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리스 옐친

 




'''러시아 연방 제1·2대 대통령
보리스 니콜라예비치 옐친[1]
Бори́с Никола́евич Е́льцин
Boris Nikolayevich Yeltsin
'''
<colbgcolor=#A81717><colcolor=#EFD88F> '''출생'''
1931년 2월 1일
[image] 소련 러시아 SFSR 우랄주 붓카구 붓카(Бутка)
(現 [image] 러시아 스베르들롭스크주 탈리차시 붓카)
'''사망'''
2007년 4월 23일 (향년 76세)
러시아 모스크바
'''재임기간'''
초대 대통령
1991년 7월 10일 ~ 1996년 8월 9일
제2대 대통령
1996년 8월 9일 ~ 1999년 12월 31일
'''서명'''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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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81717><colcolor=#eFD88F> '''부모'''
아버지 니콜라이 이그나티예비치 옐친
(Николай Игнатьевич Ельцин)
어머니 클라브디야 바실리예브나 옐치나[22]
(Клавдия Васильевна Ельцина)
'''배우자'''
나이나 이오시포프나 옐치나[23]
(Наина Иосифовна Ельцина)
'''자녀'''
장녀 옐레나 보리소브나 오쿨로바
(Елена Борисовна Окулова)
차녀 타티야나 보리소브나 유마셰바
(Татьяна Борисовна Юмашева)
'''학력'''
우랄 기술대학교 (석사)
'''종교'''
러시아 정교회
'''신장'''
187cm
'''소속 정당'''


1. 개요
2. 생애
2.1. 초기
2.2. 대통령
3. 개인사
4. 평가
4.1. 러시아의 평가
4.2. 서방의 평가
5. 한국과의 관계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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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러시아 연방의 제1·2대 대통령.
1987년 인민대표회의 의원으로 선출된 이후에 급진 개혁파 정치인으로 명성을 얻었으니, 1990년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회의 주석으로 취임했으며, 1991년에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으로 당선했는데, 1991년 8월 쿠데타를 성공적으로 저지하면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의 실권자로 떠올라 그 해 말 소련 해체를 주도하였고 1991년부터 1999년까지 러시아 연방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재직하였다.
옐친은 개혁파 정치인으로 처음 등장하여 소련이 붕괴되기 전까지는 러시아 시민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으나, 1991년 독립 이후 경제개혁 실패, 최고회의 해산 등 무능한 모습을 보이며 국민들의 지지를 잃었다. 특히 충격 요법으로 대표되는 신자유주의 경제개혁을 추진해 러시아 경제를 양극화하고, 소련 시절 쌓은 경제 기반을 전부 무너뜨리면서 러시아는 1990년대를 통틀어 기나긴 불황을 겪어야 했다. 이후 1996년 제1차 체첸 전쟁 패배, 1998년 러시아 모라토리움 위기 및 탄핵 시도로 정치적 입지가 땅에 떨어졌다. 이후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완전히 끝났음을 직감했고, 건강 문제까지 겹쳐 1999년 12월 31일 당시 총리였던 블라디미르 푸틴에게 정권을 넘기고 정계에서 은퇴, 2007년 사망했다.
시기적절하게 후임 푸틴에게 대통령직을 넘겨 주었고, 푸틴과 통합 러시아당이 일당독재라는 비판을 들을지언정 지속적으로 정권 재창출에 성공을 거두면서 말년에도 존중받는 삶을 살았다. 대중들의 평이 어떻든간에 러시아 연방정부로부터 국부 수준으로 대접받아왔기 때문에 퇴임 후에 러시아 연방정부나 통합 러시아당, 러시아 공산당, 러시아 자유민주당 가릴 거 없이 푸대접하는 미하일 고르바초프보다는 나은 삶이기는 했다. 러시아인들이 옐친을 어떻게 생각하든간에 푸틴은 공석에서 옐친을 비하한 적이 없고 되려 옐친을 추모하는 의미에서 옐친의 이름을 붙인 문화센터가 개장되는 것을 보면 러시아 연방정부 차원에서 옐친을 존중하는 기조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
러시아 역사상에서 옐친 정권기는 1917년 2월 혁명 이후 제정이 무너진 러시아와 여러 면에서 많이 비견될 만한 시기였다는 평가가 있다. 그러나 러시아 공화국(임시정부)이나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은 분명 합법적 선거와 운영 체제로 국가를 통치했지만 옐친은 비합법적인 독재를 일삼았다.

