때문에 내추럴이라고 하면 알아 듣는다. 아프로는 항목이 있으니 해당 항목 참조.
노예제가 있을 당시 미국 흑인들은 가꾸지 못했고 자기 주인에 의해서 어떤 주어진 일에 따라서 헤어 스타일이 결정되었다. 아니면 더럽다는 이유로 마치 강아지 털을 밀듯 주인이 다 밀어버리거나. 야외 농장이나 밭에서 일하는 흑인들은 흘러내리지 않고 관리가 쉬운 콘로우를 즐겨 했고 집안일을 하는 노예들은 머리를 다 밀어버리고 백인 머리를 흉내낸 가발을 착용했다. 가발은 실제로 꽤 비싼 물건이었기 때문에 가발을 구하지 못하면 최대한 백인 처럼 스타일링 했다. 식민지 미국에서 이상적인 헤어스타일은 스트레이트 또는 적당한 웨이브 헤어 였기 때문에 그들과 다른 모질을 지녔던 흑인들은 슬프게도 스스로 자책하거나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백인의 헤어를 모방하는 것이 생존에 유리하다고 여겼다. 왜냐하면 그때 당시에는 최대한 백인처럼 보여야만 했다. 다만 소수의 흑인들은 아프리카 고유의 헤어스타일을 지키고자 했다. 이와 같이 노예제 시기에 흑인 헤어스타일은 지배 이데올로기인 식민주의 저항을 표출함을 알 수 있다.
다행스럽게도 현재 미국 흑인들의 그 특유 헤어 스타일은 미국 흑인 선조들이 아프리칸으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지켜온 고유 문화이며 현재는 다양한 레게, R&B힙합 뮤지션들에 의해서 전 세계로 빠르게 전파되었다.

4. 정치


최초의 흑인 연방상원의원은 하이럼 리블스(Hiram Rhodes Revels, 1827-1901)이다. 공화당 출신으로 미시시피 주 연방상원의원을 지냈다.[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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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블스는 1869년부터 1871년까지 연방상원의원으로 재직했으며 연방상원에서 유일한 흑인이었다. 1875년에는 미시시피에서 블랜치 브루스(Blanche Kelso Bruce, 1841-1898)가 연방상원에 올라 1881년까지 재직했다. 그 후 상원에 흑인이 없다가[17] 1967년 공화당의 에드워드 브룩(Edward William Brooke, III, 1919-2015)가 매사추세츠에서 연방상원의원으로 당선됐다. 그는 1979년까지 연방 상원으로 재직했다. 1979년부터 1993년까지 흑인 상원의원이 없다가 다시 1993년에 첫 민주당 출신의 흑인 상원의원인 캐럴 브라운(Carol Moseley Braun, 1947-)이 나왔다. 그녀는 일리노이에서 당선됐으며 1999년까지 재직했다. 그리고 2005년에 버락 오바마가 일리노이에서 연방상원의원으로 당선된다. 미국 대통령이 되면서 2009년에 사퇴하고 로널드 버리스(Roland W. Burris, 1937-)가 일리노이에서 새로 연방상원의원이 된다. 이렇게 해서 2012년까지 미국 역사상 흑인 상원의원은 여섯 명이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영향 때문인지 2013년 113기 상원의원에서는 흑인 상원의원이 셋이나 나왔다.
  • 코리 부커(Cory Booker), 1969년생, 민주당, 뉴저지. 이 분은 흑백 혼혈인데 본인을 흑인으로 인식하는 경우다.

5. 사회


흑인들의 사회는 현재에 들어서는 매우 분화, 다양화하였고, 개인주의적으로 변했다. 흑인들의 향상된 사회적 지위 덕에 흑인들은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흑인들의 삶은 여전히 향상되지 않은 면이 있다. 미국 남부에서 플랜테이션 농업에서 대규모 농업기업 식으로 바뀐 후, 흑인들은 대규모로 미 북부, 동부, 서부 대도시에 이주했다.[18] 그들은 흑인 경제학자 토머스 소웰이 말하던 레드넥 문화를 가지고 왔다. 결과 미 남부에서 백인이 보여주던 행위를 그대로 흑인들이 따라하게 되었다.

5.1. 빈곤 문제


상대적으로 흑인들이 많이 사는 지역[19] 백인들이 많은 지역과 비교해봤을 때 가난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이는 인종차별이 아니라 실제로 미국에서 살아본 외국인들과 미국인들이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게 흑인들은 19세기 중반까지 일부 자유인을 제외하면 노예신분으로 살아왔고 지속적으로 행해진 차별 정책과 린치, 백인 폭동 때문에 백인들과 비교해봤을 때 부를 축적할 수 없었고 수준 낮은 교육 환경을 악습으로 대를 이어서 작용한 이유다. 물론 모두 다 대를 이은 건 아니고, 흑인의 빈곤율은 1940년 70% 이상에서 1970년 40% 밑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로 흑인들의 빈곤율은 여러 사회 문제로 인해 빠르게 떨어지지 않고 있다. 이들 빈곤층이 가난을 대물림하는 것. 물론 이중에서 자수성가한 사람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의 흑인 빈곤층이 가난을 대물림한다. 이건 흑인 뿐만 아니라 미국 내의 모든 인종 빈곤층들의 문제이긴 하다.
백인들은 대개 수 백년간 노예를 부려먹으며 부동산 등으로 부를 축적시킨 미국의 주류 인종이다. 현재는 부유층 흑인[20]도 있고 빈민층 백인들[21]도 있긴 하지만 평균적으로 봤을 때 부자라고 하면 보통 백인을 떠올리지 흑인을 떠올리지 않으며 실제로 많은 부자들도 백인이다. 흑인들의 지능이 떨어진다거나 게으름, 유전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고[22] 일반 백인들을 또 백인이 딱히 우수해서라기 보다는 노예제 시절과 그 뒤에 99년간 법적으로 존속된 흑인에 대한 제도적.사회적 차별 때문에 격차가 벌어지는 것.
심지어 미국에는 1930년대에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연방주택국이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는 시스템을 만들었다. '''Redlining''' 이라고 하는데 흑인이 밀집한 빈곤층 거주 지역을 경계 지역으로 설정하고 대출, 보험, 신용카드 발급 등 금융서비스 등을 거부하거나 높은 대출 금리를 요구하는 등의 차별을 두는 것이다. 흑인이 사는 곳에는 부동산 지도에서 빨강색으로 선을 그은 것에서 유래했다. 1968년 공정 주택 거래법(Fair Housing Act)에 의해 불법으로 지정됐음에도 아직까지도 이런 인종차별적인 관행이 있다. 쉽게 말해 흑인은 재산을 불리는 것 조차도 마음대로 못한다. 대출이 가능해도 불리한 대출 조건을 적용받는 등의 불이익이 있기 때문이다.# 미국에 고속도로, 고가도로, 큰 나들목이 위치한 지역이 대부분 흑인 동네인 이유가 이것 때문이다.
흑인 사회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가난의 대물림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 비영리기관인 진취성개발조합(CFED)과 정책연구원(IPS)보고서에 따르면 백인 가구의 평균 부는 2013년 기준 65만6000달러(약7억2천)에 달하지만 흑인 가구의 평균 자산은 약 8만5천달러(9천3백)에 불과하다.[23] 부와 가난의 대물림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만큼 교육도 못받으니 트러블도 많이 발생하고 그런 이미지가 미디어로 만들어지는 것. #
미국 사회의 이해도가 낮은 한국인의 입장으로 봤을 때 미국 흑인들은 그저 열등해서 가난한 것 처럼 보이는데[24] 미국의 주류 인종은 백인으로, 유색인종 혹은 흑인이 백인의 부를 뺏어 오는 것을 철저히 거부하고 있다. 흑인 이야기는 아니지만, 유색인종인 필리핀계 미국인이 자기 집 담벼락에 BLM이라고 적자 다른 백인이 오지랖하는 헤프닝이 괜히 벌어지는게 아니다.

