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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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문하시중'''
이림

'''정몽주'''

임견미


'''정몽주'''
鄭夢周

'''조선국 익양부원군'''
<colbgcolor=#fedc89> '''본관'''
연일 정씨
'''자'''
달가(達可)
'''호'''
포은(圃隱)
'''국적'''
[image] 고려
'''출생지'''
고려 영천(現 경상북도 영천시)
'''생몰년도'''
양력
1338년 1월 13일 ~ 1392년 4월 26일
(54년 3개월 13일, 19,828일)
음력
1337년 12월 22일 ~ 1392년 4월 4일
'''시호'''
'''문충공(文忠公)'''
'''작위'''
익양군 충의백(益陽郡 忠義伯)[1]
'''군호'''
영원군(永原君)[1387년]
익양군 충의군(益陽郡 忠義君)[1388년]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2]
1. 소개
2. 일대기
2.1. 동방이학(東方理學)의 비조(鼻祖)
2.2. 문무겸비의 명재상
2.3. 고려 최후의 보루
2.4. 선지교의 피
2.5. 후일담
3. 능력과 인물됨 및 평가
3.1. 정몽주는 충신인가?
3.2. 정몽주는 충신이다!
4. 묘소
5. 후손들
6. 제자들
7. 기타
8. 등장한 작품
9.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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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고려 말의 학자이자 관리. 영천 태생이며[3] 본관은 연일 정씨, 호는 포은(圃隱)이다.
그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학문·외교·경제·군사·정치·인품 모두 만렙을 찍은 고려 말기의 먼치킨, 고려 최후의 보루. 선비이미지가 강하기는 하지만 실제로는 왜구 토벌에도 공을 세웠던 글자 그대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그의 조상은 고려 인종의종 때 강직한 충신이었던 정습명이다.[4]
여말삼은(麗末三隱, 혹은 고려삼은) 중 한 사람이다. 보통 여말삼은은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吉再), 목은 이색을 꼽는다. 여말삼은에는 길재 대신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이 들어가기도 하는데 이숭인 또한 정몽주의 제자. 야은 길재는 이색과 정몽주의 제자이기도 하다. 길재는 조선 왕조를 섬기지 않았으나 영남학파의 영수인 김종직이 맥을 이어 조선 왕조의 후반기 정치사조를 지배한 사림파가 나왔다. 한 마디로 조선 시대의 강력한 정치사조는 고려 최후의 충신을 학문적 비조로 삼는다.(길재 등은 이들 사림파의 강력한 지지로 인해 결국 중종 대에 문묘에 배향되게 된다.)[5]
흔히 정몽주의 학맥은 사림파로만 이어지고 훈구파와는 반대라고 보는 경향이 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의 제자인 매헌 권우는 조선 왕조에서 벼슬을 하며 세종대왕스승이 되어 가르쳤고 정몽주의 성리학적 민본주의는 이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세종대왕의 치세에 영향을 미쳤다.[6] 기술 관료로 이름을 날린 정인지도 권우의 제자였으므로 정몽주의 학통에 속하고 정몽주의 제자나 가까운 사형제(師兄弟)들이 조선 초기 훈구파를 이루었던 관계로 이들 또한 정몽주의 학통을 일부 잇고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권근과 변계량 등이며[7], 세종대왕 시절의 명재상으로 이름을 날린 영의정 하연은 정몽주의 마지막 제자였다. 조선 왕조의 개창을 반대했으면서도 조선의 양대 정치사조에 모두 영향을 끼친 인물로 간단히 축약하자면 여말선초에 어지간히 이름을 남긴 인물치고 정몽주의 제자나 문인이 아닌 사람을 찾기가 힘들며 그들을 통해 조선 개국 이전에 죽었지만 조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조선 왕조의 창립을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충절은 충효를 제일로 치는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도 높이 숭상되었기에 그 후손은 조선 왕조 내내 혜택을 받았다. 사례를 들면 세조 때 정몽주의 손자로 장손이기도 했던 정보는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그들은 죄인이 아니라고 두둔한 죄로 거열형에 처해지게 되었다. 정보가 끌려나간 후에 세조가 정보가 어떤 사람인지를 주변에 묻자 신하들이 정몽주의 장손이라고 대답하여 이에 놀란 세조가 형을 중지하고 영일로 귀양을 보내는데 그쳤다.[8] 아이러니하게도 정몽주의 친구이자 라이벌이며 조선을 세우는데 앞장선 정도전의 증손자 정문형은 절의를 지키기는커녕 단종을 배신하고 수양대군에게 붙어 잘먹고 잘살았다.
연산군 때 밉보인 죄로 처형당한 연산군의 스승 조자서의 아내는 남편이 죄인으로 처형당했지만 정몽주의 증손녀라서 연좌되는 것을 피했다. 그의 무덤도 처음에는 이성계에 반대한 죄인이라 하여 승려들이 몰래 묻어줘야 할 정도였지만 조선 건국 이후에 복권되면서 왕릉에 비슷할 정도로 우대받으면서 관리되었다. 오히려 조선 개국의 1등공신이지만 역적으로 찍혀 조선 말기 때 신원해준 정도전과는 대접의 차원이 달랐다.[9] 몇몇 일화에서 보듯이 조선 시대 손꼽히는 폭군조차도 그 후손들을 죽이는 것은 피했을 정도이다. 이 정도면 중국 한나라 소하의 자손들에 대비될 정도의 특혜.
1990년대부터 그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이 나오고 재평가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비슷한 시기에 정도전에 대한 인식이 대중적으로 재평가되었던 것과 맞물리는 편인데[10] 후술되는 정몽주가 충신인가 아닌가 하는 내용은 이와 관련이 있다. 다만 지나치게 고려의 마지막 충신 이미지만 강조되다 보니 고려 말 혼란기 속에서 제도 개혁을 위해서 노력한 점, 왜구 토벌에서도 활약한 점, 왜구에게 포로로 끌려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활약한 점 등의 능력있는 정치인으로서의 모습이 가려지는 경향도 크다.

2. 일대기



2.1. 동방이학(東方理學)의 비조(鼻祖)


출생지는 경상북도 영일[11]이지만 얼마 후 경상북도 영천으로 옮겼다고 전해진다.[12] 후에 크게 될 그릇이라서 그랬는지 작명에도 비범한 일화가 있는데 원래 1번째 이름은 난을 건네받는 태몽을 꾸고 낳아서 "몽란"이었으나 어린 시절 어머니가 용이 나무 위에서 노는 꿈을 꾸고 마당에 나가보니 나무에 아들이 놀고 있어 "몽룡"으로 바꾸었고 나중에 주나라 주공을 본받는다는 뜻으로 "몽주"로 바꾸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꿈에서 주공을 만났는데 주공이 "몽룡은 훗날 한 나라를 지키는 충신으로 자랄 것이오."라고 말해 몽주라고 개명했다고 한다. 영천시 임고면에 정몽주가 유년기를 보낸 외가가 있었으며 지금도 임고서원에서는 정몽주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낼 뿐만 아니라 문집의 목판본을 인쇄 발간하는 등 지역의 중요한 위인으로 기리고 있다.
고려에 본격적으로 성리학을 들여왔고 학문적 완성도도 높아서 스승인 목은 이색에게 '동방이학의 비조'[13]라는 찬사를 들었다. 이때의 일화가 비범한데 당시 성리학 관련 서적이라고는 몇 권밖에 안되던 시절 책을 읽고 정몽주는 내용에 대한 주석을 달고 의미를 풀었다. 해설을 들은 주변 사람들은 모두 과연 맞는 말인지를 의심했는데 후에 중국에서 성리학 서적이 대거 들어오면서 내용이 정몽주가 풀었던 내용과 거의 일치함을 알고 모두들 감탄했다. 훗날 홍건적 토벌에서 공을 세웠다가 김용에 의해 살해되는 김득배의 문생이기도 해서 살벌한 주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김득배의 죽음을 기렸다. 공민왕 초기인 1360년 과거 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해 본격적으로 관직에 입문했고 1363년 여진족 토벌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이후 전농시승, 예조정랑을 거쳐 성균사성에 올랐다. 1372년 사신으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친명파에 속하게 되어 친원파였던 이인임 등의 외교 정책에 반대하다 언양으로 유배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1년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이번에는 일본 규슈에 사신으로 가서 왜구 토벌의 확답을 받고 왜구에게 끌려간 수백 명의 고려인들을 데리고 돌아왔다.[14]

2.2. 문무겸비의 명재상


학문에만 치우친 게 아니었는지 1380년 이성계와 함께 왜구를 토벌하는데 참여했고 이성계가 왜구를 싹쓸이해버린 황산대첩 때에도 이성계의 부장이었다. 물론 무장으로서의 능력보다는 군내 사무나 병법 논의 등을 맡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문신이면서 장수로 활약한 이들이 있고 정몽주 자신의 이미지와는 달리 문약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차례 전투에 참여한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무신 적성도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극 용의 눈물에서는 이 점을 고려했는지 이성계가 정몽주를 회유하려 할 때 이 때의 일을 거론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했는데 이 때도 이성계와 함께 활동했다.
1372년에 처음 명나라에 사절로 파견되었을때 정몽주는 임무를 마치고 고려로 귀국하는 길에 난파당하여 10여 일을 표류했다. 그래서 이 소식을 들은 명나라 태조 주원장은 사람을 보내어 바다 위를 수색하게 했고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고 한다. 당시 난파로 사절단의 2/3 이상이 죽고 살아남은 것은 정몽주를 포함한 일부였다. 난파된 바다 위에서 발견될 때까지 버틴 것도 엄청나지만 발견된 것도 엄청난 확률로 천운이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10여 일을 표류하는 와중에도 끝까지 외교 국서를 놓치지 않았고 배에 실려 있었던 말 안장을 뜯어 먹으면서 버텼다고 한다. 물론 명태조가 정몽주를 수색해 귀환시킨 것은 그를 아껴서가 아니고 외교적 문제 발생을 막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구조된 정몽주가 다시 남경으로 올라가 명나라 조정에 들어갔을때 그런 조난 사고를 겪고도 끝까지 사신으로서 책무를 다하는 모습에 명태조와 주변 신하들이 감탄했다고 전해진다.
1384년 명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되어 아무도 명나라 사신으로 가려고 하지 않을 때도 성절사로 명나라에 건너가 명나라와의 관계 회복에 공을 세웠다. 정몽주가 사신으로 가는 것이 확정된 시점에서는 시간까지 촉박하여 바로 출발한다고 해도 명태조의 생일에 맞춰 도착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정몽주는 밤낮으로 필사적으로 강행군을 해서 기한에 맞춰 도착하는데 성공한다. 12년 전에 풍랑으로 표류해서 죽을 뻔했는데 기일을 맞추려고 최단 항로를 택해 또다시 사신행을 갔다는 점에서 성실하고 책임감있는 성품이 잘 드러난다.
다행히 정몽주가 시일에 맞춰 도착했을뿐더러 명태조가 표문을 작성한 날짜를 보고 "이번 사절행이 위험한 줄 알고 서로 미루다가 널 보낸 거 아니냐? 용케 잘 왔다. 너 12년 전에 개고생했던 정몽주 아니냐?"라고 정몽주를 알아본 덕분에 사신단은 후하게 대접을 받고 무사히 살아서 돌아왔다고 한다. 고려를 견제하기 위해 다소 무리하게 책정되었던 조공도 철회시키는 데 성공.
왜구와의 교섭 성과도 그렇고 명나라와의 마찰 등 외교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계속 성과를 올린 것을 보면 고려 최후의 에이스 외교관이라고 불러도 될 정도다. 일본과의 외교 협상에서는 후에 정몽주의 죽음을 안 일본인들도 애도할 정도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15]

