쁘아까오

 


[image]
''' 본명 '''
''' 솜밧 반차멕
Sombat Banchamek
สมบัติ บัญชาเมฆ '''

''' 출생 '''
1982년 8월 8일 (42세)/ 태국
''' 국적 '''
태국[image]
''' 신장 '''
174cm[1]
1. 개요
2. 상세
3. 격투스타일
4. 마사토
5. K-1 max 이후
6. 근황


1. 개요


풀네임은 쁘아까오 포 프라묵(บัวขาว ป.ประมุข, Buakaw Por Pramuk)[2]k-1당시 일본의 영향으로 대부분 쁘아까오라고 알고있지만 실제발음은 부아카우에 가깝다. 태국의 수린 에서 태어난 쁘아까오는 8살부터 무에타이를 시작했고 15살에 포푸라묵 Gym 에 픽업되어 무에타이 선수생활을 시작한다. 이름의 포 프라묵은 소속 체육관 명인데[3] 몇해 전까진 살아있는 전설로 추앙받던 남삭노이가 소속돼있기도 했다. 2012년 당시 프로모터의 허락없이 시합을 가진 이후 그것이 문제되어 은퇴선언까지 했었지만 다행히 협의 후 다시 선수로 복귀. 이후에는 본명(솜밧 반차멕 Sombat Banchamek)과 링네임을 합쳐 쁘아까오 반차멕으로 활동중. 현재 소속짐은 본인의 이름을 내건 반차멕짐.