5.2. 비만 문제


미국 흑인 사회의 평균적인 빈곤은 평균적으로 높은 비만율로도 이어진다.# 여러 통계에서 미국 내 여러 인종 중에서 흑인들의 비만율이 독보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흑인이 가난하니까 결국 신선한 야채나 과일, 생선, 생수 같은 제품들을 소비하지 못하고 정크푸드나 먹으니 비만율이 오를 수 밖에 없는 것.# 다만 빈곤 문제 외에도 유전적인 영향도 무시할 수가 없다. 이는 어쩌면 체형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6. 정치 성향


사실 흑인들이 참정권을 처음 가졌을 때부터 1920년대까지는 공화당 지지성향이 강했다. 애초에 공화당 자체가 휘그당이 노예제 폐지에 미온적이라고 반발한 당원들이 탈당해서 만들어진 정당이라 노예제 폐지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던 정당이었고 노예해방선언을 한 링컨 대통령도 공화당 소속이었기에 흑인들도 자연히 공화당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더군다나 이때는 미국 남부에서 민주당의 지지가 강했는데 미국 남부지역의 인종차별주의자들도 상당수가 민주당 소속으로 정치활동을 하고, 이들이 미국 남부에서 흑인들의 참정권을 실질적으로 박탈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25] 민주당에 대한 반감이 거세질 수밖에 없기도 했다. (딕시크랫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1929년 대공황 이후 경제난으로 대다수의 흑인들이 피해를 봤고 이후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뉴딜 정책을 펼치자 대다수의 흑인들이 민주당을 지지하면서 공화당 지지성향이 약해지고 민주당이 우세해졌다. 다만 그래도 이때까지는 상당수 인종차별주의자들이 미국 민주당에 남아있었을때라서 아직 공화당을 지지하는 성향의 흑인들도 적지 않게 남아있었고, 마틴 루터 킹 목사도 공화당 당원이었지만, 1960년대 민권운동 시기 공화당에서 민권운동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민주당에서 케네디 대통령과 란든 존스 대통령대 들어서 흑인들의 권리향상을 약속하자 공화당 지지성향의 흑인들 대다수도 민주당 지지로 돌아서며 민주당 지지가 절대적인 수준에 이르게 된 것이다. 1970년대 이후로는 절대 다수의 흑인들은 민주당을 지지하며 진보적 성향을 갖고있다. 더군다나 로널드 레이건 정부 이후로 공화당이 복지정책 축소를 지지하는만큼 공화당 정부가 들어서면 흑인들에 대한 복지예산을 깍아내는 경향이 있는데다가 인종차별주의자적인 당원들도 상당수있고 심지어 공화당 우세지역에서 흑인들의 참정행위를 방해하니[26] 흑인들 입장에서 공화당에 대한 반감이 강한 것은 당연하다.
2008년 미국 대선 당시 폭스 뉴스의 코믹한 실험은 아직도 유명한데, 당시 공화당 후보였던 존 매케인의 공약을 민주당 후보였던 버락 오바마의 공약이라고 속인 뒤 길거리의 흑인 행인들을 붙잡고 공약에 대한 생각을 물어보았는데, 하나같이 "역시 오바마!"라고 하였다(...).[27] 한마디로 민주당/흑인 정치인들을 맹목적으로 지지한다.
실제로도 2008년 대선에서는 흑인들의 95%가, 2012년에는 93%가 민주당의 오바마 후보에 투표했다. 민주당 후보군 중에서는 민주당의 적자, 주류후보에게 지지를 많이 보내주는 성향으로 인식된다. 민주당 내에서는 오바마의 후계자로 인식되는 힐러리가 흑인들에게 압도적으로 지지를 받고 있는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슈퍼 화요일 경선에 이르기까지 클린턴가에 대한 애정과 민주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힐러리의 매우 효율적인 방화벽 역할을 해주었다. 힐러리가 민주당 경선 참여 백인종들에게는 42%대 58%로 샌더스에게 밀렸지만 흑인층에서는 82%대 17%로 발라버렸다. 앨라배마나 조지아 등지에서는 93%의 흑인이 힐러리로 갔으며 흑인 여성에 한정하면 96%가 힐러리를 지지했다. 20대 백인 남성도 이만큼 샌더스를 지지하지는 않았을걸로 파악되는 현실에서 보면 단순히 지지를 넘는 열렬한 팬심이 작용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2016년 기준으로 미국 흑인의 대략 87%~92%가 힐러리 클린턴을 지지하고 있다고 파악되고 있으며 현재의 오바마를 향한 배타적 지지와 마찬가지로 힐러리를 향한 열정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그렇다고 도널드 트럼프지지한 흑인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흑인들도 숫자가 많은 만큼 여러가지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그 중에는 자신의 이해관계, 신념 혹은 정치 이데올로기에 따라, 아니면 힐러리를 입으로만 자신들을 위하는 위선자로 보는 시각 등등 여러가지 이유로 의외로 트럼프를 지지한 흑인들도 있다. 하긴 트럼프가 멕시코 불법이민들을 추방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데도 "그래야 자기같은 합법 이민자들의 지위가 올라간다"라면서 트럼프의 정책을 지지하는 히스패닉도 있을 정도니.[28] 당장 위에 언급된 팀 스콧 상원의원은 물론 본인의 소속당이라는 측면도 있지만 도널드 트럼프의 백인우월주의 성향 문제로 한창 시끄럽던 와중에도 당당하게 트럼프 지지 연설을 하기도 했다. 도널드 트럼프가 공화당 내에서도 비주류에 가까운 존재이고 기존 공화당 주류 백인 정치인[29] 중에서 같은 당 소속임에도 노골적으로 트럼프에 대해서 반감을 표시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중 일부는 트럼프에게 표를 주느니 차라리 민주당 후보를 찍겠다는 극단적인 발언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을 생각하면 본인의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 트럼프를 지지하는 흑인들도 분명히 있다는 충분한 증거라 할 수 있겠다.
2016년 미국 대통령 선거의 출구조사 결과, 흑인 남성의 80%는 클린턴, 13%는 트럼프에 투표하였고, 흑인 여성의 94%가 클린턴, 4%가 트럼프에 투표하였다.
오바마의 부통령 이었던 조 바이든에 대한 지지 역시 엄청난 수준으로 민주당 경선 초반 흔들리는 조 바이든 이었으나 흑인 유권자가 절반이 넘는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의 대승 이후 승승장구 하며 조 바이든을 후보로 당선시키게 도와줬다. 당연하지만 대선 여론조사에서도 압도적인 지지를 보내주고 있다.
그렇다고 보수 성향의 흑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몇몇 예를 들자면 허먼 케인, 토머스 소웰, 클래런스 토머스, 콘돌리자 라이스, 칸예 웨스트, 콜린 파월[30] 등이 유명하다. 공화당도 노예 해방의 역사가 있음은 부정하기 어려워서인지(오히려 상술했듯 존 매케인 같은 온건파들도 많다.) 흑인을 아예 무시하는 건 아니다.
민권 운동까지만 해도 공화당을 지지하는 흑인들이 많았다. [31] 당장 마틴 루터 킹이 공화당원이었으며[32], 재키 로빈슨, 제임스 브라운 등의 당대 유명 흑인들도 공화당을 지지했다.

7. 범죄


We as black people are never going to be successful, not because of you white people, but because of other black people. When you are black, you have to deal with so much crap in your life from other black people.

우리들은 흑인으로서 절대 성공할 수 없습니다. 백인때문이 아니라, 바로 다른 흑인들 때문에요. 만약 당신이 흑인이라면, 당신은 당신의 인생 속에서 다른 흑인들이 나불대는 온갖 개소리들과 마주해야 합니다.

'''For some reason we are brainwashed to think, if you're not a thug or an idiot, you're not black enough. If you go to school, make good grades, speak intelligent, and don't break the law, you're not a good black person. It's a dirty, dark secret in the black community.'''

'''어째선지 우리는 이런 생각에 세뇌된 거에요. 만약 네가 깡패나 바보가 아니라면, 넌 흑인답지 못한 거다. 만약 네가 학교를 제대로 다니고, 좋은 성적을 받고, 똑똑하게 말하고, 법을 준수한다면, 넌 좋은 흑인이 아니다. 이건 흑인 공동체의 더럽고 어두운 비밀이죠.''' [33]

'''There are a lot of black people who are unintelligent, who don't have success. It's best to knock a successful black person down because they're intelligent, they speak well, they do well in school, and they're successful. It's just typical BS that goes on when you're black, man.'''

'''성공하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흑인들은 많습니다. 그들이 가장 좋은 짓이라고 생각하는 짓거리는 바로 성공하는 흑인들의 발목을 잡는 겁니다. 단지 그들이 똑똑하고, 말 잘하고, 학교를 잘 다니고, 성공할 것 같다는 이유로요. 이건 당신이 흑인으로 살아갈 때 마주치게 될 아주 전형적인 개짓들입니다.'''

