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녀디 야노시
Hunyadi János[1]
트란실바니아 총독(보이보드), 헝가리 왕의 섭정, 명군 마차시 1세의 아버지. 헝가리 왕국의 장군으로서 당대 유럽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본래 왈라키아 지방 출신으로서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를 섬기던 그의 아버지 보이크가 트란실바니아의 후녀디 성(Vajdahunyadi vár)[2] 을 하사받게 되면서 후녀디의 성을 쓰게 되었다. 비록 하급의 귀족에 불과하였으나 비슷한 계층에서는 가장 높은 지위였으며 다른 영주들에 비교하여 재산도 그렇게 꿀리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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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 영웅광장(Hősök tere)에 있는 후녀디 야노시의 동상
후녀디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계기는 오스만 제국의 무라드 2세가 세르비아침공을 결행한 사건이었다. 당시 헝가리 왕국과 가신 관계에 있던 세르비아 공 주라지를 돕기 위해 폴란드 왕 겸 헝가리 왕이던 브와디스와프 3세는 트란실바니아 지역의 총독(보이보드)이었던(1446~1452) 후녀디 야노시를 지휘관으로 임명해 대오스만 원정군을 일으켰다.(1443. 9)
후녀디의 군대는 오스만군을 밀어붙여 소피아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올렸지만 오스만군의 저항과 보급선 유지의 어려움으로 인해 퇴각했다. 그 와중에도 추격해오는 오스만군을 격파하고 무라드 2세의 처남을 포로로 잡아 휴전을 이끌어냈다. 결국 퇴각하기는 하였으나 이 전쟁으로 헝가리와 후녀디의 위신은 크게 상승했고 무라드 2세는 세르비아의 중립을 조건으로 세르비아의 영토를 반환했다.
이듬해 추기경 체자레니는 대오스만 동맹 결성을 촉구하였고 여기에 호응한 교황령, 헝가리 왕국, 폴란드, 부르고뉴 공국, 베네치아, 제노바의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여기에 왈라키아 공국도 참전하게 되었다.[3] 드디어 연합군은 다뉴브 강을 넘어 공격을 개시하였다(1444. 9. 20). 그러나 이전 원정이 끝난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재개된 원정은 예전의 규모에 미치지 못하였고, 바르나까지 진격한 연합군은 이곳에서 오스만군에게 포위당한 채 혈투 끝에 퇴각했다(바르나 전투).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르나 십자군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오스만군을 상당히 밀어붙였기 때문에[4] 오스만 또한 공세를 지속하지 않았다는 것.
이 전투 뒤에 왈라키아를 통해 퇴각하던 후녀디는 블라드 2세 드라쿨과 그의 아들 미르체아 2세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는데 그 이유는 확실치 않다. 단지 바르나 전투에서 오스만군에 대한 공격을 주장하고 직접 지휘를 맡았던 것이 후녀디였기 때문에 블라드 2세가 후녀디의 책임을 물으려 했던 것이라고 생각될 뿐이다. 여담으로 이 사건이 훗날 블라드 2세 드라쿨의 아들, 블라드 3세 '체페슈'의 인생을 질곡으로 밀어넣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바르나 전투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가 사망하면서 후녀디는 당분간 섭정으로서 헝가리를 통치했다. 후녀디는 바르나의 치욕을 갚기 위하여 군대를 재정비하였고, 1448년 알바니아의 영웅 스칸데르베그를 진압하기 위해 무라드 2세가 출병하자 다시 한번 원정길에 나선다. 이때 주라지는 후녀디가 세르비아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후녀디는 이 경고를 무시하고 그대로 세르비아에 대한 침공을 개시했다. 이에 무라드 2세는 곧장 후녀디를 맞이하기 위한 병력을 나눠 세르비아로 파견하였다.
10월 17일 양군은 코소보 벌판에서 마주쳐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후녀디는 이 전투에서 다시 한번 패배하고, 후퇴하던 와중에 세르비아인들에게 붙잡혀 다시는 세르비아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서약과 함께 그의 아들인 마티아스 코르비누스가 주라지의 조카딸과 결혼을 하기로 약조하였다. 마티아스 코르비누스는 헝가리의 현군으로 유명한 마차시 1세의 라틴식 이름이다.
