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릭스마리네
'''Kriegsmarine'''
1935년부터 1945년까지의 독일 해군의 정식 명칭. 국어로 번역하면 전쟁(Krieg)해군(Marine)이라는 뜻이다. Krieg 뒤의 s는 합성명사에 붙이는 접미사.[1]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몰락한 독일 제국 황제해군(Kaiserliche Marine)을 계승한 전간기의 독일 국가해군(Reichsmarine)을 계승했다. 육군(Heer) 및 공군(Luftwaffe)과 함께 독일 국방군을 구성[2] [3] 했다.
[image]
[4][5]
국방군 최고사령부(Oberkommando der Wehrmacht;OKW) 예하의 해군 최고사령부(Oberkommando der Marine;OKM)가 최선임 기관이었고, 이곳의 총수는 전쟁해군 최고사령관(Oberbefehlshaber der Kriegsmarine)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Z 계획이 제대로 구현되기도 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개전하는 바람에 해군력이 약소했으므로, 함대 단위의 체계[6] 를 갖추지 못했다. 예하 부대 단위로 해역사령부(Marineoberkommando), 전단, 전대가 있었다.
해역사령부는 크릭스마리네의 최상급 전투 단위로, 담당하는 구역 역시 가장 넓었다. 사령관에는 상급대장이나 대장 계급의 제독이 맡았다.
주 해상작전은 전단 단위로 치뤄졌는데, 전단장((Flottenchef)이 여러 함정을 혼성 편제하여 그때그때 임무에 맞게 조직했다 해체하는 임시 조직인 경우가 많았다. 해군판 임무형 지휘체계라고 볼 수 있다.
일종의 행정 조직에 더 가까운, 함종별로 묶인 전투전대들이 해역 사령부 예하에 배속되었는데, 전함, 순양함, 구축함, 잠수함, 어뢰정, 초계정 등 함종별로 묶어 관리하다가 작전시 차출되어 전단을 구성하는 식이었다.
해군 항공대는 공군 제국원수 헤르만 괴링의 욕망 때문에 사실상 보유하지 못했다.[7] 주요 항공기와 승무원, 정비원 등을 루프트바페에서 파견받는 형식으로 운영했는데, 해군에서 전군한 이들 위주로 파견대를 조직했다. 가장 많이 파견된 항공기는 순양함 이상에 함재기로 실리는 수상정찰기인 Ar 196이었고, 지상 발진하여 유보트 등에게 호송선단의 위치 등을 알려주는 장거리 정찰기 Fw 200 등도 파견되었다. 항공모함 그라프 체펠린에 탑재될 Bf-109 전투기 등도 공군 파견대로 조직되었으나, 사실상 건조가 중단된 이후는 지상에서 통상적인 공군 전투기 부대의 임무를 수행했다.
해안포는 육군과 해군이 분할해 맡았는데, 독일 본토와 노르웨이, 프랑스 해안의 해안포 부대는 다수가 해군 산하였다.[8] 이들은 해안포 운용 뿐 아니라 해안 지역의 상륙에 대비한 지상전 및 경계 임무도 수행했으며, 해상 감시 레이더인 제타크트(Seetakt)도 운용했다. 고사포는 군단급 이상에만 배치해 그 이하는 공군 파견대에 의존한 육군과 달리, 주요 해군 기지는 자체 방공망을 갖추고 있어 공군에 대한 의존도가 낮았다.
적지 않은 숫자의 해군 육전대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일부 상륙작전에서는 함 승조원을 차출해 투입했으나 점차 상설 육전 병력의 규모가 커졌다. 크릭스마리네의 육전대는 2차대전 개전 당일인 1939년 9월 1일, 베스터플라테(Westerplatte) 전투 당시 구형 전함 SMS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차출 편성된 해안 상륙 부대(Marinestoßtruppkompanie)를 단치히에 함포 사격과 함께 상륙시켰다. 또한 나르비크 전투에서도 육군 산악사단과 함께 최일선에서 상륙작전을 수행[9] 한 이래 노르웨이 전역 내내 적지 않은 수가 지상전을 치렀으며,[10] 채널 제도 점령 때도 해군 육전대가 동원됐다. 1944년 9월엔 '동쪽 전나무 작전(Operation Tanne Ost)'이라는 이름으로 한 때 동맹국이었던 핀란드의 전략 요충지인 고틀랜드 섬 상륙 작전을 치렀으나 이는 실패했다. 1944년 6월 이후 공군 야전사단과 공수부대가 대폭 증강된 공군과 마찬가지로, 해군 역시 상실한 함정과 해군 기지 등의 잔류 인원과 지원 부대 축소 등을 통해 확보한 인력으로 해군사단(Marinedivision)을 편성해 육군의 지상전을 지원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전쟁이 갈수록 심화되어 1945년 1월에는 6개 사단 40개 연대 규모까지 커졌다. 상당수는 아예 육군으로 사단이 통째로 해군사단이란 이름만 남긴 채 전군되거나[11] 차출된 인원이 육군으로 전군되어 국민척탄병사단들에 배치되었다.
그 외에, 함정의 설계와 건조 등을 감독했던 조함단(Marineamt)이 OKM의 직할로 존재했다.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된 이후 독일군의 무장은 상당히 제한되었는데, 독일 해군은 오직 15,000명의 병력, 10,000톤 미만의 구식 전함 6척, 순양함 6척, 구축함 12척, 어뢰정 12척만 허용되었으며 잠수함과 항공모함은 소유 금지당했다. 이 정도의 전력을 가지고는 대양해군은 고사하고 지역해군 노릇조차 하기 힘든 전력이었다. 하지만 독일은 조약에서 제한하는 기준을 무시하고 12,000톤을 넘는 배수량을 가지는 새 군함을 진수해 냈는데 이것이 바로 도이칠란트급 장갑함이다.[13] 또한 1935년 독일의 재군비 선언에 따라 1935년 6월 18일 독일-영국 해군 조약을 통해 독일은 영국 해군의 수상함의 35%, 잠수함의 45%에 달하는 전력을 가질 수 있었으며 전함의 최대 배수량도 35000톤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독일 해군은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을 위반하고 타국에게는 조약을 준수했다고 거짓말을 해가면서 새 전함을 진수했는데 바로 비스마르크급 전함이었다. 그리고 1939년 4월, 유럽에 긴장감이 맴돌면서 독일은 일방적으로 이 조약을 파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상 적국인 프랑스와 영국, 특히 영국 해군과 비교해서 크나큰 열세였다. 알다시피 영국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육군이나 육전대가 대규모로 지속적인 공격을 펼치려면 재해권 장악이 필수적이었다.[14] 이에 따라 1939년 1월 독일은 새로운 해군 증강 계획을 세우는데 이것이 바로 Z 계획이다. Z 계획이 완료되면 독일은 항공모함 4척, 전함 10척, 순함전함 12척 등 대 함대를 보유할 예정이었으나...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 결국 Z 계획은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다.[15]
빈약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독일 해군은 베저위붕 작전에서 큰 역할을 했는데 독일군의 해상 수송이란 목표를 훌륭히 달성한 것이다.[16] 그러나 노르웨이 전역의 제해권 장악을 위해 벌어진 여러 차례의 해전 , 그 중 특히 제 2차 나르비크 해전에서 독일 해군의 악몽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HMS 워스파이트'''를 위시한 영국 왕립 해군은 독일 해군을 작살내버렸고 결국 노르웨이 전역에서 해군 전력의 반 이상이 격침당하거나 손실되었다. 이는 바다사자 작전 진행에 큰 차질을 가져왔으며, 영국 본토 항공전의 배경이 되었다. 이후 독일 해군은 통상파괴 작전에 전념할 수 밖에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1941년 5월, 독일 해군의 최강, 최대의 수상함인 비스마르크가 비스마르크 추격전 끝에 격침당해 독일 해군은 더더욱 전면전을 기피하게 된다.
