헝가리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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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000년부터 1946년까지 헝가리와 그 주변 지역에 존재하였던 국가이다.
헝가리는 1526년부터 1918년까지 합스부르크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1867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성립과 함께 헝가리 왕국이 등장했다가, 191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없어졌다.
이후 잠시 동안 공화정과 공산 정권이 들어서지만 트리아농 조약으로 왕정이 부활하고 1920년부터 1944년까지 호르티 미클로시가 섭정을 맡아 집권하였다. 1944년 말부터는 살러시 페렌츠가 집권하였으며, 1945년엔 소련에 점령당해 소련의 괴뢰국으로 전락한다.
2. 역사
2.1. 997 ~ 1038, 이슈트반 1세의 건국 후
아르파드 공작으로부터 세습된 헝가리 대공국의 공작 작위가 이슈트반 1세(István I, 975~1038, 재위 997-1038)때인 1000년에 로마 교회와 독일의 신성로마제국 황제로부터 왕의 칭호를 받아 헝가리의 왕으로 격상되면서, 11세기 헝가리 왕국이 건국되었다. 또한 1102년에는 헝가리의 칼만 왕이 크로아티아의 왕위에도 오르며 크로아티아-헝가리 연합(1102~1526)이 성립되어 발칸 반도에서도 영향력을 끼치기 시작했고, 유럽인들이 십자군 전쟁을 시작한 11~13세기엔 유럽 최강국들 중 하나로 군림했다.
12~13세기는 신성 로마 제국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전성기로, 아직 황제가 서유럽 전역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시기였고, 동방에선 동로마 제국의 콤니노스 왕조가 위세를 떨치던 시절이라, 강대한 세력을 동서에 둔 헝가리는 그 영향력을 유럽 전체에 떨치지는 못했다.
특히 헝가리는 동로마 제국의 콤니노스 왕조를 약화시키기 위해 동로마 내 세르비아인들과 연대하여 제국에 반란을 일으킴으로서 견제를 꾀했지만, 콤니노스 왕조가 하람 전투와 시르미움 전투에서 헝가리군을 격파하면서 헝가리를 약 30여년간 동로마 제국의 보호국으로 전락시켰다. 당시의 왕이었던 게자 3세가 제국의 봉신으로 거의 10년간 대제 마누일 1세의 궁정에 있었을 수준.
다만 폴란드와 함께 중부 유럽의 강자로 불리기는 충분한 국력을 보유하고 있었고, 이후 동로마 제국이 4차 십자군의 침공으로 몰락하자 동로마 제국에 적대하지 않겠다는 봉신서약을 깨고, 세력권을 발칸 반도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2.2. 전성기와 몰락
1241년, 동방에서 쳐들어온 몽골족(바투의 원정군)과 싸워 참패(모히 전투)한 후[2] ,헝가리 전역이 몽골군의 맹렬한 침략을 받았고, 전염병까지 만연하게 됨에 따라 헝가리의 국력은 일시적으로 크게 쇠퇴하였다. 이 때 헝가리 인구의 약 60%가 사망하였고, 이 인구를 회복하는데 약 300년의 기간이 걸릴 정도였다.[3] 기존에 헝가리인들이 살던 지역은 다른 민족들이 들어오게 돼 20세기까지 이어지는 민족 다툼이 생겼다.
2.2.1. 1288 ~ 1381, 1차 전성기: 카로이(1288 ~ 1342)와 러요시 1세(1342-1381)
14세기 중반, 1000년 이래 헝가리를 통치한 아르파드 왕가의 대가 끊기고 헝가리의 왕위는 나폴리 왕국을 다스리던 앙주 왕가[4] 의 카로이 로베르트(Károly Róbert)에게 넘어갔다. 카로이와 그의 아들 러요시의 재위기(1342-1381)에 헝가리는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하지만 이 때 왈라키아 지방의 바사라브 1세는 오히려 헝가리 왕국으로부터 독립하여 왈라키아 공국을 세운 후, 이를 진압하러 온 카로이 1세를 포사다(Posada) 전투에서 격퇴했다.
