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링하우젠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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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
3.2. 영국-프로이센-하노버 연합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61년 7월 16일 프랑스군과 영국-프로이센-하노버 연합군이 독일 서부 빌링하우젠에서 맞붙은 전투. 연합군이 프랑스군을 격파해 프랑스군의 독일 원정을 좌절시켰다.

2. 배경


1761년 7월, 랑엔잘차 전투그륀베르크 전투에서 일진일퇴를 거듭한 프랑스군과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은 수스트에서 대치했다. 당시 프랑스군은 브로이 공작 빅토르 프랑수아와 수비즈 공작 샤를 드 로앙의 군대를 합쳐 약 10만 명에 달했다. 반면 연합군 총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가 이끄는 군대는 6만 명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런 불리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위치를 끝까지 사수하기로 굳게 결심했다. 그는 적이 큰 희생을 치를 위험을 무릅써가며 공격하지 않을 거라고 여겼고, 그의 생각은 옳았다. 양측은 며칠간 서로를 마주보고 대치하면서도 서로를 향해 섣불리 공격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7월 14일, 브로이 공작과 수비즈 공작은 며칠간의 의논 끝에 마침내 적을 공격하기로 결의했다. 브로이 공작은 헐트로프 근처에서 자리를 잡기 위해 진군하면서 선봉대에게 우티나우 군단과 그랜비 후작 존 메너즈의 군단이 수비하는 나텔른과 빌링하우젠을 공격하게 했다. 이와 동시에, 수비즈 공작은 잘츠바흐로 진군하면서 분견대로 셰이딩겐을 공격해 적의 주위를 그쪽으로 쏠리게 하는 동시에 연합군 우측면이 위치한 함을 경기병대로 습격해 적을 혼란에 빠뜨리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빌링하우젠 전투의 막이 올랐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



