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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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삼국시대 위나라의 무장으로 자는 사재(士載). 등충의 아버지며 형주 남양군 사람.
삼국지연의의 후반기 주인공격인 강유의 라이벌격으로 묘사된 인물. 실제 역사에서도 강유의 구벌중원을 방어하고 결정적인 타격을 가한 후반기 삼국지 최고의 명장 중 한 명이다. 훗날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을 이끌어낸 덩샤오핑[3] 의 조상이다.
2. 정사
2.1. 어린 시절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고향을 떠나 여남으로 이사하여 농부가 되어 송아지를 길렀다.[4] 12세에 어머니를 따라 영천에 이르렀다.
세어에 따르면 등애는 어려서 양성의 전농부민이 되었는데[5] , 함께 관리로 있던 석포와 12~13세였다. 전농사마의 추천으로 길본의 허도에서 반란을 일으킨 것에 연루되어 근신 중이던 곽현신(郭玄信)의 마부가 된 적이 있었는데, 곽현신은 10여 리 길을 가면서 대화를 나누어 보고는 이 두 사람이 모두 장래에 좌상(佐相)이 될 것이라는 평가를 했다.
다만 상당히 출세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진식#s-2이 지은 비문을 보고 자신의 이름(애가 그리 좋은 뜻은 아니다)을 바꾼 적도 있다.
이 비문에서 따와 이름을 등범(鄧範), 자를 사칙(士則)으로 지었지만 문중에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있어서 등애(鄧艾)로 개명했다고 한다.글은 세상의 모범이며, 실천은 선비의 규칙이다.
「文爲世範, 行爲士則」
2.2. 태위 사마의의 눈에 들다
등애는 도위학사로 임명되었지만 말더듬이라서 간좌(문서를 다루는 각 부서의 보좌관)도 할 수 없어 도전수총초리(稻田守叢草吏)[6] 가 되었다. 벼슬도 출세직이 아닌 농업 계통의 낮은 자리를 얻게 된 것이다.
같은 군 관리의 부친이 그의 집이 가난한 것을 불쌍히 여겨 재물을 후하게 주었지만, 등애는 처음부터 사례도 표하지 않았다.
전체적으로 무언가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데 능한 편으로 큰 산이나 연못을 보게 되면 군영 설치를 위한 그림을 그려두는 등 군사 운영적 측면에 관심이 많았다 하나 주변 사람들은 그를 비웃었다.
후에 전농강기가 되고 인구 및 공물의 통계를 내어 중앙에 보고하는 자리인 주의 상계리까지 올라간다. 상계리 시절 사마의를 만났고 후에 전농공조가 되어, 사자로 사마의가 있는 곳으로 가서 알려져 발탁된 것이다. 그렇게 그의 눈에 띄어 처음엔 태위 밑의 연으로 임명된 후 더 잘했던지, 중앙의 상서랑으로 임명받는다. 이렇게 문관으로서 중앙 관직을 시작한다.
2.3. 대운하 프로젝트
중앙 관료로서 등애의 첫 공은 다름 아닌 '''대운하'''.
당시 조정에서는 양주와 예주 사이에 농경지를 넓히고 곡식을 저축해두고자 하여 적국을 멸망시키려는 계책을 세우고 상서랑인 등애에게 진군과 항현의 동쪽인 수춘 지역까지 파견하여 시찰하도록 했다. 등애는 생각했다.
그래서 수원이 없는 것에 착안해 제하론(濟河論)이란 글을 올렸다. 당시 오나라를 상대로 전략을 구상해야 했던 위나라로서는 허창에서 군량을 조달해 파견하는 데 막대한 비용과 운송병이 필요했다. 등애의 구상은 진과 채 사이의 땅은 낮고 밭은 기름지므로 허창 주위의 논농사를 줄이고 회하로 들어가는 하천을 모아 동쪽으로 내려가게 하고 이 주변 지대에 회하 북쪽에 사는 사람 2만 명과, 회화의 남쪽에 사는 사람 3만 명을 열에 둘씩 쉬게 하고, 늘 4만 명에게는 농사를 지으며 수비를 하게 하며[7] 경작과 방비를 돌아가며 시키는 것이다. 더욱이 황하의 운하를 개착하여 관개를 늘리고 조운을 통하게 하자고 했다. 이러면 서쪽 지방의 3배 가까이 군량을 수확할 수 있고 운송도 배를 이용할 수 있으므로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사마의는 등애의 '대운하 프로젝트'에 대만족, 일을 추진해 241년 이해에 비로소 조운할 운하를 넓게 팠다. 등애가 주로 내세운 주장이 농사를 장려하면 군대가 강해진다. 그 군대로 적을 치면 된다는 주장인데 운하사업은 이에 딱 알맞는 작업이었다.
완공된 대운하의 효과는 말한 그대로였다. 첫째, 군사적으로 오를 견제할 수 있었다. 등애전에 따르면 매번 동남쪽으로 군이 출진할 때마다 배를 타고 동쪽으로 내려가 장강과 회수에 도착하게 되었다고 한다.
둘째, 정사 등애전에는 "수춘 지역에 물자와 식량이 회복되었고 수해가 없었다." 하여 운하의 경제적 효과도 거론했다.