카로이 로베르트의 아들, 러요시 1세는 계속된 정복전쟁으로 방대한 영토를 가졌을 뿐만 아니라 후반기엔 폴란드 왕위까지 겸임하게 됨으로써 일시적으로 헝가리 왕국은 오늘날의 헝가리 전역, 폴란드 대부분, 루마니아의 절반, 세르비아 북부(베오그라드 포함),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전역, 심지어 오스트리아의 일부까지 지배했으며 딸을 결혼시킴으로서, 신성 로마 황제를 배출하기도 했다.
이토록 강력한 대왕국을 일군 헝가리였지만 프랑스와 같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세우는데는 실패한다. 헝가리는 거대한 영토 때문에 많은 나라들과 접경하고 있었고 폴란드,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 왕가, 왈라키아 공국, 세르비아인들과 싸웠으며, 이는 주변 모든 나라가 잠재적 적국이었다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했다.[5] 또한 상술하다시피 1241년 몽골에게 참패한 여파로 헝가리의 인구가 회복세에 접어들기까지 꽤 오랜 세월이 걸렸고, 이는 국가 발전의 침해요소가 되었다.
14세기 말부터 헝가리는 남방의 발칸 반도에서 밀려들어오기 시작한 오스만 제국에 맞서 전쟁을 벌이면서 조금씩 국운에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특히 1444년의 바르나 전투와 1448년의 코소보 전투[6] 에서, 오스만 제국의 무라트 2세(재위 1421~1444, 1446~1451)에게 연패한 것이 대표적이었다.
2.2.2. 중흥기 : 마차시 1세
하지만 그렇다고 헝가리가 약해진 것은 아니어서 1456년에는 후녀디 야노시의 주도로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베오그라드에서 저지하였으며, 그 아들로 왕위에 오른 마차시(Mátyás) 1세의 시대에 헝가리는 다시 한번 부흥기를 맞이했다. 마차시 1세가 어렸을 때에 인문주의자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덕에 이탈리아를 제외하면 모든 유럽 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르네상스 문화를 받아들인 나라가 되었으며[7] , 오스만을 제외하면 당시 유럽 최대의 상비군을 두어 군사력 강화를 꾀하기도 했다[8] .
2.2.3. 멸망, 모하치 전투(1526)
다만 그가 1490년에 죽고 폴란드의 왕족인 브와디스와프가 울라슬로(Ulászló) 2세(통치시기: 1490 ~ 1516, 27년간)로 즉위하면서 헝가리는 급속도로 기울기 시작했고, 결국 그의 이후에 왕에 오른 러요시 2세(1516 ~ 1526, 11년간)의 통치시기인 1526년 쉴레이만 1세(재위 1520~1566)가 거느린 군대와 모하치 전투에서 교전한 후 2만 대 10만이라는 병력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완패하면서 멸망을 맞게 되었다.[9]
이렇게 어이없게 헝가리 왕국이 멸망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헝가리는 강력한 중앙집권을 이루지 못하고 지방 귀족들의 힘이 강력한 상태였는데, 마차시 1세는 제도적으로 왕권을 강화해나가더니 마침내는 문화 부흥과 국방 강화를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면세권을 비롯해 귀족들이 그간 누려 오던 특권들을 모조리 폐지하는 등 전제군주로서 군림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니 귀족들의 입장에서 '저 왕이 언제 죽나' 라고 벼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가 서자만을 남기고 죽자 그를 후계자로 삼는다는 유언을 무시하고 몇 대 전 왕의 머나먼 친척이라는 이유로 브와디스와프를 데려다 앉혀버린 것이었다.