- 찰스 바클리 (인터뷰 출처)

흑인 사회에서 범죄 문제는 주요 문제 중 하나다. 흑인이 미국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3% 남짓인데 미국 전 교도소 수감자의 절반이 흑인 남성이고[34] 폭행, 살인이나 강간 등 강력범죄를 저지른 자의 21.6%는 흑인이다.출처 다른 인종보다도 유독 흑인이 감옥에 많이 간다. 이는 흑인들의 이미지를 깎아 먹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다른 인종보다도 유독 흑인이 감옥에 많이 가는 이유는 후술.
사실 이러한 원인은 흑인의 19%가 아직 빈곤층이고[35] 흑인 청소년의 70%는 편부모 가정에서 자라나고 있어[36][37] 제대로 교육의 기회 자체를 받지 못하고 있는것이 큰데, 알다시피 미국 공교육은 거의 파탄 상태로 백인 학부모들은 약이나 빨고 학교폭력 문제도 심한 공립학교에 애들을 잘 안 보내고 싶어한다. 학군이 좋으면 몰라도 학군 안 좋은 가난한 동네들은 더욱 그렇다. 공립학교는 파탄 상태인 만큼 교육이 정상적으로 될 리 없고, 백인들이 가기를 기피하는 학교는 상대적으로 가난한 흑인이 그 자리를 채운다. 선생들도 박봉에 열악한 여건 때문에 의욕적으로 가르치려고 하지 않으니 뭘 배우고 싶어도 못 배운다. 그 결과 흑인 빈곤층 사회가 일종의 갈라파고스화되어 미국 평균사회와 너무 유리되어 버렸다. 교육 부재로 인해 도덕성이 낮아 거리낌 없이 범죄를 저지르고, 갈라파고스화 된 흑인 빈곤층 사회는[38] 아무도 신경 안 써서 부모가 자식에게 도둑질을 가르치든 10대 비행청소년갱스터에 가입하든 아무도 신경 안 쓰게 되었고 이것의 결과물이 흑인의 범죄율이다.

흑인들 사이에서 마약이나 폭력단(갱스터)가 퍼져 큰 문제이다. 그들은 대도시에서 뿌리를 내리고 마약을 퍼트려 흑인 사회를 병들게 만들었다. 1980년대 중후반 크랙이라는 코카인의 변종인 마약이 퍼져 흑인 사회가 괴멸적인 타격을 입었다. 이를 크랙 에피데믹이라고 하는데, 크랙을 통해 흑인의 진학률과 소득은 급격히 감소했다. 대도시의 흑인들은 삶에 대한 희망을 잃고 크랙에 의지를 하게 되었다. 물론 "대도시의 흑인들"은 빈곤층이 많다. 그러니까 흑인 빈곤층이 19%인데 White flight으로 인해 백인들이 어반 지역을 떠나 근교인 Suburban으로 떠났는데 이에 도시의 어반 지역은 백인이 없어서 아무도 신경을 써주지 않았고 결국 게토화 되었다. 이 흑인 게토는 70년대까지만 해도 밝고 활기찬 모습이었지만 마약과의 전쟁과 크랙 에피데믹으로 인해 밝고 희망차던, 그러니까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던 흑인 게토 사회가 망가져 버렸다. 힙합 문화가 80년대에 퍼진 것도, 망가진 게토 사회의 청소년들은 힙합을 들으며 자신을 위로해보고자 했고 [39] 갱스터 랩이 생긴 이유도, 이러한 흑인 게토 빈곤층을 대표하기 위한 음악이었다. 다만 90년대 당시 힙합은 이미 대중화되어서 백인들은 가사 뜻도 제대로 이해하지 않고 스눕 독이나 투팍 등을 마구 틀었다고...
물론 암암리에 남아있는 인종차별도 문제가 된다. 대체로 미국 경찰들은 흑인이라면 화이트칼라일지라도 의심하며#, 그저 화이트칼라가 아니라고 눈에 쌍심지를 켜고 지켜보며 사소한 일로도 체포하는 경찰의 인종차별도 문제이다. 마약 관련해서도 그러했으나 2010년 공정한 처벌법의 발효로 코카인이나 크랙이나 둘다 미국 연방지정 2급 마약류로 처벌 기준은 똑같다. 아무튼 그러다보니 흑인 사회에서 미국 경찰에 대한 인식은 대단히 나쁘다. [40]
물론 흑인들의 Race Riot (인종 폭동)[41] 중 일부분은 흑인 용의자가 흑인 경찰에 의해 죽었을 때 일어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백인 경찰의 인종차별에 항의하며 생겼다. 어이없는 사건이 아주 많은데 특히 트레이본 마틴 살인사건 처럼 매우 인종차별적인 경찰 범죄가 이루어지기도 한다.[42] 백인 경찰이나 흑인 경찰이나 흑인 용의자를 쏴죽이는 비율에 차이가 없다는 연구 결과도 있으나 # 저 연구에서도 결국 흑인이 죽을 확률이 높음을 인정하고 있으며 물론 흑인을 보면 발사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암암리에 흑인을 의심하는 인종차별은 남아있지만 다시 말해서 백인 경찰이 무슨 악마도 아니고 단순히 흑인을 싫어해서 쏴죽인다는 것은 아니다.[43] 오히려 비율로만 따지면 유색인종 경찰들은 같은 유색인들이 사는 동네에 파견되는 경우가 많아서 같은 인종인 범죄자를 쏘는 경우가 더 많았다고 한다.
사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얼마나 많이 죽였다 보다는 '왜 죽였냐'가 더 중요한데 대부분 별로 중요한 이유 없이 흑인들을 쏴죽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제 3자의 입장으로 생각해봐도 정말 말도 안되는 이유로 죽는다. 그러니까 미국 흑인들은 이에 저항하는 것이다. 별 시덥잖은 이유로 흑인들을 총 쏴서 죽인다거나 감옥에 보내는 경우가 아주 많다. 편의점에서 먹을 것 사서 집에 돌아가다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신고받고 총맞아 죽은 사례도 있다. 텍사스에선 용의자를 밧줄로 묶어서 돌아다니질 않나.. 심지어 그저 집에서 비디오게임을 하고 있었는데 집 문이 열려 있다는 이웃 주민의 신고를 받은 경찰에게 피살된 경우도 존재한다. 이건 최근 문제가 아니라 아주 옛날부터 지금까지 행해오는 흑역사에 가깝고 미국인들도 셀프디스 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심지어 미국 정부는 2014년 퍼거슨 소요를 계기로 흑인을 겨냥한 총격을 줄여나가겠다고 밝혔다.
위에서 흑인의 범죄율이 높은 주요 원인은 빈곤층이기 때문이라는데[44] 그럼 흑인과 마찬가지인 아시안 2, 3세 미국인들[45],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무일푼으로 이민 와서 푼돈에 일하는 이민자들은 왜 범죄율이 흑인보다 낮은 건가? PC 운동, 어퍼머티브 액션의 최대 수혜자이면서 범죄율이 낮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정당한 공권력 행사에 폭동이나 일으키면서 적반하장을 보여줬고 정당한 대응을 한 경관은 결국 마녀사냥에 시달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기피와 멸시를 당한 것도 모자라 범죄자의 가족에게 소송을 당해 합의금을 줘야만 했다.
반론으로 흑인 남성의 범죄율은 교도소 수감자의 비중을 따진 것이다. 흑인들의 범죄율이 높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종차별을 정당화 할 순 없다. 또한 흑인이 폭력적으로 나왔기 때문에 악명이 높다 하더라도 엄연히 공권력 납용과 살인은 불법이다. 이러한 이유로 경찰들에 대한 인식이 상기되어 있듯 매우 나쁘다. 왜냐하면 현재까지도 까딱하면 별 것도 아닌 생트집으로 체포하거나 감옥에 처넣는게 일상인데다가 말대꾸하면 진짜로 얻어맞거나 총맞아 죽는다. 심지어 승강장에서 샌드위치 먹었다고 체포하거나# 운전하는데 깜빡이 안켰다고 교도소에 수감된 사람도 있다.[46] 미국에서 살아본 경험이 있다면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겠지만 백인을 제외한 나머지 유색인종에게 경찰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고 특히 흑인에겐 정말 치졸하게 군다. 그래놓고 정당 방위라며 아무런 조치없이 끝난다. 언론에 나와야 정직 정도지 살인 혐의로 법원에서 재판받는 일은 매우 드물다. 미국 경찰은 절대로 한국인들이 아는 그 한국 경찰과 같은 것이 아니다.
무일푼으로 이민 와서 푼돈에 일하는 이민자들은 왜 범죄율이 흑인보다 낮은 건가? 라는 의문을 품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미국 사회나 역사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이다.[47] 애초에 미국 흑인이라고 다 노예 출신도 아니다. 지금까지도 가해자가 흑인이고 피해자가 백인일 경우 높아지는 사형 집행률 등을 보면 미국사법제도도 인종차별적 성격이 없다고 할 수 없다. 가해자가 흑인일 경우 말도 안되는 이유로 감옥에 보내는 경우가 분명히 백인의 경우보다 많다. 실제로 통계에 의하면 '불공정한 사법 처리로 인해' 살인의 경우 무고한 흑인은 무고한 백인보다 감옥에 갈 확률이 7배 이상 높다.이는 전체 범죄율에서 흑인범죄율이 높은것을 모두 설명할순 없지만(전체 범죄율중 무죄로 밝혀진 비율을 따져봐야 하기 때문에) 차별로인해 범죄율이 일부 왜곡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기사내용의 신뢰성에 의구심을 가져야 할만한 것은 성폭행 피해에 관한 내용인데 성폭행 백인 피해자가 가해자 식별을 잘못해 엉뚱한 흑인을 가해자로 지목하기 때문인 것으로 써있는데 이게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 때문이란 논리로 덮어버리기 때문이다.

