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역전 대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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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재가 진압된 직후의 지붕이 내려앉은 옛 부산역.
1. 개요
1953년 11월 27일에 부산 중구 일대에서 벌어진 화재 사건.
2. 설명
한국전쟁이 휴전을 맞아 임시 수도였던 부산에서 서울로 정부가 옮겨 가긴 했지만, 여전히 부산 일대에는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전쟁 피난민들로 가득 찬 상태였다. 그러다 보니 사건의 시발점이 된 중구 영주동 일대에는 아직도 그들이 만든 임시천막으로 가득 찬 상태. 늦가을 건조한 날씨에 불이 딱 붙기 좋은 목조건물이 밀집된 공간에서 화재가 발생했고,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번져 당시 부산의 도심이었던 부산역~중앙동~동광동-영주동~대청동입구 일대가 거의 전소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불길은 이튿날 새벽 6시경 잡혔으나, 주택 3,132채 및 일제강점기 조선과 일본을 잇는 관문 역할을 했던 옛 경부선 부산역사와 부산우체국이 전소되어버렸다. 부산역은 1965년까지 10년 이상 가건물을 사용했으며, 1965.7.23. 초량역의 영업을 정지하고 1965.11.1. 부산역을 폐쇄하고 부산진역으로 통합하여 운영하였고 1969년 초량에 부산역이 신축 완공됨과 동시에 명실공히 부산의 종점 부산역으로서의 업무를 다시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신축된 현 부산역은 구 초량역 위치가 아니고 3부두옆의 물웅덩이 해변을 매립한 곳이다.
이 화재에 앞서 1953.1.30 국제시장 대화재로 국제시장이 전소되고 부평동, 신창동, 광복동 일부가 피해를 입는 큰 화재가 있었는데 이 국제시장 대화재와 부산역전 대화재를 같은 화재로 착각하여 국제시장, 남포동, 광복동까지 부산역전 대화재로 소실 된 걸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1954년 12월에 용두산공원 판자촌에도 화재가 발생하여 많은 판자촌 사람들이 피해를 입었었다. 그러다보니 그 당시에 사람들이 "부산이 아니고 불산이라고 불러야겠다"고 우스게 소리로 얘기했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찢어지게 가난했던 한국전쟁 직후, 광활한 지역의 일제 건축물과 6.25시대의 미군막사 같은 주요 건축물이 죄다 불에 날아가면서(...) 절대로 무시 못 할 정도의 큰 피해가 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한국 정부 주도의 무역항 개발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말이 있다. 그래도 영도다리, 부산근대역사관(舊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 사옥)[1] ,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舊 경상남도청) 같은 일부 일제강점기 건축물은 계속 살아남아 한국인들이나 히키아게샤들에게 추억이 되는 천수(?)를 누렸다.
3. 여담
해외에서도 비슷한 화재 사건이 있었으며 그 중 하나가 1달 뒤 영국령 홍콩에서 일어난 섹깁메이 대화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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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관련 문서
[1]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이 나는 곳이며, 미국대사관 미국문화원이였던 건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