2. 생애



2.1. 초기


옐친은 1931년 2월 1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우랄주 붓카구(現 러시아 연방 스베르들롭스크주 탈리차시)에 위치한 붓카(Бутка)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절에 건축 기사로 지내다가 1961년에 소련 공산당에 입당했다. 뛰어난 흡인력과 업무 능력으로 빠르게 승진하여 1976년에 스베르들롭스크주 지구당의 제1서기가 되었고, 1981년에 공산당 중앙위원이 되면서 승승장구하게 된다. 훗날 그와 원수가 되는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지도자가 되면서 고르바초프는 옐친을 등용하여 모스크바시 지구당의 제1서기(한국으로 치면 서울특별시장 권한대행)가 되었다. 옐친은 모스크바시 지구당의 제1서기 시절 정치개혁을 주장하다가 보수파들의 반발에 1987년에 해임되었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대중적인 인지도를 쌓아 올려갔고, 개혁의 상징이 되었다.
그 결과 1989년 소련 첫 자유 총선거 때 모스크바 선거구에 출마, '''89%의 득표를 얻어''' 초압승을 거두었고, 그의 동료들도 대거 의원직에 당선되면서 보수파의 세를 누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때부터 급진적인 노선을 본격적으로 주장하여, 절충 개혁을 주장하던 고르바초프와 점차 갈등을 빚기 시작한다. 결국 1990년 공산당을 탈당했다. 원래는 고르비가 급진 개혁을 추진했지만 개혁 정책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개혁파 내부에서도 이견이 나왔고, 그 과정에서 고르바초프가 절충 개혁을 주장하게 되자 이에 대항해 옐친이 고르바초프를 몰아붙이면서 공산당을 탈당하게 된 것. 이 과정에서 그의 주벽에 대한 얘기가 보수파 사이에서 나왔지만 옐친의 인기는 더더욱 높아졌다. 1990년 5월에 옐친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회의 주석으로 취임하면서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의 입지를 완전히 굳히게 된다. 이 당시의 보리스 옐친은 의전상으로 광역자지단체장에 해당되어야 하지만 경제개혁의 실패로 고르바초프의 인기가 떨어지면서 이때부터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거듭났고 세계에서 가장 넓은 행정구역인 러시아의 단체장을 맡고있다는 점때문에 그 무게감은 엄청났다.
당시 소련에서는 페레스트로이카 과정에서 소련 공산당 위주의 중앙집권제를 약화시키기 위해 공화국 정부의 권한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 과정에서 공산당 보수파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조지아 공산당 제1서기였던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ედუარდ შევარდნაძე, 1928년 1월 25일 ~ 2014년 7월 7일) 같은 공화국 정부 출신 인사들을 대거 포섭했고, 그런 혜택을 받은 인물들 가운데 하나가 옐친이었다. 옐친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을 대표하는 정치인으로 성장하면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고, 1991년 6월 12일에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 선거에서 58%만큼 득표했으니, '''무소속 후보로서 국내 최초로''' 러시아 연방의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2.2.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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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8월 보수파들이 쿠데타를 일으키자 옐친은 러시아 시민들에게 실력 행사를 호소, 보수파의 쿠데타를 막아 내면서 소련을 장악할 수 있었다. 당시 소련 정부는 개혁파였던 고르바초프와 보수파였던 겐나디 야나예프(Геннадий Янаев, 1937년 8월 26일 ~ 2010년 9월 24일),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Владимир Крючков, 1924년 2월 29일 ~ 2007년 11월 23일) 등 두 세력 모두 쿠데타로 인해 몰락한 상황이었고, 중앙정부가 사실상 무력화되면서 옐친은 이 공백을 이용해 고르바초프와 보수파의 지지 기반이었던 소련 공산당을 압박하여 정국을 원하는 대로 주도해 갈 수 있었다.
1991년 12월 21일 옐친은 벨로루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등의 지도자와 벨라루스에 있는 벨라베자 숲(Белавежская пушча, Biełaviežskaja Pušča)에서 만나 함께 소비에트 연방을 해체하고 독립국가연합의 결성을 선언했다. 조약 체결 이후, 12월 12일에 러시아 최고 소비에트는 1922년의 소련 수립 조약을 폐기하였고, '신연방 조약'의 체결을 준비하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도 사임하게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러시아인 중 그 누구도 그가 어떤 정책을 펼칠 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새 러시아의 대통령이 된 옐친은 경제 개혁을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그나마 간신히 지탱되던 경제를 빈사 상태로 몰아넣었다. 원래 러시아 경제는 페레스트로이카 시절 추진한 경제 자유화의 후유증을 떠안으면서 거의 파산에 가까운 수준이었지만,[3] 당시 재무장관이었던 예고르 가이다르(Егор Гайдар, 1956년 3월 19일 ~ 2009년 12월 16일)가 추진한 경제 개혁 정책의 일환으로 예금동결과 가격 자유화를 무리하게 추진하면서 실패해 버렸다.
사실 고르바초프 시절 추진한 가격 자율 지정화[4]로 인해 이미 후유증이 컸다는 사실을 생각해 본다면 가이다르의 개혁은 너무 조급하고 낙관적이었다. 가격지정 자율화는 국영기업들의 생산성을 늘릴것으로 생각되었지만 되려 기업들은 국영상점에서 팔아야 될 물건을 농민시장에 내다파는 식으로 수익을 창출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값싸게 물건을 사려면 발품을 수시로 파는 것이 일상이 되는 등 유통구조가 왜곡되었다. 가이다르는 기업들이 난잡한 유통구조를 이용해서 수익을 창출하는 행태나 타 동유럽 국가에서 가격자유화로 인한 임금 및 자산손실이 엄청났던 점을 감안하지 않고 가격자유화를 시행한 결과 물가를 수십배 이상 폭등시켰다. 소련 루블의 가치는 땅바닥으로 떨어졌고 비슷한 시기에 추진한 예금동결로 인해 러시아 국민들은 구매력을 급속히 잃어가며 대다수 국민들은 불과 1년만에 빈곤층이 되고야 말았다. 또한 이러한 조치는 구 소련에 속한 나머지 14개국에게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가이다르의 경제 개혁 실패로 러시아의 GDP는 추락했고, 소련 시절 국가의 지원으로 유지되던 수많은 국영기업, 공장, 콜호즈들과 연구소들은 예산이 대대적으로 삭감되면서 몰락했으며 예금은 초인플레이션과 예금동결로 휴지조각이 되고야 말았다. 이렇게 가장 기본적인 경제 주체들이 사라지고 예금이 휴지조각으로 변하자 대다수의 러시아 국민들은 임금체불과 사회복지예산 삭감까지 겹치며 빈곤과 실업의 늪에 빠져야했으며, 오직 소수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만이 모든 부를 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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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옐친은 재신임에 성공한 직후 9월 21일 대통령에게 의회 해산권을 부여하고, 기존 소련 체제의 잔재였던 인민대표회의와 최고회의를 폐지하고 상하원을 신설하는 개헌을 시도했다. 이에 다수당인 러시아 연방 공산당 등이 9월 23일 러시아 국회의사당을 점거하고 옐친을 '''탄핵'''하자, 분노한 옐친은 10월 4일 모스크바육군 병력을 소집했고, 모스크바 군구 타만스카야 사단의 T-80 전차들을 데려다 '''국회의사당을 포격해 버렸다.''' [A]18분 30초부터 나온다.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항목 참조.
2년 만에 전차 앞에서 맞서던 입장에서 전차를 끌고 가서 포격하는 입장이 된 게 참으로 아이러니하지만, 이 때 군부가 옐친을 지지하면서 옐친은 빠르게 상황을 진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적잖은 사상자가 나면서 러시아 국민들은 옐친에게 크게 실망했다.[5] 결국 그 해 12월에 치러진 총선에서 옐친파 정당은 고작 15.5%의 득표를 올리며 패배했으며, 극우정당인 러시아 자유민주당이 23%로 제1당이 되었다. 공산당-농민당 연합도 22%를 차지했으며 나머지 정파는 대다수가 사민주의 정파였다.
1995년 12월 의회에서는 공산당이 22%를 득표하며 1당이 되었다. 11%로 자유민주당이 2당을 차지했으며 10%의 여당 '러시아 - 우리집'[6]은 3당에 그쳤다. 하지만 비례대표제의 특성상 어느 한쪽도 과반을 유지할 순 없었고 혼란은 더 가중되었다.[7]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 옐친은 심장마비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이미지 플레이로 초반 지지율 6%에서 결선투표 진출은 물론 공산당의 겐나디 주가노프를 54%대 41%로 14% 가량 앞서며 승리했다. 하지만 대통령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옐친은 '''"배당을 위한 융자"'''라는 악명 높은 합의를 통해 자신에게 선거 자금을 대주는 대가로 올리가르히(재벌)들에게 러시아의 중요한 경제적 자산 통제권을 나눠주겠다는 범죄적 약속을 했다. 그 같은 조치는 러시아 내에서 올리가르히의 부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특히 가즈프롬이나 루살 등 에너지나 광물 관련 회사들 등 그 나름대로 흑자를 벌어들이는 사업이 많았는데,[8] 이런 사업체들이 모두 소련 내 관료나 시장원리에 밝았던 전직 공산관료들이나 권력 핵심부에 있던 정부 관리에 넘어감으로써 벼락부자들이 대거 탄생했다. 이들 중 몇몇은 옐친 집권 몇년만에 세계적인 부호가 될 만큼 큰 재산을 모았다. 이런 벼락부자들의 대표적인 예로는 보리스 베레좁스키로만 아브라모비치 등이 있다. 소련 시절에는 부동산 및 생산 수단이 국유화되었기 때문에 모을 수 있는 재산은 예금이 전부였고,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재산이 서방 기준으로 수천 달러가 고작이었다. 그런데 옐친 집권 하에서 자본주의에 빠르게 적응한 이들은 2, 3년 만에 수조에서 수십조원의 자산가가 된다.
게다가 분리 독립을 선포하려던 체첸 공화국을 제압하기 위해 당시 체첸 지도자였던 조하르 두다예프와 협상을 거부하고 무리하게 군을 투입했다. 하지만 체첸군은 아슬란 마스하도프(Аслан Масхадов, 1951년 9월 21일 ~ 2005년 3월 8일) 같은 전직 소련군 출신 인사들에 의해 훈련이 되어 있는 상태였고[9] 이 상황에서 무리하게 그로즈니 시로 진입했다가 체첸군에게 큰 피해를 입었다.[10] 1996년 샤밀 바사예프가 주도한 부됴놉스크 병원 인질극과 체첸 반군의 그로즈니 재탈환으로 체첸군에게 패배하면서 결국 1996년 하사브유르트 협정을 맺고 굴욕적으로 패배를 시인하면서 체첸에 국가나 다름없는 자치권을 준 다음 물러났다. 사실 러시아군으로써는 붕괴 이후 군 조직이 약화되고 준비가 덜 된 상황에서 체첸에 투입되었으니 큰 피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일개 지방이었던 체첸에 패배한 사실은 러시아인들에게 적잖은 충격을 안겨주었다.
1998년 러시아 정부는 재정 부족으로 '''모라토리움'''을 선언하기까지 이르렀다. 이미 옐친의 권위는 잦은 실정으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탄핵 직전에까지 몰렸다가 겨우 회생하기도 하였다. 이후 1999년 8월에는 건강까지 좋지 않아 KGB 출신의 블라디미르 푸틴을 총리로 지명했다. 더 이상 평판이 나빠질 일도 없었던 옐친이 마지막으로 내던진 승부수였는데, 이후 건강 이상으로 물러난 옐친을 대신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은 푸틴이 치밀한 계획을 세워 체첸을 공격, 옐친이 5천 명 이상을 죽게 만들고도 해결하지 못한 전쟁을 겨우 2,500여 명의 전사자만으로[11] 체첸 반군을 남김없이 쓸어버리고 깜짝 스타로 등극하자 자연히 여당의 지지율도 다시 올랐다. 그 해 12월 총선에서 친 옐친파 정당들이 선전하였고, 총선에서 선전한 대가로 옐친은 푸틴을 차기 대권 주자로 내정하였다. 옐친의 권위가 만신창이가 되었기는 했지만, 적어도 '''마지막 승부수는 성공을 거둔 셈이다'''. 그해 말인 12월 31일 옐친은 건강 문제로[12] 자신의 실정에 대해 사과하면서 사임했고, 푸틴에게 대통령직을 넘겨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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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12월, 크렘린을 떠날 당시 후임인 블라디미르 푸틴과 악수하는 모습.
푸틴에게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과정에서 옐친은 푸틴에게 사임 후에도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푸틴은 옐친에게 면책 특권을 보장함으로써 이에 보답하였다.[13] 그리고 푸틴이 승승장구하면서 옐친은 푸틴으로부터 비토당하는 일 없이 잘 지내며 한가롭게 야인으로 지내다가 2007년에 사망했다. 향년 76세. 그놈의 때문에 건강이 나빠서 죽었다고 한다. 옐친은 살아 생전 지독한 주당이었다. 가족으로는 아내 나이나와 장녀 예레나와 차녀 타티야나, 외손자 3명이 있다.
그 동안의 소련 지도자들은 대부분 크렘린 벽 묘지에 안장되었지만 옐친은 노보데비치 수도원에 매장되었다. 말 그대로 국가 지도자나 영웅들이 묻히는 크렘린에 비하면 격이 살짝 낮다고는 할 수 있을지 몰라도 노보데비치 수도원도 러시아의 위인들이 많이 묻힌 곳으로 유명하다.