2.3. 고려 최후의 보루


1389년, 이성계가 우왕창왕신돈의 태생이라 주장하며 폐위시킨뒤 공양왕을 옹립할때 동참했다. 흥국사 9공신(이성계, 심덕부[16], 지용기, 정몽주, 설장수, 성석린, 조준, 박위, 정도전)의 하나로서 이성계파로 여겨지게 되고, 반이성계파의 테러의 대상으로 오르기까지 했다. 그렇게 수문하시중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이성계의 저의가 다른데 있다는 것을 느끼고 이성계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1392년, 이성계가 사냥 중 낙마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성계가 멀쩡히 돌아오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후 이성계의 기색을 살피기 위해 병문안을 핑계로 이성계의 집에 방문했다. 기록으로는 이때 이방원과 술자리를 했고 이방원이 하여가를 읊자, 단심가로 화답했다고. 이 부분을 용의 눈물에서는 이성계와 정도전이 정몽주를 회유하기 위해 일부러 이성계가 낙마한 것처럼 꾸며서 정몽주가 일을 도모하게 한 후, 개경으로 귀환한 이성계가 정몽주를 용서함으로써 한편으로 끌어들일 계획이었으나 실패한 것으로 각색했다. 또, 같은 사극에서 이방원과 서로 시조를 읊는 이 장면이 등장하는데, 구구한 말 없이 비장한 표정으로 딱 시조만 주고받도록 깔끔하게 처리한 명장면이다. 한편, 동시대를 다룬 육룡이 나르샤에선 정도전을 이성계와 합의 하에 탄핵 후 합의완 다르게 유배보낸 뒤 이성계가 땅을 빼앗긴 권문세족(조상원)의 암살시도로 인해 낙마한 것으로 꾸몄고, 이를 노려 이성계 일파인 조준과 남은을 유배보냈다. 동시에 이성계에게 시위대와 척사광, 우학주가 이끄는 살수를 보내지만 실패하고, 대신 정도전, 조준, 남은을 처형하려 하지만 처형 바로 전 날, 이성계를 문병하고 오는 길에 이방원과 선지교에서 마주하는거로 꾸며진다. 다른 사극관 다르게 하여가와 단심가를 직접적으로 읆지 않고 서로의 주장을 하는 사이에 녹이도록 표현되었다.[17] 이 두 시조는 한국인이라면 대다수가 들어봤을 정도로 유명한 시조로 정몽주가 죽기전 그의 어머니가 정몽주에게 충고하기 위해 지은 백로가도 유명하다.

2.4. 선지교의 피


어쨌든 이것으로 이방원은 정몽주가 이성계의 신왕조 수립에 동참하지 않을 것이며 어떠한 회유도 통하지 않는다라고 판단하고, 조영규라는 자객을 시켜 선지교에서 정몽주를 죽였다. 공식 기록인 실록에는 조영규가 먼저 말을 공격해서 말이 넘어지자 정몽주도 땅에 떨어졌다가 일어나 달아났는데, 이것을 고여가 쫓아가서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이성계 낙마~정몽주 사망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에 대해서는 당시 기록이 서로 미묘하게 다른 내용으로 남아있어 학계에서 논의가 분분하다. 다만, 대부분의 기록은 정몽주가 낙마한 이성계의 병문안을 가기 전에 자신을 죽이려는 암살계획에 대해서 알았다는 점에서 공통되며[18] 이 때문에 학자들 사이에서는 왜 죽을 줄 알면서 병문안을 갔는지에 대해서도 연구거리이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이를 정몽주 자신의 도박 비슷한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정몽주 자신이 권력자 이성계에게 거스르는 온갖 정치 공세를 다하면서도 진작에 죽지 않고 있는 것은 이성계 자신이 그런 식으로 피를 흘려가면서 왕조를 찬탈하기보다는 모양좋게 모두의 지지를 받아 즉위하고 싶다는 속셈(정몽주는 그것을 '''과욕'''이라고 불렀다) 덕분이며, 그것 때문에 진작에 자신 따위 마음만 먹으면 제거해버리고도 남았을 이성계가 자신을 죽이지 않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이성계 쪽에서 암살이든 뭐든 쓸 생각이라면 경호원을 데리고 가봤자 아무 소용없을 게 뻔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했고 이제 어떻게 흘러가는지 한 번 보자 하는 심리였다는 해석이다. 하여튼 이 난리 중에 정몽주의 동생 정정과도 형과 같이 죽음을 당했고, 다른 동생 정정도는 유배되었다. 유배된 동생 정정도는 살아남아 형의 문집을 발간했다고 한다. 다만 이와 별개로 정몽주의 아내와 자식들에게만은 아무런 책임을 묻지않아 그들은 무사했다.
이 선죽교에서의 죽음은 이후 그야말로 전설이 되었다. 먼 후대 사람도 아니고 정몽주 본인의 제자였던 권우나 권근의 저술에도 여러 이야기가 전해지며 당대 사람들의 증언도 각양각색이다. 대표적으로 전해오는 야사에 의하면 정몽주는 죽을 것을 알고 자신을 수행하던 머슴 김경남[19]에게 너는 어서 피하라고 충고했으나 충직한 머슴은 같이 죽겠다고 하여 그를 뒤따라갔다. 이 설은 권근이나 권우가 머슴역을 대신하는 경우도 있다. 권근 본인의 말에 따르면 그날 권근이 끝까지 모시고 가려고 했으나 군인들이 거리를 분주히 다니는 모습을 보고 정몽주가 주변 사람들을 모두 돌려보냈다고 한다. 정몽주는 이 때 일부러 나귀를 거꾸로 타서 자객들을 기다렸다고도 한다. 어차피 죽을 것이면 죽일 사람 얼굴을 봐서 뭐하겠나라는 설도 있고 부모가 주신 몸을 상하게 되는데 그 꼴을 정면으로 볼 수 없어서였다는 설도 있다. 이것도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 그대로 재현했다. 나귀를 거꾸로 타고 가는 것과, 수행하던 종에게 집에 돌아갈 것을 권유했으나 종이 그것을 거부하고 함께 죽은 것 등.
그런데 연려실기술, 동사강목, 임하필기 등에 적힌 기록에 따르면, 대부분 하급 관원인 녹사(경조궁 녹사 혹은 이름이 김경조인 녹사)가 정몽주를 따랐다가 죽었다고 되어 있다. 특히 임하필기에서는 근래 <진주김씨세보>라는 오래 전에 쓰여진 족보가 발견되었는데, 거기에는 그 녹사의 이름[20]과 당시 행적에 대해 적혀있었던 것은 물론 그 부친이 공민왕 때의 시중인 김구라는 이였다는 기록까지 적혀있었다고 하고, 이를 본 이들이 원래 있던 녹사비 옆에 새로운 비를 다시 세워주었다는 기록이 남기고 있다. 실제로도 그런 비들이 아직 선죽교에 남아있다고. 다만 모두 다 후대의 기록인 만큼 무조건 신뢰하기는 힘들다고 본다.
후대 기록들과 야사를 제외하고, 정사인 고려사 정몽주 열전과 태조실록 총서만 보면, 정몽주와 함께 죽은 이는 커녕 정몽주가 선지교에서 살해되었다는 언급도 전혀 없다. 고려사에는 정몽주가 태조를 문병하고 돌아가는 길에 격살했다는 짤막한 서술만 있고, 태조실록에는 중간의 유원의 집에 문상을 위해 잠깐 들렀던것 정도만 추가되어있을 뿐이다.
태조강헌대왕실록에는 이성계를 문병하고 이어 판개성부사 유원의 문상을 갔다 오느라 원래 다다르기로 예정되었던 곳에 정몽주가 제 시간이 되도록 오지 않자 이방원이 초조해 하는 모습도 실려 있다. 처음에는 자신을 습격하는 조영무 등에게 고함을 지르다 타고 있던 말이 먼저 칼에 맞고 바닥에 쓰러진 것을 다시 일어나서 집 쪽으로 뛰어가려다 철퇴에 거듭 맞아 죽었다고 되어 있다. 충격적인 것은 이 사태가 '''백주대낮에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는 것이다.
아들이 독단으로 정몽주를 죽인 것을 안 이성계는 대노하여 이방원을 크게 혼냈다. 실록에 의하면 이성계가 이방원에게 크게 화를 내는 자리에 신덕왕후가 곁에 있었지만 이성계가 너무 화를 내서 그녀도 어쩌지 못했다고 한다. 한창 한소리 듣던 이방원이 나중에 "어째서 어머니께서 변명해 주지 않으십니까?"라고 말하자 신덕왕후가 "공(公)은 항상 대장군(大將軍)으로서 자처(自處)하였는데, 어찌 놀라고 두려워함이 이 같은 지경에 이릅니까?"라고 말했다고. 사실 이성계 본인은 그다지 정몽주를 죽일 생각도 없었고, 오히려 정몽주를 죽이면 자신만 욕을 먹는 상황이었지만 이미 일어난 일이라서 결국 정몽주를 역적으로 죽였다고 선포하며 그의 목을 효수했다.
실제 정몽주는 이성계를 직접적으로 위해할 군사력이 없었고, 이성계를 설득해 고려왕조를 유지한 채 온건개혁책을 펼 것을 설득하려고 했다고 여겨지기도 한다. 게다가 정몽주는 이성계와 매우 가까운 사이기도 했는데, 정도전 또한 정몽주의 소개로 이성계와 만났다. 이러한 관점에서 정몽주은 강경파들만 이성계에게서 떼어내면 이성계를 설득할 수 있을거라고 생각한걸 수도 있다. 실제로도 이성계는 공적으로도 사적으로도 여러 차례 은퇴를 희망하는 등 정치적 투쟁에 지쳐 있었고[21], 마음이 거의 찬탈의 야심으로 기울긴했지만 500년 고려 사직을 직접 끝장내는건 역시 부담이 큰 일이라 고민은 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방원의 이런 행동에 이성계는 굉장히 불쾌했던것 같고, 이것이 이방원을 세자로 삼지 않은 주요 원인 중 하나라고 보는 사람들도 많다. 이후 조선이 개국되고 왕위에 즉위한 후에도 태조실록에서 정몽주를 죽인 일과 관련하여 이성계가 "대신을 멋대로 죽였으니 누가 비난하지 않겠는가."라는 취지의 말로 간접적으로 이방원을 디스하는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이성계의 정몽주에 대한 사적인 친분은 차치하고 수십년간 공을 세운 명신을 명분도 충분히 없이, 심지어 국가의 명령 형태를 갖추지도 않고 사적으로 암살한 일이니 당연히 옹호가 불가능하다. 이색이나 이숭인을 죽이듯이 억지 명분으로라도 탄핵해서 유배를 보내거나 곤장을 쳐서 죽이는게 정치적 부담이 훨씬 덜한 방식이다.