이후 코소보의 패배로 이미 실각한 것과 다름 없던 후녀디를 되살려준 것은, 역설적이게도 메흐메트 2세의 세르비아 침공이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동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기세가 오른 메흐메트 2세는 헝가리 왕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이중가신 관계를 맺은 세르비아를 직접 통치하기로 마음먹고,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 1년이 지난 1454년 침공을 개시하였다. 주라지는 헝가리로 도피하였고 코소보 일대는 완전히 오스만의 수중에 들어갔다.
1456년 드디어 메흐메트 2세(25세)가 10만의 대군과 300문에 달하는 대포를 이끌고 베오그라드를 향해 진격을 개시하였다. 겁에 질린 헝가리 국왕은 사냥을 핑계로 빈으로 도망쳐 버렸고, 후녀디는 다시 한번 무대로 복귀하였다. 후녀디는 직접 발칸 반도 전역에서 지원병을 모집하기 시작하였고, 오스만의 동맹이 되어버린 왈라키아 공국의 '블라디슬라프 2세'를 견제하기 위해, 블라드 2세의 3남이었던 블라드 3세를 지원하였다.[5]
그러나 정작 헝가리의 귀족들 중 상당수는 국왕의 부재를 핑계로 참전을 꺼리고 있었다. 오히려 당시 교황이던 칼릭스투스 3세가 후녀디를 가리켜 '기독교 세계의 방패'라 칭송하며 사제 카피스트라노[6] 를 파견해 후녀디의 모병을 돕고 나섰다. 이렇게 후녀디는 오합지졸이긴 했으나 40,000명의 병사들을 모을 수 있었고 여기에 10,000명의 정예병을 모아 오스만군에게 포위된 베오그라드로 진격하였다.
7월 14일 베오그라드 포위망에 도달한 후녀디의 군대는 도나우 강을 막고 있던 오스만 함대를 격파하고 베오그라드에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군의 우세는 변함이 없었다. 계속되는 전투 끝에 21일 무너진 성벽을 향해 오스만군의 야간 기습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미 예니체리 부대가 성벽 내부로 쏟아져 들어오는 위기상황에서 후녀디는 돌파된 성벽 주변에 불을 질러 적의 허리를 끊고 내부에 고립된 적들을 역포위하여 섬멸시켰다.
더 놀라운 일은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징집된 농민군 중 일부가 멋대로 성 밖으로 나가 오스만군 진지를 기습한 것이다. 카피스트라노는 이를 통제하려고 노력했으나, 막지 못한다는걸 깨닫고 오히려 선두에 서서 돌격해버렸다. 이른 아침 넋을 놓고 있던 오스만군은 이 공격에 당황하기 시작했고, 후녀디는 기회를 포착하여 전 병력을 이끌고 총공격에 나섰다. 이에 오스만군은 순식간에 전의를 잃고 무질서하게 패주하기 시작했다. 메흐메트 2세는 예니체리를 이끌고 전선에 나서 직접 헝가리의 기사와 일대일 결투를 벌여 죽이는 등 사기를 북돋으려 했으나, 오히려 화살을 맞고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다. 결국 오스만군은 75,000명에 달하는 병력과 중화기를 전부 잃는 엄청난 참패를 당했고, 메흐메트 2세는 예니체리 부대의 몸을 던진 희생으로 겨우 탈출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전투의 충격으로 메흐메트 2세는 음독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한동안 폐인으로 지내게 되었다.
베오그라드 공방전은 후녀디의 가장 빛나는 승리였지만, 허무하게도 곧바로 찾아온 전염병으로 인해 야노시는 가장 빛나는 순간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후계자였던 장남 후녀디 라즐로가 세력을 이어갔지만, 헝가리의 기성 귀족들과의 권력 다툼 속에 반역죄를 선고받아 1년만에 처형당했고, 함께 갇혀있던 차남 마차시가 반란으로 풀려난 뒤, 외숙부 미할리 쉴라지[7] 에게 옹립되어 마차시 1세(마티아스 코르비누스)로 즉위하게 된다.
이는 헝가리 역사상 왕족이 아닌 사람이 헝가리의 왕이 된 첫번째 사례였는데, 당연히 그 후녀디의 아들이라는 점이 작용했다.[8] 마차시 1세도 그 후녀디의 아들답게 명군으로 이름을 날렸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4년 창설된 헝가리인으로 구성된 제25SS무장척탄병사단은 바로 이 후녀디 야노시의 이름을 따서 명명(25th Waffen Grenadier Division of the SS Hunyadi (1st Hungarian))되었다.
