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허호 사건

 


1. 개요
2. 상세
3. 처벌
4. 학살 책임자
5. 기타


1. 개요


Indian Ocean raid (인도양 영국 상선 습격사건)
サ号作戦
일본 해군 소속의 중순양함 토네호의 승조원들이 영국 상선 베허호를 습격, 격침시키고 배에 타고 있던 '''민간인들을 학살한 사건'''.

2. 상세


1944년 2월 말에, 남서방면 함대사령관 다카츠 시로 대장은 16전대에 인도양 방면의 연합군 선박을 습격할 것과, "정보를 캐내는데 도움이 될 일부를 제외하면 포로는 필요없다"는 명령을 내렸다. 이때 16전대 기함 아오바에 승선한 16전대 사령관 사콘조 나오마사는 이 명령에 이의를 딱히 제기하지 않았다. 원래는 아시가라가 동행해야겠지만, 아시가라는 2월 25일에 16전대를 떠나 일본으로 돌아갔으므로 작전에 참가하지 못했고, 2월 27일에 출항한 함대는 16전대 기함 아오바, 경순양함 키누와 오오이, 구축함 5척, 그리고 7전대 소속인 토네급 중순양함 토네와 치쿠마로 이루어져 있었다. 아시가라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7전대의 토네와 치쿠마를 대신 지원받은 건데, 이게 나중에 문제를 일으킨다.
여기서 토네는 3월 9일, 인도양에서 국적표시를 숨기고 영국 상선 베허(behar)에 접근, 나포를 시도했지만 정체가 탄로나자 베허호를 공격, 침몰시킨 후 민간인들을 포로로 잡는다. 일본어 위키에 따르면 토네의 항해장이 "(국적표시를 숨기는 건) 국제법 위반입니다"라고 진언하자, 마유즈미 하루오 함장이 "국제법 위반은 아니다"라며 설득했다고 한다. 어쨌든 베허호에서 잡힌 포로의 수는 100명이 넘었으며, 일본 위키에 따르면 115명이었다고 한다. 포로들은 토네의 승조원들에게 가혹한 학대를 당했으며, 16전대 사령관 사콘조는 베허호가 보낸 무전을 통해 연합군이 일본군의 존재를 알았으리라고 판단하고 작전을 취소한다. '''토네의 어설픈 습격이 일본군 최후의 인도양 통상파괴전을 수포로 돌아가게 한 셈이다.''' 그러나 무전을 받은 배가 너무 늦게 상부에 보고하는 바람에, 연합군의 추격은 없었다.
3월 15일에 인도네시아의 탄중 프리옥 항구에 입항한 후, 토네는 생존 포로중 일부를 아오바에 보낸다. 이것으로 임무는 끝나고 토네는 16전대의 관할에서 벗어났으며, 3월 18일 밤에 토네 승조원들은 남은 포로 80명의 목을 벴다. 포로 살해 현장에는 토네의 함장 마유즈미 하루오도 동석했다. 당연히 전쟁이더라도 국적표시를 숨긴 채 공격한 것과 포로, 그것도 민간인을 임의로 처형하는 것은 중범죄다.
그러나 15일에 16전대 기함 아오바에 넘겨진 포로들은 자바 각지의 포로수용소로 보내져 강제노동에 종사했고 죽은 사람은 없었으며, 전쟁이 끝난 후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갔다.

3. 처벌


"필요한 정보를 뽑아낼 수 있는 포로만 남기고 나머지는 죽여라."는 명령을 내린 자는 남서방면 함대사령관 다카츠 시로 대장이었지만 이 작자는 전쟁 중에 병으로 죽었고, 토네가 잠시나마 16전대와 같이 행동했다는 이유로 사콘죠가 책임을 뒤집어쓰고 전후 홍콩에서의 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으며, 토네 함장 마유즈미 하루오는 징역 7년(노동형)을 선고받았다. 원래는 마유즈미가 사형을 당해야 했지만, 홍콩 전범재판에서 영국군 심문관에게 "군기와 문장을 숨기고 포로 학살을 저지른건 사실이나, 작전 중에 포로를 잡거든 신속히 처리하라는 상부의 엄중한 지시가 있었다."라는 진술을 하는 바람에 사콘조 나오마사 중장의 신병이 인도되어 함께 홍콩에서 재판을 받고, 본인은 7년형, 사콘조 중장은 교수형이라는 엇갈린 운명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실제로 학살을 자행한 토네 승조원들은 제대로 된 처벌도 받지 않고 석방되었으며, 토네 함장 마유즈미 하루오는 고작 4년만 복역하고 석방된 후 잘 먹고 잘 살다가 1992년에 편안하게 죽었다.

