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왕자의 난

 



1. 개요
2. 여타 명칭
3. 사건의 성격
4. 발생 원인
4.1. 태조의 후계자는 누가 될 것인가
4.1.1. 구세력과의 결별?
4.1.1.1. 반론
4.1.2. 말자상속?
4.2. 간과한 것
4.3. 예방책?
4.4. 정도전의 대명강경책과 군제개혁
5. 쿠데타의 전개와 결과
6. 여타 기록 왜곡
6.1. 왕자 살해 음모는 실존했는가?
7. 태조의 병환
7.1. 태조 병환 조작설
7.2. 반론
8. 사극에서


1. 개요


봉화백 정도전·의성군 남은과 부성군 심효생 등이 여러 왕자들을 해치려 꾀하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형벌에 복종하여 참형을 당하였다.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1398) 8월 26일 기사 1번째 기사.[1]

조선 초, 태종 이방원이 왕자 시절에 일으킨 난.

2. 여타 명칭


무인년(戊寅年, 1398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인정사(戊寅靖社)라고도 하며, 이방원이 주도하여 일으킨 난이라고 하여, '방원의 난'이라고도 한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음력 8월 26일에 있었던 일이다. 여기서 정사란 사직을 안정시켰다는 뜻. 삼봉집에서는 '공소(恭昭)의 난'이라는 표현도 보이는데, 이는 이 난으로 살해된 무안군 이방번의 시호 공순(恭順)과 세자 이방석의 시호 소도(昭悼)에서 한 글자씩 따서 부른 표현이다.[2]

3. 사건의 성격




신덕왕후 소생 방석을 세자로 삼고 사병혁파 등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한 것에 대해 신의왕후 한씨 소생인 왕자들과 방계 종친들이 불만을 품고 일으킨 쿠데타이다. 흔히 이방원의 난으로 알려져 있으나 참여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과 방계 왕족들이 태조에게 반기를 든 왕실 내분이다.
이성계의 막내동생 이화, 이성계의 조카 이천우(이성계의 이복형 이원계의 아들)와 조온(이성계 누이의 의붓아들), 3남 이방의, 4남 이방간, 사위 이저(경신공주의 남편)와 그의 아버지 이거이 등이 자기 휘하의 사병들을 이끌고 적극 가담했고 장자 진안군 이방우의 아들이자 장손인 이복근도 이방원을 지지했다.[3] 주요 친인척들 중 참여기록이 없는 사람은 차남 이방과뿐이다.[4]
이 난의 얄궂은 면은 조선 건국 몇년 만에 왕족끼리 피를 보는 것도 있지만, 태종이 10년 전 아버지의 위화도 회군 때 인질이 되거나 보복용으로 살해될 위험에 놓이게 된 계모와 이복동생들을 구해줬는데, 10년이 지난 후 계모와는 완전히 틀어지고, 이복동생들을 자기가 직접 죽이게 됐다는 점이다.

4. 발생 원인



4.1. 태조의 후계자는 누가 될 것인가


1392년, 조선이 건국되었을 때 태조는 이미 50대 후반이었고 왕위를 물려줄 후계자를 생각해야 될 나이였다.[5]
'''왕후'''
'''아들'''
'''생년'''
'''개국 당시 나이'''
'''비고'''
신의왕후 한씨
진안군 이방우
1354
38
배제[6], 개국 공헌
영안군 이방과
1357
35
실질적 장남, 개국 공헌
익안군 이방의
1360
32
개국 공헌
회안군 이방간
1364
28
개국 공헌
정안군 이방원
1367
25
개국 공헌
문안군[7] 이방연
1370?
-
사망[8]
신덕왕후 강씨
무안군 이방번
1381
11
-
의안군 이방석
1382
10
-
당시 태조의 아들들을 살펴보면 장남 이방우[9], 차남으로 훗날 정종이 된 이방과, 셋째 이방의, 넷째 이방간, 다섯째로 훗날의 태종인 이방원, 여섯째로 이미 요절한 이방연, 일곱째 이방번, 여덟째 의안대군 이방석이 있다. 방연까지가 개국 이전에 사망한 신의왕후 한씨 소생의 아들이고, 방번과 방석은 신덕왕후 강씨 소생의 아들이다. 세자 책봉 당시 이방번은 11세, 이방석은 10세로, 당시 이방과가 35세, 이방원이 25세였으며 여섯째 이방연이 살아있었다면 20살 이상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므로 신의왕후 소생의 아들들과 나이 차이가 심했다.[10] 이미 장성해 있던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은 요절한 방연을 제외하면 크건 작건 다들 개국과정에 참여해서 일정한 공을 세웠다.
일반적인 적장자 계승 원칙을 따른다면 이방우가 세자가 돼야 했을 것이고 나름 문과 급제자일 정도로 능력도 출중했지만, 그는 다소 석연치 않은 이유로 국초부터 탈락했다. 청해백집을 근거로 고려왕조에 충절을 보이다가 폭음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잘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개국 후에도 나름대로 활동이 있기 때문에 그보다는 조선 건국에 반대한 이색의 손자를 사위로 들였고 조선 역사관 상으론 신돈의 손자였던 창왕의 즉위에 공헌한 바 있어 공양왕 즉위 이후 정치적 문제로 배제된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이방우 문서 참조.)
어쨌거나 이방우는 고려왕조에 대한 충절인지 적장자임에도 배제된 울분 때문인지 조선 개국 직후인 1393년에 사망해 버린다. 방우가 생전에 가졌던 '적장자'로서의 위상은 방우의 아들 이복근 대신 차남 이방과에게 내려가 방우의 후손들은 정치실권에서 완전히 배제된다.[11][12] 방우 문제는 그렇게 일단락 되었지만 여전히 걸리는 게 있었다.
그리고 세자는 가장 막내인 이방석으로 결정되고 이는 쿠데타의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4.1.1. 구세력과의 결별?


태조는 고려로 귀순해 중앙정계로 들어가는 과정에서 정계 실력자들을 필두로 한 고려 지배층과 적극적으로 혼인관계를 맺었다.
  • 맏이 방우는 지윤의 딸과 결혼했고 이색의 손자 이숙묘를 사위로 들였다. 이색은 고려말 정계와 학계의 구심점으로 창왕을 옹립하고 이성계에 맞섰던 인물이다. 게다가 방우는 이색과 함께 (조선시대 역사관에선 신돈의 손자인) 창왕 옹립에 참여했다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13][14]
  • 2남 방과는 증문하좌시중(贈門下左侍中) 김천서(金天瑞)의 딸과 혼인했고 지윤의 두 딸을 첩으로 들였다.(숙의 지씨, 성빈 지씨)
  • 3남 방의는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최인두(崔仁㺶)의 딸과 혼인했는데 최인두는 동주최씨로 바로 그 최영과 인척관계에 있다.
  • 4남 방간은 증문하찬성사(贈門下贊成事) 민선(閔璿)의 딸과 혼인했다.
  • 5남 방원은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 민제(閔霽)의 딸과 혼인했다.
  • 6남 방연은 예문관대학사(藝文館大學士) 민제(閔霽)의 딸과 혼인했다. 민선과 민제는 모두 여흥민씨(황려민씨)로 재상지종으로 불린 유력 권문세가다.
  • 7남 방번은 공양왕의 조카사위다.
즉, 신의왕후 한씨 소생 다섯 아들과 방번은 모두 고려 구세력(심하면 왕족)과 혼맥을 중심으로 이어져 있었다.[15] 이러한 혼맥은 변방무장 출신 태조가 중앙정계에 순조롭게 연착륙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지만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를 개창한 이후엔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겐 정치적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해석이 있다. 막내 아들 방석만이 고려 구세력과의 접점이 없었다.[16]
해당 문단의 논리는 애당초 전제 자체가 틀린 것이 오히려 신의왕후 한씨는 태조 이성계가 변방의 장수였던 젊은 시절의 향(鄕)처이고, 오히려 신덕왕후 강씨야 말로 이성계가 개경에서 출세를 위해 나중에 맞이한 경(京)처일 가능성이 큰데[17] 고려의 구세력과의 단절과 같은 의도가 있었더라면 오히려 신덕왕후의 소생이 아닌 신의왕후의 소생으로 후사를 잇도록 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덕왕후의 어린 아들을 세자로 책봉했던 것은 오히려 개경의 기존세력을 의식했다고 정 반대로 해석할 수도 있다. 오히려 그렇게 보는 편이 훨씬 자연스럽다. 애당초 태조 이성계가 아들들을 통해 개경의 유력가문들과 적극적으로 혼맥을 맺으려 했던 자체가 그가 얼마나 그들을 포섭하고 싶어했는지를 나타내고 있다.

4.1.1.1. 반론

공양왕 조카 사위인 이방번은 혼인관계가 문제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18] 하지만 다른 아들들은 그렇게 단언하기 힘들다. 신의왕후 소생들이 권문세가에게 장가를 들었다면 이방석은 아예 권문세가의 외손이라 딱히 명분 면에서 우월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곡산강씨의 원류인 신천강씨 집안은[19] 원 간섭기에 새롭게 일어나 권문세가도 아닌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진짜배기 명문가였다.[20]
게다가 바로 위에 나왔듯이 세자의 친위세력으로 이성계가 밀어준 이방번과 이제 역시 구세력 걸고 넘어지면 할 말 없는 사람들이었다. 한쪽은 공양왕의 조카사위고 한쪽은 이인임 조카다. 이방석이 설령 처가를 부유 심씨 집안으로 갈아치운들 여전히 구세력과 혼맥으로 얽혀있는 점은 변하지 않는다. 만약 일각에서 주장하는 대로 유씨에게 누명을 씌워 폐출시키고 이방석의 처가를 갈아줌으로서 구세력과의 결별을 도모할 수 있었다면, 고작 한 살 차이 형 방번 역시 그리 할 수 있었다. 누나 경순공주도 마찬가지로 이혼시키고 다른 신흥 신진사대부 집안의 매형을 만들어주는 것이 이런 목적 설정에 훨씬 부합했을 것이다. 물론 그런 움직임은 전무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요인은 방석이 왕의 총애를 한몸에 받고 있는 현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아들이라는 점이었다. 신의왕후 한씨는 조선 건국 1년 전에 사망했고, 건국 후 절비(節妃)란 시호를 내려 어느 정도 예우를 갖추긴 하였으나 죽은 신의왕후의 권위가 현 국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현 왕비인 신덕왕후를 뛰어넘을 순 없었고 집안 면에서도 안변 향처와 개경 경처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심지어 태조 대에는 그녀에게 왕후의 시호를 내리지도 않았으며[21] 태조 2년 한씨의 3년 상이 끝나고 잔치를 베푸는 것을 마지막으로 그녀에 대한 태조의 예우는 끝났다. 반면 개국 직후 공신들이 태조를 위해 잔치를 열 때 동시에 공신부인들이 강씨를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에서[22] 알 수 있듯 강씨의 권세는 공인되어 있었다.[23]
실제로 실록을 보면 먼저 태조가 신덕왕후의 첫 아들인 이방번의 세자 책봉을 밀고, 정도전을 포함한 신료들이 이를 반대하다가 결국 배극렴이 총대 메고 나서서 이방번 대신 이방석을 세자로 책봉할 것을 건의해 일이 마무리된다.[24] 태조의 머릿속에서는 애초에 고려왕실과의 연계성 문제는 고려조차 되지 않았던 것이다. 심지어 이방번을 세자 후보에서 배제한 표면적 이유가 '성품이 경솔하고 방탕해서'였던 것을 보면 태조도 이 문제를 지적받고 적잖이 당황했던 정황이 보인다. 만약 보다 치밀한 계획과 준비 하에 이방번을 배제시켰다면 이방우의 사례처럼 보다 그럴듯한 미담을 꾸며 이방석의 책봉 명분을 구축하는 것이 바람직했을 것이다.[25]
결국 태조에게 우선적으로 중요했던 것은 자신의 성공을 뒷바라지해준 사랑하는 신덕왕후의 소생을 세자로 올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동북면 촌놈 출신인 이성계가 개경에 자리를 잡고 고려 최고의 권신에 이어 왕 자리까지 오르는 데는 경족 처가인 곡산 강씨 집안의 조력이 절대적이었을 수밖에 없으며, 그 곡산 강씨 집안은 이성계에게 귀한 딸을 내준 것만이 아니라 이성계의 사촌누이들[26]에게도 연달아 장가를 드는 등 전주이씨 가문의 개경 진출에 그 누구보다도 큰 힘을 주었으니 적어도 신덕왕후가 살아 있는 한은 차라리 큰왕자들을 숙청하면 숙청했지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삼아달라는 신덕왕후, 나아가 곡산강씨 가문의 요구를 절대로 거절할 수 없었다.

4.1.2. 말자상속?


일각에는 막내아들을 후계자로 삼는 말자상속 풍습이 있는 유목 민족, 즉 여진족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특히 이성계의 전주 이씨 집안은 대대로 이런 경향이 강했는데, 이안사 이래 쌍성 전주 이씨 가문은 이자흥 이전까지 계속해서 적장자나 차남이 아닌 4남 이하의 아들이 쌍성의 천호직을 이어왔다는 점[27]은 이러한 주장에 더욱 힘을 실어 주었다. 핵심은 과연 이방석의 세자 책봉이 유목민의 말자상속 원리에 부합하는가? 하는 점이다.
말자상속의 핵심은 장자부터 재산을 분배받아 먼 땅을 개척하고, 말자에게는 마지막으로 남은 본가를 물려준다는 데 있다. 다만 이것도 정말 문자 그대로 무조건 애송이 막내한테 지위를 때려박아주는 게 아니라 가장이 죽은 시점에서 집에 남아있는 아들들 사이에서 경쟁하는 쪽에 가까웠다. 따라서 실제로는 문자 그대로 막대 아들은 아니고 전체 형제 가운데 중간 약간 아래 정도 순위에 있는 아들이 가문을 물려받는 경우가 많았다. 이 원리에 따르면 말자가 물려받은 본가는 쭉정이만 남은 상태에다가 더 이상 확장할 곳도 없으니 오히려 독립해나간 형들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도 많았다.[28][29][30] 그런데 그 본가가 한 국가의 왕실이 된다면? 무슨 밑천을 떼어주든 본가를 물려받는 게 장땡이다. 이 때문에 몽골제국도 초창기에는 아들들을 이리저리 외지로 보내 정복왕조를 세우도록 해줬지만 그게 한계에 다다른 이후에는 장자부터 말자까지 동등하게 제위에 도전하는 쪽으로 갔다. 처음부터 반농반목 체제였던 여진족의 금나라는 화북왕조화 된 이후 대체로 장자상속을 따랐다. 다만 만주족의 청나라는 정복왕조들 중에서도 유독 장자가 아닌 차순위 황자에게 황위를 잘 물려준 케이스인데, 이쪽은 주로 택현(澤賢)의 논리로 후계자를 지명했고, 만주의 한+몽골의 대칸+중화의 천자(+티벳의 보호자)라는 복잡한 청제국 황제위의 특성상 후계자의 능력을 최대한 고려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게 지명되어 즉위한 황제가 강희제-옹정제-건륭제이니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31]
이러한 점들을 보면 당시 갓 10대에 접어든 이방석을 지명하는 것은 유목민의 상속제도에 비춰봐도 크게 무리수였다. 성리학을 근본 이념으로 삼는 중앙집권국가 조선에서, 그것도 왕실에서 큰아들에게 무슨 밑천을 마련해줘서 독립시키겠는가? 혹은 이방석이 무슨 근거로 택현을 내세우겠는가? 이성계 이전의 사정을 보면 이행리의 경우 형들이 이미 원 조정에 출사하여 벼슬을 했고, 이춘은 동복형 이송이 고려 숭록대부였던 것을 봐서 쌍성을 떠나 고려에 출사했던 것으로 보이며, 이원계 또한 이자춘의 귀부 이전에 이미 고려에서 음서로 벼슬길에 올라 과거에 연이어 급제하는 등 일찌감치 쌍성을 떠나 있었다. 즉 큰아들은 중앙에서 벼슬살이를 시키고 집안에 남은 아들들 중에서 서열이 높은 쪽에게 쌍성 천호직을 물려주는 것이 이성계 집안의 말자상속방식이었는데, 사실 이성계가 고려 귀부 이후 동북면, 즉 옛 쌍성 전역을 개인 영지 수준으로 다스리게 되어서 그렇지 과연 쌍성 총관도 아니고 천호직이 원이나 고려 중앙조정의 벼슬보다 값나가는 자리인지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결정적으로 유목민족도 장남에게 떼어줄 거 없으면 집안을 줬다.
애초에 전주 이씨 가문 자체가 쌍성 시절 내내 고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끝까지 여진이나 몽골족에게 동화되지 않았다. 익조 이행리는 아예 고려계라는 이유로 여진족 천호들에게 다굴당해 쫓겨났을 정도고, 이후로도 고려에게 귀부하는 그 순간까지 전주 이씨 가문의 기반은 고려계 주민집단이었으며, 줄기차게 고려계 집안끼리 통혼해왔다.[32] 큰아들을 출사시킬 수 있을 때는 어떻게든 벼슬살이를 시키려 했지만, 그렇지 못할 때는 오히려 이자춘의 형 이자흥처럼 원 조정으로부터 직접 적장자 인증을 받아 집안을 이었으며 이자흥 사후 이자춘이 어린 조카 이천계를 제치고 천호 벼슬을 꿀꺽(...)하자 이자춘 사후 이천계가 적장자임을 이유로 이성계를 죽이고 가주 지위를 돌려받으려 하기도 했다.[33] 이성계는 아버지와 함께 공민왕에게 귀부할 때부터 고려인을 자부했고 고려인 대우를 받기 원했으며, 여진족 티를 내지 않고 철저히 개경의 중앙귀족으로 정착하려 하였기 때문에 유목민 풍습은 설령 있다 해도 척결 1순위였다. 이성계가 개경으로 나온 이후에는 고려 귀족으로서 형제간의 서열과 가문의 후계구도가 확실하게 정착되어서 장남 방우가 개경의 대귀족인 전주 이씨 가문의 차기 당주로서의 특권으로 음서로 벼슬에 나아갈 수 있었고, 차남 방과 또한 이미 동북면 영지와 가별초를 물려받을 군사 방면의 후계자로서 아버지에게 군인 수업을 받고 있었다.[34] 더구나 조선 건국을 주도한 세력이 사대부 중에서도 공민왕 이래의 급진 반몽주의자들이었던 것만 봐도 몽골유목민의 말자상속제를 여염집도 아니고 다름 아닌 세자 책봉에 적용한다는 것은 재고할 가치가 없다.
그보다는 이성계 집안의 내력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우선 이행리는 두만강변 여진족 천호들에게 밀려난 뒤 안변의 최씨집안에게 후원을 받아 천호 자리를 되찾고 최씨 여식을 계실로 들여 정실의 자식들을 제치고 최씨의 아들인 이춘을 후계자로 삼았다. 또 본인부터가 출중한 능력을 기반으로 먼저 고려에서 벼슬살이하던 이복형 이원계를 제치고 사실상 전주이씨 가문의 당주 노릇을 하고 있었다.[35] 큰아버지 이자흥이 계모와 싸워가며 천호 자리를 물려받은 사례가 있긴 하지만 이것도 이자흥 사후 자기 아버지가 자기 사촌형을 제끼고 자리를 물려받았다. 즉 적장자 계승이 원칙적으로는 맞기야 하지만 확실한 뒷배가 그 원칙보다 낫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며, 특히나 이행리가 최씨에게 그랬듯이 자신의 개경 정착과 성공에 강력한 힘을 보태준 현 중전 강씨의 요구는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여기에 대신들이 단순히 적장자 원칙만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공이 있는 왕자까지도 후보로 언급하고 있으니, 더더욱 굳이 장자는 아니어도 된다는 발상까지 더해졌을 것이다.
어쨌든 문제는 조선이 유목제국이나 봉건국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37] 게다가 태조가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에게 취한 태도는 토사구팽으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많았다. 왕자들과 고려 구 세력의 딸들을 혼인시켜 중앙 정계에 진출했으면서도, 정작 새 왕조가 세워지자 왕자들을 권력의 중심에서 내치려 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한양 천도 직후 신덕왕후가 사망하면서 세자의 배후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다. 살아있는 현 왕비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이 어머니 신덕왕후의 사망으로 사라지면서 이복형들과 다를 바 없게 된 것이다. 태조는 일부러 그녀의 능 정릉(貞陵)을 도성 내, 그것도 광화문 바로 남쪽에 조성하고 원찰로 흥천사를 창건해 강씨의 존재감과 권위를 유지해 세자의 권위를 지키려 했다. 또한 세자빈 심씨를 현비로 책봉하고 방석과 현비 사이에 아들이 태어나자 왕손의 개복신 초례(開福神 醮禮)를 세자전 남문에서 거행해 태조 - 세자 - 왕손의 후계구도를 공고히 하려 했다. 그러나 왕손이나 세자나 아직 어렸고 신의왕후 때와 마찬가지로 죽은 사람의 권위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4.2. 간과한 것