3. 개인사


옐친은 러시아 정치인들 중에서도 주변 인사들이 '''잠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제일 먼저 보드카오이[14]를 찾았다'''고 증언할 만큼 무척 좋아했다. 심지어 tv로 신년사를 진행할 때에도 맨 마지막에 술잔을 들고 건배를 할 정도였다.1995년 신년사, 5분 4초부터 해당 장면이 나옴 거의 이오시프 스탈린에 비견될 정도라 농담 삼아 '''보리''' 옐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보리스 옐친은 심각한 알코올 중독자였는데, 이 알콜 중독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져서 나라를 말아먹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옐친의 추태가 심각했다.
얼마나 술을 처먹어 댔는지, '''공식 석상에서까지도 취해서''' 추태를 부리는 등 러시아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데 일조했을 정도.
대표적인 예로, 1994년 9월 아일랜드 총리와 회담할 예정으로 공항에 도착했는데 이 때 '''이미 기내에서 만취해 있었던 탓에 비행기에서 내리지 못해''' 회담이 연기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1994년 8월 독일을 방문했을 때도 공식 행사 때 술에 취해 있었고 행사 중에 지나가다가 '''갑자기 독일 경찰악대지휘자의 지휘봉을 빼앗더니 본인이 직접 지휘했다.''' 지휘봉을 빼앗기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웃는 지휘자의 모습은 덤. 이후 독일 어린이합창단이 러시아 민요를 부르자 갑자기 나오더니 앞에 있던 마이크를 뽑아들고 술에 취한 목소리를 따라 불렀다. 이 장면은 독일 전역에 생중계되었고, 각국의 해외 토픽이 되었다.

