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 전쟁
[image]
Rat u Bosni i Hercegovini, Agresija na Bosnu i Hercegovinu (세르보크로아트어)
Rat u Bosni i Hercegovini, Domovinski rat (크로아티아어)
Рат у Босни и Херцеговини, Грађански рат у Босни и Херцеговини, Одбрамбено-отаџбински рат (세르비아어)
Bosnian War (영어)
La guerre de Bosnie-Herzégovine (프랑스어)
Боснийская война (러시아어)
1. 개요
1992년 4월 6일[1] – 1995년 12월 14일[2]
3년 반 동안 지속되었던 보스니아 전쟁은 대량의 난민사태와 민간인 학살, 유엔보스니아평화유지군(UNPROFOR)과 나토군의 군사적 개입, 비정부 민간 구호단체들의 개입, 그리고 집중적인 언론보도 등의 이전의 전쟁들과는 다른 양상을 드러냈고, 이로 인해 일부 국제정치학자들은 보스니아 전쟁을 ‘새로운 전쟁’이라 부른다. 이후 국제 분쟁의 해결에서 국가주권보다 인명 보호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인도주의적 개입', '보호 책임'(R2P) 개념이 제시되는 계기가 되었다.
보스니아 전쟁은 20세기 인류역사에서 가장 잔인하고 수치스러운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상당한 충격을 준 전쟁으로, 400만 인구의 40%에 해당하는 이들이 난민으로 전락했고 40%의 집들이 방화와 폭격 등으로 초토화되었다. 이 전쟁으로 25∼30만명의 사람들이 전쟁으로 사망했다고 추정되나 아직도 정확한 통계 자료는 없다.
전쟁의 피해는 초기에 집중되었으며, 실제로 1995년 6월 빌 클린턴이 앨 고어 부통령과 함께 CNN의 앵커인 래리 킹과 대담을 나눴을 당시 그는 “전쟁 희생자 가운데 절반 가량인 13만명이 초기 1년 동안에 희생당했다”고 밝혔다.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는 전쟁 희생자 가운데 상당수가 전투가 아닌 '인종청소'(ethnic cleansing)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집단학살로 사망했다는 사실이다.
2. 역사
일자별 전황 경과. 처음에 나오는 영상은 독립 선언하기 직전인 1991년 10월 14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 자치 의회[3] 에서의 라도반 카라지치 vs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의 설전 영상이다.
2.1. 전쟁의 시작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붕괴·분열 과정에서 가장 잔인한 전쟁이 벌어진 곳은 가장 먼저 독립을 선언한 슬로베니아도 크로아티아도 아닌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였다. 그 이유는 다름아닌 보스니아가 최약체였기 때문이다. 보스니아가 약체인 데다 결정적으로 어느정도 국내 민족 구성이 지역을 단위로 경계선을 그어놓고 있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북마케도니아와 달리 보스니아는 '''이슬람교(보슈냐크계)[4] - 가톨릭(크로아티아계) - 정교회(세르비아계) 사람들이 한 지역 내에서도 뒤섞여 살았기 때문이다'''. 이슬람 공화국으로 독립을 원하는 보슈냐크계 무슬림들과, 영토를 유지하려는 세르비아계 정교회, 독립한 김에 영토 확장을 노리던 가톨릭 크로아티아계가 뒤엉켜서 총부리를 서로 들이댔다. 그래서 보스니아 전쟁은 초기부터 '''종교 전쟁'''으로 흘러가, 자기 종교가 아닌 타 종교 인원들에 대한 대량 학살의 양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유고슬라비아인은 통틀어서 남슬라브 민족으로 사실 슬로베니아부터 세르비아,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에 이르기까지 '''언어는 표기 문자만 다르지 똑같았고''', 이들을 구분하는 단위가 바로 '''종교'''였다. 즉, 종교를 배경으로 민족이 쪼개져 버린 것.
1991년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연방 탈퇴로 시작된 연방 내 공화국들의 분리 독립 움직임이 표면화되자,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에서도 연방으로부터 독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다.
1991년 10월 14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의회에서 벌어진 라도반 카라지치(세르비아 민주당)와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민주행동당, 보슈냐크인)의 비방전. 카라지치는 '''"분리 독립을 선언하겠다고? 어디 독립 선언 한 번 해봐라. 무슬림은 자기네를 지킬 힘이 없으니 내전 나면 다 죽여버리겠다."'''[5] 라고 일갈했고, 이제트베고비치는 '''"세르비아인들을 제외한 그 어떤 사람들도[6] 유고슬라비아(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서 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너희가 아무리 무슬림들을 공격해도 무슬림 사회는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고 응수했다.