게다가 귀족들이 다른 헝가리 왕 후보들을 제치고 그를 옹립한 건, 강인하고 총명하다는 이유가 아닌 띨띨하고 모자라서 '예스맨' 으로 부려먹기 딱 좋겠다는 이유였다. 실제로 울라슬로 2세는 자신 앞에 무슨 서류가 내밀어지든 일단 서명부터 하고 보는 버릇이 있었고, 결국 헝가리는 귀족들의 사유물로 전락하고 만다. 요컨대 마차시 1세가 죽으면서, 그의 군사, 문화적 업적까지 다함께 관짝에 들어간 셈이었다.
이후 헝가리의 국토는 삼분[10] 되어 오스만 제국의 속국인 동부의 트란실바니아 공국을 제외하면 중심부는 오스만 제국의 최북단 영토로서 1699년까지 무려 170년이나 통치를 받아야 했으며, 서북부는 최후의 헝가리 국왕 러요시 2세의 누나와 결혼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가 헝가리의 잔존 세력에 의해 선출되어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오늘날까지도 이 시대는 헝가리인의 민족적 치부로 남았다.
한편 그 사이 헝가리는 문화적으로 종교개혁의 영향을 받아 합스부르크령 헝가리를 제외하고 상당수 백성들이 칼뱅교로 개종하였다. 이로 인해 헝가리도 체코처럼 가톨릭 이외에 개신교 문화유산이 건재하게 되었다.
1683년, 2차 빈 공방전에서 빈 함락에 실패한 오스만은 오스트리아-헝가리-베네치아-러시아가 엮인 신성 동맹 군대의 공격을 받고 참패해 헝가리의 잔존 영토를 오스트리아에 할양했다. 헝가리 전역은 중세에 그렇게 날을 세웠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통치를 받게 되었으며, 이 통치는 1867년까지 이어졌다. 이로서 헝가리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직할령이 되었다.[11]
2.3. 트란스라이타니아
19세기 초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이 퍼뜨린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영향으로 헝가리인들은 수백년 동안 헝가리를 지배해 온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격렬한 독립 운동을 전개했다. 특히 1848년 오스트리아에서 '빈 체제'에 항거한 3월 혁명이 일어나고 새 황제가 즉위하자 헝가리인들의 저항은 더욱 고조되어 코슈트 러요시의 주도 아래 부다페스트와 데브레첸에서 반 오스트리아 혁명을 일으켰다. 이 때 헝가리 혁명군은 오스트리아군을 연달아 격파하며 독립에 거의 성공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크로아티아인,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등 헝가리 내부의 소수민족과의 갈등과 자국내 분리주의 운동의 확산을 우려한 러시아 제국의 개입으로 인해 헝가리 혁명은 실패하고 만다. 헝가리 혁명을 진압하고 난 후 오스트리아 당국은 보복으로 헝가리 전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트란실바니아와 크로아티아 등 소수민족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을 분리한 후 헝가리어의 교육을 금지하고 독일인을 이주시키는 등 헝가리 지역의 독일화 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이런한 강압적인 통치 방식도 얼마 지나지 않아 한계를 맞게 되었다. 결국 1866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전한 뒤 오스트리아 제국이 독일 연방에서 축출당하며 독일의 통일 과정에서 사실상 배제된 것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오스트리아 정부는 방침을 전환해 제국 내 제2의 세력을 차지하고 있던 헝가리인들에게 공동의 제국을 제안했다. 대타협[12] 의 결과 헝가리인들은 헝가리 왕국을 건국하고 독립적인 정부와 의회 등을 구성하는 대가로 오래 전에 헝가리 공주와 결혼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머나먼 후손인 현재의 황제(당시의 황제는 프란츠 요제프 1세)를 왕으로 인정하여 이중 제국이 출현했다. 이렇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등장했고 헝가리인들은 비록 오스트리아의 황제를 왕으로 모셨지만 분리된 왕국을 만들었다.