1995년 10월, 클린턴이 대통령이었던 시절 미국을 방문해서는 백악관에서 잠을 자다가 술을 진탕 마시고 맨발잠옷 차림으로 백악관 문 앞까지 나간 적도 있었다. 당연히 이걸 본 경호원들과 비서들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사건은 '''국가 기밀로 취급'''되어(…) 언론에는 비공개 처리되었다가 나중에 기밀 해제가 되면서 까발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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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클린턴 대통령 시절 미국을 방문한 때인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클린턴 대통령에게 뻐큐를 시전한 적이 있다(...). 아마 어린 시절 손가락을 잃은 탓에 그런 손동작으로 찍힌 것일 가능성이 높다.
그 덕에 옐친의 국제적 이미지는 대폭 추락했다. 측근들은 이 사람이 술 취해서 부린 추태를 수습한다고 애를 먹었다. 그 덕인지 말년에는 하도 병을 많이 달고 다녀서 걸어다니는 종합병원 소리를 들었다. 그 외에도 온갖 기행이란 기행은 다 벌리고 다녔는데, 집권 초기에는 권총으로 자살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관련 기사. 또한, 많이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1991년에는 음주운전을 한 전과도 있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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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1996년 대통령 선거 당시 로스토프에서의 선거 유세 중 '''춤을 춘 사진'''. 당시 옐친이 선거에서 시도한, 일종의 친서민적 이미지 메이킹의 일환이었다. 이 사진은 1996년 '''올해의 퓰리처상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 또한 영상 자료로도 매우 확실하게 남아 있다. '''물론''' 이 때도 술에 잔뜩 쩔어 있는 상태였다.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옐친은 떡대가 상당했으며 키 187cm의 장신거구였다. 외국인들 입장에선 저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겠으나, 술에 관대한 러시아의 특성상 의도한 대로 친서민적인 이미지를 통한 지지율 상승 효과는 있었다. 이는 만취했다는 점을 빼면, 외국에서도 서민들에게 친밀감을 주기 위해많은 정치인들이 하는 행위다.