이는 후세에도 영향을 주었는지 유송시기 역사를 다루는 송서의 지 47권에는 토지 22만 경을 한나라, 위나라 이래로 소신신, 두시, 두예, 임준, 사마의, 등애가 제도를 세워 개간했다고 설명했다. # 등애의 보고서는 항상 농사를 잘 지으면 병사를 잘 먹일 수 있는 곡식을 축적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전투력을 높여 적을 정벌할 수 있다고 시작한다. 즉 농사=전투력인 셈, 군대에서 보급과 농업이 중요함을 깨달았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등애가 내놓은 수리사업의 폐해도 만만치 않았다. 서진 시기 사마염에게 두예가 간언하길 회수 유역에 있는 둑과 보를 철거하기를 원했는데 그 일대에 둑과 보가 너무 많이 설치되어 제대로 관리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두예는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
이는 회수 일대에 설치된 둑의 폐해에 대한 두예의 발언으로 지속적으로 관리되지 못한 수리시설이 오히려 주변 환경을 악화시키고 수재를 불러왔던 것이다. 실제로 두예가 아예 철거시킬 것을 주장한 수리시설은 대부분 등애 때 건설되었던 것들이었던 것 같다. 원래 개간, 대운하, 벌목 사업을 할 때 사후관리가 중요한 법이지만 대부분 눈앞의 이익이니 부작용을 감안하고 사업을 진행시키는 법이 드문데 등애의 대운하가 딱 그 짝이었다. 지속적인 관리와 보수가 이루어지지 않은 인프라의 폐해를 보여주는 기록임과 동시에 후한 말 이래 여러차례 회수 일대에 건립된 둑과 제방이 환경에 미치는 폐해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이 지역에 제방과 둑을 건설한 인물들로는 유복, 조조, 등애 등이 있다. 두예가 유독 회수 일대에 둑과 보가 많아 관리하기 힘들다고 한 것을 보면 등애가 과도하게 많이 지었던 것 같다. 인프라를 지어놓고 관리할 체계가 부족해서 발생한 참사. 조조는 하북에서 운하를 건설한 뒤 적절히 관리하여 별 사고가 없었으므로, 등애는 회수에서 일어난 부작용의 책임을 면하기 어렵다.둑과 보가 해마다 무너져 양전(良田)은 부들과 갈대밭으로 변하였고, 사람들은 물풀이 자라는 습지 주변에서 살고 물과 땅은 그 용도의 마땅함을 잃었으며, 이에 가축을 방목할 뿐 파종은 하지 못하고 수목은 말라 죽으니 이것은 모두 둑의 폐해입니다. 둑이 많으면 땅이 척박해지고 수심은 낮아져 큰 비가 와도 아래로 물을 보낼수 없게 됩니다.
진서 식화지
2.4. 강유의 1차 북벌
249년, 진태전에 따르면 강유가 국산(麴山)에 성을 쌓고 구안(句安)과 이흠(李歆)에게 지키게 하자, 진태는 서질과 등애 등을 인솔하여 성의 보급을 끊었고, 진태와 곽회가 구원하러 온 강유까지 격퇴하자 구안과 이흠은 결국 위군에 투항한다.
등애전에 따르면 강유가 물러나자, 곽회는 그 기회를 틈타 다시 서쪽으로 강인을 공격하려는데, 등애는 강유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생각하여 주둔한다. 3일 후, 강유는 요화를 보내 등애를 상대하게 하고 자신은 도성(洮城)을 공격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챈 등애가 먼저 도성에 도착해 강유군을 막아냈다.
2.5. 사마사의 양신
251년에는 조정에 글을 올려 남흉노의 세력을 둘로 나누어 그들의 힘을 약하게 할 것을 건의하자 사마사는 등애의 건의를 대부분 받아들였다.
등애가 여남태수로 전임하자 과거에 자신을 후하게 대우했던 관리의 아버지를 수소문하여 찾았지만, 오래 전에 이미 죽었으므로 관리를 보내 그에게 제사를 지내도록 하고, 그의 어머니에게 충분한 선물을 보내 주었으며, 그의 아들을 추천하여 계리로 임명했다.
제갈각이 합비 신성을 포위했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물러나 돌아갔다. 등애는 사마사에게 왕권이 탄탄하지 않은 오나라는 참패하고 온 제갈각에게 죄를 물을 것이라고 그의 예측을 말했는데 과연 제갈각은 귀국하자 주살되었다.[8]
사마사에게 농사가 전쟁보다도 중요하다는 걸 강조하며 경작을 권장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255년, 관구검이 반란을 일으키고 달리기 잘 하는 병사를 파견하여 서신을 보내 대중을 혼란스럽게 하려고 했는데, 등애가 그 사람을 죽이고 아울러 신속히 군대를 나가게 하고 우선 낙가성(樂嘉城)으로 달려가 부교(浮橋)를 만들었다. 사마사가 군을 이끌고 도착했을 때 등애가 만들어 놓은 부교 덕분에 편히 낙가성을 점거했다. 반란에 동조한 문흠의 대군은 위의 대군보다 늦게 왔기 때문에 성 아래에서 패배하였다. 등애는 그를 병두까지 추격하였고, 문흠은 오나라로 달아났다.
2.6. 사마소의 양신
오나라 대장군 손준 등은 10만 대군이라고 외치며 장강을 건너려는 형세를 나타냈다. 진동장군 제갈탄은 등애를 보내 비양을 차지하도록 하였지만, 등애는 적군과 멀리 떨어져 있는 요해지가 아니라고 생각하고는, 신속하게 부정으로 옮겨 주둔하였으며 태산태수 제갈서 등을 여장으로 파견해 막아 싸우도록 하여 적을 달아나게 했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사마소가 말을 더듬는 등애에게 "경은 말할 때마다 '애, 애' 거리는데 애가 도대체 몇이나 되는가?"라고 놀린다.
참고로 고대에는 자신을 낮추어 말하는 의미에서 '저'라는 대명사 대신 자신의 이름을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지칭한다. 즉 등애가 '애', '애', 하는 것은 오늘날로 치면 '저, 저'하며 나를 반복하는 것이며 이에 대해 사마소가 '너는 왜 '저, 저'라 하는데 대체 넌 몇 명이냐?'며 놀린 것이다.
이에 등애는 "접여[9] 도 '봉황이여, 봉황이여'라고 했지만, 이는 단 하나를 가리킬 뿐입니다."라고 센스있게 답변한다.
2.7. 강유의 4, 5차 북벌
255년, 진태전에 따르면 강유가 이전에 촉에 항복한 하후패와 함께 옹주자사 왕경을 박살내고 왕경을 적도성으로 몰아넣고 포위했다. 등애는 이후 장수교위로 임명되었고 문흠을 격파했기에 방성향후로 봉해지고, 안서장군을 대행했다. 등애, 호분 등은 일단 물러난 뒤 반격을 하자고 했으나 진태는 조속히 공격하자고 했고 즉시 적도로 행군하여 촉군을 포위하려 하자 강유는 퇴각했다.