2. 상세


태국 출신으로, 무에타이 톱 레벨을 오가는 차세대 에이스로 각광을 받다가 마침내 일본의 K-1 MAX에 나가게 되며 주목받는다. 사실 그 이전에 우리나라의 KOMA라는 시합에 등장하여 무시무시함을 과시한 적이 있다. (당시 국내에는 중소규모 대회가 난립했으며 코마도 그중 하나였으나, 특유의 포스터부터 풍기는 음산한 분위기, 남삭노이, 쌈코, 쌍욕 등 정상급 낙무아이들의 차원이 다른 경기력에 많은 사람들이 경악했다.)
본토 무에타이 선수들이 그렇듯, 8세부터 무에타이로 돈을 벌기 시작해 룸피니 스타디움 2위 랭커,20대도 되기 전에 이미 150전에 130승의 괴물같은 스코어를 자랑했다. 놀라운 것은 저것이 챔피언 급에서는 그다지 많은 전적이 아니라는 것 정도(...).
태국에서는 무에타이 선수들이 그 활약이나 기술 수준에 비해 돈을 많이 못 버는 편인데[4], 쁘아까오가 일본에서 활약하게 되면서 일본에서 많은 돈을 받고 사랑받으면서 시합을 하게 되는 길을 열었다며 기대를 걸고 있다고 한다. 실제로 태국 TV쇼에 출연을 한다든가, 태국내에서 외국인들과 시합을 펼친다든가 하는 활동도 하고 있는 등, 다른 무에타이 선수들에 비하면 상당한 관심을 받고 있다.
파워면 파워, 기술이면 기술 뭐 하나 약하지를 않은데다 스피드와 경험마저 살인적이다. 펀치보다 킥을 위주로 경기를 풀어가는데 킥의 스피드가 펀치 만큼 빠르다. 로우킥, 미들킥, 하이킥, 연속 미들킥 등 다양한 종류의 킥을 왼발 오른발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빰 클린치 후 니킥은 접근전에서 무시무시한 위력을 발휘한다. 킥에 비해 복싱 스킬이 약하지만[5]그것을 커버하고도 남을만큼 쁘아까오의 킥은 완벽에 가깝다.
막강한 공격력 뿐만 아니라 쁘아까오는 방어기술 역시 뛰어나다. 경기를 보면 알겠지만 쁘아까오의 회피 능력은 엄청나다. 300전에 가까운 대전 경험을 통해 격투의 센스가 온 몸에 새겨진 것처럼 쁘아까오는 본능적으로 상대의 공격을 피하거나 봉쇄해 버린다. 2006년 IBF 복싱 챔프 출신의 버질칼라코다 와의 경기에서 펀치를 모조리 피하는가 하면 2007년 Tsogto Amara 선수와의 경기에서 로프에 기댄채로 노가드 위빙과 더킹으로 상대의 펀치를 모조리 흘려버리는 서커스같은 장면도 연출했으나 고의로 연출한 장면은 아닌 것 같다. 쁘아까오 입장에서 굉장히 위험한 순간이었고 쁘아까오는 레이세포 같은 노가드의 도발이나 쇼맨쉽을 보여준 적이 단 한번도 없다. 그런 행동 자체를 하지 않는다.
한편 쁘아까오의 경기를 보다보면 가끔씩 페이스가 갑자기 급격하게 떨어지는 장면이 있었는데, 이것은 쁘아까오가 어떤 데미지를 입었거나 체력이 소진된 것을 숨긴채로 파이트를 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숨기고 있던 데미지의 임계점에 다다랐을때 페이스가 급격히 떨어진것으로 보인다. 자신의 데미지를 숨긴채로 싸운다는것은 300전의 베테랑 파이터 이기에 가능한 퍼포먼스일것이다.
2008년 K-1 max 일본 토너먼트 사토 요시히로 와의 경기에서 2 라운드까지 우세한 경기를 펼치던 쁘아까오가 3 라운드 중반 들어 페이스가 급격하게 떨어졌다. 계속해서 클린치를 시도 하고 딥으로 사토를 밀어내는 방어적인 플레이를 반복하던 쁘아까오는 3라운드 종료직전에는 다리가 굳고 가드도 잘 올리지 못했다. 사토에게 거의 끌려다니다 시피 수세에 몰리던 쁘아까오는 3라운드 종료 후 연장전에서 놀랍게도 언제 그랬냐는 듯 회복되어 라운드 시작부터 사토에게 맹공을 퍼부었고 판정으로 승리했다. 또한 2008년 K-1 WORLD MAX 8강전, 역시 사토와의 경기에서 팽팽한 경기를 펼치던 3 라운드 중반 부터 쁘아까오는 페이스가 다운되더니 다리가 굳은채로 가드도 제대로 올리지 못한체로 우두커니 서서 사토의 라이트훅에 굴욕의 KO 패를 당했다. 이 경기는 많은 논란이 있었는데 고의로 쁘아까오가 졌다는 의견이 굉장히 많았다. 그러나 사실은 3라운드 사토의 니킥이 몇차례 쁘아까오의 복부에 꽂혔고, 다운 직전 결정적으로 사토의 니킥이 쁘아까오의 복부에 명중했다. 보통은 그자리에 주저 앉아야 정상이겠지만 쁘아까오는 아마도 사토에게 자신이 데미지를 입었다는 것을 들키지 않기위해 버티고 서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하지만 다리가 굳고 가드도 올릴 수 없을 만큼의 데미지를 입었기에 사토에게 통한의 라이트 훅을 내주고 말았다. Tsogoto Amara와 경기에서도 아마 그런 이유로 인해 로프에 기댄체로 가드없이 회피동작을 했을것으로 추측된다.
맷집도 강하다. 턱이 돌아갈 정도로 강한 펀치를 맞아도 쓰러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다. 2004년 K-1 WORLD MAX 결승전에서 2회전 마사토에게 라이트 훅을 제대로 맞았는데 [6] 흐트러짐 없이 경기를 이어갔다. 체급에 비해 파워도 있다. 어린시절부터 무에타이로 강하게 단련된 몸이라 그런지 가볍게 던지는 펀치 한방에도 상대가 KO 당하는 장면이 종종 있었다. [7] 전성기 쁘아까오의 기량은 경이로운 수준으로 K-1 WORLD MAX 세계왕자의 자리에 오른 2004년 당시에는 쁘아까오를 이길수 있는 파이터가 있을까 라는 의문을 들게 할 정도였다. [8]
2004년 K-1 MAX 데뷔와 동시에 K-1 MAX를 초토화시키며 세계왕자의 자리에 올랐다. 당시 쁘아까오의 기량은 K-1 WORLD MAX 출전자들보다 몇 수 위의 실력이었다. 4강전에서 코히루 이마키는 1회전 초반 쁘아까오의 다리를 걸어 넘어뜨린 뒤 열받은 쁘아까오에게 복날 개처럼 두들겨 맞았다. 쁘아까오의 무한 니킥에 속수무책으로 얻어맞은 코히루이마키는 2회전 KO 패를 당했다. 말 그대로 속수무책으로 얻어 맞았다. 그리고 쁘아까오는 일본의 킥복싱 영웅 마사토와 결승전을 벌이는데 그 당시 마사토는 일본 K-1 MAX의 최고 스타 중 한 명이었다. 쁘아까오와 마사토의 결승전에서 쁘아까오는 일방적인 경기를 이어갔다. 아니, 일방적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할정도로 정말 완벽한 원사이드 경기였다. 마사토는 쁘아까오의 연속 프론트킥으로 인해 접근조차도 못하고, 다가왔다 싶으면 펀치를 피하고 무에타이 클린치 후 니킥 퍼붓기, 펀치를 내면 미들킥 3연타가 쏟아지는 등 마사토는 어떤 해법도 찾을수 없이 그냥 쁘아까오가 때리는 대로 얻어터졌다. 경기 초반부터 마사토는 얼굴이 퉁퉁 부어올랐으며 툭툭 지르는 프론트킥에 밀려나고 정신차리고 달려들면 요것봐라 하는 쁘아까오에게 스트레이트 연타에 로우킥 콤보를 당하고 굴욕중의 대굴욕을 당한다. 당시 3라운드 이후 당연히 쁘아까오의 판정승일 줄 알았으나 연장이 선언되었고 [9] 쁘아까오는 묵묵히 자신의 코너로 돌아가 연장전을 준비했다. 그리고 연장전에서도 역시 쁘아까오는 압도적인 기량으로 마사토를 두들기며 승리했고 그렇게 쁘아까오는 K-1 MAX의 전설이 되었다.
