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겐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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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
3.2.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59년 4월 13일 프랑스군과 영국, 하노버, 헤센, 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이 헤센의 베르겐에서 맞붙은 전투. 프랑스군은 이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뒤 하노버를 향한 1759년 공세를 개시한다.

2. 배경


1759년 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가 이끄는 연합군은 오스트리아군이 프로이센군을 상대하느라 정신없는 틈을 타 오스트리아군이 점령하고 있던 풀다와 마이닝겐을 함락시켰다. 이후 페르디난트는 3월 말에 마인 강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군의 본영인 프랑크푸르트 탈환 작전에 착수했다. 그는 프랑크푸르트를 공략함으로서 오스트리아군과 프랑스군이 서로 연합하지 못하게 만들고 마인 강 일대의 프랑스군을 궤멸시키기를 희망했다. 당시 프랑크푸르트를 수비하고 있던 프랑스군 지휘관 브로이 공작 빅토르 프랑수아는 이러한 연합군의 진군에 대비하기 위해 프랑스 여단들과 작센군을 이끌고 온 디헤른 장군과 합류한 뒤 프랑크푸르트에서 수 km 떨어진 베르겐 마을에 군대를 배치했다.
4월 12일 저녁, 연합군은 그들의 공격 계획을 수립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자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는 선두 부대를 이끌었고 헤센의 이센베르크 왕자는 좌익을, 홀슈타인-고토프 공작 프린츠 게오르크 루트비히는 우익을 맡았다. 그들은 빌벨과 베르겐 사이의 지점에 배치되었다. 페르디난트는 베르겐에 주둔한 프랑스군은 2~3천명 정도일 거라고 추정하고 포병을 동원할 것 없이 신속하게 공격해 단숨에 공략하기로 했다. 4월 12일 자정, 페르디난트로부터 출발 명령을 접수한 연합군은 베르겐을 향해 진군하여 로스도르프와 킬리안슈타텐 주변에 배치되었다. 공격 시각은 4월 13일 오전 6시로 정해졌으나 6시간 내 그 많은 병력을 배치시키는 건 불가능했기에 연합군은 오전 6시까지 배치 작업이 완료되지 않았다. 하지만 적의 구원군이 오기 전에 얼른 베르겐을 공략해야 한다고 판단한 페르디난트는 오전 6시가 되자마자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