2.5. 후일담


당시 정몽주가 고려에 가진 영향력은 단순한 재상의 수준이 아니었다. 조선개국에 가담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조준에게 조견이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조선 개국에 대해서 조준이 동생을 설득하려 하자, 조견이 "또 달가(達可, 정몽주의 字)는 이 나라의 기둥이자 주춧돌인만큼 만약 한 마디 말과 한 가지 일이라도 달가와 달리하기를 구한다면 이것은 국사를 해치는 것이고 나라가 망하기를 재촉하는 것입니다."[22]라고 말할 정도였고 조준도 여기에 토를 달지 않았다. 명문가 출신에 이성계측 주요인물인 조준의 가문에서 달가(=정몽주)와 뜻이 다르면 역적이자 나라를 망하게 하는 일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의 위상이었으니 이성계 측이 그토록 그를 한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던 것도 무리가 아니었던 것이다.[23] 이런 점에서 이방원이 한 일은 이성계와 당시 고려 전체에 매우 큰 충격을 주었을 것은 자명하다. 그래서 이 정몽주 살해 사건은 이방원이 단순히 '이성계의 아들 중 1명'에서 벗어나서 본격적으로 중앙 정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가 되는 계기이자, 이후 수십년간 이어지는 이성계와 이방원 간의 그 지독한 대립 및 애증 관계의 시발점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의 시신은 산중의 중들이 충신의 시체를 방치할 수 없다하여 목숨을 걸고 밤에 몰래 옮겨 장사지냈으며, 시중의 상인들도 며칠간 상점을 철시하고 충신의 죽음을 애도했다고 전한다. 게다가 일본에 이 소식이 전해지자, 그를 만나고 알게 된 일본인들마저 따로 제를 지냈다고 한다. 그 중에는 절에 정몽주를 위하여 시주하는 이들도 있었다. 다만 그의 시신을 수습한 이가 누구인가에 대해서는 이설이 존재하는데 당시 정몽주와 가깝게 지냈던 명문가 우현보가 수습해 묻었다는 말도 있다. 후에 정도전이 우현보의 세 아들을 곤장을 때려죽인 사건에 자신의 어머니가 우현보 집안의 종의 자손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이 점이 작용했다는 설도 있긴 하다.
'''다만''', 또다른 일각에선 이것이 그 당시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정몽주의 죽음을 슬퍼하고 후에 정도전이 이방원에게 축출되고 나서 간적으로 규탄받고, 나중에 정몽주가 추앙받게 되는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우현보의 집안인 단양 우씨에서 자신들의 위상을 드높이려고 자칭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있다.
한편, 정몽주가 죽어간 다리는 당시 선지교라는 이름이었으나 정몽주가 죽은 자리에서 붉은 참대나무가 났다하여 이름이 선죽교로 바뀌었다. 개성에 남아있는데, 다리에 있는 검붉은 얼룩이 정몽주의 피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북한에 간 유홍준 교수나 여러 인물이 선죽교를 찾아가봤더니 북한에서도 정몽주를 기려서 선죽교에 아예 보호대를 설치하여 함부로 밟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이 선죽교 다리에는 붉은 얼룩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얼룩의 범위가 60년 전과 현재의 모습이 좀 다른 듯.
역설적이게도 후에 2차 왕자의 난이 이 선죽교를 사이에 두고 벌어진다. 일설에 따르면 조선 말기까지 남아있던 선죽교의 혈흔에 대한 증언과 현재 개경에 남아있는 피얼룩이 상당히 다르다고 하며 이 때문에 일제시대에 훼손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이도 있다.
태종이 그를 공식 복권시킨 후에는 정몽주의 아들도 조정에 나아가 벼슬을 했다. 장손인 설곡 정보라는 인물도 벼슬을 했는데 충신의 집안에서 충신이 나오는 것인지 단종에게 절의를 지키고 그 삼년상을 치렀기에 결국 사사당했으나 이후 숙종때 절의를 인정받아 신원, 이조참의로 증직되었다. 이후 정조(조선)로부터 “살아 있는 사육신”이라는 호평을 받았다. 이후 그 후손들도 대대로 벼슬을 했으며 그 중에는 우의정을 지내거나 학문의 거두가 된 이들도 나오는 등, 나름대로 번창한 편이다. 현대 연일 정씨는 주로 교육자나 기업가, 전문직 등에 많이 종사하고 있다.

3. 능력과 인물됨 및 평가


고려 말의 유능한 관리이자 뛰어난 성리학자였으며 성리학의 입장에서 고려를 개혁해보려고 애썼다고 한다. 스승인 이색이 이르기를 '''동방 이학(理學)의 비조'''. 고려시대 수도인 개성에 5부학당과 지방에 향교를 세웠는데 이런 교육체제는 조선에서도 그대로 계승했다. 주자가례를 실천한 최초의 인물이라고도 한다.
외교적으로는 친명파로서 명나라와의 외교관계 진작에 앞장섰으며 와의 대외교섭도 맡았는데 실제로도 뛰어난 성과를 남겼다. 당시 명나라 태조 홍무제고려원나라의 사이를 의심하고 또 고려를 견제하기 위해 상당히 까다롭게 굴었는데 그 때문에 당시 대명외교는 지난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몽주는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홍무제에게 억류당한 이전 고려 사신들을 풀려나게 해주고 고려의 입장을 이해시켜 목적을 달성해냈으니 그 능력을 보면 알 만하다. 이는 홍무제에게 감명을 준 여러 사건들 때문이기도 했다.[24]
일본외교 또한 대단한 수완을 발휘하였는데 당시 포악하기로는 손꼽히는 왜구들한테 거의 단신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찾아가 국제관계를 설명하고 설득하여 잡혀온 고려인 포로 수백 명을 구출했는데 이 때의 상황이 눈물겹다. 당연히 처음부터 왜구나 일본의 영주가 설득에 응한 것은 아니어서 시간이 걸렸고 준비해간 돈도 떨어져서 앞으로 어찌해야 하나, 하고 탄식하는 시도 남겼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애쓴 끝에 고려인 포로를 데리고 돌아왔고 이후에도 왜구의 노비로 혹사당하는 고려 양민들을 구출하기 위해 사재를 털고 다른 대신들을 설득하여 돈을 모아 그들을 고려로 데리고 오기도 했다. 정몽주의 이런 노력에 감탄한 일본의 영주가 그때마다 고려인 포로를 백여명씩 돌려보내주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통틀어 끌려간 양민구출에 이렇게 노력을 기울인 관리가 상당히 드물다는 것을 볼 때, 사재까지 털어가면서 그들을 구출한 점은 실로 높이 평가해야 할 부분.
또한 언변이 대단히 뛰어났다. 스승인 이색은 정몽주를 가리켜 "횡설수설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25]라고 하면서 동방이학의 비조로 추대한다고 하였으며, 명나라홍무제 또한 정몽주의 언변이 뛰어나서 고금의 예에 어긋남이 없다고 평하였다.
꼬장꼬장하고 문신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배포가 크고 호방한 인물이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그가 남긴 시와 기록을 보면 당대에서부터 현재까지 호방하다는 감상이 꼭 등장한다. 또한 대단히 침착하여 큰 일을 결단하는데 낯빛이 변하는 일이 없었고 극비로 처리해야 하는 일에서 한 치의 허투름도 없었다고하니 세상 사람들이 그를 일컬어 왕좌지재 라 하였다.
또한 명나라의 법인 대명률을 참고한 신율을 편찬해 법률의 정비로 국가의 혼란을 수습코자 노력했다. 군사적으로도 어느 정도 능력이 있어 이성계의 왜구토벌 등에 따라 여러차례 종군하면서 공을 세웠고 의창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는 정책을 펼쳤는데 이후 이 의창은 조선왕조가 들어선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또한 왜구의 침략으로 황폐화된 조운시설을 재건하여 국가 재정을 회복시켰고[26], 원칙도 없이 엉성하게 처리되던 회계출납도 개혁하여 담당관리를 두고 엄중히 관리하여 부정을 막았으며 인재를 뽑아쓰는 일에도 이전과 다르게 엄중히 살펴서 행하여 허투른 인물이 발탁되는 일이 없어졌다고 한다.
이런 일화들을 볼 때 그야말로 만능 관리였던 것 같다. 한마디로 학문의 대가이면서 외교, 군사, 법률 및 행정에도 뛰어났던 대단한 인물이다.
이러한 능력과 인품으로 민중들 사이에서 인망도 대단히 높았다. 여말선초를 살았던 박신이라는 관리는 백성들이 무기의 병화를 입지 않고 편안히 먹고 자는 것이 모두 선생의 공적이라고 말할 정도. 게다가 한창 세를 불려서 고려에서 상대할 자가 없던 이성계 일파와 맞서 팽팽히 대결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정치력 또한 보통이 아니며 그만큼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용기도 강하였다. 하지만 끝내 이방과이방원에게 살해당해 고려의 멸망을 막지는 못했다. 이렇듯 다방면에 걸친 뛰어난 능력과 업적에 더해 충절까지 겸했기에 후대에 평가가 매우 높았다.
정몽주의 충절은 조선 초기에는 조선 건국에 반대했다고 하여 언급조차 안되었지만 세종 이후 유교적 충효를 강조하기 위해서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재미있게도 정몽주를 때려잡은 태종 이방원은 자신의 즉위 원년에 '''정몽주를 영의정으로 추증하고 익양부원군으로 봉하였으며''' 세종은 삼강행실도에 정몽주의 충절 항목을 실어 그의 충절을 본받게 하고자 했다. 실제로 세종대왕은 고려사를 편찬하면서 고려 왕조의 충신들에 대해서 상당히 객관적으로 평가하려고 노력했는데 그 중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여말 삼은에 대해서 평가하기를,
  • 목은 이색은 학문은 뛰어나지만 절의를 지키지 못했고, 관리로서의 재능이 낮으며 정치적 역량이 부족하다.
  • 야은 길재는 절의를 굳게 지켰지만, 성격에서는 모가 난 사람이었다.
  • 포은 정몽주는 절의를 지켰고 관리로서 뛰어나며 인품이 순후하고 성실하다.
라 하여 이색이나 길재와 비교해도 매우 좋은 평을 내리면서 그가 충신임에 대하여 재론이 필요없다고 하였으며 그 학문적 능력에 대해서도 높이 평가했다. 이와 같이 정몽주는 단순히 그 충절만 평가된 것이 아니라 외교적 업적같이 관리로서의 능력도 높이 평가되었는데 워낙 충성심이 강조되다보니 현대에 들어서는 충신이라는 것 빼고는 한 게 뭐가 있냐고 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물론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정몽주가 명, 왜와의 외교나 왜구 토벌, 내정분야에서 세운 업적을 전혀 모른다.(...)
어쨌든 객관적으로 보면 당연히 명신이자 충신으로 존경받을 인물이었지만 조선왕조 개국을 반대한 점 때문에 조선 왕들에게 많은 딜레마를 안겨주기도 했다. 실제로 위에서 정몽주를 높이 평가했던 세종대왕은 용비어천가에서는 정몽주를 반역의 괴수이자 천명을 거스르는 인물로 묘사했는데 읽고 있으면 거의 대마왕같다.
그러나 시대가 흐르면서 그에 대한 평가는 계속 높아졌고 조선 왕들도 후대로 갈수록 역적도당이 아닌 충신으로 인정하게 된다. 중종은 사림파의 요구를 받아들여 문묘에 정몽주의 위패를 안치하게 했고 명종 대에는 정몽주의 고향에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임고서원이 창건 되었다.
중종은 정몽주가 이씨의 원수라고 하면서도 그 충절을 포장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는데, 이는 성리학 윤리와 질서를 추구하며 건국되었으면서도, 건국과 찬탈 과정에서 그 윤리와 현실이 벌어졌던 조선의 정치와 윤리의 괴리를 보여주고, 그러면서 자신들의 명분이 손상됨에도 성리학 윤리를 버릴 수도 없었던 왕들의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27]
정몽주의 묘에 비석을 세울 때는 그가 고려의 신하로 죽은 뜻을 더럽혀서는 안된다고 조선왕조가 추증한 벼슬을 기재하지 않았을 정도.[28] 이와 같이 조선 초기는 물론 훗날 송시열을 비롯한 사림파들도 정몽주를 찬양해 마지 않았다.
조선왕조 성종실록에 의하면 '그 당시 사람들이 말하기를 '만약 한 번 마음만 바꾼다면 개국(開國)의 원훈(元勳)이 될 것이니, 누가 그를 앞설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나, 정몽주는 끝내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켜 죽어도 의(義)를 잃지 않았던 것입니다.'라고 평가된다.
또한 후대로 갈수록 이러한 경향은 현저해진다. 영조는 과거시험에서 정몽주의 후손이 장원급제한 것을 알고 기뻐하는 시도 남겼으며 숙종은 정몽주의 시를 모방하여 여러 편의 시를 남겼다.
정치적 라이벌인 정도전 또한 그를 가리켜 "도덕의 으뜸"이라고 평가했는데 실제로 이 둘은 상당히 막역한 사이기도 했지만 청렴한 관리기도 했던 정몽주의 도덕성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의 충신 이미지 때문에 간과하는 경우가 있는데 정몽주는 상당한 경지에 들어선 시인이다. 위에서 정몽주의 능력을 설명할 때 유능한 관리이자 뛰어난 성리학자였다고 평한다. 성리학자로서 가진 사상과 식견을 자신의 시에 고도로 승화시켰다. 한문학이나 그에 관련된 전공을 한다면 한 번씩 짚고 넘어가게 된다.

