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룬디 내전

 

'''부룬디 내전
Burundian Civil War'''

'''시기'''
1962년 10월 21일 ~ 2005년 5월 15일
'''장소'''
부룬디
'''원인'''
부룬디 내부의 부족 및 종족 간의 다툼
'''교전 세력'''
[image] 부룬디 정부
[image] 유엔
후투족 반군
투치족 반군
'''지휘관'''


'''전력'''


'''손해'''
25만명 이상의 사람들이 사망.

'''결과'''
2005년 내전 종식
'''영향'''
그 이후에도 준내전이 간접적으로 나타남.
1. 개요
2. 진행 과정
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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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2년부터 2005년까지 벌어진 부룬디에서 일어난 내전학살 사건.

2. 진행 과정


부룬디에는 트와족, 반투족, 투치족, 후투족 등 다양한 민족들이 있었고, 훗날 16세기 또는 17세기 후반에 부룬디 왕국을 세웠으나 근대시대에는 독일, 훗날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벨기에가 지배했었다. 루안다-우룬디 시대에는 르완다와 하나였지만, 르완다와 부룬디에는 각각 다른 왕이 있었고, 결국 분리되었다. 이는 훗날 르완다와 부룬디에서 나타나는 내전의 원인 또는 훗날 내전이 더욱 악화되어 인종청소라는 학살로 변하게 되는 구실이 되었다.
1962년 부룬디는 독립했지만 르완다처럼 다양한 민족들이 있었고, 이들은 뭉치지 않고 서로를 불신하여 내분이 심해졌다. 1966년에는 쿠데타가 나타나기도 했다.
투치족 중심의 군부가 장악한 부룬디 정부는 정부와 군부 내에서 후투족을 대거 숙청시켰으며 온건파 투치족도 숙청시켰다. 이에 따라 후투족 난민들이 대거 국외로 떠나는 와중에 1972년에 후투족이 군사시설을 점령하자 투치족 군부는 그 보복으로 '''20만에 달하는 후투족을 학살했으며''', 후투족 지식인들도 대거 살해했고, 10만 명이 넘는 난민이 발생했다. 1976년에 쿠데타가 발생하면서 장 바티스트 바가자 대령이 집권하여 후투족 탄압정책은 접었으나, 이번에는 야당을 금지하고 종교의 자유를 박탈하는 등의 독재정치를 폈다.
1987년에 피에르 부요야는 바가자 정부를 뒤엎고 독재정권을 수립하였으며, 1988년에 종족 분쟁이 일어나자 후투족 2만 명이 학살당하였다. 그러나 부요야는 결국엔 버티지 못하고 1992년 헌법 제정에 합의를 하였고, 그 동안에 학살사건 조사에도 합의했으며 1993년에 민주선거가 치러지면서 후투계 정당인 부룬디 민주전선이 집권하게 되면서 투치족을 일정 수준 장관에 임명하면서도 후투족 난민들의 귀환을 돕는 정책을 폈다가, 3개월 만에 멜키오르 은다다예 대통령이 투치계 극단주의자 장교들에게 살해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쿠데타 자체는 1주일 만에 서방세계의 원조중단 압력과 여론의 반발로 진압되었고, 이후에 시프리앵 은타랴미라가 대통령이 되었고 투치족을 총리로 임명하였으나, 집권 2개월 만에 평화협정 관련해서 회담을 나누러 가던 도중에 '''비행기 요격 사건으로 르완다 대통령 쥐베날 하뱌리마나와 같이 사망하였다.'''[1]
그리고 그 이후에 후투족 극단주의자와 투치족 군부가 들고 일어나서 다시 내전이 재개됐다. 그나마 이쪽은 양쪽 모두 미리 대학살을 준비하고 계획한 것까지는 아니어서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기에 르완다 내전으로 르완다에서 최소 80만 명이 희생된 것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역시 내전 수십 년 동안 발생한 피해는 사망자만 '''최소 25만 명'''에 달한다. 수십만 명의 피난민이 콩고민주공화국탄자니아로 탈출하였다. 그래서 주로 부룬디 내전은 르완다 내전과 같이 언급되거나 르완다 내전 다음으로 언급되는 경우가 많다. 차이점은 르완다에서는 후투족이 투치족을 일방적으로 학살했다면, 브룬디에서는 후투족이 학살을 저지르고 투치족이 보복으로 학살을 저지르는 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학살했다는 점이다.