쁘아까오는 말그대로 혜성처럼 등장함과 동시에 K-1 MAX 를 정벌하며 엄청난 임펙트로 무에타이의 압도적인 강함을 일본 그리고 세계에 각인시켰다. K-1 MAX 를 비롯한 세계 입식 타격계는 일본산 킥복싱이 주류였고 정통 무에타이를 구사하는 파이터는 태국인이 아니라면 흔치 않은것이 사실이었다. 더군다나 쁘아까오가 K-1 MAX 에 진출하기 이전, 태국 룸피니 스타디움 챔피언 출신의 낙무아이 두명이 K-1 MAX 무대에서 킥복서들에게 처참히 무너진 전례가 있기에 [10] 쁘아까오의 2004 K-1 WORLD MAX 우승은 그 의미가 더 큰 것이었다. 빰클린치와 딥 같은 킥복싱에서는 부각되지 않는 정통 무에타이의 기술들로 어떻게 무에타이가 킥복싱을 제압하는지, 그리고 입식타격기의 최강은 바로 무에타이 라는것을 쁘아까오는 세계 최고의 일본 킥복싱 무대위에서 천명한 것이다.
K-1 MAX 극강의 무에타이 챔피언의 탄생과 디펜딩 챔피언 마사토의 참패에 충격에 빠진 일본격투계와 K-1 운영진은 [11] 대대적인 룰 개정을 감행하는데 빰클린치 상태에서 연속니킥 금지라든지[12], 연속 프론트킥 금지 등 누가봐도 쁘아까오와 무에타이를 죽이는것이 자명한 룰 개정이 이루어졌다..[13] 그 결과 2005년 K-1 WORLD MAX 결승전에서 쁘아까오는 앤디사워에게 두번째 연장까지 가는 접전끝에 판정패한다.[14] 이 후 쁘아까오는 변경된 룰에서 복싱스킬 보강의 필요성을 느끼고 복싱 훈련에 매진했고 [15] 이전 무에타이 스타일과 다른 복싱을 강화한 새로운 K-1 스타일의 무에타이로 2006년 K-1 WORLD MAX 에 도전한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8강전에서 사토요시히로를 펀치로 TKO 시키고 결승전에서 앤디사워 또한 펀치로 TKO 시키며 2005년의 패배를 설욕하며 다시 세계왕자의 자리에 오르며 최초의 K-1 WORLD MAX 2회 챔피언이라는 영예를 안았다.
하지만 K-1 주최측의 룰 개정 이후 쁘아까오가 고전 하는 경우가 많아졌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2004년 K-1 WORLD MAX 의 세계왕자 자리에 올랐던 절대 강자 쁘아까오의 모습은 룰 개정 이후 보기 힘들어졌다. 2006년 챔프의 자리에 올랐지만 2004년 마사토를 누르고 챔프에 올랐을 때와 비교한다면 그 둘의 양상은 좀 다르다. 2004년 극강의 모습과는 달리 2006년 앤디사워 와의 경기에서는 불안한 장면들이 몇번 있었다. 대부분이 접근전에서 상대의 짧고 빠른 펀치의 콤비네이션 공격시인데 이것은 룰 개정이 원인이다. 2004년 룰 개정 이전 2004 K-1 WORLD MAX 결승전에서 가지고 놀다시피 했던 마사토에게 2007년 K-1 WORLD MAX 8강 전에서 1라운드 다운을 내주고 판정으로 진것도 마찬가지다. 룰개정 이전이라면 상대가 접근시 빰클린치를 활용한 니킥공격등 다양한 전술을 구사 할 수 있었기 때문에 마사토가 감히 접근을 할 수 없었고 쁘아까오는 쉽게 경기를 풀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룰개정 이후 빰클린치와 니킥을 사용할 수 없게 된 쁘아까오는 접근전에서 엄청난 핸디캡을 안게 되었다. 상대를 잡지를 못하니 물론 쁘아까오도 복싱스킬을 보강했지만 마사토나 앤디사워같은 복싱 위주의 킥복서 스타일의 경기를 할 순 없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쁘아까오는 지금까지 해온 무에타이 스타일을 버려야 한다. 쁘아까오는 이미 무에타이의 정점에 오른 완성형의 낙무아이 였기 때문에 격투스타일을 바꾼다는 것은 쁘아까오 에게는 득보다 실이 훨씬 많은 것이다. 쁘아까오의 무에타이 스탠스 또한 복싱을 구사하기에는 맞지 않는다.
그런 이유들로 인해 2006년을 정점으로 K-1 MAX 극강의 황제라 불리운 쁘아까오는 2007 K-1 WORLD MAX 마사토와 2차전 패배 이후로 조금씩 하향세를 그리게 된다. 2008 K-1 WORLD MAX 8강전에서는 사토 요시히로 에게 생애 첫 KO패를 당하는 굴욕의 순간마저 맛보게 된다. [16] 거게다가 개정된 룰이 복싱에 유리하고 점수 채점 방식도 복싱 기술에 더 많은 배점을 주기 때문에 킥의 비중이 높은 무에타이 선수인 쁘아까오에겐 불리할 수밖에 없다. K-1 MAX의 룰개정은 쁘아까오에게 비유하자면 마치 독수리의 한쪽 날개를 꺾어 버림과 마찬가지일 것이다.[17]
심판진의 편파판정도 문제가 있는데, 쁘아까오는 앤디 사워와 3번의 경기를 가졌는데 전적은 1승 2패이다. 1승은 쁘아까오의 KO 승, 2패는 앤디 사워의 판정승인데 쁘아까오가 판정패 당한 두 경기 모두 연장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다. 문제는 쁘아까오가 우위를 점한 경기까지 판정패한 것에 있는데, 2009년 K-1 WORLD MAX 4강전에서 연장 끝에 쁘아까오가 판정패한 것을 두고 HD NET의 캐스터는 "나의 기록에 의하면(캐스터 자신이 채점한) 난 매우 실망스럽다. 당신은 반드시 실망스러울 것이다. 그는(쁘아까오)는 도둑 맞았다." 는 표현으로 쁘아까오의 판정패를 부정했고 해설자 역시 "난 매우 실망스럽다. 이것은 말도 안 된다."라며 잘못된 판정을 비난 했다.[18] K-1 MAX 심판진의 쁘아까오에 대한 편파판정은 하루이틀 일이 아니다. 대부분이 결승이나 준결승같은 큰 경기에서 였다. 2014년 K-1 WORLD MAX 엔리코 켈 선수와의 결승에서 무승부 판정 후 쁘아까오가 무단 이탈 한 것도 심판진의 부당한 판정 때문이었다.[19]

