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중량
卞仲良
(1345년 ~ 13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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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말선초의 문신.
호는 춘당이며, 태조 이성계의 이복형인 이원계의 사위이자 정몽주의 제자이며, 생에 시와 문장에 능하여서 <춘당유고>란 문집을 남겼다. 조선 초기의 대신 변계량의 형이기도 하다. 그런데 두 형제의 나이차가 '''24살'''이나 난다.(...)(변계량은 1369년 출생.) 친형제인 것으로 볼때 변계량이 늦둥이인 듯.
1392년 이방원이 이제 등과 함께 스승인 정몽주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미리 눈치채고 이성계에게 문병가는 것을 말렸으나 정몽주는 정세를 살피기 위하여 이성계의 집에 다녀오다가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되었다.
이후 조선이 건국되자, 조선에 입조해서 정도전의 당으로 활동한 것은 확실하다.
1차 왕자의 난 이후에도 전 신료들이 모두 이방원 밑으로 들어가 목숨을 보전하였는데, 갑옷을 입지 않고 이성계를 지켜내었다고 한다.[1] 결국 이방원에 의해 살해당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크게 폄하되어 밀양 변씨 후손들이 소송을 건 적도 있다. 다만 이 부분은 1권, 2권의 주요 참고 문헌 조유식의 <정도전을 위한 변명>을 참고한 흔적으로, 이 책에서도 변중량을 '기회주의적', '카멜레온'으로 표현하고 있다. # 어쨌든 이 일로 박시백 작가는 직접 사과하고 해당 내용을 수정했다는 내용을 10권 후기에 실었다. 정작 <정도전을 위한 변명>은 '''박시백의 추천사가 들어간''' 2014년판에서도 해당 내용이 수정되지 않았다.
몇백년 전 조상에 대한 창작까지 억압하는 법 조항 때문에 창작물이 늘 후손들의 소송에 휩싸이는 풍토는 분명 문제가 있지만, 변중량의 경우는 후손들의 항의에도 일리가 있다. 왕자의 난 당시 실록의 기사는 곡필의 흔적이 역력해서 믿을 수 없는 부분이 많은데다[2] 변중량의 행보가 기회주의적이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사료를 잘 보면 변중량은 이기는 쪽보다 지는 쪽을 택하거나 주류에 거스르는 의견을 주장하다 손해를 본 일이 많아서, 오히려 정치적 이해 득실에 몹시 둔감했거나 아예 신경쓰지 않는 독자적 행보를 보여 온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자기 나름대로의 주관에 근거해서 행동하고 대세를 따르지 않거나 일정한 정치 파벌에 소속하지 않고 활동하다가 변을 당한 것.
정몽주와 이성계가 맞붙었을 때는 스승에게 의리를 지켜서 암살 위험을 충고했고, 이후 개국파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주류였던 조준과 정도전의 주장을 비판했다가 옥에 갇히는가 하면, 또 왕자의 난 당시에는 정도전과 같이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할 것을 주장하고 이성계를 보호하려다 죽는 등의 행동을 보였다. '''대체 어떤 기회주의자가 항상 지는 편과 손해보는 주장을 골라서 택한단 말인가?''' 기회주의자라는 설명은 단순히 실록의 기사에서 변중량이 목숨을 구걸하는 폄하적 내용을 교차 검증이나 사료 비판 없이 단편적으로 해석한 것이거나, 그가 스승인 정몽주가 죽고 나서 개국파 편에 선 것만을 확대 해석하는 것.[3]
즉, (변중량의 최후에 대한 기사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실록의 기록들을 검토했을 때 떠오르는 변중량의 인물상은 기회주의자가 아닌, 외로운 비주류에 가깝다.
변중량의 후손인 한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여러 문헌을 살펴보았을 때 지금의 청량리 중랑교는 원래 '중량교'이고, 변중량의 동생 변계량이 그 자리의 나루터를 변중량의 이름에서 따 '중량포(중량 나루터)'라고 개인적으로 이름붙인 것이 그 지명의 유래로 보인다고 한다. 중량포라는 지명이 변계량의 개인 문집에서는 보이지만 변계량이 편찬에 참여한 관찬 지리서에서는 쓰이지 않았는데, 그보다 후대에는 조정과 민간에서도 중량포라는 이름이 쓰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것을 변계량이 개인적으로 사용하던 지명이 이후 민간에서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본다고. 이후로는 중량포를 표기하는 한자가 가끔씩 바뀌다가 일제 강점기에 와전되어 '중랑교'로 바뀌었다고 한다.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딱 한 장면 등장하는데, 왕자의 난 당일에 입궐하다가 살해당하는 것으로 끝. 입궐할때 궁문을 지키던 장수가 "우부승지 변중량 입시요"라고 외치는 덕분에 변중량이라는걸 알수 있다. 물론 해당 장면의 묘사는 이방원측에게 살해당했다는것만 빼고 실제 역사와는 전혀 맞지 않는 장면이다.
(1345년 ~ 1398년)
[image]
1. 개요
여말선초의 문신.
2. 생애
호는 춘당이며, 태조 이성계의 이복형인 이원계의 사위이자 정몽주의 제자이며, 생에 시와 문장에 능하여서 <춘당유고>란 문집을 남겼다. 조선 초기의 대신 변계량의 형이기도 하다. 그런데 두 형제의 나이차가 '''24살'''이나 난다.(...)(변계량은 1369년 출생.) 친형제인 것으로 볼때 변계량이 늦둥이인 듯.