등애는 이후 안서장군으로 임명되었다. 등애전에 따르면 이때 대부분의 위나라 장수들은 강유의 병력은 다했으므로 다시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지만 등애는 다섯 개의 이유를 들어 간언한다.
따라서 등애는 적군은 교활하고 책략에 뛰어나므로 그들이 오는 것은 필연적이라고 말한다.1 : 왕경의 패배로 거의 멸망 상태까지 되었기 때문에 적은 승기를 타고 있고 우리는 허약하다.
2 : 저들은 훈련이 잘 되어있고 병기는 예리한데, 우리는 병사 증원과 병기 수리가 필요하다.
3 : 적은 배로 행군하고 우리는 육로로 걸으니 적의 소요는 적다.
4 : 적은 병력을 한 곳에 집중시키지만, 우리는 네 곳(적도, 농서, 남안, 기산) 나누어야 한다.
5 : 옹주의 풍성한 곡식이 적을 유인할 것이다.
256년, 강유가 과연 기산으로 향했는데, 등애가 이미 방비를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서 곧 동정으로 돌아가 남안으로 진군했다. 등애는 무성산을 점거하고 강유와 대치했다.
강유는 등애와 요충지를 차지하려고 다투었지만 이길 수 없었으므로, 그 밤에 위하를 건너 동쪽으로 진군하여 산길을 따라서 상규로 달려가 호제#s-2와 합류하려고 했다. 하지만 호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오지 않았고 등애는 단곡에서 교전하여 강유를 격파한다. 이때 등애전에 따르면 등애는 천여급 참수에 촉장을 10명이나 죽였다고 하며 대장군이었던 강유는 스스로의 벼슬을 위장군으로 깎아버릴 정도였다.
2.8. 강유의 6, 7차 북벌
257년 등애는 사마망과 함께 장성으로 쳐들어온 강유에게 대응하지 않고 잘 방어해 강유군을 물린다.
262년에는 후화에서 강유를 또 패퇴시킨다. 강유는 퇴각하여 답중을 지켰다.
2.9. 촉한 정벌군
2.9.1. 개요
263년, 해가 가도 끈질기게 계속되는 강유의 북침에 골머리를 썩힌 사마소는 종회의 진언에 따라 촉을 토벌할 계획을 세웠다. 종회는 장안 방면에서 양안(촉의 오른쪽에 해당) 방면으로 쳐들어가며 등애는 제갈서와 함께 옹주 방면에서 답중으로 쳐들어가 강유를 차단하는 역할을 했다.
등애는 천수태수 왕기(王頎) 등을 파견하여 직접 강유의 진영을 공격하게 했으며, 농서태수 견홍 등을 보내 강유 군대의 앞에서 싸우도록 하고, 금성태수 양흔 등에게 감송으로 가도록 했다. 강유는 종회의 군대가 이미 한중에 진입하였다는 것을 듣고 물러나 돌아갔다. 양흔 등은 강천구[10] 까지 추격하여 큰 싸움을 하였고 강유가 패하여 달아난다.
강유는 옹주가 벌써 길을 막고 교두에 주둔하고 있다는 것을 듣고 공함곡으로부터 북쪽 길로 들어가서 옹주 후방을 공격하려고 했다. 제갈서는 이 소식을 듣고 퇴각하여 30리를 돌아갔다. 강유가 북쪽 길로부터 30여 리 진입하였는데, 제갈서의 군대가 퇴각했다는 사실을 듣고는 곧 돌아서 교두를 통과했다. 제갈서는 급히 강유의 퇴로를 차단했지만 하루 차이로 미치지 못했고 강유는 음평을 통과해 검각에서 결사농성을 벌였다. 이후 검각에서 종회와 강유 사이에 지리한 공방전이 벌어진다.
그런데 등애는 이 상황에서 일생일대의 도박이나 다름없는 행동을 저질러버리는데, 그것은 바로...
2.9.2. 산악왕, 그 전설의 행군
'''음평곡을 넘어서 검각을 우회해 사천 분지로 침투한다는 것이였다.''' 애당초 촉한이 음평을 지키고 있으면 이곳으로 들어갈 수 없지만, 답중과 음평도 먹은 상황에서 부성을 찔러 검각의 수비를 푸는 것을 전제로 움직인것이다. 실패하더라도 자신의 부대만 전멸할 뿐 종회의 본대는 타격이 없으니까, 죽음을 각오한 도박이었던 것이다.
이에 등애는 '''70세'''에 가까운 나이에도 불구하고 음평으로 가서 정예병사를 선발하며 '''산길을 타 넘으며 검각을 우회'''하기로 한다. 제갈서에게도 같이 진격하자고 했는데, 제갈서는 산을 타기 싫었는지 그대로 종회에게 합류했지만 이후 종회의 무고로 군권을 빼앗기고 수도로 압송되었다. 이 때 등애가 선택한 루트는 음평으로부터 작은 길을 달려 한덕양으로부터 강유성과 좌담도로 들어가 면죽으로 가서 직접 성도로 향하는 것.
'산을 넘어가서 적을 친다'라는 게 힘든 작전이긴 해도, 중국 뿐만 아니라 역사상 수많은 곳에서 시도되고 언급된 것이다. 그런데 유독 등애의 이 작전이 터무니없는 짓이라고 하는 걸 많이 볼 수 있는데...
등애전의 구절에서 설명하는 것처럼, '''그게 사람이 다닐만한 길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글로 봐선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감이 안온다. ''''사진으로 보자.''' 이 사진 역시 1,700년 이상 지나고 잔도(棧道)까지 생겼기에 굉장히 가볼만해진 것이다. 당연한 거지만 저 시대에 대군이 지나갈만한 잔도 같은 건 없었다.등애는 음평 길로부터 사람이 없는 땅을 7백여 리나 행군하였다. 산을 뚫어서 길을 통과하게 하고 계곡에는 다리를 만들었다. 산은 높고 계곡은 깊었으므로 작업은 매우 어려웠고, 또 식량 수송의 어려움으로 인해 거의 위기에 이르게 되었다. '''등애는 모전으로 자신의 몸을 감싸고 산기슭을 따라 내려갔다.''' 장수와 병사들은 모두 나무를 붙잡고 낭떠러지를 기어오르며 서로 이어서 전진하였다.
