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헴스타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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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배경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
3.2. 영국-프로이센-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
4. 전투 경과
5. 결과


1. 개요


7년 전쟁 시기인 1762년 6월 24일 프랑스군과 영국-프로이센-하노버-헤센 연합군이 하노버의 빌헴스타흘에서 맞붙은 전투. 연합군의 승리로 끝난 이 전투는 7년 전쟁 시기 프랑스의 마지막 독일 공세를 좌절시켰으며, 프랑스는 이 전투 후 전의를 상실하고 연합국과의 화의를 모색한다.

2. 배경


1762년경, 영국은 7년이나 지속된 전쟁에 질려 있었다. 뷰트 백작을 위시로 한 새 내각은 채텀 백작 윌리엄 피트의 프로이센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 정책을 중단하고 프랑스와의 평화 협정을 고려했다. 프로이센은 지난 7년간 참혹한 전쟁을 치르면서 막대한 인명 손실을 겪으면서 1762년 무렵엔 전체 병력이 7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뷰트 내각은 프로이센은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그들에 대한 지원을 크게 줄여버렸다. 그러다가 1762년 1월 5일에 즉위한 러시아 차르 표트르 3세가 프로이센과 전격 평화 협정을 체결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그럼에도 뷰트 내각은 더이상의 군대 파견을 꺼려했고, 프랑스군을 상대하는 연합군에 대한 병력 지원은 중단되었다.
영국-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 총사령관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페르디난트는 그의 영국인 부관들이 겨울이 지나도 여전히 런던에 머물고 있는 등 영국의 이같은 소극적인 태도에 근심했다. 당시 독일 서부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프랑스군의 규모는 7만에 달했던 반면 그가 확보하고 있는 병력은 5만에 불과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이 제대로 된 지원을 해주지 않는다면 프랑스군의 공세를 막아낼 가능성은 희박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난국에도 불구하고 선제 공격을 감행해 프랑스군에게 타격을 입히기로 결심하고 6월 21일 니콜라 뤼크네르 장군 휘하의 군대를 자바부르크 요새 쪽으로 이동하게 했다 이에 프랑스군 총사령관 수비즈 공작 샤를 드 로앙은 카셀에서 북상하여 디멜 강에 접근했고, 라인강 상류 일대의 프랑스군은 임멘하우젠과 그레벤슈타인 사이의 지역에 진을 쳤다. 또한 캐스트리스 후작 휘하의 우익 예비군은 칼스도르프 방면으로 진군하여 라인하르츠발트 숲에 자리를 잡았다.
하지만 프랑스군은 디멜 강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빌헴스타흘에서 멈췄다. 수비즈 공작은 페르디난트가 프랑스군의 진군을 가로막기 위해 디멜 강에 접근했을 뿐 프랑스군과 대결할 생각은 없을 거라고 판단해 빌헴스타흘에 자리를 잡은 뒤 연합군의 진군을 저지하려는 움직임은 추호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캐스트리스 후작은 칼스도르프의 우익 예비군과 함께 본군과 동떨어진 위치에서 주둔하고 있어 자칫하면 고립될 가능성이 컸다. 6월 23일 전군에게 디멜 강 부교 건설을 실시하도록 지시한 그는 프랑스 진영을 정찰한 뒤 적의 전선이 허술하다는 것을 간파했다. 이에 그는 공격을 결심하고 당시 웨저 강 건너편 슐벡에 주둔하고 있던 뤼크네르 장군에게 야밤에 강을 건너 자바부르크 성 북쪽에 있는 고트츠뷔렌으로 진군하게 했다. 오후 8시, 뤼크네르 장군으로부터 군대가 정해진 위치에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은 페르디난트는 전군에게 자정까지 이동 준비를 완료할 것을 지시한 뒤 다음날 새벽 3시에 디멜강을 7개의 군단으로 도하하기로 했다.
당시 페르디난트가 계획한 작전은 다음과 같다. 먼저, 영국 기병대로 구성된 첫번째 군단은 리베나우에서 디멜 강을 건너 지에렌베르크로 남하하여 프랑스 좌익을 공격한다. 그리고 영국 보병대와 포병대로 구성된 두번째 군단은 리베나우의 디멜 강 하류를 건널 것이며, 브라운슈바이크 보병대로 구성된 세번째 군단은 라메덴에서 디멜 강을 도하하고, 하노버 중포대로 구성된 네번째 군단은 에베르슈츠에서 디멜 강을 도하할 예정이었다. 또한 헤센 보병대와 좌익의 16개 기병 대대로 구성된 다섯 번째 군단은 에베르슈츠와 시엘렌 사이에서 디멜 강을 도하하며, 6번째 군단은 아우구스트 프리드리히 폰 슈페르켄 장군 휘하의 하노버 보병 12개 대대로 구성되어 시엘렌에서 디멜 강을 건너 남쪽으로 행군하여 홈브레센에서 오른쪽으로 이동해 캐스트리스 후작 휘하 프랑스군의 우측면과 후방을 공격한다. 마지막으로 나머지 좌익 기병대로 구성된 7번째 군단은 시엘렌의 디멜 강 하류를 도하한다. 이러한 7개 군단의 출발 시각은 오전 4시로 정해졌다.
이 7개 군단이 출발하기 전인 새벽 2시, 제20 킹슬리 보병대가 리베나우 근처에서 출발해 연합군 군단의 행군로를 확보하기 위해 츠웨겐과 마주보는 고지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에 하노버 예거 부대와 후사르 부대가 선봉 부대를 맡았다. 한편 6개의 보병 대대와 7개의 기병 대대를 보유하고 있던 뤼크네르 장군은 새벽 3시에 고트츠뷔른에서 자바부르크 숲을 거쳐 마리엔도르프까지 남서쪽으로 진군한 다음 우덴하우젠으로 진격하여 캐스트리스 후작 휘하 프랑스군의 후방을 노릴 예정인 슈페르켄 장군의 군대와 합세하는 임무를 맡았다. 슈페르켄 장군은 칼스도르프 근처에 있는 프랑스군 우익의 측면을 공격하고, 뤼크네르 장군은 프랑스군 우익의 후방을 노릴 예정이었다. 페르디난트는 이 원대한 계획이 성공한다면 프랑스군 전체를 박살낼 수 있다고 확신하고 6월 24일 새벽 작전을 개시한다.