1392년 이방원이 이제 등과 함께 스승인 정몽주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미리 눈치채고 이성계에게 문병가는 것을 말렸으나 정몽주는 정세를 살피기 위하여 이성계의 집에 다녀오다가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게 암살되었다.
이후 조선이 건국되자, 조선에 입조해서 정도전의 당으로 활동한 것은 확실하다.
1차 왕자의 난 이후에도 전 신료들이 모두 이방원 밑으로 들어가 목숨을 보전하였는데, 갑옷을 입지 않고 이성계를 지켜내었다고 한다.[1] 결국 이방원에 의해 살해당했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크게 폄하되어 밀양 변씨 후손들이 소송을 건 적도 있다. 다만 이 부분은 1권, 2권의 주요 참고 문헌 조유식의 <정도전을 위한 변명>을 참고한 흔적으로, 이 책에서도 변중량을 '기회주의적', '카멜레온'으로 표현하고 있다. # 어쨌든 이 일로 박시백 작가는 직접 사과하고 해당 내용을 수정했다는 내용을 10권 후기에 실었다. 정작 <정도전을 위한 변명>은 '''박시백의 추천사가 들어간''' 2014년판에서도 해당 내용이 수정되지 않았다.
3. 기회주의자인가?
몇백년 전 조상에 대한 창작까지 억압하는 법 조항 때문에 창작물이 늘 후손들의 소송에 휩싸이는 풍토는 분명 문제가 있지만, 변중량의 경우는 후손들의 항의에도 일리가 있다. 왕자의 난 당시 실록의 기사는 곡필의 흔적이 역력해서 믿을 수 없는 부분이 많은데다[2] 변중량의 행보가 기회주의적이라고 보기에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사료를 잘 보면 변중량은 이기는 쪽보다 지는 쪽을 택하거나 주류에 거스르는 의견을 주장하다 손해를 본 일이 많아서, 오히려 정치적 이해 득실에 몹시 둔감했거나 아예 신경쓰지 않는 독자적 행보를 보여 온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자기 나름대로의 주관에 근거해서 행동하고 대세를 따르지 않거나 일정한 정치 파벌에 소속하지 않고 활동하다가 변을 당한 것.
정몽주와 이성계가 맞붙었을 때는 스승에게 의리를 지켜서 암살 위험을 충고했고, 이후 개국파에 참여하기는 했지만 주류였던 조준과 정도전의 주장을 비판했다가 옥에 갇히는가 하면, 또 왕자의 난 당시에는 정도전과 같이 왕자들의 사병을 혁파할 것을 주장하고 이성계를 보호하려다 죽는 등의 행동을 보였다. '''대체 어떤 기회주의자가 항상 지는 편과 손해보는 주장을 골라서 택한단 말인가?''' 기회주의자라는 설명은 단순히 실록의 기사에서 변중량이 목숨을 구걸하는 폄하적 내용을 교차 검증이나 사료 비판 없이 단편적으로 해석한 것이거나, 그가 스승인 정몽주가 죽고 나서 개국파 편에 선 것만을 확대 해석하는 것.[3]
즉, (변중량의 최후에 대한 기사를 신뢰하지 않는다면) 실록의 기록들을 검토했을 때 떠오르는 변중량의 인물상은 기회주의자가 아닌, 외로운 비주류에 가깝다.
4. 기타
변중량의 후손인 한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여러 문헌을 살펴보았을 때 지금의 청량리 중랑교는 원래 '중량교'이고, 변중량의 동생 변계량이 그 자리의 나루터를 변중량의 이름에서 따 '중량포(중량 나루터)'라고 개인적으로 이름붙인 것이 그 지명의 유래로 보인다고 한다. 중량포라는 지명이 변계량의 개인 문집에서는 보이지만 변계량이 편찬에 참여한 관찬 지리서에서는 쓰이지 않았는데, 그보다 후대에는 조정과 민간에서도 중량포라는 이름이 쓰이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것을 변계량이 개인적으로 사용하던 지명이 이후 민간에서도 널리 쓰이게 되었다고 본다고. 이후로는 중량포를 표기하는 한자가 가끔씩 바뀌다가 일제 강점기에 와전되어 '중랑교'로 바뀌었다고 한다.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딱 한 장면 등장하는데, 왕자의 난 당일에 입궐하다가 살해당하는 것으로 끝. 입궐할때 궁문을 지키던 장수가 "우부승지 변중량 입시요"라고 외치는 덕분에 변중량이라는걸 알수 있다. 물론 해당 장면의 묘사는 이방원측에게 살해당했다는것만 빼고 실제 역사와는 전혀 맞지 않는 장면이다.
[1] 당시 갑옷을 입었다는건 이방원의 편임을 의미했다.[2] 일례로, 정도전에 대해서는 목숨을 구걸했다는 구절 바로 뒤에 '단검을 갖고 있었다'는 묘사가 있는 등 당일의 기사에는 앞뒤가 전혀 맞지 않아서 심하게 곡필, 윤색된 것으로 추정되는 부분이 꽤나 많다.[3] 심지어 개국파 편에 선 것마저도 변절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애초에 변중량은 스승인 정몽주를 해치거나 배반하는 행동을 하기는커녕 이방원의 정몽주 암살 계획을 탐지해서 정몽주에게 미리 알려주는 등 위기에 처한 스승을 살리려고 최대한 노력했으며, 개인적으로도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사위로 매우 가까운 인척 관계였기 때문에 그 편에 설 명분은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