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오그라드 공방전

 

오늘날에는 세르비아의 수도이며 15세기 초 이래로는 헝가리 남부에서 가장 중요한 요새로 난도페헤르바르라고 불렸던 베오그라드를 둘러싼 공방전. 1521년을 비롯해 역사상 열 번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졌으나, 본 항목에서는 1456년에 헝가리 왕국후녀디 야노시오스만 제국의 황제 메흐메트 2세가 친히 이끄는 오스만군을 물리친 전투를 다룬다.
1456년, 메흐메트 2세가 10만의 대군과 300문에 달하는 대포를 이끌고 베오그라드를 향해 진격을 개시하였다. 겁에 질린 헝가리 국왕은 사냥을 핑계로 빈으로 도망쳐 버렸고, 후냐디는 다시 한번 무대로 복귀하였다.
후냐디는 직접 발칸반도 전역에서 지원병을 모집하기 시작하였고 오스만의 동맹이던 왈라키아 공국의 블라디슬라프 2세를 견제하기 위해, 드라쿨의 아들이던 블라드 가시공을 지원하였다.[1]
그러나 정작 헝가리의 귀족들 중 상당수는 국왕의 부재를 핑계로 참전을 꺼리고 있었다. 오히려 당시 교황이던 칼릭투스 3세가 후냐디를 가리켜 '기독교 세계의 방패'라 칭송하며 추기경 카피스트라노[2]를 파견해 후냐디의 모병을 돕고 나섰다. 이렇게 후냐디는 오합지졸이긴 했으나 4만의 병사들을 모을 수 있었고 여기에 1만의 정예병을 모아 오스만군에게 포위된 베오그라드로 진격하였다.
7월 14일 베오그라드 포위망에 도달한 후냐디의 군대는 도나우 강을 막고 있던 오스만 함대를 격파하고 베오그라드에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오스만군의 우세는 변함이 없었다. 계속되는 전투 끝에 21일 무너진 성벽을 향해 오스만군의 야간 기습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미 예니체리 부대가 성벽 내부로 쏟아져 들어오는 위기상황에서 후냐디는 돌파된 성벽 주변에 불을 질러 적의 허리를 끊고 내부에 고립된 적들을 역포위하여 섬멸시켰다.
더 놀라운 일은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징집된 농민군 중 일부가 멋대로 성 밖으로 나가 오스만군 진지를 기습한 것이다. 카피스트라노 추기경은 이를 통제하려고 노력했으나, 막지 못한다는걸 깨닫고 오히려 선두에 서서 돌격해버렸다. 이른 아침 넋을 놓고 있던 오스만군은 이 공격에 당황하기 시작했고 후녀디는 기회를 포착하자 전 병력을 이끌고 총공격에 나섰다. 이에 오스만군은 순식간에 전의를 잃고 무질서하게 패주하기 시작했다. 메흐메트 2세예니체리를 끌고 전선에 나서 직접 헝가리의 기사와 일대일 결투를 벌여 죽이는등 사기를 북돋으려 했으나 오히려 화살을 맞고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다. 결국 오스만군은 10만 중 7만 5천에 달하는 병력과 중화기를 전부 잃는 엄청난 참패를 당했고 메흐메트 2세는 예니체리 부대의 몸을 던진 희생으로 겨우 탈출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1] 가시공은 1448년 왈라키아 공에 올랐다가 후냐디에 의해 폐위된 뒤 몰다비아로 도망갔다가 헝가리로 와 후냐디의 부하가 되어있었다.[2] 이를 보면 그냥 얼굴마담이 아닌가 싶겠지만 엄연히 독립된 지휘권을 가졌던 사람이다. 물론 농민군이 후냐디의 명령을 어겼다는 표현 등 실질적으로는 후냐디가 총괄했다는 증거는 많지만. 당시 그의 나이가 70이었는데, 후술할 농민군의 돌격에서 같이 돌격하는등 노익장의 면모를 과시했다. 카피스트라노는 베오그라드 전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 성인으로 시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