등애전
하지만 등애는 온갖 생고생을 한 끝에 기어이 넘는 데 성공했다. 좋게 말하면 인간승리, 나쁘게 말하면 그냥 '''성공한 미친 짓.''' 저길 넘느라 등애군의 몰골은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산을 내려가면서 강유성에 도착하긴 했지만 전속이 전진하지 않았으므로[11] 분노한 등애는 목을 베려고 했고, 직후 전속은 산길에 내버려졌으나 어떻게든 종회군과 합류한다. 전속은 이 일로 등애에게 원한을 품는다. [12]
이 극악한 산길을 넘은 등애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강유관(江油關)이었다, 강유관은 강유수(江油戍)[13] 여기서 수(戍)는 수자리(변방을 지키는 일), 둔영(屯營), 병사(兵舍)를 뜻한다. 즉, 강유관은 변방을 지키는 요새로 인식되었던 셈이다. 이 관문은 한 겨울에, 290km에 달하는, 보기만 해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산길을 넘느라 모든 진이 다 빠지고 보급이 안되어 굶주렸으며 비전투손실로 1만명만 남은 등애군에게 절망을 선사하기에 충분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등애군의 선봉이 강유관에 도착하자 강유관의 수문장인 마막은 항복해 버린다. 진서 단작전에서 단작의 말에 따르면 지방의 병사는 차별받아 제대로된 상을 받지못했지만 양흔의 병사 30명만은 강유의 세를 핍박했던 공로를 인정받아 봉해졌다고 한다. 차별 대우에도 상을 받은 것을 보면 결사대나 특공대의 임무를 맡았을 가능성이 있다. 차별대우 때문에 결사대 중 30명만이 받았다고도 볼수 있기에 이들이 소수인지는 알수없다. 어쨋든 이 30명이 주축이된 병사들이 뭔가 압박을 했고 준비되지 않은 마막은 항복했던것으로 보인다.
이것 때문에 등애의 평가는 다소 갈린다. 등애의 저 작전이 촉을 멸망시키는 데 엄청난 역할을 한 건 사실이지만, 상대가 마막만 아니었으면 죽을 고생하면서 산 넘느라 지칠대로 지친 군대로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털렸을 거라는 평과, 운빨이 좀 있었다 한들 과감하고 기상천외한 작전을 펼쳐 성공시킨 삼국시대 한니발이라는 평. 뭐 역사에 만약은 없으니 어찌됐든 성공한 이상 등애의 공 자체는 맞긴 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체 무슨 깡인지는 모르겠는데 촉군이 그 요지를 장악하고 대항했더라면 이 계획은 그냥 실패다. 계획 없이 무작정 밀고 들어와 깽판을 치면 검각수비가 풀릴 거라고 장담했다는 얘기인데, 상식적인 판단으로 더 이상 진군할 수 없다고 사실대로 말하는 부하를 격노하면서 죽이려하거나, 제갈첨 낭야왕 드립, 쓰잘데기 없는 자기자랑 같은 걸 보면 사마소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기 목숨을 결과적으로 버리게 된 등애라는 인물이 원래 이런 인물이었나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무리해서라도 꼭 삼국통일을 보고싶어 하는 걸 보면 그 동안 마음속에 쌓아둔 공명심이 터진 케이스가 아닐까 싶다. 만약에 강유성에서 진짜 대비해서 그들을 들여보내지 않았다면 우릴 다 죽일 작정이었냐며 휘하 장수들에게 프래깅을 당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보면 이런 험지를 걸을 때는 당연히 낮에는 움직이고 밤에는 휴식을 취해야 정상인데 촉한, 즉 익주는 산간지형의 특징 때문인지 해가 비교적 빨리 넘어가고 또 하필이면 이때는 한겨울인 10월이었다. 산과 길이 너무 험하고 계곡도 깊은 데다, 당연한 말이지만 보급도 거의 불가능한 곳이라 등애군은 남은 식량도 거의 없었다. 또 안개 등의 이유로 일조량이 그렇게 많지도 않았다. 이 정도면 비전투로 손실된 인원, 물자가 어느 정도였을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사람이 안 살다보니 제대로 된 지도도 없었을 테고 원래 내켜하지 않던 사람이 작전이 다 망해가니까 즉흥적으로 계획을 내놓은 셈이라 등애군은 사전조사 없이 산간지대에 들어와 '여기가 대체 어디지?'라며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밤에는 별자리, 낮엔 태양의 움직임을 그냥 대략적으로 감만 잡을 수준이었을 수도 있다. 혼천의? 총사령관도 양탄자 둘러싸는 마당에 그게 남아날 리가... 또 원래 험지긴 했지만 등애군이 700리까지 진군하게 된 이유 중에선 '''얼레? 이 산이 여기가 아닌가벼?''''라는 상층부의 판단 착오도 있을 수 있다. 대체 그 전까지 '촉정은 불가합니다!라고 뻗대던 사람이 이런 쪽에서 제대로 준비를 하기는 한 건지 의심스럽다.
너무 대책없고 막장스러운 상황이다보니 등애의 작전에 대해 여러가지 설왕설래가 붙고는 하는데, 등애가 촉 내부의 사정에 밝아서 검각을 돌파하면 있는 강유관의 수문장이 마막같은 막장스러운 인물이라는 것을 고려하여 과감한 큰 그림을 그린 것이라는 추측 등이 대표적이다. 혹은 맹달과 제갈량의 경우처럼 등애와 마막 사이의 모종의 커넥션이 있어 항복에 대한 합의가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그나마 등애의 작전은 아무 대책없는 무모한 작전이 아니라, 철저한 고려와 선구안이 자아낸 작전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는 방향성이 생긴다. 그러나 이렇게 평가할 수도 없는 것이, 등애와 마막의 관계는 앞서 말한 맹달-제갈량 커넥션처럼 정사에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며, 등애가 마막의 성품을 고려하여 작전을 짰다고 보기도 어려운 것이 등애가 음평으로 갈때 보고한 내용도 그냥 "생각지도 못한 곳으로 들어가서 검각 쪽 병력을 유인하자!" 정도라 촉의 정치상황을 고려했다고 해석할만한 부분은 전무하기 때문이다.
