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건빌 내전

 

'''부건빌 내전
Bougainville Civil War'''

'''시기'''
1988년 12월 1일 ~ 1998년 4월 20일
'''장소'''
파푸아뉴기니 부건빌 섬, 솔로몬 제도
'''원인'''
부건빌 섬 주민들에 대한 파푸아뉴기니 중앙정부와
구리 채굴 회사의 착취, 차별, 지역감정으로 인한 갈등
'''교전 세력'''
[image] 파푸아뉴기니
[image] 호주
[image] 부건빌 반군
[image] 솔로몬 제도
[image] 피지
'''지휘관'''
[image] 줄리우스 챈[1]
[image] 제리 싱이로크
[image] 파이아스 윙티
[image] 빌 스케이트
[image] 로비 나말리우
[image] 프랜시스 오나
[image] 샘 카우오나
[image] 시어도어 미리웅 †
[image] 이스마엘 토로아마
[image] 조셉 카부이
'''전력'''
군인 800명
경찰 150명
반군 약 2000여명
'''손해'''
군인 약 300여명 전사
반군 약 1000~2000여명 전사
'''결과'''
부건빌 자치정부 수립 , 부건빌 평화협정[2] 체결
'''영향'''
15,000명에서 20,000명에 달하는 부건빌 주민 사망
섬 전체에 대규모 피해 발생
1. 개요
2. 배경
3. 전개
4. 독립투표 실시
5. 기타
6. 관련 문서


1. 개요


파푸아뉴기니 부건빌 섬에서 발생한 내전. 국내에서는 파푸아뉴기니 내전으로 알려져 있다.

2. 배경


부건빌 섬은 파푸아뉴기니 본토와 부족, 문화가 달라 1975년 파푸아뉴기니가 독립한 뒤에도 분리독립 움직임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부건빌 섬에는 세계 최대 규모 구리 광산인 팡구나 광산이 있었는데 이곳을 세계 2위 광물회사 리오 틴토의 자회사인 부건빌 코퍼가 점유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부건빌 코퍼와 부건빌 코퍼의 대주주였던 파푸아뉴기니 중앙정부는 팡구나 광산에서 채굴한 구리를 팔아 막대한 이익을 챙겼지만 부건빌 섬 주민들에게는 이익이 돌아가지 않았고 오히려 광산을 개발하기 위해 환경이 심각하게 파괴되고 말았다. 게다가 여러 가지로 대우가 좋지 않았다. 호주에서 건너온 백인 노동자들은 팡구나 광산에서 일하던 부건빌 본토 주민들을 ‘빨간 피부’라고 불렀고 인종차별까지 이어졌다. 결국 호주, 파푸아뉴기니 정부에 대한 부건빌 섬 주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1988년, 양 세력간에 무력충돌이 일어나고 말았다.