개전 초기 죄다 털려버린 수상함대와는 달리, 유보트를 필두로 한 잠수함대는 영국, 소련[17] 등으로 가는 수송선들을 대거 격침시키면서 연합군, 특히 영국의 보급과 경제 사정에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수상함대는 1942년말 벌어진 바렌츠 해 해전에서 완전 망신을 당하고 전력의 다수를 상실했다. 이에 격분한 히틀러는 독일 해군의 대형함의 해체를 지시했고 이에 반발하여 에리히 레더 제독이 사임하였고, 후임인 카를 되니츠 제독의 설득 끝에 대형함 완전 해체 명령은 취소되었으나, 히틀러는 항공모함 그라프 체펠린의 건조 중지를 명했고, 수리를 기다리던 그나이제나우가 해체된다. 이때 살아남은 대형함인 샤른호르스트와 티르피츠는 연합군의 북극 항로 견제를 위해 노르웨이의 피요르드 해안에 배치 되었다가 샤른호르스트는 1943년 12월 26일 KGV 3번함 듀크 오브 요크에 의해 격침당했고, 티르피츠는 1944년 11월 12일 영국군의 공격 끝에 톨보이에 직격을 맞고 격침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943년 말부터 유보트에 의한 전술은 크게 효과를 보지 못하는데, 이는 미국의 참전, 호위 항공모함의 개발로 인하어 에어갭(Air Gap)[18] 이 닫힌 점, 기존의 폭뢰에 비해 명중률이 대폭 상승한 헤지호그 폭뢰의 개발 및 실전배치 등 다양한 요인이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독일군의 암호인 에니그마가 털려버린 것으로 이를 통해 연합군은 유보트의 모든 작전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이때부터 독일 해군은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며 결국 1944년 6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했을때도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상륙을 허용했으며 재해권 또한 빼앗겨 벼렸다.
1945년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상황이 더더욱 암담해졌다. 그때쯤 되면 독일 공군은 전멸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독일 해군 함정들은 가장 안전해야 할 장소였던 군항에서조차 무차별 공습을 당해야 했고, 결국 수많은 소형 함선들과 구축함, 유보트, 심지어는 아드미럴 히퍼급 중순양함 아드미럴 히퍼,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아드미럴 셰어나 쾨니히스베르크급 경순양함 쾰른 등 대형함들까지 항구에서 가라앉게 된다. 급기야 전쟁 말인 1945년 4월에는 항공모함 그라프 체펠린까지 자침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대형함인[19] 아트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3번함 프린츠 오이겐은 전후 미국에게 넘어가 1946년 7월 비키니섬 핵실험에 사용되었다.
유보트를 위시한 크릭스마리네였기에 유보트로 세운 전과가 상당히 많다. 당장 전함 부분에서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이 격침시킨 후드를 제외한 버럼[28] 과 로열 오크[29] 는 유보트로 인해 격침되었으며, 항공모함 역시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의 포격으로 침몰한 글로리어스를 제외하고서는 전부 유보트로 세운 전과다. 순양함 부분은 3척을 제외하고서는 역시 전부 유보트의 전과.
크릭스마리네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정규함대 다운 함대를 구성하지는 못했다. 히틀러의 집권 이후 재무장에 편승해서 항공모함을 포함한 전력확충을 꾸몄지만, 영국과의 전쟁이 너무 빠르게 시작된 탓에 제대로 된 해상작전을 펼칠 수 있는 전력은 잠수함대 뿐이었다. 하지만 에니그마와 늑대때 전술을 통해 잠수함과 한줌의 수상함대로 영국 해군에게 대항하였으나 영국 해군은 굳건히 버티면서 잠수함대에게 반격을 가했고 영국이 개전 초기의 충격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서고 에니그마가 해독(그나마 독일군 조직 중 해군이 암호전에서 가장 오래 버텼다.)되는 상황에서 미국의 참전으로 미국이 본격적으로 영국을 지원하기 시작하면서[35] 잠수함대마저 힘을 잃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국이 주로 물자를 이동시킨 선단은 HX와 SC인데 유보트가 한창 악명을 떨쳤던 1942년에도 HX 선단과 SC 선단의 소티 대비 손실률은 2.5% 수준이고 전쟁 전 기간을 합치면 1.7% 수준에 불과하다.[36] 따라서 유보트가 영국을 말려죽이기 직전까지 갔다는 말은 다소 과장이 있는 셈이다. 오히려 유보트 자체에 의한 피해보다는 수송선단의 조직으로 인한 피해가 더 컸는데 수송선단의 조직으로 인해서 상선의 효율이 2/3수준으로 떨어졌기 때문. 덕분에 영국은 단독으로 유보트를 따돌릴 수 있는 상선(속력이 빠르다거나)들은 다소 위험을 감수하고 단독으로 항해하는 방법으로 이러한 손실을 최소화 하려고 했다.[37]
수상함대의 경우에는 독일보다 기술이 우수한 일본의 도움으로 항공모함 아카기를 참고하여 만든 그라프 체펠린 급이 있었지만, 헤르만 괴링을 위시한 루프트바페와의 알력으로 인해 기껏 진수된 항공모함은 목재 창고로만 쓰이다가 종전 후 이를 전리품으로 삼은 소련 해군의 사격표적이 돼서 파괴되었다.[38] 하지만 실체는 문제덩어리였던 비스마르크급 전함 1번함 비스마르크를 이용한 라인강 연습작전 등 영국 해군의 주력함 1척을 수상전에서 격침시킨 전적이 있으며 비스마르크급 2번함 티르피츠 등은 북해에 머무르면서 영국과 미국의 신경을 계속 살살 긁어놓게 만들어서 북해를 통해 독일 본토에 직접 상륙을 가할까 라고 고민하던 영, 미 연합군에게 다른 방향을 고르게 하는 위엄을 선보이기도 하였다.(물론 이건 라인강 연습작전등 수상함대가 엄청난 실책들을 저질러서 히틀러의 미움을 사서 순양함 이상의 대형함들이 해체될 뻔한 것을 되니츠 제독이 필사적으로 사정해서 얻어낸 성과다. 직접적인 전적은 없지만 독일 본토와 노르웨이에 직접 상륙군이 처들어오는 것을 막아낸 것은 나름의 성과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의문인 점은 전함 개발건은 이탈리아의 도움을 받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점이다. 물론 전략 병기 취급 받던 전함이니 만큼 공유나 도움이 쉽지는 않았을테지만, 추축국내의 유럽권 국가중, 제일 가까웠던 동맹이였던데다, 과거 승전국이자 전함 설계를 포스트 유틀란트로 구성할만큼 구식 설계에 매달리지 않았다는점. 소련 마저도 돈을 주고서라도 이탈리아의 전함 설계를 맞겼던거를 보았을때, 독일로써는 구식 구조 설계위에 전함들을 건조하기보단 나았을거라고 생각된다. 문제는 이건 가정인데다, 두 국가간의 해군 기술 교류는 어떠했는지는 알수 없으므로 크릭스마리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아쉬울 점이라고 생각된다.