애시당초 등애는 사마소가 사찬을 보내기 전까지는 촉을 칠 수 없다고 반대하던 입장이었으며 등애가 가지고 있는 촉에 대한 정보 내에서는 촉을 칠 수 없다고 결론이 나온 상태였기에 촉한 내부의 자세한 상황은 모른채 감행했다보는게 타당하다. 기껏해야 종회하고 연계작전 정도를 생각했다가 갑자기 마막이 항복하고 실전경험 없는 장군들이 나타나고 황제까지 항복해버리는 로또급 행운이 연속해서 터진것이다. 마막이 저항하기라도 했다면 그대로 끝장났을거고, 유선이 농성했어도 거기서 망했을 상황이었다. 등애도 마찬가지로 그냥 모 아니면 도 식으로 밀어본 거고 결과적으로 강유관의 마막이 항복했기에 결과가 좋게 된 것이다. 당장 강유관 공격을 외칠때 전속이 항명한 것만 봐도 등애 머리속에 계산이 다 있었을 리 없다. 종회 보조 정도로 목표를 정했지만 산넘다가 입은 손실도 그렇고 선봉 맡긴 부관이 도망갈 정도면 사실상 원래 계획은 실패했다고 봐도 된다. 전속이 항명한건 아군의 상황상 강유관이 함락시키기 불가능한 성채라고 생각해서였을 것이다.
촉나라를 토벌할 때, 등애가 산 위에 앉아있는데 흐르는 물이 있는 꿈을 꾸었다. 등애가 진로호군 원소(爰邵)에게 해몽을 묻자 원소는 주역의 궤를 통해 공을 세우지만 그 길이 다하기 때문에 촉을 이길 것은 분명하지만 돌아올 수 없다고 대답했으며, 이를 들은 등애는 망연한 채 불쾌해했다.
2.9.3. 촉한을 멸망시키다
하여튼 이렇게 천신만고 끝에 강유성을 정복한 등애는 다음으로 상대할 면죽관의 제갈첨에게 등충과 사찬을 보내지만 그들은 전세가 불리해 퇴각하여 돌아온다. 등충과 사찬이 적을 공격할 수 없다고 했다가 등애가 이 싸움에 모든 것이 걸려있어 불가능한 것이 있겠냐고 화를 내면서 목을 베려고 했다.[14] 이에 등충과 사찬이 급히 돌아가 다시 싸워 촉군을 격파해 제갈첨, 장준 등의 머리를 베고 면죽관까지 점령한다.
등애군은 마침내 낙성에 이르렀고 거기서 유선의 항복의사를 전달받는다. 등애는 기뻐하며 '천자의 기강이 도를 잃어 군웅들이 아울러 일어나고 용이 싸우고 호랑이가 다투었으나 끝내 참 주인에 귀의했으니 이는 아마도 천명이며 한, 위에 이르기까지 천명을 받아 왕이 된 자는 중원이 아니면 없었으며 황하에서 도(圖)가 나오고 낙에서 서(書)가 나오니 성인이 이를 본받아 홍업(洪業)을 흥하게 했으니 여기에서 비롯되지 않은 자로서 일찍이 무너지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외효는 농에 의지했다 망하고 공손술은 촉을 점거했다 멸망했으니 이는 모두 전세의 본보기로 황제는 명철하고 재상은 충성스럽고 현명하며 황제 헌원 때처럼 융성하니 정벌하라는 명을 받고 좋은 소식을 받길 바랬는데 과연 사신을 보내니 하늘의 가르침이며 미자는 주나라에 귀부해 상빈으로 대접받았다. 와서 고하는 말이 겸손하고 관을 등에 지는 예(항복의 의식)를 올리니, 이는 모두 지난날 명철한 이들이 천명에 귀의하는 법식이었다. 나라를 온전히 하는 것이 상책이고 나라를 격파하는 것은 그 다음이니(全國爲上, 破國次之, 손자병법 모공편), 스스로 총명하고 지혜로운 이가 아니었다면 어찌 왕자(王者)의 뜻을 보였겠나.'라고 답장을 보냈다.
이후 성도에 도착, 유선의 항복을 받아내어 촉한을 멸망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이후 등애는 촉의 안정을 위해 힘쓴다. 등애는 촉나라의 장수와 병사들을 조사하여 약탈한 일이 없고, 항복한 자를 받아들여 위로하고 옛 사업을 회복하도록 하였으므로, 촉나라 사람들은 등애를 칭찬했다. 또 후한 초기, 등우의 이전 일에 따라서 전권을 발휘하여 유선을 행표기장군으로, 태자를 봉거도위로, 제왕을 부마도위로 임명했다. 촉나라 신하들은 각자 지위의 고하에 따라 왕의 관직으로 임명되었고, 간혹 등애 수하의 관직을 받기도 했다. 사찬을 익주자사대리로 임명하고, 농서태수 견홍 등이 촉나라 안의 각 군을 대신 관리했다. 확실히 군정관으로서는 나무랄 데가 없었다.
그러나 가끔 지나치게 자신의 공에 도취되어 뽐내고 어찌보면 위협적인 태도로 나오는 경우도 없지 않았기에 촉나라 사대부들 입장에선 뒤에서 그를 몰래 비웃으며 기분이 복잡하긴 했을 터이다. 대놓고 오한의 예를 언급하며 '너희들은 나 아니었으면 진작에 다 죽었을거다'라고 말하며, '나는 강유보다도 뛰어난 영걸 중의 영걸'이라며 콧대가 높아져 말하는 사람인데 분명 잘해준다고 해도 그런 발언을 듣는 사람 입장에서 겉으로 잘해준다고 과연 마음이 편할 수 있었을까?[15] 또 사람을 보내 면죽(緜竹)에 대(臺)를 쌓고 경관(京觀)[16] 을 만들어 전공(戰功)을 드러내었다. (위나라의) 사졸(士卒) 중에 죽은 자들을 모두 촉병(蜀兵)과 함께 매장하였다. 어쨌든 등애는 최대한 익주에 머물면서 촉한의 관리들의 생활을 보장하여 그것을 오나라에게 보여 그들의 항복을 유도하고, 한편으로는 3년쯤 뒤에 익주를 재편성해 오나라를 공격하기 위한 자산으로 만들어 결과적으로 삼국통일은 자신의 공이 될 수 있을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어었었다. 하긴 한참 폭군 손호가 날뛰던 오나라였으니 독발수기능의 난이 없는 260년대 후반에 정말로 더 큰 공을 세울 수도 있을 터이다.