3.2. 영국-프로이센-하노버 연합군



4. 전투 경과


7월 15일, 브로이 공작은 하루종일 정찰하여 연합군의 모든 전초 기지를 살펴봤다. 그는 우티나우 군단이 정해진 위치에서 1km 떨어진 후방에 진을 치고 있는 걸 확인하고 작전을 시행해도 무방하다고 판단했다. 오후 5시, 브로이 공작은 오스팅하우젠에서 군대를 3개 부대로 편성했다. 우익 부대는 클로젠 장군의 지휘하에 후트로프로 진군한 후 빌링하우젠을 공격하는 임무를 맡았고, 좌익 부대는 스탱빌 백작의 지휘하에 나텔른을 공격하며, 중앙 부대는 브로이 공작 본인이 지휘를 맡아 좌익과 우익의 공세를 지원하는 역할을 맡았다. 오후 6시, 브로이 공작은 연합군을 급습했다. 연합군은 이 갑작스런 공격에 크게 놀랐고, 프랑스군 좌익부대는 나텔른을 재빨리 공략하고 100여 명의 포로를 확보했다. 또한 클로젠 장군이 지휘하는 우익부대는 적 전초기지를 격파한 뒤 빌링하우젠으로 진군했다. 이에 그랜비 경이 지휘하는 영국군이 거세게 저항했으나 적의 기세에 밀려 빌링하우젠 마을로 후퇴했다.
페르디난트는 적이 공격해왔다는 소식을 듣고 그랜비 경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라는 명령을 내렸으며 우티나우 군단에게 함을 점령해 아군의 퇴로를 차단하려 드는 적을 저지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우티나우 군단에 소속된 7개 보병대대와 5개 기병대대는 립슈타트에서 함까지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좌측으로 전진해 그랜비 군단을 지원했다. 또한 페르디난트는 안할트 장군에게 명령을 내려 우티나우 군단을 대신해 나텔른을 탈환하고 우티나우 사단과 연계하여 적의 공세를 저지할 것을 명령했으며, 콘웨이 중장에게는 안할트 장군을 대신해 일링겐과 호헤노버를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이후 페르디난트는 헤르츠펠트에 진을 치고 있던 아우구스트 프리드리히 폰 슈페르켄 장군에게 윌프 장군 휘하의 6개 보병대대와 6개 기병 대대를 그랜비 경에게 파견할 것을 지시하고 본인이 친히 그랜비 경의 진영으로 향했다.
한편 클로젠은 연합군이 후퇴한 빌링하우젠 마을로 쳐들어가 그랜비 경의 진영을 지키는 바리케이드까지 점령했다. 그러나 그랜비 경은 우티나우 군단이 도착할때까지 가까스로 버텨냈고, 우티나우 군단은 도착하자 마자 클로젠 부대를 공격했다. 이에 프랑스군은 어쩔 수 없이 숲으로 후퇴했고, 클로젠은 브로이 공작에게 지원군을 요청했다. 이에 브로이는 게르쉬 백작에게 드 루이 척탄병 대대와 야전대포 15문과 함께 클로젠과 합세했고, 클로젠은 재차 빌링하우젠 마을을 향한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나 그랜비 경의 군단과 우티나우 군단은 적을 훌륭히 막아냈고, 브로이 공작은 어쩔 수 없이 오후 10시에 공격을 취소하고 빌링하우젠 마을 일부를 점거한 프랑스군을 지원하기 위해 아우베르그네 여단, 샹파뉴 여단, 푸아투 여단을 파견했다.
이렇듯 빌링하우젠에서 급박한 전투가 벌어지는 사이, 수비즈 공작은 셰이딩겐을 향한 공격을 개시하지 않았다. 그는 계획상의 공격 개시 날짜가 7월 16일인 만큼 그 전날에 빌링하우젠을 공격한 브로이 공작처럼 공세를 개시할 의향이 없었다. 그는 단지 연합군의 전초 기지를 위협하는 선에서 그쳤다. 만약 브로이 공작이 수비즈 공작에게 얼른 공세를 개시하라고 독촉하고 수비즈 공작이 이에 따랐다면, 연합군은 아마도 그날로 붕괴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브로이 공작은 수비즈 공작에게 공격하라고 독촉하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빌링하우젠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개시하지도 않았다. 결국 7월 15일 밤이 되자 모든 공세는 중단되었고 프랑스군은 내일 있을 공세를 준비했다. 그러는 사이, 페르디난트는 빌링하우젠에 추가 병력을 투입해 전력을 보강한 후 가까운 시일에 있을 적의 공세를 반드시 저지하겠노라고 다짐했다.
7월 16일 새벽 4시경, 브로이 공작은 빌링하우젠에 대한 공세를 개시했다. 그러나 얼마 안가 적의 병력이 대거 보강되었다는 걸 확인한 브로이 공작은 수비즈 공작에게 오스팅하우젠으로 철수하는 게 좋겠다고 알렸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적에게 붙들려 있었기 때문에 후퇴할 수 없었다. 또한 나텔른에 주둔한 좌익 부대는 자신들을 대신해 나텔른을 사수할 부대가 오지 않았기 때문에 함부로 정해진 위치를 벗어날 수 없어서 빌링하우젠 전투를 지원하지 못했다. 한편 수비즈 공작은 오전 7시 무렵 적을 향한 공세를 개시해 셰이딩겐 마을과 다리를 장악하고 얼마 안되는 적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브로이 공작으로부터 오스팅하우젠으로 철수할 의향이 있다는 교신을 접한 수비즈 공작은 자신만이 단독으로 연합군과 싸우게 될 것을 두려워했다. 결국 그는 압도적인 병력으로 밀어붙이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진영으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오전 7시~8시까지 빌링하우젠 마을을 사이에 두고 연합군과 프랑스군 간의 포격전이 벌어졌다. 그러다가 양측은 모두 지쳐서 30분간 휴식을 취했다. 이때 브로이 공작은 수비즈 공작이 제대로 공격하고 있는지를 걱정했지만, 그가 철수해버렸다는 건 까맣게 몰랐다. 오전 8시 30분경, 연합군은 다시 공세를 개시했다. 그들은 그동안 보강된 압도적인 병력을 동원해 브로이 공작의 프랑스군을 밀어붙였다. 프랑스군은 밤새 싸우느라 지칠대로 지친데다 전력상으로도 불리해 도저히 막아낼 수 없었고, 결국 시신과 부상자들, 대포 몇문을 내버리고 도주했다. 오전 10시경, 브로이 공작은 수비즈 공작이 자신에게 협조해주지 않은 것에 낙담한 채 퇴각 명령을 내렸다. 연합군 경기병대는 후퇴하는 프랑스군을 추격해 후트로프까지 진군했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질서정연하게 후퇴하며 큰 손해를 보지 않은 채 철수할 수 있었다. 이렇게 해서 빌링하우젠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연합군은 빌링하우젠 전투에서 290명의 전사자와 927명의 부상자, 183명의 포로, 대포 3문을 상실했다. 여기에 수비즈 공작의 프랑스군과 맞선 부대의 손실까지 포함하면 총손실은 전사자 311명, 부상자 1,011명, 포로 192명에 달한다. 반면 브로이 공작의 군단이 입은 사상자는 5,500명에 달했고 포로는 2,000명에 달했으며 6개의 깃발과 대포 19문을 상실했다. 수비즈 공작이 이끄는 군단의 사상자는 24명에 불과했다. 브로이 공작과 수비즈 공작은 이 전투의 패배에 대해 서로를 몹시 비난하면서 모든 책임을 상대에게 떠넘겼다. 이에 대해 샤를 프랑수아 뒤무리에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이 전투는 너무 일찍 공격해 모든 것을 독차지하려 들었던 브로이 공작의 야심찬 경솔함과 그의 라이벌을 굴복시키는 것으로부터 범죄적 쾌락을 얻고자 프랑스의 명예를 저버린 수비즈 공작의 비난받을 만한 질투 때문에 패배한 것이다.

이후 프랑스 정부는 빌링하우젠 전투의 충격으로 더이상의 공세를 포기했고, 전쟁을 혐오하는 여론은 갈수록 거세졌다. 반면 연합군은 빌링하우젠 전투의 승리를 계기로 사기가 끌어올랐고 이듬해에 있을 공세를 집행할 준비에 착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