4. 평가



4.1. 러시아의 평가


[image]
참조
[15]
전반적인 평가는 대단히 나쁘다. 이는 그의 실정으로 인해 소련 시절에 비해 러시아 연방의 국력이 크게 추락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의 결정적인 실책이었던 경제정책으로 인해 러시아의 서민층은 극심한 교통을 겪었다. 그래서 러시아인들의 옐친에 대한 평가는 대개 부정적이다. 물론, 현 러시아 집권 여당이나 재벌들처럼 옐친을 좋게 평가하는 이들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소수에 머무를 뿐이다.
그나마 러시아 정부는 공식적으로는 옐친을 높이 평가한다. 이는 옐친이 어쨌든 현대 러시아 연방의 국부이고 현 여당인 통합러시아당의 권력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현재 러시아의 대통령이자 독재자인 블라디미르 푸틴도 옐친의 후계자나 다름없다. 푸틴은 옐친의 후원으로 대통령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민들의 평가는 매우 나쁘다. 미하일 고르바초프를 몰아내고 초대 러시아 연방 대통령이 되었을 때는 개혁가로서의 면모와 친서민적인 이미지 덕분에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당선 후에 그가 독재에 가까운 전횡을 벌이고 측근들이 소련 시절을 능가하는 부정부패를 일삼아서 급속도로 국민들의 지지를 잃었다. 게다가 1994년 체첸 사태로 그의 인기는 그야말로 땅에 떨어졌다. 당시 많은 전비를 지출하고도 패배하여 굴욕적인 평화 협상을 맺었기 때문이다.
그의 가장 큰 실정은 경제정책이다. 그는 '충격요법'이라는 경제정책을 펼쳤다. 이는 대단히 급진적인 가격 및 생산 자유화 정책이었다. 이 정책을 실행한 목적은 공산주의에서 자본주의로의 체제 전환을 최대한 빠르게 이루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체제 전환에 따른 혼란과 민생 붕괴를 예방해야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가 실행한 충격요법으로 인해 시장에는 다대한 혼란과 산업 기반의 붕괴가 발생했다. 이는 그동안 중앙의 명령에 의해 가격과 공급량이 정해졌었는데, 시장에 의해 수요 공급이 조절되기까지 과도기가 엄청나게 길어졌기 때문이다.
자유화와 소련 붕괴에 따른 산업 붕괴로 초 인플레이션이 일어나 예금이 모조리 휴지조각이 되었다. 이는 옐친이 경제를 개혁하겠다고 워싱턴 컨센서스에 충실한 학자들이나 기관들(예를 들면 세계은행, 미국 재무부, IMF)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옐친은 이들의 조언을 받아들여서 충격 요법을 시행했다. 문제는 이들 학자들이나 기관들은 이러한 충격 요법을 시행하면 일어날 파장을 예측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음에도 이걸 단순히 불가피한 일 혹은 단기적인 일로 여겼으며, 장기적으로 보면 시장이 해결해 줄 것이라고 지나치게 낙관했다는 거다.
그리고 옐친은 이들이 제시한 방안을 그대로 받아들였고, 충격 요법에 따라 가격 자유화가 즉각적으로 시행되자, 물가 폭등으로 예금이 휴지 조각이 되어버리면서 구매력이 급속히 떨어졌고, 범죄율도 급속히 상승하게 된다. 당시 러시아 국민의 90%가 절대 빈곤선 이하로 전락했으며 1인당 국민소득도 1990년 당시 5,300달러였던 1인당 GDP가 1997년과 1998년에는 1,600~1,700달러까지 떨어졌으니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과장이 아니라 실업자만 무려 2,000만 명에 이르렀다.
러시아인들에게 소련 붕괴 이후 조국의 모습은 상상도 못한 몰락이었다. 러시아의 전신인 소련은 미국과 대결하던 양대 초강대국이었다. 그러므로 러시아인들은 체제를 개혁하면 더욱 부강해질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오히려 미국과는 전혀 상대가 안 되는 파탄 국가로 전락한 것이었다. 러시아의 쇠퇴는 단순히 산술적으로 분석해도 충격적이다. 소련의 인구는 2억 9천만이라서 미국을 당시 2억 5천만이던 미국을 능가했고, GDP는 미국의 40%에 육박했다. 그러나 러시아 연방의 인구는 소련에 비해 반토막나서 1억 4천만이 되었고, GDP는 소련의 '''3분의 1'''이하로 줄었다. 이는 미국과 비교했을 때 인구는 미국의 40% 남짓이고 GDP는 미국의 '''10%''' 밖에 안되는 수준이다.
무분별하게 민영화를 하다 보니 대량의 국부가 유출되었고 빈부격차도 극심해졌으며 경제를 장악한 올리가르히들이 정치계와 언론계까지 장악하는 바람에 부정부패도 소련 시대보다 심해진데다가 쓸 수 있는 예산이 줄어서 각종 복지정책 등 사회안전망까지 붕괴되었다. 결국 재빠르게 부를 독점한 이들을 제외한 나머지 국민들의 삶은 처참해졌다. 1999년 열친 말기에 와서야 일시적으로 상황이 호전되는 듯 했지만, 그래봐야 사회적인 지표가 개판에 가까웠고, 금융 범죄도 대거 일어날 정도로 그 내실은 결코 탄탄하지 않았다.
그나마도 외환위기가 일어나는 바람에 다시 한번 쑥대밭이 되어 급기야 '''모라토리엄'''까지 선언했을 지경이고 여기에 국민들의 생활 수준이 말 그대로 진짜 벼랑 끝에 내몰리는 바람에 발생한 출산율의 급감과 사망률의 급증으로 매년 인구가 70만에서 90만명선까지 줄어드는 수준이 되어서 한 동안 2050년이 되면 러시아 인구가 1억명 이하로 떨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올 수준이었다.
이 시기의 상황이 얼마나 시궁창이었냐 하면 1990년대 러시아 여대생들의 최고 아르바이트가 바로 외국 관광객 상대 성매매(인터걸)였다는 웃지못할 사실이 있다.[16]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는 "러시아 여자"란 단어가 성매매 여성을 지칭하는 단어가 될 정도였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동남아 여성 매매혼이 유럽-미국 국가에서는 러시아 여성 매매혼으로 벌어졌다. 니콜 키드먼이 주연한 영화 버스데이 걸(Birthday Girl)이 바로 그 러시아 여성 매매혼을 주제로 한 영화다. 한 마디로 말해 옐친 집권 시기의 러시아는 사실상 러시아판 고난의 행군을 겪은 셈이다.
러시아는 오랜 경제 위기를 겪으면서 국외에 군사력을 전개시킬 수 없을 정도로 경제가 악화되었는데, 중앙유럽 국가들 입장에서는 '''러시아의 영향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었다. 특히 이 시기 반소 감정이 심했던 중앙유럽 국가들은 재빨리 서구권에 편입되기 위해 급진적으로 경제 개혁을 진행하면서 냉전 시절의 유산을 청산하였다. 그 결과 2016년 현재 벨라루스, 몰도바, 아르메니아 등 옛 소련권 국가들과 내전을 겪은 옛 유고슬라비아 국가들 중 친러 국가인 세르비아를 제외한 대부분이 현재 NATO유럽연합 회원국으로 가입해 있다.
옐친의 집권기에 러시아는 강대한 군사력도 크게 약화되었다. 이는 러시아에 소련군 수준의 군사력을 유지할 경제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러시아 정부는 경제난 때문에 극단적인 군축을 거듭해야 했다. 결정적으로, 군의 기간이라고 할 수 있는 인적자원이 크게 망가졌다. 소련 시절의 장교단과 기술자들은 월급도 주지 못하는 군대를 떠났다. 그로 인해 러시아는 군의 인적자원을 복구하는 데 크게 애를 먹었다. 그나마 핵전력과 군사 기술 역량만은 어떻게든 유지를 했다는 것이 위안이다.
서구식 민주주의 체제를 지향했던 옐친은 자신이 러시아에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는 자부심을 가졌으며 한때 푸틴이 지방선거를 폐지하고 대통령이 주지사 등 지방자치단체장을 직접 임명하는 방식으로 바꿔 버리자[17] 옐친은 퇴임 이후 푸틴과 우호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푸틴의 결정이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제약한다고 반발했다. 그러나 러시아에 제도적 민주주의를 정착시켰다는 보리스 옐친 본인은 정작 대통령 임기 동안 반민주주의적 행보를 보였다. 자기 말 안 듣는다고 헌법에도 없는 최고회의 해산을 벌이려다가 1993년 러시아 헌정위기 같은 내란을 불렀고, 임기 동안 솔제니친이 진행하는 TV 프로그램(솔제니친과의 만남)이 폐지된다거나, 주요 방송사와 통신사에 낙하산을 내보낸다거나 주요 언론사들을 매수해서 선거 운동을 하고 막장인 러시아 상황을 알린 외국 언론들에게 압력을 가하곤 했다.
그 영향이 남아서 러시아는 제도적으로만 민주화되었을 뿐, 실제로 민주주의는 취약하며, 경제는 그리 좋다고 보기 어려운 국가가 되었다. 그러니 옐친이 민주 제도를 정착시켰다고 해도 좋은 평가를 받기 힘들다. 가령 러시아는 헌법상으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지만, 실제로 반정부적인 언론은 여전히 엄청난 탄압을 받고 있으며, 언론자유지수는 180개국 중 149위(2020)로 세계적으로 하위권을 달리고 있는 상태. 이미 옐친 시기가 지난지 얼마 안된 2002년에도 121위를 마크해서 독재국가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과 비슷한 순위를 보여주었다. 기자들은 중국이나 소련 시절처럼 코렁탕을 먹는 건 아니지만 유무형의 협박을 받거나 심지어는 암살된다고 한다. 정적의 사생활을 찍어 폭로해 매장하는 몰래카메라[18]를 비롯한 여러 수단으로 정적을 제거하고 있으며, 서방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 암살 의혹 사건은 옐친-푸틴 시절부터 러시아에서 지속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옐친의 소련 해체는 악성 채무를 털어내고 권력을 확고하게 잡으려고 한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즉 소련을 해체함으로써 알맹이만 챙겨먹어 이후 통치 및 재건을 용이하게 한다는 건데 그걸 추가로 말아먹었으니 옐친의 능력이 얼마나 답이 없었는가를 말해주는 부분. 그러나 정치적인 능력 자체는 높게 평가받기는 하다. 사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시에 보수파에 맞서는 일도 정세를 재빠르게 판단할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할수있는 일이었고, 대통령 재임시의 경제난에도 기여히 대통령직을 유지하는데 성공한것은 물론 서방으로부터 막대한 차관을 얻은것을 보면 정세판단이나 회유능력이 어느정도였는지도 알수있었다. 대통령직 권한을 강화하는 헌법을 제정하는데 성공했고, 두 차례 총선 참패와 지속적인 경제난에도 기여히 대통령직 재선에 성공을 해버린데다가 거기에 야당이 압도적인 의석을 가졌음에도 탄핵안이 부결되어 살아남았다. 이렇듯 정치적인 승부수 하나는 매우 잘던졌고, 그걸 회수하는것 하나만큼은 유능했던 사람이 바로 옐친이었다. 더군다나 모라토리엄까지 겹쳤음에도 대통령직에서 곱게 물러난것은 물론 정권재창출에도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정치적으로 엄청난 고단수였다는 것을 알수있다. 물론 그러한 정치적인 능력이 국민들의 삶에 도움되지 않았다는것이 문제였을 뿐이다.
아무튼 정치적으로 고단수였던것과는 별개로 생전의 실정 때문에 대다수의 러시아 국민들에게 나라를 말아먹은 놈, 심하면 개혁을 한답시고 개인 소유 재산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어놓고선 자기와 친인척, 재벌들의 배만 불린 놈 정도의 취급을 받고, 긍정적으로 평가해봐야 푸틴에게 권좌를 넘겨준것이 그나마 잘한 정도로 평가하는 수준이 대다수이지만 그와 별개로 푸틴에게는 자신을 대통령으로 올려준 아버지 같은 인물이다 보니 옐친이 퇴임한 후에도 현안이 있을 때마다 옐친을 만나 얘기를 나누면서 조언을 구할 정도로 대접을 융숭하게 해주었으며 장례식도 꽤 성대하게 치러졌다. 또한 옐친의 이름이 거리명으로 사용되는 등 공식적으로 러시아 개국의 아버지라며 좋게 평가해주고 있다.
옐친의 통치 하에서 러시아는 기초과학도 무너졌고 복지도 파괴되었고 국가 경쟁력과 각종 경제 및 사회 지표 역시 폭락했다. 또한 러시아는 옐친 시절 소련 해체와 기본 경제 붕괴로 인해 러시아는 옛날의 제정 러시아 때나 소련처럼 서방과 정면으로 대립각을 새울 영토적 기반을 거의 상실해버렸다.
이를 인지한 러시아에서는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서구권에 유화적인 모습을 보이면서 서구권과 나름대로 협력을 추진하면서 대립을 피했다. 하지만 2000년대 중반 본격적으로 우크라이나몰도바, 조지아 등이 서구권 편입을 준비하기 시작하자 러시아는 옛 영향권을 유지하기 위해 다시 패권적으로 나서기 시작했고, 이는 2008년 남오세티아 전쟁2014년 크림 위기, 돈바스 전쟁을 겪으면서 보다 더 노골적으로 드러나게 되었다. 이 때문에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의 관계가 심하게 틀어져 서방에게서 경제제재를 받고 있는 상황이다. 러시아는 이 경제제재를 당장 해제하라고 요구하지만 서방은 서방대로 러시아가 자신들을 계속 위협하는 이상 경제제재를 유지할 수밖에 없다며 반발하고 있다.
또한 1996년 선거는 지금도 러시아에서 서방의 내정 간섭, '''부정선거'''로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무엇보다 옐친의 재선은 '''미국이 러시아를 몰락시키려고 한다는 생각을 러시아인들에게 각인시킨 결정적인 계기였다'''. 사실 의외로 소련 시절까지만 해도 러시아인들의 대미 감정은 그렇게까지 나쁘지는 않은 편이었다. 외교적으로 적국이었고 미국을 적대시하라는 공산당의 선전이 있었지만, 그림자 속에서는 미국의 다양한 문화를 즐기면서 미국에 대한 친숙함이 어느 정도 있었다. 특히 소련 말기에는 자유 세계의 선도자이자 소련보다 훨씬 경제적으로 발전한 국가인 미국을 동경하는 사람들까지 많았다.

