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관식
卞寬植, 1899~1976
소정 변관식은 1899년 황해도 옹진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는 아픔을 겪었다. 이로 인해 어린 그를 기른 것은 외조부 소림 조석진이었다. 조석진은 조선 왕조의 마지막 화백으로서 서화미술원을 심전 안중식과 함께 열어 후진 양성에 주력하시기도 한 사람이었다. 그 덕에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 작품들을 접하면서 자랐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그의 첫번째 예술 활동은 조선총독부 공업전습소 도기과에 들어가면서 시작되었다. 졸업 후 그는 1917년 외조부가 설립한 서화미술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웠다. 그리고 1921년 서화협회전에 작품을 출품하면서 화단에 등단한다.
그 이후 그는 1922년 동연사라는 모임을 조직했다. 이 모임의 멤버로는 이용우, 노수현, 이상범 그리고 변관식으로 그 당시 막 화단에 등단한, 신인 동양화가들 중 두각을 보이던 사람들이었다. 이 모임을 통해 그와 그의 동지들은 전통 회화의 새 방향을 모색하는데 힘을 쏟았다. 하지만 이 모임은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기 전 해산되고 말았다. 이후 화백은 1925년 김은호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그림을 배우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고무로 스이운이라는 일본화가를 만나게 된다. 또한 도쿄미술학교에서 청강생으로서 4년간 학습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당대 일본에서 유행하던 동양화 사조인 신남화풍을 접하게 된다. 그러면 신남화풍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 신남화는 새로운 남화라는 뜻이다. 이 남화라는 것은 일본 전통 문인화 양식을 가리키는 말로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적이지 못한 것으로 치부되면서 근대성을 세우려 하던 일본 화단의 무시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1910년대 서양화가들이 남화를 후기 인상파적 관점에서 재발견하였고, 이를 통해 기존 남화의 표현 양식을 사용하되, 서양 인상파의 접근법을 활용하여 그림을 그렸고 이것이 신남화라고 불리는 사조이다.
1929년 그는 귀국한다. 1922년부터 귀국하기 전 해까지 총독부에서 주관하는 선전에 꾸준히 그림을 냈지만 귀국 이후 이를 포기한다. 그 이후 서화협회의 간사를 역임하면서 작품 활동을 펼치다가 1937년 돌연 서울을 떠나 전국 유랑의 길에 오른다. 그리고 이 시기, 평생의 작품 소재가 되는 금강산에 방문하게 된다. 그는 금강산에서의 사생을 통하여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더욱 단련시켜 나갔다. 이후 1942년부터 몇 번의 개인전을 가지고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전쟁을 맞이하지만 처가인 진주시로 피난을 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후 휴전과 함께 열리게 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속칭 국전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된다. 그러나 국전은 빠르게 분열상을 보이게 되었다. 문교부가 독단적으로 예술원 회원들에게 국전심사위원 추천권을 준 것이 문제가 되어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술가들을 관리 통제하려던 문화인 등록령을 통한 국가의 폐쇄적 예술원 운영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이러한 모습을 본 낙선자들은 낙선작품전들을 여는 것을 통해 이에 항의하였다. 여기에 이어 대한 미술협회의 위원장 자리를 놓고 갈등이 일어나 한국미술협회가 떨어져 나오면서 이러한 갈등은 더욱 가열되었다. 이 모습을 본 그는 이러한 혼돈상을 이기지 못하고 국전의 비리상을 폭로하고 나오면서 1957년 미술계를 등지고 재야 화가로서의 길로 나간다.
미술계를 등진 이후에도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갔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원각사 벽화다. 1959년 새롭게 지어진 원각사를 꾸밀 벽화를 의뢰받았다. 금강산의 진주담을 그린 그 그림은 높이는 12척에 넓이는 5척으로 높이 3.6m, 폭 1.5m의 대작이었다. 낮은 물론이거니와 밤에도 자다 깨 그림을 그리는 등 한 달 동안 이에 어김없는 애정과 열정을 쏟으면서 그림을 그리고 이를 자신의 최고 작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 작품은 원각사 화재로 소실되어버렸고 당시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당시 이 벽화가 어땠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작품이 남아있다. 바로 1960년에 그려진 내금강 진주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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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담은 폭포에서 떨어져 튀는 물방울이 마치 진주와 같다 하여 이름 붙여진 명소로 많은 화가들의 그림 소재가 되었던 명소이다. 이 그림을 통해 우리는 화백의 그림 세계를 제대로 엿볼 수 있다. 우선 절벽을 따라 화면의 우하단에 물줄기가 네 개 시원하게 내려꽂힌다. 솔잎 하나도 놓치지 않는 모습은 사경산수화로서의 진수를 보여준다. 또한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시, 위로 올려다보는 앙시 등 시점을 자유롭게 변경시키면서 풍경 속으로 들어간 그의 그림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시각적 변화는 우리에게 강렬한 긴장감을 선사해 준다.
이후 1969년 고희전을 갖는 등 활발한 전시, 창작 활동을 펼치다가 1976년 작고했다.