1867년부터 헝가리인들은 오스트리아•독일인과 함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서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의 트란실바니아 등 트란스라이타니아 지역의 다른 민족들[13] 을 탄압했다. 이 중 가톨릭 교도가 아닌 정교회 신자였던 루마니아인과 세르비아인은 더 많은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1878년 이후에는 제국 바깥에 루마니아 왕국, 세르비아 왕국이 수립되었기 때문에 소수 민족 탄압은 루마니아, 세르비아의 반감과 적대감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은 발칸 반도에서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입지를 좁히게 만들었다. 1868년 크로아티아-헝가리 타협으로 크로아티아계는 트란스라이타니아 내에서 대폭적인 자치권을 부여받았고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이 수립되어 헝가리 왕국의 지배를 받게되었다.
1918년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배하면서 헝가리 왕국도 소멸되었다.
2.4. 분리 독립: 현대 헝가리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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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독립한 이후의 국기
패전 후 민족자결주의와 베르사유 조약에 따라 제국은 공중분해되어, 헝가리인들은 1526년 이후 390여년 만에 마침내 그들'만'의 나라를 갖게 되었다. 헝가리 공화국이 탄생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 헝가리는 트리아농 조약에 의하여 에르데이(Erdély)로 불리던 트란실바니아(Transilvania)를 포함한 대량의 영토를 상실하고 이중제국의 일원이었던 헝가리의 영역보다 작은 영토에 세워졌다. 헝가리인들이 지배하던 슬로바키아인들은 체코인들과 연대해 체코슬로바키아로 독립하고, 슬로베니아인들과 크로아티아인들은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와 연대해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독립했으며, 트란실바니아의 루마니아인들은 루마니아 왕국에 편입되어 헝가리 왕국 이후 수백년간 지속된 마자르의 지배에서 벗어났다.
그러나 분리 독립 이후에도 헝가리의 역사는 고난과 굴욕으로 점철되었다. 1918~19년 사이 쿤 벨러(Kun Bela), 거르버이 샨도르(Garbai Sándor)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이 러시아 혁명에 자극받아 세운 헝가리 소비에트 공화국(Magyarországi Tanácsköztársaság)은, 헝가리 보수파들과 이들과 연합한 루마니아군의 침공으로 붕괴되었다. 이후 헝가리에는 권위주의적 민족주의 국가가 세워졌고, 호르티 미클로시 제독[15] 이 다스린 이 나라는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에 호의적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인 1940년 11월에는 과거의 영토를 되찾기 위해 독일과 동맹을 맺고 추축국에 가담했다. 헝가리는 독일의 소련 침공 및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적극 참여했다. 독일이 우세했을 때 체코슬로바키아와 루마니아 로부터 옛 영토를 조금 뜯어내고 유고슬라비아에서도 영토를 뜯어내는 등 1차대전 때의 패배를 되갚는 듯 했다. 그러나 1944년 전세가 불리해지자, 호르티 치하의 헝가리는 소련과 단독으로 강화를 맺으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를 파악한 독일은 1944년 3월 마가레타 작전을 시행해 헝가리를 사실상 점령했다.[16] 이에 호르티는 새 총리를 임명하지만, 독일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그해 10월 독일군과 친독 인사인 살러시 페렌츠가 이끄는 화살십자당의 합동 작전인 판처파우스트 작전으로 호르티는 섭정 지위를 잃게 되었고, 슈츠슈타펠 대원들에 의해 납치되어 독일로 호송된다. 살러시 페렌츠의 쿠데타는 성공하여 국민단결정부(Nemzeti Összefogás Kormánya) 수립을 선언하며 총리로 취임했다. 살러시 페렌츠의 국민단결정부는 파시즘적 통치를 하고, 엄연한 준메이저 추축국이던 이전과 달리 독일에 거의 종속된 모습을 보여주었다.[17] 그러나 결국 전쟁에서 패배하고 소련에 점령(1945년 4월)당하였다.