태조나 공신들이 막내를 세자로 만들었을 때는 나름대로 명분(현존 왕후의 자식)은 있고 재상 중심 정치를 만들기 위한 정도전의 구상[38] 때문에 결정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나중에 큰 혼란을 만들어낸다.
공신 측에선 현 왕후의 자식이 세자가 되어야 한다, 왕이 결정했다는 명분을 가지고 있었고, 마찬가지 방과, 방원 등도 불평하거나 반발하는 순간 불충으로 찍힐 수 있어서 일단 따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안의 분노와 실망은 절대로 지울 수 없었다.
아무리 태조에게 자신만의 명분이 있다 해도, 조선이 건국되고 제왕학이나 역사를 배웠다면 막내에게 물려주다가 멸문당한 문벌군웅, 동생이 태자 책봉 직전까지 가서 그 반동으로 친족을 약화시킨 황제[39] 등 장자상속을 지키지 않아 혼란의 시대가 온 사례가 수도 없이 많았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이미 한국사에서 이성계와 똑같이 자수성가하여 무력에 기반해서 나라를 세우고 장자를 무시하고 후처 소생을 후계자로 세우다가 쿠데타로 모든 것을 잃은 견훤이라는 반면교사가 있었다. 아무리 봐도 막내를 책봉한 건 엄청난 리스크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 ① 모든 권위의 시작과 끝 - 신덕왕후
세자에게 가장 확실하고 빠른 정통성 부여 수단이 왕과 왕비의 자식이란 점인데 공인된 조선의 초대 왕비 신덕왕후의 적자라는 시선으로 보면 방석의 세자 책봉은 이상할 게 없었다. 동복형 방번에겐 아주 치명적인 결격사유(공양왕의 조카사위)가 있었기 때문. 문제는 신덕왕후가 한양 천도 이후 사망해 버린 것. 다른 그 어떤 이유보다 신덕왕후의 죽음이 무인정사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동복형이 몇 명 있던 종법상 왕자들의 어미인 신덕왕후가 멀쩡했으면 서자 운운하는 말이 나올 수 없었고 쿠데타 자체가 발생할 수 없었다. 신덕왕후가 사라지고 그 권위를 유지하기 위한 태조의 노력도 한계가 자명했기에 방석의 입지는 급격하게 위태해졌다. 이건 방석의 불행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데 신덕왕후는 사망 당시 고작 40세였다. 이성계의 맏아들 이방우보다 어리고 이방과보다 겨우 1살 많던 그녀가 그렇게 일찍 세상을 떠날 줄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하지만 한 걸음 더 들어가자면 이것도 그렇게 완벽한 장치만은 아니었다. 다시 말하지만 그의 큰아버지 이자흥과 아버지 이자춘은 모두 적장자임을 내세워 계모의 집안인 한양조씨를 이겨먹은 바가 있었다.[40] 그때도 이춘의 계실 한양 조씨는 첩 따위가 아니라 당당한 후처였고, 한양 조씨 집안은 다름 아닌 쌍성총관을 지내는 집안인지라 상대적인 파워 면에서는 오히려 조선이라는 한 국가 내에서의 곡산 강씨 집안보다 강력하면 강력했지 부족하진 않았다. 하물며 신덕왕후는 차남(사실상 장남) 방과와는 1살 차이밖에 나지 않으며 야심만만한 방원과도 11살 차이에 불과하니 웃어른으로서의 권위도 작정하고 뭉개려면 얼마든지 뭉갤 수 있었다. 또한 정실 왕비/대비는 단순히 존재만 한다고 권위가 생기는 것이 아니며 왕비/대비를 구심점으로 외가가 후계자를 단단히 받쳐줄 때 비로소 제대로 된 권위를 발하는 것인데,[41] 분명 신덕왕후는 곡산강씨-진주강씨라는 명문가 출신이었고 실제로 이성계의 성공에도 막대한 힘을 보태주었지만 정작 그녀의 친인척들은 아래에서도 살펴보듯이 신덕왕후 생전에도 신극례 남매처럼 방석의 후계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 ② 형들이 많은데 막내가 되었다.
고려 권문세가를 처가로 둔 다섯 이복형들 중 적어도 이방우, 이방과, 이방원은 똑똑하고 능력있으며 개국 과정에서 공헌을 했음에도 다 제쳐지고 막내가 세자가 되었다. 일개 여염집이라고 해도 만약에 아버지가 재산을 나눠줄 때 같이 뼈빠지게 일하고 같이 고생한 아들들을 제쳐두고 아직 애교나 부리는 어린 막내에게 재산을 많이 물려주면 당연히 화가 날 수밖에 없고, 아버지 사후 싸움이 일어날 가능성이 대단히 크다. 더군다나 그 막내가 어머니가 다른 후처의 자식이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다. 하물며 차기 국왕의 자리인 세자 자리이고, 시기가 매우 민감한 건국 초기라면 불만과 혼란이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건국 초기인 만큼 왕조의 정통성 확보가 중요하다는 점을 생각해본다면, 장자도 아니고 건국공신도 아닌 방석은 신덕왕후의 아들이라는 점을 감안해도 정통성이 한참 부족했다. 능력이라도 가장 출중했다면 모르겠으나, 능력 면에서는 아버지 이성계를 뛰어넘은 먼치킨인 이방원이라는 형이 있었으며, 방과, 방간 등도 방석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절대 못나지 않았다.. 신덕왕후가 살아있었을 때는 살아있는 정비의 아들이라는 명분에다가 생모인 신덕왕후가 직접 보호해줄 수 있었지만 신덕왕후가 죽자마자 이 보호막이 사라져버린 것.
다만 첫 번째 리스크와는 달리 세자를 폐위시키려면 명분이 있어야 했는데, 바로 적장자를 놔두고 서자를 옹립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이방원 측은 이성계 사후에 신덕왕후에 대한 예우를 아예 후궁격으로 격하시켜버린다.[42] 그리고 이 역시 명분이 있었던 것이, 이성계의 이복형인 이원계를 서장자로 만들기 위해 이자춘의 정실이었던 한산 이씨를 첩으로 격하시켜버렸던 것이다. 게다가 5형제의 어머니인 안변 한씨 역시 정식 왕후로서의 대우를 못 받고 그저 절비의 시호로 때워버렸으니 정종이나 태종으로서는 아버지 생전에 신덕왕후를 강등시키지 않은 것만으로도 할 도리는 다 했다고 강변해도 이상하진 않은 일이었다.
사실 이성계 생전에도 이방원은 죽은 신덕왕후를 제대로 예우하지 않았지만 될 수 있으면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완전히 격하시키진 않았다.[43] 그 결과 태조 사후 편찬된 태조실록에서는 일관되게 이방석을 '서자'라고 칭했지만, 그 실록조차도 모든 사실을 완전히 갈아엎는 것은 불가능했는지 신덕왕후는 줄곧 왕비 자격으로 적어놓았으며 이방석 책봉 당시 태조가 행사한 영향력도 가감없이 적어놓았다.

  • ③ 납득할 만한 책봉의 근거가 없다.
2번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방번, 방석은 1381년, 1382년생이라 조선이 세워질 때 겨우 10살쯤밖에 안 되었다. 반면 이복형들은 달랐다. 관직에 오래 머무른 방우, 아버지를 따라 여러 전투에서 활약한 방과, 그리고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 아버지의 가장 큰 정적인 정몽주까지 살해하며 조선을 세우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방원 등은 개국 공헌에 힘쓴 형들이었다. 업적을 생각한다면 방원을 세자로 안 세우는 게 이상할 정도였고, 비록 정몽주를 독단적으로 암살한 일로 이방원이 태조에게 찍혔다손 쳐도[44] 실질적인 적장자이자 경험도 풍부한 방과가 있었다. 하지만 태조는 이를 무시하고 방석을 세자로 삼은 데다가 그 명분을 제공하지도 못했다. 방석이 형들 다 제치고 황제가 된 강희제처럼 다섯 살 때부터 책을 읽으면 바로 암송하는 무서운 재질을 보여주기라도 했으면 모를까[45] 딱히 그런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이는 고생한 자식들을 홀대하고 새엄마의 자식만 편애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었다. 아무리 태조가 무섭더라도, 섭섭함과 실망감은 감추기 어려웠다.
방석의 어린 나이가 그나마 강점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이라면 그나마 어린 나이부터 유교적 제왕학을 학습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태조는 본인이 무장 출신이라 제대로 된 제왕학 교육을 받지 못했고, 안 그래도 신왕조에 대한 여론이 우호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의 후계자는 보다 체계적인 준비를 거쳐 즉위하기를 바랐을 테니 어린 방석에게 여기에 대해 나름대로 기대가 컸을 것이다.[46] 더하여 든든한 빽들도 있으니 조금씩 정치적 경력을 쌓아주면 되리라고 생각했겠지만 일단 태조 본인이 세자책봉 당시 이미 환갑으로 인생의 말년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그렇게 시간이 많지는 않았다.[47] 게다가 태조실록이 아무리 태종 시대에 간행됐다는 점을 고려해도 이방석은 세자로서 딱히 정무 경험을 착착 쌓아올린 흔적도 보이지 않고,[48] 오히려 장군들과 궁밖에 나가 남의 집 가축을 쏴죽이거나, 궁 안에 창기를 들이거나, 공부를 싫어하고 놀아제끼려 해서 태조가 친히 놀려고 해도 못하게 하라고 엄명하는 등 여러 모로 말썽을 일으켰다.[49][50] 이방석이 죽을 때는 만 16세로 오늘날에 대면 고1 정도의 어린 나이이긴 하지만 당대 사회 수준을 생각하면 태조와 정도전 일파가 집중관리해준 세자로서는 여러모로 부족해보인다.[51] 그게 아니라면 세종조에 했던 것처럼 세자와 대군들 사이의 예법을 확실하게 정한다거나 하는 사전작업이라도 했어야 하는데 이조차도 없었다.

  • ④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한다.
만약 초장에서 추측한 대로 이방석의 세자 책봉이 고려 구세력과의 결별이라는 이상이라도 제시했다면, 적어도 기존 고려 권문세족에 환멸을 느끼던 지방 출신의 신진사대부들에게는 상당한 호응을 얻을 수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달라서, 이방석의 세자책봉은 그냥 이도저도 아닌 무리수로 전락해버렸다. 방석의 어머니인 신덕왕후야말로 전통의 명문가인 곡산-진주 강씨 집안이며, 인맥으로 이성계를 고려 중앙귀족 사회에 안착시켰다. 결국 향처의 아들로 권문세족과 혼인한 큰아들들 vs 권문세족 외가를 두고 신진사대부와 혼인한 막내아들의 구도에서, 후자가 딱히 전자에 비해 전왕조 시대의 유산에서 자유롭다는 근거는 전무했다. 그나마 처가는 족칠 수라도 있지 어머니의 후광으로 어거지로 왕위에 오른 막내 이방석이라면 오히려 외가를 비롯한 구 권문세족을 싸고돌면 싸고돌았지 숙청한다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했다.[52] 게다가 이방석 본인은 심효생 집안에 다시 장가를 들었다손 쳐도 여전히 그의 친형수는 고려 왕실 사람이고 그의 매형은 이인임의 조카였으며 이 둘은 이방석 옹위라는 명분으로 상당한 권한을 부여받았다. 정도전 진영의 선택을 받았다는 정도를 제외하면 이방석을 둘러싼 인적 구성은 개혁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다.
특히 성리학을 전면에 내세운 신진사대부들의 입장에서 봤을 때, 왕이 설령 구체제와의 결별이라는 이상적인 목표를 제시한다손 쳐도 적장자상속을 강조하는 성리학적 종법을 깡그리 무시하는 - 그것도 가장 모범을 보여야 할 왕실이! - 이런 후계지명을 마냥 지지하는 것은 무리였다.[53] 여기에 조강지처인 절비 한씨에 대한 예우 문제나 세자의 외가 문제까지 겹치니 결과적으로 당대의 그 어느 누가 보든 간에 이방석의 세자 책봉은 그저 젊은 계비 신덕왕후와 정도전 일당의 야합이며 이성계의 오판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었다. 만일 이방석의 책봉이 구체제와의 결별이라는 이상이라도 제시했으면 무인정사에 대한 소장파 신진사대부들의 반발이 적지 않았을 것이고, 그랬다면 이방석 친위세력의 핵심이었던 정도전의 준복권[54] 역시 먼 훗날에야 실현되었을 것이며, 새로 집권한 이방원은 인재풀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55] 하지만 현실은 태조가 직접 칼 빼들고 나선 것 이외에 딱히 이방석의 살해에 직접적으로 불만을 표출하는 움직임은 나타나지 않았고, 오히려 이방원은 동생들을 죽이고 아버지를 제낀 패륜을 저지른 것 치고는 너무나 수월하게 정권을 장악했을 뿐만 아니라 무인정사 당시 이래저래 반대파로 엮여서 하옥되거나 처벌된 이들도 나중에 은근슬쩍 중앙에 복귀해 벼슬살이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귀양갔던 순녕군 이지 같은 경우는 복귀해서 영의정까지 해먹고 졸기도 써줬다. 심지어 이방원은 수많은 공신들을 이래저래 숙청하면서도 능수능란하게 신진세력을 등용하여 이후 세종 시기 관학파의 전성시대에 토대를 닦아주었다.