7.1. 경찰 혐오, 범죄자 옹호 현상


연행 도중 도주하는 흑인 용의자를 총으로 가격해 체포하자 백인 경찰에게 위협을 가하며 욕을 하는 흑인들(6분 8초 가량 성인인증 필요)
간단히 말하면, 주로 빈민층 흑인 동네에서 흑인 범죄자가 경찰에게 체포 당하면, '''범죄자가 어떤 범죄를 저질렀던 간에''' 이를 '''무시하고 일단 체포하는''' 경찰들을 욕하고 위협하고 인종차별이라고 몰아가는 반면, 흑인 범죄자를 감싸는 현상이다. 이들은 경찰한테 시비거는 건 물론이고 위협적으로 몰려오는 등 아주 악명이 높다. #
이는 상기된 빈민층 흑인 사회에서의 미국 경찰에 대한 인식이 나빠서 발생하는 문제가 큰 원인으로 분석된다. 예를 들어, 유튜브 같은 곳에서 미국의 용의자 체포 장면을 보여주는 동영상을 보면 댓글은 자신의 얼굴을 프로필 사진으로 한 흑인들이 "인종차별 경찰", "이게 경찰국가다."라는 등의 댓글을 다는 게 보이기도 하고,[48] 흑인 용의자가 흑인 동네에서 체포됐을 때 '''너나 할 거 없이 우르르 나와서 체포하는 경찰들에게 폭언을 퍼붓거나 위협을 가하는 영상을 볼 수 있다.'''[49][50] 그리고 인종차별로 무조건 몰고 가는 건 언제나 비슷비슷하기 때문에 흑인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이유로 빈민층 흑인들의 이중성 때문에 미국 웹 커뮤니티에선 이를 비판하는 밈이 생겼는데 바로 dindu-nuffin.[51] 해석하면 "나(혹은 그, 그녀)는 아무 짓도 안 했다."쯤으로 해석되며 흑인 용의자가 경찰에 의해 체포되거나 상기한 구경 나온 마을 주민들이 체포 과정에서 경찰에게 '''자주 하는 말.''' 명백하게 용의자가 잘못이 있거나 혹은 경찰에게 발포를 했다는 그 사실을 명백히 목격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치미 뚝 떼고 인종차별이라 몰아 세우며[52] 자신 혹은 용의자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 하거나 더욱 심한 경우에는 마을 주민이 용의자에게 다가와[53] 감싸주는 말이나 동정하기도 한다. 이를 비판한 그림의 예시(잔인함 주의)[54]

8. 소수 집단 우대정책


영어어퍼머티브 액션이라고 부른다. 흑인과 히스패닉은 여러가지 혜택을 얻을 수 있다. 소수 집단 우대정책은 진보-보수 양 측간의 논란 대상이다. 보수측은 기회의 평등을 중시한다. 그래서 어퍼머티브 액션같은 결과적 평등을 위한 정책 폐기를 주장한다. 미 진보 측은 결과적 평등을 위해 소수 집단 우대정책을 찬성한다.
일단 흑인 사회에서는 진보 측의 입장을 지지한다. 그러나 클래런스 토머스[55] 같은 흑인 보수주의자들은 이런 움직임에 반대한다. 그는 이렇게 발언했다. "소수 집단 우대정책은 흑인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그들의 학력만 더 낮아질 뿐이다." 어퍼머티브 액션에 반감을 가지는 흑인들도 물론 있다. 왜냐면 이 어퍼머티브 액션이라는거 자체가 1960년대 흑인 민권이 높아짐에 따라서 흑인들 차별하지 않고 대학교 보내야 줘야 된다고 해서 만든거라, 그때 당시에는 도움이 됐을지 몰라도 그게 2020년 아직까지 남아 있다는 점이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소수 집단 우대정책의 가장 큰 피해자는 아무래도 백인과 주로 아시아인이다. 대학/대학원 진학시 흑인학생보다 월등한 스펙을 갖추고도 단지 백인/동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성적이 낮은 흑인 학생은 붙고 백인/동양인 학생은 떨어지는 어처구니 없는 역차별 사태가 일어난다. 주의 해야 할 것은 아시안은 아시안끼리 경쟁한다는 점이다. 백인은 백인 학생 끼리 경쟁한다. 즉, 입학에서 같은 민족끼리 경쟁하는 시스템이다. 눈치 챘겠지만 공부만 하던 아시안들이 전 세계에서 모조리 미국으로 몰려와서 경쟁하는 시스템이니 싸움이 되겠는가? 돌머리가 흑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명문대에 간다는 그런 환상적인 케이스는 없다. 어차피 명문대에 가려면 공부를 잘해야한다. 흑인 학생들은 타 인종보다 Athlete student (운동 특기)로 입학 하는 비율이 많이 높아서 상대적으로 입학시 학업성적이 떨어져 보이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아시안들은 학구열이 엄청나게 높기 때문에 또 그만큼 부모님들이 많이 지원하고 경쟁자도 아주 많은 이유도 있다. 물론 흑인, 히스패닉의 커뮤니티에서는 상대적으로 교육열 및 경쟁 수준이 낮고, 그렇기에 부유층인 흑인과 히스패닉은 어퍼머티브 액션의 제도로 인해 많은 이익을 보는 것도 사실이다. 어퍼머티브 액션이 시대에 뒤떨어진 정책이라는 것도 이런 불평등 때문에 주장되는 것.
가장 유명한 예는 1978년에 일어났던 바키 대 캘리포니아대학교 사건이다. 요약하자면, 앨런 바키(Allan Bakke)라는 백인 대학생이 UC 데이비스 의과전문대학원에 낙방했는데, 소수인종 지원자들이 자신보다 낮은 학업 점수로 입학 한 것을 발견한 바키는 곧바로 대법원에 헌법 위반 (Title IV) 위반이라며 제소했고 결국 승소하여 UC 데이비스 의전으로의 입학이 허가되었다. 이후 UC 데이비스는 소송비를 내는걸 계속 거부하다가 바키에게 고소를 당하고 결국 1980년 2월에 18만 달러 가까이 물어줘야했다. 후에 앨런 바키는 UC 데이비스 의전을 정상적으로 졸업하고 메이오 대학병원에서 의사 경력을 이어나갔다고 한다.
또한 이 제도의 헛점을 이용한 사건도 있는데 인도인 비제이 초칼-잉엄이 높은 성적에도 미국 의대 입학이 불허되자 일부러 피부 검은칠을 하고, 삭발을 해서 흑인처럼 보이게 프로필을 바꾸고 지원하니 합격이 됐다는 이야기다. 물론 이 사례는 소수인종 우대법을 비판하기 위해 뒤에서 도와준 인권운동 세력이 포함된 빅엿이라고 한다.

