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
1. 개요
傅祗
(244 ~ 312[1] )
서진의 인물. 자는 자장(子莊). 부하의 아들, 부함의 사촌동생.
2. 행적
2.1. 무제 시절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럽고 일찍이 이름을 알렸으며, 재주와 식견이 분명하고 단련되어 있다고 칭해졌다. 무제가 최초로 동궁을 세우자 태자사인으로 천거되었다가 산기황문랑으로 옮겼으며, 관내후의 작위를 받아 식읍 300호를 받았다.
어머니가 사망하자 관직을 떠났다가 상을 마치자 형양태수가 되었고 일찍이 등애가 제하론이라는 글을 통해 대운하를 건설할 것을 주장한 적이 있어서 부지는 제방을 건설해 백성들의 물에 대한 근심을 없앴으며, 백성들이 덕을 칭송하는 비를 지었고 정위를 겸임했다가 후에는 상시, 좌군장군을 지냈다.
2.2. 혜제 시절
290년에 무제가 죽고 양준이 보정대신이 되면서 평소에 좋은 평판을 받지 못한 것을 알고 위나라의 명제가 즉위했던 고사에 의거해 모든 관원에게 봉작을 높여 많은 사람에게 환심을 사려 했는데, 부지는 아직까지 제왕이 붕어하고 나서 초기에 신하들이 논공행상을 한 일이 없다고 반대했지만 양준은 무시했다.
시중에 임명되었고 사마요 등이 양준을 죽이려 할 때 부지는 양준에게 초대되었는데, 밤에 양준에게 이야기해 무무와 함께 운룡문으로 들어가 사태를 관찰하기를 요청했다. 부지는 여러 관료들에게 궁중을 비워서는 안된다고 말하고는 곧 일어나 인사하자 모두들 떠났다.
양준이 주살되자 배해가 양준의 인척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형벌을 받을 뻔 하자 도움을 주어 사형을 면하게 했으며, 하남윤에 임명되었지만 사양하고 사례교위로 옮겼다. 사례교위를 지내면서 석숭이 남중에 있던 시기에 짐조의 병아리를 주어 왕개에게 줬는데, 이 당시 제도에 따르면 짐조를 가지고 장강을 건널 수 없으며, 조칙을 내려 조사해서 도성 거리에서 짐조를 불태웠다.
양준을 토벌한 공으로 군공 8천 호를 받자 굳게 사양해 반으로 줄이고 영천현공으로 낮추어 봉하면서 1천 8백호를 받았으며, 막내 아들 부창을 2천 2백호와 함께 무향정후로 봉하고 형의 아들인 부준을 동명정후에 봉했다. 사마위가 상주해 면직되었다가 다음 해에 광록훈으로 옮겼고 송사에 걸려 면직되었다가 복귀했다.
저족의 제만년이 봉기하자 행안서군사에 임명되면서 상시를 겸임했으며, 위위로 옮겼다가 풍질로 인해 사양했다가 상시로 임명되고 음식과 녹봉, 평상과 휘장 등을 받았다. 광록대부에 임명되고 문 앞의 인마의 통행을 막게 했다. 사마륜이 보정대신이 되자 중서감으로 임명되고 상시를 더했으며, 병으로 사퇴했다가 어사가 되었다.
사마륜이 찬탈하자 우광록, 개부에 임명되고 시중을 더했다가 혜제가 복위하자 관직에서 물러날 것을 요청했지만 허락되지 않았으며, 광록대부의 자리를 회복했고 아들 부선은 홍농공주와 결혼했다. 태자소부로 옮겼다가 자리에 물러나 집으로 돌아올 것을 요청했으며, 사마영이 태부가 되자 소부가 되었고 시중을 더했다.
2.3. 회제 시절
회제가 즉위하자 광록대부, 시중으로 옮겼지만 사양했고 우복야, 중서감을 더했으며, 사마월이 태부를 지낼 때는 좌광록, 개부, 행태자태부를 역임하고 이전처럼 시중을 지냈다. 병을 이유로 사양했지만 허락받지 못했고 사도로 옮겼다가 발에 병이 걸리자 궁전에 들어올 때 수레를 탈 수 있도록 허락받았지만 사양했으며, 구희가 표를 올려 수도를 창원으로 옮기기를 요청하자 회제는 이를 따르기로 하고 대신들은 대부분 도망쳤다.
부지는 하음으로 파견되어 배와 노를 수리하고 뱃길을 건널 준비를 했는데, 갑자기 낙양이 함락되자 군사를 일으켜 회제를 구출하려 했다. 아들인 부선을 화욱에게 보내 의병을 일으키게 하면서 맹진의 작은 성에서 주둔했으며, 삼저를 공격해 함락했다가 병으로 69세에 사망했다.
[1] 『자치통감』에 의하면 이 해의 5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