3. 격투스타일


K-1 MAX 의 룰 변경 이전의 쁘아까오는 전형적인 무에타이 스타일이었다. 주 공격 루트는 킥 그리고 빰클린치를 이용한 니킥이다. 펀치는 주로 레프트 잽으로 견제시 많이 사용한다. 대부분의 킥복서들이 킥 보다 펀치를 많이 사용하는데 쁘아까오는 펀치보다 킥의 비중이 더 높다. 그래서인지 K-1 MAX시절 라운드 후반 체력이 소비된 듯 갑자기 둔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20]펀치의 경우 무에타이 특성상 쁘아까오의 펀치는 단발의 성향이 많다. 짧게 끊는 펀치가 아닌 강하게 휘둘러 치는 펀치이며 거의 원투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고 콤비네이션이나 연속된 펀치는 잘 쓰지 않는다.
킥의 달인이다보니 자유자재로 킥을 사용하는데 빠르고 강력한 로우킥과 미들킥으로 상대의 펀치가 닿을수 없는거리에서 펀치처럼 빠르게 상대를 타격한다. 킥의 속도가 빠르고 양발을 자유 자재로 사용하기 때문에 상대방에서 가드 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한번의 킥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연속된 킥을 쓰는 경우가 많은데 예를 들어서 로우킥과 미들킥이 연속으로 들어간다든지 왼발 미들킥후 스탭을 바꿔서 오른발 미들킥 2연타를 날린다든지 그런 연속된 킥이 빠른 속도로 들어오기 때문에 상당히 방어하기가 어렵다. 킥을 막더라도 가드한 팔에 데미지가 쌓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쁘아까오의 킥은 위협적이다. 또한 상대의 펀치가 닿지 않는 거리에서 상대의 펀치에 카운터로 킥을 날리는데 그 타이밍이 좋기 때문에 상대가 펀치로 밀고 들어 오는것도 쉽지 않다. 또한 쁘아까오의 킥은 스피드와 파워 뿐만 아니라 선이 굉장히 아름답다. 골반을 완전이 비틀어 채찍처럼 후려치는 쁘아까오의 킥은 무에타이 킥의 교과서 라고도 불러도 손색이 없다
상대가 접근하면 빰 클린치로 상대의 공격을 무력화시키고 니킥으로 상대를 제압한다. 쁘아까오의 탄탄한 빰클린치는 단순히 잡고 있는것 뿐만 아니라 상대가 빠져나오려 하면 포지션을 이동하며 이리저리 상대를 휘두르며 상대를 무력화 시키는데 쁘아까오의 빰클린치 기량이 워낙 높다보니 한번 잡히면 빠져나오기가 힘들다.[21] 빰클린치 후 이어지는 니킥은 접근전에서 엄청난 무기이다. 특히 복싱을 앞세우는 킥복서들을 접근전에서 제압하는데 아주 효과적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마사토. 비단 마사토 같은 킥복서 뿐만 아니라 빰클린치와 니킥을 잘 쓰는 무에타이 선수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현격한 기량차에서 오는 것인데 코히루이마키 [22] 와의 경기가 좋은 예시다. 무엇보다 전성기 쁘아까오의 무에타이 기량은 가히 최고의 경지에 오른 수준이었기 때문에 쁘아까오의 경기를 보면 상대의 수를 미리 읽고, 또한 경기 시작후 잠깐의 탐색전으로 상대를 파악한 뒤 상대에게 맞춤형 공격을 한다는 것이다.[23] 이렇듯 무에타이의 엘리트 전사인 쁘아까오의 기량을 기존의 K-1 MAX 룰 로서는 감당할 수 없었기에 K-1 MAX 에서는 딥 공격을 1회로 제한, 빰클린치 금지 , 니킥 1회 제한 [24] 이라는 룰 변경을 하여 쁘아까오의 공격력을 제한했다.
K-1 MAX 룰개정 이후의 공격 패턴은 레프트 잽과 딥(프론트 킥)을 이용한 견제, 무에타이 스탠스 상 경쾌한 스탭이 아닌 성큼성큼 상대를 향해 걸어가며 레프트 쨉과 딥을 활용해 간격을 조절하며 적절히 사용하다가 적정한 타이밍에 로우킥, 미들킥을 주로 날린다. 쁘아까오의 딥 활용도는 다른 K-1 MAX 파이터들과 비교했을때 월등히 높은 편이며 쁘아까오에게 딥 공격은 상대와의 거리를 재고 공격을 리드하는 역할을 하는데 마치 복서의 잽과 같다고 보면 이해가 빠를 것이다. 미들킥의 경우 니킥과 더불어 쁘아까오의 주무기이며 오른발보다 왼발 스위치킥의 사용 빈도가 높다. 쁘아까오의 왼발 스위치 속도가 워낙 빠르고 [25] 오른발 킥보다 가볍고 가깝게 상대를 타격할 수 있기 때문에 아주 효율적일 것으로 생각된다. 오른발 킥은 주로 로우킥과 미들킥이며 하이킥또한 적정한 타이밍에 사용한다. 룰 개정 이전에는 연속 미들킥과 양발 스위치 킥 등 화려한 킥들을 자주 사용했는데 룰 개정 후로는 자주 보기가 힘들어졌다.[26] 아무래도 룰 개정 이후로 공격력이 제한되다 보니 상대 선수에게 그러한 고난도의 기술을 시전할 찬스가 많이 줄어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접근했을 시 빰클린치를 이용하여 상대를 휘두르며 니킥을 날렸지만 룰 개정으로 인해 사용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니킥은 접근전에서 쁘아까오의 강력한 무기다. 니킥은 보통 원투 펀치와 연결하거나 상대에게 접근시 사용하고 주로 클린치와 동시에 사용한다. 니킥 후 대부분 클린치로 이어지는데 접근전에서 복싱대결은 쁘아까오에게 불리하기 때문에 니킥 후 클린치로 공방을 끊어버리거나 스윕을 활용해 상대를 넘어뜨리는 경우가 많다.
룰 개정 이후 빰클린치를 활용한 다양한 패턴의 공격을 사용할 수 없게 되었고 쁘아까오의 공격패턴은 위에 서술한 대로 딥과 레프트 쨉 후 왼발 스위치킥이 기본 패턴이 되어 굉장히 공격이 단순화 되어버렸다. 니킥의 경우 단발로 사용할수밖에 없고 클린치를 할 수는 있지만 목덜미를 잡으면 안되고 붙잡는 순간 바로 break 선언이 되기 때문에 복싱이 주무기가 아닌 쁘아까오는 접근전에서 상당한 핸디캡이 있다. 그래서 접근전 상황에서 상대의 공격을 끊기위해 클린치를 한 다음 스윕(쓰러뜨리기) 기술을 많이 사용한다. 상대의 킥을 캐치한 다음 사용하기도 하는데 [27] 얼핏보면 상대를 계속 넘어뜨리는 것이 안좋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것 역시 전략이며 이 기술 또한 상당한 고급 기술이며,[28]이 기술을 경기에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K-1 파이터는 쁘아까오와 페트로시안 뿐이었다. 룰 개정 이후 복서에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는데 2004년 복서에 가까운 킥복서인 마사토를 유린하며 승리했던 쁘아까오가 룰 개정 후 마사토의 숏컷에 판정패하고 IBF 복싱 챔프 출신의 버질 칼라코다에게 고전하는 등 짧고 빠른 펀치의 복서스타일에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현재는 K-1 MAX 스타일이 굳어진 듯하다. 무에타이룰의 경기에서도 K-1 MAX 스타일로 경기를 풀어나가고 있다. K-MAX 룰 개정으로 인해 쁘아까오의 오리지날 무이타이를 볼 수 없게 된 것은 그의 많은 팬들에게 슬픈 일일지도 모른다.[29]