'''그런데 그 시점에서 등애는 자신의 날개를 꺾은 사람이 다름 아닌 자신을 그토록 후원한 진공 사마소일 줄은 꿈에서도 미처 상상치 못했을 것이다'''
2.10. 죽음
큰 전공으로 한껏 고무된 등애는 연회 자리에서 촉의 사대부들을 모아 놓고, "그대들은 나 때문에 산 것이지 만약 오한[17] 이 쳐들어온 거라면 모두 죽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강유는 본래 한 시대의 영웅이었지만 나 때문에 곤궁해진 것일 뿐이다."라고 말했다가 식견 있는 자들에게 비웃음을 산다.
등애는 나이가 70이 가까워졌으니 생전에 자기 손으로 천하를 통일하고 싶은 마음에 사마소에게 촉에 대한 전후 관리를 주장했고 아예 이 기회에 기세를 타서 오를 정벌할 수 있다고 했다. 당장은 병사가 피로해서 시행하기 어렵겠지만 익주의 물산을 이용하여 공격할 준비를 갖추어 오를 칠 형세를 하면서 유선에게 잘 해주면 손휴를 오도록 할 수 있고 오나라 사람들을 귀순시킬 수 있다고 주장하는 등 여러 가지 방안에 대해 매우 광범위한 내용을 상소를 올린다. 하지만 사마소는 위관을 통해 이 상소를 받아보고는 너무 큰 일이라 즉시 시행할 수 없다고 답을 보낸다. 재차 등애는 춘추를 인용하며 "장수는 국가에 이익을 줄 수 있을 경우 '''독단적으로 행동할 수 있다고 합니다.'''"[18] 라고 말하며 자신의 주장을 다시 강조했지만 이는 모함을 받을만한 결정적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사마소에게 등애는 성격으로 보나 위치로 보나 절대 편한 인물이 아니었다. 자기 능력으로 농부에서 일국의 최고위 장군까지 올라간 입지전적 인물이다보니 자부심이나 고집이 매우 남다른 사람이었다. 아랫사람에게 자비롭거나 윗사람에게 고분고분한 사람이 절대 아니었고 아군을 무작정 희생해가며 무모한 작전을 본인의 고집으로 성공해 내고, 촉병으로 경관을 쌓은 것과 사마소에게 보낸 답변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황제를 백주대낮에 참살해 불안불안한 정통성에 관구검, 문흠, 제갈탄까지 지방 사령관들의 반란을 수차례 경험했고, 촉 정벌 장군들을 못 믿어 종회, 등애, 제갈서로 지휘권을 분산시킨 사마소가 그런 성격에 어마어마한 전공이 누적된 등애를 곱게 봤을 가능성은 뒷날의 등애 가족들에 대한 처분을 보건대, 그리고 사마소의 성품을 생각했을 때 '''없다.''' 하지만 등애는 사마소의 성정이나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전혀 인지하지 못했던 걸로 보인다.
결국 종회[19] , 호열, 사찬 등이 등애에게 모반할 조짐이 있다고 보고하고 등애, 등충은 감군이던 위관에게 불시에 붙들려 수레에 갇혀 낙양으로 호송된다. 위씨춘추에 따르면 등애는 하늘을 우러러 "나 등애는 충신이거늘 이 지경에 이르렀구나, 백기의 잔혹한 운명이 오늘 또 재현되었구나."라고 탄식했다.
이후 종회가 모반을 일으키나 피살되고 결국 반역의 뜻을 가졌던 것은 종회였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이에 등애 진영의 장수와 병사들은 오해가 풀린 것이라 여겨 등애를 모시고 돌아오나 이 행동 때문에 등애를 종회에 같이 모함해 잡아다 가둔 위관이 등애가 변란을 일으킬까 두려움을 품어 등애에게 원한이 있는 전속과 휘하 병력들[20] 파견하여 등애, 등충을 면죽 서쪽에서 참수해 죽인다. 같이 가던 사찬은 등애 진영의 장수들 중에서도 가장 많이 병사들에게 원한을 산지라 수백 번이나 난도질 당하면서 죽었다.
두예는 사람들에게 위관이 함부로 공신을 죽였으니 제 명에 죽지 못할 것이라고 비난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위관은 두예에게 직접 찾아가 사죄했다. 위관이 파촉정벌전 지휘관을 감독하는 역할이었고 이미 사마소가 등애를 역적으로 인정했는데도 불구하고 그리했다. 자기 행동이 떳떳하지 못했던 것도 있겠지만 두예가 사마의의 사위라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치라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위관이 등애를 죽임으로서 이런 상황이 올 것이라고 생각 못했을 확률이 얼마나 될 지 생각해보면, 등애의 성격에 얼마나 문제가 컸는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위관으로서도 불가피한 상황이었음에도 "차라리 등애를 죽여버려서 이런 사람에게 욕 먹는 게 살려둬서 험한 꼴 당하는 것보다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이 문제를 곱게 넘어갈 인물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관우와 비슷한 성격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관우가 곱게 대하지 않은 오나라나 미방은 스스로 빼도박도 못할 비난받을 문제를 일으킨 케이스라는 걸 생각하면, 등애 쪽이 더 심각하다.[21]
2.11. 사후
결국 난을 일으킨 것은 종회였고 등애는 누명을 쓴 걸로 판명났지만 등애의 가족들은 죽음을 당하거나 변방으로 유배당한다. 누명이었음에도 이런 처벌을 받은 것은 이미 상소 건으로 등애가 사마소에게 위험 분자로 낙인이 찍혔다는 뜻이다.