3.1. 정몽주는 충신인가?


정몽주의 행적을 연구한 일부에서는 정몽주를 충신으로 보는 것은 지나친 미화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이런 시각에서는 정몽주는 충신이 아니라 단지 대세를 잘 살펴서 줄타기를 잘한 노회한 정객일 뿐이라고 평가된다. 이러한 정몽주가 충신으로 미화된 것은 그를 충신으로 미화, 격상하여 표본으로 삼음으로써, 조선조가 가장 두려워하는 역성혁명을 방지하기 위한 선전 수단으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볼 수 있는 소지는 정몽주가 이인임의 친원정책에 반기를 들어 같은 신진 사대부들과 함께 반대운동을 벌인데서부터 시작된다. 얼핏 이인임의 친원정책에 반대한 것은 외교문제일 수도 있었지만 속내는 친원파인 이인임의 권력을 견제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그러나 신진 사대부들의 반이인임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고 정몽주를 비롯한 반이인임 운동에 관여한 자들은 유배되거나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 정몽주는 1년만에 유배에서 풀려나왔다. 이는 강경파로서 완전히 찍혀 유배지에서도 훼방을 받았던 정도전은 물론[29],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상당히 빠른 것으로 능숙한 외교관이었던 정몽주는 당시의 집권세력인 친원파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즉, 정몽주는 줄타기를 매우 잘한 것이다.[30]
정몽주를 충신으로 보기에 어렵게 만드는 요인은 이성계에 대한 태도에서도 드러난다. 정몽주는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하는데에 비판하는 목소리를 내지 않았고 최영의 죽음에도 아무 말을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이성계가 우왕과 창왕은 신돈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며 그들을 폐위하려 할때 이를 반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적극적으로 찬동해 공양왕을 옹립하기까지 했다. 우왕을 자기 집에 초대해서 성대한 잔치까지 벌였던 사람이 말이다. 물론 이성계가 역성혁명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는걸 처음에는 몰라서였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이성계의 행보에 반대하지 않고 동참한 것은 이성계를 이용해 권력을 잡으려는 목적에서 그랬다는 시각이 있다.
이런 시각에서 볼 때 정몽주가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반대했던 건 고려에 대한 충심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역성혁명에 찬동해도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이 적다면 고려 왕실을 유지해서 자신이 권력을 잡는 편이 낫다고 계산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정몽주가 백성을 위한 민본주의적 성리학을 도입했다고 하나 백성에 대한 충성은 '''고려충신 정몽주'''와는 전혀 다른 문제다. 백성에 대한 애민정신과 국가에 대한 충성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리고 역사적 평가를 봐도 고려의 멸망은 백성들에게 훨씬 나은 결과를 가져왔다. 정몽주의 충성 대상을 백성으로 두면, 고려 멸망을 막으려고 한 시도는 뻘 짓이 되는 것이다. 여러모로 봐도 고려왕조와 고려백성을 분리시킨 다음에 고려백성에 대한 충성 이야기를 하는 것은 현대적 관점에서 끼워맞춘거나 마찬가지다.
또한 이와는 별도로 인품이 고결하고 도덕적으로 훌륭한 점도 과장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한 예로 이성계가 낙마한 틈을 타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시도할 당시 정몽주의 행동을 보면 고결한 도덕군자의 모습은 보기 힘들다. 간관들을 조종해 공양왕에게 정도전 일파를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몰아붙이는가 하면, 관원들을 시켜 정도전 일파를 고문해 죽여야 한다고 엄명을 내리는 등 대단히 냉혹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31][32]
이런 정몽주가 만고의 충신이 된 이유에 대해서는 조선 왕조가 역성혁명에 부정적인 성리학자들을 회유하기 위해 성리학자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치는 정몽주를 미화하고 떠받들었다는 것이다. 정몽주가 충신으로 미화된 근본적인 이유는 새로운 역성혁명을 방지키 위한 측면이 크다 할 수 있다. 역성혁명으로 건국된 조선왕조가 가장 두려워한 것은 다른 역성혁명에 의해 전복되는 것이다. 때문에 조선왕조의 건국을 가장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정몽주를 성인으로 격상하면서 충의 표본으로 삼아 그를 통해 전 대신과 백성들에게 충효사상을 주입하여 역성혁명을 근원적으로 방지하려는 했다는 것.

3.2. 정몽주는 충신이다!


우선 명백히 해야 하는 것은, 단지 해배가 빨랐다는 것만 들어서 정몽주가 이인임 등 친원파와 소통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장은 냉정히 말해서 그 앞뒤 사정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견강부회다.
정몽주의 해배가 함께 유배된 다른 사대부들보다 빨랐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해배된 직후인 1377년 정몽주는 당시 들끓는 왜구 세력의 억제를 부탁하기 위해 일본에 사신으로 보내졌다.
그런데 이 당시의 일본은 끝없는 전쟁 상태였고,(남북조 시대~무로마치 막부 시대였다) 왜구들 또한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해 노략질에 나선 도적떼가 아니라 내전에서 패배한 세력들의 잔당으로 구성된 것이 상당수였다. 즉 일본 본토에 찾아간다는 것은 왜구들의 마굴에 제발로 걸어들어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인 것이다. 당장 정몽주 이전에 일본에 사신으로 간 나흥유는 감금당해 굶어죽기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목숨만 부지해서 돌아왔고, 나흥유 본인 입으로 일본은 고려인을 싫어하니 사신을 보내봤자 죽기만 할 거라고 손사래를 칠 정도였다.
정몽주의 해배는 이런 곳에 보내지기 위해 이루어진 것이다. '''이건 누가 봐도 대놓고 가서 죽으라는 소리지 절대 은근히 싸고도는 짓으로 해석할 수가 없다!''' 게다가 정몽주는 이 헬게이트에 당당히 찾아가서 외교적 성과를 거두는 것은 물론이고 고려인 포로들까지 더불어 데리고 오는, 직전 나흥유의 봉변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충격적인''' 대업적을 이루었다. 국가 중대사에서 이 정도로 혁혁한 성과를 보인 인물이니, 정몽주에 대한 친원파의 소극적인 압박은 '봐줬다'기 보다는 아무리 그들이라도 '함부로 건드리기 어려울 정도로' 정몽주의 공이 컸다고 보는 것이 옳다.
또 '충성의 대상은 백성'이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정몽주는 충신이 맞다. 앞에서 언급된 일본에 잡혀 간 포로들을 송환해 온 것이 별 것 아닌 걸로 보일 수도 있지만,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시대까지 통틀어 외국에 포로로 잡혀간 백성들을 구해오기 위해 그처럼 발벗고 노력한 정치가는 정몽주 외에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당시 중국과 일본은 모두 전란에 휩싸여 있어서[33] 여기에 사신으로 가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지만 정몽주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이는 명나라와의 외교에서도 마찬가지로, 태풍으로 표류하기까지 하는 고초를 겪으면서도 계속 사신행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만 봐도 대단한 인물이다. 심지어 명나라로 갈 때는 죽는 게 거의 확정사항일 정도로 위험한데도 거절하지않고 가서 기어코 목적을 달성했다. 이러한 행동은 결코 노회한 정객이나 권력에 눈 먼 대신에게서 나올 수 있는 행동이 아니다.
당시 부패한 고려 말의 정치판에서 그만큼 청렴하고 양심적인 정치인이 드물었던 것도 사실. 그리고 외교활동만 한 게 아니라 '''자신의 사재까지 털어가며''' 일종의 모금운동까지 벌였다. 그의 충성의 대상은 '조정' 이전에 바로 '백성'이었던 셈. 즉, 고려의 마지막 기둥이자 양심적이고 청렴결백했던 정치가였음은 변함이 없다. 그의 죽음이 알려지자 평범한 백성이나 상인들도 그 죽음을 애도한 것은 이러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유교의 민본주의 사상을 지나치게 끌어내어 짜맞춘 논리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이건 애시당초 정몽주가 유교(성리학)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당사자로서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했을 것임을 고려하면 '''그가 민본주의를 받아들인 건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유교고 뭐고를 떠나서 예나 지금이나 '''정치가가 백성을 위해 노력했다면 당연히 좋게 평가받는 것이다'''. 요즘 정치인들도 부정부패에 찌들어 탄핵당하거나 감옥 가는 자들이 태반인 걸 생각해 보자.
사실 백성에 대한 충성을 비현실적인 소리로 본다고 하여도 정몽주에 대한 충신 이미지가 사라지진 않는다. 바로 '''왕氏 고려'''라는 왕조에 대한 충성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우왕창왕을 폐지한다고 해도 새로 옹립한 공양왕도 왕씨이다. 왕위에 앉아있는 사람만 변했지 왕씨가 다스리는 고려 왕조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
즉 정몽주 입장에선 왕이 왕씨 왕조라면 타협의 여지가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여차하면 무장의 지배도 뒤집힐 수도 있는 것이고. 애초에 고려는 무신정권을 겪었던 나라이고, 공양왕은 대놓고 이성계에게 무신정권을 제의하기도 했다. 이씨 무신정권이 성립되었다면 정몽주는 잘하면 왕가도나 정지상, 못해도 왕조의 보호 정도의 위치는 할 수 있다. 이건 당시 정몽주의 현실판단력이라면 충분히 고려할 수 있는 문제이다[34]. 조선 건국 세력들은 이전의 권력자와는 달리 고려라는 국가 자체를 없애려고 하였고 이게 충돌한 것이다.
또한 상기의 비판 문단에 있는 “조선왕조의 수립이 백성의 생활에 더 나은 결과를 가져왔으므로 고려왕조를 지키려고 했던 그의 행동은 뻘 짓이다.”라는 요지의 비판도 원인과 결과가 배치된 대단히 '''결과론'''적인 주장이다.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면 조선왕조 전반기 명군들의 출현을 알고 있으므로 정몽주 측의 행동이 답답하게 여겨질지 모르나 당대 사람에게 그러한 사실은 예측불가능한 미래의 일이었다는 것을 명심해야한다. 고려말 당시 상황에서 이성계 측이 과연 백성을 위하여 역성을 주장하는지 권력을 탐하는 것인지는 판단이 불가능한 사항이다. 이것은 예측이 아니라 예언의 영역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당장 고려 말에 “조선이 건국되면 뛰어난 명군이 나타나서 백 년 정도는 전성기를 맞게 될 테니 역성혁명에 찬성해달라.”고 했다면 미친 소리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실제 상황이 조선초에 일어났다는 것 또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왕씨 대학살과 고려 충의파에 대한 숙청 및 배제로 많은 피가 흘렀으며 그 이후에도 조선 개국세력 내에서 권력다툼으로 두 차례에 이르는 왕자의 난이 발생하여 조선 초 정국은 대단히 불안했다.[35] 왕권 강화에 눈이 멀었던 태종이 도덕적으로는 패륜아였지만 군주로써는 먼치킨이자 공과 사는 확실히 구분하는 명군이었고, 그 아들이 더 큰 먼치킨이었기 때문에 조선 왕조가 전성기를 맞은 것은 그저 우연에 불과한 일이다.[36]
오히려 당시 일반적인 상식론과 과거 사례에 입각해서 예측해본다면, 역성으로 나라가 뒤집히게 되면 새로운 왕조가 구 왕조의 왕족과 지배층을 대량학살하거나 숙청하는 피바람이 불 것이며 심한 경우 내란이 발생할 수도 있다. 이 정도로 정국이 불안해지면 백성의 생활에도 악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 실제로 조선이 개국되자 왕씨 대학살과 고려 충절파에 대한 탄압이 있었던 것만 봐도 이것은 충분히 고려해야만 하는 사항이었다. 반대로 만약 이성계 측이 혁명을 단념하고 개혁에 주력했다면 왕조 교체와 함께 숙청된 온건 개혁파 인물들까지 포함한 개혁이 가능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또한 이성계, 정도전 일파의 조선건국은 이념적으로는 맹자역성혁명론에 기반하고 있는데, 우왕이라면 모를까 창왕공양왕은 폭군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다. 물론 우왕창왕신돈의 후손이라는 의혹이 있었고, 실제로 정몽주 역시도 여기까지는 이성계 일파와 뜻을 같이했다. 하지만 공양왕의 경우를 보자. 공양왕은 명백한 왕씨로서 우왕과 창왕 부자처럼 혈통에 관한 의혹도 없었고, 역성혁명을 당해야 할 정도의 폭정도 없었다.[37]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공양왕 대신 이성계를 왕으로 추대하는 것은, 맹자역성혁명론을 구현했다 보기 어렵다.
즉 정몽주는 자신의 이상에 대한 '''일편단심'''을 진정으로 지켰고, 세상에 순응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공상에 빠져 비현실을 살지도 않았는 것이다. 혁명과 쇄신 중에는 후자가 더 어려운데도 불구하고 정몽주는 어려운 길을 택했고, 이를 현실에서 그릴뻔 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받아야 마땅하다.
훗날 태종이 정몽주를 영의정에 봉하고 사대부들의 귀감으로 삼은 것 역시, 물론 왕조에 충성을 다하라는 프로파간다의 목적이 있었겠지만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충성의 표본을 제시하기 위해서라면 정몽주 이외에도 왕조를 위해서 목숨을 아끼지 않은 충신들은 역사 속에 많이 있었고, 태종 입장에서도 단지 프로파간다의 목적을 위해서 자신이 살해한 정몽주를 충의의 화신으로 내세우는 것은 오히려 왕조의 정통성에 적지 않은 위험부담을 지는 셈이다.
태종이 당시 고려의 주춧돌이나 다름없던 정몽주를 살해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상황에서 단순히 프로파간다만을 고려해서 그를 존숭하기에는 정치적 부담이 매우 컸다. 아무리 말을 잘 포장해도 결국 충신이며 명신을 살해했다는 결론은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왕조의 정통성에 다소 흠결이 생기더라도 정몽주를 인정하고 추증함으로써 얻는 이로움이 더 크리라는 태종의 계산이 들어갔을 것이며, 따라서 이것은 오히려 당대 정몽주의 위상이 그의 사후에도 영향력을 끼칠 정도로 거대했다는 반증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따지면 프로파간다의 목적으로 정몽주를 끌여다 붙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몽주를 어떻게든 존숭할 필요가 있었기에 자기모순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정몽주를 높일 수밖에 없었다고 해석하는 것도 결코 무리한 비약은 아닐 것이다.[38]
또한 인터넷 상에서 일부가 그의 도덕성과 관련하여 왕과 권신의 인척을 실력이 없는데도 과거에 부정합격시켰다고 주장하고 그게 사실인줄 아는 경우도 많은데 이는 사실과 전혀 다르다.
실제로는 과거의 부책임자 격이었던 정몽주가 우왕의 3비인 의비(毅妃)의 동생 노구산(즉 왕의 처남)을 너무 실력이 모자라서 불합격시켰는데 우왕이 노발대발하여 과거 자체를 무효화시켰다. 그러자 다른 대신들이 의비의 아버지 노영수에게 과거를 다시 보게 하라고 하자 노영수는 아들과 같이 불합격된 다른 10명도 응시시키는 조건으로 이에 응하여 결과적으로 아들을 부정합격시켰고 또한 문윤경이란 자가 친구의 글을 베껴서 정몽주가 그를 내쫓았으나 과거 총책임자였던 염국보(염흥방의 형)가 합격시켜버렸다. 이에 대하여 최영이 한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즉 정몽주가 부정합격에 관여한게 아니라 제대로 처리한 것을 우왕과 권신들이 개입하여 뒤집어버린 것이다. 왕과 권신의 인척이 과거에 응시해도 실력대로 처리했는데 왕과 권신들이 뒤집어버린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를 정몽주가 권신과 결탁했다며 정몽주 비판론에 인용하는 것은 명백하게 사실관계의 오류다. 물론 제대로 사료를 살펴보는 역사학자들은 이런 말을 안하지만 그냥 떠도는 말로 역사적 인물을 비평하는 몇몇 네티즌들이 이런 말을 유포하며 비판론의 근거로 써먹는다.
또한 이방원의 회유에 따라서 이성계 편에 붙었다면 손쉽게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39] 충절을 지켜 '''고려왕조에 순절'''한 점, 사리사욕이나 탐욕을 부리지 않았던 점 등을 볼 때, 단순히 권력을 추구했다고 보기는 힘들며, 초기에 이성계에게 협조했던 것은 그 시점에서는 아직 그가 역성혁명을 노린다는 점이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는 것이 옳다.[40] 그리고 정몽주로서는 고려왕조를 개혁하기 위한 실질적인 무력의 뒷받침을 해줄 수 있는 인물로 그때까지 고려의 변방 출신인데다 같이 목숨을 걸고 싸운 적이 있는 이성계를 신뢰했을 것이라는 추측 또한 가능하다. 당시 최영은 충신이긴 했으나 정몽주를 비롯한 신진 사대부가 추진하는 개혁에 반대편에 선 인물이었으므로 개혁을 통한 고려왕조의 지속을 노린 정몽주로서는 그를 몰아내기 위해 최영과 반대편에 선 무신세력의 도움을 필요로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편 다소 마키아벨리즘적인 인식이긴 하지만, 위에 언급된 정몽주의 냉혹한 면모는 목적 달성을 위해 불가피했다는 해석도 있다. 정몽주가 상대한 이성계 일파는 이미 조정의 모든 실권(특히 군사권)을 장악하고 있었고, 이들을 제거하기 위해선 비정상적인 방법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 도덕적 정당성만으로는 왕조를 지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도전(드라마)에서는 이러한 해석 위에서 군자 정몽주가 정쟁의 온갖 수단을 사용하며 느끼는 갈등을 묘사한다.