이후 헝가리에는 제2공화국이 설립되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철의 장막' 안쪽으로 편입되었고, 영토도 다시 트리아농 조약을 기준으로 한 영토로 되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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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독립한 뒤, 1946년까지 사용된 헝가리 왕국 국기는 이렇다.[2] 심지어 이때 바투는 오만한 어투로 '''보잘 것 없는 헝가리의 왕(!!!)은 즉각 항복할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전달하기도 했다.[3] 이 추정은 과거의 것으로, 현재에는 다른 견해도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 1960년대 학계에서는 1240년도의 헝가리 인구를 200만 가량으로, 몽골 침공 이후의 인구를 100만 ~ 120만, 1300년의 인구를 140만 ~ 160만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근래에는 몽골 침공 직전에 헝가리 인구를 120만 ~ 135만 가량으로 낮추어 추측하고 있다.[4] 영국의 앙주 왕조와는 다른 가문으로, 프랑스 카페 왕가의 방계 가문이다. 원래는 시칠리아 왕국의 왕가였으나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이 일어난 이후로 시칠리아 섬을 상실,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북 시칠리아 왕국(=나폴리 왕국)을 다스리는 왕가가 되었다.[5] 비슷하게 프랑스 역시 거대한 영토를 지녔지만 헝가리와는 다르게 프랑스의 지형은 바다와 산맥들로 자연 국경을 형성하고 있었다. 헝가리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방어선을 펼쳐도 충분히 국경을 지킬 수 있었던 것.[6] 1369년에도 오스만과 세르비아가 코소보에서 싸운 탓에, 2차 코소보 전투라고도 한다.[7] 특히 마차시 1세가 건립한 왕립 도서관인 비블로티카 코르비니아나(Bibliotheca Corviniana)는 방대한 서적을 구비하여,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까지 올라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보다 규모가 컸던 도서관은 바티칸 도서관이 유일했다.[8] 헝가리의 상비군은 '검은 군대(Black Army, Fekete sereg)' 라고 불렸는데 1458년부터 1494년까지 활동하였으며, 전성기 때의 병력은 2만 8천 명에 달했다. 반면 오스만과 헝가리를 제외하면 동시대에 상비군을 두었던 유일한 유럽 국가인 프랑스는 가장 규모가 컸던 15세기 후반을 살펴보아도 꼴랑 4천 명이었다. 또한 검은 군대는 중기병에 경기병, 보병까지 다양한 병종을 두었으며 총기를 받아들인 반면, 프랑스의 4천 명은 전부 중기병이었다.[9] 여담으로, 오늘날까지도 헝가리인들은 힘든 일을 겪으면 '모하치의 패배보다 더하다' 라는 말을 한다고 한다. 한이 제대로 맺힌 모양.[10] 모하치 전투 직후에 헝가리의 귀족 가운데 하나였던 자포여 야노시(Szapolyai János)라는 인물이 귀족들 대다수의 지지를 얻어 왕을 자칭했지만, 모하치에서 전사한 헝가리 왕 러요시 2세는 생전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 1세를 후계로 지목했었다. 