무차별 폭격을 실시하였던 루프트바페, 많은 학살을 저질렀던 헤어 등에 비해서 독일 국방군 중 여전히 가장 평이 좋은 군대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세계대전 중 해상에서의 전투는 종결 후 상호간에 적함 승조원도 구조하는 등 인도적인 모습을 보인 편이었고 이는 각종 국제 조약들 및 관습법과 함께 뱃사람 특유의 국적을 뛰어넘는 유대감이 현장의 해군 장병들에도 작용한 탓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해군이 육공군에 비해 전쟁 범죄를 저지를 여지를 크게 줄이기도 했다.[39][40] 크릭스마리네는 비교적 우위하에 전쟁을 치뤘던 육군 및 공군에 비해 열세에서 시작했었고 이후에도 연합군 해군보다 우세한 전력을 가졌던 적이 없으며, 이런 가운데 연합국에게 나름대로 피해를 안겨주며 패전 때까지 유보트 등을 앞세워 끈질기게 항전했던 이미지 덕에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이와 더불어, 독일 해군으로부터 잠수함 관련 노하우를 전달받으며 친분을 쌓은 점과, 크릭스마리네에 우호적인 평가를 하는 미 해군의 영향으로 크릭스마리네에 대해 긍정적인 분위기를 형성한 한국 해군 잠수함 승조원들 위주로 정보가 민간에 전달된 점으로 인해, 우호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당시 태평양 중부해역군 사령관 해군원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검사단의 질의에 대해 되니츠 제독의 전시 행동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고 응답했는데, 이러한 자세가 미 해군에서 한국의 잠수함 요원들에게로, 다시 전사(戰史)에 관심이 있는 한국인들에게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1. 개요
1935년부터 1945년까지의 독일 해군의 정식 명칭. 국어로 번역하면 전쟁(Krieg)해군(Marine)이라는 뜻이다. Krieg 뒤의 s는 합성명사에 붙이는 접미사.[1]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몰락한 독일 제국 황제해군(Kaiserliche Marine)을 계승한 전간기의 독일 국가해군(Reichsmarine)을 계승했다. 육군(Heer) 및 공군(Luftwaffe)과 함께 독일 국방군을 구성[2] [3] 했다.
2. 구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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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
국방군 최고사령부(Oberkommando der Wehrmacht;OKW) 예하의 해군 최고사령부(Oberkommando der Marine;OKM)가 최선임 기관이었고, 이곳의 총수는 전쟁해군 최고사령관(Oberbefehlshaber der Kriegsmarine)이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한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Z 계획이 제대로 구현되기도 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개전하는 바람에 해군력이 약소했으므로, 함대 단위의 체계[6] 를 갖추지 못했다. 예하 부대 단위로 해역사령부(Marineoberkommando), 전단, 전대가 있었다.
해역사령부는 크릭스마리네의 최상급 전투 단위로, 담당하는 구역 역시 가장 넓었다. 사령관에는 상급대장이나 대장 계급의 제독이 맡았다.
주 해상작전은 전단 단위로 치뤄졌는데, 전단장((Flottenchef)이 여러 함정을 혼성 편제하여 그때그때 임무에 맞게 조직했다 해체하는 임시 조직인 경우가 많았다. 해군판 임무형 지휘체계라고 볼 수 있다.
일종의 행정 조직에 더 가까운, 함종별로 묶인 전투전대들이 해역 사령부 예하에 배속되었는데, 전함, 순양함, 구축함, 잠수함, 어뢰정, 초계정 등 함종별로 묶어 관리하다가 작전시 차출되어 전단을 구성하는 식이었다.
해군 항공대는 공군 제국원수 헤르만 괴링의 욕망 때문에 사실상 보유하지 못했다.[7] 주요 항공기와 승무원, 정비원 등을 루프트바페에서 파견받는 형식으로 운영했는데, 해군에서 전군한 이들 위주로 파견대를 조직했다. 가장 많이 파견된 항공기는 순양함 이상에 함재기로 실리는 수상정찰기인 Ar 196이었고, 지상 발진하여 유보트 등에게 호송선단의 위치 등을 알려주는 장거리 정찰기 Fw 200 등도 파견되었다. 항공모함 그라프 체펠린에 탑재될 Bf-109 전투기 등도 공군 파견대로 조직되었으나, 사실상 건조가 중단된 이후는 지상에서 통상적인 공군 전투기 부대의 임무를 수행했다.
해안포는 육군과 해군이 분할해 맡았는데, 독일 본토와 노르웨이, 프랑스 해안의 해안포 부대는 다수가 해군 산하였다.[8] 이들은 해안포 운용 뿐 아니라 해안 지역의 상륙에 대비한 지상전 및 경계 임무도 수행했으며, 해상 감시 레이더인 제타크트(Seetakt)도 운용했다. 고사포는 군단급 이상에만 배치해 그 이하는 공군 파견대에 의존한 육군과 달리, 주요 해군 기지는 자체 방공망을 갖추고 있어 공군에 대한 의존도가 낮았다.
적지 않은 숫자의 해군 육전대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일부 상륙작전에서는 함 승조원을 차출해 투입했으나 점차 상설 육전 병력의 규모가 커졌다. 크릭스마리네의 육전대는 2차대전 개전 당일인 1939년 9월 1일, 베스터플라테(Westerplatte) 전투 당시 구형 전함 SMS 슐레스비히홀슈타인에서 차출 편성된 해안 상륙 부대(Marinestoßtruppkompanie)를 단치히에 함포 사격과 함께 상륙시켰다. 또한 나르비크 전투에서도 육군 산악사단과 함께 최일선에서 상륙작전을 수행[9] 한 이래 노르웨이 전역 내내 적지 않은 수가 지상전을 치렀으며,[10] 채널 제도 점령 때도 해군 육전대가 동원됐다. 1944년 9월엔 '동쪽 전나무 작전(Operation Tanne Ost)'이라는 이름으로 한 때 동맹국이었던 핀란드의 전략 요충지인 고틀랜드 섬 상륙 작전을 치렀으나 이는 실패했다. 1944년 6월 이후 공군 야전사단과 공수부대가 대폭 증강된 공군과 마찬가지로, 해군 역시 상실한 함정과 해군 기지 등의 잔류 인원과 지원 부대 축소 등을 통해 확보한 인력으로 해군사단(Marinedivision)을 편성해 육군의 지상전을 지원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전쟁이 갈수록 심화되어 1945년 1월에는 6개 사단 40개 연대 규모까지 커졌다. 상당수는 아예 육군으로 사단이 통째로 해군사단이란 이름만 남긴 채 전군되거나[11] 차출된 인원이 육군으로 전군되어 국민척탄병사단들에 배치되었다.