3.2.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



4. 전투 경과


전투가 벌어진 베르겐 전장은 프랑크푸르트에서 남서쪽에 위치해 있으며, 북쪽으로는 니다 강이 흐르고 남동쪽에는 메인강이 흐른다. 전쟁터의 남반부는 늪지대가 형성된 평지였고 그 끝엔 고원을 이루는 횡단 경사지가 있었다. 이 고원은 앞면이 측면보다 더 가팔랐다. 요새화된 베르겐 마을엔 울타리들이 흩어져 있는 정원을 에워싸고 있었다. 이 울타리들은 많은 도로들이 하나로 모인 교차로 근처에 지어졌다. 이 도로들 중 하나는 마인 강둑에 있는 페첸하임으로 향했고, 두번째는 프랑크푸르트로, 세번째는 동쪽으로 이어졌다. 또한 두 개의 평행도로가 북쪽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니다의 빌벨로 향했다. 베르겐의 토지는 부드럽고 진흙투성이여서 대포와 마차가 지나가기가 매우 어려웠다. 베르겐의 북쪽에는 두 개의 언덕이 있는 개활지가 있었다. 이 개활지는 두 개의 음푹 패인 길 뒤에 있었다. 베르겐과 니다 강 사이에 있는 지역의 3분의 2는 나무로 뒤덮여 있었고 니다 강의 지류가 그 사이를 흘렀다. 이 개활지에 있는 와트베르크 꼭대기에는 베르겐 마을을 관활하는 탑이 서 있었다. 베르겐 마을은 요새화된 집들과 영지가 있었으며 방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4월 13일 새벽, 브로이 공작은 적이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군대를 배치시켰다. 우익은 베르겐 마을에 주둔하여 프랑크푸르트 방향으로 나아가는 가파른 경사지를 따라 배치되었다. 좌익은 니다 강을 따라 형성된 숲에 배치되었다. 또한 브로이 공작은 다수의 기병대를 양익에 세 개 대열로 배치하고 나머지 기병대를 예비 부대로서 후방에 배치했다. 그리고 베르겐 마을 주변에 8개 보병대를 배치했고 5개의 추가 대대를 베르겐 마을 후방에 배치했으며 알자스 보병대 2개 대대로 하여금 지원 임무를 맡겼다. 중앙 보병대의 좌측은 작센 보병대와 함께 아트베르크 뒤편에 배치된 11개의 프랑스 보병 대대로 구성되었다. 또한 포병대는 최전선에 배치되어 적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한편 연합군은 오전 6시경에 적지를 향해 진군을 개시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자가 먼저 출발해 프리트베르크, 지센, 그리고 하나우에 분견대를 파견했다. 그 뒤를 이어 홀슈타인-고토프 공작 프린츠 게오르크 루트비히가 랑겐베르크하임으로 진군했고 이센부르크 왕자는 마케벨로 진군했다. 얼마 후 연합군 선봉부대를 맡은 경기병대는 프랑스군 척후병들을 후방으로 밀어내고 베르겐의 북동쪽에 위치한 마케벨을 장악했고, 그 뒤를 이어 루슈 장군이 이끄는 검은 후사르 2개 분대와 브라운슈바이크 공자의 군단이 진군했다. 오전 8시경, 브라운슈바이크 공자의 군단이 암호벤스타인의 동쪽 경사지에 도달했다. 페르디난트는 그들과 함께 동행하면서 병사들을 재촉해 빨리 진군해 가능한 빨리 적을 격퇴하게 했다. 이러한 적의 거센 공격에 직면한 브로이 공작은 생제르맹 백작 루이 클로드에게 편지를 보내 가능한 빨리 휘하 군단을 이끌고 베르겐으로 와달라고 요청했다. 한편 이센부르크 왕자의 군단은 브라운슈바이크 공자의 군단에 이어 프랑스군과 교전했다. 그러나 이센부르크 군단 우편에 있는 홀슈타인-고토프 공작의 군단은 3시간이나 늦었다.
페르디난트는 암호벤스타인과 비벨 사이의 지형을 정찰했다. 그는 베르겐 일댕에 많은 프랑스 연대를 볼 수 있었지만 베르겐과 와트베르크의 배후에 배치된 예비군은 확인하지 못했다. 페르디난트는 적이 막 도착했을 뿐 베르겐 일대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지 않다고 착각하고 베르겐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명령했다. 한편 브로이 공작은 그의 장군들을 와트베르크 탑 후편에 집결시킨 뒤 베르겐 마을을 반드시 사수해야 한다면서 적의 공세에 결사 항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후 오전 10시경, 연합군은 총공세를 개시했다. 브라운슈바이크 공자는 북쪽에서 공격했고 곧 양측은 농장과 울타리로 이뤄진 지역에서 격렬한 총격전을 벌였다. 그러나 연합군은 적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하다가 곧 패주했다.