3. 평가
사마의의 눈에 들어 외정,내정 통틀어 후반기 최고의 공업을 쌓은 인물이지만 자기관리의 부족으로 숙청되고 말았던 인물이다.
사후, 단곡 전투의 공마저도 사마소가 가로채 진왕에 올라갈 때 써먹었다. 그것도 '단곡(段谷)의 싸움에서 기회를 타서 크게 이겼으니 장수를 참하고 깃발을 뽑아 죽인 적군의 숫자를 만 단위로 헤아렸다.' 새빨간 거짓말을 해가면서 뻥튀기 시킨 것. '''물론 그 공을 세운 게 진짜 누구인지는 당연히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등애는 거의 준역적 취급...원래 만 명 타령은 고귀향공의 조서에서 촉군을 죽이거나 사로잡힌 게 만 명이라면서 '이 좋은 날 술을 내리니 내 맘이라고 생각하고 풍악을 울려라!' 라는 식으로 조모가 신하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부풀린 조서를 내린 거였는데 정작 가장 큰 공로자인 '''등애 본인의 본전에서는 조환이 직접 등애 개인에게 내린 조서에 '촉장 10명에 천여 급의 목을 참수했으니 상을 받으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사마염 시대인 265년, 사마염은 등애의 죄에 대해서 언급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잡으러 가자 부하들을 물리고 순순히 잡혀 준 것으로 보아 다른 놈들보다 나은 구석이 있다며 죄를 묻고 추방시킨 등애의 일족들을 사면해주었다. 그리고 2년 뒤 267년 단작이 사마염에게 등애를 신원해 달라는 상소를 올렸고, 이후 여러 해 후에 사마염은 "나도 걔네 일족들 불쌍하게 생각하고 있었음.. ㅇㅇ" 하며 받아들이긴 하는데, 삼국지 위지 등애전에서는 저 사이에 시간차가 좀 있다. 또 번건이 사마염에게 상소를 올려 등애의 무죄를 주장하고 반역죄로 처벌된 것을 풀어달라고 요청한다.[22] 당시의 시대상을 생각하면 반역죄로 처벌된 죄인을 무죄로 돌리는 일은 위정자의 실수[23] 를 시인하는 것으로 상소를 올리는 사람은 목숨을 걸어야 했으며 애초에 반역죄를 면죄하는 일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마염은 등애의 명예를 회복시켜주고 그의 장손 등랑(鄧郞)을 낭중에 봉했다.[24] 번건은 등애에 의해 멸망한 촉한의 관료였는데도 그런 건의를 했다는 점이 이채롭다. 하지만 똑같이 촉한 출신인 진수는 등애의 열전을 진짜 반란을 일으켰던 인물들과 묶어서 기록했다.
등애의 이런 처우는 그 자신이 자초한 것도 있었다. 등애가 죽은 후, 등애의 담당지역을 둘러 본 당빈은 등애를 다음과 같이 디스하였다.
등애가 담당지역인 농우에서 어지간히 욕을 먹었던 듯하다. 모범적인 목민관이라기 보단 뼈빠지게 일을 시키는 행보관 스타일이었던 모양. 단 단작은 등애를 옹호하면서 단작은 등애가 1만명의 병사를 가진 지휘관 시절에도 스스로 사졸의 역을 다했다고 쓰고 있다.애초에 등애가 주살됐을 때, 문제(사마소)는 등애가 농우(隴右)에서 오래 있어서 본디 병사들의 마음을 얻었는데, 하루 아침에 이멸돼 변방의 형편과 사정이 혼란스러워질까 두려워 당빈에게 은밀히 살피게 했다. 당빈이 돌아와 황제에게 아뢰길
등애는 시기하고 각박하며 천성이 교활했고, 자신의 재능을 과시하며 재능과 학문을 믿어서, 순종하던 이는 (등애가) 형세를 식별한다고 여겼으나 직언하는 이는 무례한 짓을 한다고 여겼습니다. 비록 장사(長史)와 사마(司馬), 참좌(參佐)와 아문(牙門)이라도 답하며 뜻을 놓치면 번번이 함부로 욕을 먹고 모욕을 당했습니다. 처신이 무례하여 인심을 크게 잃었습니다. 또한 강제노역을 시행하길 좋아하여 자주 무리의 힘을 고달프게 했습니다. 농우에서 그를 매우 증오해서 그의 화를 기뻐하며 듣고, 그를 위해 일하길 원하지 않습니다. 지금 여러 군이 이미 이르러 내외를 압박하기에 충분하니, 근심으로 여기지 마시길 바라옵니다.
진서 당빈전(열전 12권)
이밖에도
로 보상을 미끼로 5천여명의 병사들이 잘 따랐다고 하고있다. 빡세게 굴려도 보상은 확실했던 듯. 하지만 등애가 숙청되자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지만, 강유의 세를 핍박했다는 30명은 마막을 압박하는 특공대 임무를 맡아서 보상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예전에 촉을 칠 때에 凉州의 兵馬와 姜胡의 건아들을 모집하고 무겁게 보답할 것이라 약속하여 5천여 명이 등애를 뒤따르며 적을 쳐서 그 공이 모두 제일(第一)이었습니다. 그런데 을해(乙亥)의 조서에서 州郡의 將督은 中外의 軍[중군은 수도에 주둔하는 중앙군 ; 외군은 도독(XX주 제군사)이 통할하며 변경을 진수. 주군병과는 별개]과 서로 같지 않아 비록 上功을 세웠어도 응봉(應封,공에 상응하여 알맞게 봉해짐?)된 경우가 없었습니다. 오직 금성태수 양흔이 거느린 군사들 만이 江由의 勢를 핍박하였음을 이유로 30명이 봉해질 수 있었습니다만 금성 이서로 양흔의 部가 아닌 경우는 한명도 봉해진 사람이 없었습니다. 中軍의 例에 속하면 비록 下功이라도 필히 (봉해져서) 侯가 되고 州郡에 속하면 비록 功이 높아도 봉해지지 못하니 이는 '가깝다고 하여 무겁게 베풀어서는 안되고 사이가 서로 멀다고 하여 은혜를 베푸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일컫는 바에 맞지 않는다고 할 것입니다....(후략)..."