그 외에, 함정의 설계와 건조 등을 감독했던 조함단(Marineamt)이 OKM의 직할로 존재했다.
3. 역대 최고사령관
4. 역사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된 이후 독일군의 무장은 상당히 제한되었는데, 독일 해군은 오직 15,000명의 병력, 10,000톤 미만의 구식 전함 6척, 순양함 6척, 구축함 12척, 어뢰정 12척만 허용되었으며 잠수함과 항공모함은 소유 금지당했다. 이 정도의 전력을 가지고는 대양해군은 고사하고 지역해군 노릇조차 하기 힘든 전력이었다. 하지만 독일은 조약에서 제한하는 기준을 무시하고 12,000톤을 넘는 배수량을 가지는 새 군함을 진수해 냈는데 이것이 바로 도이칠란트급 장갑함이다.[13] 또한 1935년 독일의 재군비 선언에 따라 1935년 6월 18일 독일-영국 해군 조약을 통해 독일은 영국 해군의 수상함의 35%, 잠수함의 45%에 달하는 전력을 가질 수 있었으며 전함의 최대 배수량도 35000톤으로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독일 해군은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을 위반하고 타국에게는 조약을 준수했다고 거짓말을 해가면서 새 전함을 진수했는데 바로 비스마르크급 전함이었다. 그리고 1939년 4월, 유럽에 긴장감이 맴돌면서 독일은 일방적으로 이 조약을 파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상 적국인 프랑스와 영국, 특히 영국 해군과 비교해서 크나큰 열세였다. 알다시피 영국은 섬나라이기 때문에 육군이나 육전대가 대규모로 지속적인 공격을 펼치려면 재해권 장악이 필수적이었다.[14] 이에 따라 1939년 1월 독일은 새로운 해군 증강 계획을 세우는데 이것이 바로 Z 계획이다. Z 계획이 완료되면 독일은 항공모함 4척, 전함 10척, 순함전함 12척 등 대 함대를 보유할 예정이었으나...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인해 영국과 프랑스가 독일에 선전포고, 결국 Z 계획은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다.[15]
빈약한 전력에도 불구하고 독일 해군은 베저위붕 작전에서 큰 역할을 했는데 독일군의 해상 수송이란 목표를 훌륭히 달성한 것이다.[16] 그러나 노르웨이 전역의 제해권 장악을 위해 벌어진 여러 차례의 해전 , 그 중 특히 제 2차 나르비크 해전에서 독일 해군의 악몽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HMS 워스파이트'''를 위시한 영국 왕립 해군은 독일 해군을 작살내버렸고 결국 노르웨이 전역에서 해군 전력의 반 이상이 격침당하거나 손실되었다. 이는 바다사자 작전 진행에 큰 차질을 가져왔으며, 영국 본토 항공전의 배경이 되었다. 이후 독일 해군은 통상파괴 작전에 전념할 수 밖에 없었고, 설상가상으로 1941년 5월, 독일 해군의 최강, 최대의 수상함인 비스마르크가 비스마르크 추격전 끝에 격침당해 독일 해군은 더더욱 전면전을 기피하게 된다.
개전 초기 죄다 털려버린 수상함대와는 달리, 유보트를 필두로 한 잠수함대는 영국, 소련[17] 등으로 가는 수송선들을 대거 격침시키면서 연합군, 특히 영국의 보급과 경제 사정에 큰 타격을 입혔다. 그러나 수상함대는 1942년말 벌어진 바렌츠 해 해전에서 완전 망신을 당하고 전력의 다수를 상실했다. 이에 격분한 히틀러는 독일 해군의 대형함의 해체를 지시했고 이에 반발하여 에리히 레더 제독이 사임하였고, 후임인 카를 되니츠 제독의 설득 끝에 대형함 완전 해체 명령은 취소되었으나, 히틀러는 항공모함 그라프 체펠린의 건조 중지를 명했고, 수리를 기다리던 그나이제나우가 해체된다. 이때 살아남은 대형함인 샤른호르스트와 티르피츠는 연합군의 북극 항로 견제를 위해 노르웨이의 피요르드 해안에 배치 되었다가 샤른호르스트는 1943년 12월 26일 KGV 3번함 듀크 오브 요크에 의해 격침당했고, 티르피츠는 1944년 11월 12일 영국군의 공격 끝에 톨보이에 직격을 맞고 격침되었다. 설상가상으로 1943년 말부터 유보트에 의한 전술은 크게 효과를 보지 못하는데, 이는 미국의 참전, 호위 항공모함의 개발로 인하어 에어갭(Air Gap)[18] 이 닫힌 점, 기존의 폭뢰에 비해 명중률이 대폭 상승한 헤지호그 폭뢰의 개발 및 실전배치 등 다양한 요인이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독일군의 암호인 에니그마가 털려버린 것으로 이를 통해 연합군은 유보트의 모든 작전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이때부터 독일 해군은 사실상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며 결국 1944년 6월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했을때도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하고 상륙을 허용했으며 재해권 또한 빼앗겨 벼렸다.
1945년에 들어오면서부터는 상황이 더더욱 암담해졌다. 그때쯤 되면 독일 공군은 전멸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독일 해군 함정들은 가장 안전해야 할 장소였던 군항에서조차 무차별 공습을 당해야 했고, 결국 수많은 소형 함선들과 구축함, 유보트, 심지어는 아드미럴 히퍼급 중순양함 아드미럴 히퍼,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아드미럴 셰어나 쾨니히스베르크급 경순양함 쾰른 등 대형함들까지 항구에서 가라앉게 된다. 급기야 전쟁 말인 1945년 4월에는 항공모함 그라프 체펠린까지 자침했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대형함인[19] 아트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3번함 프린츠 오이겐은 전후 미국에게 넘어가 1946년 7월 비키니섬 핵실험에 사용되었다.
5. 전력
5.1. 함정
- 수상함 전력, 특히 그중에서도 중순양함, 전함, 항모를 위시로 한 대형함 전력은 워낙 안습하였기에 전쟁 내내 제대로 된 활약을 하지 못했다.[20] 기껏해야 후드 격침 정도? 여기에는 대형함 부족이 컸다. 전쟁 내내 크릭스마리네가 실전투입시켰던 중-대형함은 총 21척이었고,[21] 이는 이웃나라 영국 해군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였다.[22] 이는 결국 크릭스마리네의 수상함들이 전쟁 내내 통상파괴전만 수행하거나 육상 포격지원만 하도록 하는 원인을 제공했다.[23] 이들은 적은 전력으로 열심히 숨어 다니면서 싸웠으나, 결국 상술한 21척 중 5척[24] 을 제외하고서는 대전 중 모조리 착저하거나 격침당했다.