  • ⑤ 적이 너무 많다.
1~4의 요소가 합쳐진 결과, 결국 정치적 고려에 의한 이방석의 세자책봉은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을 정점으로 하는 왕실 종친 세력과 권문세족 출신의 공신세력을[56] 동시에 적으로 돌리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태조와 신덕왕후 일가 및 정도전 일파를 제외한 조선 중앙기득권층 전부를 상대해야 한다는 소리다. 조선 건국의 주역이 신진사대부라지만 정도전처럼 정말 지방에서 올라와 어렵게 공부해서 사대부의 반열에 합류한 사례는 손에 꼽을 정도였고 오히려 조준, 권근, 민제, 김사형 등등 한가닥하는 집안 출신 사대부들이 수두룩했으니 이게 얼마나 거대하고 무모한 시도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특히 조준은 이로 인해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간에 정도전하고 완전히 틀어져버렸다. [57][58] 위에서 구세력과의 결별이라는 목표는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하기는 했지만, 문제는 이방석을 후계자로 옹립하기로 결정한 직후 이들의 행보는 분명히 큰왕자들에 대한 토사구팽 그 자체였다는 것이다. 결국 태조나 정도전이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간에 큰왕자들과 혼맥으로 얽힌 권문세족 출신들에게는 자신들의 미래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읽힐 수밖에 없었다.[59] 여기에 초강경파 정도전 일당[60]이 정국을 주도하고 각종 강경책이 봇물을 이루면서 결국 주류를 차지하는 권문세족 출신들은 이방석 즉위 이후의 상황을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처럼 적이 많을 때의 기본 전략은 모름지기 적의 적은 나의 편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일례로 막내가 즉위한 순치제 사례를 보면, 왕위 계승의 경쟁자들이 서로 극한 대립으로 치닫다가 결국 정치적 타협의 산물로 가장 만만한 막내를 후계자로 세우고 권력을 적당히 갈라먹은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61][62] 순치제 모델이 홍타이지의 급서라는 특수한 조건 하에서 성립된 것이긴 하지만, 보다 핵심적인 요소는 상호 견제의 결과 권력의 분점에 대한 합의에 있다. 즉 방석의 친위세력은 납득하기 어려운 세자책봉에 대하여 어떻게든 반대급부를 제공함으로서 불만을 누그러뜨리거나, 반대세력의 두 축인 큰왕자들과 권문세족 출신 공신들을 분열시키든가 해야 하는데 실제로는 권력의 분점은 고사하고 반대세력 탄압에 열을 올리며 어그로만 만땅을 끌면서 큰왕자들과 공신들의 일대 야합을 오히려 촉진시켜버렸다. 특히 조준, 김사형 같은 대신들은 반정 당시까지만 해도 과연 붙어줄지 말지 미지수 그 자체였지만 정작 일이 터지자 별 다른 밀당조차 없이 너무나 수월하게 반정진영에 합류해버렸다.
명분은 없고 적은 많으니 방석의 친위세력은 무리수를 남발했다. 초장부터 명확한 설명도 없이 세자빈 유씨를 폐출시켜버리더니[63] 제후국 주제에 왕자들의 분봉이라는 신박한 삽질을 시도하는가 하면, 급기야 세자의 가장 든든한 후견인이어야 할 신덕왕후가 급사하자 도성 내, 그것도 왕궁 코앞에 묘를 쓰는 초유의 편법이 터졌다.[64] 목숨걸고 명 사신행에 자원해 외교분쟁을 잘 봉합하고 돌아온 권근에 대해 무리한 탄핵을 시도했다가 사대부들의 지지를 잃는가 하면, 이미 자신들이 반대를 넘어 아예 항명에 이은 정변까지 일으켜버린 바 있는 요동 정벌을 재추진하고 이를 빌미로 사병혁파를 강압적으로 실행에 옮겼지만 정작 인력풀의 부족으로 가장 경계해야 할 종친들을 대거 진도(진법)훈련에 동원하면서 오히려 거병의 기회를 조성해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이런 무리수는 결국 신덕왕후의 조카인 상장군 신극례마저 이숙번과 그의 수하들을 유숙시켜가며 무인정사에 참여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오죽하면 신극례의 여동생이 대놓고 이모인 신덕왕후에게 "방원에게 돌아갈 자리가 방석에게 갔으니 큰일이 날 것이라고 일갈할 지경이었다. 즉 방석을 가장 지지해줘야 할 그의 외가 쪽 친척들마저 등을 돌릴 정도였으니 얼마나 민심이 돌아섰는지 알 만한 일이다.[65]
이렇게 사방이 적인 상황에서 어떻게든 우군을 만들어주려다보니 자연스럽게 동복형인 이방번에게 차츰 권한이 몰리게 되었다. 아래에서 보듯 좌군절제사가 되어 매형 이제와 함께 삼군부를 맡는가 하면 사병혁파 때에도 이방번만은 사병의 유지를 허락받았다. 문제는 이방번에게 힘을 실어주면 해결되는지와, 이방번은 확실히 방석의 편인지의 여부였다. 우선 이방번이 방석보다 형이라고는 하지만 고작 1살 많을 뿐이다. 즉 삼군부 좌군절제사가 된 태조2년에 그는 고작 13살. 매형 이제가 정몽주 암살모의에 참여했을 정도로 나이가 좀 있긴 했지만[66] 이래가지고서야 권위고 뭐고 이방원을 위시한 신의왕후 소생들, 종친들 입장에서는 반발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동복과 이복을 떠나서 동생에게 지위를 뺏긴 형이라는 입장은 이방번이라고 다르지 않다는 것도 문제다. 아닌 게 아니라 이방원 역시 이복동생들 다 죽여놓고 났더니 다시 동복형과 칼을 맞대지 않았는가? 다시 언급하겠지만 실록에 따르면 이방번은 나름 세자위에 대한 욕심이 있어서 이방원이 난을 일으킨것을 알고도 딱히 세자 편을 들지도 않고 그냥 관망만 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어차피 태종 정권의 입장에서 자기들이 방석과 도매금으로 살해한 방번을 굳이 억울한 방관자로 만들어 줄 이유가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기록의 신빙성은 절대 낮지 않다. 어쩌면 태조가 기껏 신의왕후 소생의 아들들을 이러저리 쳐내가며 방석의 승계를 준비해놨더니 막판에 가서 이방번의 난이라는 초대형 통수를 맞았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4.3. 예방책?


태조도 이에 대한 걱정을 안 한 게 아니라서 나름대로는 예방 조치에 심혈을 기울였다. 국초 왕자들과 사위의 군호를 정하면서 이들의 절제사(節制使) 임명도 병행해 친위군사력을 재편성했는데 이때 이방과와 이방번, 이제가 함께 의흥친군위절제사(義興親軍衛節制使)로 임명되어 친위군의 중추가 되었다. 이방번과 이제야 세자의 동복형과 매형에게 힘을 실어주어 세자의 입지를 강화하겠다는 조치였고 개국에 공을 세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도 아예 모른 척 할 순 없으니 정치적으로 입지가 좁아진 방우 대신 적장자가 된 방과를 대표로 중임을 맡긴 것이다. 이 조치 이후 10일 뒤에 방석이 세자로 책봉되었다.[67] 신의왕후 소생의 다른 왕자들에겐 중앙의 군권 대신 지방의 지휘권이 주어졌다. 이성계에게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동북면의 가별초 지휘권은 이방원에게 잠시 주어졌다. 태조 3년 정도전의 군제개편 제안으로 각 도에 절제사를 두고 종실이 이를 맡게 할 때[68] 방번이 넘겨받는다.(방원은 전라도 절제사로 전임) 이성계에게 동북면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면 결국 세자 방석의 위상을 확고히 하겠다는 의미였다.[69]
더불어 왕자들을 지방 절제사로 전임시키면서 아예 지방으로 내보내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시도도 있었다. 실록에 따르면 정도전 일당은 환관 김사행을 사주하여 왕자들을 아예 제후처럼 분봉시키는 방안을 밀어붙이려 했으나 태조가 답을 안해주고 오히려 정안군에게 하도 말이 많으니 조심하라고 넌지시 일러주었다고 한다.[70] 사실 고려식 외왕내제도 아니고 대명 사대를 국가전략으로 채택한 주제에, 또 성리학적 중앙집권국가를 지향한 주제에 왕자들의 분봉책을 시도한 것은 무리수에 지나지 않았다. 또한 아예 중앙에서 벗어난 왕자들이 지방군을 이끌고 도성을 공격한다면 이 또한 죽쒀서 개주는 꼴이다.[71] 왕자들의 지방행이 좌절된 정도전은 이후 요동정벌과 이를 구실로 한 사병혁파 정책을 추진한다.
그러나 정도전 일파에 대한 불만, 사병혁파와 요동정벌 등 급진정책에 대한 반발은 태조의 예상 이상으로 거세었다. 사병혁파와 요동정벌을 위한 군사 징집은 반대파로서는 자신들의 수족을 자르려는 것으로 생각되었고, 실제로 이방원의 경우 신덕왕후에 대한 경계심까지 합쳐져 사병혁파를 계기로 목숨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정도전은 분명 출중한 인물이지만 정치적 능력은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정몽주나 하륜이 중앙에서 치열하게 부대끼며 정치가 뭔지 몸으로 체득할 때 정도전은 지방에 유배되어 그런 경험을 전혀 쌓지 못했다. 힘을 가진 1인자에게 사상적 기반을 제공해주는 것과 직접 똥물에 몸담그는건 전혀 다른 문제인데 이 부분에서 사형 정몽주나 경쟁자 조준, 하륜보다 서툴렀다. 그래서 건국 이전에는 2인자 자리를 홀로 차지하지 못하고 조준과 나눠야 했고, 조준의 전제개혁 때 전혀 끼어들지 못해 존재감이 낮아졌다 교우관계(이숭인, 권근)를 단절하며 척불정책을 강행해야 했다. 그의 정책들은 건국 초기 필요한 것이었지만 너무 급진적으로 전개한 데다, 반대파의 반발을 너무 강경하게만 대처했기에 그 불만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했다.

4.4. 정도전의 대명강경책과 군제개혁


이렇게 세자 문제로 혼돈의 폭풍이 휘몰아치는 와중에,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발표한다. 당시 조선과 명은 표전문 사건 등 외교문제로 인한 사신 억류 등의 문제가 터지면서 골이 깊어지고 있었는데[72] 이 때 표전문을 짓는데 참여했던 권근은 태조가 따로 부르지도 않았어도 스스로 찾아가서 '저도 표전문 사건에 관련되어 있으니 제가 가서 직접 해결하겠습니다.'라고 하며 자원해서 명에 갔다왔다.[73] 권근의 노고로 일은 잘 처리되었고 권근도 황제(주원장)에게 대접까지 융숭하게 받으며 성공적으로 귀국했다. 하지만 정도전과 그 파벌은 일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온 권근을 사헌부를 통해 탄핵해버렸다. 이유는 정총 등 표전문 관련으로 억류된 이들 가운데에 홀로 살아 돌아왔다는 것. 물론 태조는 '만리 길 마다 않고 자원해서 일 처리하고 온 권근에게 상은커녕 무슨 탄핵이냐?' 라며 씹어버렸다. 결국 정도전은 이에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민심과 사대부의 지지만 잃어버렸다.[74] 물론 그렇다고 태조가 그를 버리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표전문 사건이 마무리된 후 정도전은 이참에 아예 요동을 공격하여 명에 본때를 보여주자는 과격한 모습을 보였고 그를 위한 군사 개편까지 기획했다. 그리고 그 첫발로 공신과 종친이 보유하고 있는 사병들을 회수하여 조선의 중앙군을 강화하는 '사병 혁파'를 추진한다.
하지만 그의 사병 혁파 시도는 말처럼 쉽지 않았다. 애초에 이성계 본인이 사병을 가지고 왕이 된 만큼 이를 모두 혁파하려면 사병의 준동을 진압할 수 있는 훌륭한 관군이 확보되어야 가능하다. 그런데 당시 조선의 중앙군이라곤 본래 함흥의 이성계 일가에게 충성하던 직속 가별초들이었다. 이들이 함흥과는 아무 인연이 없는 정도전이나 이방번에게 복종하여 다른 전주 이씨 문중 인사들을 가차없이 적대할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또한 함흥 출신 왕자들과 문중의 종친이 보유하는 사병들 또한 본래 가별초였기 때문에 이성계의 지휘 아래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수많은 주변 이민족들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역전의 용사들이다. 이들은 일반 사병보다도 더 특정 가문에 대한 사병화의 정도가 심각했기 때문에 모시는 주군들이 극구 반대하는 관군으로의 강제편입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당장 사병 몰수 대상 리스트에 있는 이지란이 가별초의 실질적 2인자, 이방과가 가별초의 차기 수장이었는데, 아무리 1인자의 위세를 빌린다 한들 낙하산 문신 정도전과 큰마님을 밀어낸 후실의 막내아들이 가별초에 발휘할 수있는 영향력은 한계가 명백하지 않았겠는가.

물론 사병혁파는 필요한 정책이었지만 당시 실행자가 당시 신권정치 실현을 빌미로 정계의 온갖 어그로란 어그로는 다 끌고다니던 정도전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정도전은 이러한 사병혁파를 추진하면서 당연하게도 공신은 물론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과 왕실 종친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특히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은 안 그래도 세자 책봉 문제로 골이 깊은 상황에서 이러한 발표가 나오니, 자신들의 수족이 잘린다는 생각을 넘어서 정도전이 기어이 나라를 뺏고 자신들을 모조리 죽여버리려고 수작을 부린다며 이를 갈았다.
게다가 사병혁파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요동 정벌도 오히려 역효과만 불러일으켰다. 조선 건국세력이 본격적으로 고려를 뒤엎은 시발점이 위화도 회군이었기 때문. 이미 두 번의 요동 정벌이 모두 별 소득 없이 끝난 마당에, 조건은 오히려 더욱 불리해진 상황에서[75] 추진되는 요동 정벌은 그다지 지지를 얻을 수 없었고, 요동 정벌에 명분이 없으니 이를 명분삼아 추진되는 사병혁파도 자연히 명분을 잃었다. 특히 태조조차도 요동 정벌을 크게 지지하지 않는 상황에서 정도전만이 이리저리 날뛴다는 것이 어떤 그림으로 보여졌을지는 누구도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심지어 친정도전, 친이방석파로 분류되는 남은, 이제, 이방번, 유만수, 이무, 이지, 정신의조차 태조 7년 8월 진도강습 태만 처벌대상자 명단에 들어있을 정도인 것을 보면 정작 이방석의 친위세력들이 요동정벌에 열성적이었다고 보기도 어렵다.[76][77]
여기에 형평성이나 제대로 맞췄으면 모를까, 방석의 동복형 방번에게는 상당한 규모의 사병을 유지하도록 해주면서 대놓고 사병혁파의 목적이 방석 반대파에 대한 견제에 있음을 인증해버렸다. 자연히 요동 정벌의 진짜 목적에도 의심을 가질수밖에 없는 상황이 조성되었다.[78] 이런 배경을 생각해보면 종친모해죄라는 발상이 거저 나온 것은 아니며, 의외로 당대 사람들에게도 그럭저럭 말이 되는 논리로 받아들여졌을 가능성도 적지 않다.