[image]
1991년 전쟁 발발 이전 당시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민족 구성. 아래의 흰 선이 데이턴 협정으로 확정된 양 세력 간의 경계이다. 경계선 동쪽 세르비아계 영역에 다수 거주했던 보슈냐크인들이 주된 희생자가 되었으며, 이후 세르비아계의 영역 확장으로 원래 크로아티아-보슈냐크계 지역이었던 곳들도 큰 전쟁 피해를 입었다.
문제는 이전의 분쟁 지역이었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각각의 분쟁 양상은 판이하게 달랐다는 점이다. 슬로베니아는 민족 분포가 각각 슬로베니아계(90%)로 세르비아계의 비율이 적었으며, 크로아티아의 경우 크로아티아계(89%)가 다수였지만 세르비아계도 소수 정도나마 분포하고 있었으면서도 두 민족 간의 주거 지역도 확실하게 분리되어 있어[7] 전쟁의 성질이 지역 내 민족 분쟁보다는 사실상 크로아티아계와 세르비아계의 전선 쟁탈전이었다. 이와는 달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이슬람교를 믿는 보슈냐크인, 동방정교회를 믿는 세르비아계,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계의 세 민족들이 한 나라 내부에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 있었다. 보스니아의 분리 독립에도 보슈냐크계와 크로아티아계는 독립에 찬성했으나 세르비아계가 반대하면서 분란이 격화되었다.
결국 긴장이 고조되어가던 1992년 2월 29일 연방 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사회주의 공화국의 2/3를 차지하던 보슈냐크계, 크로아티아계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을 선포하며 연방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자 나머지 세르비아계가 이에 반발하면서 사태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르게 된다. 3월부터 4월까지 각 지역에서 세 민족 간 소규모 충돌이 일어난다.
연방의 주도국이었던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1992년 3월 10일 유고슬라비아의 정부군인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을 보스니아에서 철수시키고 보스니아의 독립을 인정하는 태도를 취했지만 이는 철저한 '''기만술'''이었다. 인민군은 철수했지만 1992년 3월부터 4월 6일 라도반 카라지치의 세르비아계 괴뢰국인 스릅스카 공화국 건국 선언 직전까지 보스니아로 무단 월경을 하여 카라지치 산하의 세르비아계 민병대로 넘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운명의 4월 6일 미국과 유럽 공동체(EC, 이후 유럽 연합)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독립을 승인하면서 보스니아의 연방 이탈이 사실상 국제 사회로부터 인정되자 이와 동시에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수도 사라예보를 포위하면서 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라도반 카라지치는 미국과 유럽 공동체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독립 승인을 확인하고, 4월 6일 14시(현지시간) 연방[8] 주도국인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지원 하에 스릅스카 공화국[9] 의 이름으로 세르비아 접경 도시인 Pale에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렇게 카라지치는 봉기를 일으키고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세 민족 사이에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에서 그랬던 것처럼 인민군의 직접적인 개입보다는 스릅스카 정부군 및 민병대를 활용하는 방식을 고수했다.
일단은 크로아티아계와 보슈냐크계가 함께 세르비아계에 대항하는 양상을 띄었으나,[10] 여기에 크로아티아가 같은 해 6월 12일 작게는 크로아티아계 공화국 지역, 크게는 헤르체고비나 전역을 목표로 참전[11] 하면서 상황은 더욱 막장이 되었다. 보스니아 전쟁의 하위 전쟁인 이 '보스니아-크로아티아 전쟁' 에서는 사상자가 1만 명 이상이 나왔는데 62%가 보슈냐크인이었고,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계는 각각 24%, 13%였다. 크로아티아계의 무슬림 인종청소가 함께 자행되었다는 증거다. 이 때문에 크로아티아의 독립 영웅이자 초대 대통령이었던 프라뇨 투지만 역시 전범이라는 비판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image]
