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츠 게오르크 루트비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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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일생


1. 개요


프로이센의 장성. 홀슈타인-고토프 공작.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7년 전쟁에서 활약했다.

2. 일생


루트비히는 1719년 3월 16일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홀슈타인-고토프 공작 크리스티안 아우구스트이고, 어머니는 바덴-두를라흐 공주 알베르틴 프리데리케이다. 1726년 7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그는 홀어머니 밑에서 길려졌다. 1730년대, 루트비히는 작센군에 들어가 근위 군단에서 군 경력을 이어갔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초기인 1741년, 그는 프로이센군에 입대했고 1742년 5월 20일 로쵸우 기병대 흉갑기병대 중위로 임명되었다. 1743년 10월 27일, 루트비히는 홀슈타인-고토프 드래곤 부대의 지휘관이 되었고 1744년에는 소장으로 승진했다. 같은 해 12월 15일 연대장으로서 케셀스도르프 전투에 참가해 프로이센군의 승리를 이끌어낸 그는 1745년에 러시아의 옐리자베타 여제로부터 성 앤드류 훈장을 수여받았다.
1750년 1월 1일, 루트비히는 소피 샬롯 폰 슐레스비히-홀슈타인과 결혼했고 1756년 7년 전쟁이 발발하자 동프로이센 전역에 참가해 야전군 원수 한스 폰 레발트의 지휘를 받았다. 1757년 2월, 루트비히는 중장으로 진급했고 3월 초 러시아군에 맞서기 위해 앙르부르크에 군단을 집결시켰다. 8월 7일, 레발트 원수는 인스터베르크에 주둔한 군대를 보강하기 위해 루트비히에게 5개 기병대대를 이끌고 그곳으로 가게 했다. 8월 30일, 루트비히는 그로스-야거스도르프 전투에 참가해 우익 기병대를 이끌고 러시아군을 공격해 상당한 피해를 안겼지만 러시아군의 반격으로 패퇴했다. 9월 29일 러시아군이 본국으로 철수하자, 루트비히는 그들을 추격해 틸지트를 점령했다.
1757년 11월 말, 루트비히는 포메른 전선으로 투입되 페네 강을 따라 앙클람과 뎀민 사이의 전선에 진영을 건설한 후 스웨덴을 공격할 준비를 갖췄다. 그는 곧 슈테틴으로 진군했고 12월 말에 다르군으로 진군했다. 이후 그는 트레벨 강을 건너 베스틀란트로 진군했다. 1758년, 루트비히는 검은 독수리 훈장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그해 2월에 15개의 기병 대대 지휘관이 되어 엘베 강 좌측 둑에 있는 연합군에 가담하여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의 지휘를 받으며 독일 서부에서의 연합군의 겨울 공세에 참가했다. 이후 그는 6월 23일 크레펠트 전투에서 우익 기병대를 이끌고 연합군의 승리에 기여했으며, 이후에도 여러 전투에 참가해 프랑스군과 대적했다.
1760년, 루트비히는 작센에서 프리드리히 대왕과 합세하여 리그니츠 전투, 호치거스도르프 전투, 토르가우 전투에 참가했다. 그러나 토르가우 전투에서 그의 부대가 제때에 공세를 가하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고,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가 너무 굼떴다고 비난했다. 결국 12월 8일, 프리드리히 대왕은 그에게 프로이세군에서의 직무를 사임하라고 요구했고, 대왕의 신임을 잃은 그는 지휘관 직책에서 물러난 뒤 1761년 3월 27일 프로이센군을 쓸쓸히 떠났다.
1762년 2월 21일, 루트비히는 표트르 3세에 의해 러시아 육군 야전군 원수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표트르 3세가 폐위된 직후인 6월 4일 투옥되었고, 6월 21일 석방된 뒤 홀슈타인-고토프로 돌아왔다. 그 후 그는 킬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765년 9월 7일 사망했다. 향년 46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