4. 마사토


쁘아까오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한 사람이 있으니 다름아닌 마사토이다. 2004년 K-1 WORLD MAX 결승전, 쁘아까오와 마사토의 경기는 쁘아까오가 K-1 MAX 의 전설이 된 시발점이며 지금도 회자되는 명경기다. 15세 부터 복싱을 시작한 마사토는 프로 복싱 라이선스 취득에 실패하며 킥복서로 전향한다. 1999년 전일본 킥복싱 연맹 대회에서 우승했고 ISKA 챔피언을 지낸 마사토는 2002년 K-1 MAX 출범과 함께 출중한 실력과 외모를 겸비한 파이터로서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며 맥스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 했다. 2002년 초대 K-1 WORLD MAX 에서는 4강전에서 알버트 크라우스에게 다운을 내주고 판정패 당했으나 2003년 K-1 WORLD MAX 결승전에서 알버트 크라우스와 다시 맞붙게 되었고 3라운드 레프트 카운터로 알버트 크라우스를 KO 시키며 리벤지와 동시에 2003 K-1 WORLD MAX 세계왕자의 자리에 오른다.
일본인 최초로 K-1 단체의 세계 챔피언이 된 마사토는 2004 K-1 WORLD MAX 를 앞두고 2004년 6월 12일 기자회견에서 돌연 은퇴선언을 한다. 이유는 더이상 자신의 상대가 없다는 것이었다.[30] 그렇게 2004년 대회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하겠다고 밝힌 다소 오만한 마사토의 계획은 태국에서 온 하얀 연꽃이라는 이름의 한 낙무아이에 의해 좌절된다. 사실 마사토의 기량은 탈아시안급으로 세계무대에서 서양 선수들을 누르고 정상을 차지할 수 있는 일본 격투계의 유일한 대안이자 인물로 평가받고 있었고 실제로 세계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자존심이 강하고 자부심이 강한 마사토는 자신을 이긴 상대에게 반드시 리벤지를 하고마는 근성또한 지니고 있다. 2004년 K-1 WORLD MAX 결승전에서 쁘아까오와 글러브터치를 할 때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자신감을 드러내던 마사토. 하지만 쁘아까오에게 처절하리만큼 철저하게 당했고 오죽하면 경기를 중계하는 아나운서와 K-1 프로듀서가 마사토가 이런적은 처음본다고 말 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1 MAX 심판진은 마사토에게 기회를 주기위해 말도안되는 연장전을 선언했고 연장전에서도 마사토는 쁘아까오에게 구타를 당하며 자존심에 먹칠을 하게된다. 어쩌면 심판진의 연장전 선언의 가장 큰 피해자는 마사토 일지도 모른다. 이 판정 때문에 마사토는 욕을 엄청나게 먹었다.[31] 자존심 강한 마사토 역시 그런 결정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객관적으로 쁘아까오의 압승이지만 마사토 역시 높이 평가 받아야 할 것이 그렇게 수세에 몰리면서도 한치의 흐트러짐 없이 자신의 플레이를 했다는 것이다. 보통 그 정도로 당하면 정신적으로 흐트러질 만도 한데 마사토는 시합 종료 순간까지 자신의 플레이를 보여줬다. 그 증거로 경기 종료 후 마사토는 두 팔을 번쩍 들어 승리의 포즈를 취했다. 이 경기 후 쁘아까오는 전설이 되었고 마사토는 은퇴를 접고 리벤지를 위해 쁘아까오의 트레이너를 고용하면서까지 리벤지 결의를 불태우게 된다.

