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개
1. 서진의 인물
王愷
생몰년도 미상
서진 시대의 인물로 자는 군부(君夫)이다.
동해 사람으로 왕랑의 손자이자 왕숙의 아들이다. 사마소의 아내이자 사마염의 어머니 왕원희의 남동생으로 사마염의 외삼촌이다.
젊어서 훌륭한 관료라는 칭찬을 받았지만 외척이라 진나라 조정에서 너그럽게 대해주기도 했고 천성이 호사스러웠다.
집안발은 쩔어주는 서진의 대귀족. 하지만 '''학문과 검소함으로 유명'''했던 누나 왕원희와는 달리, 사치와 낭비로 유명했다. 사실 왕개가 제대로 된 인간이었다면 할아버지 왕랑이 괜히 '''"내 손녀(왕원희)가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게 아쉽다"'''고 한탄하지 않았을 것이다.
후장군 시절 산기상시 석숭과 '''돈지랄 경쟁으로 라이벌 관계'''였다. 이때의 일화들도 유명하다. 예를 들면 왕개가 집 안을 밝힐 때 쓰는 밀랍을 땔감으로 사용해 지은 밥을 먹으면, 석숭은 오색의 꽃초를 태워서 밥을 지어 먹었고, 석숭이 은으로 만든 요강을 쓰면, 왕개는 황금으로 만든 세숫대야를 썼다. 또 왕개가 사람의 젖을 먹여 기른 돼지를 잡아 먹으면, 석숭은 비단 옷을 입히고 금가루를 먹여서 기른 닭을 잡아 먹었다. 참고로 세숫대야 뿐 아니라, 왕개의 집에 있는 그릇들은 모두 황금으로 되어 있었는데, 왕개는 하녀들에게 그것을 맥아당(麥芽糖: 꿀물)으로 씻도록 하기까지 했다.
한번은 왕개가 비단으로 40리에 이르는 담장을 만들자, 석숭은 한술 더 떠서 50리에 이르는 담장을 만들었다. 또 석숭이 값비싼 향료의 열매로 그 담장을 칠하자, 왕개는 피륙의 물감(赤石脂)으로 담장을 칠했다. 참고로 그는 석숭과의 재력 대결에서 항상 밀리곤 했다. 그래서 황제 사마염이 왕개를 도와주기 위해 진귀한 산호수를 선물했고, 곧장 이 산호수를 석숭에게 보여 주었더니 코웃음을 치면서 그 산호수를 몽땅 박살내 버렸다.
그러자 왕개가 "황제의 하사품을 부수다니, 이게 무슨 짓인가!"라며 깜짝 놀라니, 그 말을 들은 석숭이 "지금 이걸 산호수라고 갖고 왔느냐. 이까짓 것들 쯤은 내가 다 보상해 주겠다. 내 창고에 이것보다 더 큰 산호수들이 얼마든지 있으니 가져가라."라고 말했다. 그래서 왕개가 석숭의 산호수를 보더니 자신의 것과 비슷한 것은 무수히 많고, 더 크고 아름다운 산호수가 6~7개는 더 있는 것을 보고 완전히 꼬리를 내렸다고 한다.
왕개는 사치뿐만 아니라 인간성으로도 석숭과 호적수가 될 만했는데, 악사가 음악을 좀 잘못 연주했다고 그 자리에서 끌어내 때려 살해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말 위에서 활쏘기를 좋아해, 땅을 사서 울타리를 만들고 땅 한 쪽에 돈을 깔아 당시 사람들이 금전의 제방이라고 불렀다는 등의 석숭과 비슷한 일화가 남아 있다. 또한 사마염이 왕개의 집에 오자 주연을 베풀었는데, 상에 올려진 여러 음식 중 특히 돼지고기가 맛이 있었다. 사마염이 "돼지고기 요리에 무슨 비결이 있는가??"라고 묻자, 왕개는 "그 돼지는 사람의 젖으로 키웠다"고 답하였다. 그러자 사마염은 불쾌해서 식사를 끝내지도 않고 갔다고 한다. 이 일화는 문헌에 따라 왕제#s-2의 일화로 나오기도 한다.[1]
그래도 사마염은 외삼촌인 왕개를 꽤 잘 따랐던 모양이다. 왕개가 석숭과의 돈지랄 경쟁에서 조금 밀린다는 이야기를 듣자 황실의 보물인 산호수를 떡 하니 내줄 정도였으니. 물론 전술했듯이 왕개가 GG를 쳤다.