- 구축함을 위시한 소형함 전력은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싸웠으나 상부의 여러가지 삽질과 여러 격전지에 불려다닌 끝에 결국 대전 후반에는 수상함 전력과 비슷하게 거의 전멸하게 된다. 애초에 대전 초반부터 노르웨이 침공으로 무려 구축함을 10척이나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참고로 그 와중에 살아남은 구축함들도 타국의 것에 비해서는 영 질이 좋지 못한 것들뿐이었는데 예를 들어서 당시 독일이 보유한 구축함 중 대부분은 함포가 나쁘거나, 항속거리가 짧거나,[25] 배수량이 지나치게 거대한 것 등 최소 한 가지씩은 문제가 있었다. 그나마 이건 추가적으로 신형 구축함을 건조하면 해결되는 문제지만, 유보트 찍어내기도 바쁜 독일에게 그걸 여유는 전혀 없었다. 또한 남아있는 구축함들도 공습 등으로 차근차근 소모되어 버렸다. 그나마 엘빙급 어뢰정들과 소해정들이 부족한 구축함의 역할을 일정부분 분담해줬다.
- 유보트를 위시한 잠수함 전력은 1차 세계대전의 노하우까지 겹쳐서 그래도 수상함대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또한 울프백 전술 같은 새로운 전법으로 매우 적은 수에도 불구하고[26] 전쟁 초반에는 대활약하여 영국을 거의 말려죽이기 전까지 갔으나 이후 천조국 미국이 참전하고 정신 차린 영국군 역시 햇지호그 폭뢰와 앨런 튜링을 앞세운 암호해독반을 투입하여 유보트들을 토벌하였고, 결국 1944년 후반에 이르러서 독일의 유보트 전력은 거의 전멸했다. 하지만 독일은 끝까지 굴북하지 않고 수중항해기술을 증대시킨 21형 유보트나 23형 유보트들을 만들어내었고, 이들은 평균적으로 2차 세계대전 최고의 잠수함으로 취급받는다. 또한 이때 노하우를 얻은 독일이 현대까지도 계속해서 우수한 품질의 잠수함을 건조하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명맥이 끊긴 수상함대보다는 사정이 훨씬 나은 편이다.
- 수상함들 중에도 슈넬보트(어뢰정)들은 매우 큰 활약을 했는데, 연합군에게 적정(enemy boat)이라는 뜻의 E-Boat로 불린 이들은 유보트만큼은 아니어도, 도버 해협이나 독일 연안 등에서는 연합군의 골칫거리였다.[27] 이들 어뢰정 전단은 전쟁기간 내내 101척의 상선, 12척의 구축함, 11척의 소해함, 6척의 어뢰정, 1척의 기뢰부설함과 1척의 잠수함을 격침시키는 대전과를 올렸다.
6. 전공
- 전함 3척 격침. (후드, 버럼, 로열 오크)
- 항공모함 5척 격침. (커레이저스, 글로리어스, 아크 로열, 이글, 블록 아일랜드, 오더시티, 어벤져)
- 순양함 9척 격침.
- 구축함 62척 격침.
유보트를 위시한 크릭스마리네였기에 유보트로 세운 전과가 상당히 많다. 당장 전함 부분에서 비스마르크와 프린츠 오이겐이 격침시킨 후드를 제외한 버럼[28] 과 로열 오크[29] 는 유보트로 인해 격침되었으며, 항공모함 역시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의 포격으로 침몰한 글로리어스를 제외하고서는 전부 유보트로 세운 전과다. 순양함 부분은 3척을 제외하고서는 역시 전부 유보트의 전과.
7. 해군 기지
7.1. 수상함 기지
7.2. 유보트 기지
8. 주요 인물
8.1. 고위 지휘관 및 행정가
- 에리히 레더(1876.4.24 ~ 1960.11.6)
- 카를 되니츠(1891.9.16 ~ 1980.12.24)
- 한스 게오르크 폰 프리데부르크(Hans-Georg von Friedeburg)(1895.7.15 ~ 1945.5.23)
- 발터 빌헬름 율리우스 바르체하Walter Wilhelm Julius Warzecha(1891.5.23 ~ 1956.8.3)
- 알프레트 잘베히터(Alfred Saalwächter)(1883.1.10 ~ 1945.12.6)
- 빌헬름 마르샬(Wilhelm Marschall)(1886.9.30 ~ 1976.3.20)
- 헤르만 뵘(Hermann Boehm)(1884.1.18 ~ 1972.4.11)
- 빌헬름 카나리스(1887.1.1 ~ 1945.4.9)
- 프리드리히 루게(Friedrich Ruge)(1894.12.24 ~ 1985.7.3)
- 발터 헤네케(Walter Hennecke)(1898.5.23 ~ 1984.1.1)
- 테오도어 크랑케(Theodor Krancke)(1893.3.30 ~ 1973.6.18)
- 카를예스코 폰푸트카머(Karl-Jesko von Puttkamer)(1900.3.24 ~ 1980.3.4)
- 카를 토프(Karl Topp)(1895.9.29 ~ 1981.4.24)
8.2. 함대 사령관
- 귄터 뤼첸스(Günther Lütjens)(1889.5.25 ~ 1941.5.27)
- 롤프 카를스(Rolf Carls)(1885.5.29 ~ 1945.4.24)
- 루돌프 페터젠(Rudolf Petersen)(1905.5.15 ~ 1983.1.2)
- 에리히 바이(Erich Bey)(1898.3.23 ~ 1943.12.26)
- 오스카 쿠메츠(Oskar Kummetz)(1891.7.21 ~ 1980.12.17)
- 오토 슈니빈트(Otto Schniewind)(1887.12.14 ~ 1964.3.26)
- 오토 칠리악스(Otto Ciliax)(1891.10.30. ~ 1964.12.12)
- 프리드리히 본테(Friedrich Bonte)(1896.10.19 ~ 1940.4.10)
- 헬무트 브링크만(Helmuth Brinkmann)(1895.3.12 ~ 1983.9.26)
8.3. 수상함 함장
- 한스 랑스도르프(Hans Langsdorff)(1894.3.20 ~ 1939.12.20)[30]
- 에른스트 린데만(Ernst Lindemann)(1894.3.28 ~ 1941.5.27)[31]
- 프리츠 힌체(Fritz Hintze)(1901.1.13 ~ 1943.12.26)
8.4. U-보트 지휘관
- 알브레히트 브란디(Albrecht Brandi)(1914.6.20 ~ 1966.1.6)
- 볼프강 뤼트(Wolfgang Lüth)(1913.10.15 ~ 1945.5.14) - 종전 이후 시름을 잊기 위해서인지 술을 마시고 부대에 귀환하다가 경계병의 정지 및 불이행시 발포를 못들어서 총에 맞아 죽었다. 날이 밝은 이후, 경계병은 자기 일을 했을 뿐 모든 책임은 경계병의 수하를 무시한 뤼트 대령 개인에게 있다는 결론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 귄터 프린(Günther Prien)(1908.1.16 ~ 1941.3.7) - 2차대전 초기에 스캐퍼플로 영국 해군기지에 잠입해 리벤지급 전함 로열 오크를 격침시킨 사람이다. 전함이 그냥 전함이 아닌지라 경계도 삼엄하고 공격하기도 어려운 스캐퍼플로에 있었지만 그걸 해냈다. 배짱이 장난이 아니었던 인물이다. 1941 작전 도중 휘하 승조원들과 승선했던 잠수함과 함께 실종되었다.