3년후 마사토는 2007년 K-1 WORLD MAX 첫 상대로 쁘아까오를 지명한다. 쁘아까오를 이기기 위해 모든 것을 걸었다. 이 경기는 쁘아까오와 마사토 두 선수 모두가 절대 질 수 없는 경기였다. 쁘아까오는 자신이 가지고 놀았던 상대에게 진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며 자존심도 허락치 않았을 것이고 마사토 역시 지난 패배의 설욕과 자존심을 되찾기 위한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경기였던 것이다. 마사토는 1라운드 한차례 쁘아까오를 다운시키고 심판전원 만장일치로 판정승 한다. 이 경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마사토가 쁘아까오를 압도했다고 말하는데 그렇지만은 않다. 2 라운드는 쁘아까오의 라운드였고 1라운드 역시 경기 초반 쁘아까오의 강력한 로우킥에 마사토의 다리가 여러번 뒤틀렸다. 룰 개정으로 인해 쁘아까오 역시 1차전 보다 어려운 경기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딥과 빰클린치를 활용한 1차전과는 달리 쁘아까오는 로우킥으로 마사토의 다리를 겨냥한 전략으로 게임을 풀어나갔다. 접근전에서 몇번 마사토에게 숏컷을 허용했지만 쁘아까오의 로우킥과 펀치 한방 한방에 마사토는 휘청거렸다.[32]
1라운드는 전반적으로 쁘아까오에게 나쁘지 않은 흐름이었다. 그러나 쁘아까오가 1라운드 종료를 얼마 안남기고 다운을 당했고[33] 그때부터 게임의 흐름이 바뀌었다. 그러나 마사토의 일방적인 우세는 아니었다. 오히려 2 라운드에서는 로우킥을 앞세운 쁘아까오의 강력한 공격과 노련한 경기운영으로 마사토를 공략했고 마사토를 앞서나갔다. 그런데 2라운드 로우킥으로 앞서가던 쁘아까오가 3라운드에서 복싱으로 마사토와 대결을 하기 시작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판정으로 가면 질 것이라는 압박감이나 어떤 자존심 때문에 그런게 아닌가 싶다. 그 결과 쁘아까오는 마사토에게 많은 펀치를 허용했고 실점을 하게 되었으니 완벽한 실패 전략이었다. 3라운드 역시 로우킥을 활용한 전략이었다면 더 좋은 결과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쁘아까오와 8강전 이후 마사토는 앤디사워와 결승전에서 로우킥 데미지로 인해 경기를 포기했으니 말이다. 결국 심판 전원 만장일치로 마사토는 승리하며 리벤지에 성공한다.[34]
2007년 2차전 이후로는 두 선수가 경기에서 만난적은 없다. 2차전 이후로 황제라 불리던 쁘아까오는 하향세에 접어들고 마사토는 2008년 K-1 WORLD MAX 챔피언에 오르며 은퇴하게 된다. 쁘아까오에게 마사토는 자신의 존재감을 세계에 알리게 된 계기였으며 마사토에게 쁘아까오는 반드시 넘어야 할 산이었다. 두 선수 모두 K-1 MAX 의 레전드이며 지금도 많은 팬들이 그들을 기억하고 있다.[35]

5. K-1 max 이후


2010년 이후로는 태국내에서 활동중이며 YOKKAO EXTREME(K-1룰) 및 THAI FIGHT(무에타이룰)에서 출전. 오랜만의 무에타이 시합이라 우려가 되는 가운데 자국내 무에타이룰 시합에서 팔꿈치 봉인해제 이후 마치 물 만난 물고기 처럼 상대 선수를 압도하며 무시무시한 KO를 양산해내고 있다. 2013년 후반부터 되살아난 K-1 MAX에도 참가하여 2014년 2월 준결승에서 대한민국의 이성현에게 판정으로 승리하고 동년 10월 결승에서 엔리코 켈과 붙었으나 연장전을 앞두고 이탈해 논란을 일으켰다. 이 경기 이후에는 다시 K-1 MAX 를 떠나 중국, 태국 등지의 다른 단체에서 활약중이다. 잠시 주짓수,유도,레슬링 클라스에 참여한 적이 있는데 2012년 당시 포푸라묵 짐과 계약 문제로 인해 경기에 뛸 수가 없었기 때문에 포푸라묵 짐의 계약조건에 없는 MMA 경기에 진출하기 위한 트레이닝 이었다
사실 쁘아까오가 입식격투계의 경량급 최강자라는 것은 알만한 사람은 다 알고있는 사실이다. K-1 MAX의 룰 개정으로 인해 살짝 빛이 바래긴 했지만 쁘아까오의 실력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미국이나 유럽의 스포츠 채널 다수의 진행자들조차도 쁘아까오를 소개할때 'legend' 'master' 'the great fighter' 라는 어휘를 아낌없이 사용하고 있다. 간혹 남삭노이나 쌈코에 비해 쁘아까오는 한 수 아래 라든지 태국 본토에서는 일류선수가 아니라는 등의 말들을 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이것은 사실과는 다르다.[36] 쁘아까오가 룸피니 챔피언 경력이 없다는것도 이런 주장에서 한 몫을 더 하는데 2002년 초대 K-1 WORLD MAX 대회에서 [37] 무려 3번의 룸피니 스타디움 챔피언에 오른 태국의 가오란 선수가 [38]결승전에서 알버트 크라우스에게 무기력한 경기끝에 실신 KO패를 당한것을 보면 쁘아까오의 실력과 K-1 MAX 에서의 업적을 평가절하할 수 없을 것이다.[39] 태국 본토에서는 룸피니 스타디움 2위의 경력이 있고 엄노이 스타디움 2회 챔피언, 도요타 무에타이 마라톤 위너, 그 외에도 다수의 무에타이 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는 쁘아까오는 태국내에서도 무에타이의 강호다.
쁘아까오는 챔피언이 된 이후에도 동료들과 고향의 강가에서 수영을 하고 흙밭에서 밥을 먹는 등 변함없이 소박한 삶을 살고 있다. 링에서는 매서운 무에타이의 전사지만 링 밖에서 그는 장난기 많은 순박한 태국 청년이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챔피언이 되었다고 해서 자신의 삶이 달라지는 것은 없다며 사치스런 생활을 할 생각은 전혀 없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실력 뿐 아니라 인격적인 면에서도 쁘아까오는 최강의 무에타이 전사라는 타이틀을 가질 자격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세월에는 장사 없듯이 30대 중반으로 접어든 쁘아까오는 예전 전성기 시절의 기량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2015년 7월 Khayal Dzhaniev 와의 경기에서 쁘아까오는 상대의 엘보우 공격에 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판정패 당해 많은 그의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 경기후 쁘아까오는 자신에게 승리한 Khayal Dzhaniev 를 포옹하며 진심으로 승리를 축하하는 모습을 보여 다시 한 번 그의 인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여담이지만 후원해주는 회사(TOP KING과 SINGHA,THAI AIR 등)의 제품을 굉장히 애용한다.