전쟁 중기인 1994년의 인구 구성. 세르비아계 영역이 전범위로 넓어진 것을 볼 수 있다. 유일한 예외로 형제국 크로아티아의 지원을 받은 지도 남쪽의 크로아티아계(파란색) 영역이 일부 확장되었다. 보슈냐크인이 많았던 지역을 크로아티아계가 차지한 경우도 있다. 크로아티아가 본국에서의 전쟁을 수행하기도 여력이 부족하여 세르비아를 제대로 막지 못한 탓에 세력 간 대치가 지루하게 이어졌고, 세르비아 정부의 지원을 받은 스릅스카군이 보스니아군과 크로아티아군을 압도했기 때문이었다. 좀 심하게 말해서 이 전쟁은 세르비아가 이하에 서술될 반인륜적인 짓거리만 안 했어도 승리할 가능성이 무척 높았던 전쟁이었다.[12]
2.2. 사라예보 포위전
2.3. 스레브레니차 학살
2.4. 1993년 아테네 합의 시도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보스니아 전쟁에서는 전쟁 초기에는 스릅스카 공화국을 지원했으나 1993년 5월 그리스 아테네에서 이뤄진 아테네 합의[13] 를 적극 주장하여 스릅스카 공화국의 라도반 카라지치, 라트코 믈라디치와 엄청난 마찰을 빚기도 했다. 관련 영상
밀로셰비치는 무슬림의 독립 자체는 용인할 수 있어서 아테네 합의를 시도했으나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기에'''[14] 크로아티아와의 전쟁에 집중하는 대신 보스니아에서는 여러차례 발을 빼려고 했다. 이 때문에 밀로셰비치는 '''보스니아 전쟁은 명분이 없다'''며 크로아티아와의 전쟁에 올인할 것을 주문했으나 카라지치와 믈라디치는 이슬람 숙청이 먼저이고 영토 문제에 대해서 양보할 수 없다며 아테네 합의를 파기해버린다. 그러자 밀로셰비치는 1993년 말 스릅스카 공화국에 대한 지원을 최소화하기로 결정하고 이후 스릅스카 공화국은 보스니아 전쟁에서 수비 + 점령지 내 보슈냐크인 학살에만 집중하다가 미국한테 폭격 맞고 사실상 전쟁에서 패배했다.
2.5. 전황이 뒤집히다
전쟁이 시작되자, 1992년부터 미국, 영국 등 서방세계 NATO 가입국의 주도로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에게 무기와 자금을 지원하는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신 유고 연방) 세르비아 공화국에 대한 단계적인 제재가 가해졌다. 신 유고 연방에겐 경제 제재와 무역 금수 조치가 단행되었고, 심지어 국제연합에서도 신 유고 연방의 회원국 자격을 박탈하면서 세르비아를 비롯한 신 유고 연방은 국제 사회로부터 고립되고 말았다. 하지만 이런 외교적인 차질과는 별개로, 당시 서방이 가했던 세르비아에 대한 경제 제재와 금수조치는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루마니아, 불가리아, 헝가리가 세르비아와 밀수, 밀거래를 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쟁 당시 세르비아가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등지에서 자행하는 전쟁범죄와 학살 행위를 비난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세르비아 애들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경제 봉쇄를 통한 압력보다는 외교적 방법으로 전쟁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태평한 소리를 늘어놓으며 서방의 경제적 제재를 반대하는 등 이중적인 면모를 보였다. 단순히 태평한 소리는 아니었던 것이 루마니아와 불가리아가 민주화 이후 급속한 물가상승과 실업률 증가로 인해 지하경제가 크게 성행하고 있었고 중앙정부도 월급액수가 위낙에 적던 상황이다보니 지하경제 융성에 대해 단속조차 하지 못했다. 헝가리도 이보다는 상황이 조금 낫기는 했지만 그래봐야 경제상황이 좋지 않았던 것은 매한가지였다. 이러다 보니 밀무역이 이루어져도 약간의 뇌물로 해결이 가능했고, 밀무역 단속이 제대로 이루어질 턱이 없었다. 물론 물가상승 문제는 세르비아도 예외는 아니었지만 이미 1980년대 말부터 물가상승이 고질적인 문제가 되었던지라 어느 정도 내성이 있었던 상황이었다.[15]
이런 상황에서 결국 미국을 중심으로 UN 평화유지군이 파견되었으나, 이들은 현장 관리만 맡는 소규모 군대였고 세르비아계 입장에서는 직접 공격만 안 하면 상관없었기에 전쟁 종결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세르비아 민병대 사령관이던 소위 '슈퍼 장군' 라트코 믈라디치는 고라즈데, 사라예보, 비하치 세 도시만 점령하면 이제 전쟁은 끝이라고 호언장담하면서 승리를 확신했으며 실제로 보스니아 공화국의 운명은 무척 위태로웠다.
[image]
사라예보 시장에 대한 무차별 포격으로 인해 벌어진 참상. 피가 낭자하고 두개골로 보이는 뼈 조각이 널브러진 거리의 모습, 신체의 일부가 잘려나간(말이 잘려나간거지 사실상 '''찢어발겨진 수준'''의 부상이다 )등의 끔찍한 부상을 입고 간이 병원으로 끊임없이 실려오는 시민들의 모습, 충격을 받고 울부짖는 간호사의 모습이 담겼다. 매우 충격적인 장면인데다 컬러 영상이므로 주의.