4. 묘소


묘소는 용인시에 위치한다. 용인시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 소재. 혈죽에 관한 일화가 있는 민영환 묘소도 존재하기에[41] '''혈죽용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 역사가 만든 우연?
원래는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이장하려고 관을 옮기던 중 명당자리를 발견하여 그 자리에 이장하고 자손들이 터를 잡게 된 것이 현재 묘소라고 한다. 상당한 명당인데 후에 선조의 왕비인 의인왕후 박씨가 승하하여 그 능터를 찾던 지관이 적당한 곳을 발견했는데 그곳이 바로 정몽주의 현 묏자리였다. 이에 선조는 난색을 표하면서 명당을 얻기 위해 충현의 무덤을 파헤칠 수 없다하여 다른 곳을 찾아 의인왕후를 매장토록 했다. 정몽주의 무덤이 있는 곳 일대를 능골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러한 일화에 따라서 왕릉 자리로 택지될 정도의 명당터라는 뜻이라고 한다. 위에도 잠시 언급했지만 조선 시대에 복권되면서 무덤 또한 대단히 크고 화려하게 단장하여 거의 왕릉 수준으로 다듬어져 있다. 유림의 정몽주에 대한 존경심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묘비명은 매우 담박하게 高麗守門下侍中鄭夢周之墓(고려 수문하시중 정몽주지묘), 즉 '고려 수문하시중을 지낸 정몽주의 묘'라고만 쓰여져 있다. 사실 이것도 엄밀히 말하면 유림의 존경심이 담긴 표현이다. 본래 묘비에는 생전의 관직 뿐만 아니라 사후에 추증된 관직들도 모두 적어서 기리는게 보통이다.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 정몽주를 충신으로 인정하고 조선의 관직들을 추증하였으나 유림들은 정몽주가 오직 고려의 충신임을 주장하기 위해 이런 묘비를 지은 것.
여담으로 정몽주의 손녀가 명당터를 얻어서 자신의 시갓집을 잘되게 하려고 무덤자리에 물을 부어서 정몽주의 원래 무덤자리로 예정되어 있던 명당을 훔쳤다는 야사가 있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 야사에 나오는 손녀는 실제로는 정몽주의 손자인 설곡 정보의 딸인데 그 딸이 이석형[42]이라는 인물에게 시집가 자식을 낳고 젊은 나이에 죽자 정보가 원래 자기 무덤자리로 찍어놓은 곳에 딸을 묻었고 이석형도 후에 죽어서 아내 무덤 가까이에 묻히게 된 것이다. 이 야사는 후에 이석형의 자손이 크게 번창하자[43] 생긴 이야기다. 실제로는 그 두 집안이 서로 가까워서 정씨 가문의 선산에 이씨 가문의 묘소가 같이 혼재되어 있었는데 일제 시대 선산 분쟁이 일어나 이씨 가문의 묘소가 모두 이장되어 나가고 이석형의 무덤만 남은 것이라고 한다.

5. 후손들


정몽주의 아들 정종성은 대단한 효자였는데 고려말 아홉 효자 중 한 명이었다고 한다. 정몽주가 참살당하자 이성계 일파가 그를 역적으로 선포하고 효수했기 때문에 가산은 모두 적몰되었는데 정종성은 동생과 함께 피신하여 숨어살았다. 지방에 있는 친척들의 도움으로 근근히 살았다고 하며 태종 때 정식 복권된 뒤에도 '정씨의 아들인데도 전하가 봐줘서 살아있는줄 알아라.'라는 식으로 폭언을 들었고 조정 권신들에게 매질을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어쨌든 부친의 복권 이후에는 조선 조정에 출사했다.
이 정종성의 딸은 조선 정종의 서자로 5번째 아들인 선성군과 결혼하였으며 서녀는 양녕대군의 장남 이개의 첩[44]이었으므로 아이러니하게도 정몽주는 조선왕실과도 인척지간이 된다. 한편 정종성의 얼녀는 조선시대 가장 욕먹는 찬탈인 세조 집권을 도운 한명회의 첩이기도 했는데[45] 반대로 아들인 정보는 단종에게 충의를 다해서 결국 거열당할 뻔하다가 유배되고 가산을 적몰당한다. 정보에게 사형을 선고한 후 그가 정몽주의 손자라는 것을 뒤늦게 안 세조가 '충신의 자손을 죽일 수는 없다'고 하면서 감형한 것.[46] 뿐만 아니라 한명회는 정몽주의 또다른 아들인 정종화의 딸도 자신의 첩실로 두었다.
정보 사건 때문에 이후로 가문이 기울었다고 하는데 그래도 이후로 과거에 급제해 벼슬한 이들은 계속 나오긴 했다. 이 정보는 후에 단종이 복위되면서 역시 표창되었으며 조선 후기 신료들에게 '가문의 명성을 떨어뜨리지 않았다.'는 평을 받는다.[47] 단종의 충신들을 복권한 정조 또한 정보를 가리켜서 '과연 그 할아버지의 그 손자다.'라고 하며 생육신들보다도 윗 줄에 있어야 할 것이라고 평하였다. 정보에게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과거에 급제해 출사한지 얼마 안 되어 혹독한 신고식을 당해서 사망하고 만다. 후에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자 정보는 그 아들이 살아있었다면 반드시 이 일에 참여했을 것이니 차라리 일찍 죽은 것이 다행이었다고 말했다 한다. 물론 본인도 사육신을 옹호하여 거열형을 당할 뻔했다.
정보의 사위인 이석형 또한 뛰어난 문장가로 고위 관직을 지낸 사람이다. 세조 밑에서 벼슬했고 그의 총애를 받긴 했지만 역시 사육신의 절의를 기리는 시를 남겼다. 정몽주의 친구이자 라이벌 정도전의 증손자 정문형이 아무렇지도 않게 절의를 내버리고 단종을 배신하고 수양대군에게 붙어 평생 잘먹고 잘살며 아무런 업적을 남기지 않은 것과는 너무나도 비교된다...
조선 인조와 효종 때 우의정을 지낸 정유성 또한 정몽주의 자손으로 그 손자 정제현은 효종의 딸 숙휘공주와 결혼하여 인평위가 되었다. 또다른 손자 정제두는 양명학의 거두로써 이름을 떨쳤다.
조선 후기에 종가의 대가 자주 끊어져서 그 후계문제로 여러 차례 조정에서 논쟁이 일어났으며 이와 관련해서 조정대신들이 옛 일을 상고하거나 종손으로 양자입적할 후손들을 물색하였고 왕명으로 양자입적의 예외를 인정하는 등, 중요한 사안으로 확대되었다. 이것은 정몽주가 조선 후기를 지배한 사림파의 비조였기에 그 종가의 후계문제가 정치적인 색깔을 띄게 되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러한 종손의 후계문제를 다른 가문들이 따라하기도 하여 문제가 되었다고 한다.
현재 보이밴드 신화로 활동하고 있는 신혜성[48]이 정몽주의 21대 후손으로 유명하다. 실제로 신혜성의 친가에 포은 정몽주 선생의 서찰 교지가 남아 있는데 '''모두 국보문화재라고 한다'''(...)