- 오토 크레치머(Otto Kretschmer)(1912.5.1 ~ 1998.8.5) - U-99의 함장이었다. 전쟁 당시 "배 하나에 어뢰 한 개" 라는 표어를 걸고 싸웠으며, 상당한 격침수를 기록하였고 U-99는 독일 잠수함 중 격침수 2위에 오른다. 이후 잠수함이 공격당하며 포로로 잡혔고, 독일로 귀환한 다음 다시 서독 해군에 입대했다.
- 헤르베르트 볼파르트(Herbert Wohlfarth)(1915.6.5 ~ 1982.8.13)
- 에리히 토프(Erich Topp)(1914.7.2 ~ 2005.12.26)
- 하인츠빌헬름 에크(Heinz-Wilhelm Eck)(1916.3.27 ~ 1945.11.30) 이 사람은 상당히 불명예스러운 쪽에서 유명하다. 그 이유는 에크는 1944년 U-852을 지휘하며 남아프리카 근해에서 인도양으로 향하던 도중 홀로 항해하던 그리스 국적 증기선 SS Peleus 호를 격침시켰는데, 문제는 이 인간이 격침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에게 기관총 사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이후 Peleus 호의 생존자들과 증언이 발표되고 그가 지휘했던 유보트의 항해일지[32] 등이 공개되자 학살에 대한 진실이 밝혀지자, 에크는 국제법 위반 혐의로 처형되었다.[33] 다만 일부 역사학자들은 그의 사형이 공정하지 못했고 철저히 승자의 관점에서만 이루어진 일이라고 꼬집기도 했다. 전 각주에서 서술했듯이 이런 식의 범죄는 연합군 추축군 안가리고 일어났는데 연합군쪽은 다 쉬쉬하고 넘어갔고 에크 혼자만 대표로 사형당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 한스 디트리히 폰티젠하우젠 남작(Hans Diedrich Freiherr von Tiesenhausen)(1913.2.22 ~ 2000.8.17) 1941년 11월 25일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 HMS 버럼을 지중해에서 격침시킨 것으로 유명하다.[34] 이후 잠수함이 공격당해 심각한 부상을 입고 죽을 뻔하기도 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캐나다로 망명해 목수와 자연사진작가 일을 하며 남은 여생을 보냈다.
- 귄터 헤슬러(Günther Hessler)(1909.6.14 ~ 1968.4.4)
- 하랄트 겔하우스(Harald Gelhaus)(1915.7.24 ~ 1997.12.2)
- 엥겔베르트 엔트라스(Engelbert Endrass)(1911.3.2 ~ 1941.12.21)
- 콘스탄틴 폰푸트카머(Konstantin von Puttkamer)(1917.7.31 ~ 1943.2.23)
- 게오르크 폰빌라모비츠묄렌도르프(Georg von Wilamowitz-Möllendorf)(1893.11.7 ~ 1943.7.24)
- 프리드리히 구겐베르거(Friedrich Guggenberger)(1915.3.6. ~ 1988.5.13.)
- 에른스트 바우어(Ernst Bauer)(1914.2.3. ~ 1988.3.12.)
- 페터 크레머(Peter Erich Cremer)(1911. 3. 25 - 1992. 7. 5) - 국내에도 번역되어 유명한 잠수함 함장 수기 U-333의 저자이다.
8.5. 그 외
- 베르트홀트 솅크 폰슈타우펜베르크 백작(Berthold Schenk Graf von Stauffenberg)(1905.3.15 ~ 1944.8.10) - 해군 법무관(군무원),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의 주역 클라우스 폰슈타우펜베르크 육군 대령의 사촌이자 사건의 주요 공모자이다.
- 볼프강 히르슈펠트(Wolfgang Hirschfeld)(1916.5.20 ~ 2005.4.24) - U보트 비밀일기의 저자. 최종계급은 해군 무선상사.
- 취소선이 그어저있기는 하지만 오스카가 승선했던 비스마르크함과 영국 해군의 군함 4척은 우연히도 모두 전쟁중 격침당했다.
9. 평가
크릭스마리네는 제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정규함대 다운 함대를 구성하지는 못했다. 히틀러의 집권 이후 재무장에 편승해서 항공모함을 포함한 전력확충을 꾸몄지만, 영국과의 전쟁이 너무 빠르게 시작된 탓에 제대로 된 해상작전을 펼칠 수 있는 전력은 잠수함대 뿐이었다. 하지만 에니그마와 늑대때 전술을 통해 잠수함과 한줌의 수상함대로 영국 해군에게 대항하였으나 영국 해군은 굳건히 버티면서 잠수함대에게 반격을 가했고 영국이 개전 초기의 충격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반격에 나서고 에니그마가 해독(그나마 독일군 조직 중 해군이 암호전에서 가장 오래 버텼다.)되는 상황에서 미국의 참전으로 미국이 본격적으로 영국을 지원하기 시작하면서[35] 잠수함대마저 힘을 잃기 시작했다. 그리고 영국이 주로 물자를 이동시킨 선단은 HX와 SC인데 유보트가 한창 악명을 떨쳤던 1942년에도 HX 선단과 SC 선단의 소티 대비 손실률은 2.5% 수준이고 전쟁 전 기간을 합치면 1.7% 수준에 불과하다.[36] 따라서 유보트가 영국을 말려죽이기 직전까지 갔다는 말은 다소 과장이 있는 셈이다. 오히려 유보트 자체에 의한 피해보다는 수송선단의 조직으로 인한 피해가 더 컸는데 수송선단의 조직으로 인해서 상선의 효율이 2/3수준으로 떨어졌기 때문. 덕분에 영국은 단독으로 유보트를 따돌릴 수 있는 상선(속력이 빠르다거나)들은 다소 위험을 감수하고 단독으로 항해하는 방법으로 이러한 손실을 최소화 하려고 했다.[37]
수상함대의 경우에는 독일보다 기술이 우수한 일본의 도움으로 항공모함 아카기를 참고하여 만든 그라프 체펠린 급이 있었지만, 헤르만 괴링을 위시한 루프트바페와의 알력으로 인해 기껏 진수된 항공모함은 목재 창고로만 쓰이다가 종전 후 이를 전리품으로 삼은 소련 해군의 사격표적이 돼서 파괴되었다.[38] 하지만 실체는 문제덩어리였던 비스마르크급 전함 1번함 비스마르크를 이용한 라인강 연습작전 등 영국 해군의 주력함 1척을 수상전에서 격침시킨 전적이 있으며 비스마르크급 2번함 티르피츠 등은 북해에 머무르면서 영국과 미국의 신경을 계속 살살 긁어놓게 만들어서 북해를 통해 독일 본토에 직접 상륙을 가할까 라고 고민하던 영, 미 연합군에게 다른 방향을 고르게 하는 위엄을 선보이기도 하였다.(물론 이건 라인강 연습작전등 수상함대가 엄청난 실책들을 저질러서 히틀러의 미움을 사서 순양함 이상의 대형함들이 해체될 뻔한 것을 되니츠 제독이 필사적으로 사정해서 얻어낸 성과다. 직접적인 전적은 없지만 독일 본토와 노르웨이에 직접 상륙군이 처들어오는 것을 막아낸 것은 나름의 성과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의문인 점은 전함 개발건은 이탈리아의 도움을 받아도 되지 않을까라는 점이다. 물론 전략 병기 취급 받던 전함이니 만큼 공유나 도움이 쉽지는 않았을테지만, 추축국내의 유럽권 국가중, 제일 가까웠던 동맹이였던데다, 과거 승전국이자 전함 설계를 포스트 유틀란트로 구성할만큼 구식 설계에 매달리지 않았다는점. 소련 마저도 돈을 주고서라도 이탈리아의 전함 설계를 맞겼던거를 보았을때, 독일로써는 구식 구조 설계위에 전함들을 건조하기보단 나았을거라고 생각된다. 문제는 이건 가정인데다, 두 국가간의 해군 기술 교류는 어떠했는지는 알수 없으므로 크릭스마리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아쉬울 점이라고 생각된다.