1995년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사라예보 시장을 폭격하면서 상황은 급격히 반전되었다. 평화로운 일요일,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의 번화가 시장에 대한 세르비아계의 포격으로 수많은 무고한 시민이 학살당한 이 사건 때문에 국제적 여론이 완전히 돌아섰던 것이다. 사라예보는 당시 양측의 경계였고, 전쟁 중 우세한 세르비아계가 장악한 지역에 포위되어 있었으나 수도라는 등의 이유로 전쟁 위협에서 벗어나 방치되고 있었는데 이것이 깨지게 된 것이다.
우세한 여론을 등에 업고, NATO가 '딜리버레이트 포스' 작전으로 명명된 세르비아계에 대한 전면 공습을 개시했다. 8월 경에 시작된 NATO 소속 항공기들은 사라예보 일대에 배치된 세르비아계 민병대의 야포 진지와 물자 집적소, 통신시설을 집중 폭격했으며 세르비아계 스릅스카 공화국의 핵심 시설도 덩달아 폭격의 대상이 되어 이로서 스릅스카 공화국의 진격은 저지당했다. 정작 폭격의 효과는 미미했다고 하지만, 이 전쟁에 대한 NATO의 적극 개입 의지가 제대로 천명된 셈이었다. 이에 세르비아계는 매우 당황하기 시작했다. 사실 폭격 자체는 이전에도 있었으나 고작 6발밖에 안 투하하는 등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했고, 오히려 스릅스카 공화국의 수장 라도반 카라지치가 이제 미국놈들에게 보여 줄 예의는 없다고 선포하며 반발심만 커지게 만드는 등 악효과만 끼쳤다. 여기에 세르비아 민병대가 2대의 NATO 항공기를 격추하면서 사기만 잔뜩 올려주고 말았으나, 다시 대규모 폭격을 가하면서 이를 완전히 뒤집은 셈이다.
라드코 믈라디치 장군은 '''UN군 포로들을 전략 거점에 묶어서 인간 방패로 삼았고''' 프랑스 평화유지군 사령관이자 UN군 사령관 베르나르 잔비엘 장군에게 '폭격을 계속하면 보스니아 민간인들과 UN군 포로들을 살해하겠다'고 위협했으나, 이미 여론은 세르비아에 불리하게 기울어진 상황이었다.
거기에 이웃한 크로아티아 공화국 영내에서는 미국의 후원으로 재정비된 크로아티아 공화국군의 '폭풍작전'이 시작되었다. 크로아티아에 대해서는 미국 정부의 직접적 개입이 힘든 상황이었기에 미 국무부는 크로아티아군에게 미국 민간군사기업(PMC)을 알선해 주었고 이를 통해 크로아티아 군대의 훈련을 MPRI라는 업체가 맡게 되었다. MPRI는 구성원의 상당수가 미군의 전직 고위 장성 출신들이었으며 이들의 훈련을 통해 크로아티아군은 NATO의 교리 체계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결국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남부 지역을 점거하고 있었던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은 붕괴되었고, 이 지역의 세르비아계는 보스니아와 세르비아로 축출되었다.
이어서 미국 특사가 세르비아를 후원하던 러시아 대통령 보리스 옐친을 만나 압력을 넣으면서 전쟁이 수습 단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옐친은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에게 세르비아계 민병대를 후원하지 말라고 경고했으며,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계 민병대 지도자에게 더 이상의 적대 행위를 중단하고 회담에 응하라고 설득할 수밖에 없었다. 러시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국을 '기만자'라고 맹렬히 비난하며 세르비아 편을 들었으나, 사라예보와 고라즈데에서 벌어진 참상으로 인해 반전된 여론에 밀려 세르비아에게 등을 돌렸고 세르비아인들은 최소한의 인도적 한계도 지키고 있지 않다며 비난 성명을 발표했다.
2.6. 전쟁이 끝나다
결국 1995년 12월 14일, 미국 오하이오 주 데이튼에서 역사적인 데이튼 협정이 체결되었다. 이로써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공화국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로 계승되어 독립국으로서 인정되었으나, 각각 영토를 절반씩 차지한 세르비아계 스릅스카 공화국과 크로아티아-무슬림 연합의 두 세력이 한 연방 내에서 공존하는 식으로 합의되었다. 대통령직은 세 민족이 돌아가며 맡게 된다는 협정 내용은 결국 갈등의 근본 원인인 민족 분쟁의 씨앗을 제거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후 1996년 3월부터 사라예보에서 스릅스카 공화국군이 철수하였고, 이를 관리 감독하기 위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는 UN 감시이행군과 러시아군이 공동 주둔하게 되었다. 러시아군이 별도로 추가된 것은 세르비아계의 요청으로, 협정상 보장에 따라서 러시아군이 세르비아계의 이익을 대변하게 된 것.