5. 쿠데타의 전개와 결과


기본적으로 실록의 내용 자체와 당대 문집과 증언들이 하나로 일관되지 못하고 전부 제각각이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 알기 어렵다. 반군의 병력이 많았다고 하기도 하고 적었다고 말하기도 하며, 전투가 있었다고 하기도 하고 없었다고 하기도 한다. 박위가 이방원의 군세를 살피러 갔다가 잡혀 죽었다고 하기도 하고, 난전 중에 전사하였다고 하기도 한다. 김사형과 이무 등은 미리 포섭된 것인지 아니면 나중에 투항한 것인지 알 수 없다.[79]
일단 거사 당시부터 이방원에게 합류한 지휘관급 인원은 지안산군사 이숙번, 전 평안도 병마도절제사 이거이, 전 충청도 도절제사 조영무, 상장군 신극례 등이었다. 지안산군사 이숙번은 안산군 병력을 동원했을 것이며[80], 왕자들을 진법 훈련에 투입해가며 열을 올리던 시기인지라 상장군 신극례나 각 왕자 및 종친들이 훈련시키던 각 진의 병력만 족히 네자릿수는 동원이 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실록의 표현을 따르자면 시위패를 폐한 지 10여 일이 지난 시점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중앙군으로 편입된 각 집안의 가병들이 옛 주인들에게 달려와 합류했을 가능성이 높다.
객관적 기록으로 보자면, 이숙번, 하륜 등은 확실히 반군 편에 서서 군대를 지원했고 이화, 이천우 등 많은 종친들이 참여했다. 이천우는 특히 정도전이 살해된 이후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입궁하려다가 정안군 측에서 일을 벌인 것을 알고 바로 합류해 왜 자신한테는 미리 말 안 해줬냐며 불평하기도 했다. 정도전, 남은, 심효생, 장지화, 이제, 유만수, 변중량 등이 살해되었으며 왕씨 학살에서 겨우 빗겨났던 개성 왕씨들도 다수가 죽임을 당했다. 다만 하륜은 기록을 보면 8월 초 충청도 관찰사로 부임하여 내려가 있다가 거사를 전후하여 단기로 서울에 올라와 이방원 지지선언을 하고 후속 병력이 올라오는 것을 기다렸던 것으로 보인다.[81] 정도전에 이은 신권 2인자 조준은 점쟁이를 불러 누가 이길지 점을 쳐보고 반란군이 이긴단 점괘가 나오자 왕도 세자도 아닌 정안군 이방원에게 끓어 엎드렸다.[82]
신덕왕후 소생의 세자 이방석과 무안군 이방번 또한 살해되었다. 특히 이방번은 당시 유일하게 사병 보유가 허가되어 이방원이 거병 초반에 찾아가 합류할지를 물었는데, 이방석이 제거되면 자신에게 세자 자리가 오지 않을까 하는 계산으로 대답 없이 그냥 집안에 들어가 드러누웠고 결국 죽음을 맞이했다. 아이러니한 것이 이방원은 태조가 위화도 회군을 일으켰을 때 신덕왕후와 두 이복동생이 고려 조정에 의해 인질이 되거나 보복 살해를 당하지 못하게 구해줬는데, 신덕왕후와는 척을 지고, 두 이복동생은 자기가 죽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사실 정몽주를 죽인 직후에도 이방원이 신덕왕후에게 왜 자신의 편을 안 들어 주냐며 하소연할 정도로 서로 믿고 의지했다는 것을 보면 참 씁쓸한 일이다.[83][84]
태조의 사촌동생인 순녕군 이지는 난이 터진 당일 신덕왕후의 오빠인 강계권, 보성군 오몽을, 지중추원사 정신의, 대장군 강택, 정도전의 아들 정진 등과 함께 순군옥에 갇혔다가 귀양살이를 한다. 친형 이방번조차 이방석을 돕지 않은 마당에 이 사건에서 아마도 유일하게 이방석 편으로 기록된 왕족일 것이다. 사실 그는 도조 이춘이 후처 조씨 사이에서 낳은 아들 이완자불화(李完者不花)의 아들로, 완자불화가 이자춘과 천호직 승계를 놓고 원 조정까지 개입하는 개싸움을 벌였던 걸 생각하면 이자춘의 후손들로서는 꽤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런데 졸기를 보면 그가 어려서 부모를 잃자 이성계가 잠저로 불러 키우다시피 했다 하니 그야말로 태조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곁에서 함께 머리가 굵어지며 커 온 이지란이나 이화가 어쨌거나 이방석 편을 들지 않은 것과 비교되는 부분. 이후 태종이 즉위한 뒤 그를 불러서 다시 요직을 맡기니 영의정에 영돈녕부사까지 승진하다 천수를 누리고 죽는데, 졸기에서는 무인년에 어떤 사건에 연좌되어 귀양갔다고 대충 넘어가버린다. 그리고 67세에 57세 과부와 재혼을 하는 전대미문의 스캔들을 일으켰다. 재혼 상대인 낙안 김씨는 심덕부와 함께 신도궁궐조성도감판사로서 한양 천도를 총괄한 김주의 딸이었고 개국공신 조준의 조카며느리로 나름 명문가의 자손인 데다 전남편 소생의 자식도 있었다. 당연히 전남편의 자식들은 이지를 넘어뜨리는 등 극렬하게 재혼에 반대했지만 결혼을 막지는 못했다. 그래도 재혼 생활은 행복했던 듯 하다.
이직은 원래 제거 대상에 있었으나 종으로 위장하여 목숨을 건졌다[85]. 영안군 방과는 아버지의 쾌유를 위한 제사를 준비하다 반란 소식을 듣자마자 달아나 숨었고, 익안군 방의와 회안군 방간은 실록 묘사를 빌리면 말도 없이 뛰다가 자빠지기까지 하면서 열렬히 반란에 호응했다. 이방우의 장남이자 이성계의 적장손인 봉녕군 이복근은 이방원 편에 붙어서 공을 세우고 봉녕부원군의 작위를 얻었다.[86]
궁궐수비대 총지휘관 박위 또한 살해당하고 공동으로 지휘를 맡았던 조온은 반군에 합류했다.[87] 궁궐 내 다른 곳의 수비를 맡았던 이무도 조온이 투항하고 박위가 죽었단 소식을 듣자마자 투항했다. 특기할 만한 것으로 궁궐 오위군 중 하나인 호분위의 군사 전원이 이성계 가문 가별초(사병)들이었다는 것. 이들은 이성계의 지휘 아래 황산 대첩, 개경 탈환 작전, 나하추 전투, 이오르 티무르 전투 등에서 승리한 당시 조선 최고의 정예부대였다.
오랜 세월 동북면에서 이성계 일가에 충성을 바쳤던 가별초들이라면 태조가 직접 내린 공격명령이나 태조가 시해될 정황이 없는데 자기들이 도련님으로 모셨던 동북면 출신 왕자들에게 칼을 빼들고 대항할 의지도, 필요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동북면 출신 왕자들이 주축인 반군도 전심전력으로 자기 가문의 정예 사병들과 적대할 계획은 없었을 것이다. 가별초를 포함한 수비대 전원을 전멸시킨다면 피해가 심할 것은 자명했기에 미리 지휘관들을 포섭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오히려 가별초들은 동북면 도련님들이 내세우는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냐, 정씨의 나라냐?"라는 구호에 누구보다도 쉽게 동조가 가능할 세력이었다. 실제로 이방원은 즉위한 후 이 때의 일을 가리켜 "무인년에 입직하는 갑사가 갑옷을 버리고 달아났으니, 이것이 서얼을 도울 것이 아님을 안 것이다."라고 하여 당시 궁궐수비군의 투항으로 일이 쉬웠음을 시사하고 있다.[88]
그렇게 보면, 반군이 공성전을 하지 않았을 것이고 궁궐에 입성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당일 현장을 지휘하던 박위는 이미 궁궐 내의 다수가 사전모략을 했거나 포섭됐다는 것을 파악하고 전투의지를 상실해 투항했을 것으로 보인다. 아니면 아예 조온, 이무 등에게 포로로 잡혔을 가능성도 있다. 박위, 조온, 이무 등이 이끌던 지휘부 군대가 모두 투항한 후, 궁궐 내 다른 곳을 지키던 나머지 잔존 부대도 전세가 꺾였다는 걸 알고 투항, 모두 무장해제 당한 후 집으로 돌려보내졌다고 한다. 그렇다면 실록에서 묘사되었듯 전투가 거의 없었다는 것이 납득이 간다.
또한 다른 방어군은 가별초를 포함한 대군과 대치했다는 것만으로도 사기가 빠르게 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다만 위에서 보듯 반군 측 자체 군세도 결코 적지는 않았을 것이다. 불확실한 숙위군 지휘관들과의 밀약만 믿고 일을 진행할 순 없으니까. 실록에선 세자 이방석이 연이어 줄지어진 병력을 보고 놀랐다는 듯한 기록이 있다. 계유정난처럼 정말 세력이 약한 상황에서 주저하는 사람들 걷어차 가며 일을 벌였다기보다는 사전에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쿠데타였다.
난이 일단락된 후, 이방원이 도평의사사를 소집해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을 중심으로 상황 정리 뒤 신하들이 태조에게 정도전, 남은, 박위 등이 역적이라 죽였다는 문서에 서명을 요구하자 이름을 적고는 토하려다가 그리하지 못하고 "목에 뭐가 걸린 것 같은데 넘어가질 않는다."라고 말하며 울었다고 한다.
1차 왕자의 난으로 이방원은 단번에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2차 왕자의 난도 불만분자의 돌출행동에 가깝고 별다른 위협조차 되지 못했다.[89] 1차 왕자의 난으로 태조 이성계는 상왕이 되어 실권이 없어졌고 새로 왕이 된 정종도 별다른 실권이 없었다.[90] 반면 이방원은 실권을 쥐고 세자가 되어서[91][92] 공식적인 왕위 계승권자가 되었고 측근들이 조정을 장악했다. 보통 이런 경우 있을 법한 반대 세력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고 왕위 등극 후 가장 큰 위협인 조사의의 난조차 초기 진압에 성공했다.[93]
반면에 태조는 쿠데타 한 번에 너무나 쉽게 무력화 되고 말았다. 여러 면에서 판박이인 견훤의 경우 견신검은 쿠데타 후에도 쉽게 정부를 장악하지 못했다. 신검의 쿠데타는 견훤에 충성하는 이들을 숙청은커녕 군대를 맡겨서 전쟁터에 끌고 나올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기반이 취약했다. 견훤이 고려로 망명 후 고려군을 이끌고 쳐들어왔을 때 후백제의 중신들은 견훤을 보고는 별다른 저항없이 투항했다. 후백제의 우군을 이끌던 견훤의 사위 박영규는 아예 전투가 시작되면 깃발을 바꿔 달기로 약조까지 한 상황이었다.[94] 하지만 왕자의 난은 쿠데타 과정에서 중신들과 왕실 친인척의 지지를 받았고, 당일에 이복동생인 세자를 폐세자한 후 살해하는건 물론이고 이성계의 손발이 될 측근을 모조리 참살해버리고 빈자리에 자기 사람들을 심는 데 성공했다. 덕분에 궁궐에 고립된 이성계는 이방원에게 변변한 반격 한 번 못해봤고, 결국 몇년을 벼르고 별러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서야 그나마 칼을 뽑아볼 수 있었다. 건국 왕이라는 권위가 있음에도 최측근만 정리되자 중앙에 고립된 건 막내의 세자 책봉과 연이은 큰 왕자들의 토사구팽이라는 무리수와, 그로 인한 이들과 혼맥, 인맥으로 연계된 주류 사대부들의 엄청난 지지를 잃었다는 반증이다.

6. 여타 기록 왜곡


1차 왕자의 난에 관해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왜곡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이는 1차 왕자의 난에 대한 기사가 실린 태조실록이 반란의 주동자인 태종 시절에 편찬되었기 때문이고, 실록 편찬 멤버들 또한 직간접적으로 1차 왕자의 난에 가담한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실록에는 이방원의 군사들이 무기가 없어 서로 창을 쪼개어서 들었다고 하고 또 이숙번이 거느린 장사 2명과 기병이 10명, 보졸이 9명에 여러 군의 종자와 노복 10여 명이 동구 앞에 진을 치고 있었다고 한다. 어디서 수십명으로 나라를 엎었다는 구라를 치냐고 펄쩍 뛰는 이들이 많은데, 이들은 일단 정안군과 왕자들을 경호하기 위해 궁문 바로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인원 정도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거짓말은 하지 않았다 정도. 어차피 같은 기록에서 광화문에서 남산까지 병력이 쭉 늘어서 있었다고 함께 밝히고 있으며, 원경왕후 민씨가 몰래 병장기를 준비하여 거병을 도왔던 사실도 몇 차례에 걸쳐 언급된다. 이방원이 마냥 많은 병력을 처음부터 거느렸다고만 보기도 어려운 것이, 공식적으로 사병이 몰수된 마당에 여전히 대대급 이상의 사병을 몰래 육성하고 있었다면 이방석의 친위세력이 이를 감지하지 못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정도전이 맥없이 선공을 허용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결국 쿠데타측은 최초에 저 수십명 수준의 경호 인력과 이숙번의 안산군 병력 외에 직접적으로 손에 쥔 병력은 없었고, 거사 직후 동원한 병력은 대부분 몰수되어 재편된지 얼마 안되는 사병 출신의 중앙군과 포섭된 친위군을 주력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95]
당시 경복궁 숙위병 사령관은 이방석이었는데, 당연히 이에 대처를 하려고 했지만 저항을 못했다. 숙위병의 수가 적어 중과부적으로 밀려서 변변한 전투 한 번 치르지도 못하고 제압당했든지, 아니면 숙위병들마저도 칼을 거꾸로 잡았든지, 그도 아니면 숙위병이 대처하기도 전에 반란군이 들이닥쳤을 것이다. 여하튼 이방원 측에서 적지 않은 병력을 동원해 급습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정도전의 최후에 대해 실록에서는 정안대군 이방원에게 목숨을 구걸하다가 처형되었다고 나와 있으나 이 역시 왜곡되었을 공산이 크다. 자세한 얘기는 정도전 문서를 참조할 것.

6.1. 왕자 살해 음모는 실존했는가?


실록에서는 정도전이 왕자들을 태조의 병을 핑계로 궁으로 불러들여 죽이려 하자 이를 눈치채고 역관광시킨 것으로 서술했으며 이것이 이른바 종친모해죄의 직접적인 명분으로 제시되었다. 심지어 이후로도 잊을만하면 "무인년에 태상왕이 아프시자 정도전 일당이 적자들을 쳐 없애려" 했다는 기사들이 몇 번씩 나온다.
이후 월탄 박종화의 세종대왕이나 이를 기반으로 한 용의 눈물, 후의 정도전 등에서 모두 이를 따랐지만[96][97] 실제 그랬는지는 의문이 남는다. 아무리 정도전이 당대의 알아주는 권신이라지만 명색이 다른 종친도 아니고 태조의 친아들들을 죽이는 일을 태조의 윤허도 없이, 그것도 궁 안에서 저지른다면 그 정치적 파장은 만만치 않은 일이고, 특히 왕자들과 이리저리 얽힌 구파 공신세력들의 반발을 진압하자면 사실상 친위쿠데타 수준의 후속행동이 필요한데 정작 무인정사 당시 정도전파는 실로 맥없이 여기저기서 쿠데타군에게 각개격파당했을 뿐이다. 게다가 그 사실상의 친위쿠데타를 지휘 혹은 묵인해줘야 할 태조는 기록을 보면 병으로 누워있다가 급작스러운 반란 소식 앞에 극도로 무기력한 모습만 보일 뿐이며, 이방석 또한 아무 대응을 못했다.
당시 궁 안에서 태조를 간호하던 것은 세자의 매형인 흥안군 이제와 태조의 서제인 의안군 이화인데, 이화는 칼 들고 싸우겠다는 이제에게 집안일일 뿐이니 가만 있으라고 구슬릴 정도로 확고한 정안군파였다. 위의 여러 정황들을 보면 경복궁 친위병들 역시 상당수가 이방원 측에 이미 포섭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이런 상황에서 왕자들을 죽이려 했다면 당장 정보가 새어나갔을 것이다. 왕자들을 죽인다는 무시무시한 일을 모의하면서 정작 궁 안에 정안군파를 남겨두고 내부단속부터 실패한다는 것 역시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다. 이 정도의 일을 실행하려 했으면 이미 한차례 궁 내부에서 친이방원계들에 대한 대숙군이 벌어졌어야 정상이고, 그랬다면 하륜은 태조실록에서 또 정도전이 태상왕이 아프시자 궁인과 갑사들을 장악하려 들면서 어쩌고 하는 식으로 신나게 손을 놀렸을 것이다. 게다가 정작 정안군과 함께 또 다른 최유력 적장자였던 영안군 이방과는 궁밖의 소격전에서 태조의 건강을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었지 입궁하지 않았다. 남은의 경우는 일단 몸을 피했다가 "정도전이야 어그로 만땅이라 죽었지만 난 괜찮겠지" 하면서 정안군을 찾아갔다가 죽었다고 하는데 무려 살해모의까지 해놓고서 미움받을 짓을 안 했다며 밖으로 나가는 것이 정상적인 판단력으로 가능할 일일지는 의문이 남는다.
이와 관련하여 하륜의 졸기에 꽤 의미심장한 기록이 있다. 해당 기록을 그대로 옮기면 아래와 같다.

(전략) 그때에 정도전이 남은(南誾)과 꾀를 합하여 유얼(幼孽)을 끼고 여러 적자(嫡子)를 해하려 하여 화(禍)가 불측(不測)하게 되었으므로, 하윤이 일찍이 임금[98]

의 잠저(潛邸)에 나아가니, 임금이 사람을 물리치고 계책을 물었다. 하윤이 말하기를,

"이것은 다른 계책이 없고 다만 마땅히 선수를 써서 이 무리를 쳐 없애는 것뿐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이 없었다. 하윤이 다시,

"이것은 다만 아들이 아버지의 군사를 희롱하여 죽음을 구하는 것이니, 비록 상위(上位)께서 놀라더라도 필경 어찌하겠습니까?"

하였다. 무인년 8월에 변이 일어났는데, 그때에 하윤은 충청도 도관찰사(忠淸道都觀察使)로 있었다. 빨리 말을 달려 서울에 이르러 사람으로 하여금 선언(宣言)하고 군사를 끌고와 도와서 따르도록 하였다. (후략)

즉 이방원이 "쟤들이 자꾸 우릴 죽이려고 하는데 어쩌지?"라 묻자 하륜이 먼저 공격해야 한다고 대답한 것이다. 하륜은 1398년 8월 초에 충청도관찰사로 내려갔으니 이는 적어도 무인정사가 일어나기 1달 전에는 있었던 대화다. 이를 보자면 이 사태를 이방원 측의 잘 준비된 선공과 계획된 누명으로 해석할수도 있다. 궁에 갔다가 돌아온 이방원이 자신이 죽을 뻔했다며 병력을 모으려고 해서 무전기 같은 게 있던 시절도 아니고서야 한두시간만에 갑자기 여기저기에 흩어진 수천의 병력이 뚝딱 - 그것도 사병이 혁파된 마당에 - 모일 리가 있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도전 측이 아주 결백해지는 것은 아니다. 우선 하륜의 합류시기가 미묘한데, 만약 이방원의 거병이 잘 준비된 각본에 따른 것이었다면 하륜은 졸기에 나온 것처럼 혼자 상경하여 후속병력의 합류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정도전(드라마)에서처럼 충청도의 대군을 이끌고 당일 밤부터 주력을 맡아야 했을 것이다. 정작 무인정사 당일 기록에는 하륜은 행적은 고사하고 아예 이름이 언급조차 되지 않는 수준이며 거병 4일이 지난 9월 1일에서야 정당문학으로 임명되면서 재등장한다.[99] 또한 갑자기 병력이 준비되는 것도 숙위군이 이미 포섭되어 있다면 어려울 일은 없다. 미리 계획을 입수하고 한성 상주 인원에게 준비시켜두면 그만이니까. 이와 관련하여 실록에서는 정도전 일당이 송현방 남은의 첩 집을 밤낮으로 들락거리고, 이화, 이무 등이 계획을 알려주며, 박포가 정도전 진영을 정탐했다고 서술하는 등 어떻게 이방원이 계획을 알 수 있었는지를 매우 자세하게 적고 있다.[100] 이무는 특히 당시 정도전의 친구들 중에서 유일하게 훈련 소홀 문제에 대한 실드를 못 받고 파직당했기 때문에 신발 거꾸로 신을 동인도 충분했다
영안군 이방과가 입궁하지 않은 사실도 어찌보면 결정적인 증거까지는 아니다. 이방과는 분명히 차적장자의 명분을 지니고는 있었지만 권력욕이 없는 사람이었고, 따라서 이방석 측에서 포섭 내지 타협하기에 그나마 편한 상대였다. 특히 효심이 깊은 이방과로서는 아무리 동복형제들과의 우애가 깊다 해도 막내의 안정적인 즉위를 위해 아버지가 살해를 지시 혹은 묵인했다는데 적어도 직접적으로 반발할 가능성은 적었고, 설령 반발한다 해도 차라리 산으로 들어가 은거하면 모를까 반란을 일으킬 정도의 정치적 리더십을 보일 가능성도 낮았다. 만에 하나 반란을 일으킬 수 있는 근거자산조차 하필 이방과 이전에 이성계에게 충성하는 동북면 가별초이기 때문에 충분한 안전장치가 존재했다. 그런 그를 살려둔다면 정도전이나 태조의 입장에서는 왕자들의 살해에 적어도 몰살이라는 꼬리표가 붙어 신의왕후 소생 vs 신덕왕후 소생의 구도로 낙인찍히는 상황은 면할 수 있고, 나아가 이방과의 묵인이라는 명분까지 얻을 수 있다. 즉 어디까지나 이방원을 비롯한 '일부' 왕자들의 불온한 소행 때문에 부득이한 일이었으며 그 증거로 품행이 방정한 영안군은 아무 일 없다고 잡아 뗄 수 있는 것이다.
종합해 볼 때 거병일의 결정 타이밍은 한성의 병력은 동원이 가능하지만 충주의 충청감영에는 빨라야 8월 하순 중반쯤에야 연락이 되는 시점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반군의 중추가 될 수 있는 하륜과 충청감영의 합류를 포기하고 일단 일을 벌일 정도로 이방원 측이 상황을 급박하게 인식했던 것이다. 문제는 왕자살해음모를 긍정하자면 정도전은 왕의 윤허도 없이 왕자들을 죽이려 하면서, 피아 구분도 못하고, 보안유지도 실패했으며, 심지어 현장 지휘조차 손을 놓은, 그야말로 작전의 신 수준의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는 것이다. 게다가 실록에 따르면 이게 정도전 혼자 준비한 게 아니라 남은, 심효생, 이무, 이근, 장지화, 이직, 이제 등 송현방 멤버들이 함께 준비했다고 하니 읽는 사람 입장에서는 좀 황당한 일이다.
이를 고려하면 실제로 살해계획이 있었다기보다는 정도전 측의 별 의미 없는 움직임을 가지고 이방원 측에서 심각하게 오해해서 다소 급작스럽게 일을 벌였을 가능성도 있다. 위에서 봤듯이 정도전에게 억하심정이 있을만한 내부배신자도 존재하고. 그렇다고 해도 이방원 측이 이미 거사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춰놨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고, 그러자면 이방석의 친위세력이 왕자들을 살해하려 한다는, 혹은 살해할 것이라는 예측 자체는 이미 세간에 파다했을 가능성이 높다. 어차피 막내의 세자책봉이라는 초유의 명분제로 승계시도는 큰왕자들의 존재와는 절대 양립할 수 없는 것이며, 특히 능력, 세력, 야심의 3박자를 모두 갖춘 이방원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위에서 이방번이 세자 자리에 욕심을 부렸다는 언급도 있었지만, 같은 기록에서는 이방원이 이방번에게 그가 멀쩡할 리는 없으니, 지금이라도 같이 가자고 구슬렸다는 대목도 있다.
조선왕조실록이 생각보다 기록 짜깁기가 많은 사료[101]라 1차 사료인 승정원일기가 중요한데 조선 전기 승정원일기가 임진왜란때 몽땅 불타버려서 정확한 사실에 접근하기가 요원하다. 사실 승정원일기라고 조작 없이 멀쩡했을지도 의문이지만.