그러나 미국의 지원과 러시아 국내 농간을 등에 업고 집권한 독재자가 실정으로 러시아의 사회를 파괴하고 국력을 끝없이 후퇴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증오심과 반미 감정을 키운 러시아인들이 상당히 늘었다. 결국 옐친이라는 최악의 독재자를 지원한 대가로 미국은 러시아인들의 압도적인 반미 여론을 형성시켜, 기형적 독재자인데다 서방에 극도로 적대적이기까지한 블라디미르 푸틴의 집권을 간접적으로 야기한 꼴이 되었다. 고르바초프는 본인의 자서전에서 미국은 민주주의이든 아니든 개혁한 소련이나 민주주의 러시아보다는 옐친이 이끄는 망한 러시아가 더 다루기 쉽다고 판단하고 옐친에게 모든 지원을 집중했다고 비판했다. 지금 동유럽에서 벌이는 푸틴의 각종 무리수가 계속 먹혀드는 것도 이 때의 부정선거가 절반은 해먹었다.

이 시기 러시아인들은 서방이 체제 전환 과정에서 발생한 러시아의 위기를 방조 내지는 조장하고 구 소련 국가들을 적극적으로 서방권으로 끌어들이는 모습을 두 손 놓고 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오늘날에도 러시아인들은 서방이 소련을 일부러 무너뜨렸다는 인식이 강한 편이다.[19]
러시아는 나라 특성상 블랙 유머가 많이 통하는데, 옐친도 예외는 아니어서 꽤나 자주 입담에 올랐다. 다음은 공산주의 유머에도 나와있는 예시다.
A: 소련이 70년 동안 그토록 강조했지만 국민들을 설득시킬 수 없었던 과업을, 옐친은 단지 자신의 재임 시절 몇 년 만에 다 이루었다.
그것은 무엇일까?
B: '''국민들에게 소련이 좋다는 것을 알게 해 준 것이다.'''
다만 부정적인 평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학술적인 부분에 있어선 긍정적이거나 중립적인 평도 존재한다.“옐친은 러시아 구한 지도자” 모스크바학술대회 반공주의적인 성향을 가진 시민들 중에는 옐친을 열렬하게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어느 정도 옹호하거나 공산당보다는 낫다는 소리를 하기도 한다. 물론 전반적인 의견은 아닌지라 러시아에서 이런 얘기를 한다면 좋은 소리는 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옐친 재임 시절의 러시아인들이 겪었던 고통은 IMF 당시의 한국 사람들이 겪었던 고통보다 훨씬 더 강도도 심했고 기간도 길었다는 점 덕분에 부정적 평가는 많아도 긍정적 평가는 매우 나오기 힘들다. 소련 시절 같은 구성원이자 러시아의 이웃 국가였던 우크라이나, 몰도바, 아르메니아, 조지아 등의 나라들이 소련 붕괴 이후 20년이 넘어가는 시점에서도 내전과 경제 붕괴의 수렁 속에서 잘 헤어나오지 못하는 것을 두고 '''러시아는 국토가 그렇게 큰 데도 체첸 전쟁 빼면 내전이 없었지 않았냐?'''라는 재평가가 학계에서 나오기도 한다.