다행히 2020년 현재까지는 큰 탈이 없지만 언제 타오를지 모르는 불안한 불씨가 남겨진 셈으로, 주변국들의 EU 가입이 미뤄지거나 아예 고려되지 않는 이유가 되었다.
이 전쟁은 제1차 세계 대전과 비슷한 면이 있다.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지역의 민족 분쟁으로 인해 발생했다는 점,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에서 벌어진 테러가 전면적인 국제전의 도화선이 되었다는 점, 세르비아 뒤에 범슬라브주의의 대부를 자처하는 러시아가 있었다는 점 등이다. 냉전 시기였다면 세계대전까지 내다볼 수 있었던 상황인데, 다행히 1990년대의 국제정세는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약화가 명확하던 시기였고 결국 유일 최강국이었던 미국 빌 클린턴 행정부의 강경한 입장에 밀려 러시아가 개입을 포기하게 되면서 더 큰 전쟁으로 번지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 이러한 평가에 대한 반론도 많다. 유고 전쟁 당시 러시아는 소련 붕괴 이후 경제적, 정치적 혼란으로 인하여 유고슬라비아 전쟁에 무리한 개입이 쉽지 않았으며, 개입했다면 전쟁은 빠르게 종결되었을 것이기에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 밑에서 인종청소와 같은 범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보는 의견이다. 또한 러시아가 개입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서방 측은 유고 전쟁을 최소화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종교적/경제적 이유로 인하여 이를 관망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다. 전쟁이 심화되는 와중에도 서방측이 안이하게 행동하면서 그 피해를 더 크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보스니아에서 인종청소가 벌어진 이면에는 무슬림 정권을 축출해 보고 싶다는 이유만으로 방관만 하고 있었던 서방 세력의 태도가 자리잡고 있었음이 분명한 사실이다. 서방도 이 전쟁에 대해 큰소리 칠 입장은 결코 되지 못한다는 것.
[image]
2005년의 민족 구성. 두 공화국의 경계로 민족이 확연하게 구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경계 너머 세르비아계의 대대적인 민족 이동이 수반되었고, 전쟁 중 심각한 피해를 입은 보슈냐크인 거주 지역은 일부만이 회복되었다.
이 참담한 전쟁에서 보스니아에서는 3만 명이 넘는 군인과 비슷한 수치의 민간인 사망자가 나왔고, 세르비아도 2만 명의 군인(주로 세르비아계 의용병과 스릅스카군)과 4천여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크로아티아 역시 5천 명의 군인과 2천 명의 민간인이 사망했다. 실제 사망자는 앞 수치들의 도합인 9만여 명보다 1~2만 명 정도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상자나 난민은 물론 그보다 훨씬 많아서 무려 220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독립 직전 인구는 435만 명이었는데, 현재는 402만 명으로 줄었으니 난민의 규모와 전쟁의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시기에 민간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에 대해 전쟁의 생존자가 작성한 글을 읽어보면, 얼마나 피폐하게 버텼는지 단편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 그나마 국제 사회의 적극적인 지원과 더불어 제노사이드가 조직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 그리고 애초에 인구도 얼마 없는 동네라는 점 덕분에 아프리카 지역처럼 백만 단위에 이르는 대규모 사망자가 쏟아져 나오는 일은 없었다. 또한 국제적인 인권단체 엠네스티 인터내셔널이 2003년 8월에 낸 한 보고서에 따르면, 1만 7000명가량이 실종 상태라고 밝혔고 가족들은 그들이 죽임을 당한 뒤 어딘가에 암매장됐을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보스니아 곳곳에선 아직도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다. 보스니아 당국이 최근 밝힌 바에 따르면, 1995년 전쟁이 끝난 뒤 지난 8년 동안 약 1만 8000구의 시신이 발굴됐다. 지금까지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약 1만1500명이며 나머지 6500명의 유골은 훼손이 심한 탓에 신원조차 확인이 안 된 상태다.