9. 유명 인물



9.1. 정치


  • 말콤 엑스
  • 미셸 오바마
  • 버락 오바마: 첫 흑인 대통령[56]
  • 서굿 마셜: 첫 흑인 대법관.
  • 콘돌리자 라이스: 첫 흑인 여성 국무장관
  • 콜린 파월: 첫 흑인 합참의장, 국무장관
  • 클래런스 토머스: 두번째 흑인 대법관

9.2. 과학


  • 닐 타이슨
  • 엘버트 프랭크 콕스: 첫 흑인 수학 박사 소유자, 수학자
  • 에드워드 보쳇: 첫 박사 흑인 학위 소유자, 물리학자
  • 캐서린 존슨: NASA 수학자, 유인우주비행선을 위한 궤도 역학의 계산에서 미국 최초 및 그 이후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
  • 어니스트 윌킨스: 맨해튼 프로젝트 참여자, 핵물리학자 및 수학자
  • 로이드 쿼터맨: 맨해튼 프로젝트 참여자, 화학자
  • 윌리엄 쉬펠린 클레이터: 수학자
  • 허만 브랜슨: 물리, 화학자, 단백질 작동 방식 기여
  • 조지 워싱턴 카버: 생물학자, 농학자. 땅콩 농사를 농부들에게 처음 권유하였고, 땅콩 버터를 비롯한 다양한 땅콩 가공 제품을 개발하였다.

9.3. 군사



9.4. 음악


주로 힙합, 컨템퍼러리 R&B, 재즈 분야에 많이 포진해 있다. 힙합과 컨템퍼러리 R&B가 1990년대 초반부터 미국 음악 시장을 점령하고 힙합 음악의 인기는 점점 더 커지면서 그에 따라 미국 흑인 아티스트들의 영향력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59]

9.5. 배우



9.6. 모델



9.7. 스포츠



9.7.1. NFL


러닝백, 코너백 포지션은 거의 흑인 밖에 없다고 볼 정도로 백인이 들어가기 매우 어려운 포지션. NBA 못지 않게 유색 인종 비율이 높으며 70%를 넘어간다.


9.7.2. NBA


대부분의 선수들이 흑인이며 흑인의 영향력이 가장 큰 스포츠.

9.7.3. MLB[66]



9.7.4. MMA



9.7.5. 복싱



9.7.6. 기타 스포츠



9.8. 코미디언


  • 크리스 락: 코미디언. 미국 흑인 사회에서 흑인들이 겪는 애환과 차별을 코믹하게 소화하는 것이 특징.
  • 데이브 샤펠: 미국의 흑인 스탠드업 코미디언.
  • 에디 머피: 위에 배우 항목에도 있었지만 에디의 본직은 스탠드업 코미디언이다. 87년까지 스탠드업 코미디 활동을 했었다. 심지어 에디는 가수로도 성공했었다!
  • 아세니오 홀: 미국의 코미디언. 미국 흑인 최초로 레잇 나잇 토크 쇼를 진행했으며 쇼 이름은 자신의 이름을 내건 The Arsenio Hall Show였다. 당시 투나잇 쇼와 시청률 경쟁을 했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는데 쟈니 칼슨의 투나잇 쇼를 기성 세대가 많이 봤다면 Arsenio Hall Show는 젊은 층이 주로 봤다. 게스트로 래퍼나 팝가수가 많이 나왔고 빌 클린턴민주당 대통령 후보 시절 이 쇼를 통해 어마어마한 인기를 얻게 되었다.
  • 케빈 하트: 미국의 유명 스탠드업 코미디언. 겸 배우

9.9. 기타


  • 마틴 루터 킹
  • 오프라 윈프리: 미국 흑인 최초로 토크쇼를 진행했으며 [67], 제일 부유한 미국 흑인 여성이다. 흑인 여성 중 드문 빌리어네어.
  • 베리 골디: 모타운의 창립자 겸 사장. 이 분의 영향력은, 단지 미국 음악계를 바꾼 정도가 아니라, 음악을 통해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없애기 위해 노력한 분이다. 이 분 덕분에 흑인 음악이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실질적인 전성기를 누릴 수 있었다. 참고로 이 분은 미국 흑인 중 제일 성공한 사업가 중 하나이다.