징기스칸 4 파워업키트의 시나리오 4(1370년)에서 스칸데르베그와 함께 함께 발칸 반도의 재야 인재로 등장하며, 1400년대 초반부터 등용할 수 있다.
Europa Universalis IV에서 헝가리의 장군으로 등장하며 능력치는 4/4/4/1. 이벤트를 통해 플레이어 혹은 AI 의 선택에 따라서 섭정이 될 수 있으며 능력치는 4/5/5. 아들 마차시 후녀디는 이후 진행에 따라 이벤트를 통해 플레이어 혹은 AI 의 선택에 따라 왕위에 오를 수 있으며 능력치는 4/5/6, 장군으로서의 능력치는 3/4/3/1(이벤트로 즉위한 경우 적용되지 않음). 이들 부자의 활약을 반영하듯 매우 높은 능력치가 책정되어 있다.
후스 전쟁을 다룬 오니시 코이치의 만화 소녀전쟁에서는 요한 후냐디라는 이름으로 등장. 이린 시절이며 작화상으로도 미소년이다. 헝가리 국왕 지기스문트의 부하로 등장하며 주인공인 샤르카의 연인이자 남편으로 나온다. 샤르카와의 사이에서 클라라라는 이름의 딸을 낳았고, 그 딸은 소녀전쟁 본편 완결 후 연재된 외전 2편의 주인공이 된다.[9]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서 작품 초반부터 등장이 확정되어 있었던 인물 중 하나인데, 마침내 188화에서 처음 등장했다. 실제 별명인 '백색의 기사'라는 말 그대로 순백으로 빛나는 갑옷을 입고 등장하며, 왈라키아-오스만 연합의 군대로 인해 전멸한 군부대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분노하지만, 상황이 급박하기에 시체 수습은 하지 않고, 대신 갑옷을 비롯한 군장은 벗겨내어서 챙기라는 냉철한 모습도 보여준다. 또한, 세르비아를 비롯한 발칸 반도 서부의 국가들의 세력이 변변찮은 상태에서 그들에 대한 기대를 접고, 주인공이 통치하는 모레아를 대오스만 전략에 있어서 사실상의 유일한 희망으로 본다. 무라트에게 백색기사라 불리며 인정을 받았고, 헝가리에선 지기스문트 황제의 유언을 직접 들은 고명대신이 되었으며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전권대사, 드래곤 기사단의 핵심 인물이 되어 조직한 흑군으로 3차 오스만전쟁의 승리에 일조하는 등 다양한 활약을 하며 주인공을 돕고있다.
용병대장과 성녀에서도 등장한다.
(1407? ~ 1456.8.11)
[image]1. 개요
트란실바니아 총독(보이보드), 헝가리 왕의 섭정, 명군 마차시 1세의 아버지. 헝가리 왕국의 장군으로서 당대 유럽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한 가장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이었다.
2. 행적
본래 왈라키아 지방 출신으로서 헝가리 왕 지기스문트를 섬기던 그의 아버지 보이크가 트란실바니아의 후녀디 성(Vajdahunyadi vár)[2] 을 하사받게 되면서 후녀디의 성을 쓰게 되었다. 비록 하급의 귀족에 불과하였으나 비슷한 계층에서는 가장 높은 지위였으며 다른 영주들에 비교하여 재산도 그렇게 꿀리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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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다페스트 영웅광장(Hősök tere)에 있는 후녀디 야노시의 동상
후녀디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계기는 오스만 제국의 무라드 2세가 세르비아침공을 결행한 사건이었다. 당시 헝가리 왕국과 가신 관계에 있던 세르비아 공 주라지를 돕기 위해 폴란드 왕 겸 헝가리 왕이던 브와디스와프 3세는 트란실바니아 지역의 총독(보이보드)이었던(1446~1452) 후녀디 야노시를 지휘관으로 임명해 대오스만 원정군을 일으켰다.(1443. 9)
후녀디의 군대는 오스만군을 밀어붙여 소피아까지 진출하는 쾌거를 올렸지만 오스만군의 저항과 보급선 유지의 어려움으로 인해 퇴각했다. 그 와중에도 추격해오는 오스만군을 격파하고 무라드 2세의 처남을 포로로 잡아 휴전을 이끌어냈다. 결국 퇴각하기는 하였으나 이 전쟁으로 헝가리와 후녀디의 위신은 크게 상승했고 무라드 2세는 세르비아의 중립을 조건으로 세르비아의 영토를 반환했다.