6. 제자들


  • 정몽주의 제자 중에 권우라는 인물이 있는데 후에 조선왕조에서 벼슬을 했고 충녕대군이 세자가 되자 그 빈객이 되어 학문을 가르쳤다. 이런 관계로 세종대왕은 정몽주의 손제자격이 된다.
  • 정몽주의 제자 또는 사제(師弟)인 권근은 그 파에 속하여 이성계의 반대파에 섰으나 스승이 이방원에게 피살된 이후에는 바로 이성계 측에 붙어(...) 조선에서 높은 벼슬을 지내고 태종 이방원의 딸 경안공주를 며느리로 들이는 등 권세를 누렸다. 후에 정몽주의 신원을 적극 주장하여 태종이 정몽주를 복권시키는 단초를 마련하였다. 비록 절의를 끝까지 지키지 못했다 하여 후학들에게 변절자로 비난받기는 하지만 외교면에서 공을 세웠고 문필과 학문에 뛰어났다.
  • 변계량 또한 정몽주의 제자로 외교문서를 전담할 정도로 뛰어난 문장가이자 중신이었다. 선대를 모시는 법도를 엄격히 하여 정몽주의 행한 바를 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 세종 시절 명신으로 이름을 남긴 영의정 하연은 그 부친이 정몽주의 옆집에 살았던 인연으로 그에게 학문을 배웠으며 마지막 제자이기도 했다. 그의 강직함에 감탄한 태종이 그의 손을 잡고 치하할 정도였다고 한다.

7. 기타


  • 후에 정적이 되는 정도전과는 동문수학 사이이며 야사에서는 서로를 동심(同心友, 같은 뜻을 가진 벗)이라 부를 정도로 가까웠다고 하며 맹자에 관한 서적을 그에게 주었다고 한다. 이 맹자는 역성혁명을 다룬 서적으로 정도전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런데 정몽주는 오히려 고려 왕조 최후의 보루로서 정도전과 대립했다는 점에서 대단한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정도전은 정몽주를 '도덕의 종장, 문채의 으뜸'이라고 평하였고 항상 '선생'이라고 부르며 존경심을 표현[49]했으며 정몽주 역시 정도전에 대해서 '정생은 막빈에 든 사람 중 가히 으뜸'[50]이라는 내용의 시를 지어 보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는 친우였고 역사적으로는 이상을 부딪히는 정적이었으며 한 사람은 자신의 나라를 지키고 한 사람은 새로운 세상을 열려 했다는 점 등등 인상적인 대비점이 많아서 자주 함께 거론된다. 또한 태종의 집권 이후, 조선의 설계자인 정도전은 간신으로 비하되고 고려의 충신 정몽주는 동방의 성현으로 성균관에 모셔지는 등 후세의 아이러니컬한 평가도 눈길을 끈다.
  • 극심한 반불론자였던 정도전과는 달리 불교를 그렇게까지 배척하진 않았던듯하다. 정몽주는 "삼한에 불교가 바야흐로 유행하니, 왕사성(王舍城)에까지 가서 구할 필요가 있겠나"라고 말할 정도로 불교가 유행했던 사회 환경에 살았기 때문에 불교와 인연을 끊을 수는 없었다. 정몽주가 승려와 자주 접촉했던 시기는 공민왕 5년으로 그의 나이 20세되던 해인데, 이해 여름에 김중현(金仲賢)이란 친한 벗과 함께 책을 가지고 원증국사 보우(圓證國師 普愚, 1301∼1382)를 방문한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따라서 정몽주가 불교의 여러 경전을 통해 불교교리를 접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고 시문을 통해 불교교리에 대해서 이해하고 있음을 드러내기도 했다. 심지어 정도전은 정몽주에게 자중을 바라는 서한을 보낸 일도 있었다.

그러나 정몽주는 결코 유학의 도를 떠나 불교에 탐닉한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그가 한편으로는 불교를 이해하는 측면이 있지만 역시 유자로서 불교를 비판하고 있는 사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공양왕(恭讓王)이 찬영(粲英, 1328∼1390)을 맞아들여 왕사(王師)로 삼으려는 것에 대해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기도 했으며 유,불이 높은 경지에 있어서 서로 통할 수 있음을 한편으로 인정하지만, 구체적 현실을 논할 때 불교는 미흡함이 있으며, 불교처럼 현실을 벗어나 도를 찾기보단 유학경전을 통해 현실 속에서 진리를 찾을수 있다고 보았다. 이런 정몽주의 불교관은 많은 당시 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던것으로 단순히 불교의 폐단뿐만 아니라 불교의 이론적인 부분에 대한 비판으로 나아간 것을 알 수 있다.[51] 불교 사찰을 공격한 유생들을 옹호하며 처벌하지 말 것을 호소하는 상소를 올린 적도 있다.
  • 당대 사람들이 그를 가리켜 왕을 보필할 재주라 하여 왕좌지재라고 칭하였는데, 같은 평가를 받았던 역사적 인물로는 순욱이 있다. 공교롭게도 순욱은 정몽주처럼 당시 무너져가는 후한을 일으키기위해 진력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으며, 조조를 보필하여 권력을 잡았으나 오히려 나중에 가서는 조조의 역심을 알고 이에 대립하다 죽었다는 점에서 많은 부분이 유사하다. 특정 권력가(이성계, 조조)에게 매우 중요한 존재였고, 그 세력의 힘을 통해 무너져가는 나라(고려, 한)를 다시 일으키려는 생각이었으나, 오히려 그 권력가(이성계, 조조)에게 역모의 마음이 있어 이를 계기로 관계가 틀어지고 대립하다 죽음을 맞이하며 후에 결국 왕조가 교체된다는 점까지도 똑같다. 혁명파와 개혁파의 정치 성향이 같아 친하게 지내다가도 어느 순간이 와 혁명파의 본심이 드러나면 서로 갈라지게 되는 숙명인 듯.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왕조를 위해 왕을 버린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친명파였던 정몽주의 입장에서는 친원파인 최영의 말만 듣는 우왕과 그 자식인 창왕을 좋게 볼 순 없어서 그들에게 신돈의 자식이란 굴레를 씌워서 폐위시키고 죽이는데 동의를 했던 것. 위의 내용을 반영한 것인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는 정몽주는 왕조 유지를 통해 성리학적 이념을 지키려 하면서, 수단적 측면에서 현실적이고 냉혹한 정치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시에서 상당히 밀어주는 인물로, 임고면에 위패를 모신 임고서원이 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허가 돼 있다가 1965년에 대충 건물만 복원한걸 2009년부터 증축하여 지금은 상당히 으리으리하게 꾸며놓은 모습을 볼 수 있다. 인근에 있는 면사무소보다 더 크다.(...) 때문에 포항시에서 불편한 기색을 보이기도 했다. 포항시와 영천시는 서로 우리가 포은 선생의 고향이라고 분쟁을 벌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포은 선생의 또다른 고향인 포항시 남구 오천읍 문충리는 오천 읍내에서 꽤 떨어진 한적한 곳이고, 동해고속도로 포항~울산구간 공사 때문에 동네 주민들이 개발에 부정적인 인식이 많았기에[52] 이를 노려 영천시가 포은 유적지 개발을 선점한 것. 영천시에서는 포은 선생의 생가, 임고 서원, 가설 선죽교를 새로 복원했으며 영천에는 포은초등학교와 포은고등학교[53]가 있다. 그리고 포항에는 포은중학교와 포은중앙도서관, 정몽주로가 있다.
  • 묘소가 있는 경기도 용인시에서도 밀어주고 있다. 수지구를 관통하는 국도명이 포은대로이며, 수지구에 위치한 대규모 문화시설인 포은아트홀과 포은아트갤러리가 그의 호를 따서 명명되었다.
  • 김씨 정권의 붕괴를 우려해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를 역사 교과서를 통해 권력에 눈이 멀어 나라를 팔아먹고 고구려 영토를 되찾을 기회를 날려버린 대역죄인이라고 가르치는 북한에서도 정몽주를 고려의 충신으로 강조하고 있다. 비록 김씨 정권에게 충성하라는 뜻이 깔린 것이지만 북한에서도 정몽주의 충심을 인정하고 있는 모양.#
  • 고려사 이색전에 따르면 술에 취하면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주사가 있었다고 한다.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묘살이 3년상을 최초로 이룬 고려 사람이라고 한다.
  • 9살 때 쓴 연애편지가 있는데, 지금봐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글솜씨가 뛰어난 것을 알 수 있다. 9살 당시 외삼촌 이 판서댁에서 머물던 중 한 여종이 전쟁터에 나가있는 남편에게 편지를 쓰고 싶어했는데 글을 몰라서 쓸 수가 없자, 정몽주에게 대신 써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 相思曲(상사곡)
>
> 雲聚散月盈虧 [운취산월영휴]
> 구름은 모였다가 흩어지고 달은 찼다가 이지러지나
>
> 妾心不移 [첩심불이]
> 첩의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
> 緘了却開添一語 [함료각개첨일어]
> (편지를) 봉함하였다가 도로 열어 한 마디 덧붙이는데
>
> 世間多病是相思 [세간다병시상사]
> 세간에서 병 많은 것이 상사 병이라 하더이다.
>
> 정몽주가 9살 때 여종을 위해 대필해준 연애편지, 상사곡