10. 관련 문서


[1] MLB에서 볼 수 있는 흑인들은 거의 미국 출신들이 아닌 중남미 출신들이다. 미국 흑인층 내에서 야구 인기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고 이는 MLB 사무국에게도 큰 고민거리이다. 대부분 NBA, NFL로 다 빠진다.[2] 그런데 래퍼인 슬릭 릭(Slick Rick)처럼 부모가 자메이카에서 영국으로 이민 간 사람이라 '흑인이면서도 영국계 미국인'이라는 희한한 사례도 있다. 나중에 가서는 오랫동안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애틀랜타 게토에서 태어난 미국인인 척했는데 알고 보니 영국 국적자인 데다가 영국에서 유년기를 보낸 흑인이라는 희한한 사례도 생겼다.[3] 따지고 보면 아프리카에서 온 것은 맞다. 그러나 이들은 아메리카에 유입된 이후 독자적으로 문화를 이끌고 카리브해에서 살았기 때문에 현대의 분류상 "Afro-Caribbean people" 이라고 한다.[4] 다만 남미의 인구 조사 통계에서는 흑인들이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자신들을 혼혈인종으로 통계낼 것을 요청하는 편이다. 실질적으로는 브라질 흑인 후손이 미국보다 훨씬 더 많다고 볼 수 있다.[5] 현재는 흑인을 비하하는 용어로 쓰인다.[6] 실제로 2010년대 초에 NBC월스트리트 저널에서 흑인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서 블랙을 선호하는 사람들(42%)이 아프리칸 아메리칸을 선호하는 사람들(35%)보다 더 많은 걸로 집계되었다.[7] 미국 흑인들의 50% 정도가 미국 남부에 살고 있다.[8] 왜 백인이 남말할 처지가 아니였느냐 하면은, 1980년대 중반에는 백인 역시 청소년 임신률이 높았다. 이를 대변하는 곡이 바로 1986년 발표된 매더나의 "Papa Don't Preach"이다. [9] 54th Regiment Massachusetts Volunteer Infantry[10] 물론 링컨의 노예제 폐지 전에도 흑인 자유인은 미국 흑인 인구 전체의 5% 정도였다. 그러다가 링컨의 노예제 폐지 이후 모든 미국 흑인들이 자유인이 되었다.[11] 정말 말도 안되는 사항들이 많다. 예를 들어 제 38조, 도망간 노예가 한달이 지나도 일하러 돌아오지 않으면 귀를 자르고 두달이 되면 햄스트링을 잘라야 한다. 또 도망가면 처형하도록 한다. 라는 법도 있다. [12] 모욕적 표현이라 현대는 사용되지 않는다.[13] 애초에 링컨이 노예 해방을 한 것은 흑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노예 해방의 이유는 타협도 있지만, 당시 북부는 값싼 노동력이 많이 필요했는데, 흑인들이 제격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노예 해방 전 미국 흑인 중 자유인은 전체 미국 흑인의 5% 정도였는데, 이들은 공장의 노동자로 일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 공장들의 일손이 부족해져서 공장들과 회사들은 더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했고 이에 따라 노예 해방을 지지한 것. 지금 현재 대도시는 민주당 지지율이 강하지만 당시는 공화당이 지금의 민주당 위치에서 대도시와 자본가를, 민주당이 지금의 공화당 위치에서 시골과 노예주를 대변했기에 공화당의 대통령 링컨이 노예 해방 정책을 펼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원래 남북전쟁 전부터 공화당은 노예 철폐의 움직임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급진 공화당 세력이라고 불리는 (자기들이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 공화당 상원 의원 몇몇이 노예 철폐와, 넘어서는 인종 차별 철폐까지 강력히 주장했다. 이들은 실제로 흑인들의 인권을 생각하고, 흑인도 우리와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한다! 라고 생각한 깨어 있는 인물들이었으며 1850년대부터 이런 주장을 하기 시작하며 1865년 노예 해방이 될 때까지 열심히 노력한 사람들이다. 원래 1850년대 이들의 이런 의견이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공화당에서도 이건 좀 너무 급진적이다라고 했지만 남북 전쟁, 즉 미국 내전이 벌어지고 이들의 의견이 수용되었다만 인종차별 철폐는 이 시대 미국 백인들의 인식상 하지 못했다. 연방법으로의 인종차별 철폐는 노예제가 연방법으로 폐지된 지 딱 99년 만인 1964년 1964년 미국 연방 민권법로 연방 전체에서 이루어지게 된다. 물론 이 연방법으로 흑인뿐만 아니라 아시아계와 히스패닉에 대한 인종차별도 법적으로 사라졌고 이에 따라 1970년대부터 히스패닉계와 아시아계의 대거 이민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14] 구글에서 이 당시 린치당한 흑인들의 사진들을 볼 수 있다.[15] 오트쿠튀르에서 시작된 그것.[16] 후술하겠지만 이 무렵의 공화당은 흑인의 이권을 대변했다. 그 시절 공화당을 지지했던 남부 흑인들의 후손들은 현재 민주당을 지지하고 있다.[17] 이걸 두고 만약 "흑인이 80여 년 동안 상원의원에 진출하지 못했다고? 그럼 흑인이 멍청해서 그런 거 아니야"와 같은 생각을 한다면 당신은 인종차별주의자에다 미국 역사를 전혀 이해 못하는 것이다. 그 당시엔 미국 흑인의 95%가 미국 남부에 거주했는데 1877년 미국 연방이 남부에서 북부군을 철수시키며 남부 주들은 13년 동안 유지되었던 흑인들의 선거권을 박탈하고 시민권 외의 다른 권리를 거의 박탈했다. 그리고 40여 년 간 매일같은 백인들의 린치에 시달리다 1916년부터 대이주, 즉 Great Migration을 시작한 것이다. 이 대이주와 미국 흑인 역사에 댜해 알고 싶다면 Great Migration 문서로.[18] 사실 이는 일자리 문제보다 남부에서 매일매일 일어나던 백인에 의한 흑인 린치 때문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Great Migration 참조[19] 흑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지 흑인들이 "주로" 사는 지역이 아니다. 미국 흑인들의 빈곤율은 2020년 현재 19%로 Great Migration을 통해 1940년 70%였던 빈곤율이 1960년 50%, 1970년 40% 밑까지 내려오며 흑인 중산층과 부유층이 많이 형성되었다. 흑인들의 81% 정도는 빈곤하지 않다는 말인데 그렇다 해도 20% 가까이 되는 흑인들이 빈곤층이며 이들의 많은 경우가 이러한 게토에 사는 것은 심각한 사회 문제이다. 백인의 빈곤율이 10%인 것을 생각해 보자. 물론, 흑인들이 제일 가난한 인종은 아니며 1970년대부터 무일푼으로 이민온 히스패닉계가 빈곤율 40% 이상으로 제일 많다. 참고로 아시아계는 전체 아시아계 미국인 중 15%가 빈곤하다. 이 빈곤율 자료들은 모두 미국의 연구 기관 출처. 그러기에 한국에서 말하는 빈곤과 개념이 다를 수 있다.[20] 래퍼나 스포츠 선수, 코미디언 등을 제외하고도 많은 성공한 흑인 사업가들이 있다. [21] 백인 빈곤층이 전체 백인의 10%를 차지한다만, 빈곤율이 15%인 아시아계, 빈곤율이 19%인 흑인, 빈곤율이 40%를 넘는 히스패닉계와 비교했을 때 백인들의 빈곤층 비율이 제일 낮긴 하다.[22] 이게 백인 정치인이 노예제를 유지하던 동안, 또 인종차별을 유지하는 동안 일반 및 저소득층 백인들을 선동한 방법이었다. 20세기 초중반 까지만 해도 대다수 백인들은 백인 정치인과 부자들의 꾐에 넘어가 흑인은 원래 열등하고 게으르고 멍청하다고 생각했다. 정치인 문제 뿐만이 아니라 그 당시 영화나 코미디에서도 흑인을 그렇게 표현하니 대부분의 일반 백인들이 이에 선동당하기 더 쉬웠던 것이다. 국가의 탄생이 그런 영화의 대표이고 짐 크로우와 Blackface가 그런 코미디 (백인을 위한 코미디)의 대표라 할 수 있겠다. 애초에 Blackface가 금기시 되는 제일 큰 이유가, 블랙페이스는 당시 백인 "코미디언"들이 백인 앞에서 흑인처럼 분장하고, 흑인들을 게으르고 열등하고 멍청하게 표현함으로서 일반 백인들의 인종차별을 더 키웠기 때문이다. 물론 노예제 시절부터 흑인들을 그렇게 표현한 이유는, 백인 저소득층 및 중산층들의 불만이 백인 정치인들과 부자들 자신에게 오는 것을 막기 위해, 당시 운영되던 노예제에 인종차별 의식을 더해, 저소득층 및 일반 백인들의 불만을 흑인 자유인과 흑인 노예로 돌리기 위함이었다. [23] 사실 이는 흑인 빈곤층의 영향이 크다. 왜냐하면 미국에도 중산층 이상 흑인이 과반수를 넘는데, 이들은 중산층의 인생을 살지만 19%나 되는 빈곤층은 당장 내일 먹고 살 돈이 없어서 오늘 벌고 오늘 쓰는 수준으로 대부분 산다. 흑인들의 갱 활동이 높은 이유는, 이 빈곤층들 때문이다. 흑인 갱스터의 거의 대부분은 이 흑인 빈곤층으로, 갱 활동을 통해 매일 번 돈을 그 날에 쓰는 것이다. 물론 이게 거의 대부분의 흑인 빈곤층이 갱스터란 얘긴 아니고, 흑인 빈곤층 중에서도 갱 활동 안하고 돈 버는 사람들도 많다. 