3.1. 강유와의 우열 논란
등애와 강유와의 관계는 삼국지 후반부의 메인 떡밥으로, 이 둘의 관계를 두고 등애가 강유의 공세를 여러차례 막아내었으니 등애가 더 뛰어나다, 눈에 띄는 전력차를 가지고도 잘싸운 강유가 더 뛰어나다등 등애빠와 강유빠, 위빠와 촉빠 간에 늘 논란이 있다.
강유와의 첫 전투인 조성 전투에서 강유의 의도를 알아채고는 강행해 조성에 미리 도착, 강유의 진격로를 미리 끊은 것은 등애의 자질이 돋보인다. 하지만 255년 왕경이 적도에서 포위당했을 때 등애는 구원을 포기하려고 했다. 왕경 스스로가 말했듯이 진태가 아니었다면 강유는 적도를 함락시켰을 것이다.
등애가 강유를 잘 막아낸 것이 맞지만 실제로 당시 위나라가 촉나라에 비해 인재나 병력 거의 모든 면에서 압도적으로 많았다. 강유가 거의 나홀로 원맨쇼를 했던 것에 비해 등애는 진태, 사마사 등 든든한 아군이 많았으며 정촉은 여러 가지로 운이 따라준 경우라 결과만 가지고 두 장수의 우위를 섣부르게 평가하는 것은 곤란하다.
뒷세대 왕조들이 선정한 명장 목록에 등애는 자주 들어가지만 강유는 자주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4. 연의
연의 한정으로 진군#s-2의 아들 진태와는 신분과 직급, 연령을 초월한 망년지교의 우정을 쌓았다.
삼국지연의에선 대운하 경력은 없으며 정사에서는 종회만 언급했던 하후패의 대사 속에 추가되어 하후패가 강유에게 주의해야 할 인물로 소개한다. 이 말을 들은 강유는 등애와 종회를 모두 어린 서생으로 취급하며 별 것 아닌양 여겼다가 후에 북벌을 개시하면서 등애와 첫 대면을 한다. 등애가 워낙 늦게서야 출세한 인물인 만큼 강유는 등애를 젊은 무장이라 생각했는지 등충을 등애로 착각해 일기토를 펼쳤고 뒤이어 진짜 등애가 아들을 지원하러 나왔을 때에야 비로소 서로의 모습을 확인하게 된다.
관구검의 난에서는 문앙에게 맞서 화려한 데뷔전을 치른다. 문앙이 등애에게 개털리고 혈혈단신으로 오로 도망가는 내용이다. 당시 등애가 환갑이 가까운 노장이었으며 문앙이 한창 날아다닐 나이인 18세인 걸 감안하면 황충과 맞먹는 노익장의 실력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나관중이 제갈량을 신비스럽게 그리기 위하여 연의에서는 마천령을 간신히 올라간 등애가 나아가는 길가에 예전에 제갈량이 썼다고 되어 있는 비석을 본다.
저때가 촉나라 염흥(炎興) 원년(263)이었는데 이화초흥은 이것을 의미(火+火=炎)하고, 등애와 종회의 자가 각각 사재(士載), 사계(士季)였으므로 이사쟁형은 둘이 싸우게 된다는 의미. 결국 '''제갈량이 등애와 종회의 최후를 예언한 내용'''인 것이다. 게다가 근처에 빈 진영이 하나 있어 조사하니 예전에 제갈량이 군사를 두고 길목을 지키라 했는데 유선이 거둬가서 비어 있었다고 한다. 등애도 "과연 무후(제갈량)는 신인이구나."라고 감탄한다.이화초흥(二火初興): 두 불이 처음 일어나면
유인월차(有人越此): 여기를 넘어 오는 이가 있다.
이사쟁형(二士爭衡): 두 선비가 서로 지지 않으려고 다투니
불구자사(不久自死): 저절로 죽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으리라.
종회는 상국 종요의 아들로 농민 출신인 등애와 현격한 신분차였기 때문에 호송되는 등애에게 "소 몰고 밭갈던 놈이 고작 암벽등반한 거 가지고 공을 세웠다고 뻐기냐!"라고 그의 한미한 출신을 깐다.
5. 기타
등애의 죽음에 많은 이들이 애통해하며 등애묘를 만들었고 그 중에서 일부는 현존한다. 또한 말더듬이를 격려하는 의미에서 등애의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인용하기도 한다.
유명록에는 등애묘와 관련한 전설이 기록되어 있다. 등애묘는 경구에 있는 초가집이었는데 어느 날, 사마염이 병에 걸렸는데 꿈에 노인이 나타나 "나는 등공(등애)인데, 집이 허물어졌으니 자네가 다시 지어 주게나."라고 말했다. 이에 사마염이 낡은 초가집을 허물고 기왓집으로 다시 지어 주었다. 그 후, 어떤 남녀가 등애묘에서 밀회를 즐기던 중 거대한 구렁이가 나타나 두 사람을 휘감아 버렸다. 이에 여자의 집에서 제사를 지내니, 그제야 풀어 주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전 주석인 덩샤오핑이 등애의 후손이라고 한다.
5.1. 이름 논란
'艾'자가 '쑥 애, 다스릴 예'로 쓰이는데 뜻으로 미루어 보아 '등예'라고 발음하는 것이 맞을 가능성이 있다. 장합의 자(준예/준애)와 비슷한 케이스.
삼국지집해에서도 이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런데 예기(禮記)에서 쉰 살을 애(艾)라고 하였다. 또한 자가 사재(士載)인데 이아(爾雅)에 따르면 요순의 시대에 해를 재(載)로 불렀다고 하니 이렇게 따지면 자를 짓는 전통적 방식에 맞다. 쉰 살까지 살으라고 한 게 이상하겠지만 이때의 평균 수명은 쉰 살도 나름 오래 살았다고 할만큼 짧았음을 기억하자.
양 쪽 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긴 하지만 관련 작품에서 애가 절대 다수로 쓰인다.
한편 'ㅐ'와 'ㅔ'의 구별 때문에 발음이 똑같은 곤충과 헷갈리는 경우가 꽤 있다.
6. 미디어 믹스
- 등애/기타 창작물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