무차별 폭격을 실시하였던 루프트바페, 많은 학살을 저질렀던 헤어 등에 비해서 독일 국방군 중 여전히 가장 평이 좋은 군대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세계대전 중 해상에서의 전투는 종결 후 상호간에 적함 승조원도 구조하는 등 인도적인 모습을 보인 편이었고 이는 각종 국제 조약들 및 관습법과 함께 뱃사람 특유의 국적을 뛰어넘는 유대감이 현장의 해군 장병들에도 작용한 탓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해군이 육공군에 비해 전쟁 범죄를 저지를 여지를 크게 줄이기도 했다.[39][40] 크릭스마리네는 비교적 우위하에 전쟁을 치뤘던 육군 및 공군에 비해 열세에서 시작했었고 이후에도 연합군 해군보다 우세한 전력을 가졌던 적이 없으며, 이런 가운데 연합국에게 나름대로 피해를 안겨주며 패전 때까지 유보트 등을 앞세워 끈질기게 항전했던 이미지 덕에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이와 더불어, 독일 해군으로부터 잠수함 관련 노하우를 전달받으며 친분을 쌓은 점과, 크릭스마리네에 우호적인 평가를 하는 미 해군의 영향으로 크릭스마리네에 대해 긍정적인 분위기를 형성한 한국 해군 잠수함 승조원들 위주로 정보가 민간에 전달된 점으로 인해, 우호적인 평가가 지배적이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당시 태평양 중부해역군 사령관 해군원수 체스터 니미츠 제독은 검사단의 질의에 대해 되니츠 제독의 전시 행동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고 응답했는데, 이러한 자세가 미 해군에서 한국의 잠수함 요원들에게로, 다시 전사(戰史)에 관심이 있는 한국인들에게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10. 관련 문서
[1] 사실 이 명칭의 원조는 과거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군이다. 정확히 말하면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 해군의 공식 명칭은 'Kaiserliche und Königliche Kriegsmarine'로 '제왕 전쟁해군'이다. 간단히 줄여서 K.u.K Kreigsmarine로 표기.[2] 많은 이들이 잘못 알고 있는 것과 달리, 국방군은 육군만이 아니라 육해공군을 아우르는 개념이다. 이를 혼동하여, 많은 이들이 "독일군은 국방군(육군), 해군, 공군, SS로 구성되었다."같은 식의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쉽게말해 '''독일 국방군=대한민국 국군,미합중국 국군'''이며 육해공군은 각각 대한민국 육해공군,미합중국 육해공군을 생각하면된다.[3] SS는 행정적으로 국방군 예하는 아니었으나, OKW에서 무장 SS 부대에 지휘권을 행사할 수는 있었다.[4] 사진에서 앞의 3척은 도아칠란트급으로 추정되는데, 자세히 보면 선두함과 세 번째 함의 함교 모양이 다르다. 도이칠란트급의 1번함 도이칠란트는 이전 경순양함들처럼 얇은 원통형 마스트를 사용했기 때문에, 외형이 약간 다르다. 따라서 앞의 2척은 도이칠란트의 자매함 아드미럴 셰어와 그라프 슈페로 보인다. 또한 이 사진은 그라프 슈페가 격침당하기 이전인 1939년 이전에 촬영된 것으로 추정된다.[5] 도이칠란트급 뒤에 따라오는 함선들은 라이프치히급 경순양함이나 쾨니히스베르크급 경순양함으로 추정된다.[6] 유일하게 함대 명칭을 썼던 곳은 발트 함대 뿐이었다. 여기는 그나마 독일의 앞바다였던 관계로 함대 명칭을 썼다.[7] 정찰기, 뇌격기, 소해전용 항공기, 수상기 등을 모은 5개의 연안비행대(Küstenfliegergruppen)를 보유하긴 했으나, 군수지원을 공군에서 받아야 했는데 협조가 원활하지 않았다.[8]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진행된 해안은 육군의 해안포 부대가 관할했었다.[9] 이후 나르비크 항내의 해전으로 상실한 구축함의 생존 승조원들도 합류했다.[10] 노르웨이 전역 등으로 해군은 육군 산악부대와 꽤 깊은 인연(?)을 이어갔다. 노르웨이에서 나르비크 전투 이후 대거 육전부대로 투입된 해군 장병들은 육군 산악사단으로부터 그 전투력을 인정받아, 이들로부터 암묵적으로 자신들의 상징인 에델바이스 배지를 모자에 다는 것을 허용받기도 했다. 독일 육군 산악병과가 현 대한민국 육군의 특공여단에 해당하는 전투력 및 역할을 가졌던 걸 생각하면 꽤 대단한 일이다. 이후에도 산악사단은 그 높은 전투력으로 인해 상륙전시 선봉으로 많이 투입됐는데, 이 때 해군과 함께 구르면서(?) 관계가 긴밀해진 편이기도 하다.[11] 제1/2 해군사단의 경우 초기에 해군소장이던 사단장이 후기엔 육군대령이 보직되었다.[12] 임기 중 음독 자살했다.[13] 도이칠란트급 장갑순양함은 11인치 3연장 포탑 2기를 장착함으로 배수량 대비 강력한 공격력을 보유했으나, 대응방어는 꿈도 못 꾼다는 단점이 있었다.[14] 실제로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은 프랑스를 점령하고도 해군력이 빈약해 바다사자 작전을 펼칠 수 없어 독일 해군은 손빨고 구경이나 하였고 대신 독일 공군이 영국 본토 항공전을 수행하였다.[15] 때문에 많은 독일의 전함들이 페이퍼 플랜으로 끝나버리고 말았다. 대표적인 예로는 H급 전함이 있다.[16] 하지만 노르웨이 수비군의 항전으로 아드미럴 히퍼급 중순양함 블뤼허가 격침 당하는 등 손실도 있었다.[17] 수송선들은 렌드리스를 위해 북극해를 통해 소련으로 건너갔다.[18] 육상에서 이륙한 항공기들의 항속거리 부족 문제로 인하여 수송선들이 항공엄호를 받을 수 없는 지역을 뜻한다.[19] 라이프치히급 경순양함 라이프치히와 뉘른베르크,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뤼초도 공습에서 살아남았지만 이들은 대체로 중형 함선으로 분류되니 예외로 한다.