3. 전개


1988년, 파푸아뉴기니 정부는 무력충돌을 예측하여 팡구나 광산 근처에 군과 경찰을 배치했다. 결국 이들과 부건빌 반군(BRA)과의 무력충돌이 발생했고 이 충돌은 부건빌 섬 전체의 분리독립 운동으로 이어졌다. 광산은 폐쇄되었고 수많은 외지인들은 부건빌 섬을 떠났으며 이 내전은 몇년에 걸쳐 광범위한 인권유린, 방화가 수반되었다.
1990년, 파푸아뉴기니군(PNGDF)은 부건빌에서 철수하였고 부건빌 반군은 섬 전체를 장악한 뒤 부건빌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파푸아뉴기니 정부는 호주로부터 헬리콥터, 순양함 등을 지원받아 부건빌 섬 전체를 봉쇄했다. 호주는 파푸아뉴기니에게 무력충돌을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헬리콥터를 제공하였으나 파푸아뉴기니는 이 말을 무시하고 기관총 등을 장착해 사용했다.[3] 또한 호주 정부는 파푸아뉴기니 정부에게 자금과 무기등을 제공하고 기술자와 간부를 파견하여 정부군을 광범위하게 지원했다. 해상 봉쇄는 1994년까지 이어졌으나 일부 지역에서는 1997년까지 이어졌다.
한편 반군 지도자 프랜시스 오나[4]는 부건빌 반군정부를 수립하였고 그 스스로를 대통령에 추대했다. 지역 수장이었던 조셉 카부이[5]는 부통령에 지명되었고 군 총사령관에는 전 파푸아뉴기니군 장교였던 샘 카우오나(Sam Kauona)가 임명됐다.
그러나 부건빌 반군정부(BIG)는 여전히 그 세가 약한 편이었고 정부군의 봉쇄 속에서 부건빌은 또다시 혼돈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더욱이 반군 자체도 하나의 통일된 지휘체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섬의 각 지방이 느슨하게 연합하고 있던 형태라 독립선언이라는 목적은 달성했지만 BIG가 섬 전체에 완전한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결국 반군은 부족, 지역별로 갈라졌고 대립하기 시작했다.
부건빌 섬 북부에 위치한 부카 섬 주민들은 민병대를 결성한뒤 파푸아뉴기니 조직의 도움을 받아 부건빌 반군을 몰아냈다. 1990년 하반기 즈음에는 반군이 부건빌 섬 나머지를 장악해 나가는 동안 파푸아뉴기니 군이 부카 섬을 장악했다.
반군의 대통령 프랜시스 오나와 부통령 조셉 카부이의 권력은 차츰 약해졌고 결국 샘 카우오나를 포함해 이 셋은 물러났다. 한편 친정부적인 성격의 지역 민병대들은 정부군과 함께 반군을 축출해내기 시작했고 1991년부터 1992년까지 정부군은 부건빌 섬 북부와 남서쪽을 점령했다.
1992년 선거를 통해 구성된 파이아스 윙티[6] 총리를 위시로 한 새 내각은 반군에 대해 더욱 강경한 노선을 채택했으며 이때 파푸아뉴기니는 솔로몬 제도의 국경을 불법침입하여 반군을 도운 솔로몬 제도의 주민들을 추적했지만 이내 솔로몬 제도 경찰들과 충돌했다.
1993년 2월, 정부군과 부건빌 지역 민병대 연합군은 부건빌의 수도 아라와(Arawa)를 다시 빼앗아왔다. 전 총리 줄리우스 챈은 외교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반군과 타협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윙티 내각은 이를 묵살했다. 하지만 윙티 내각은 단명했고(...) 다시 들어선 내각을 줄리우스 챈이 이끌게 되었다.
하지만 정부군은 울창한 우림속에서 지역 지리를 잘 알고 있던 반군들에게 지속적인 피해를 입었고 팡구나 광산을 되찾는데 실패했다.
챈 내각은 계속해서 평화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고자 노력했고 1993년 9월 솔로몬 제도에서 카우오나와 평화협상을 진행했다. 그리고 10월 중으로 아라와에서 호주의 주도로 평화 협의회를 개최하기로 협의하였으나 다른 반군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다. 오나의 불참 속에서 카우오나는 반군내 온건 세력 지도자로 떠올랐으나 거기까지였다.
챈 내각은 부건빌의 또다른 반군 세력 나시오이(Nasioi)의 수장이자 팡구나 광산 부지 소유자 협의회의 변호사였던 시어도어 미리웅(Theodore Miriung)과 접촉했고 이것은 1995년 부카섬을 수도로하는 부건빌 과도정부(BTG[7])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미리웅은 파푸아뉴기니 정부군과 강경한 반군 사이의 가교역할을 하길 자처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결국 챈 내각의 평화적 방책은 물거품이 되었고 카부이를 포함한 반군정부는 호주 케언즈에서 열린 회담에서 정부로부터 매우 좋지 않은 발언을 들었다고 전해진다. 이로서 챈 내각은 반군에 대해 유화적인 태도를 180도 바꾸었으며 정부군은 BIG의 근거지인 마틴 미로리를 폭격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마틴 미로리가 '''솔로몬 제도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에 반군은 즉시 부카 섬에 보복공격을 감행했고 결국 1996년 3월 21일 줄리우스 챈 총리는 부건빌에 대한 공격을 승인, 무력으로 마무리를 짓겠다고 대국민 담화에서 밝혔다.
그리고 챈 내각은 영국의 용병회사에서 용병을 데려오기 위한 협상을 진행했다.
와중에 정부군은 부건빌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는데 반군들의 근거지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무리한 공격을 감행한 탓에 작전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1996년 9월에는 반군이 부건빌에 주둔해있던 정부군의 캠프를 습격해 군인 12명을 사살하고 5명을 포로로 잡았다. 정부군은 급격하게 세가 약해졌고 집단 기강해이가 발생해 결국 정부군은 철수했다. 한편, BTG의 수장 시어도어 미리웅은 암살당했다.
챈 내각은 팡구나 광산을 되찾기 위해 용병을 데려왔으나 정부군 사령관 제리 싱이로크[8]는 용병 기용에 반대했다. 제리 싱이로크는 용병들이 파푸아뉴기니에 입국하는 즉시 체포•구금할 것을 명령했고 정부군은 국회의사당을 포위해 챈 내각을 압박했다. 또한 호주 정부까지 파푸아뉴기니 정부가 용병 계약을 파기할 것을 종용했고 정부군에 지원했던 무기와 헬기 등을 회수했다. 결국 줄리우스 챈은 사임했고 용병들은 추방되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부건빌에서의 분쟁은 1997년까지 지속되었다.