4.2. 서방의 평가


옐친은 막나가는 통치를 펼쳤지만 서방에서는 그래도 그를 지원했다. 물론 서방에서도 옐친의 통치를 좋게 본 것은 아니다. 저러다가 나라 말아먹으면 서방에도 위협이 될 것이라 우려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원한 건 옐친 외에는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옐친 다음으로 지지를 많이 받았던 겐나디 주가노프러시아 연방 공산당 당수로서 "소련 부활"을 부르짖었다. 그 다음으로 유력한 정치인이었던 러시아 자유민주당블라디미르 지리노프스키는 아예 민족주의와 인종차별을 모토로 삼았었다.
게다가 이들은 정말로 집권할 가능성까지 높았다. 실제로 주가노프는 1996년 대통령 선거에서 옐친과 거의 근접할 정도로 지지율이 높았다. 1999년에는 아예 공산당이 재집권이 가시적인 상황이었다. 그나마 아프가니스탄전의 영웅인 알렉산드르 레베디, 반정부 활동을 하다 훗날 암살된 보리스 넴초프, 야블로코당 당수였던 그리고리 야블린스키 등 개혁파 정치인들이 공산당에 맞서 두각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두 거대 양당인 공산당자유민주당을 이길 수 없었다. 만일 이들이 집권한다면 경제는 경제대로 더 말아먹으면서 국민들의 분노를 밖으로 돌리기 위해 남은 군사 자산을 총동원해 동유럽과 중앙아시아를 향해 대규모 침략전쟁을 단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렇잖아도 공산권 붕괴 이후 동유럽의 혼란이 극심했던 상황에서 이런 사태가 벌어지면 신소련의 성립과 냉전의 재개라는 끔찍한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었다. 경제적으로 막장이 된 러시아였지만, 옐친의 삽질로 당장 보이는 GDP가 낮았을 뿐 구소련을 지탱하던 국력의 기반 자체는 건재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을 파악한 서방은 차라리 옐친을 지원하기를 택했다. 물론 그 덕택에 적어도 미국과 서유럽, 일본은 무사할 수 있었다. 물론 서방의 언론들은 옐친의 무리한 경제 개혁과 부패에 대해 보도하면서 그를 비판했다. 그러나 정부 차원에서 미국은 옐친에게 많은 지원을 해주었다. 1996년 대통령 선거 당시 러시아 공산당 당수인 주가노프가 옐친보다 지지율에서 앞서자, 미국 측이 선거 전문가들을 대거 파견했다기사.
하지만 아무리 서방이 지원해도 옐친이 국민들의 적 수준이었다면 선거에서 이길 수 없었을 것이다. 옐친이 이긴 진짜 이유는 러시아 언론을 대부분 소유했던 러시아 재벌 올리가르히들의 지원 덕택이었다. 러시아 국영 방송에서는 소련 시절의 부정적인 모습과 1993년 10월 사태를 중점적으로 보도하면서 네거티브 전략을 펼쳤다. 이에 반해 공산당 쥬가노프의 선거 전략은 기껏해야 공산주의 시절의 구시대적인 대중 집회와 연설뿐이었다. 소련 해체 이후의 극심한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소련 시절에 대한 반감이 컸던 당시 이런 선거운동의 결과는 옐친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고, 1차 투표에서 옐친:주가노프는 35%:32%, 결선투표에서 옐친은 레베드와 지리놉스키의 지지를 얻어 54:40으로 이긴다. 선거 승리의 주역이었던 알렉산드르 레베디는 그 공로로 러시아 국가안전보장회의 의장이 된다. 하지만 얼마 안가 토사구팽당했다. 주가노프 다음 가는 유력 경쟁자였던 지리놉스키는 일개 코미디언급의 인식이 박힌 정치인으로 전락했다.
서방의 이러한 대러 정책은 2021년 기준으로도 변함이 없으며, 푸틴을 대신할 정치가들이라고 해봐야 도로 공산당을 외치는 자들과 네오나치와의 유착이 짙게 의심되는 극우민족주의자들밖에 없다. 물론 푸틴 본인이 의도적으로 대안이 될 수 없는 이들은 살려두고 대안이 될만한 알렉산더 나발니 같은 사회민주주의자들만 독하게 탄압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서방이 이를 묵인하는 가장 큰 이유는 푸틴이 물러난 뒤 집권할 자들이 러시아를 어떻게 이끌어 세상을 지옥을 만들지가 너무 뻔하기 때문이다. 푸틴은 옐친처럼 서방의 말을 잘 듣지는 않지만 적어도 서방의 우위를 인정하고 러시아의 세력권을 현실적으로 구소련권 주변 지역 중 비나토 구역. 즉 우크라이나 동부 등지로 한정하고 있어 냉전 붕괴 이후 정립된 신질서를 깨지는 않고 있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옐친의 대외노선을 계승하고 있다.

5. 한국과의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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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6월 김영삼 대통령의 러시아 방문 당시.
옐친은 한국에 우호적인 모습을 많이 보였다. 일단 옐친은 개인적으로 북한을 굉장히 싫어했다. 스탈린김일성의 회담 내용 등을 포함한 6.25 전쟁 관련 문서를 대거 공개해 6.25 전쟁의 원인이 북한의 남침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못박았고 남-북한간 전쟁시 러시아가 북한 편으로 개입하는 조소동맹조약을 파기한 것도 옐친이다. 옐친 개인의 반북 경향과 더불어 한국과 교류를 늘리려던 러시아의 외교 정책, 그것을 이용한 한국 정부의 외교 전략이 성공한 결과이다.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을 공식적으로 사과하였고, 블랙박스 및 유품 등을 전달해 주었다.
또한 소련이 북한에 해주던 여러 가지 지원이나 우방국 혜택 같은 것을 모두 폐지하여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걷게 되기도 했다. 고난의 행군 기간 동안 북한 주민들이 수십만 명이나 아사한 걸 감안한다면 북한 입장에서는 원수로 보인다. 다만 이때는 소련이 멸망하고 러시아도 마찬가지로 경제건 국가운영이건 파탄되고 있었기 때문에 설령 옐친이 북한이 호의적이었다고 해도 저런 사태는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간접적으로 북한의 핵무기 개발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소련의 멸망에 이은 90년대 러시아의 국가 파탄상황에서 북한은 이를 역으로 이용하여 자국의 핵무기, 탄도미사일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옐친 치하에서 러시아군은 무기를 제대로 관리를 안 해서 소련 시절 개발한 여러 전략무기들과 기술력들이 북한의 손에 넘어갔고 구소련 전략 미사일 설계국은 돈도 제대로 못 받아 엔지니어들이 거리에 나앉게 되자 북한은 이들을 거금을 줘서 고용을 했다. 북한은 입수한 로켓과 공학자들을 이용 소련 로켓을 역공학으로 카피하여 2000년대 들어 여러가지 전략무기를 제조해내고 있다. 기껏해야 500~700km 단거리 탄도미사일이나 간신히 만들던 나라가 1990년대 후반~2000년대 초에 갑자기 로켓 개발 능력이 향상된 건 이러한 이유이다. 물론 그렇다고 러시아 연구자들이 정말 핵심 기술까지 인도해서 당장 미국 본토에 핵탑재가 가능한 대륙간탄도탄 ICBM을 만드는 수준까지[20] 가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핵탑재를 배제하고 중거리탄도탄이라도 만들 수 있고 대륙간탄도탄에 도전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러시아 동유럽 기술자 연구자들과의 접촉없이는 불가능했다고 봐야 한다. 지금도 이 러시아 구소련출신 연구자들은 한달에 8천달러의 봉급을 받으며 북한 고급 아파트에서 경호를 받으며 살고 있으며 푸틴이나 동유럽국가들이 줄기차게 이들의 소환을 요구하고 있으나 북한은 거절하고 있다고 한다. 20여년이 지난 지금은 이들이 가진 대부분의 지식과 기술력은 북한 과학자들에게 전수되어 송환해봤자 별 소용도 없겠지만.
한편으로 옐친 시절 외채에 시달리던 러시아는 갚을 돈이 없자 채권국인 한국에 채무 상환 대신 군사기술 이전을 제안했고 그게 불곰사업이다. 국산 대공미사일 기술의 상당 부분에 러시아 기술이 이전된 것이다.[21] 당장 사정이 급해서 기술을 줬던 만큼, 러시아가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온 푸틴 정부 이후부터는 러시아의 국방 기술 이전이 어려워졌다.