2.1. 바르나 전투(1444.11.10)
이듬해 추기경 체자레니는 대오스만 동맹 결성을 촉구하였고 여기에 호응한 교황령, 헝가리 왕국, 폴란드, 부르고뉴 공국, 베네치아, 제노바의 연합군이 결성되었다. 여기에 왈라키아 공국도 참전하게 되었다.[3] 드디어 연합군은 다뉴브 강을 넘어 공격을 개시하였다(1444. 9. 20). 그러나 이전 원정이 끝난지 채 1년도 지나지 않아 재개된 원정은 예전의 규모에 미치지 못하였고, 바르나까지 진격한 연합군은 이곳에서 오스만군에게 포위당한 채 혈투 끝에 퇴각했다(바르나 전투).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르나 십자군이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오스만군을 상당히 밀어붙였기 때문에[4] 오스만 또한 공세를 지속하지 않았다는 것.
이 전투 뒤에 왈라키아를 통해 퇴각하던 후녀디는 블라드 2세 드라쿨과 그의 아들 미르체아 2세에 의해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는데 그 이유는 확실치 않다. 단지 바르나 전투에서 오스만군에 대한 공격을 주장하고 직접 지휘를 맡았던 것이 후녀디였기 때문에 블라드 2세가 후녀디의 책임을 물으려 했던 것이라고 생각될 뿐이다. 여담으로 이 사건이 훗날 블라드 2세 드라쿨의 아들, 블라드 3세 '체페슈'의 인생을 질곡으로 밀어넣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바르나 전투에서 브와디스와프 3세가 사망하면서 후녀디는 당분간 섭정으로서 헝가리를 통치했다. 후녀디는 바르나의 치욕을 갚기 위하여 군대를 재정비하였고, 1448년 알바니아의 영웅 스칸데르베그를 진압하기 위해 무라드 2세가 출병하자 다시 한번 원정길에 나선다. 이때 주라지는 후녀디가 세르비아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으나 후녀디는 이 경고를 무시하고 그대로 세르비아에 대한 침공을 개시했다. 이에 무라드 2세는 곧장 후녀디를 맞이하기 위한 병력을 나눠 세르비아로 파견하였다.
10월 17일 양군은 코소보 벌판에서 마주쳐 치열한 접전을 벌였으나 후녀디는 이 전투에서 다시 한번 패배하고, 후퇴하던 와중에 세르비아인들에게 붙잡혀 다시는 세르비아를 침공하지 않겠다는 서약과 함께 그의 아들인 마티아스 코르비누스가 주라지의 조카딸과 결혼을 하기로 약조하였다. 마티아스 코르비누스는 헝가리의 현군으로 유명한 마차시 1세의 라틴식 이름이다.
2.2. 오스만 제국의 세르비아 침공(1454)
이후 코소보의 패배로 이미 실각한 것과 다름 없던 후녀디를 되살려준 것은, 역설적이게도 메흐메트 2세의 세르비아 침공이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동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기세가 오른 메흐메트 2세는 헝가리 왕국과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이중가신 관계를 맺은 세르비아를 직접 통치하기로 마음먹고,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 1년이 지난 1454년 침공을 개시하였다. 주라지는 헝가리로 도피하였고 코소보 일대는 완전히 오스만의 수중에 들어갔다.
2.3. 베오그라드 공방전(1456)
1456년 드디어 메흐메트 2세(25세)가 10만의 대군과 300문에 달하는 대포를 이끌고 베오그라드를 향해 진격을 개시하였다. 겁에 질린 헝가리 국왕은 사냥을 핑계로 빈으로 도망쳐 버렸고, 후녀디는 다시 한번 무대로 복귀하였다. 후녀디는 직접 발칸 반도 전역에서 지원병을 모집하기 시작하였고, 오스만의 동맹이 되어버린 왈라키아 공국의 '블라디슬라프 2세'를 견제하기 위해, 블라드 2세의 3남이었던 블라드 3세를 지원하였다.[5]
그러나 정작 헝가리의 귀족들 중 상당수는 국왕의 부재를 핑계로 참전을 꺼리고 있었다. 오히려 당시 교황이던 칼릭스투스 3세가 후녀디를 가리켜 '기독교 세계의 방패'라 칭송하며 사제 카피스트라노[6] 를 파견해 후녀디의 모병을 돕고 나섰다. 이렇게 후녀디는 오합지졸이긴 했으나 40,000명의 병사들을 모을 수 있었고 여기에 10,000명의 정예병을 모아 오스만군에게 포위된 베오그라드로 진격하였다.