따라서 이들 두 사람은 각자 헝가리의 왕을 자칭하며 전쟁을 벌였는데, 그 와중에 야노시가 오스만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며 신하국이 되겠다고 요청, 쉴레이만 대제는 당장 그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헝가리는 일단 양분되었는데, 1541년에 야노시가 죽고 갓난아이인 야노시 2세가 즉위하자 '얘를 지금 그대로 헝가리 왕에 앉혔다간 합스부르크한테 다 뺏기겠다' 라고 판단한 쉴레이만이 헝가리를 삼분하여 중부는 직할지로 삼고 비교적 안전한 동부(트란실바니아 지방)만 야노시의 영토로 인정했다. 역사가들은 이 야노시의 헝가리를 동헝가리 왕국이라고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리고 1570년에 야노시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2세에게 헝가리 왕위를 완전히 양도하면서, 그는 '트란실바니아 공작이자 헝가리왕국 영토 일부의 지배자(여기까지가 공식 직함이다)' 가 되었다.[11] 보통 이렇게들 말하지만 헝가리 왕국 또한 보헤미아 왕국처럼 선거군주정이었으며 합스부르크 가문은 엄연히 선출된 군주들로 억압적인 전제군주들과는 거리가 멀다.[12] 독일어로 '아우스글라이히', 헝가리어로 '키에제제시'.[13]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루신인 등.[14] 다만 이 시기 헝가리 영토는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에게서 영토를 뜯어내고 독일의 조력으로 북부 트란실바니아를 할양받고 유고슬라비아에게서도 영토를 뜯어낸 뒤의 최대 영토로써 헝가리 왕국 대부분의 기간은 트리아농 조약으로 정해진 현대 헝가리 영토라 보면 된다.[15] 호르티 미클로시. 헝가리의 섭정. 본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군 장교였다. 우습게도 그가 섭정일 당시 헝가리는 공화국을 칭하고 있었음에도 1946년까지 공식적으론 '''왕국'''이었고, 이 때문에 1919년부터 1946년까지 헝가리는 '''바다 없는 나라의 해군 제독이 왕 없는 왕국의 섭정'''이 되어 다스리는 기묘한 상태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헝가리의 왕이던 카를 1세(헝가리명: 카로이 4세)가 헝가리로 잠입하여 왕으로 즉위하려고 시도하기는 했으나 호르티 제독의 군대에게 도로 쫓겨났다.[16] 이때를 기점으로 헝가리의 유대인들이 독일로 호송되기 시작했다. 후술할 국민단결정부에선 아예 자기들이 직접 학살한다.[17] 이때를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마냥 독일의 괴뢰국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서 독립한 뒤, 1946년까지 사용된 헝가리 왕국 국기는 이렇다.[2] 심지어 이때 바투는 오만한 어투로 '''보잘 것 없는 헝가리의 왕(!!!)은 즉각 항복할 것'''을 요구하는 서신을 전달하기도 했다.[3] 이 추정은 과거의 것으로, 현재에는 다른 견해도 상당한 지지를 받고 있다. 1960년대 학계에서는 1240년도의 헝가리 인구를 200만 가량으로, 몽골 침공 이후의 인구를 100만 ~ 120만, 1300년의 인구를 140만 ~ 160만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근래에는 몽골 침공 직전에 헝가리 인구를 120만 ~ 135만 가량으로 낮추어 추측하고 있다.[4] 영국의 앙주 왕조와는 다른 가문으로, 프랑스 카페 왕가의 방계 가문이다. 원래는 시칠리아 왕국의 왕가였으나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이 일어난 이후로 시칠리아 섬을 상실, 이탈리아 반도 남부의 북 시칠리아 왕국(=나폴리 왕국)을 다스리는 왕가가 되었다.[5] 비슷하게 프랑스 역시 거대한 영토를 지녔지만 헝가리와는 다르게 프랑스의 지형은 바다와 산맥들로 자연 국경을 형성하고 있었다. 헝가리보다 상대적으로 적은 방어선을 펼쳐도 충분히 국경을 지킬 수 있었던 것.[6] 1369년에도 오스만과 세르비아가 코소보에서 싸운 탓에, 2차 코소보 전투라고도 한다.