6. 기타


  • 1990년대 초반, 한국에서는 이 사람을 한때 옐트신이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이 사람의 이름을 영어로 Yeltsin으로 표기하기 때문(...) 러시아어에 익숙하지 않았던 그 당시 사람들이 영문 알파벳을 보고 이상하게 읽은 것이다.
  • 인디펜던스 데이: 리써전스에서는 외계인을 무찌른 후 각국과 정상회담을 한다.
[1] 강세를 적용한 러시아어 발음은 [bɐˈrʲis nʲɪkɐˈlaɪvʲɪtɕ ˈjelʲtsɨn\](바리스 니칼라이비치 옐친)에 가깝다.[2] 많은 러시아인들은 옐친을 증오하기는 하지만 그와 별개로 푸틴이 옐친으로부터 대통령직을 승계받은 인물이고 옐친으로부터 이런저런 조언을 들으면서 대통령직 수업을 받았다. 또한 푸틴이 대통령직에 오른 이후로 옐친에게 면책 특권을 부여해 옐친이 감옥에 가지 않고 말년을 별장에서 편하게 보낼 수 있게 해 주었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격하를 시킨다면 정통성에 타격을 입기 때문이다.[3] 사실 소련은 1990년부터 이미 경제 체제가 거의 마비되어 배급제를 실시하고 있을 정도로 악화되었다.[4] 국가가 가격을 정하지 않고 생산자가 가격을 정하는 것. 자본주의 국가에서라면 이미 당연한 논리겠지만,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국가에서 국영화된 생산 시설(공장, 농장(콜호즈) 등)을 통해 가격을 책정, 도시 노동자들에게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고 있었다. 이는 현실공산주의 경제의 가장 기초적인 경제원리였다.[A] 비공개 처리됨[5] 당시 러시아 정부 공식 통계 추산 사상자 187명, 최고회의 추산 약 2,000명 가량으로 집계했다.[6] 옐친은 임기 내내 무소속이었으므로 여기서 여당은 옐친 지지 정당을 말한다.[7] 이런 기조는 1999년 총선까지도 이어지지만, 1999년 총선에서 친 옐친파 정당이 선전하고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이 들어서면서 정치는 안정된다. 거꾸로 말하면 이전까지 러시아는 혼란이 심각했단 이야기다.[8] 원래 소련은 1930년대 산업화 시절 군대를 육성하기 위해 군수 산업과 관련된 중공업에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하지만 1950년대, 1960년대를 거치면서 점점 공업 생산력과 경쟁력이 서방보다 떨어지면서 적자가 늘어났다. 이에 따라 소련 정부는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자원 채굴 사업에 많이 기댔고, 실제로도 국가 예산의 상당 부분을 자원 소득에서 얻었다. 이런 자원의존형 구조는 소련 붕괴 이후 점차 심각해져 오늘날 러시아는 국고의 52%를 자원 수출에 의존하고 있다. 러시아의 재벌들 역시 주요 수익이 자원 채굴과 수출이다.[9] 이미 러시아는 나고르노 카라바흐같은 분쟁이나 1992년 조지아 내전 때 샤밀 바사예프 같은 체첸계 군인을 보냈던 적도 있었다.[10] 제대로 된 보병과 포병, 공군의 지원없이 무리하게 기갑전력을 시가지로 밀어넣은 결과 고층 건물에서 체첸 반군이 내리 쏘는 대전차무기들에게 뚜껑이 따이고 극심한 피해를 입었다(....). 러시아군은 당시 그로즈니 시가전을 숫제 연옥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11] 사실 이 정도의 전사자도 러시아에겐 상당한 피해였다. 그만큼 체첸의 저항이 워낙 거세 고생했던 것.[12] 실제로 재임 중 건강이 좋지 못해 병원에 자주 갔으며 않아 눕는 일도 많았다.[13] 옐친은 이미 대통령일 때에도 임기 중에 많은 뇌물을 받고 부정 축재를 했다는 당시 검찰의 폭로가 있어서 제1야당인 공산당이 집권하고 이걸로 건수 잡으면 퇴임하자마자 감옥에서 여생을 보내야 할 판이었다.[14] 러시아에서 절인 오이(Солёные огурцы)는 살로(Сало, 돼지 비계)와 더불어서 보드카와 함께 가장 흔하게 먹는 술안주다.[15] 만평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자면, 다친 곰(러시아)이 그저 치료를 받으려 병원(옐친)에 갔는데 죽어서 관에 실려 나온다는 내용이다. 즉 살아들어가서 옐친을 만나 죽어나왔다는 풍자.[16] 이는 당시 이원복의 '현대문명진단'에서도 묘사된 바가 있다.[17] 몇년 후 직선제로 원상복귀되었다.[18] 이런 정치 공작도 옐친이 원조다. 기사.[19] 그 당시 서방은 소련을 최대의 가상적국으로 보았고 소련을 약화 내지는 제거하려는 의도는 상황에 따른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항상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수십 년을 넘게 미국 및 서방 세력과 적대해 왔었고, 아무리 몰타 회담 등의 이벤트를 통해 일시적으로 서방과 소련의 관계가 완화된다고 해도 소련이 서방의 위협 요인이라는 근본적 사실 자체는 바뀌는 것이 없었다. 물론 그런 점을 생각한다 해도 소련 붕괴를 위한단 이유로 내정 간섭을 하며 부정선거 지원을 하거나 독재 파시스트 정권이여도 반공을 외친다면 묻고 따지지도 않고 지원을 했단 점, 그리고 소련과의 약속들을 모두 어기고 동유럽의 구 소련 국가들을 모조리 NATO에 가입시키려 들거나 가입하려 드는 구 공산권 국가들을 단호히 막지 않고 무리하게 가입을 허가했다는 점 등의 행보들은 러시아인들에게 하여금 자신들의 실수로 소련이 무너졌다는 생각 대신 서방이 온갖 부당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국가를 무너트렸다는 생각을 각인시켰고, 그 결과 남오세티야 전쟁우크라이나 내전으로 대표되는 러시아의 반서방, 대러시아적 외교 방침을 부추기고 극도로 호전적인 정권이 생겨났다.[20] 북한의 핵탄두 수량은 수십발로 추정되나, 탄도탄에 탑재할 정도로 소형화되거나 재돌입과정을 버틸 수준은 아니라는 게 미국의 평가이다.[21] 그 유명한 자주포인 K-9 차체가 러시아 기술이 많이 반영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