3. 양측의 전력



3.1. 프랑스군



3.2. 영국-프로이센-하노버-헤센-브라운슈바이크 연합군



4. 전투 경과


6월 24일 오전 4시, 페르디난트 휘하 7개 군단은 디멜 강을 도하해 정해진 위치를 향해 진군했다. 새벽 5시, 아우구스트 프리드리히 폰 슈페르켄 휘하 2개 군단이 라인하르츠발트로 진군했다. 그들은 홈브레센의 고지에서 단 2명의 프랑스 초계병을 발견했고,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은 채 고지를 공략했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슈페르켄 장군은 숲에 가려진 캐스트리스 후작 휘하의 프랑스 군단을 보지 못한 채 오른쪽 대신 왼쪽으로 가버렸다. 그 바람에 그의 군단은 캐스트리스 후작의 군단이 아닌 적 본군 전면을 향해 전진하고 말았다. 한편 프랑스군 초계병은 적이 난데없이 나타나자 크게 놀라 종을 요란스럽게 쳤다. 이에 캐스트리스 군단은 적이 확보한 홈브레센 고지를 탈환하기 위해 포병대를 동원하여 포격을 가했지만, 슈페르켄이 고지에 남겨놓은 연합군 부대 역시 포병대를 투입해 맞대응했다. 캐스트리스 후작은 본대로부터 적을 공격할 것인지, 후퇴할 것인지에 대한 어떠한 지시도 받지 못해 난감해 하다가 일단 슈페르켄 군단의 기동을 지연시키기 위해 기병대를 투입시키려 했다가 뤼크네르 군단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를 중지하고 방어에 전념하기로 했다.
오전 7시경, 뤼크네르 장군의 군단이 마리엔도르프에 도착했다. 그는 마리엔도르프 마을을 좌편에 두고 홈브레센 마을을 우편에 둔 채 제1열에 보벼앧, 제2열에 기병대를 배치했다. 이후 양군은 서로를 향해 포격전을 가했으나 캐스트리스 후작은 적의 후속부대가 계속 도착하자 마침내 8시경에 빌헴스타흘로 철수하기로 결정했다. 알자스 보병대가 캐스트리스 군단의 후미를 보호했고, 일부 병력은 그레벤슈타인 마을에 남겨져 그레벤슈타인 협곡을 지나는 아군을 엄호하게 했다. 한편 뤼크네르 군단은 적이 후퇴하자 우덴하우젠으로 진군했으나 잘못된 방향으로 행군하던 슈페르켄의 일부 부대를 발견하고 프랑스군으로 오인하여 오인사격을 가하고 말았다. 적이 이렇듯 혼란에 빠진 사이, 캐스트리스 후작은 전력을 최대한 보전한 채 빌헴스타흘로 철수할 수 있었다.
한편 홈브레센에서 포격소리가 들려오자 깜짝 놀란 프랑스 본대는 혼란에 빠져 있다가 캐스트리스 후작의 보고를 받고 나서야 가까스로 진정되었다. 수비즈 공작은 데스트리스 공작에게 우익 기병대를 이끌고 캐스트리스 후작의 후퇴를 엄호하게 하고, 자신은 중앙과 좌익 병력을 이끌었다. 이때 그랜비 경 존 메너즈가 이끄는 영국군 기병대가 지에렌베르크에 도착했다. 난데없이 적 기병대가 출현하자, 수비즈 공작과 데스트리스 공작은 크게 놀라 전군에 숙영지를 정리한 후 카셀을 향해 4개 대열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뤼크네르 장군은 캐스트리스 후작의 프랑스군 우익이 빠져나갔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슈페르켄 군단의 좌측 대열을 지휘하는 키엘만세크 장군에게 전령을 보내 자신과 함께 군대를 결집시켜 호헨키르헨으로 가서 빌헴스타흘에서 카셀로 가는 모든 도로를 차단함으로서 프랑스군의 퇴로를 끊어버리자고 권유했다. 