작고한지 43년 후인 2019년에 외손자인 조영식 화백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이 2019년 고성-속초 산불의 피해를 입어 소실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였다.관련기사 산불 한달 뒤에 취재한 기사
1. 초기생애
소정 변관식은 1899년 황해도 옹진에서 출생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님을 여의는 아픔을 겪었다. 이로 인해 어린 그를 기른 것은 외조부 소림 조석진이었다. 조석진은 조선 왕조의 마지막 화백으로서 서화미술원을 심전 안중식과 함께 열어 후진 양성에 주력하시기도 한 사람이었다. 그 덕에 그는 어린 시절부터 예술 작품들을 접하면서 자랐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그의 첫번째 예술 활동은 조선총독부 공업전습소 도기과에 들어가면서 시작되었다. 졸업 후 그는 1917년 외조부가 설립한 서화미술원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웠다. 그리고 1921년 서화협회전에 작품을 출품하면서 화단에 등단한다.
2. 일제 시기
그 이후 그는 1922년 동연사라는 모임을 조직했다. 이 모임의 멤버로는 이용우, 노수현, 이상범 그리고 변관식으로 그 당시 막 화단에 등단한, 신인 동양화가들 중 두각을 보이던 사람들이었다. 이 모임을 통해 그와 그의 동지들은 전통 회화의 새 방향을 모색하는데 힘을 쏟았다. 하지만 이 모임은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기 전 해산되고 말았다. 이후 화백은 1925년 김은호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그림을 배우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고무로 스이운이라는 일본화가를 만나게 된다. 또한 도쿄미술학교에서 청강생으로서 4년간 학습하게 된다. 그곳에서 그는 당대 일본에서 유행하던 동양화 사조인 신남화풍을 접하게 된다. 그러면 신남화풍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 신남화는 새로운 남화라는 뜻이다. 이 남화라는 것은 일본 전통 문인화 양식을 가리키는 말로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적이지 못한 것으로 치부되면서 근대성을 세우려 하던 일본 화단의 무시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1910년대 서양화가들이 남화를 후기 인상파적 관점에서 재발견하였고, 이를 통해 기존 남화의 표현 양식을 사용하되, 서양 인상파의 접근법을 활용하여 그림을 그렸고 이것이 신남화라고 불리는 사조이다.
1929년 그는 귀국한다. 1922년부터 귀국하기 전 해까지 총독부에서 주관하는 선전에 꾸준히 그림을 냈지만 귀국 이후 이를 포기한다. 그 이후 서화협회의 간사를 역임하면서 작품 활동을 펼치다가 1937년 돌연 서울을 떠나 전국 유랑의 길에 오른다. 그리고 이 시기, 평생의 작품 소재가 되는 금강산에 방문하게 된다. 그는 금강산에서의 사생을 통하여 자신만의 그림 세계를 더욱 단련시켜 나갔다. 이후 1942년부터 몇 번의 개인전을 가지고 광복을 맞이하게 되었다.
3. 해방 이후
이후 전쟁을 맞이하지만 처가인 진주시로 피난을 가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후 휴전과 함께 열리게 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속칭 국전의 심사위원으로 위촉된다. 그러나 국전은 빠르게 분열상을 보이게 되었다. 문교부가 독단적으로 예술원 회원들에게 국전심사위원 추천권을 준 것이 문제가 되어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모습은 예술가들을 관리 통제하려던 문화인 등록령을 통한 국가의 폐쇄적 예술원 운영에서 유래한 것이었다. 이러한 모습을 본 낙선자들은 낙선작품전들을 여는 것을 통해 이에 항의하였다. 여기에 이어 대한 미술협회의 위원장 자리를 놓고 갈등이 일어나 한국미술협회가 떨어져 나오면서 이러한 갈등은 더욱 가열되었다. 이 모습을 본 그는 이러한 혼돈상을 이기지 못하고 국전의 비리상을 폭로하고 나오면서 1957년 미술계를 등지고 재야 화가로서의 길로 나간다.
미술계를 등진 이후에도 열정적인 작품 활동을 이어 나갔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 바로 원각사 벽화다. 1959년 새롭게 지어진 원각사를 꾸밀 벽화를 의뢰받았다. 금강산의 진주담을 그린 그 그림은 높이는 12척에 넓이는 5척으로 높이 3.6m, 폭 1.5m의 대작이었다. 낮은 물론이거니와 밤에도 자다 깨 그림을 그리는 등 한 달 동안 이에 어김없는 애정과 열정을 쏟으면서 그림을 그리고 이를 자신의 최고 작으로 여겼다. 그러나 이 작품은 원각사 화재로 소실되어버렸고 당시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그 당시 이 벽화가 어땠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작품이 남아있다. 바로 1960년에 그려진 내금강 진주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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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담은 폭포에서 떨어져 튀는 물방울이 마치 진주와 같다 하여 이름 붙여진 명소로 많은 화가들의 그림 소재가 되었던 명소이다. 이 그림을 통해 우리는 화백의 그림 세계를 제대로 엿볼 수 있다. 우선 절벽을 따라 화면의 우하단에 물줄기가 네 개 시원하게 내려꽂힌다. 솔잎 하나도 놓치지 않는 모습은 사경산수화로서의 진수를 보여준다. 또한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시, 위로 올려다보는 앙시 등 시점을 자유롭게 변경시키면서 풍경 속으로 들어간 그의 그림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시각적 변화는 우리에게 강렬한 긴장감을 선사해 준다.
이후 1969년 고희전을 갖는 등 활발한 전시, 창작 활동을 펼치다가 1976년 작고했다.
작고한지 43년 후인 2019년에 외손자인 조영식 화백이 소장하고 있던 작품이 2019년 고성-속초 산불의 피해를 입어 소실되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하였다.관련기사 산불 한달 뒤에 취재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