이 전쟁에서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계, 보슈냐크인 모두가 민병대를 조직해서 서로 개처럼 싸웠고, 모두가 고문, 집단 강간, 대량학살 등의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세르비아계 뒤에 있는 러시아를 경계한 서구 미디어들의 일방적인 보도로 인해서, 온갖 나쁜 짓은 세르비아계가 다했고, 크로아티아계와 보슈냐크인들은 일방적인 피해자로만 묘사하는 경우가 많은데 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전쟁 종식이후 2017년까지 진행된 국제사법재판소의 전쟁범죄자 재판에선 세르비아계의 전쟁범죄라고 알려진 것들이 상당 부분 과장되었다면서, 일부 혐의에 대해선 무죄를 선고하였다. 또한 크로아티아계와 보슈냐크인들의 전쟁범죄에 대해서도 광범위하게 처벌했다. 한마디로 극단적인 민족주의의 광기로 인해서 모두가 개만도 못한 짓거리를 저질렀다는 것이다.
스포츠 부분도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올림픽이나 FIFA 월드컵, 유니버시아드 대회 등 각종 국제 스포츠 경기에서 경기 출전 금지령까지 내려졌던 것. 과거 냉전 시기 동유럽의 스포츠 강국이었던 유고슬라비아는 보스니아 전쟁으로 인해 국제스포츠대회에서 1990년대 전반기에 그 존재감이 지워지게 된다. 전쟁의 장기화와 유고 연방의 분리로 국가대표 선수들의 혼란 또한 당연히 발생됐다. 유고 연방 분리로 국가대표 각 선수들은 독립한 자신의 모국으로 국적을 옮기기 시작하면서 구 유고슬라비아 시절 최고의 전력을 자랑하던 축구, 수구, 테니스 등의 전력이 급감하게 된다. 가장 유명한 사례로 유로 1992를 들 수 있다. 당시 UEFA는 유고슬라비아의 유로 대회 출전을 박탈했고, 그 자리를 대신한 덴마크가 유로 1992 우승을 달성하게 된다. 아예 국가대표급 테니스 선수 중 모니카 셀레스나 슬로보단 지보이노비치 같은 선수들은 미국 등 국외로 망명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출신으로 유명한 축구 선수인 에딘 제코 역시 보스니아 전쟁을 눈앞에서 경험하였다. 축구인 바히드 할릴호지치 역시 모스타르에서 피해를 겪은 적이 있다고 한다. 크로아티아의 축구선수 루카 모드리치도 이 시기에 전쟁에서 할아버지가 총살당하는 시련을 겪었다.
3. 매체에서
이 당시 10대 소녀였던 즐라타 필리포비치(Zlata Filipović)가 쓴 일기는 보스니아판 안네의 일기란 평을 받았고 한국에서도 번역 출간된 바가 있었다. 즐라타는 이후 가족과 함께 프랑스로 이주했고, 현재 아일랜드에 정착하여 평화운동, 난민 구호 등의 여러 활동에 동참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을 그려 유명해진 만화가 조 사코가 그린 안전지대 고라즈데와 카라쥐치의 크리스마스가 보스니아 전쟁을 다루고 있다.
제프 롱의 소설 디센트(소설)의 주인공 일라이어스 브랜치가 보스니아에 주둔한 유엔군 출신이다.
한국에서 코메디 영화로 잘못 알려지며 주목받지 못한 비운의 걸작 <노 맨스 랜드 ''Ničija zemlja''>(2001)[17] 와 베를린 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한 <그르바비차 ''Grvavica''>(2005)가 보스니아 전쟁을 배경으로 한다.
스티븐 갤러웨이 作 ‘사라예보의 첼리스트’ 역시 보스니아 전쟁 당시 실화를 바탕으로 쓰인 소설이다.
음악 쪽으로는 U2의 ''Miss Sarajevo''가 유명하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빌 카터가 보스니아 전쟁의 참상을 영화화할 것을 보노에게 제안하여 다큐멘터리 필름을 만들었고, 이후 브라이언 이노, 루치아노 파바로티 등이 참여하여 반전의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만들어내기 이른다. 또한 프로그레시브 메탈 밴드 사바타지의 1995년작 '''Dead Winter Dead'''가 이 보스니아 전쟁의 참상을 스토리텔링으로 엮은 컨셉트 앨범으로 엮기도 했다.
리차드 기어와 테렌스 하워드가 주연한 '헌팅 파티 ''The Hunting Party'''(2007)라는 영화도 보스니아 전쟁을 배경으로 다루고 있다. 후술된 '에너미 라인스'와 같이 본다면 좋은 작품.
영화 에너미 라인스는 보스니아 전쟁 당시 세르비아 민병대에 의해 격추됐던 미 공군의 스콧 오그래디 대위(Scott O'Grady)의 실화를 다룬 영화이다. 스페이스 포스의 주인공 마크 네어드의 캐릭터도 오그래디를 부분적으로 모델로 하여 보스니아에서 추락해 6일간 벌레 먹으며 버틴 적이 있다.