7. 태조의 병환



7.1. 태조 병환 조작설


태종이 반란군을 이끌고 가장 먼저 제압한 곳은 정도전과 친구들이 놀고있던 술집이 아니라 태조가 기거하고 있던 경복궁이다. 실록에는 태조가 당시 와병 중이었다고 나와있지만, 실제로는 반란군들에게 체포, 구금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태조는 1차, 2차 왕자의 난 이후에도 아주 건강하게 지냈으며 조사의의 난 때는 태종을 겨냥해 실질적으로 군대를 지휘하기도 하는 등 와병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당시 왕자의 난 전후한 실록의 기록을 보면, 태조의 병환에 대한 기록은 총 6번인데, 태조 7년에 무려 5번이 몰려 있고[102] 그 중에 왕자의 난이 발생한 8월에 4번이 몰려 있다. 그런데 8월 아파서 누웠다는 사람이 3일 만에 흥덕사에 가서 신덕왕후의 명복을 비는 모순된 기록이 보이고, 태조가 아팠다면 아내 신덕왕후 때처럼 거처를 옮긴다든가 대사령이나 불공처럼 회복을 기원하는 행동이라도 보여야 하는데 1차 왕자의 난 직전 태조의 회복을 위한 행동은 오로지 영안군 이방과가 태조의 건강을 위한 제사를 지냈다는 것 하나뿐이다. 그리고 정종에게 선위하는 이유 중 하나가 건강 문제임을 봐서는 태조의 와병은 조작이고 태조가 구금되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는 논리다.
당시 태조는 언제 급사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는 62세의 나이였고, 요동 정벌을 앞두고 있는 중대한 시기였다. 그런데 태조가 몸이 아픈데 재상이자 의흥삼군부사로서 군권을 모두 틀어쥐고 있던 정도전이 즉각 입궐해 상황을 살피면서 계엄령을 선포할 것인지 저울질하는 것이 아니라 밖에서 태연하게 술을 마신다는 것은 대단히 이상하다.
실록에 나와있는 것처럼 태조가 걸핏하면 골골대며 자리에 누워버렸다면 상왕이나 태상왕으로 물러났을 때 심심하면 사냥을 나가거나 타 지역으로 유랑을 갈 수 없었을 것이고 조사의의 난 때 군대 지휘 또한 불가능했을 것이다. 태조는 죽기 몇 년 전에 딸을 얻을 정도로 매우 건강했다.

7.2. 반론


실록을 보면 예전의 씩씩했던 태조치고는 너무 무기력해보인다. 기록을 믿는다면 태조가 진짜 아프긴 했다는 쪽에 힘이 실린다. 무인정사 당시 태조의 나이(64세)라면 한 번쯤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겉보기에 건강해도 어느 날 손바닥 뒤집히듯 바뀌는 게 노인들 건강이다. 일례로 1994년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되었을 당시, 직접 평양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보고 온 지미 카터는 그가 건강하다고 평가했지만 서울에서 TV화면으로만 김일성을 본 김영삼은 그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다는 것을 바로 간파해냈고 김일성은 그로부터 보름도 안 되어 죽었다. 김영삼의 아버지가 김일성과 비슷한 연배(김일성은 1912년생, 김홍조 옹은 1911년생)라서 노인의 건강상태를 살피는 데는 일가견이 있었기 때문. 20세기에 온갖 호사를 누리며 산 독재자가 이런데 하물며 15세기의 60대라면 말할 것도 없다. 어르신을 모셔봤다면 어딘가 문제가 생겨서 수술하고 한 5~6년, 길게는 10년까지도 건강히 지내시다가 다시 건강에 문제가 생겨 수술하거나 장기입원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태조의 사례도 크게 다를 것은 없다. 아무리 실록에 윤색이 되었다 해도 앞뒤의 기록과 교차해보면 어느정도의 신뢰성은 검증할 수 있는데 이 건이 바로 그런 예이다.
태조는 2년 전인 1396년에 그토록 사랑했던 신덕왕후의 급사라는 충격적인 비극을 맞이했고, 슬픔으로 몸을 가누기도 힘든 상황에서 신덕왕후의 장지를 찾기 위해 직접 수도권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등 꽤나 무리를 했다. 배우자의 사망은 당사자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는 사안으로[103], 특히나 그 사망이 급작스럽거나 비참하다면 젊은 사람도 하루만에 머리가 새하얗게 변한다. 애처가 사망하자 실의에 빠져 사망한 사례는 군주들 중에서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데, 중국사에서도 손꼽히는 강건한 군주였던 청태종조차 사랑했던 후궁 하르졸(해란주)이 사망하자 이후로 2년간 실의에 빠진 채로 지내다가 유언도 남기지 못한 채 51세의 나이로 앉은 채로 급서했고, 청태종의 아들인 순치제도 가장 사랑하던 현비 동악씨가 죽자 1년 만에 천연두로 세상을 떠났다. 이미 환갑을 넘긴 태조라면 피를 토하며 쓰러지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게다가 세자의 가장 든든한 배경이 되어줘야 할 신덕왕후의 죽음으로 이성계가 직접 나서서 후계구도를 공고화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했는데 위에서 보듯이 신덕왕후의 친척들조차도 이방석의 승계에 그다지 긍정적인 입장이 아니었으며, 정도전이 추진하는 요동정벌과 사병혁파 정책 덕에 조정 내의 분열과 대립이 개국 이래 최고조에 달한 상황이었으니 스트레스가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실록에 기록된 태조의 병환은 난이 일어난 그 날만 갑자기 등장한 게 아니라 1398년 내내 꾸준히 등장한다. 후일 태조가 건강했다 한들 그 당시의 병환을 의심하는 건 음모론에 지나지 않는다.
다만 태조가 목숨이 위태로울 정도로 위독한 상태라면 정도전 일파가 신하가 되어서 술자리를 벌이고 있었을 가능성은 없으니 중병까지는 아니었고, 몸이 안 좋긴 한데 며칠 푹 쉬고 약 잘 먹으면 완쾌될 정도라서 회복에 집중하느라 태조의 대응력이 떨어진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태조가 대응하고 싶어도 병환 중 태조를 대신할 인물이 없고 경복궁이 장악된 상태라서 태조가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웠을 공산이 크다. 술 마신 다음날의 숙취나 무리하게 움직인 다음날의 몸살같이, 꼭 중병이 아니라도 젊은 사람조차 걸렸을 때 무력화 되어서 자리보전해야 하는 병은 있다. 태조 역시 처방 잘 받고 하루이틀 푹 쉬면 나을 잔병이 걸리지 말란 법은 없다.[104]
당시는 음력 8월 말로 양력으로는 10월 초[105]에 해당하는 환절기였기 때문에 국사나 군무 등으로 조금 무리했다면 심한 감기몸살이 들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시기다. 게다가 이 해 하반기에는 계속해서 폭우가 내리고 우박이 쏟아져 법석(법회)을 열게 하는 등 날씨도 영 좋지 않았다. 어디 거동이라도 잘못 했다면 꼼짝없이 몸살나기 딱 좋은 상황이다. 실제로 7~8월 태조의 행적을 보면 병이 날 수밖에 없는 사정을 짐작할 수 있는데, 7월 27일 폭풍이 불고 우박이 내리던 날 태조가 흥천사에 거둥하고 바로 이틀 뒤인 29일에 5월 이후 3개월만에[106] 병이 났다는 기사가 등장한다. 이후 8월 3일과 6일 잇달아 병이 난 직후 8월 9일 흥천사에 거둥했고, 13일에 세자 이방석이 길복[107]을 입고 정릉을 지키던 이서와 강인부를 표창한 다음날 14일에 다시 태조의 병환 기사가 나온다. 이로 미루어보면 7월까지 중국 사신 접대 등으로 스트레스가 쌓인 상태에서[108] 7월 말 궂은 날씨에 무리해서 외출을 한 태조가 감기몸살이 들었고, 완치되지 않은 상황에서 계속해서 국사와 신덕왕후의 3년상 마무리 등으로 무리하다가 증세가 도지기를 8월 내내 반복했다고 추측해도 크게 무리는 없으며, 이렇게 병세를 질질 끌고 있는 상황이니 이방원 측에서 궁내 지휘관들을 포섭하고 날짜를 잡을 틈을 포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를 보면 태조의 병은 정릉 원찰인 흥천사 거둥에서부터 시작한다. 위에서 살펴봤듯이 태조가 이방석을 책봉한 가장 강력한 근거가 신덕왕후였고, 나이도 어리고 큰왕자들에게 능력과 세력 면에서도 밀리는 이방석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태조가 택한 방법도 정릉을 왕궁 코앞에 조성해 죽은 신덕왕후의 존재감을 각인시키는 것이었다. 태조에게 있어서 신덕왕후의 3년상 관련 행사들은 자신의 몸이 상하는 한이 있어도 무조건 챙겨야 하는 최우선 일정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태조의 몸이 병들자 난이 터졌고 그 주력으로 지목되는 것이 정릉 숙위를 위해 상경한 것으로 추측되는 안산군 병력이니, 결국 이방석의 승계를 위해 택한 행보가 정작 이방석을 죽인 아이러니한 결과였다. 태조의 병은 9월 초에 수정포도를 구해 먹으면서 점차 회복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미 정권을 장악한 이방원 측에게 실무를 떠넘기고 양위까지 하면서 분노와는 별개로 그동안 격무에 시달렸던 몸이 자연스레 회복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도전 측이 태조의 병환에 기민하게 대응하기에는 오히려 이제는 정말 이방석이 즉위할 판이라, 뭐라도 하지 않으면 끝장이라는 시그널을 줄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109] 사실 7월 말부터 내내 태조의 병이 도지고 낫고를 반복한 상황이라 매번 경복궁에서 숙위했다간 정도전부터가 몸이 남아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정도전 측이 아무것도 안 하고 손 놓고 있었던 것은 아닌데, 이미 사병이 혁파되어 중앙군으로 편입되었고, 왕자 및 종친들에게 군사훈련을 시키고 그 결과가 미흡하다 하여 그 휘하 사람들에게 태형을 내린 것이 약 2~3주 전이었다. 즉 이미 삼군부의 군령이 왕자들에게 직접적으로 미치는 상황이었으며 세자의 동복형인 이방번에게는 상당한 규모의 사병을 들려놓았으니 나름대로는 안전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태조가 앓아누워있긴 하지만 역전의 용장인 박위가 궁내에 있었고 삼군부 절제사를 지냈던 흥안군 이제가 입궐해 숙위중이었으며, 자신이 열심히 키워놓은 만16세의 세자가 궁궐 친위병 정도는 충분히 지휘할 수 있으리라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혁파해서 모아놓은 중앙군과 이방번이 아무 도움이 안 될줄은 몰랐을 것이다.
만약 태조가 멀쩡한 상태에서 쳐들어왔다면? 아들이고 뭐고 거기서 끝났다. 반란군이 세력을 쉽게 불릴 수 있었던 것은 아직 가별초 시절의 기억이 생생한 중앙군이 '큰 도련님'들의 편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가별초들이 '큰 도련님'들의 친아버지가 멀쩡히 걸어나오는 모습을 보게 되면? 호통도 필요없고 팔짱 끼고 서 있기만 했어도 그냥 끝이다.
흥안군 이제는 직접 시위병력을 이끌고 나가 싸우겠다고 했지만 함께 있던 이화의 만류와 태조의 부동의로 실패했다. 태조의 기력이 충분한 상황이었다면 당연히 이제가 반격을 시도해봤을 것이고 실록 혹은 연려실기술같은 야사에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태조실록은 음모론자들이 막연히 주장하는 것과는 다르게 무인정사 이전까지는 세자책봉의 책임이 정도전이 아닌 다른 이들에게 있었음을 밝히는 등 생각보다 윤색이 적은 기록이다.[110] 더군다나 멀쩡한 태조를 힘들여 구금할바에야 차라리 모든 문제의 시발점인 정도전을 몰래 암살해버리는 게 훨씬 견적이 나올 일이다.
위에서 의문점으로 제시한 조사의의 난은 오히려 무인정사 당시 태조가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좋은 반례가 된다. 이미 무인정사로부터 4년이 지났고 아예 이방원이 왕위까지 확실히 차지해 그야말로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었지만 그럼에도 이성계는 자신과 가별초들의 근거지였던 함길도에서 순식간에 1만의 병력을 모아 내전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의 권위가 남아 있었다. 하물며 현역 군주인 그가 난을 감지하여 반군 앞에 상방검을 들고 나타난다면? 그야말로 반역죄로 삼족을 멸할 일이다. 의심하는 쪽에서는 태조가 그렇게 아팠다면 어떻게 여기저기를 그렇게 쏘다니며 함흥까지 올라가버릴 수 있었겠냐며 의문을 제기하는데, 반대로 멀쩡한 상태의 태조를 강제로 구금해 난을 성공시킨 것이라면 오히려 그대로 궁 안에 유폐하고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태조가 거동을 할 수 없다고 열심히 둘러대도 모자를 일이다.[111] 태종이 이성계의 무기력함을 직접 확인하지 않았다면 사신을 접대하고 흥천사에 불공을 드리러 다니고 평주(평산)니 낙산사니 신도(한성)니 오만 곳을 쏘다니도록 놔뒀을 리가 없다.[112]
명분 면에서도 무인정사는 다른 반정들과 크게 차이가 나는데, 직접적으로 왕을 폐위시켜버린 중종반정이나 인조반정은 아예 왕을 폭군으로 지목해버렸지만 무인정사 지도부는 창업군주이며 친아버지인 태조를 상대로 폭군의 ㅍ자도 꺼내지 못했다. 그보다는 차라리 임금 옆의 간신을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일어난 계유정난과 비슷하겠지만, 그 계유정난 때에도 수양대군은 어리디 어린 단종을 압박하여 양위를 받는데 무려 2년의 시간을 소비했다. 반대파를 전멸시키고 조정을 다 장악하고도 어린 왕을 상대로 이 정도인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기력이 충분한 창업군주 친아버지가 멀쩡한 몸으로 반란군 앞에 선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아무리 사대부와 종친들이 이방원을 지지하며 몰려왔다고 해도 가별초를 이끌고 당당히 나타난 이성계의 면전이라면 이방원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무릎을 꿇고 손이 발이 되도록 빌면서 한줌 부자의 정에 의지해 폐서인을 목표로 하는 것 뿐이었다.[113] 특히 조준 같은 주요 관료들이 한 번 머뭇거린 것을 제외하고 생각보다 순순히 따른 것을 보면 이들도 태조의 병환으로 경복궁이 쉽게 대응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감지하고 있었다는 데 무게가 실린다.
태조가 병환중이었음을 뒷받침하는 또 다른 근거는 바로 거병시기다. 전술했듯이 이 사건은 사병이 혁파된지 약 10여일이 지난 시점에서 터졌는데, 상식적으로 거병을 시도한다면 사병을 손에 들고 있는 상황이 사병이 몰수된 상황보다 훨씬 쉬울 노릇이다. 거병과 거의 동시에 경복궁을 장악할 정도로 주도면밀하게 일을 진행한 이방원이 사병의 유지를 포기하면서까지 기다릴 조건이라면 오로지 태조의 병환과 그로 인한 경복궁의 일시적 혼란 외에 다른 답이 나오지 않는다. 또한 사병이 이미 몰수된 이방원에게 궁궐수비군이 내응할 이유 역시 태조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 아니면 찾을 수가 없다. 각종 야사나 음모론이라면 환장을 하는 대한민국 방송작가들이 유독 무인정사만큼은 태조의 와병 상황으로 묘사하는 것은 그 외에 도저히 개연성 있는 전개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던 이방원 일파가 마침 태조가 가벼운 병치레 탓에 이 전격적으로 쿠데타를 성공시켰다고 해석할 수 있다. 따지고보면 태조가 신속하게 밀어붙인 위화도 회군과 비슷하게 1차 왕자의 난도 신속하게 펼쳐졌다.
여담으로 과거 이 항목은 드라마 정도전이 종영된 이후 기레기들에 의해 토씨 하나 수정되지 않고 무단 도용되었다(...).기사 1, 기사 2 지금은 항목에 수정이 좀 가해진 상태.