6. 근황


2017년 10월 라마 9세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 한때 출가하는 선원(禪院)에서 생활하던 모습이 공개됐다.
2020년 현재는 치앙마이에 쁘아까오 빌리지라는 대규모 무에타이 캠프를 세워 후학 양성에 힘쓰고 있다. 2020년 태국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때 라마 9세의 사진을 올리며 경의를 표하는 글을 페이스북에 올렸는데, 팬들은 이 행동이 라마 10세를 돌려 까는 것으로 보고 있다.
[1] 태국 내에선 남성 평균 키가 165cm인 걸 생각하면 의외로 장신이다.[2] Buakaw 이름의 의미는 하얀 연꽃 [3] 최초의 파이트네임은 ‘ Damtamin Kiat-anan‘ 이다.[4] 매 경기당 수입을 말한다. 물론 경기가 잦아 명목상 소득은 비등하지만 결국에는 생각보다 더 돈을 못 버는 편이다. 그럼에도 태국인들은 태국 내 무에타이 무대를 최고로 보기 때문에 국내용>세계용이라는 상관관계가 존재하므로 해외로 진출하는 사례가 적다.[5] 킥에 비해 약하다는 것이지 쁘아까오의 복싱스킬이 약한 것은 아니다.[6] 결승전 경기에서 마사토의 유일한 히트[7] 시시도 히로키, 김준[8] 실제로 K-1 max 의 프로듀서는 쁘아까오의 상대를 찾기가 힘들다는 푸념을 털어놨다[9] 두번째 심판진이 무승부를 선언했을때 어처구니없이 놀라는 쁘아까오의 표정이 카메라에 잡혔다[10] 두 선수 모두 실신 TKO 패를 당했다[11] 사실 쁘아까오의 2004년 K-1 WORLD MAX 우승을 예상한 전문가들은 거의 없었다 가장 큰 이유는 체급이었다 58kg 급에서 활동했던 쁘아까오가 70kg급 선수들과의 경기를 하는것은 역부족이고,대부분 같은 무에타이 파이터인 존 웨인파 와 8강전에서 패할것이라고 예상했다 또한 쁘아까오를 픽업한 K-1 스카우터 역시 쁘아까오를 챔피언감으로 데려온것이 아니었다 이벤트의 구색을 맞추기위해 본토 낙무아이가 필요했던 것이지 그들도 쁘아까오가 이정도까지 강력할 줄은 몰랐던것이다[12] 이건 최홍만과 세미 슐트의 탓도있긴 있다. 이 둘이 무릎을 올리기만 해도 다른 선수 하이킥 포지션에 와 버리는 바람에 KO율이 급등해서 너무 유리해진 때문...[13] 일본산 킥복싱 (마사토) 을 위한 처사였다. 만일 룰 개정이 없었더라면 쁘아까오는 K-1 MAX 세계왕자 자리를 장기 집권 했을 것이다[14] 사실 이 경기도 논란이 많은 경기다. 해외 유투브 댓글의 대부분은 쁘아까오의 승리라는 의견이 대부분이다[15] 룰 개정 이후 이전보다 두 세배로 복싱 트레이닝을 했고 자신에게 단지 킥과 니킥만 있는것이 아니라는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고 한다. 펀치가 강해지는것을 원했고 트레이닝의 포커스를 복싱에 맞췄다고 한다. 본인 스스로 이전에는 펀치를 적게 사용하고 킥을 많이 사용했다고 말했으며 트레이닝을 통해 그것을 변화시켰으며 그로인해 최고의 컨디션으로 2006 K-1 WORLD MAX 를 우승 할 수 있었다고 K-1 MAX 인터뷰에서 밝혔다[16] 그 이후 KO 패를 당한적은 없다. 쁘아까오 인간 자체가 워낙 강하기때문에 다운을 당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K-1 MAX 에서 쁘아까오에게서 다운을 빼앗은 선수는 마사토, 알버트 크라우스, 안드레디다, 사토 요시히로 4명 뿐이고 6년의 K-1 MAX 활동기간 동안 그 4번의 다운이 전부다. 그마저도 마사토의 경우는 슬립성이 농후한 다운이었다.[17] 차 포 떼고 한다는 말이 결코 과장된 얘기가 아니다.[18] 연장전이 선언됐을 때 아예 연장까지 갈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물론 쁘아까오의 승리라는 말이다.[19] 무에타이가 자신들의 무대 정상에 서는 것을 견제하는 일본 킥복싱계의 술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참고로 앤디 사워의 슛복싱도 일본산이다.[20] 펀치보다는 킥의 에너지 소비가 더 크다. 그런데 한가지 주목할만한 점은 룰 개정 이전에는 쁘아까오의 스테미너가 딸리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룰개정 이전의 마사토와 1차전에서는 연장라운드에서도 날라다녔는데 룰개정이후에 스테미너가 저하되는 모습들을 종종 볼 수 있었다. 