4. 독립투표 실시


2016년 1월 부건빌 자치정부(ABG)와 파푸아뉴기니 정부는 부건빌 섬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한 독립투표를 2019년 11월 23일에서 12월 7일까지 실시하기로 합의했다. 여론조사 결과 독립 찬성이 압도적으로 다수를 차지했다.#
12월 11일 선관위원장이 투표율 87.59%, 독립 찬성표가 98%로 압도적인 결과를 공식 발표했다. # 다만 구속력이 없으므로 어떤 식이든 협상을 거쳐야하며, 파푸아뉴기니 의회에서 독립 승인을 가결해야 한다. 제임스 마라페 총리는 독립투표 결과에 대해서 인정하였고 부건빌 자치정부와 협상해서 로드맵 구상하겠다고 밝히면서도 다른 파푸아뉴기니 내 자치지역 독립을 우려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는 이 독립투표가 2020년 누벨칼레도니 2차 독립투표, 서파푸아 독립운동에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도했다.#

5. 기타


2만여명의 사망자가 나왔으며 수만명의 피난민이 발생했다고 집계될 정도로 상당히 큰 규모의, 그리고 인권유린이 오랫동안 자행되었다고 보고된 내전임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는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은 물론 영미권 국가를 제외하면 세계적으로도 그리 큰 반향은 일으키지 못했다. 동기간에 벌어진 보스니아 전쟁이 규모가 압도적으로 크고 더 충격적이었던데다 후대에는 소말리아 내전, 르완다 내전, 부룬디 내전의 비중도 같이 부상했고 파푸아뉴기니는 물론 그 인근의 남태평양 섬나라들은 그리 영향력 있는 나라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런 대규모 내전들은 빠르게 현대인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고 있다.'''
2011년, 파푸아뉴기니 총리 마이클 토머스 소마레가 팡구나 광산을 점유하던 호주 광물회사 리오 틴토가 파푸아뉴기니 정부군에 무기, 병영 등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리오 틴토는 이 사실을 부인했다. #
2019년 독립관련 투표 이후 독립될 가능성도 있지만 파푸아뉴기니 측은 파푸아뉴기니 내부가 분열될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하여 이를 반대하고 있다. 독립에 성공하더라도 미승인국이 될 가능성이 높다.

6. 관련 문서



[1] 중국계 이다.[2] 부건빌 자치정부 수립, 내전 종결후 20년내 독립투표 실시 합의등의 내용이 담겼다.[3] 다만 이때 호주가 파푸아뉴기니의 행태를 사실상 묵인했다며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팡구나 광산을 사실상 점유하던 리오 틴토는 호주 최대 광물수출 회사였고 반군의 준동은 호주의 국익과도 직결된 문제였기 때문이다.[4] Francis Ona(1953~2005), 부건빌 독립운동의 리더중 한 사람이었다.[5] Joseph Kabui(1954~2008), 마찬가지로 독립운동 지도자중 한사람이었고 2005년부터 2008년까지는 부건빌 자치정부의 대통령을 역임하기도 했다.[6] Paias Wingti(1951~), 파푸아뉴기니의 정치인. 1985년~1988년과 1992년~1994년까지 파푸아뉴기니 3대 총리를 역임했다.[7] Bougainville Transitional Government[8] Jerry Singirok(19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