8. 등장한 작품


  • 개국 : 송재호[54]
  • 조선왕조 오백년 추동궁 마마 : 홍계일
  • 용의 눈물 : 정승현[55]
  • 신돈 : 김한
  • 대풍수 : 박준혁
  • 정도전 : 임호. 정몽주(정도전) 문서 참고.
  • 육룡이 나르샤 : 김의성. 정몽주(육룡이 나르샤) 문서 참고.
대하사극 용의 눈물에서 성우 겸 배우인 정승현씨가 정몽주 역을 맡았다. 원로 성우답게 발성이 좋고 무게감 있는 중신으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어서 좋은 평가를 받는다. 또한 이 작품 역시 후대의 작품인 정도전이나 육룡의 나르샤만큼은 아니어도 이성계의 낙마사건을 틈타 이성계의 측근들을 숙청하는 장면과 유약한 공양왕을 대신해 고려 왕조를 이끌어가기 위해 간언하는 장면에서 정몽주가 상당한 정치력을 갖춘 거물급 정치인이었다는 사실이 잘 나타난다.[56] 또한 낙마사건 직후 이성계를 찾아간 자리에서 이성계와 나누는 대화에서 이성계가 "그대와 그 옛날 여진 오랑캐와 북방의 야인들을 쫒던 기억이 생각나는구려."라고 한 말을 통해서 정몽주의 종군 이력이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극 초반에 나오고 역사대로 선죽교에서 살해당하지만 태조 이성계가 임종 직전 꾼 꿈에서 나온 고인들 중 한명으로 나와 이성계를 반기는 쪽과 이성계를 비웃거나 저주하는 쪽으로 나뉘는 상황에서 마지막에 나와 착잡함이 느껴지는 표정으로 이성계를 조용히 바라본다.
2014년작 대하사극 정도전에서는 왕 전문배우로 유명한 임호가 정몽주 역을 맡았다. 처음에는 배우의 나긋나긋한 기존 이미지 때문에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는[57] 평도 있었으나 극이 진행되면서 다른 주연급에 밀리지 않는 무게감을 보여주며 평이 나아졌다. 특히 처음의 순수한 이상을 지닌 선비에서 '''무너져가는 왕조를 지키기 위해 상대와 마찬가지로 괴물로 변모하는''' 모습이 임팩트있게 묘사되었다. 역대 정몽주 역 중 가장 젊고 잘생긴 배우라는 평도 있다.[58] 자세한 것은 정몽주(정도전) 문서 참고.
<용의 눈물>과 <정도전>, <육룡이 나르샤>의 정몽주를 비교해보면 90년대 중반과 2010년대의 정몽주 평가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알 수 있다. 과거에는 강직한 인물로 고려를 마지막까지 지킨 충신 이미지가 강했다면, 최근에는 강직한 인물로 그려지는 것은 맞지만 결국 새 나라를 열려는 세력에 맞서는 최후의 정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 근래들어 정도전이 급진적 개혁가로 재평가되고 있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이에 대한 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의 분석도 있다.‘육룡’ 제작진이 정몽주를 야비한 인물로 묘사한 이유
다만, 진정한 정몽주의 모습은 다 드러난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극에서 정몽주를 다룬다고 하면 위화도 회군~선죽교 피살 사이의 시기, 즉 역성혁명을 막기 위해 고심하는 고려 최후의 충신으로서의 모습을 묘사하는데 집중한다. 반면에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상황에도 필사적으로 나라를 구원하고, 포로를 데려오는 등 여러 업적과 유능한 외교관 겸 행정가로서의 면모는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또한 문신이면서 직접 전쟁터에 나서는 등 복합적인 모습은 KBS 사극 정도전을 제외하면 언급도 거의 되지 않는다. 천재이자 엘리트이면서 유배와 사신행, 조난과 전쟁 참전 등 여말선초의 인물치고도 많은 일화와 복합적인 면모를 가진 인물인데도 새롭게 조명되는 많은 역사적 인물에 비해서 여전히 평면적인 묘사에 그치는 상황.
다만 이게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는 것이, 대개 여말선초의 사극은 주로 이성계 측이 주인공이 되는데 여기서 정몽주가 있는 그대로 나오면 조선 건국의 정당성이 그만큼 떨어지고 주인공이 악역스럽게 인식될 우려가 크기 때문이다. 이것이 제일 큰 모순이다. 정몽주의 일생은 애국과 애민이 두 가지가 공존이고 목숨을 다한 사람이다. 죽을 자리인 것을 알면서도 목숨을 걸고 명나라와의 외교를 성공시키고, 가능성이 거의 없는 일본과의 외교에도 필사적으로 매달려 결국 백성들을 되찾아왔다. 심지어 이는 국가적 일이라기 보다는 정몽주가 거의 개인으로 일구어 낸 일이다.
그 뿐만 아니라 황산대첩에서 이성계와 같이 싸웠다. 비록 전투원이 아닐 지 몰라도 전쟁터에 나가는 것은 목숨을 거는 일이다. 그리고 망가진 조운제도를 되살리고, 청렴한 인사정책 등 마치 소설 속의 주인공 같은 행보다. 그런데 만약 이런 정몽주의 모습이 나와버리면 그야말로 '''"어째서 이런 인물을 죽여가면서까지 왜 조선을 건국한 거야?"''' 라는 모순이 발생한다.
현재까지 이 물음에 명쾌하게 답해주는 작품은 없다.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려면 일단 고려식 재상중심제와는 완전히 다른, 인사권을 쥔 국왕과 권문세족보다 훨씬 넓은 등용문에서 배출된 실무담당 대신, 대신을 견제하는 간관이 각기 균형을 이루는 정도전의 관료제 개혁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이 개혁에 불만을 품고 이방원 쪽에 붙은 고려 구세력들에 대한 설명이 제대로 이뤄져서(쉽게 말해 태조보다 태종이 훨씬 보수적이었고, 태조보다 태종 때 신권이 훨씬 더 강했다.) 고려를 유지하고선 개혁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역설해야 하는데 정도전의 개혁을 무슨 재상이 정치를 다하고 왕은 결제나 하는 걸로 이해하고 이방원을 단순한 왕권주의자로 만들며 그 세력에 대한 이해가 없다보니 전혀 안 되고 있다. 정몽주를 죽이고 벌어지는 것이 바로 왕씨 몰살이다.
한 마디로 이성계와 정도전이 주도해서 왕씨를 무참하게 도륙하는 것인데 정몽주 같은 위인을 죽이고 또 대규모 학살을 벌이는 역사의 모습을 그대로 보이면 우리가 기대하는 권선징악이 사라진다. 그럼 조선을 건국한 것이 무엇인가가 결국 딜레마로 생긴다. 말했듯 정도전의 그런 비전을 설명한다고 해서 정몽주 같은 위인과 많은 인명을 살상한 일이 정당화 되기 굉장히 어렵다. 그리고 오늘날 대중들에게 조선 건국하면 결국 세종대왕으로 귀결 되기에 이성계와 정도전이 보여줄 이런 어두운 면을 납득시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 할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역사적 흐름이나 은폐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다.
사실 정몽주가 추구한 국가체제나 개혁정치는 고려보다는 오히려 조선의 체제와 훨씬 더 어울리는 것이었다. 그런 까닭에 고려 구신들이 모두 반대했던 사전개혁안에서도 정몽주는 혼자서 중간에서 갈팡질팡했다는 기록이 존재하는 것이다. 즉, 심정적으로는 개혁안에 동조하지만 그 개혁에 찬성하면 곧 고려 왕조의 멸망이라 적극 찬성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정몽주와 이성계, 정도전은 본질적으로 같은 국가 체제를 지향했으나, 역성혁명이라는 면에서만 의견이 갈렸다고 볼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계가 끝까지 정몽주를 죽이지 않으려 했던 것도 당연한 노릇이다. 문제는 이런 복잡한 정치적, 체제적 문제는 드라마로 담아내기도 어렵고 시청자들의 원하는 구도도 아니라는 점이다.
여담으로 그가 선지교에서 살해당한 것은 '''백주대낮'''의 일이었는데, 여말선초를 다루는 사극에선 옛날 작품부터 한결같이 분위기를 살리기 위해서인지 야밤으로 각색되었고 이것이 클리셰가 되어 후대 작품들도 그대로 따라하고 있다(...) 백주대낮의 칼부림이었단 사실은 이방원이 여러 의미에서 정몽주 참살을 과시하고 싶었다는 사실을 드러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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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공양왕 2년에 이성계파가 옥사 사건을 주작해 왕을 끌어내리려 했는데 이를 정몽주가 막아내고 자신이 왕당파임을 드러냈다. 이에 왕은 고려조 최고위 품계 "벽상삼한삼중대광"과 함께 백작위를 봉하며 밀어줬다.[1387년] [1388년] [2] 조선 왕조에서 시호 문충공과 함께 추증한 군호. 동시에 조선조 최고위 품계 "대광보국숭록대부" 및 온갖 좋은 직위를 같이 추증했다.[3] 정몽주 선생은 본관이 영일이기는 한데 고향이 영천 임고면이라는 설과 포항 오천읍이라는 설 2가지가 있다. 그래서 영천시포항시는 서로 우리가 정몽주 선생의 고향이라고 분쟁을 벌이기도 했다. 포항에는 정몽주 선생의 호를 딴 '포은'중앙도서관과 '포은'중학교, 정몽주로가 있다. 영천시에는 '포은'초등학교와 '포은'고등학교(원래 금호여고였으나 2014년 남녀공학으로 전환하면서 교명을 변경하였다.)가 있다. 현재 영천이라는 쪽이 우세한 편으로 영천에는 임고서원과 가설 선죽교, 새로 복원한 포은 선생의 생가가 있다.[4] 연일 정씨의 지주사공파의 중시조. 무신정변이 일어나기 전에 막장가도를 달리던 의종에게 목숨걸고 간언한 인물이다. 원래 의종을 보살피고 보좌했으나 의종이 정사를 내팽개치자 이를 간언하다가 결국 왕의 눈 밖에 나자 자결했다.[5] 다만 정몽주와 길재의 관계는 의심스러운데 왜냐하면 정몽주의 문집 어디에서도 길재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정몽주의 제자와 문생들은 다수가 태조~태종에 조선에 출사했기 때문에 여말선초 정몽주의 학통 은거 세력이 학파로 실존했다는 증거가 사실상 없다.[6] 일부 사극 등의 영향으로 세종대왕이 정도전의 영향을 받았거나 그의 사상을 이었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으나 실제 사료에서 이를 뒷받침하는 기술은 존재하지 않는다.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면 세종대왕이 정몽주의 손제자로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편이 맞다. 이외에도 세종대왕 치세의 신하들 또한 정몽주의 학통이 대부분이다.[7] 권근 본인도 태종 때 대신이며 권근의 손자가 한명회와 함께 세조를 옹립하고 훈구파의 대표 인물이 된 권람이다. 변계량은 태종과 세종 때 명신으로 높이 평가받은 인물.[8] 영일은 정몽주의 고향이다. 유배지 또한 상당히 배려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실제 유배지 및 관련 사적은 경남 산청에 남아있어 실제는 달랐을 수도 있다.[9] 다만 정도전의 후손들은 정도전과 무관하게 역적으로 멸문지화를 당하지 않고 대대손손 고관대작을 지냈다. 연산군 때 정도전의 증손자인 정문형이 우의정에 제수될 정도였는데 얼마 안가서 대간의 탄핵으로 물러났다. 그때 대간이 꼬집은 이유도 정도전의 후손이라는 이유가 아닌 50년이나 벼슬하면서 큰 실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정작 정도전 본인은 시체도 제대로 수습이 안됐고 장례는 치렀는지, 묘소는 어디인지 자손들도 모른다.[10] 이 시기에 전체적으로 원균, 광해군, 정도전 등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재평가 이 일어났었다. 이는 직전까지 군사정권 아래에서 대체로 고정된 이미지로 가르쳐진 역사와 인물들에 대해 정치적 입장과 더불어 새로 평가하게 된 경향이 있다. 그 때문에 한동안 이런 흐름이 지속되기는 했으나 다시 연구가 활발해지고 붐이 가라앉으며 객관적 시각이 늘어났다. 원균은 다시 개노답으로 내려왔고 광해군 역시 명암이 뚜렷한 인물이 되었다. 정도전은 드라마로 대표되는 재평가를 이어받았고 정몽주는 후술하는 것과 달리 충신을 넘어서는 능력자로서 평가받고 있다. 결론적으로 1990~2000년대 역사의 재평가와 그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이 자리잡은 시기에 일어난 일들.[11] 현 경상북도 포항시. 이런 이유로 포항에는 관련 사적지가 여러 군데 있으며 포항시립도서관의 이름이 '포은'도서관이었다.[12] 이 바람에 포항시와 영천시는 서로 우리가 정몽주 선생의 고향이라고 싸우기까지 했다. 