8. 사극에서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작품은 용의 눈물이다. 1차 왕자의 난을 대단히 스펙타클하게 그려냈으며 정예 병사들이 입고 있는 경번갑도 볼거리.
전개는 남은, 심효생, 박위, 유만수 등이 이방원을 비롯, 신의왕후 소생의 왕자들 및 의안대군 이화를 대궐로 불러들인 뒤 매복한 군사들을 시켜 죽이려는 거사를 기도하면서 일어난다. 원작인 세종대왕에서는 정도전이 왕자 살해를 주도하지만 용의 눈물에서는 정도전을 합리적인 인간상으로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과격파 남은이 살해를 주도하고 정도전은 나중에서야 기겁을 하며 펄쩍 뛰지만 상황을 돌이킬 수 없어 그저 결과를 기다리는 모습으로 나온다.[114]
부름을 받은 대군들이 궐 앞에 모이기 시작하지만, 대군들이 모두 모여야 거사를 실행한다는 조건 때문에 거사 실행이 늦어지고, 그 사이 낌새를 챈 이방원이 뒷간에 간다는 핑계로 대궐을 빠져나온 것을 시작으로 모든 대군들이 흩어져버리자, 정도전 일파는 일이 틀어졌음을 알고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치려한다.
그러나 이미 사태를 파악하고, 혹시라도 자신을 해하려는 시도가 있으면 즉각 거사를 실행하기로 모의했던 이방원은 사전에 준비한 군사들을 모아 대궐을 공격하기 시작한다.[115] 이것만 놓고는 어느 쪽이 우위에 있다고 보기 어려운 전력차였으나, 당초 정도전 일파가 자신들의 편이라 여기고 불러들었던 지안산군사 이숙번이 뒤통수를 치고 이방원의 편에 서면서 전세가 급격히 기울어, 이방원의 군세가 압도적 우위를 가지고 대궐을 포위하기에 이른다. 이방원은 먼저 계획한 대로 삼군부를 쳐 유만수를 죽이고, 뒤어이 대궐을 공격해 이를 지키던 갑사들을 물리치고 박위마저 죽이면서 대궐을 완전히 장악한다.
세자 방석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죽이라고 이방원은 눈치를 보냈고, 방번과 이제는 함께 그냥 보내주었으나 이들은 뒤쫓아간 이방간에게 제거된다.[116] 정도전의 최후에 대해서는 실록의 상반된 기록을 참고하여 의미 있는 모습을 그려냈다고 평가받는다. 여기서 태조는 기록에 따라 병으로 인해 아무 것도 하지 못하던 상황으로 등장. 나레이션에서 이방원은 딱히 동생들을 죽일 생각이 없었는데 주변에서 멋대로 죽여서 화가 나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하였다는 기록을 언급하며 어디서 설득력 없는 소리를 하냐고 디스한다. 다만 한명회의 살생부 씬을 가져다 쓰는 바람[117]에 실제 왕자의 난 전개 과정과 차이가 생겼다. 본시 남은의 첩실 집에 모여있던 인물은 정도전, 남은, 심효생은 물론이고 장지화, 이근, 이직, 이무 등 다수였는데; 극중에서는 정도전, 남은, 심효생만 있는 것으로 묘사했고 본시 이 자리에서 죽는 장지화, 이근은 입궐하란 명을 받고 궁문에 들어섰다가 이숙번이 살생부에 줄을 긋는 것과 동시에 무사들의 철퇴에 맞아죽는 걸로 바뀌었다. 본시 습격 현장에서 하인 복색으로 변장하고 도망치는 데 성공한 이직도 궁문을 들어서다 맞아죽는 오류가 나왔다. 다행히 이직이 비중이 크지 않았기에 남은의 형 남재와 함께 이방원을 찾아가 등용되는 장면으로 은근슬쩍 부활시킬 수 있었다.




드라마 정도전에서도 정도전의 최후를 장식하는 사건이기에 최종화로서 이 사건을 다룬다. 이방원이 죽이자, 제거하자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등 싹수를 보이기도 했지만, 이방원은 거사가 일어나기 전에 정도전에게 목숨을 위협받은 상황에서 하륜의 충청도 병력이 올라오는 것을 계기로 무인정사를 일으킨다.[118] 태조는 요동정벌을 위한 군사훈련 덕에 무리를 하게 되면서 자리에 눕게 되었으며, 도당 내에서 정도전의 우군이 없었기에 이지란이나 조준 등 이방원에게 호의적이라 볼 수 없는 사람들도 결국 이 사건을 방조하거나 받아들인다. 작중에서 정도전은 도망치지 않아 억류된 뒤, 이방원에게 '재상정치에 대한 포기를 대가로 모든 정책을 받아들이겠으니 내 부하로 들어오라'고 회유를 받으나 거절하고 참살당한다. '정도전은 도망치다 붙잡혀 애원하다가 살해당하였다'고 태조가 이방원에게 왜곡된 사실을 듣는 장면이 나오면서 양자택일이 아니라 두 설을 모두 채택하는 모습을 보였다. 참고로 용의 눈물에서 이방원을 맡았던 유동근은 정도전에서는 태조로, 용의 눈물에서 세종 이도 역을 맡았던 안재모는 정도전에서 이방원으로 출연한다(…).
2015년 3월에 개봉했던 영화 순수의 시대 또한 이 사건을 다루는 작품이다. 여기서는 장혁이 이방원을 맡았는데 영화 자체의 평가는 나빴어도 장혁의 킬방원(…) 연기는 괜찮았다는 평가. 그런데 2019년 나의 나라에서도 할 듯하다...
육룡이 나르샤에서는 47회에서 본격적으로 다뤄졌다. 일단 태조 와병설을 택한 듯, 태조는 등창에 걸려있었다. 물론 다른 드라마들과 달리 물흐르듯 진행되지 않고 이래저래 삐걱거리는 순간이 많았지만 운좋게 요동 출정이 연기되고, 안산군수 이숙번의 병력이 예정대로 이방원 병력과 합류했다. 그리고 이방원 - 이방간의 사병은 정도전 일행이 머무르던 송현방(남은의 별장)을 피바다로 만들며 정도전, 남은을 제외한 주요 인사들을 모조리 주살하고 그에 이어서 삼군부를 공격하여 그곳을 그들의 통제 하에 놓이게 하였다. 물론 정도전의 경호원인 이방지를 떨어뜨려 놓아 방해요소를 제거한 상태. 그리고 결국은 성균관 대성전으로 피신한 정도전을 이방원이 직접 주살해버린다.[119] 48회에서는 남은이 도망치다가 죽임을 당하고[120] 이방원은 궁으로 진격하여 세자 이방석도 참살한다. 한편 이방석의 형 이방번은 정황상 이방간이 죽인 것으로 보인다.