베니치오 델 토로, 팀 로빈스 주연의 영화 어 퍼펙트 데이는 보스니아 전쟁 종결 직후 보스니아에 파견된 구호 단체가 하루 동안 겪는 해프닝을 다룬 영화이다.
보스니아 전쟁이 한창이던 1994년에는 멀리 떨어진 르완다에서도 대학살극이 벌어졌으며,[18] 이를 이용해서 보스니아 전쟁과 르완다 내전을 다룬 창작물에서는 각각의 사건을 창작물 내에서 따로 언급할 때가 있다. 가령 르완다 내전을 다룬 영화 호텔 르완다는 보스니아에서 학살극이 자행되었다는 뉴스가 나오며, 보스니아 전쟁을 다룬 노 맨스 랜드에선 등장인물들이 '르완다에서 무슨 일이 났나봐.'라고 언급하는 식.[19] 언급되지는 않지만 1994년 연말에도 피로 범벅이 된 해였는데, 12월 11일날 러시아 공군기가 그로즈니를 공습하며 제1차 체첸 전쟁이 벌어졌다. 또한 당시에는 파푸아뉴기니에서 부건빌 내전이 한창이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보스니아 전쟁에 비하면 별로 주목받지 못했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소설 '안녕 요정'에서는 중요하게 다뤄진다.
리버풀 FC의 유튜브 계정에 업로드된 데얀 로브렌의 개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 'My Life as a Refugee'에도 당시의 참상에 대해 다루고 있다. ##
건담 시리즈 중 가장 참혹하기로 알려져있는 기동전사 V건담은 보스니아 전쟁을 모티브로 했다고도 한다.
1997년에 개봉한 영화 피스메이커에서도 이 전쟁이 비중있게 언급된다.
This War of Mine이란 게임은 보스니아 전쟁 당시 포위됐던 사라예보를 모티브로 만들어진 서바이벌 게임이다.[20] 전장에서 싸우는 군인이 아니라 '''내전에 휘말려 고립된 민간인들'''이 주인공인 게임으로, 플레이함으로써 간접적으로 보스니아 전쟁이 '''얼마나 막장이였는지''' 체험 가능하다. 게임 트레일러 중에는 실제 보스니아 전쟁 생존자가 출연한 동영상도 있다.
단편 영화 10분 동안에도 이 전쟁을 소재로 한다. 10분 동안 벌어지는 전쟁의 참상을 건조하게 보여준다.
4. 관련 문서
보스니아 전쟁이 종식된 후 전쟁에서 살아남은 한 생존자[21] 는 생존주의 커뮤니티에서 자신의 경험을 공유했다. 유명해진 그는 "도심 SHTF (Shit-Hits-The-Fan. '망했다'. 극도의 혼돈 상황을 이르는 은어)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해야했는가"라는 주제에 대한 인터뷰를 했는데 인터뷰 내용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게임이다. 이 게임을 해보는 것 만으로도 보스니아 전쟁이 얼마나 비참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훗날 밈으로 돼 버린 뽕짝거리는 노래가 이때 생겼다.
보스니아 전쟁이 종식된 후 전쟁에서 살아남은 생존자. 레딧에서의 글로 유명해진 그는 "도심 SHTF (Shit-Hits-The-Fan. '망했다'. 극도의 혼돈 상황을 이르는 은어)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어떻게 해야했는가"라는 주제에 대한 인터뷰를 했다.