세설신어의 태치편에서 석숭과 돈지랄 경쟁하는 여러 가지 일화가 나온다.
또한 왕개는 깃털을 술 속에 담가두면 반드시 사람을 독살할 수 있는, 장강 이북으로 들여오는 것이 금지된 짐새를 익군을 지낼 때 석숭에게서 얻어 길렀다. 짐새의 크기는 거위만 했고, 부리의 길이는 1척이 넘고, 오로지 독사만 먹었다. 왕개는 석숭과 함께 조사받아야 한다고 상주받았고, 사마염은 용서해주면서 도성의 거리에서 짐새를 태우게 했다.
그는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 꺼리는 바가 없었다. 생전에는 후군장군이 되었으며, 사후에는 추(醜)라는 시호를 받았다. '더러울 추(醜)'라는 한자에서 보듯이 이 시호는 최악으로 나쁜 시호다. 사기 시법해에 따르면 '''위세를 믿고 방자하게 행동하는 것을 추(醜)라고 한다.'''고 하였다. 당대 사람들 역시 참으로 형편없는 인간으로 보았던 것이다.[2] 시호를 추(醜)로 받았던 삼국지 인물이 더 있는데, 바로 조비의 측근인 오질이 추후(醜候)를 받았다. 이 작자도 나쁜 기록이 많은데다 평판도 최악이었는데, 그나마 오질은 아들이 항의해서 위후(威候)로 변경되었다.
2. 후한 말의 인물
王凱
생몰년도 미상
후한 말의 인물.
왕찬의 사촌형이자 왕업의 아버지, 왕필의 조부.
서주 고평현에 살다가 조조의 서주대학살때 왕찬과 함께 난리를 피해 형주로 이사를 가 유표에게 의지했는데, 유표에게 딸이 있어 왕찬의 재능을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처음에는 유표가 딸을 왕찬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다. 그러나 왕찬의 용모가 못생긴데다가 사소한 절개를 따지지 않는 것을 꺼려했으며, 유표가 왕찬에게 그대의 재능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지만 몸매와 용모가 볼품없으니 사윗감이 아니라고 하면서 왕찬을 사위로 삼는 것을 그만뒀다.
그러나 왕개는 좋은 풍채와 용모를 지녀 유표가 딸을 왕개에게 시집보냈으며, 이 유표의 딸과의 사이에서 왕업을 낳았다. 왕개가 낳은 왕업은 위풍의 난에 가담한 왕찬의 두 아들이 처형되면서 왕찬의 대가 단절되자 왕찬의 양자가 되어 후사를 이었다.
3. 중국의 배우
왕카이 참조.
[1] 그리고 SBS 드라마 육룡이 나르샤에서도 활용되었으며, 작가들이 직접 이 일화를 본딴 것이라고 밝혔다.[2] 시호란 한 신하의 생전의 일을 돌아보며 짓는 것이다. 고인에게 내리는 것이기도 한만큼 시호를 내릴 때는 생전의 행적 가운데 최대한 좋은 걸 추려내고 짓는 것인데 추 자를 시호랍시고 받은 것이다. 조선의 예를 보면, 명종 때 박순은 임백령의 시호를 짓는 일을 맡았는데, 박순은 사림 계열이고 임백령은 소윤이면서 탐관오리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절대 좋은 걸 주고 싶을 리가 없었건만 그래도 '소공'이라는 시호를 주려 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소는 과오가 있으나 고칠 수 있다는 의미이고, 공은 풍채나 용모가 수려하다는 의미. 잘못이 있더라도 이렇게 에둘러 선정하는 것이 보통이다. 왕개의 경우 당대인들에게조차 그 정도의 존중도 받지 못할 정도로 악명이 대단했다는 것이다. 어지간히 쓰레기처럼 보였던 모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