[1] 태조실록에 기록된 공식 사건 개요이다. 물론 현실은... 이하 내용 참조.[2] …9월에 공소의 난에 공(정도전)이 천년(天年)을 마치지 못했다. -삼봉집, 8권 부록 중 <사실>(事實).[3] 방우에게 남아 있던 군사들은 방우 사후 그의 아들 복근이 아니라 이성계의 형 이원계의 3남 이조(李朝)에게 인계되었기에 다른 종친들과 달리 실질적인 보탬이 되진 못했을 것이다. 태조실록 권4 태조 2년 9월 18일[4] 당시 이방과는 태조 이성계의 쾌유를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5] 애초에 태조의 나이도 나이였지만 장남인 이방우부터 시작해 한씨 아래의 아이들은 이미 장성한 성인이었던 만큼 후계자가 되어도 이상할건 없는 수준이었다. 오히려 이방우의 나이를 고려하면 장남이 나오고 38세가 되어서야 후계자 선정을 시작한 꼴.[6] 창왕 시기까지 아버지를 도우며 활발하게 활동했으나 공양왕 집권기 이후 정계에서 배제되어 건국 이후엔 맏아들로서 제한적인 역할만 하며 술로 시간을 보내다 일찍 사망하였다. 고려에 충절을 지켜 조선 개국에 한 역할이 없다는 건 야사에 불과하다.[7] 태종 때 문안군으로 추증. 고종 때 덕안 대군으로 재추증.[8] 1385년 과거에 합격했다는 기록이 있으므로, 이방원이 1382년 16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했으니 대략 1370년을 전후해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건국 전에 혼인도 하지 않은 상태로 사망하였으나 정확한 사망년도는 불명.[9] 당시 그의 장남이자 태조의 장손인 이복근이 15세쯤 되었다.[10] 두 왕후의 나이치는 19세나 되었다. 신덕왕후의 나이는 이방우보다도 어리고 이방과와 비슷한 수준이었으니 그 자식들이 어린 건 당연한 수순.[11] 이방과의 후손 또한 곧 계승권과 실권에서 배제되었긴 마찬가지다. 태종과 세종 후손들만이 적통을 이어나가게 설계했고 조선 멸망까지 이행되었다.[12] 밑에서 다시 검토하겠지만 태조의 아버지 이자춘도 형 이자흥이 죽은 직후 어린 조카에게 돌아가야 할 천호 자리를 차지했으니 이 점도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다만 이자춘은 안 그러면 계모의 집안인 한양조씨네(정확히는 그쪽 외손자인 이복동생들)가 천호 자리를 잡아먹었을 것이라는 나름의 명분은 있다.[13] 고려에 충절을 지켜 은거했다는건 야사에 불과하며 실록에선 병권도 일부 쥐고 있었고 맏이로서 조상들에게 제를 지내는 등 후계자가 되지 못했을 뿐 맏이로서 역할을 했다. 그가 폭음을 일삼은 건 고려에 대한 충절 때문이 아니라 맏이 대우는 하면서 후계자는 되지 못한 현실에 대한 울분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14] 다만 그가 사신으로 간 직후, 이방원이 이색의 요청에 따라 이성계의 선택으로 서장관 자격으로 이색, 이숭인을 따라 간 적이 있는 만큼, 이방우의 사신 행도 이와 같이 강제성이 있었을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다. 또한 이방우에 대한 바로 앞의 주석에 기록된 내용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반론이 가능한데, 진안대군 항목을 참조할 것을 추천한다.[15] 태조실록 권4 태조 2년 9월 18일 기사.[16] 그리고 여기서 생각해 봐야 할 인물이 방석의 첫 부인인 폐세자빈 유씨. 그녀와 방석이 혼인한 시점은 명확하지 않은데 만약 조선 건국 이전에 혼인한 고려 구세력의 딸이라면 그녀의 폐출 이유로 흔히 알려진 내시 이만과의 간통이 누명일 가능성이 생긴다.[17] 실제로 당시에 고위 관료, 장수가 경처와 향처를 따로 두는 것은 꽤 흔한 일이었다.[18] 어디까지나 높을 뿐이지 확실하지는 않다. 다시 이야기하겠지만 현빈 유씨의 폐위가 정치공작이라는 주장대로라면 이방번이라고 못 할 건 없다.[19] 곡산강씨는 신덕왕후의 아버지 강윤성 대에 신천강씨에서 분관되어 지금은 다시 신천강씨에 합관되었다.[20] 심지어 신천강씨는 고려왕실인 왕씨와는 고려초에 제법 가까운 인척이었고(궁예의 왕후였던 강씨가 신천강씨인데, 왕건의 인척이였고, 광종도 신천강씨에서 성장하였다.) 그 이전에 왕건의 외고조모 집안으로 기록되었을 정도다.[21] 신의왕후가 왕후 시호를 받는 것은 정종 즉위 후인 1398년 11월의 일이다.[22] 태조실록 권1 태조 원년 8월 19일[23] 현종과 명성왕후의 적자인 숙종이 조선왕 중 가장 강한 왕권을 자랑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왕의 정통성은 아버지인 왕의 권위와 어머니인 적실 왕비의 권위가 결합될 때 완성될 수 있다. 신하들에게 혈통상 권위를 완벽하게 인정받고 더 나아가 제대로 된 후계자를 갖춘 태조 자신의 권위도 높아진다.[24] 그 배극렴도 처음에는 신덕왕후 소생의 책봉을 반대하다가 데꿀멍하고 전향하게 된다. 실록에서는 배극렴을 무식한 무장이라 태조가 한마디 했다고 바로 우디르해버리는 위인이라고 까는데, 무인정사 이전까지 실록에서 세자책봉 문제로 직접 욕을 들어먹는 것은 그가 유일하다. 그런데 정작 이방원은 그에 대해 딱히 어떠한 보복을 가하지는 않았다. 죽은 사람이라도 부관참시니 시호박탈이니 보복할 방법은 무궁무진한데도.[25] 일각에서는 양녕의 폐세자 정국에서 효령대군의 책봉 부적격 사유라고 나온 게 고작 '술을 못마신다'였다며 이방번이 밀린 이유 역시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고 주장하나, 실제로 실록을 읽어보면 당시 이방원이 밝힌 효령대군의 부적격 사유에서 술 문제는 일종의 예시일 뿐이고 정확히는 사람이 물러터졌고 똑부러지지도 못하며 융통성도 없다는 것이 주였다. 그리고 효령은 실제로 불도에 정진한 정황을 고려하면 사람이 마냥 물러터졌다거나 술 못 마신다는 지적을 본인도 수긍할 수가 있겠지만 하루아침에 방탕아로 내몰려 동생에게 세자 자리를 뺏기는 건 유가 다른 일이다.[26] 이성계의 큰아버지 이자흥의 딸들.[27] 이행리: 4남, 이춘: 4남/최씨의 2남[28] 그러나 특이 케이스라고 할 수 있는 칭기즈 칸의 경우를 보면 보르테 소생의 4아들은 일정한 수의 유목민들을 분배받지만, 터전이던 몽골초원과 대다수의 유목민은 말자 툴루이가 상속받고, 차가타이와 우구데이를 제치고서 대칸 선출때까지 대리역할도 하였다. 사실 이러한 말자 상속은 동아시아에서 전설의 시기라고 불리는 商代(殷이라고 함)에 상속 방법으로 장자의 씨앗이 불분명한 것과는 반대로 말자의 씨앗은 분명하다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승계방식으로 사용되었다.[29] 애당초 칭기즈 칸은 이성계와 전혀 상황이 다르다. 이성계의 장남 이방우가 별다른 결격사유도 없아 후계자에서 배제된(그래서 고려의 충신이었다는 이야기가 사실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받는) 것과 달리, 칭기즈 칸의 장남 주치는 혈통이 불분명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어서 장자계승이 애초에 불가능했다. 칭기즈 칸이 네 아들에게 계승 문제에 대해 물어볼 때 차남 차가타이가 대놓고 주치를 메르키트의 사생아라고 욕했는데, 만약 칭기즈 칸이 진짜로 주치를 후계자로 선정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면 차가타이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라, 보르테가 주치를 임신할 당시 칭기즈 칸의 휘하에 있던 양대 2인자 젤메와 보르추, 그리고 칭기즈 칸의 친동생들까지 모조리 반발할 가능성이 컸기에 당시 몽골은 장자계승이라는 게 절대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결국 칭기즈 칸은 쿠릴타이를 열어 장자도 막내도 아닌 셋째 우구데이를 후계자로 삼았으니, 당시 몽골 울루스에는 일정한 후계자 선정 원칙 자체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30] 더욱이 몽골의 경우에는 아시아를 넘어 위로는 러시아 공국에서부터 서쪽으로는 동유럽을 넘어 서유럽을 넘보기 직전까지, 남쪽으로는 인도까지 닿을 정도로 지속적으로 땅을 개척했으며, 그러다보니, 장남이나 차남에게 땅을 떼어주는 것이 가능했다. 그리고 그 몽골조차도 몽골 제국이 원나라와 4칸국으로 나뉜 후에는 나누어줄 땅이 없다보니 황실 내부에서 끊임없이 권력투쟁이 끊이질 않았고, 결국 원나라가 세워진 지 98년 만에 멸망하고 만다.[31] 그럼 그렇게 따져서 물려줬는데 강건성세 이후는 뭔가 싶겠지만 일단 강건성세 동안의 사회적 모순이 겉잡을 수 없어 덤터기를 쓴 것도 있고, 그나마 가경제도 당시까지 살아있었던 아들들 중에서는 가장 인망이 높고 기대가 컸던 황자였고 도광제도 백련교도의 난을 직접 권총을 쏴가며 진압한 인재였다.[32] 도조 이춘의 계처가인 한양 조씨 집안이 정강의 변 때 북송에서 넘어온 집안이라 조금 애매하긴 하지만 적어도 여진이나 몽골계는 아니다.[33] 이천계의 정체에 대해서는 이자흥의 친아들이 맞다는 설과 원래 이원계의 동복동생인데 이자흥의 친자가 죽은 후 이자흥 밑으로 입적되었다는 설이 대립한다. 세조실록에서 이천계가 태조의 서제라고 밝힌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고종대에는 이천계가 이자흥 소생이 맞다고 결론내렸다.[34] 여기까지는 이송, 이원계가 일찌감치 중앙조정에 출사하던 것과 비슷한 테크라고 볼 수 있다.[35] 이자춘 문서에도 언급되어 있지만 이원계가 서장자라는 것은 진짜 서자인 이화와 달리 항렬자를 사용한 점을 봤을 때 조선 왕실의 윤색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36] 사실 이때는 누굴 세웠어도 사단이 났을 가능성이 높았고 실제로 뒷배가 없던 혜종 뿐 아니라 힘있는 호족을 외가로 두었던 정종조차도 시해당했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결국 광종이 호족들을 싹 숙청한 뒤에야 안정을 찾게 되었다.[37] 보통 왕조국가는 정국의 안정을 위해서 나이로 형제 간의 왕위계승 서열을 구분하고 장자계승을 실시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뭐 고려 태조 왕건처럼 제대로 준비를 안 하고 적장자 계승을 밀어붙였다가 후계자가 오히려 낭패를 본 경우도 있지만,[36] 적장자 계승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 나라 말아먹는 경우의 리스크가 더 컸다.[38] 하지만 처음부터 정도전이 방석을 세자로 세우자고 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나라가 안정될 때는 장자, 혼란스러울 때는 능력있는 아들'을 주장했다. 이는 여차하면 방원도 세자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 것. 하지만 태조가 신덕왕후 소생이 세자가 되어야 한다고 못박았으니 방석밖에 답이 없었다. 방번은 공양왕의 조카 사위라서 설사 자질이 요순이라도 절대 세자가 될 수 없었다.[39] 이 두 경우는 태조보다도 더 참작의 여지가 훨씬 더 있다. 태조는 이 경우를 무시해서 내친 왕자가 조선조 최고의 명군 중 1명이였다는 게 가장 큰 문제점이었다.[40] 다만 이 경우는 신덕왕후와 달리 왕가가 아닌 일개 호족 집안 내에서의 다툼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도 있다. 한 나라의 현 왕비이자 왕의 총애까지 받는 신덕왕후 상대로 후계자 다툼을 하는 것은 일개 집안 내 다툼 때보다 훨씬 어려웠을 것이다. 신덕왕후 본인도 이것을 알기에 방석을 세자로 삼는 무리수를 둔 것이다. 문제는 당시 기준으로 이성계는 꽤 오래산 편이라 갑자기 이성계가 세상을 떠날 가능성도 염두에 둬야 했고 그 경우에는 신덕왕후 본인도 파워가 급속히 약해질 수밖에 없으므로 결국 이래나 저래나 리스크가 크다는 건 명백하다. 당장 건문제 주윤문이 세력만으로는 영락제 주체를 훨씬 능가했음에도 결국 황제 자리를 뺏긴 걸 보면 말이다.[41] 실제로 이 집안이 받쳐주질 못해서 손자며느리에게도 치여 산 안습한 대왕대비가 있다. 그것도 성리학적 예법이 확실히 정착되고도 남아서 예송논쟁까지 터진 17세기 말에....[42] 다만 왕후의 시호 자체는 폐하지 않고 남겨두었다.[43] 이는 조선의 첫 번째 임금인 태조의 권위를 훼손한다면 왕실의 권위가 같이 훼손될 위험이 있기 때문에 더이상 태조의 권위를 훼손하지 않기 위한 정치적인 계산이기도 하고, 동시에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아버지와 대립한 끝에 직접 칼까지 맞댔던 불효자라는 죄책감이라는 개인적인 감정에서 나온 행동일 가능성이 높다.[44] 물론 다른 형제들도 정몽주 암살에 찬동하기는 했지만 책임은 이방원 혼자 오롯이 뒤집어쓴다. 정몽주 암살에 가장 적극적으로 행동한 것이 이방원이다. 하지만 방원의 입장에서 보면 정몽주의 존재는 조선 개국에 도움이 되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가장 큰 걸림돌인 상황에서 이성계든 정도전이든 아무 손도 쓰지 못하고 있던 터라 결국 방원이 나서서 손을 쓰게 만든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조선 개국을 안 한 것도 아니고 할 건 다 해놓고 이제와서 넌 정몽주를 죽였으니 안된다는 식이면 당연히 어이가 없을 노릇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깔끔한 암살도 아니고 백주대낮에 상갓집에서 나온 사람을 다른 사람들 다 보는 데서 때려죽였으니 할 말이 없긴 하다.[45] 이 자질도 강희제의 조모이자, 순치제의 생모이고, 홍타이지의 적복진이였던 효장문황후가 공인하고 뒤에서 버텨주었기에 인정받았다. 심지어 강희제는 5살 때부터 차기 군주로서 엄격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때도 순치제의 유지와 각지의 신료들과 친왕, 군왕들이 한데 모여 후사를 논의한 끝에 황위에 오른 것이다. 나이도 형제들 중 가장 어린데다 능력도 검증이 안 된 상태에서 친모 신덕왕후의 총애만으로 덜컥 세자에 책봉된 이방석과는 차원이 다르게 청나라 전체가 강희제의 권위를 인정한 상황이었다. 그런 강희제조차도 나이 어릴 때는 구왈기야 오보이의 전횡을 제어하지 못하다가 16세가 되어서야 친위 쿠데타를 통해 오보이를 숙청하고 진짜 황제로서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는데 오보이같은 방계왕족과 공신들이 수두룩한 조선초기라면....[46] 앞에서도 살펴보았지만 태조는 놀라울 정도로 세자 책봉에 있어 적장자 세습의 원칙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정도전 조차도 처음에는 나이와 경력에 따른 책봉을 건의했다가 태조가 강씨의 아들을 하도 강력하게 주장하자 데꿀멍하고 입을 닫았을 정도며, 방석 책봉에 뽐뿌를 넣는 악역은 정도전이 아니라 배극렴에게 돌아갔다. 왕 옆의 간신 제거라는 명분을 내세운 이방원 입장에서 차라리 태조가 적장자 세습을 고민하고 강씨나 죽은 정도전이 이를 부추기는 그림이 훨씬 자신에게 유리했을 텐데도 실록은 정도전이 죽기 전까지는 일관되게 강씨 아들의 책봉이 태조의 의지였다고 서술하고 있다. 어쩌면 자신과 같은 무장 출신의 방과가 공신들에게 휘둘리는 미래가 자신의 모습과 겹쳐보였을지도 모른다.[47] 태조는 일단 약 73세(72세 7개월여)에 사망하여 역대 조선왕 중 2위의 장수기록을 가지고 있다. 3위는 고종(67세), 4위는 광해군(66세), 5위는 아들 정종(62세)이다. 그런데 잘 보면 순위권들 중에서 태조 밑으로는 나라 망해서 당구치며 여생을 보내다가 죽거나(고종), 반정으로 쫓겨나 유배지에서 할일없이 노닥거리다 죽거나(광해군), 2년간 실권 없는 왕 노릇 하다가 뒷방으로 물러나서 격구나 치고 유람이나 다니며 인생 즐길만큼 즐기다 죽은(정종) 케이스 들이다. 사실 태조도 만6년의 재위 기간보다 만10년에 가까운 태상왕 시절이 훨씬 길었고, 원래 강골인 몸이 원치 않게 정치 스트레스에서 일찍 벗어난 덕에 저만큼 장수할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설령 신덕왕후가 그렇게 빨리 죽지 않았다 해도 태조 본인이 어린 세자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나날을 지속했다면 무인년의 그 병환이 언제 어떻게 커져서 태조를 저세상으로 이끌었을지 모르는 일이다.[48] 대군들에게 연회를 베풀거나 도성 밖에서 어가를 맞이하거나 법회를 열게 하는 정도가 전부다.[49] 그럴 만도 한 게 왕실의 후계자 교육이라는 것은 원·세자가 5살이 되면 강학청을 설치해서 조기교육으로 체화시켜야 할 정도로 빡빡한 커리큘럼이었다. 그걸 10살이 되도록 호랑이 같은 형님들을 두고 권신의 막내둥이로 어리광부리며 자유롭게 지냈을 방석이 소화하자니 죽을 맛이었을 것이다.[50] 조선왕조를 통틀어 이방석 외에 10세가 넘어 원자 혹은 세자, 세제로 책봉된 사례는 정종(만40세)(!), 태종(만31세), 세종(만21세), 의경세자(만19세), 광해군(만17세), 소현세자(만11세), 효종(만26세), 영조(만27세)의 8명이다. 그런데 이 세자, 세제들은 효종 정도를 제외하면 이미 혈통이나 야심, 재능 등등 여러 가지 요인으로 후계자로 거론은 되던 사람들이다. 의경세자조차도 왕위에 욕심 만땅인 세조가 잠저에서부터 후계자로 키워왔던 장남이고 효종은 형인 소현세자가 묵던에 인질로 간 이래 줄곧 아버지 인조와 정치적으로 갈등관계에 있어 어느 정도 낌새는 있었다. 정말로 이방석처럼 아무 준비도 없이 덜커덕 세자가 된 사례는 찾기 어렵다.[51] 일례로 세종이 수양대군에게 활자 간행에 참여하도록 한 것이 그가 만16세 때였다. 문종은 세종이 하도 몸이 안좋아서 이미 10대 초반부터 툭하면 사신을 접대해야 했다. 당장 이방석의 형인 이방번도 13살에 삼군부 절제사 노릇을 했고, 무인정사 직전에도 한창 진도훈련에 투입되었으니 세자 역시도 군사훈련 등에 얼굴을 내밀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52] 훗날 명종(조선)이 외삼촌 윤원형을 숙청하긴 했지만 어머니 문정왕후가 죽은 이후에나 가능했다. 그나마도 파직에 그쳤고 아예 확실하게 조지라는 백관의 주청을 계속 묵살하며 자살에 이를 때까지 내버려두기만 했다.[53] 때문에 이방원도 일단은 공식 적장자인 형 이방과를 얼굴마담으로 세우고 그 양자로 들어가는 형식을 취해 사대부들의 지지 혹은 묵인을 확보하려 했던 것이다.[54] 본인의 복권은 불발되었지만 이미 태종대부터 가족들이 복권되고 본인의 정책이 수용되며 문집이 멀쩡히 간행되는 등 사실상 복권에 가까운 조치들이 잇따랐다. 당장 그가 집필하던 경국전부터가 지속적으로 국책사업으로서 진행되었다.[55] 하지만 그랬다간 오히려 고려 구세력의 반발이 더 커서 문제가 더 심각했을 것이다. 당장 구체제라고는 하지만 대체 뭘 가지고 구체제라고 해야 할 지 의문이기도 하고. 고려에 종사했던 인물들을 전부 쫒아낼 수는 없는 노릇이고 조선 건국에 반대한 자들은 이미 살해되었거나 쫒겨난 지 오래였다. 오히려 두문동 전설도 있듯이 고려의 구세력도 포용하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쪽이 백성들의 신망을 모으기도 쉽고. 조선 건국의 주역인 신진사대부조차 고려 구세력으로 여겨졌던 권문세가와 사실상 큰 차이가 없지 않냐는 말이 나오는 판국이다.[56] 후술하겠지만 이들은 사실 집안만 권문세족이지 사상은 이미 성리학을 배운 사대부 세력이었다.[57] 이와 관련하여 사대부 항목에 있는 실체 관련 논점도 같이 참고해보면 좋다.[58] 당연히 조준, 권근, 민제, 김사형 등은 방원 편에 붙거나 나중에라도 합류했다.[59] 4명 왕자들의 처가마다 처남, 동서가 두셋씩만 있어도 벌써 10여개 가문이 얽힌다. 당장 이방원만 해도 처남 4명에 처형 2명, 처제 1명이었으니 이들의 처가, 시댁과 처외가까지만 쳐도 이방원 한 사람의 안위에 이미 9개 가문의 목숨줄을 깔고 시작하는 싸움인 것이다.(사실 동서 중 하나는 사촌형인 이천우였지만) 이래서 혼맥이 무서운 것이다.[60] 애초에 정몽주 등 온건파 사대부들에 맞서 역성혁명을 지지하고 실행한 이들 자체가 강경파 사대부였다. 정도전은 그 강경파들조차 고개를 저을 정도의 초강경파였다.[61] 그래도 순치제는 홍타이지의 유일한 적자라는 명분은 있었다.(정확하게 말하면 공인된 복진 5명의 소생 중에서 장남이였고, 다른 복진이 낳은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다른 아들도 있긴 했지만 다들 서자다.(그래도 서장자 호격 같은 경우에는 나이상 숙부인 도르곤과 비슷한 연배에 여러 전공을 세운 사람이기에 후계자 다툼시 홍타이지의 측근세력들에 지지를 받았다.)[62] 사실 홍타이지 사후 이러한 후계 분쟁이 생겼던 이유는 누르하치가 어느 정도 세력분배를 하고난 이후이지만, 급사한 상황에서 홍타이지가 공동 통치자인 다른 형제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독재권을 황립한 것에서 불만이 나왔었다. 여기에 홍타이지 본인도 갑자기 급사를 하면서 혼란이 커졌는데, 홍타이지는 후계구도를 명확하게 정하지도 않은 상황이였다.(원래의 팔기의정에서 황제 중심의 행정체제로 변신하면서 두 체제 간의 간극이 생겼다. 홍타이지는 이를 자신의 능력으로 커버했으나, 사망하게 되자 누르하치의 방식대로 후계자를 팔기의정에서 선출하고자 했다.) 그러나 당시 누르하치의 마지막 정실이던 아바하이에 소생들(원래대로라면 이들은 누르하치의 유일한 적자들로 인정받아야 했으나, 홍타이지와 그의 이복형제들에게 압박받아서 강제로 조용히 살아야 했다. 이후 도르곤과 도도는 많은 전공을 세워서 팔기 중 2기를 장악하게 되었다.)이 팔기의정에서 다음 후계자로 선출될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자, 홍타이지의 측근세력들은 유언에서 아들로 후계를 삼으라고 했다고 하며 호격을 중심으로 뭉쳤다. 이러한 분란이 커질 위기에 이르게 되자 도르곤은 자신과 호격의 후계지위를 포기하고, 홍타이지의 인정받은 복진의 소생 중 연장자인 복림을 즉위시키자고 하고, 당시 가장 원로였던 홍타이지의 이복형 다이샨이 자신 대신 도르곤과 지르갈랑을 신황제의 섭정인으로 추천하여 결국 통과되었다.[63] 현빈 유씨가 내시 이만과 간통한 혐의로 내쫓겼다는 내용은 거짓이다. 