[1] 미국과 유럽 공동체(유럽 연합의 전신)가 보스니아의 독립을 승인했고 여기에 대한 대응으로 밀로셰비치가 지배하던 세르비아(신유고 연방)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수도 사라예보를 포위하고 포격을 시작했다. 통상적으로 이 날을 전쟁 발발 시점으로 잡는다.[2] 데이튼 협정 체결일. 사라예보 포위전의 종료로 잡을 경우 1996년 3월 1일. 1996년 3월 1일은 라도반 카라지치가 스릅스카 공화국의 대통령직에서 사임하고 종적을 감춘 날이기도 하다.[3] 1989년 동유럽 혁명에 따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공화국도 이름만 사회주의 공화국이지 민주화 조치를 단행하여 1990년 각 구성국에 자유 총선을 시행했다. 1990년 보스니아 총선 결과,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가 이끄는 민주행동당(이슬람)이 31.1%, 라도반 카라지치가 이끄는 세르비아 민주당(정교회)이 26.1%, 크로아티아 민주연합(가톨릭)이 16.1%, 보스니아 공산당이 12.3%, 유고슬라비아 개혁연합이 8.9%를 얻었다. 1990년 총선 결과가 곧 내전의 시작이나 다름이 없었다.[4] 세르보크로아트어권에서는 보스니아 무슬림(Bosanski musliman)을 의미하는 표현으로서 '보슈냐크(Bošnjak-단수형, Bošnjaci-복수형)',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민족 전체를 의미하는 표현으로서 '보사나츠(Bosanac-단수형, Bosanci-복수형)'라는 표현을 사용하여 구분하지만, 한국에서는 별도의 구분없이 지명에서 유래한 '보스니아인'으로 지칭하는 편이다. '보슈냐크인'이라는 표현 대신 영어식 표현인 Bosniak에서 유래한 '보스니악'이라는 표기가 사용되기도 한다.[5] 대놓고 세르비아인들이 보슈냐크인에 대한 학살, 공격에 나서라고 하는 부분이다.[6] 이제트베고비치는 이때 유고슬라비아의 민족들을 직접 언급한다. 슬로베니아인(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인(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인(마케도니아), 알바니아인(코소보), 헝가리인(보이보디나 자치주), 무슬림(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이는 티토 시절이었던 1960, 70년대에는 상상할 수조차 없는 민족주의 발언이다. 티토 시절에는 유고슬라비아인으로써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각 민족명의 'ㅁ'자를 발설하는 순간 숙청당할 정도로 살벌했다.[7] 주로 세르비아와 인접한 부코바르 등 동부 지역과 크닌 등을 비롯한 크로아티아 남부 지역에 세르비아계의 분포 비율이 높았다.[8] 신 유고슬라비아 연방인 유고슬라비아 연방공화국 발족은 1992년 4월 29일이었므로 아직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SFR Yugo)이었다.[9] 처음에는 SAO 보산스카 크라이나, SAO 헤르체고비나, SAO 로마니아 등 SAO(사라예보 자치주)로 독립했으나 이후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통합된다.[10] 심지어 이들은 유고슬라비아 전쟁 이전인 제2차 세계 대전 때 추축국의 유고슬라비아 점령기에 나치 독일, 헝가리 왕국 등 추축국 세력들의 지원 하에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국내의 세르비아계들을 학살, 탄압한 이력이 있다. 자세한건 우스타샤, 실향민, 한트샤르 문서 참조.[11] 1992년 6월 12일 크로아티아계는 헤르체고비나-크로아티아 공화국을 자칭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인들의 보슈냐크인 학살이 알려지자 미국이 크로아티아한테 보스니아에 이 영역을 반환하지 않으면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과 싸우는 크로아티아를 지원하지 않을 것이며 나아가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을 인정하겠다고 압박하여 결국 크로아티아의 투지만 대통령이 GG치고 1994년 8월 보스니아에 헤르체고비나-크로아티아 공화국을 반환했다. 그러자 보슈냐크인들은 보복 차원에서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보복학살에 나서기도 했다.[12] 특히 이 학살은 보슈냐크계, 크로아티아계만 학살당한 게 아니라 '''동족인 세르비아계도 학살한 게 문제였다.'''[13] 보스니아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 후 분리독립 국민투표를 인정하는 것. 의외라고 생각할 수는 있지만 밀로셰비치는 1992년 3월 10일 보스니아의 독립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였던 적이 있다. 그래서 밀로셰비치는 카라지치와 믈라디치에 "이 정도만 해라. 우리의 주적은 크로아티아다."라는 메세지를 보낸 것이다.[14]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주적을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15] 하지만 세르비아도 급속한 물가상승에는 도저히 못 버티고 특히 1994년 1차 화폐개혁이 실패로 돌아갈 정도로 물가상승률이 너무 높아지자 아예 유고슬라비아 디나르를 독일 마르크에 페그시키는 방식으로 화폐개혁을 단행하고 나서야 겨우 물가가 안정되었다.[16] 슬로보단카 하일로비치라는 이름의 세르비아계 여성. 이 사람도 살해당했다.[17]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까지 수상한 작품인데, 어째 미국에서도 코미디 영화로 광고되었다(...)[18] 구글 지도로 검색해보면 5000km나 떨어져 있다.[19] 보스니아 반군 측 병사 1: 르완다가 뭔지 난리군. 보스니아 반군 측 병사 2: 완전히 미쳤군.[20] 다만 실제 배경은 그라츠나비아의 포고렌이라는 가상의 도시다.[21] 하술되는 "Selc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