[20] 오죽했으면 히틀러가 대형함 폐기 명령을 내렸을까.. 다반 여기에는 바렌츠 해에서의 졸전도 컸다.[21] 엠덴급 1척 + 도이칠란트급 전함 3척 +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3척 + 쾨니히스베르크급 3척 + 라이프치히급 2척 + 아트미랄 히퍼급 3척 + 샤른호르스트급 2척 + 비스마르크급 2척. 총합 1+5+3+3+2+3+2+2= 21. 게다가 도이칠란트급 전함 3척은 노후화가 너무나 심해서 사실상 중요 전력에서 제외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22] 영국은 순수 전함들만 따져도 넬슨급 2척+ 퀸 엘리자베스급 5척 + 킹 조지 5세급 5척= 도합 12척이나 되었다. 참고로 독일이 보유한 전함은 비스마르크급 2척 + 샤른호르스트급 2척= 도합 4척... (그중에서도 샤른호르스트와 그나이제나우는 순양전함에 가까웠다.) 게다가 이는 리나운급, 리벤지급, 어드미럴급 등 영국의 순양전함들은 다 빼고 계산한 건데도 전력차가 이 정도다.[23] 일례로, 현재 나무위키에 작성된 크릭스마리네들의 대형함 문서에 “활약상” 부분에는 대부분 “기뢰 부설”, “함포 사격 지원” “피난민 수송” “통상파괴작전”이라는 단어만 꽉 차있다.[24] 하노버, 슐레지엔, 라이프치히, 뉘른베르크, 프린츠 오이겐[25] 독일이 비스마르크의 마지막 항해에 호위구축함 한 척 못 붙여준 이유이다.[26] 일단 전쟁 전, 히틀러가 직접 나서서 잠수함대 전력 증강을 약속하기는 했지만, 약속한 전력 증강을 하기도 전에 히틀러가 전쟁을 시작해 버렸고, 보유하고 있던 잠수함들도 노르웨이 침공 등에서 꽤 많이 잃어버린다.[27] 심지어 일부 깡 좋은 어뢰정들은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연습하던 영국 본토 해안을 습격해 미 해군 LST를 격침시키고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낸 뒤 피해 없이 도망치기도 했다![28] U-331[29] U-47[30] 도이칠란트급 장갑함 아트미랄 그라프 슈페의 함장, 슈페를 자침시키고 자살했다.[31] 비스마르크급 전함 비스마르크의 함장, 위에서 이미 설명한 뤼첸스 제독과 함께 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서 전사. 여담으로 수병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그에 반면, 뤼첸스 제독은 썩 인상이 별로였다고.[32] 에크는 이걸 미리 소각시키려고 시도했으나 실패했다.[33] 참고로 이것 말고도 2차 세계대전 도중 잠수함 선원들이 격침된 배의 생존자들을 공격한 사건은 몇번 있었다. 대표적으로 연합군 잠수함이었던 HMS Torbey 나 USS Wahoo, 같은 독일군 소속 잠수함이었던 U-247 등이 있다. 유독 에크만와 잘 알려진 이유는 연합군 쪽은 대체로 (승전국인 것도 있고 나치가 워낙 악마였기 때문에) 쉬쉬하는 분위기로 넘어간 것도 한몫 했지만, 무엇보다도 USS Wahoo는 1943년, U-247은 1944년에 격침되어 전쟁이 끝난 시점에선 이미 승조원 전원이 사망했기 때문에 더 이상 책임주체를 물을 수 없어서이기도 하다.[34] 참고로 버럼이 기울다가 폭발하면서 가라앉는 장면은 아직도 카메라에 기록된 가장 거대한 폭발 중 하나로 남아있다.[35] 전쟁기간 동안 유보트에 의해서 손실을 입은 상선이 1,500만톤이고 영국이 자체적으로 건조한 상선이 600만톤, 영연방에서 찍어낸게 600만톤이고 그외 국가들에서 얻어온게 300만톤이다. 저건 미국이 건조한 상선은 제외한 수치인데도 현상유지였고 여기게 미국이 혼자서 2,500만톤을 건조하면서 격침되는 수보다 더 많은 상선이 쏟아져 나온다.[36] 그리고 유보트가 격침시킨 선박의 절반은 빈배이므로 실질적인 물자 손실은 저 수치보다도 적을 것이며 정말 중요한 물자는 빠른 수송선에 실어서 매우 엄중한 호위를 받으며 건넜기네 피해를 본 사례가 극히 드물다.[37] 단독으로 항해하는 경우, 최소한 유보트 한 척에게 상선 여러 척으로 이루어진 수송선단 한 개가 삭제당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는다.[38] 물론 건조되었어도 연안 하나제대로 못 지키는 크릭스마리네의 안습함 상 제대로 된 활약은 못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39] 전후 크릭스마리네에서 전쟁 범죄로 총살된 이는 단 세 명이었다. 국제법을 무시하고 격침시킨 민간 상선의 표류중인 선원들을 살상한 IXD형 U-852의 함장 하인츠 빌헬름 에크(Heinz-Wilhelm Eck) 항해소령과 부장 아우구스트 호프만(August Hoffmann) 항해대위, 그리고 군의관 발터 바이스페니히(Walter Weisspfennig) 의무중위가 그들이다. 이 외에 서부 해역 사령관 겸 비스마르크 지원 작전의 총지휘관을 지낸 해군상급대장 알프레트 잘베히터(Alfred Saalwächter) 제독 또한 모스크바에 끌려가 처형되었으나 잘베히터 제독의 경우 무리한 처벌이었음이 인정되어 소련 해체 이후인 1994년에 혐의를 벗을 수 있었다.[40] 굳이 따진다면 '잠수함은 무장을 하지 않은 상선에 대한 공격을 수행할 때, 필히 상선에게 경고를 하고 임검을 실시해야 하며 모든 화물과 승객의 안전한 하역이 완료된 상태에서 선박에 대한 나포, 혹은 침몰처분을 시킬 것.' 이라는 조항을 어기기는 했는데 이걸 다 지키면 잠수함이 어떻게 배는 가라앉히고 민간인을 인근항구로 돌려보내주냐는 문제가 있어 현실적으로 지키는게 불가능한지라 전쟁이 시작되면서 국가를 불문하고 사문화되었다. 유일하게 전쟁 초기 영국은 진짜로 지켜가면서 하려고 했는데 경고를 받은 상선이 도망가면서 자국군을 부르고 그 동안 잠수함은 무방비 상태가 되는 등 문제가 있어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걸 깨닫고 결국 때려치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