그런데 흑인 갱스터의 대부분이 이 빈곤층이니 이게 사회적 문제가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24] 이는 20세기 초중반과 그 전에 백인 사회에 만연해 있던 백인들의 흑인에 대한 인식이었다. 20세기 초중반 당시 영화나 블랙페이스는 이런 말도 안되는 편견을 더 강화시켰으며 백인들은 진짜 흑인들이 자신들보다 열등하고 게으르며 멍청하다고 생각했다.[25] 물론 1890년대 이후로 민주당이 인민당의 노선을 일정부분 받아들이면서 나름대로 진보적인 색채를 받아들이게 되었고, 윌리엄 J. 브라이언이나 우드로 윌슨 등 당대에 나름대로 진보적인 스탠스였던 정치인들이 민주당 소속으로 활동하고 있었기는 했지만 동시에 상당수 인종차별주의적인 보수주의자들이 민주당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이들은 진보적인 대통령의 대명사로 손꼽히는 프랭클린 루스벨트존 F. 케네디때까지도 민주당에 잔류해있다가 1960년대 중반 이후로 민주당이 진보적인 색패를 확 띄게 되면서 공화당으로 빠져나오게 된다.[26] 물론 1960년대 이전 남부처럼 대놓고는 아니고 주의회 차원에서 은근슬쩍 투표시간을 단축시킨다거나 투표소를 흑인 밀집지역에서 멀리 떨어트린다거나 하는 식이다.[27] 물론 매케인이 어떻게 보면 흑인한테 불리하게 돌아갈 수 있는 공약도 내걸어서 그렇지, 매케인이 흑인을 혐오하는 인물이라는 건 절대 아니다. 공화당에서 온건파 보수주의자로 유명했고 대선 패배 승복 연설 때 오바마와 첫 아프리카계 미국인 대통령 탄생을 높게 평가했으며, 애초에 그의 자식 중에 막내딸이 입양한 것이긴 하지만 흑인이며 며느리 중 한 명이 흑인이다.[28] 트럼프가 흑인, 히스페닉 등 마이너리티 인종에 대처하는 형식적 레퍼토리이기도 하다. 불법 이민자 빗장 닫아버리면 결국 주류는 아닐지언정 시민권 가진 너희가 이득이라는 논리.[29] 대표적으로 조지 부시 가문, 존 매케인 전 상원의원 등[30] 그러나 파월은 2008년 선거에서 오바마를 지지하였고, 2016년 선거에서도 클린턴을 지지하였다. 2017년에도 뉴욕타임스에 트럼프의 외교 예산 감축 등을 우려한 컬럼 등을 실었는데 합참의장 시절의 경험보다는 국무장관 시절의 경험에 더 입각하여 글을 쓰고 있다. 다만 이것은 콜린 파월 개인이 보수에서 진보로 전환했다기 보다는 어떤 것이 미국을 위한 길인가에 대한 본인의 신념과 주관이 확고하고 그에 부합하는 후보를 지지하기 때문으로 보인다.[31] 이때 공화당은 인종차별을 철폐하려고 했고 민주당은 인종차별을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60년대 중반 전까지 공화당과 민주당의 스탠스는 지금의 정반대였다. 민주당이 남부 백인들의 입장을 대변했고 공화당이 북부 백인과 흑인의 입장을 대변했었다. 그러나 배리 골드워터 때부터 공화당이 남부 백인에게 지지를 얻고 리처드 닉슨이 공화당과 민주당의 지지기반을 '''아예 바꾸어 버렸다.''' 이후 남부에서 지지를 얻은 민주당 후보는 남부 출신인 지미 카터 정도. 정작 골드워터, 닉슨, 카터는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었다.(단 닉슨은 사적인 자리에서 레이건과 전화 통화할 때 아프리카인을 원숭이라고 부르는 농담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32] 자식들은 민주당원.[33] GTA 5후드 사파리 미션 인트로 컷신에서, 프랭클린 클린턴이 '''돈도 안 되고 위험하기만 한 할렘가 뒷골목 갱 생활에 소홀하다는 이유'''로 프랭클린의 이모인 데니스가 "배신죄!(Disloyalty, boy!)" "늙은 남자들이랑 어울리고, 친구들은 내쳐놓고, 지가 무슨 최고인 것 마냥... 네 엄마가 무덤에서도 돌아눕겠다, 이 녀석아." 라고 이상한 헛소리(...)를 하는 건 사실 이러한 미국 흑인 사회의 해괴한 의식을 풍자한 대사다. 이러한 흑인 사회의 이상한 의식에 대해 전혀 모른 채로 이 대사를 들어 본 비 북아메리카권 플레이어들은 '''저 평소에도 정신나간 것 같은 아줌마는 대체 뭔 약을 빨고 저런 말도 안 되는 개소리를 지껄이나''' 정도의 생각밖에 안 들었을 것이다(...). [34] 물론 이에 대해서는 오해하지 말도록 하자. 미국 수감자의 대부분이 흑인이나 히스패닉인 이유는, 1980년대 레이건 시대부터 시작된 미국 현대사 최고의 실책 마약과의 전쟁 때문인데, 이 마약과의 전쟁으로 교도소 민영화와 "크랙:코카인 = 1:100" 등의 악법으로 수많은 흑인 및 히스패닉 저소득층 잡범이 교도소에 끌려가 중형을 받았다. 이는 미국 교도소 수용자 그래프에서 알 수 있는데, 1970년대까지는 평균적인 수용자 수를 기록하다가 1980년대 초부터 급증한다. 이는 교도소들이 흑인과 히스패닉 저소득층 잡범이나 무고한 사람을 누명을 씌우면서까지 잡아들였기 때문이다. 미국에만 수용자 수가 전세계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이유는 이것이다. 교도소 민영화는 교도소가 교도소가 아닌 기업으로 변모하고 수용자는 단지 보석금 장사, 돈 장사, 교도소 내 실질적 노예 취급 받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크랙:코카인 1:100이 왜 악법이냐 하면, CIA와 레이건이 84년도 비밀리에 남미에서 크랙을 밀수해와 미국 흑인 게토에 뿌렸다. 즉 크랙 에피데믹이, 미국 정부에 의해 비밀리에 자행된 인종차별적인 현상이었던 데다가, 크랙과 코카인은 결국 똑같은 코카인으로 만든 거지만, 크랙은 값싸기 때문에 흑인/히스패닉 빈곤층이 이용했고 코카인은 '''백인 부자'''들이 이용했다. 즉 이 법의 내용은, 흑인 빈곤층이 크랙 한 번 피우는 것은 '''돈 많은 부자가 코카인 백 번 피우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35] 2020년 기준[36] 높은 이혼률도 한 몫 하지만 실제로 랩 가사에서 흔하게 찾아보듯 흑인 가정의 아버지는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것도 또 하나의 편견이라 볼 수 있겠지만 실제로 그렇다. 우리가 아는 주류 갱들 중 절반은 흑인 갱이란걸 떠올리면 그럴만하다. 사실 여기서는 편견을 갖지 말아야 하는데 갱 활동을 하는 이유는 먹고 살기 위해서이다. 실제 흑인 갱스터들은 매일매일 경찰차만 오면 도망가야 하는 인생이 싫고 제발 좀 이런 삶에서 벗어나고 싶다라고 말한다. 흑인 빈곤율이 1940년부터 1970년까지 70%대에서 40% 밑으로 떨어졌지만 그 후 마약과의 전쟁의 여파로 흑인 빈곤층은 빈곤을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을 찾지 못했고, 결국 선택한 게 갱 활동이었다. 크립스나 블러드 모두 70년대에 창단되었지만 미국에서 흑인 빈곤층의 갱 활동이 증가한 것은 1980년대였다. 이러한 사태는 레이건 시대의 그림자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갱단에 대해서는, 일단 나머지 절반 정도는 히스패닉 갱이 대부분이지만 아시아계 갱도 어느 정도 있다. 예를 들면 China mac이 대표적인 아시아계 갱 멤버였고 아시아계 사이에서도 빈부 격차가 커지고 빈곤층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사실 이 빈부 격차는 미국 전체의 문제이다. 빈곤율은 백인이 10%로 제일 낮고 아시아계가 15%로 그 다음, 흑인이 19%, 히스패닉계는 흑인보다 높은 빈곤율을 기록하는데 (이 빈곤율에 대한 정보는 미국 연구 기관들 출처. 참고로 한국에서 말하는 빈곤과 미국에서 말하는 빈곤이 다를 수 있다.) 빈곤층은 점점 더 빈곤해지고, 중산층 역시 조금씩 밑으로 내려가고 있으며 위로 갈수록 더 위로 올라간다. [37] 이것 외에도 린든 B. 존슨이 미혼모에게 제공하는 정부보조금의 양을 대폭 늘린 것도 흑인 미혼모들을 늘리는 역효과를 가져온 것도 컸다. 학력이 낮은 흑인 커플의 경우 애아빠를 쫓아내고 정부보조금의 혜택을 보는 게 이득이었던 경우가 많아서... 그러나 편부모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은 범죄나 정신병, 가난 등에 노출될 가능성이 정상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보다 넘사벽으로 높다.[38] 이 흑인 사회는 흑인 게토 사회, 즉 흑인 빈곤층 사회를 얘기하는 것이다. 이 당시 중산층 이상의 흑인들은 이미 게토를 떠나 백인들이 사는 Suburban 등으로 이주해 있었다. 그러나 그때 그 빈곤층의 상당수가 아직도 그 자리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고 그 이유는 80년대 마약과의 전쟁, 크랙 에피데믹 등으로 게토 사회가 빈곤층을 벗어나기는 힘들게 되었는데 현재까지도 자수성가한 빈곤층 흑인들을 제외하면 빈곤층을 벗어나기 힘든 경우가 많다. 우리가 유명 래퍼에 대해 얘기할 때 이 래퍼는 길거리에서 마약 팔던 시절이 있었다 뭐 이런 얘기를 하는데, 그 이유는 그런 래퍼들이 살았던 삶이 흑인 빈곤층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살기 위해 마약을 팔고 갱 활동을 해야 했으며, 그들에게 돌파구는 랩 음악이었는데(힙합 문화 자체가 게토 사회를 벗어나고자 하는 하나의 운동이었다.) 