실록에서는 그냥 어느 날 유씨가 폐출되고 이만이 참수당했는데 다들 대체 이유가 뭐냐며 시끄럽자 태조가 역정을 내며 이를 논한 대간들을 잡아 가두도록 했다고 기록했을 뿐이며 간통 혐의라느니, 정치적 의도에 적합한 새 세자빈을 맞기 위해서라느니 하는 것은 모두 추측의 영역이다. 정말 간통이라고 하면 두말할 것도 없이 아무리 어리다고는 하지만 집안관리 제대로 못한 방석의 허물이 되며, 정치적 의도에 의한 공작이라면 추진세력이 아니고서야 이렇게까지 해야 하냐는 회의, 실망, 자괴를 느낄 수밖에 없다. 결과적으로 어느 쪽이 되었건 방석의 입지와 권위는 흔들릴 수밖에 없는 사건이다. 모두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방석을 주시하는 상황에서 어쨌거나 세자빈을 폐출시키려 했다면 보다 그럴싸한 명분을 만들어 처리해야 했다.[64] 백제나 신라의 왕릉들이 수도 내에 위치한 경우가 여럿 있지만 이 시절의 공주, 부여, 경주는 본격적인 성곽도시는 아니었다. 공주는 백제의 도성 위치가 아직까지는 불분명하지만, 후보지 중 한 곳인 공산성이라면 성밖에 조성한 것이 되는 것이고, 부여는 확실히 나성 밖에 묘지들을 조성하였다. 경주는 4~5세기 조성된 무덤들이 경주시내 한복판이기는 한데, 이시기 왕성이 어디인지는 불명확하다. 대채로 월성을 통일 이전까지 왕성으로 보는데, 역시 성밖 인근에 조성한 것이 되고, 신라 중대 이후에는 주변에 산지에 무덤들이 조성된다. 반면 본격 성곽도시인 송악을 도읍으로 삼은 고려는 도성 바깥에 왕릉을 썼다.[65] 물론 신덕왕후의 친가인 곡산강씨 집안은 여러모로 보복을 당하긴 했다. 하지만 당장 신덕왕후의 친가만 해도 오빠인 강계권이 직첩과 전민을 몰수당하는 정도에 그쳤다. 이종조카들의 경우도 신극례의 큰형인 신극공과 같은 항렬의 신극온이 직첩과 전민들을 회수당한 것 외에 처벌받은 이력이 전무하고, 그 신극공도 태종 13년에 풍패지향인 완산부윤으로 화려하게(?) 부활한 모습이 기록된다. 종친, 그것도 당숙인 순녕군 이지마저 투옥 후 귀양보낸 마당에 고작 직첩과 전민을 몰수하는 것으로 끝났다는 것은 매우 온건한 처분이었다.[66] 이제나 경순공주, 이제의 아버지인 이인립 모두 생년을 알 수 없다.[67] 태조실록 권1 원년 8월 20일[68] 태조실록 권5 태조 3년 2월 29일[69] 다만 이방원이 밀려났다고 보기에는 약간의 어폐가 있는 것이 전라도는 전주이씨의 본적지라고 할 수 있는 全州가 있는 곳으로 중요도가 있는 곳이였다.(전주의 경기전에 태조 이성계의 초상이 그냥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권한을 빼앗기는 것이기에 신덕왕후의 소생들에게 힘을 몰아 주겠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70] 시기가 명시되어 있지는 않으나 기사의 서술을 볼 때 대강 이방번이 좌군절제사가 된 1393년쯤의 일로 보인다.[71] 월탄 박종화의 작품인 소설 세종대왕, 그리고 이를 원작으로 한 용의 눈물에서 이 부분이 꽤 살벌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묘사되어있다. 정도전 일당이 왕자들을 지방에 분봉하자고 건의하여 태조가 대신들을 모아 의견을 묻는데, 자리에 참석한 정안군의 장인 민제는 손바닥만한 나라에서 이게 무슨 소리냐며 황당해 했고, 정안군과 손을 잡은 하륜은 대번에 "그거 천자만 하는 건데 명나라에는 어떻게 설명하시게요?"라고 했다. 이에 다급해진 정도전 쪽에서 "아니 뭐 꼭 분봉까지는 아니어도 절제사 같은 걸로 내려보내서 경험도 좀 쌓게 하고 왕자들끼리 왕실도 수호하고요" 라며 둘러대자 역시 하륜이 "그랬다가 왕자들이 반란 일으키면 어쩌려고?"라고 받아쳐 정도전도, 태조도 아무 말도 못했다.[72] 이 과정에서 홍무제는 정도전 파벌이면 억류하거나 죽이고 그의 반대파나 중도파면 우대해 자신의 뜻을 전한다.[73] 이때 태조는 권근이 노모가 계시는데도 스스로 자원하여 명에 가는 것에 고마워서 노자까지 두둑히 주어 그를 배웅했다.[74] 이것이 이렇게 크게 작용하는 것은 표전문 사건때 홍무제정도전을 꼭집어서 오라고 명령하면서, 당시 파견된 사절단과 이후 사건을 해명하러간 사절단들을 억류하거나 죽여버렸다. 이에 명나라의 수도 난징까지 가는 길이 어렵고 힘든 것은 둘째치고 가면 무자비한 홍무제의 칼에 목숨부지가 어려운 일이었다.[75] 1차 요동정벌은 원이 명의 북벌을 막아내는 와중에, 2차 요동정벌은 나하추가 명에 귀부한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명의 요동 장악력이 낮은 상황에서 추진되었다. 반면 위화도 회군으로부터 이미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태조 치세 말기쯤 되면 이미 명사 최강의 인간흉기로 꼽히는 연왕 주체가 북경에 부임하여 북방을 평정한지가 벌써 20년이 다 되어간다. 게다가 정난의 변 항목을 참조해보면 알겠지만, 요동은 무주공산이 아니라 연왕을 견제할 만큼의 상당한(명사 철현전에 의하면 '''10만'''의 군사.) 중앙 직속 병력이 따로 주둔하고 있었다.[76] 드라마 정도전에서는 이때 남은이 송현방 집에 새로 첩실을 들이면서 훈련에 소홀해진 것으로 설정했다.[77] 이 중 이무는 17일 후에 정도전을 배신하고 정안군에게 살해계획을 알리는 역할로 실록에 기록된다. 이무는 당시에 왕실의 지친도, 공신도 아니라는 이유로 유일하게 파직당했는데 이 때의 원한이 작용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78] 태조 7년에 사병을 혁파하고 중앙군으로 재편하면서 군사훈련을 맡긴 것이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을 비롯한 종친들이었다. 즉 의안백 이화와 이방과 형제들이 모두 군무를 맡고 있던 상황인데, 이는 다시말해서 요동 공격이 실행에 옮겨진다면 왕자들이 병력을 이끌고 출전하는 상황도 충분히 가능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2차 요동 정벌도 최영이 이성계를 제거하려는 복안이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지만 최영과 이성계의 사이가 좋았다는 반론이 있는 데 반해, 정도전은 이미 신의왕후 소생 및 종친들과 사이가 틀어질 대로 틀어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도전이 요동 공격을 통해 왕자들이 전장에서 명군의 칼에 맞아 죽기를 바라고 있다는 의심을 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혹여 요동 공격이 성공한다 해도 왕자들은 요동 방위를 구실로 현지에 처박힐 것이고 세자가 어물쩡 숟가락을 올려 후계구도를 다질 것이며, 요동 공략에 실패한 채 살아돌아온다면 패전을 빌미로 숙청당할 가능성이 높다. 위화도 회군을 직접 겪어본 신의왕후 소생 왕자들, 특히 아버지를 따라 종군했던 이방과나 개경의 가족들을 직접 피신시키고 뒷수습을 한 이방원이라면 뜬금없는 요동 공략의 진짜 저의가 무엇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79] 용의 눈물에서는 이방원이 궁에서 무사히 탈출하자 일이 글렀다고 판단한 이무가 급히 신발을 거꾸로 신은 것으로 설정했다.[80] 드라마 용의 눈물에서는 이숙번이 정릉숙위군으로 안산병력을 이끌고 도성에 들어와 있는 시기를 쿠데타 결행일로 잡았다. 당대의 정릉은 바로 지금의 영국대사관 자리에 있었으며 이곳은 광화문에서 도보로도 20분이 채 안 걸리는 곳이다. 현대인들보다 훨씬 달리기에 능한 당대의 병사들에게는 정말로 궁궐 코앞이나 마찬가지. 정말로 이랬다면 정릉을 굳이 도성 안에 쓴 태조의 고집이 파멸을 불러온 셈이다. 이숙번의 정릉숙위는 용재총화에 기록되어 있는데, 실록에서는 정릉숙위에 관한 기록은 없고 이방원이 미리 이숙번에게 일러 자기 집 근처 신극례(辛克禮)의 집에 병장기를 갖추고 유숙하고 있도록 했다. 물론 임지를 떠나 수도에 체류하고 있으려면 정릉숙위 같은 공식적인 명분이 갖추져 있긴 했을 것이다.[81] 12.12 군사반란 시기 대구 50사단장으로 내려가있던 정호용의 상황과 비슷하다[82] 사실 지금의 광화문 앞은 당시 육조거리로 행정관청들이 밀집된 지역이였다. 이 거리에서 남산까지 불분명한 무리들이 가득찬 상황에서 좌정승인 조준이 할 수 있는 행동이 있을리 만무했다. 그렇다고 누구인지도 모르고 기다렸다는 듯이 달려가서 항복할 처지도 아니니 잠깐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다만 조정대신들의 수장이라는 자가 위급상황에서 이도저도 아닌 어정쩡한 행동을 보인 것에 대한 악필이지 않을까 싶다. 비슷한 사례로 12.12 사태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노재현이 있다.[83] 태조가 아버지의 천첩이었던 김씨를 개경으로 모셔와 깎듯이 대접하고 이복동생인 이화나 집안의 눈엣가시였던 사촌동생 이지 등도 보살펴주며 모범을 보인 것을 생각하면 후계자 문제만 아니었어도 큰아들들이 아버지의 사례를 좇아 서모와 이복동생들을 챙겼을 가능성은 꽤 높다.[84] 사실 신덕왕후가 10년만 더 살았어도 이방석을 왕위에 올려놓는 정도는 충분히 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이방과와 이방원만 숙청할 수 있었다면 말이다.[85] 운 좋게도 그의 딸이 태종의 장인인 민제의 자손들과 혼사를 맺은 게 그의 생명을 구원해주었을 가능성도 크다. 그는 이후 다시 복귀하여 태종 대에 우의정까지 오르는 등 탄탄대로를 걸었지만 양녕대군의 폐세자 문제와 민무휼 - 민무회 옥사로 귀양크리를 타는 등 크게 곤욕을 치렀고 세종이 즉위하고 나서야 정계에 복귀할 수 있었다.[86] 이 시점에서 이성계의 적장남은 방과다. 이복근한텐 왕위를 주장할 정통성 같은 건 없었다.[87] 이로 인해 이성계의 노여움을 사 조영무와 함께 잠깐 유배당한다. 정황상 미리 포섭당한 인물이었을 것으로 보인다.[88] 용의 눈물에서는 조영무와 이천우가 궁궐수비대와 대치하면서 투항을 종용하고, 박위는 궁궐 수비병력의 부재에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부각된다. 참고로 이천우 역시 이원계의 아들로 아주 가까운 종친이다.[89] 심지어 당시 이방원이라면 백정 놈이라며 이를 갈았던 태조조차도 방간의 반란 소식에 방간이 바보같은 짓을 했다며 방간을 나무랐다.[90] 명목상 왕은 정종이었으나, 정종에게 올라오는 모든 상소와 국서는 이방원이 모두 보고 있었으며, 정종은 항상 이방원과 상의한 후에 정책을 시행했고, 대부분은 이방원의 뜻대로 되었다. 애초에 정종 본인도 전형적인 무골이지 정치에는 관심이 없던 데다가, 괜히 왕위에 욕심을 부려서 이방원과 틀어지면 좋을 게 없다는 건 잘 인지하고 있었을 테니 바지사장인 것에 대해 딱히 불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 자신이 상왕으로 물러난 후에도 이방원과 장난을 치며 같이 놀기도 할 정도로 형제애를 유지하기도 했고.[91] 정종의 아우이니 세제(世弟)가 맞지 않냐는 사람이 있는데 이방원은 당시에 세자가 맞다. 정종도 '아우를 어떻게 세자라 할 수 있느냐'는 신하들의 말에 '이참에 아우님을 아들 삼아버리면 되지 않느냐'고 대답했다. 정종에게 아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조리 서자라서 태종이 계승권을 잡아도 별다른 반발을 할 수 없었다. 유교적 소양이 깊은데다 과거 합격까지 한 이방원이 세제와 세자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을 리는 없고 이후 숙종 때까지 정종에게 제대로 된 묘호도 올리지 않았던 사실을 보면 정종은 그저 징검다리일 뿐이고 이방원은 자신을 태조 이성계의 세자로 인식했던 듯 싶다. 또한 현실적으로 이전까지 태제/세제가 책봉된 전례도 없었다. 다른 해석으로는 세제는 형의 후계자인 동시에 아버지의 후계자이기도 하므로 두 눈 멀쩡히 뜨고 살아있는 아버지, 즉 상왕 이성계의 윤허, 적어도 묵인이 필요하기에 꼼수를 쓴 것으로 보기도 한다(용의 눈물에서 이를 따랐다.) 이를 보자면 실록에서는 상왕, 정종, 세자가 서로 하하호호 하며 왕의 도리를 논하고 있었다지만 실상은 여전히 살벌한 대립이 이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92] 여담으로 순종 융치제는 동생인 영친왕 이은을 태자로 세웠고 이에 대신들이 태제라며 반발하자 오늘부터 영친왕을 아들로 여긴다고 말하며 밀어붙였다. 이 경우는 실권이 영친왕에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순종이, 혹은 고종이 직접 후계자로 영친왕을 지목하고 정통성을 부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고종 입장에서는 순종이든 영친왕이든 모두 자신의 후계자라는 것이며 이는 특히 일본의 강압에 의한 양위에 대해 일종의 항의 제스쳐를 보인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러나 저러나 왕조의 시작과 끝이 비슷한것도 우연의 일치.[93] 조사의의 난의 경우는 명목상 조사의가 들고 일어난 난이지만 실제로는 태조가 배후에서 지휘하여 일으킨 난이라는 것이 정설이며, 실제로 태조의 거처에 태종이 방문한 뒤로 손쉽게 와해되었다. 태조가 결국 태종을 정식으로 인정해준 이유야 정확하지 않지만 조사의의 난 이후 시점에서 더 이상 왕이 될 적합한 사람도 없었고, 백성들의 여론도 썩 우호적인 상황은 아니었기에 조선을 지키고 이어가야한다는 이해관계와 현실적인 부분으로 인해 결국 다른 선택지가 남아있지 않았다.[94] 신검의 경우에는 견훤이 금강을 세자로 세우려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과 왕위 욕심 그리고 금강이 왕이 되면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불안감에 쿠데타를 일으킨 것일 뿐이다. 신검의 지지층으로서는 딱히 견훤에게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신검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도 민심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하고, 견훤이 고려군으로서 침공했을 때 후백제의 군사들이 쉽게 무너진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즉, 태조와 정도전의 정책에 불만을 가진 공신과 종친이라는 지지층이 있던 이방원과 달리 신검은 개인적인 욕심에서 쿠데타를 일으켰을 뿐, 신하들의 입장에서는 딱히 견훤의 구정권에 불만을 느끼지 못한 상황이라 공신들의 지지가 약했고 신검 본인의 통치능력도 이방원에 비해 한참 모자라 정부 장악에 실패한 것이다.[95] 용의 눈물에서는 이 대목에서 경복궁 수비병력에게 항복을 종용하는 이천우와 조영무가 "횃불만 많이 들려놨지 실상은 별 거 없는데 이거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 하며 안절부절하는 모습을 통해 실록의 상반된 기록을 이방원 측의 허장성세와 블러핑으로 해석, 나름 설득력있게 그려냈다.[96] 세종대왕이나 용의 눈물이 실록의 기록에 충실했다면, 정도전은 이를 약간 뒤틀어서 다른 왕자들이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며 내빼는 와중에 이방원 혼자 당당히 입궁했다가 정도전에 의해 강제로 태조에게 은퇴선언을 하는 굴욕을 맛보는 것으로 각색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자마자 바로 거병하면서 제1차 왕자의 난 개막.[97] 단 용의 눈물도 기록을 뒤튼 부분은 있는데 왕자들을 살해하려는 음모는 남은과 심효생이 꾸몄고 정도전은 이를 전혀 모르고 있던 것으로 각색했다.[98] 본 기록은 태종실록에 수록되어 있으므로 여기서의 임금은 태종 이방원을 말한다.[99] 하륜은 태조실록 편찬 당시 영춘추관사로 편찬작업을 총지휘했으며 아직 생존한 관계자가 많아서 시기상조라는 반대를 정면으로 돌파해가며 편찬을 성사시켰다. 그런 그가 자신의 공적을 부풀리면 모를까 굳이 숨기거나 축소할 이유가 없다.[100] 이상할 것도 없는 게 쿠데타라는 게 원래 이 사람 저 사람 끌어들이는 과정에서 말이 새나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당장 5.16 군사정변만 해도 박정희가 쿠데타 일으킨다는 첩보가 몇 달 전부터 마구 날아다녔다.[101] 인조실록과 승정원일기를 비교해보면 왕의 말조차 교묘하게 잘라 붙여서 전혀 다른 의미로 만들어 놓아서 오늘날 인조 시대에 대한 편견을 만들어 냈다. 아예 없는 내용을 지어내는 경우는 드물지만 있었던 일 혹은 전해지는 일을 요리조리 짜맞춰서 다른 맥락으로 해석하게끔 만드는 일은 드물지 않았다.[102] 그 중 한 번은 천도를 위해 순방하던 중에 난 병으로 인한 물갈이로 추측된다.[103] 어떠한 스트레스 상황에서 받는 스트레스의 정도를 수치화해서 표현한 '사회재적응평가척도'에 따르면 배우자의 죽음으로 받는 스트레스는 100점으로, 이와 같은 수치는 본인 생명의 위협밖에 없다.[10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서는 승녕부 항목에서 태조의 병이 이질이었다고 적었는데 딱히 근거를 제시하진 않았다.[105] 1398년의 동지는 음력 11월 5일이었으므로 8월 26일은 양력 10월 초였음을 알 수 있다.[106] 이 해에는 윤달이 있었다.[107] 3년상이 끝난 후 갈아입는 평상복[108] 이 때 중국 사신으로 온 신귀생은 영흥 출신의 명 환관으로, 6월 말 조선에 들어와 태조를 만나고 7월 초에 고향 영흥으로 돌아갔다. 태조가 베푼 연회자리에서 칼을 빼드는 등(...) 행패가 막심해 오죽하면 연회자리에서 신귀생을 말린 환관 조순을 사대부들이 초청해서 극진히 대접했을 정도. 그리고 신귀생이 돌아간 직후 조정에서 본격적으로 요동정벌을 둘러싼 논쟁이 격화되었다.[109] 동서고금을 통틀어 왕의 병은 물론이고 죽음마저 은폐한 사례는 수도없이 많다. 애초에 조선왕조 500여년을 통틀어 왕이 아프다고 계엄 때린 사례도 찾기 힘들다.[110] 실록의 기록을 보면 이제는 이화와 태조의 만류로 반격을 포기한 후 이방원의 지시로 그냥 집에 갔다가 반란군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고 되어 있다. 즉 기록대로라면 이방원은 자기가 집에 보내준 사람을 쫓아가 죽인 희대의 통수왕이라는 소리인데(물론 이방원은 이제가 죽었다는 소리에 놀라서 수습을 지시했다고 하지만) 태종대에 편찬된 실록이 굳이 금상을 통수왕으로 만들 이유가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안군 변호 부분을 제외하고는 윤색의 가능성은 낮다. 정 윤색을 시도했으면 통수질을 변호하느니 차라리 이제가 태조의 만류에도 뛰쳐나와 칼부림을 해대니 부득이 죽일수밖에 없었다고 쓰지 않았겠는가?[111] 실제로 중종반정 이후의 연산군이나 인조반정 이후의 광해군이 모두 이랬다. 심지어는 이들이 죽고 난 이후에도 명 사신만 오면 살아있다고 해야 하나 죽었다고 해야 하나 고민했을 정도.[112] 반대로 태조 역시 조사의 등이 동북면에 부임하고 자신의 측근들을 동북면에 올려보내 병력을 마련하는 등 준비가 갖춰질 때까지 무인정사 당시의 무기력했던 모습을 이용해 힘빠진 뒷방 늙은이를 열심히 연기하다가 한순간에 타이밍 잡아서 동북면으로 올라가버렸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 태조는 이미 조사의의 난을 일으키기 전에 한 번 안변까지 올라갔다가 개경으로 환궁한 뒤에 다시 안변으로 가서 난을 일으켰던 것이다.[113] 일각에서 태조가 태종 이방원을 사람 대접도 안 했다는 인식이 있지만 적어도 무인정사 이전까지는 태조가 여러모로 다섯째 아들인 이방원을 신경쓴 기록이 있다. 위에서 나온 것처럼 분봉 이야기가 나오자 넌지시 이방원에게 말이 많이 나오니 조심하라 이르기도 하고, 이방원을 명에 보낼 때는 눈물을 글썽이며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허약해서 만리의 먼 길을 탈 없이 갔다가 올 수 있겠는가?" 하며 걱정하기도 했다. 정몽주 살해건으로 인해 국왕으로서의 재목은 아니라고 보긴 했지만 그래도 이만한 능력자 아들, 그것도 과거에 급제하여 자신의 컴플렉스와 한을 풀어준 아들은 이방원 밖에 없었으니 마음이 쓰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평소에 태종을 아끼지조차 않았다면 조사의의 난을 일으키기까지 해놓고 차라리 자결 소동을 벌이든가 했지 조용히 환궁하여 여생동안 태종과 잘 지내진 않았을 것이다.[114] 그런데 이건 또 이것대로 태종 공인 인싸였고 본인 스스로도 죽을 짓은 안했다던 남은을 오늘만 사는 위인으로 만들어버린 감이 있다. 남은의 이런 과격파 기믹은 이후 정도전(드라마)에서도 그대로 채택되었다.[115] 이 때 정도전 일파였던 이무가 배신하고 거병을 준비하던 이방원 일파에게 와 합류한다. 박포가 이무를 죽이라고 하지만 이방원은 이를 받아들인다.[116] 사실 방원이 죽인 거나 마찬가지다. 살려주겠다 해놓고 막상 옆에 있던 방간이 칼 들고 뛰어가자 "형님!" 하고 그를 딱 한번 부르기만 하고 그냥 지켜본다. 이방원 본인은 보내줬는데 이방간이 독단적으로 쫓아가 죽인 것이니 이방원 입장에서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이방원에게 살려달라고 했지, 이방간에게 살려달라고 하지는 않았으니까.[117] 해당작가가 1990년 집필한 파천무의 살생부 씬을 그대로 써먹었다.[118] 작중에는 이방원이 밀리다가 하륜의 충청도 군대가 투입되면서 전세를 뒤집는 것으로 묘사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부분은 심각한 오류이나 드라마 스케일 상 이거이, 신극례, 이천우 등 주요 지휘관급들을 죄다 생략해버린 탓에 주력군을 등장시킬 방법이 하륜의 충청군 외에 딱히 없었던 현실적인 문제를 감안할 필요는 있다.[119] 다만 용의 눈물이나 정도전 등의 사극에서는 베어 죽인 반면에 여기서는 찔러 죽인다.[120] 용의 눈물과 정도전에서는 남은이 정도전보다 먼저 죽었다. 다만 태종의 의심(조영규 장례식에 온 주변 지인들을 사랑채로 모셨으나 이신적만큼은 제외했다)을 받는 이신적이 태종 밑에서 입신양명 할 수 있게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추격하는 병사들에게 칼을 맞아서 도망가기도 어려운 상황이었으니. 물론 이 일로 이신적은 관직에 복귀하게 되고 후속작에서 보듯이 우의정까지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