[7] 특히 마차시 1세가 건립한 왕립 도서관인 비블로티카 코르비니아나(Bibliotheca Corviniana)는 방대한 서적을 구비하여,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까지 올라 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이보다 규모가 컸던 도서관은 바티칸 도서관이 유일했다.[8] 헝가리의 상비군은 '검은 군대(Black Army, Fekete sereg)' 라고 불렸는데 1458년부터 1494년까지 활동하였으며, 전성기 때의 병력은 2만 8천 명에 달했다. 반면 오스만과 헝가리를 제외하면 동시대에 상비군을 두었던 유일한 유럽 국가인 프랑스는 가장 규모가 컸던 15세기 후반을 살펴보아도 꼴랑 4천 명이었다. 또한 검은 군대는 중기병에 경기병, 보병까지 다양한 병종을 두었으며 총기를 받아들인 반면, 프랑스의 4천 명은 전부 중기병이었다.[9] 여담으로, 오늘날까지도 헝가리인들은 힘든 일을 겪으면 '모하치의 패배보다 더하다' 라는 말을 한다고 한다. 한이 제대로 맺힌 모양.[10] 모하치 전투 직후에 헝가리의 귀족 가운데 하나였던 자포여 야노시(Szapolyai János)라는 인물이 귀족들 대다수의 지지를 얻어 왕을 자칭했지만, 모하치에서 전사한 헝가리 왕 러요시 2세는 생전에 합스부르크 가문의 페르디난트 1세를 후계로 지목했었다. 따라서 이들 두 사람은 각자 헝가리의 왕을 자칭하며 전쟁을 벌였는데, 그 와중에 야노시가 오스만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며 신하국이 되겠다고 요청, 쉴레이만 대제는 당장 그를 받아들였다. 이로써 헝가리는 일단 양분되었는데, 1541년에 야노시가 죽고 갓난아이인 야노시 2세가 즉위하자 '얘를 지금 그대로 헝가리 왕에 앉혔다간 합스부르크한테 다 뺏기겠다' 라고 판단한 쉴레이만이 헝가리를 삼분하여 중부는 직할지로 삼고 비교적 안전한 동부(트란실바니아 지방)만 야노시의 영토로 인정했다. 역사가들은 이 야노시의 헝가리를 동헝가리 왕국이라고 따로 구분하기도 한다. 그리고 1570년에 야노시가 합스부르크 가문의 막시밀리안 2세에게 헝가리 왕위를 완전히 양도하면서, 그는 '트란실바니아 공작이자 헝가리왕국 영토 일부의 지배자(여기까지가 공식 직함이다)' 가 되었다.[11] 보통 이렇게들 말하지만 헝가리 왕국 또한 보헤미아 왕국처럼 선거군주정이었으며 합스부르크 가문은 엄연히 선출된 군주들로 억압적인 전제군주들과는 거리가 멀다.[12] 독일어로 '아우스글라이히', 헝가리어로 '키에제제시'.[13]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루신인 등.[14] 다만 이 시기 헝가리 영토는 뮌헨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에게서 영토를 뜯어내고 독일의 조력으로 북부 트란실바니아를 할양받고 유고슬라비아에게서도 영토를 뜯어낸 뒤의 최대 영토로써 헝가리 왕국 대부분의 기간은 트리아농 조약으로 정해진 현대 헝가리 영토라 보면 된다.[15] 호르티 미클로시. 헝가리의 섭정. 본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해군 장교였다. 우습게도 그가 섭정일 당시 헝가리는 공화국을 칭하고 있었음에도 1946년까지 공식적으론 '''왕국'''이었고, 이 때문에 1919년부터 1946년까지 헝가리는 '''바다 없는 나라의 해군 제독이 왕 없는 왕국의 섭정'''이 되어 다스리는 기묘한 상태였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마지막 황제이자 헝가리의 왕이던 카를 1세(헝가리명: 카로이 4세)가 헝가리로 잠입하여 왕으로 즉위하려고 시도하기는 했으나 호르티 제독의 군대에게 도로 쫓겨났다.[16] 이때를 기점으로 헝가리의 유대인들이 독일로 호송되기 시작했다. 후술할 국민단결정부에선 아예 자기들이 직접 학살한다.[17] 이때를 이탈리아 사회 공화국마냥 독일의 괴뢰국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