1994년 9월에 투치족과 후투족 계열 정당과 각 단체, 군부 등은 권력분점에 합의했지만 후투족 극단주의자들과 투치족 반군 간의 살육전은 여전히 계속되어서, 장관이 피살당하는 등 혼란은 계속되었고, 1996년에 피에르 부요야가 쿠데타를 통해 재집권하면서 부룬디는 경제적으로 봉쇄되는 사태가 벌어졌고, 결국 부요야는 13개 정당-단체들과 권력분점협상에 나서야 했다, 그 결과 2000년에 아루샤 평화협정이 체결되어 투치족과 후투족 간의 차별을 없애기로 결정되었고, 과도정부가 구성되었으며 후투족 강경파와 투치족 강경파가 힘을 잃고, 2005년에는 대통령 선거와 총선, 지방선거가 각각 치러졌으며, 2006년에는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2004년에 과거 투치계 독립 왕국의 마지막 공주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다고 해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참고 그리고 2005년 선거에서 후투계 반군 출신인 피에르 은크룬지자가 의회 선거를 통해 대통령이 되었고, 2009년에 내전을 최종적으로 종식시키는데 공헌했지만 르완다 대통령 폴 카가메와 마찬가지로 점차 시간이 지날수록 독재자로 변모해나가고 있다는 평이다. 그리고 비록 후투족과 투치족 간의 오랜 갈등은 종식되었고, 경제도 점차 나아지고 있는 중이지만 역시나 빈부격차가 문제가 되고 있고, 은크룬지자 대통령과 그 측근을 중심으로 한 부정부패 문제도 심각하다.
게다가 은크룬지자 본인도 시간이 지나면서 아프리카 지도자들의 만성질환인 독재병에 걸려서 3선 출마를 강행하겠다는 뜻을 밝히기에 이르렀고[2] 그 결과 2015년 4월 헬게이트가 열렸다.
그러다가 5월 부룬디에서 고드프루아 니욤바레 장군이 주도하는 군부 쿠데타가 벌어졌다. 쿠데타를 일으킨 니욤바레 장군 측에서는 피에르 은크룬지자 대통령이 축출되었다고 주장하였고 외신에서도 피에르 은크룬지자 대통령이 축출되어 탄자니아로 도피한 것으로 확인되었다고 보도한 반면, 부룬디 대통령실에서는 트위터를 통해 쿠데타는 실패했으며 친 은쿠룬지자 군이 여전히 대통령궁과 국영방송국을 포함한 주요 시설들을 통제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관련 기사 결국 쿠데타는 진압된 것이 확인됐다. 오랜 전쟁에 지친 부룬디 국민들의 외면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인다.
그러나 독재병은 역시 만성 질환인지 은크룬지자 본인은 쿠데타와 시위에 직면해서도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3선 헌금이나 강요하고 있기 때문에 헬게이트가 열리는 게 잠시 미뤄졌을 뿐, 혼란은 곧 재개될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내전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외신들이 전하고 있다. 게다가 부룬디는 사형과 고문 등 광범위한 인권유린이 벌어지고 있고, 야권인사 등 수백명이 처형되고 30만명이 국외로 피하면서 유엔에서도 부룬디에서 다시 내전과 대학살이 발생되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2018년 6월 7일에 피에르 은쿠룬지자 대통령은 2020년에 물러날 것이라고 밝혔다. # 그리고 2020년 6월 8일 은쿠룬지자 대통령은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만다. 외신들은 코로나 바이러스에 의해 사망한 것으로 의심하고 있으며 그의 부인이 열흘 전 코로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케냐로 출국하는 등 충분히 의심스러운 정황이 있다. 여하튼 자신의 죽음으로 약속을 지키게 된 것이다.
2019년 3월 21일 10대 여학생들이 대통령의 사진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 해당 사건을 두고 부룬디에서는 소녀들을 풀어달라는 항의 시위를 트위터에서 진행했다. #

3. 관련 문서


[1] 범인에 관하여 투치족이 주도했냐, 후투족이 주도했냐로 말이 많았는데 후에 프랑스의 조사로 밝혀진 진실은 '''후투족 극단주의자들이 협상을 하러가던 쥐베날 하뱌리마나배신자로 생각하여 벌인 일임이 드러났다'''.[2] 본인은 국민의 투표에 따라 2번 당선된 게 아니라 재선에 출마하는 거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애시당초 의회 자체가 국민의 대표인 만큼 간접선거의 형태로나마 국민의 뜻이 반영되었다고 보는 게 맞고, 따라서 대통령 임기에 당연히 포함된다. 이승만이 어째서 대통령을 두 번까지 할 수 있는데도 대통령을 세 번 이상 하기 위해 사사오입 개헌을 1954년에 했어야 했는가를 생각해보면 답이 나오는 문제. 그리고 현재 부룬디는 독재를 막기 위해 대통령 임기를 2번으로 제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