그러나 키엘만세크는 늪이 많은 그레벤슈타인 협곡을 돌파해 적을 추격하는 데 집착하느라 뤼크네르 장군의 권유를 듣지 않았고, 이로 인해 연합군은 프랑스군의 퇴로를 차단하지 못했다.
한편 중앙의 페르디난트 휘하 연합군은 매우 느린 속도로 프랑스군 전선을 향해 진격했다. 이때 그들의 좌편에서 프랑스군 우익을 공격하고 있어야 할 슈페르켄 군단이 제 위치를 벗어나버리는 바람에 나머지 군단의 진군은 답답할 정도로 지연되었다. 단지 그랜비 경 휘하의 영국군 만이 후퇴하는 적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이에 스탱빌 공작 자크 필립 드 슈아쇨이 이끄는 군단은 아군의 후퇴를 엄호하기 위해 반전하여 그랜비 경의 영국군과 격돌해 그들의 추격을 지연시켰다. 그 사이 데스트리스 공작은 두라스 공작에게 1개 보병 여단을 맡겨 빌헴스타흘 고지를 점거하게 했고, 페르디난트 휘하 연합군 군단은 스탱빌 공작의 프랑스군 후방에 있는 칼덴 고지를 점령한 후 스탱빌 군단의 오른쪽 측면을 공격했다. 여기에 그랜비 경 휘하 영국군이 가세하면서, 스탱빌 군단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패주했다. 이렇듯 스탱빌 공작이 막대한 희생을 치러가면서 적의 추격을 지연시키는 사이, 프랑스군 본대는 카셀로 성공적으로 후퇴했고 연합군은 빌헴스타흘에서 남쪽으로 조금 전진했다가 오후 3시경에 전투를 중단한다. 이리하여 빌헴스타흘 전투는 막을 내렸다.

5. 결과


프랑스군의 손실은 전적으로 스탱빌 공작 휘하 군단에서 발생했다. 이 군단에서 1,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2,700에 달하는 병사들이 적에게 투항했다. 스탱빌 공작 휘하의 대대들 중 온전한 상태로 탈출에 성공한 대대는 2개에 불과했다. 또한 군기 1개, 대포 2문, 상당한 군수품들이 연합군에게 탈취되었다. 한편 연합군의 전사자는 208명, 부상자 273명, 포로 315명이었는데, 이 중 450명의 손실이 그랜비 경의 군단에서 발생했다. 이 전투는 연합군에게 있어 매우 만족스럽지 않았는데, 이는 슈페르켄과 키엘만세크 장군의 실책 때문이기도 했고 페르디난트의 중앙군이 너무 느리게 진군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7만에 달하는 프랑스군이 자신들보다 적은 병력으로 급습하는 연합군의 행보에 경악해 도주하느라 급급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으며, 프랑스 정부는 이에 크게 낙담하여 전쟁에 염증을 느끼고 연합군과 평화 협약을 맺을 기회를 모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