4. 학살 책임자


학살 책임자로 지목되어 처형당한 사람은 16전대 사령관을 지낸 사콘조 나오마사인데, 이 사람이 과연 진짜 책임자인지는 논란이 있다.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다카츠 시로가 포로 학살을 명령할 때 사콘죠 나오마사가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으며 마유즈미에게 포로 학살을 명령했다고 되어 있지만, 토네와 16전대가 입항한 날짜가 3월 15일이고 포로 학살이 벌어진 게 3월 18일인데 이 시간은 이미 임무가 해제된 시간이다. 16전대의 지휘권에서 확실히 벗어난 시점이므로 사콘죠가 토네 함장에게 명령을 내릴 권한이 없다는 뜻이다.[1] 그러나 영문 위키피디아에서는 이에 대해 사콘죠 나오마사가 아직 토네가 16전대에 잠시 있었을 때, 학살 10일 전 토네에 포로들을 수용했을 때 토네에 장시간 수용 능력이 없다고 하며 토네측에 신속히 처분할 것을 이미 명령했었다고 서술한다. 일본 위키피디아에서는 사콘죠 나오마사 역시 재판에서 "작전 중에 포로 처분을 명령한 것은 사실이지만 작전 후에는 명령하지 않았다."고 진술했고 마유즈미 하루오는 "사콘죠 나오마사가 명령했었다."고 진술했다고 전한다.
당시 16전대 사령관이었던 사콘죠는 이에 대해 미군이 과달카날 전투에서 일본군 포로들을 죽이고 병원선을 격침시켜 사상자를 내자 일본군 수뇌부는 미군이 인(人)력을 상실시키고 있다며 보복할 것을 결심했다는 진술을 남겼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학살을 자행했던 당시 일본군 내 분위기를 진술한 것일 뿐, 사콘죠가 학살 책임자라고 단정할 수 있는 증거는 아니다.
어쨌든 학살을 실제로 저지른 게 토네와 그 승조원들임은 분명하지만, 학살 책임자가 누구인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다카츠 시로가 학살명령을 내린 책임자라고 해도 그 명령이 구두로 전해졌기에 관련 문서가 남지 않았다. 재판에서 나온 증언도 서로 엇갈린다. 그래서 민간인의 즉결 처형을 처음 명령한 사람이 남서방면 함대사령관 다카츠 시로인지, 16전대 사령관 사콘죠인지, 토네 함장의 결정인지는 불분명하다. 결국 증언의 신빙성을 검토해야겠지만, 이미 한참 지나간 재판이라서 관련자가 대부분 죽었고 관련 자료도 많지 않아서 사실상 불가능하다.
다만 사콘조가 사형을 면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토네와 치쿠마가 7전대 소속이고 통상파괴전을 위해 임시로 16전대에 합류하기는 했지만, 아무리 소속 전대가 달라도 엄연히 작전은 16전대의 지휘하에 했고 베허호의 포로들을 수용한 시점도 16전대에서 작전을 수행했을 때다. 비록 잠시 합류하고 이후 지휘권에서 완전히 벗어난 상황이라지만, 총 책임자인 다카츠 시로가 병사하고 관련 작전 포로들를 학살한 이상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하므로, 같이 작전했던 16전대 사령관이 용의자로 지목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긴 하다. 비록 작전 중에 처분된 포로는 없었고 작전 후에도 그런 명령을 다시 내리지 않았지만, 작전 중 토네의 포로들을 처분(학살)을 명령한 것은 본인도 사실이라고 진술했기 때문에 사형을 면하기는 더욱 힘들었을 것이다. '''부하의 잘못은 상관 책임'''이라는 군대의 특성을 감안하면 더 그렇다.
문제는 토네 함장 마유즈미 하루오가 받은 처벌이 고작 7년 노동형이고, 그나마도 4년만 복역하고 석방되었다는 점이다. 일본어 위키에는 마유즈미 하루오가 포로 학살을 말렸기에 형량이 낮게 나왔다는 기록이 소개되고 있지만, 정말로 마유즈미 하루오가 그렇게 했는지는 알 수 없다. 마유즈미 하루오가 성조기를 배에 게양해서 국제법을 어겼고, 부하들의 포로학대를 방조했으며, 학살현장에 참석하기까지 했음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가벼운 처벌이었다. '''국제법 위반과 포로학대와 학살을 저지른 범죄자를 4년만에 풀어준 셈이다.''' 더욱 고약하게도, '''실제로''' 포로학대와 학살을 저지른 토네 승조원들은 '''제대로 된 처벌도 받지 않았다.'''

