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알렉산드로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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Борис Александрович Александров(1905년-1994년)
보리스 알렉산드로비치 알렉산드로프[1]
1. 개요
소련군 소장, 알렉산드로프 앙상블의 2대 단장.
2. 생애
2.1. 소년기와 청년기
1905년 8월 4일, 볼고로예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프가 음악인이었던만큼, 그도 어린 시절에 자연스레 음악과 친한 환경에서 지낼 수밖에 없었고 이미 열세 살 때부터 볼쇼이 극장의 비올라 연주자이자 소년 합창단원으로 활동했었다. 그 유명한 오페라 가수 표도르 샬리아핀 앞에서 검은 눈동자를 공연할 정도의 수재였다고. 그 후부터 보리스는 샬리아핀을 롤모델로 삼기 시작했다고 한다.
1923년부터 1929년까지 모스크바 음악학교에 재학하면서 작곡가 라인홀트 글리에르의 작곡 수업을 받게 되었다. 이 때 학교에서 연극 배우로 활동을 하기도 했고, 작곡과 작사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그 후 보리스는 아버지가 이끄는 M. V. 프룬제 붉은 군대 중앙 회관의 붉은 군대 합창 앙상블의 단원으로 활약하기 시작한다. 앙상블 단원 활동을 하면서 30대의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1941년까지 모교 모스크바 음악 학교의 부교수를 겸임하기도 했다.
2.2. 독소전쟁기
그러던 와중, 6월 22일. 대조국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이 시기 알렉산드로프 앙상블은 라디오 공연을 통하여 독일군과 치열한 혈전을 치르는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아주었다. 벨라루스나 우크라이나의 파르티잔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성스러운 전쟁을 들었을 때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는 이야기도 있을만큼 앙상블의 공헌은 상당했다.
알렉산드로프 앙상블은 라디오 공연에만 만족하지 않고 전선 각지를 돌면서 순회공연을 했다. 보리스는 아버지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프를 도와주면서 많은 공연에 참가했다. 라디오 공연과 전선 순회 공연을 합치면 전쟁 4년 동안 약 '''1500번'''의 공연을 했을 정도.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으나 보리스의 아버지이자 앙상블의 단장인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프가 덜컥 심장병에 걸리는 바람에 보리스는 아버지가 하던 일을 도와 앙상블 업무의 상당부분을 대신 처리했다. 알렉산드르의 심장병은 결국 낫지 않았고 , 독일을 개발살낸 후의 1946년, 독일 점령지구 공연을 앞두고 알렉산드르는 결국 죽게 된다.
2.3. 앙상블을 이어 받다
보리스 알렉산드로프가 드디어 앙상블을 이어 받았다. 보리스도 아버지 못지 않은 조련 실력을 발휘했고, 임기 동안 사회주의노력영웅과 소련 인민예술가 칭호를 비롯한 여러 훈장과 메달을 수여받았다. 1949년 2월 7일에 앙상블은 대조국전쟁에 참가한 공로를 인정받아 적기훈장을 두 번째로 수여받았고, 창립 20주년을 기념해 적성훈장도 수여받았다. 같은 해 6월 10일에는 창립자의 이름을 따 '2중 적기훈장과 적성훈장을 수훈한 A. V. 알렉산드로프 소련군 가무 앙상블(Дважды Краснознамённый ордена Красной Звезды ансамбль песни и пляски Советской Армии имени А. В. Александрова)'로 개칭되었다.
보리스 알렉산드로프가 지휘한 앙상블은 공산주의 이념이나 선전하는 프로파간다 앙상블이 아니라 국제적인 인지도와 명성을 쌓는 예술 단체로 성장했다. 보리스는 1987년에 은퇴할 때까지 엄격한 훈련으로 앙상블을 이끌었고, 특히 지휘자가 없는 상태에서도 합창단과 관현악단이 30분 이상 흐트러지지 않고 공연을 할 수 있도록 단련시켰다. 덕분에 지휘자가 퇴장한 뒤에도 악단과 합창단은 탁 트인 무대에서 계속 공연을 진행했고, 그 앞에서 무용수들은 자신들의 춤을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게 되었다.
스탈린 사후 데탕트 시기가 찾아오자 앙상블은 영국, 쿠바, 일본, 중국 등 세계 각지에서 68회의 순회 공연을 가지면서 해외에도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1978년에는 창단 50주년을 맞아 정통(академический) 칭호를 받았고, 이름도 '2중 적기훈장과 적성훈장을 수훈한 A. V. 알렉산드로프 정통 소련군 가무 앙상블(Дважды Краснознамённый ордена Красной Звезды академический ансамбль песни и пляски Советской Армии имени А. В. Александрова)'로 또 개명되었다. 이것이 소련 시절 이 앙상블이 최종적으로 가졌던 공식명칭이다.
2.4. 은퇴와 사망
1985년, 그는 팔순을 맞이하였다. 자신이 늙었다는 것을 직감한 보리스는 은퇴를 결심하게 되고, 1987년 마침내 공식적으로 앙상블의 단장 자리에서 내려오게 된다. 1994년엔 그가 하던 마지막 일인 지휘마저도 그만 두었고, 같은 해. 향년 88세로 사망하여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2]
말년의 보리스를 찾아온 앙상블 솔로이스트들을 다룬 영상. 지휘자로 활동하던 때와 비교하면 많이 홀쭉해진 인상이다. 그 외에 기르던 강아지도 노래하게 만드는(...) 왕년의 솔로이스트들의 녹슬지 않은 실력도 인상적이다.
3. 보리스의 작품
보리스는 죽기 전까지 150개의 곡을 작곡, 편곡하였다. 교향곡, 실내악곡, 기악곡, 합창곡, 극음악 등 다양한 분야를 다루었다. 물론 그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작품성이 높은 장르는 바로 군악이다.
우리의 국가 영원하라라고 하는 곡이 특히 유명한데, 이는 1943년 소련의 국가 공모전에 출품하기 위해 쓴 작품이였다만, 아버지 곡의 포스를 이기지는 못했는지 국가 공모전에선 탈락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이 흐른 후 현재 세계 유일의 소련빠(?) 국가인 미승인국 트란스니스트리아의 국가로 (다만 개사되어) 쓰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