관련 기사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정몽주 사망 후 나온 나레이션으로 영천에서 출생했다고 나왔다.[13] 東方理學의 鼻祖. '동방에서 성리학(理學)을 최초로 시작한 사람'이라는 뜻.[14] 현재 다자이후 시에 있는 간제온지(觀世音寺)가 바로 당시 정몽주가 머물렀던 곳으로 전해지며 정몽주 본인이 지은 한시도 남아 있다.[15] 1급수씩 밀리기는 하나 이후 조선 초에도 외교, 국방, 내정을 섭렵한 팔방미인이 있었는데 바로 신숙주. 둘은 시호 또한 문충으로 같으나 부귀영화를 버리고 스러지는 고려를 위해 순절한 정몽주와 세종의 눈물겨운 부탁도 저버리고 세조패륜 행각에 동참한 신숙주는 대비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인지 사후의 평가도 정반대[16] 세종대왕의 장인인 심온의 아버지다.[17] 이방원: 이런들 어떠며 저런들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포은선생께서 사직을 지키든 삼봉 스승님께서 건국을 하시든 그들(백성들)에겐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백성에겐 오직 밥과 사는 기쁨. 이거면 되는것이지요. 저 만수산의 칡이 얽힌다 해서 그 누가 탓하겠습니까? 선생께서도 우리와 함께 해서 천년만년 백성을 위하시면 아니되시겠습니까? 정몽주: 나를 죽여 고려를 천년 가게 하려 했으나 고려가 죽고 내가 천년을 가겠구나! 나를 죽이고 죽여 일백번을 죽여보시게. 백골이 썩어나가고 몸뚱아리가 흙이 되어 먼지가 된다 한들, 이 몸 안에 있었던 한 조각 충을 향한 붉은 마음은, 일편단심은 가지지 못할 것이네. 이시중께 전하시게! 고려의 충신으로 죽게 해주어 고맙다고.[18] 이성계의 이복형 이원계의 사위인 변중량이 정몽주의 제자였는데 그가 스승에게 암살계획을 알렸다고 한다.[19] 이 때 같이 죽은 머슴의 이름에 대해서는 여러 이설이 있다. 용씨(龍氏)성의 머슴이었다는 말도 있다. 참고로 용의 눈물에서는 이상인이 배역을 맡았었다.[20] 다만 필자인 이유원은 이에 대해서는 모르는 듯, 이름은 적혀 있지 않다[21] 다만 이건 진심이 아니라 왕이나 독재자들이 흔히 벌이는 양위 쇼였을 가능성이 높다. 고려 왕조를 지키려고 발버둥치던 공양왕도 이성계가 진심으로 은퇴하려는게 아니라는걸 알았기에 받아주지도 않았고.[22] 조선왕조실록 정조 14년에 조견을 제사지내자는 건의에서 나오는 기록.[23] 근데 사실 이 기록을 곧이 곧대로 믿으면 안된다. 왜냐면 이건 조선개국공신인 조견을 고려의 충신이라고 윤색한 과정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에...하여간 그렇다고 하더라도 정몽주의 위상이 그만큼 대단했으며 몇백년이 지난 후대에도 '당시엔 그의 말대로 하지 않으면 곧 역적이나 다름없었다'고 그의 위상을 높게 봤다는 것으로 해석하는게 좋을것이다.[24] 처음 사신으로 왔을 당시에는 태풍에 표류되었다 나중에 구조되었음에도 끝까지 서한만은 지켜내서 인상을 주었는데, 세월이 흘러 정몽주 반대파가 정몽주를 홍무제 손에 죽게 하려고 했을 당시 어떻게든 제 시간 안에 명나라로 도착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홍무제는 보통은 신경도 안 쓰는(...) 문서를 쓴 시기를 보고 당시 정몽주의 상황을 알아차렸으며, 이전의 그 사신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후히 대접했다고 한다. 홍무제는 관대할 때는 관대한 면모를 보이는 군주였다.[25] 우리가 사용하는 횡설수설의 어원이다. 횡으로 말해도 수로 말해도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 없다는 의미이다. 원래 이 말은 언변이 매우 뛰어나다는 뜻으로 사용되었다.[26] 조운제도가 황폐화된 시절에는 각지의 세금이 걷히지 않아 재정에 큰 지장을 초래했다.[27] 훗날 숙종 대의 사육신 복권이나 영조 대의 추증, 두문동의 재발견도 이러한 맥락에서 보아야 할 듯하다. 다만 이 경우는 국왕이 필요에 의해서 써먹었다는 느낌이 매우 강하긴 하다.[28] 택리지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하는데 조선에서 내린 의정부 영의정이라는 벼슬을 새긴 비석은 벼락을 맞았지만 고려의 문하시중이라 적힌 비석은 그대로 몇십년을 멀쩡하게 남아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의미에서는 학맥의 문제이기도 하다. 조선의 극초기를 제외한 거의 전 시기를 점령한 사대부들, 관학파, 훈구파, 사림파의 학맥에서 정몽주는 상당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 특히 정몽주와 비슷한 연배의 인물들이 조선 건국에 부정적이었고 비판도 강했던 데 비하여, 정몽주는 다른 사람도 아닌 태종이 괜찮게 말을 해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밀어줘도 부담이 없었던 케이스이다. 그래서 정몽주의 입지 회복은 엄청나게 빠르다.[29] (당시 정도전의 외조모가 우현보 일족의 종이라는 루머가 돌고 있었기에 더욱 차별받았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30] 그러나 염흥방처럼 변절 후 이인임과 결탁하여 토지침탈과 월권 등의 부정부패와 비리+횡포를 부리는 것도 아니었고, 이색처럼 이런 무리들과 친인척 관계를 맺고 친교를 가지면서 이들의 옳지 않은 행동(최영의 무리한 요동정벌과 북원과의 친교시도를 말리지 않은 것, 토지제도(과전법)개혁을 반대한 것 등등...)을 무조건 옹호하는 것도 아니었다.[31] 참고로 조선 건국 후 정도전은 정몽주 일파인 이숭인, 이종학 등에게 이 방법을 똑같이 행하여 보복한다. 공식적으로는 곤장 100대를 치게 한 다음, 엉덩이뿐만 아니라 몸통 전체를 때려서 죽게 만든 것. 참고로 이숭인의 경우는 그가 특별히 죄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뛰어난 문재를 정도전이 시기해서 죽였다는 기록이 있다.[32] 이는 당시 고려의 상황을 보아야 한다. 정몽주가 죽기 직전 공양왕의 왕권은 이성계보다 못한 수준이었고, 사실 거의 없다시피 했다. 이성계 입장에서는 명분과 정통성, 모양 좋게 선위 받아서 조선을 건국하고 싶었던 입장이었기에 이러한 상황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인데 수틀리면 이성계가 군사로 역성혁명을 일으킬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심지어 이성계가 정몽주를 죽이고 싶거든 언제든 처단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공양왕과 정몽주로서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사직을 지켜내려고 하였던 것이다.[33] 일본은 남조북조로 갈라져서 남북조 시대무로마치 막부의 혼란기를 겪고 있었고, 중국은 원나라의 쇠퇴 이후 명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까지 여러 군벌들의 난립, 왜구홍건적의 난에 정신이 하나도 없던 동아시아 전역을 통틀어서 진 헬게이트였다.[34] 아무리 성리학자라도 여말선초에는 이정도 융통성은 있었다. 가장 꼬장꼬장한 것으로 평가받는 사육신만 해도 계유정난까지만 해도 소극적 참여 혹은 우호적 방관의 위치에 있었다. 이게 끝나는 건 세조가 직접 왕위에 오른 다음이다. 정몽주에 비하면 좀 더 완고해진 것이지만, 조선 후기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인식과 실제 역사적 인물들의 행동은 차이가 있다.[35] 실제로 KBS 드라마 정도전에선 직접 정몽주의 입을 빌어 이런 해석을 피력하고 있다.[36] 태조가 망나니 방석을 세자로 세우고, 그의 이복형들을 제거했다면 역사는 또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먼치킨 태종도 그렇게 적장자계승을 중시해서 개망나니 양녕을 왕위에 세울'''뻔''' 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태종-세종으로 이어지는 환상라인은 우연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다.[37] 정확히 말하면, 폭정을 할 권한도 없었지만.[38] 또한 태종은 정몽주의 서출손녀를 자신의 며느리로 삼았으며 정몽주의 아들 정종성에 대해서도 태종의 측근과 마찰을 일으켰을 때 그를 두둔하면서 비교적 약한 모습을 보였다. 정몽주 암살에 찬동했던 그의 형 정종도 정몽주의 손녀를 며느리로 삼으며 후대했다. 이를 볼 때 정종과 태종은 정몽주를 암살하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싫어하지 않았으며, 나름대로 책임감을 가지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정몽주는 아버지와 젊은 시절부터 친해서 자연스럽게 알고 지냈을 것이다.[39] 조선왕조실록에도 공식적으로 언급된 이야기이다.[40] 이러한 관점에서 정몽주는 이성계가 최씨 정권같은 무신집권체제를 노리는 정도로 평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있다.[41] 용인시 기흥구 마북동 소재.[42] 조선의 명문인 연안 이씨[43] 정말 장난 아니게 번창했다. 연안이씨 약 70개의 파가 되는 판사공파에서 단 5개 파를 제외한 나머지 파들은 다 이사람의 후손들이다[44] 혹은 후실이지만 정보가 단종과 연루된 일로 첩으로 강등되었다는 얘기도 있다.[45] 한명회의 정실부인도 아닌 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외명부 1품 정경부인이었다고 한다.[46] KBS2에서 방영되었던 북한사극 사육신에서 정종성의 얼녀와 한명회의 관계에 대해서 어느정도 각색해서 그렸다. 극 중 정종성의 얼녀는 ‘정소연’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이복오빠 정보와 친분을 가졌던 성삼문을 연모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명회는 당시 개경에서 경덕궁지기를 하고 있었는데 정보를 필두로 한 개경 사대부들에게 고작 경덕궁지기따위라면서 욕을 있는대로 다먹자 정보를 엿먹이고자 하는 차원에서 정소연을 다짜고짜 납치해버린 것. 납치하고 나서 비록 겁탈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한 집에서 하룻밤 지낸 걸로만으로 이미 정소연은 한명회의 첩으로 낙인찍힌지 오래여서 결국 연모했던 성삼문과 이복오빠 정보에게마저 버림받아 결국 기생이 되버리는 처지가 된다. 그래도 실제 역사와 달리 한명회의 첩이 되진 않는다.[47] 이게 그냥 보기에는 별로지만 사실은 엄청난 평가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가문의 명성이란 정몽주를 가르키는데 정몽주가 받는 평가를 생각하면 실로 어마어마한 평가.[48] 신혜성은 예명이며, 본명은 정필교로 포은공파 22세손 '教'자 항렬이다.[49] 꼭 그렇지만은 않았고, 정도전이 정몽주에게 사적으로 보낸 서신에서는 격의 없이 자인 '달가'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정도로 허물없는 막역지우였던 사이였다.[50] 이 당시 정도전은 이성계의 막료가 되어 막 함흥으로 나아가는 때였다. 즉 이성계의 사람들 중 정도전만한 사람이 없다는 뜻.[51] 출처 : 여말선초 사상적 패러다임의 전환 탐구, 정성식.[52] 고속도로가 통과하는 산이 마을 선산이었던지라 묘소가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53] 이전에는 금호여고였으나, 남녀공학으로 변경되면서 이름을 바꿨다.[54] 용의 눈물에서는 태종의 장인이자 세종대왕의 외할아버지 민제 역을 맡았다.[55] MBC 특기로, 1961년에 데뷔한 원로성우.[56] 참고로 정도전이 천출이라는 이유로 관직에서 내쫒고 유배보내는 것 역시 그대로 나왔다.[57] 이것은 대중들의 정몽주에 대한 인식이 고려에 대한 일편단심을 끝까지 지킨 노신의 이미지가 강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극중에서 정몽주는 이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상을 펴보려고 하는 젊은 선비의 모습이니 마냥 어울리지 않다고 하긴 힘들다.[58] 영정을 봐도 알겠지만 그렇게 미남형은 아니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