5. 기타


토네급 중순양함 문서에도 나왔지만 민간인을 학살을 강행해 제정신이 아닌만큼 함선 운영을 얼마나 못했는지 업적도 부진하고 트롤러급으로 편대에도 방해를 줘 패전의 원흉이 되어 일본 해군내에서도 가장많은 비난을 받았다. 일본군함 역사중 최악의 함선으로 손에 꼽힐 정도로 만악의 근원으로 남겨졌다.
아라시(구축함)도 전쟁범죄를 일으킨만큼 아군편대한테도 피해를 끼쳐서 패전의 원흉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독일은 1943년 9월에 '통상파괴작전에서 배만 부수고 승무원들은 살려주니까 작전의 효과가 생각보다 안 나오네?'라고 생각하고 일본에 "연합군의 상선을 격침시켰을 경우, 승무원도 전멸시켰으면 한다"라고 의뢰한 바가 있다.[2] 일본어 위키가 출처이므로 가려들어야겠지만, 일본군 잠수함 이8이 1944년 3월 26일과 7월 2일에 두 번씩이나 연합군 화물선을 격침하고 민간인을 학살한 짓거리에는 그런 배경이 있다고 한다. 자세한 건 영문위키 이8일본어위키 이8을 참고하자.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책임을 독일에게 모조리 떠넘기는건 말도 안되는 소리인게 동맹국이라고 하더라도 그 요구를 반드시 수용해야할 의무가 있는건 아니다. 독일이 일본을 협박했다거나 천황이 독일의 지시를 받아 움직이는 부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일본의 책임이 사라질 수 없다. 물론 그와 별개로 독일도 일본과 다를바가 없다는 사실의 근거로는 적합하겠지만.[3] 물론 독일측에서 날아온 학살명령을 같은 인도양에서 통상파괴에 참여한 크릭스마리네 몬순 함대는 처음부터 지키지도 않았다.
게다가 2차 대전 당시에는 작전상 포로를 수용하기 어려운 상황이나 적군에게 강한 적개심을 품고서도 학살을 벌이지 않은 상황도 얼마든지 있었다. 진주만 공습과 바탄 죽음의 행진 등으로 일본에 대한 적개심이 하늘을 찔렀던 미군조차도 가능하면 포로를 확보하려 했었고[4] 무자비한 포로 학살을 거의 저지르지 않은 게 그 예다
사콘죠의 성격에 대해서는 근엄, 청결하고 전형적인 군인다운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를 근거로 학살 명령을 내릴 사람이 아니다라는 주장도 있었다.
토네 함장 마유즈미 하루오는 전후에도 일본 해군의 항공주병 전환은 잘못되었고 함포 중심의 함대결전사상으로 가야 했다고 주장했으며, 일본 해군의 원거리 포격 명중률은 미군의 3배라고 발언한 인물이기도 하다. 당연히 현실은 안 그랬지만, 마유즈미는 죽을 때까지 이 두 가지 주장을 끝까지 관철했다.
추가적인 정보는 영문위키 베허호 사건일본위키 베허호 사건을 참조. 관련 서적으로 해상학살이 있다.

[1] 일본어 위키에서도 16전대의 지휘를 벗어난 시점에서 학살을 자행한 건 군령 위반이라고 지적했다고 서술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삭제된 듯하다.[2] 타코츠보야제독의 결단에서도 해당 설을 차용하고 있다.[3] 포로에 대한 부당한 대우, 민간인 학살, 전쟁범죄등에서 나치 독일은 일본제국과 다를바가 없는 수준이기는 했다.[4] 오히려 미군의 포로 대우는 당시 연합군과 추축군을 통틀어서 가장 나은 편이었다. 사망률만 따지면 영국군에게 살짝 밀리기는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