페르디난트는 아군이 패주하는 것을 보고 즉시 암호벤스타인 인근에 배치된 척탄병 2개 중대를 최전선에 파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들은 패주하는 아군을 엄호해 후방에서 재집결할 시간을 벌어줬고, 몇 개의 연합군 대포들이 그들을 지원하기 위해 적에게 발포했다. 이윽고 척탄병 부대는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면서 농장들을 점령하며 동쪽의 움푹 패인 도로에 이르렀다. 그들은 그곳에서 숨을 돌리고 1분 후 방벽 바로 옆에 있는 베르겐 동부 외곽의 개활지로 전진했다. 그러자 프랑스군 보병대는 그들에게 단거리에서 일제 사격을 퍼부었고 프랑스 포병대도 그들에게 포격을 퍼부었다. 결국 척탄병들은 적의 격렬한 반격에 시달린 끝에 패주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전장을 장악하고 연합군의 반격을 모조리 물리쳤고, 연합군 척탄병들은 꾸준히 투입되었으나 끝내 적에게 격퇴당했다.
와트베르크에서 전투를 지켜보던 브로이 공작은 15개 대대를 추가로 파견하면서 북쪽에는 11개 대대를, 남쪽에는 4개 대대를 보내 연합군을 제압하게 했다. 페르디난트는 베르겐 남쪽에서 올라오고 있는 프랑스 4개 대대에 대항하기 위해 브라운슈바이크 보병 대대에게 이동하라고 명령했다. 이리하여 프랑스 4개 대대는 브라운슈바이크 보병 대대와 충돌해 격렬한 전투를 치렀으나 끝내 저지되었다. 이후 브라운슈바이크 대대와 척탄병 대대는 베르겐을 향해 세번째로 전진했다. 브로이 공작은 이에 맞서 베르겐에 주둔한 잔여 부대를 모조리 투입했다. 연합군 부대는 이러한 적의 결사 항전에 기가 질린 채 암호벤스타인으로 퇴각했다.
한편 이센부르크 왕자의 군단은 헤센 4개 분대와 후사르 1개 대대에게 대열을 갖추고 적을 공격하게 했다. 이들의 공격으로 프랑스군이 주춤한 사이 전열을 재정비한 척탄병 부대는 베르겐을 향한 네번째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나 그들은 울타리에서 저지되어 또다시 격퇴되었다. 페르디난트는 그제서야 포병대를 동원해 적을 격퇴해야겠다고 판단하고 지금 당장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포병대를 전진배치시키라고 명령했다. 브로이 공작은 이에 맞서 야전 포대에 가능한 많은 대포들을 배치한 뒤 전진하는 연합군에게 격렬한 포격을 퍼붓게 했다. 하지만 하노버 군단과 헤센 군단은 포격을 무릅스고 질서정연하게 대열을 구성한 뒤 다섯번째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나 이들 19개 대대는 곧 프랑스군 30개 대대와 맞붙었고 수적 열세로 인해 밀리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센부르크 왕자는 퇴각하려는 부대들을 독려하기 위해 최전선으로 나갔다가 그만 저격당해 전사하고 말았다.
페르디난트는 이센부르크 왕자 휘하의 군단이 패주하는 걸 추격하려는 일부 프랑스 분대를 물리친 기병대의 엄호 아래 암호벤스타인 후방에서 군대를 재집결시켰다. 브로이 공작은 프랑스 포병대에게 이 연합군 기병대에게 화력을 집중하라고 명령했다. 이에 기병대는 큰 피해를 입다가 후방으로 물러섰다. 그러던 때에 드디어 홀슈타인-고토프 공작의 군단이 중포 4문과 함께 전장에 나타났다. 홀슈타인-고토프의 공작은 자신의 군단에게 브라운슈바이크 공자의 군단에 남아있던 중포 21문과 함께 최전방에 중포를 배치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양군 포병들은 해가 질 때까지 포격전을 주고받았다. 이윽고 밤이 되자, 페르디난트는 더이상 싸워봐야 소용없다고 판단하고 철수했다. 브로이 공작의 부하들은 추격할 것을 권했으나, 브로이 공작은 아군의 피해가 크니 추격할 여력이 없다고 판단하고 이를 거부했다. 그래서 연합군은 주력군을 보전한 채 민덴으로 철수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베르겐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연합군은 이 전투에서 415명의 전사자, 1,770명의 부상자를 기록했고 이센부르크 왕자가 전사했다. 반면 프랑스군은 500명의 사망자와 1,300명의 부상자를 기록했으며 작센 부대를 이끌고 있던 다헤른 중장은 포탄에 치명상을 입고 4월 24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사망했다. 이로서 페르디난트의 계획은 실패했고, 그는 민덴을 향해 철수했다. 이후 프랑스군은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했고, 양측은 1759년 8월 1일 민덴 전투를 치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