7월 14일 베오그라드 포위망에 도달한 후녀디의 군대는 도나우 강을 막고 있던 오스만 함대를 격파하고 베오그라드에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스만군의 우세는 변함이 없었다. 계속되는 전투 끝에 21일 무너진 성벽을 향해 오스만군의 야간 기습이 시작되면서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이미 예니체리 부대가 성벽 내부로 쏟아져 들어오는 위기상황에서 후녀디는 돌파된 성벽 주변에 불을 질러 적의 허리를 끊고 내부에 고립된 적들을 역포위하여 섬멸시켰다.
더 놀라운 일은 다음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징집된 농민군 중 일부가 멋대로 성 밖으로 나가 오스만군 진지를 기습한 것이다. 카피스트라노는 이를 통제하려고 노력했으나, 막지 못한다는걸 깨닫고 오히려 선두에 서서 돌격해버렸다. 이른 아침 넋을 놓고 있던 오스만군은 이 공격에 당황하기 시작했고, 후녀디는 기회를 포착하여 전 병력을 이끌고 총공격에 나섰다. 이에 오스만군은 순식간에 전의를 잃고 무질서하게 패주하기 시작했다. 메흐메트 2세는 예니체리를 이끌고 전선에 나서 직접 헝가리의 기사와 일대일 결투를 벌여 죽이는 등 사기를 북돋으려 했으나, 오히려 화살을 맞고 혼수상태에 빠지게 된다. 결국 오스만군은 75,000명에 달하는 병력과 중화기를 전부 잃는 엄청난 참패를 당했고, 메흐메트 2세는 예니체리 부대의 몸을 던진 희생으로 겨우 탈출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이 전투의 충격으로 메흐메트 2세는 음독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한동안 폐인으로 지내게 되었다.
2.4. 죽음(1456)
베오그라드 공방전은 후녀디의 가장 빛나는 승리였지만, 허무하게도 곧바로 찾아온 전염병으로 인해 야노시는 가장 빛나는 순간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후계자였던 장남 후녀디 라즐로가 세력을 이어갔지만, 헝가리의 기성 귀족들과의 권력 다툼 속에 반역죄를 선고받아 1년만에 처형당했고, 함께 갇혀있던 차남 마차시가 반란으로 풀려난 뒤, 외숙부 미할리 쉴라지[7] 에게 옹립되어 마차시 1세(마티아스 코르비누스)로 즉위하게 된다.
이는 헝가리 역사상 왕족이 아닌 사람이 헝가리의 왕이 된 첫번째 사례였는데, 당연히 그 후녀디의 아들이라는 점이 작용했다.[8] 마차시 1세도 그 후녀디의 아들답게 명군으로 이름을 날렸다.
3. 기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1944년 창설된 헝가리인으로 구성된 제25SS무장척탄병사단은 바로 이 후녀디 야노시의 이름을 따서 명명(25th Waffen Grenadier Division of the SS Hunyadi (1st Hungarian))되었다.
4. 대중매체에서
징기스칸 4 파워업키트의 시나리오 4(1370년)에서 스칸데르베그와 함께 함께 발칸 반도의 재야 인재로 등장하며, 1400년대 초반부터 등용할 수 있다.
Europa Universalis IV에서 헝가리의 장군으로 등장하며 능력치는 4/4/4/1. 이벤트를 통해 플레이어 혹은 AI 의 선택에 따라서 섭정이 될 수 있으며 능력치는 4/5/5. 아들 마차시 후녀디는 이후 진행에 따라 이벤트를 통해 플레이어 혹은 AI 의 선택에 따라 왕위에 오를 수 있으며 능력치는 4/5/6, 장군으로서의 능력치는 3/4/3/1(이벤트로 즉위한 경우 적용되지 않음). 이들 부자의 활약을 반영하듯 매우 높은 능력치가 책정되어 있다.