그걸로 성공한 것. 물론 래퍼들 중에도 중산층 이상의 흑인 가정에서 온 래퍼들도 많다. 윌 스미스카녜 웨스트등이 대표적이고 이 외에도 많다.[39] 알다시피 갱스터 랩은 1988년에 대중화된다. 사실 NWA가 젊은 층에서 득세한 이유도 NWA가 그 당시 인종차별과 흑인 사회에 문제를 야기한 정치인들에 대한 반발, 경찰의 공권력 남용 등에 대해 신랄하고 논리적으로 깠기 때문이었다. 그 전의 힙합은 런 DMC같이 희망차거나 사회적인 문제를 다뤄도 갱스터 랩은 하지 않은 퍼블릭 에너미, 그리고 심지어 백인 힙합 그룹이었던 비스티 보이즈까지 힙합 음악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었지만 NWA의 Straight Outta Compton으로 힙합 문화가 바뀌게 된다. 그 앨범의 영향력은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았다.[40] 취소선이 그어져있긴 하지만, 미국 경찰들도 인종이 다양하며, 흑인 경찰도 당연히 많이 있다. 물론 흑인 경찰들도 업무상 흑인이라고 봐줄 수도 없는 형편이라...[41] 인종차별이 극심했을 때는 털사 인종 참사등의 백인 폭동이 많이 발생했다. 흑인들이 자기 밥그릇 빼았는다는 이유가 대부분. 자세한 이유는 Great Migration 문서 참조. 참고로 털사 인종 학살은 일자리 다툼이 아니라, 백인들이 잘 살던 흑인들을 질투해서 벌어진 사태이다. 자세한 사항은 털사 인종 학살 문서 참조.[42] BLM이 생긴 이유가 이 사건 때문이다. LA 폭동 이후 20여 년 간 안정되는 듯 했으나 (물론 백인 경찰에 의한 무고한 흑인 사살이나 흑인 잡범들로 보석금 장사하는 교도소의 행패는 계속되었지만) 이 사선에서 시작해 약 4년 동안 인종차별 사건이 계속 발생하면서 BLM 운동이 활발해지다 한동안 잠잠하여 BLM도 잠잠해졌으나, 조지 플로이드 사건을 계기로 다시 흑인 인권에 대한 목소리, 공권력 남용, 사회 문제 개선의 목소리가 높아졌다.[43] 물론 단순히 흑인을 싫어해서 쏴죽이는 백인 경찰도 있긴 하다.[44] 흑인 빈곤층은 19%, 아시아계는 15%, 그리고 백인은 10%, 마지막으로 히스패닉은 흑인보다 빈곤율이 높다.[45] 흑인과 마찬가지는 아니다. 미국 흑인 대다수는 미국에서 태어났지만 먼 조상이 이민을 온 게 아니라 끌려 왔으며, 아시아계 1세대는 대부분이 흑인 민권 운동 후인 1970년대부터 대거 이민을 온 것이다. 물론 히스패닉계도 1970년대부터 대거 이민을 왔지만 아시아계 1세대는 주류 사회에 편입되고 싶어하는 심리가 컸지만 히스패닉은 자국 치안 문제, 정치 문제 등으로 왔고 꼬 딱히 주류 사회에 편입하려는 의지가 없었다 한다.[46] 그 피해자는 흑인 여성인 Sandra Bland다. 깜빡이 안킨게 중죄도 아니고 깜빡이 안 켜도 보통은 대충 넘어간다. 아니 FM이라고 해도 벌금이나 때리고 끝나지 폭언과 협박 후 감옥에 처넣진 않는다. 어디서 감히 흑인이 대들어? 라는 인종차별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했던 사건이다.[47] 애초에 한국인 이민자가 미국에 이민 간 역사 자체가 짧다. 트러블이 생길 일도 없고 역사적 감정도 없는데 도대체 왜 갈등과 범죄를 일으키는가? 심지어 요즘에는 한국에선 제대로 된 직업이나 돈 없으면 이민도 못 간다.[48] 문제는 영상에서 총 맞은 흑인이 경찰의 지시를 거부하고 먼저 총을 꺼냈기 때문에 시작된 총격전 같은 경우도 무조건 경찰만 욕하는 경우가 많다.[49] 흑인이 바닥에 머리라도 박히는 일이 생긴다면 여기저기에서 탄식과 비명 혹은 욕설이 날아온다. 물론 경찰이 총이라도 쏜다면 '''어느새 다 도망가있다.'''[50] 물론 경찰들도 자기 일은 해야하기 때문에 이런 곳을 Bad Neighborhood 라고 부르며 특별 관리하고, 과속 등 사소한 교통단속에도 무조건 지원을 요청하는 등으로 대응한다.[51] Didn't do nothing을 흑인식 발음으로 그대로 쓴 것.[52] 해당 영상의 용의자는 체포 도중 경찰에게 침을 뱉어서 제압당했는데 관중들이 봤음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이라 몰아세우는 상황.[53] 물론 체포 중에 경찰이 물러서라고 말하지만 이도 듣지 않는다.[54] 못 보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피범벅이 된 가게에서 백인 경찰에 의해 체포된 흑인이 '손목이 너무 아프다.'라고 하면서 나오자 흑인 구경꾼들이 '잔혹한 체포'라고 하면서 비판한다. 정작 구경꾼들에게는 피범벅이 된 가게 안이 보이지 않는 상황.[55] 매우 보수적인 몇 안 되는 흑인. 그는 백인 경찰관이 흑인을 구타한 사건에서도 이렇게 말했다. "일단 판결은 판결이다. 그가 내린 집행은 합당했다." 타 흑인들은 그에 이런 발언에 대해 강력히 반발했고 그를 "배신자", "백인의 꼭두각시", "백인의 노예" 로 취급했다.[56] 미국흑인들 중에서도 제일 유명한 사람이다. 참고로 대부분의 미국 흑인들과는 외모가 다른데, 동아프리카 흑인 혼혈이기 때문.[57] #[58] 사실 락도 흑인이 만든 음악이다. 락의 기원이 흑인이 만든 락앤롤과 블루스니까. 컨트리 음악 역시 흑인들의 블루스에서 온 음악이다. 순수한 "백인 음악"은 밥 딜런과 조안 바에즈 류의 포크 음악이 다다.[59] 물론 미국 흑인 아티스트들의 영향력은 흑인 음악인 락앤롤이 본격적으로 인기 있기 시작한 1950년대 중반부터 커졌으며, 60년대 모타운 음악과 소울/R&B 음악, 70년대 Funk디스코 음악 등으로 각 시대의 미국 음악계를 락 음악과 양분하고 [58] 80년대 마이클 잭슨을 시작으로 프린스, 휘트니 휴스턴, 바비 브라운, 자넷 잭슨 등의 대형 흑인 팝스타들이 미국 음악 시장과, 나아가 전 세계 음악 시장을 지배하고, 1990년대에는 머라이어 캐리, 보이즈 투 멘, TLC를 위시로 한 컨템퍼러리 R&B 음악이 차트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게 되고, G-Funk와 같은 서부 힙합, 펍 대디를 위시한 동부 힙합이 모두 차트 정상을 차지했다. 컨템퍼러리 R&B와 힙합의 인기는 2000년대 들어 더 높아지는데, 2000년대 초반 릴 존Crunk 음악를 위시로 한 남부 힙합이 득세하며 '''2000년대 중반은 흑인 음악의 최고 전성기라고 불릴 정도로 일단 2004년은 어셔의 노래들이 1년 52주 중 무려 28주간이나 1위했고''', 2003~2004년 사이는 어반 음악, 그러니까 컨템퍼러리 R&B/힙합 (주로 남부 힙합) 음악이 빌보드 핫 100 탑 텐과 1위를 독식했을 정도이다. 개인의 의견이 아님을 밝히며, 이 사실들은 모두 미국 위키피디아 출처이다. 참고로 2008년 케이티 페리 등의 백인 일렉트로팝가수 열풍이 불기 전, 그러니까 2007년까지는 흑인 음악의 가히 최전성기였고 칸예 웨스트어셔, 50 Cent 등을 위시로 한 수많은 컨템퍼러리 R&B 가수와 래퍼가 미국 음악 시장을 지배했었다. 2008년~2010년대 초반 EDM 열풍과 일렉트로팝 등으로 인해 릴 웨인드레이크, 칸예 웨스트, 또 어셔를 제외하곤 흑인 음악이 잠시 주춤하지만 2010년대 초중반부터 트랩 시대가 열리며 힙합의 전성기가 다시 오게 되고 락 음악의 인기가 급하락하고 컨템퍼러리 R&B의 인기도 사그라든 201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는 힙합 음악이 사실상 팝 음악과 미국 음악 시장을 양분하고 있다. [60] 유대인 혼혈.[61] 2010년 이후 아프리카에서 전기 사업을 하고 있는데, 에이콘 덕분에 아프리카에 일대 혁명이 일어났다고. 에이콘이 아프리카의 영웅 취급을 받는다고 한다. 물론 그 이유는 에이콘이 아프리카에 전기를 보급시켜줬기 때문이다. 참고로 2010년은 에이콘의 전성기였다. 가수로서의 전성기 때 아프리카로 자선 사업을 하기 위해 간 것이다. [62] 한국 혼혈[63] 베냉에서 프랑스를 거쳐 미국으로 이민귀화했다. 모어도 미국식 영어가 아닌 프랑스어.[64] 백인이지만,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이다 보니 African-American 아니냐는 농담이 있다.[65] 한국 혼혈[66] MLB에서 볼 수 있는 흑인들은 거의 미국 출신들이 아닌 중남미 출신들이다. 미국 흑인층 내에서 야구 인기가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고 이는 MLB 사무국에게도 큰 고민거리이다. 대부분 NBA, NFL로 다 빠진다.[67] 쇼 이름은 오프라 윈프리 쇼로 1986년부터 2011년까지 25년 동안 방송했으며, 방송하는 동안은 후발주자인 엘렌 쇼보다 시청률이 더 높았다. 레잇 나잇 토크쇼가 아닌 엘렌 쇼와 같은 데이 타임 토크쇼로 알다시피 주부들이 많이 보는 쇼이며, 위에 서술된 바와 같이 흑인 최초로 레잇 나잇 토크쇼를 진행한 흑인 코미디언은 아세니오 홀이다. 트레이버 노아가 나오기 전까지 유일한 흑인 레잇 나잇 토크쇼 호스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