빰클린치가 금지되면서 오히려 킥의 비중이 더 늘어났거나 빰클린치를 활용한 경기 템포의 완급 조절이 힘들어진 탓일수도 있다[21] 2004년 K-1 WORLD MAX 16 강전 조단 타이 와의 경기를 보면 쁘아까오의 예술적인 빰클린치를 볼 수 있다[22] 쁘아까오에게 반칙성 로우킥 플레이를 했다가 쁘아까오의 무한니킥에 골로 갈 뻔한 일본 무에타이 선수[23] 상대의 격투 스타일에 따라 공격패턴이 확연히 차이가 난다. 단, 룰 개정 이후에는 쁘아까오의 공격패턴 자체가 단조로워 졌기 때문에 그 차이가 룰 개정 이전보다는 덜하다. 2004년 K-1 WORLD MAX 16강전 부터 결승전까지의 게임들을 하나씩 비교해 본다면 상대에 따라 달라지는 쁘아까오의 공격패턴을 확인할 수 있을것이다[24] 연속 니킥 금지 및 목덜미를 잡고 타격하는 빰클린치 니킥은 반칙[25] 느린 동작으로 재생해도 동작이 캐치가 안 될 정도다. 그만큼 준비동작이 빠르기 때문에 쁘아까오의 왼발 스위치킥은 상대가 예측하기 힘들고, 사용빈도가 높은만큼 상대의 가드하는 오른팔에 데미지를 실어준다.[26] 2005년 알버트 크라우스와의 첫 대결에서는 무려 7연속 미들킥을 시전했다.[27] 킥 캐치 후 펀치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다. 이 기술에 여러 선수들이 당했다. 2006년 K-1 WORLD MAX 8강전에서 사토 요시히로는 이 기술에 TKO 당해 완전 뻗어버렸다.[28] 스윕 기술에 휘둘려 넘어진 상대 선수는 체력이 소진된다. 또한 계속해서 스윕 기술에 무기력하게 당한다면 평정심을 잃을 수도 있다. 2004년 K-1 WORLD MAX 4강전에서 코히루이마키의 반칙성 로우킥 플레이에 대노한 쁘아까오가 우선 연속된 스윕으로 코히루이마키를 내동댕이 치며 정신을 쏙 빼놓고 그 다음 니킥으로 요리하는 모습을 쁘아까오의 팬이라면 기억 할 것이다. 그만큼 스윕기술은 능숙하고 적절하게 사용한다면 아주 유용한 무기가 될 수 있다. HD NET 아나운서는 쁘아까오의 스윕이 나올 때마다 beautiful 을 외쳤다.[29] 이것이 "세상의 모든 무술"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던 K-1 운영진이 비판받는 부분이다.[30] 정확한 워딩은 ‘No one is on my level’ 나의 레벨은 아무도 없다.[31] 비단 쁘아까오 1차전 뿐만 아니라 K-1 MAX 주최측의 마사토 밀어주기는 정말 노골적이었다. 사토 요시히로와 키센코는 마사토를 다운 시키고도 판정패했다. 더군다나 사토는 같은 일본인임에도 말이다.[32] 2004년 1차전 당시 쁘아까오의 체중은 60kg 대 초반이었다. 그러나 2007년 2차전에서는 69.0kg 이다. 그래서 1차전과 달리 2차전에선 쁘아까오의 펀치 한 방에 마사토는 휘청 거리고 로우킥 한방에 상체까지 돌아갈 정도였다. 만일 1차전에서 쁘아까오의 체중이 69.0kg 이었다면 마사토은 아마 연장까지 버티지 못했을것이다.[33] 타이밍이 너무 안 좋았다. 왼발 로우킥을 날리며 한 발이 떠있는 상태에서 스트레이트가 들어왔다. 무게 중심이 흐트러지며 뒤로 밀리듯 엉덩방아를 찧었는데 쁘아까오 입장에선 불운이다.[34] 심판 전원 10 대 7 의 점수를 줬다. 절대 그 정도의 점수차는 아니다. 1차전에서는 원사이드 게임에 연장 선언을 하더니 팔이 안으로 굽다 못해 부러질 지경.[35] 2019년 10월 17일, 태국의 쁘아까오 동상 아래서 마사토가 반차맥 짐의 유니폼을 입고 쁘아까오와 함께 한 사진이 쁘아까오의 인스타그램에 올려졌다. 생각도 못했던 두 레전드의 훈훈한 모습에 많은 팬들의 응원의 댓글을 올렸다.[36] K-1 MAX 진출 전 까지는 남삭노이나 쌈코에 비해 네임벨류가 떨어진 것은 사실이다[37] 빰클린치 연속 니킥과 딥이 허용되는 룰 개정 이전의 경기였다[38] Kaolan Kaovichit (born May 12, 1978 . Songkhla Province, Thailand) : 2000 Lumpinee Stadium super bantamweight champion -55.5 kg , Lumpinee Stadium lightweight champion -61 kg, 2003 Lumpinee Stadium welterweight champion -66.8 kg [39] 2003년 K-1 WORLD MAX 에서는 또 다른 룸피니 챔피언, 태국의 sakeddaw kiatputon 선수가 마사토의 어퍼컷에 실신 KO패를 당했다. 이런 낙무아이의 무덤과 같은 곳에서 마사토를 가지고 놀며 챔프에 올랐으니 쁘아까오의 전성기 기량은 말 할 필요도 없는것이다