후스 전쟁을 다룬 오니시 코이치의 만화 소녀전쟁에서는 요한 후냐디라는 이름으로 등장. 이린 시절이며 작화상으로도 미소년이다. 헝가리 국왕 지기스문트의 부하로 등장하며 주인공인 샤르카의 연인이자 남편으로 나온다. 샤르카와의 사이에서 클라라라는 이름의 딸을 낳았고, 그 딸은 소녀전쟁 본편 완결 후 연재된 외전 2편의 주인공이 된다.[9]
미연시인데 연애를 할 수 없는 건에 대하여에서 작품 초반부터 등장이 확정되어 있었던 인물 중 하나인데, 마침내 188화에서 처음 등장했다. 실제 별명인 '백색의 기사'라는 말 그대로 순백으로 빛나는 갑옷을 입고 등장하며, 왈라키아-오스만 연합의 군대로 인해 전멸한 군부대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분노하지만, 상황이 급박하기에 시체 수습은 하지 않고, 대신 갑옷을 비롯한 군장은 벗겨내어서 챙기라는 냉철한 모습도 보여준다. 또한, 세르비아를 비롯한 발칸 반도 서부의 국가들의 세력이 변변찮은 상태에서 그들에 대한 기대를 접고, 주인공이 통치하는 모레아를 대오스만 전략에 있어서 사실상의 유일한 희망으로 본다. 무라트에게 백색기사라 불리며 인정을 받았고, 헝가리에선 지기스문트 황제의 유언을 직접 들은 고명대신이 되었으며 이후 신성로마제국의 전권대사, 드래곤 기사단의 핵심 인물이 되어 조직한 흑군으로 3차 오스만전쟁의 승리에 일조하는 등 다양한 활약을 하며 주인공을 돕고있다.
용병대장과 성녀에서도 등장한다.
5. 관련 문서
[1] 후녀디 야노시 . 헝가리의 인명은 성이 앞에 온다. János는 세례자 요한의 헝가리어 표기이다. 영어계 인명인 John과 같은 뜻.[2] 현재 루마니아 후네도아라(Hunedoara)에 존재하는 코르빈 성(Castelul Corvinilor).[3] 왈라키아 공이던 블라드 2세는 이 원정을 막으려고 지도부를 설득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왈라키아로 물러났다. 이 원정에 참여한 것은 블라드 2세의 차남이었던 미르체아 2세였다.[4] 사실 기독교 군대가 거의 다 잡은 전투였다. 그런데 브와디스와프 3세가 욕심을 부려 자신이 갔다올 동안 기다리고 있으라는 후녀디의 충고를 무시한 채 술탄을 잡으려고 전면 돌파를 하다가 역포위되어 죽는 바람에…[5] 가시공은 1448년 왈라키아 공에 올랐다가 후녀디에 의해 폐위된 뒤, 몰다비아 공국으로 도망갔다가 후에 다시 헝가리로 돌아와 '''후녀디의 부하'''가 되어 있었다![6] 이를 보면 그냥 얼굴마담이 아닌가 싶겠지만 엄연히 독립된 지휘권을 가졌던 사람이다. 물론 농민군이 후녀디의 명령을 어겼다는 표현을 쓰는 등 실질적으로는 후녀디가 총괄했다는 증거는 많지만. 당시 그의 나이가 70이었는데, 후술할 농민군의 돌격에서 같이 돌격하는 등 노익장의 면모를 과시했다. 카피스트라노는 베오그라드 전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고, 성인으로 시성되었다.[7] 블라드 3세의 후처인 일로나의 숙부이기도 하다. 마차시 1세 즉위 수 년 뒤에 오스만군에게 사로잡혀 처형당하고, 그 후 마차시의 친정 시대가 시작된다.[8] 위에서도 언급됐지만, 당시의 왕이 메흐메트 2세가 쳐들어오자 바로 도망가버려서 민심을 많이 잃었다. 임진왜란 때 선조가 명나라로 망명시도했던 걸 생각해볼 수 있겠으나, 당시 조선은 군대가 붕괴하고 일본은 왕을 생포하려고 추격전을 벌이는 상황이었다. 베오그라드에서 공성전을 벌이는 상황에서 왕이 다른 나라로 도망가버렸으니 뭐… 당연히 돌아와서도 위신이 추락했는데, 이에 불안했는지 후녀디의 장자한테 아버지가 진 빚을 갚으라고 협박하기도 하고, 끝내 반역죄로 죽여버렸다. 결국 그 왕은 반란으로 처형되고 마치시 1세가 즉위.[9] 역사에서 후냐디의 사생아 딸은 블라드 가시공의 첫 부인이 되기에, 클라라가 가시공의 부인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이 있었지만, 그랬다가는 비참한 결말을 맞을 것 같기에 반영하지 않았다고 작가가 블로그에서 밝혔다. 가시공의 첫 부인은 오스만 전쟁 중 죽었다는 설이 있어서 그런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